: 독일 미술논쟁과 구동독 지역 페기다(PEGIDA) 현상을 중심으로
Ⅰ. 분단된 독일의 순수 예술
1. 독일과 한국: 역사적 비교
미국과 북측의 공산 정권 세력과의 전쟁 후 일어난 베트남의 통일(이 경우 후자가 지배권을 가진 경우이다), 그리고 40여년 만에 통일을 경험한 독일 (이스 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경우 이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분단된 한국은 모두 양극화된 냉전 시대의 시대착오적 관념에서 부터 벌어진 사건들이다. 이번에 분 단 독일의 예술에 대한 발표에 초청받아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예술’(특히 이 경우 순수 예술에 국한된다)이야말로, 1990년 이후 사회주의 상태에서 “새로운 연 방 상태”(이전 독일 민주공화국 지역을 의미한다) 로 이행하는 사회 전체의 흐름 을 이해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초로서 작용한다는 점이다. 비록 분단의 결과는 매우 상이하기는 하지만, 한국의 상황에 이를 반영했을 때 또 다른 자극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내가 이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번 기회를 통해 스스로 한국의 현재 상황과 한국 미술의 발전 그리고 그 속에 서 그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들에 대해 더 배우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2. 타당한 예술
분단된 독일이라는 환경과 냉전 시대, 말하자면 두개의 서로 다른 사회 구 조간 대립이라는 전지구적 흐름 속에서, 독일에서는 두개의 극명히 대립되는 “타 당한예술”이 등장하였다. 바로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세계언어로서의 추상”(베르 너 하프트만)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두 예술 모두 비록 나치의 반모더니즘선언과 양식적인 의미에서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사회주의를 “대중적”으로 그리 하여 결국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서도록 하는” 미학적 체계와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나치의 문화정책에 대항하여 직접적으로 정치적이고 관념적인 입 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냉전시대에 전면에 드러난 두 지역에서, 각기 편향되어 극
단적으로 다른 성격을 지닌 두 예술의 개념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서독의 “카셀 도큐멘타”와 동독의 드레스덴에서 열렸던 “제3독일예술전(the Third German Art Exhibition)”은 각각 당시 서로 다른 두 개의 체제를 극명히 드러내는 대표적인 예술들을 전시하였다. 양쪽 모두의 경우 예술의 양식적 원칙은 그 타당성 속에서 세워졌으며, 그 “혁신성”에 의해 그리고 “서로 대립관계에 놓인”예술의 이해를 거 부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개념들을 비판하면서 스스로를 정당화하였다. 동과 서 양측 모두 지나치게 과장된 강조적 어법으로 자신들만의 고유한 개념을 주장 하고자 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독일 민주공화국의 예술”은 부분적으로 주와 독일통일 사회당(SED)의 문화 정책, 말하자면 일상의 공공 공간에서의 전시나 언론을 통한 캠페인 그리고 집단 방문 (노동자들 역시)에 의해 통제되기도 했으며, 교과서나 교재와 같이 우리 일상 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릴 수 있는 다양한 매체들에 이용 하여 그들이 꿈꾸고 알리고자 하는 세계의 이미지들을 그려내었다. 또한 이것은
‘봉건제도적문화’의 아카데미즘과 혼합되어 학벌이나 세금 번호와 같은 것으로 지 위가 평가되는 작가가 아닌 “독학” 작가들을 증가시키는 현상을 낳았다.
비록 젊은 독일연방공화국이 비평가, 큐레이터, 갤러리스트들을 통해 현대
“서양미술”을 보호하는 데에 영향력을 행사해오기는 했지만, 뚜렷한 “독일연방공 화국(FRG)만의예술”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국가적인 차원에서 어떤 뚜 렷한 기준을 세우거나 혹은 주도적으로 예술을 조정, 유도, 격려하는 역할을 하거 나 혹은 위협적인 방식으로 예술을 이끌어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서구 문화를 지지하는’, 실제로 그러한 정치적 군사적 입장을 보여주기도 했던 (종종 반하기도 했지만) 콘라드 아덴나워 정부조차 대중을 열광시킬 수 있는 “휴 머니즘적” 희망을 보여주는 통합된 정치 개념을 정립하지 않았다..
