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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미술논쟁과 구동독 지역 페기다(PEGIDA) 현상을 중심으로

Ⅱ. 1990-2009(?) 년 동-서 독일에서 벌어진 이미지 논쟁

1989년 벽이 붕괴되고 양극화 되었던 전후 두 독일의 상태는 한순간에 종료 되었다. 하지만 초기에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행복감보다 “동반성장”의 과제 는 어렵게만 느껴졌다. 급진적인 변화에 반대하는 시각들은 그들의 담론을 통일 에 따른 “이미지논쟁”에서 찾았다. 문제는 모든 “예술”이 통합된 당의 정책 하에 서 진정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게오르그 바셀리츠가 독일이 통일되던 해에 아트 매거진에 게재한 극단적 입장의 표명을 시발점으로 그 논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는 “독일민주공화국에서 “작가”란 존재하지 않았다. 화가도, 그림을 그린 그 누 구도 없으며 […] 즐거운 화가란 존재하지 않았고, 모두 어리석은 자들뿐이었다.”

고 기술하였다.

이 논쟁의 가장 주요한 부분은 개개인 작가의 연대기에 대한 것과, 무엇보 다도 전시에서 독일민주공화국의 작품들을 선보이는 것에 대한 문제였다. 많은

동독 사람들은 이전의 틀 속에서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강한 갈등은 (베를린 하원까지) 1994년 노이에 내셔널 갤러리(Neue Nationalgaleriein)를 개관 하면서 벌어졌다. 특히 디터 호니쉬(Dieter Honisch )가 미술관의 현대 미술 소장 품 중 독일민주공화국의 회화들을 통일의 홍보사진들과 혼합시키면서 이는 전면 으로 대두되었다. 예를 들어 그는 빌리지테(Willi Sitte)의 작품을 뒤셀도르프의 화가 콘라드 클랍헥(Konrad Klapheck) 과 함께 혹은 후베르투스 기브(Hubertus Giebe)와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작품을 나란히 전시해 놓았다. 이 사 건은 양측 모두의 엄청난 흥분을 불러 일으켰다. 일례로 안드레아 휘네케 (Andreas Hüneke)는 “독일통일사회당의 문화정치인들이 이제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자리로 돌아갔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논란은 다름 아닌 1995년 베를린 독일 역사박물관 에서 개최된 <주문: 미술(Auftrag: Kunst)>전을 통해 벌어졌다. 이 전시는 독일 민주공화국 역사의 한 해를 나타내는 한 점의 작품을 각각 제작 의뢰하여 이를 보여주는 전시회였다. 하지만 이는 독일민주공화국의 예술을 소급하여 폐기하려 는 시도로 오인되었다. 이 전시에 대한 매우 공격적이고 분노에 찬 평들을 방명 록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나치의 악명 높은 전시와 동일 선상에서 비교된 다음 의 문구가 그 예이다.

“1937년 뮌헨: ‘퇴폐미술’전 : 무료입장– 1995년베를린: ‘Auftrag: Kunst’전:

무료입장”

사실 진정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던 사건은(미디어의 반응 역시) 1999년 유럽 문화수도로 선정된 바이마르에서 개최된 <모더니즘의 시작과 끝(Rise and Fall of Modernism)>전의 나치와 독일민주공화국 섹션을 둘러싸고 벌어진 (계획된?) 대 형스캔들이었다. 독일민주공화국의 섹션은 작품의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모더니즘 식의 방법과 대비되는, 공작의 성과도 같은 디스플레이 방식이 아닌, 더 나아가 이전 나치의 Gauforum의 낡은 1층을 연상하게 하였다. 심지어 이 작품들은 독일

연방공화국에서 단 한 번도 전시되지 않았던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 회화컬렉션 들과 나란히 놓여졌다.

이 작품들의 선택과 전시의 방식은 마치 그 명예를 훼손하려는 듯 보였으며 (베르너 튑케에 따르면, 극악무도하고, 악의적이며, 끔찍하게) 그 어떤 기준이나 원칙도 따르지 않는 듯 보였다. 또한 이 작품들은 오래전 왕실이나 루브르 박물 관의 방식처럼 거의 간격이 없이 서로 붙어있었다. 이것들은 마치, 공연이 끝난 채 남겨진 서커스의 텐트와도 같아보였다. (에바-마리아 슐러에 의해 디자인된) 로툰다로 돌출된 쐐기는, 언뜻 보기에 수문 혹은 미래를 가리키는 터널 끝을 알 리는 한줄기 빛과 같이 느껴졌고, “형식주의자”라 비난을 받아온 작가들은‘이단아’

로 보여 졌다.

하지만 1990년 이후, 독일민주공화국의 주도 하에 제작된 작가들의 주요 작 품들은 또한 대중들의 반감을 샀다. 특히 독일 연방의회 의사당의 장식을 의뢰받 았던 베른하르트 하이지히(Bernhard Heisig)의 작품은 큰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비록 그의 역사화인 <Zeit und Leben(시간과 삶)>은 ― 독일민주공화국의 국민 의회 입구에 걸린 <이카루스>(1975)와는 다르게 ― 국회의사당의 식당 한 곳에만 전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작가에게는 강력한 항의 가 뒤따랐다. “그의 동지들과의 어떤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실제로 “권력 의 늪 속에서 행하는 독창적인 영합이자 융통성 있는 아첨”의 한 예이다. (루츠라 테노브). 반면 하이지그의 제자인 라이프치히 출신의 하트비히 에벌스바흐 (Hartwig Ebersbach )는 이와 반대로, “동독의 위엄”을 이유로 그를 옹호하였다.

