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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미술논쟁과 구동독 지역 페기다(PEGIDA) 현상을 중심으로

Ⅲ. 독일 통일 과정의 대리 담론으로서의 “이미지 논쟁”

계속되는 이미지 논쟁은 당시 미술계와 미술매체의 관심을 끌었을 뿐만 아 니라 많은 수의 “교육받은 독일민주공화국 시민들”을 관여하게 하고 모욕을 주었 는데, 그 논점은 우월함의 태도와 열등감의 두려움 사이에서 발생하는 충돌의 문 제였다. 게다가, ‘독일민주공화국 예술연방’의 모든 예술 생산품에 대한 예술적 의 미에 대한 거부는 1990년 이후 통일의 과정에서 포착되는 많은 이야기들과 구분

되는 지점들을 반영한다 : 짧은 기간 내에 일어난 급진적인 방향 전환에서 야기 된 여러 가지 문제들은 독일민주공화국의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볼프 비어만 이 표현했듯이) 경험의 종료에 기여한 혹은 최소한 그것을 소망하였던 사람들에 게도 문제를 발생시켰다. 나는 대부분의 동독인들이 개혁을 원했다고 확신하며

― 비록 급진적인 방향이라 할지라도 ― 이러한 의미의 지평이 그들의 생활양식 으로까지 확산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독일에서 소수의 동독인들 역시 통일 에 대한 믿음을 가졌던 것 또한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그들인 삶의 전반에 침 투해있는 제도적 안보들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유 에서 오는 이익과 소비체계와 그리고 “서쪽”에서 성립된 체계에 참여할 기회들을 사회주의에 의해 보장된 안전들과 결합하기를 원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 기 때문이었다.

양쪽 모두에게,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인 것처럼 느꼈던 것도 잠 시, 과도기는 예상했던 것보다 상당히 복잡한 것으로 드러났다. 소통의 충격에서 부터 야기된 결과들은 다음과 같은 진부한 관념들을 낳았다: “서독인들은 허세가 많으며, 보여 지는 것에만 치중하고, 건방지며 물질주의적이다. 이와 달리 동독인 들은 게으르고 의존적이며 고마워할 줄을 모르고 너무나 느리다” 서독인들은 그 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동독인들은 계속해서 불만을 쏟아내는 의미 를 일컫는 “베서-베시(Besser-wessi․거만한서독인)”나 “야머오시(Jammer-ossie․

죽을 지경이라고 불평만 하는 동독인)”와 같은 잘 알려진 단어들은 이때 시작되어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한다. 1992년 가을 이미, 서독인들은 “오만하 고, 건방지며 그리고 사치스러운”동시에“피상적이고, 잘난 척 하고 허울 좋은” 그 리고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이고 자기도취적인 동시에 냉혹한” 성격으로 보여 졌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많은 동독인들이 그들 스스로를 “순진하고 속이기 쉬우며 악의 없는”, “수줍고 미숙한”, 혹은 “무능하고 미개한” 그리고 종종 “완고 하고 쓸모없으며 불안정한” 사람으로서, 즉“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는” 사람들로 느 끼면서 이러한 ‘비교조사’를 통해 확정되었다.

그들 스스로를 해방시킨 동독인들의 이러한 열등의식에 대하여 이해하고자

한다면, 50여 년간 독재 체제에 의해 형성되어온 그들의 정신성에 대하여 언급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결정적인 지점은, 고도로 산업화된 국가의 탈산업화로 인해 이후 3-5년 간 뒤따른 체계의 내분 (모든 고용이 정치적으로 확정된 사회주의 연 방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의 실업으로 이어지는 전환점)에 있다. 이것은 구(舊) 연 방 공화국의 중심 체제의 전환과도 연결되어 매우 짧은 시간 안에 발생하게 되었 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합법적인 체계와, 행정 절차, 계획과정, 경제 체계 그 리고 구연방공화국의 다양한 계층의 기능인, 관리인들의 수용은 기능 집단과 엘 리트 교체에 지대한 영향을 가져왔다.

1990년 이후 동-서 독일에 대한 인식의 변환 과정은 역사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매우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통일 이후 일부 특정 개인 혹 은 집단은 승리자의 기분을 느꼈고, 이를 “승리자의 정의”로서 이야기하기도 했 다. 하지만 동독에서의 상황은 1945년 이후 군정부의 승리 후에 벌어졌던 그것과 는 매우 상이했다. 모든 통제 권력을 차치하고서라도, 사회적인 위치들(기업, 신 문, 문화기관 혹은 대학, 행정기관, 학교)은 승리한 군대와 민간의 힘에 의해 영향 을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혹자는 독일민주공화국의 첫 번째 자유 시민 의회 선거 이후 기본 법 제 23조에 의해 “독일 연방 공화국 기본법의 관할로 편입“ 됨이 결정되었을 때 “중첩”이라 ―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이자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활동 중인 루드비히 굼플로비치(Ludwig Gumplowicz)의 개념을 빌리자면 ― 이라 명명할 수 있는 과정이 발생했다고 이야기한다. 다른 탈-사회주의 국가가 분단되었던 적 이 없었기 때문에, 이와 상응하는 유사한 역사, 유사한 언어를 찾기 어려웠다. 독 일만이 유일한 경우였다. 사회주의 정권의 통합당이었던 SED가 붕괴한 후 서독 사회는 매끄러운 방식으로 사람들과 지식, 규범, 세계관을 “서쪽”으로부터 유입시 키기 시작하였다. 동-서 독일간의 물적, 인적 자원의 교환은 단지 경제적 의미나 빠른 성장, 혹은 사회 기반 시설의 확충과 같은 면에서 뿐만 아니라 상당한 가치 가 있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이전 사회주의 연합과의 ‘자매’ 국가로서의 위치보다 변화는 더욱 쉽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열등감과 수치심을 동반하였다.