반면에 독일민주공화국의 순수 예술은 더 나은 세계를 바라보는 뚜렷한 목 표점을 향하고 있었으며, 나아가 때로는 예술이 그 세계를 창조하는 주요한 역할 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또한 소비에트의 문화행정에서 확인한 예술의 대중을 향한 “계몽”의 효과에 기반하여 탄생한 이들의 예술 양식은 사실
적으로 무언가를 묘사하는 자연주의적 사실주의와는 전혀 다른, “교육”적 차원에 서의 “목적론적” 사실주의를 지향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예술의 목적은 사회주의 하의 삶이 어떠해야하며 어떠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인식의 중요성 그리고 예술의 역사적 정당화는 예술가 개인을 더 욱 부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왜냐하면 예술을 통해 예술가의 자기 확신과 그 의지를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활동이 통제되거나, 경우에 따라 배 제되거나 위협이 가해질 때도, 심지어는 예술의 자율성에 반하거나 일부 파괴될 때도 혹은 동독비밀경찰이나 국가보안이 관여하여 통제 불가능한 두려움을 느낄 때도, 작가만의 고유한 임무, 말하자면 작가라는 직업이 지니고 있는 특수한 ‘소명 의식’의 중요성은 어김없이 표현되었다.
또한 ‘국가사회주의(나치즘)’와는 차별화되는 소비에트 점령 지역의 초기 문 화정치를 드러내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모든 행위자들은 그 체제 하 에서 고통 받았으며, 망명 상태이거나(그래서 부분적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모스 크바의 이념적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감옥 혹은 강제 수용소에 끌려갔거나, 결 국 반파시스트주의자가 되었다. 후에 이것이 사회주의 국가 하에서 스스로의 정 치적 이념을 정의하는데 일종의 강박으로 작용했음에도 말이다. 이러한 이유로, 히틀러에 의하여 탄압받은 작가와 과학자들은 모두 1945년 이후 주장된 “더 나은 독일”과 문화적 개방과 자유가 약속되어 있는 독일의 공산주의 휘하의 지역에 터 를 잡게 되었다. 양측 모두의 높아져만 가는 희망은 독일민주공화국의 역사에 걸 쳐 권력과 작가들 간의 양가적인 관계를 만들어 냈다. 공공연한 억압과 독재에 의한 규정들은(예를 들어 교조적인 “형식적 논쟁”) 빠른 속도로 불평등한 협상체 계에 의해 대체되었다. 위협과 제한이라는 거대한 배경에의 저항은 동의된 강요 로서 그들을 종속시켰다.
이것은 비록 1980년대에 일어났던 여러 움직임들을 가능케 했던 공간을 만 들어내는데 기여했다 하더라도 결코 “자유화”는 아니었다. 양쪽 모두, 막연한 공 포는 더욱 커져만 갔다. 독일민주공화국 시민들 사이에서 보다 엄격한 통제와 예 측 불가능한 막대한 결과들, 그리고 권력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사회 전체를
병적인 감시 상태로 만들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1970년대 이후 독일민주공화 국을 ‘허락된 독재’ 상태로 표현한다.
또한 이것이 왜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가 약속한 “방대함과 다양성
“(1976년 비평적 싱어송라이터인 볼프 비어만의 동독추방사건으로 이는 노골적으 로 깨져버렸다)이 자유의 상실과 그에 따르는 “틈새사회“로의 철회를 돕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정당 조직들이 내놓은 개선안들도 이 붕괴를 멈출 수는 없었으며, 그들은 이미 스스로 내부분열을 위한 전제조건이 되어 오히 려 역사의 상황에 호의적인 자세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마침내 시민들의 용기 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었다. 혁명의 물결은 가장 먼저 작은 도시인 플라우엔에서 부터 촉발되어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로 이어졌는데 이것은 훗날 적군파(구서독) 의 도움 없이도 진압이 가능했던 “평화혁명(Friedliche Revolution)”의 상징으로 여전히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