이제 혹자는 “그해의 전시”로도 선정된 바 있는, 2003년 노이에 국립갤러리 에서 성공리에 개최된 대규모회고전 <독일민주공화국의 예술>전을 통하여 이미 지 논쟁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것이 아니냐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마치 통일 후 벌어졌던 이미지 논쟁이 진정 국면에 접어드는 듯 보였을 때, 2009년 동 독 출신의 예술가들과 작품을 향한 도저히 양립 불가능한 차이를 드러내는 상황 이 다시금 발생했다. 독일연방공화국의 기본법 제정 6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 <

60년, 60점의 작품들(60 Jahre 60 Werke)>전이 그것이다. 이 전시는 베를린에 위

치한 마틴-그로피우스-바우에서 연방총리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의 주도 로 개최되었으며 “국가적이면서도 국제적인 예술을 행한” 독일 작가들의 뛰어난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이 전시는 “동시대 예술의 현상들에 주목하고 과거 독일연방공화국이 성취 해 낸 위대한 업적들에 대한 인식을 고양하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이러한 이유 로, 예술의 위치가 마치 “안정적인 기본법에 기초하여 발전된, 말하자면 국가에 의해 보장된 예술의 자유”로서 규정되는 듯 했다. 만약 이것이 헌법에 기반한 구 연방국화국이 회고되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독일민주공화국 출신의 작가들 이 처음 40년간이나 무시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 러한 것들이 서독의회의 이전 세대를 기억하기 위함이기보다는, 기본법 제5조(3 항)에 의해 보장된 예술의 자유라는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고자하는 것이었다 는 점이다.

많은 반대의견에 대하여 미술사학자 지그프리트 고허(Siegfried Gohr)는 그 가 흔히 쓰는 과장한 언어로 다음과 같이 이에 대한 입장을 표하였다. “몇몇의 감 탄할만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독일민주공화국은 마치 독일 이외에는 대답 도 없는 미학적 동물원일 뿐이었다”. 독일민주공화국의 작가를 부당하게 제외한다 는 비난에 대항하여, 그는 독일민주공화국 작가들이 참여한 몇 안 되는 예 (1999-2009년 사이 볼프강 마트호이어와 네오 라우흐의 경우가 유일했다)를 진부 하게 내세우며 “독일민주공화국의예술”을 “동독인의 특수성”으로, 그러므로 이는 역사박물관에서 어울릴 “시간과 상황-의존적 그리고 때로는 비독창적인”것이라 이야기하였다. 그는 이를 “독일민주공화국에 대한 갈망”으로 가정하고 “연방공화 국에 대항하는 분노의 증대”로서 치부하고 있다.

한편 1990년 지그프리트 고허는 루드비히 시립미술관의 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신문 ‘쾰르너슈타트-안자이너(Kölner Stadt-Anzeiger)’지에 유명한 아트 컬 렉터인 페테르 루드비히가 독일민주공화국으로부터 구입한 작품들을 전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눈에 띤 작품들은 […]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던 전체 주의 국가와 법의 규칙 그리고 민주주의가 서로 뒤엉켜 있다”. 그러므로 “인간적

가치와 사회주의의 성과라는 이름” 아래의 예술은 “이미 그 중심에 권력을 지니 고 있으며”, 작품 안에 있는 “예술의 핵심” 을 무효화하고 파괴시켜 그것들을 “감 정적이고 텅 빈”것으로 만들어버린다고 주장하였다.

아헨에 기반한 초콜렛 사업가이자 당시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트컬 렉터 중 한명이었던 (독일민주공화국의 회화를 포함한 그의 소장품 중 일부는 현 재 중국 베이징 국립미술관 3개의 전시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페테르 루드비히 (Peter Ludwig)는 다음과 같이 대응하였다. 그는 ‘쥐트도이체차이퉁(Süddeutsche Zeitung)’지 를 통하여 “독일민주공화국 예술의 금지”에 대해 자신과 자신의 부인 의 이름을 딴 퀼른의 미술관에서 “독일과 유럽의 분열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내 입장에서 바라볼 때, 이 절망적인 분열이 없어질 시간이 다가 오기를 그저 바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큐레이터로서 고허는 독일민주공화국의 존재를 역사의 “주석”과도 같은 것 으로 주장하였던 역사학자 한스-울리히벨러와는 다르게 그들의 예술을 “오늘날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연방공화국의 예술이 지닌 힘과 카리스마”와는 달리

“부차적인 사이드 쇼 정도밖에 안되는”것으로 치부하였다. 작가 게오르그 바셀리 츠는 이를 다음과 같이 단순한 방식으로 표명했다. “두 개로 접혀져 있던 독일에 서 작가들은 서독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주하거나, 강제로 서독으로 갈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