누군가 이 갈등의 상황을 어떤 방식으로 판단하던 간에, 일련의 명백한 과 정들은 폐허나 다름없는 도시와 시민 사회를 재건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 지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이미지논쟁은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주 요한 기능을 행했다. 돌이켜보건대, 논쟁에서 서로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동독인’

과 ‘서독인’의 상호 고정관념에 의해 인식한 반대 성격의 것들에도 불구하고, 내적 인 동-서 독일의 차이와 40여년 간 지속된 모순된 긴장들이 예술을 바라보는 관 점만큼 복합적이고 감정적으로 논의된 영역도 없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술은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모든 경험과 변화에도 불구하고, 오직 예술만이 또 다른 희망과 전망을, 그리고 삶의 조건들 안에서 자율성과 개선점들을 논증적으 로 소환할 수 있으며, 이는 한편으로는 좌절과 굴욕 위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대 안적인 방법 위에 전개되었다. 이미지 전쟁에 있어 모든 주제들이 노골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그러나 이것은 실용적 의의에 대한 분쟁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유사 한 논쟁이 1990년대 이후 문학의 영역에서도 있어왔다. 이후 뒤따른 모든 비난과

‘각성’에도 불구하고, 문학에서 이러한 질문은 제기된 적이 없다 - 심지어 몇몇의 작가들은 그들이 독일 분단시기에 그러했던 것처럼 더 이상 역동적으로 활동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이와 다르게 이미지 논쟁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수의 독일민주공화국의 작품 이 지닌 특성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도록 하였다 : “비예술”에 대한 논의까지 포함 하여. 심지어는 베르너 튑케(Werner Tübke )와 같은 독일민주공화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것조차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고 이야기할 정도였으며. 뿐만 아니라 이 전 사회주의 국가 출신의 예술가들인 폴케 스텔츠만(Volker Stelzmann), 로널드 패리스(Ronald Paris), 하랄트 메츠케스(Harald Metzkes )의 작품들 역시 진정한

“예술”이라 볼 수 있는가는 의문과 함께 마치 프랑켄 하우제너의 대형 파노라마 역사 회화의 경우처럼 장식 혹은 응용미술에 보다 가까운 것이라며 꼬집는다.

“예술”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은 다원주의적 “서양”의 미술사가 및 이론 가들, 언론가들, 갤러리스트들, 뮤지엄관계자들, 그리고 미술에 관심 있고 교육받

은 대중들이 동시대 예술이 더 이상 질적인 언급들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예 술체계의 틀 안에서 인식되고 창조된 사물이나 행위들의 사건으로 존재한다는 것 에 오랫동안 합의해온 이후로 주목할 만한 것이 되었다. 다수의 시민들은 이러한 (명백하게 사회학상의) 구축주의에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질문: “이것이 예술인가?”라는 질문은 아직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문가들, 감정가들 그리고 내부자들에게 이것은 쉽게 무시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문맥 속에서 발생한 일들이 논쟁거리가 될 때 , 그리고 그들이 역사 철학에 기반한 자기 확신을 통해 그들 자신을 객관 적인 의미로 구현하고자 하는 야심을 갖게 될 때, 예술 전문가들의 ‘예술로 제공 되는 한 모든 것이 예술이다’라는 그들의 의견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발터 그라스 캠프(Walter Grasskamp)는 이러한 갈등의 필연적 개연성에 대해 적절한 포장을 부여하였다 : “미학의 최전선에 있는 특정한 성격은 동쪽의 반-모던 개념에 기초 한 것만이 아니라 여전히 상호 경멸하는 양측의 예술 개념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 이다”.

이것이 비단 동독과 서독간의 갈등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 때 상황은 점 점 더 복잡해진다. 오직 “자율성”(그러므로 판매될 수도 있다)을 지닌 예술만이

“예술”이라는 영예로운 지위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이것은 독일민주공화 국의 이단아들 스스로의 이미지에 있어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이전 ‘타

“예술”이라는 영예로운 지위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이것은 독일민주공화 국의 이단아들 스스로의 이미지에 있어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이전 ‘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