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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현대예술의 진리 구성

문서에서 사후 구성적 진리와 예술 (페이지 32-36)

살펴본 바와 같이 헤겔은 논리학에서는 대상과 그 개념의 절대적 동일성 으로서의 진리 규정에 천착했지만, 정신현상학에서는 ‘변증법의 계기적 진리’의 특성을 잘 보여주었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변증법의 계기적 진리의 특성에 주목하고 각 계기마다 지(Wissen) 스스로가 검증하며 획득하는 이러한 진리를 지젝의 ‘사후 구성’ 이론에 의거하여 규명하고자 했다. 삶과 역사의 각 단계에서 우리가 규정하는 진리는 절대적 동일성으로서의 진리가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소급해 살펴본 역사적 경험들에 대한 새로운 의미발굴과 의미부여를 통해 사후적 으로 구성되는 진리로 보고자하며, 이러한 관점에서 헤겔이 예술의 내용으로 규정하는 절대적 이념 역시 한 민족, 한 시대가 절대적인 것, 가장 지고한 것, 즉 진리라고 사유한 정신의 산물이라고 볼 때 이러한 진리 역시 ‘사후적으로 구성된’

73) 지젝은 대상에 대한 매개 불가능한 서로 다른 시차적 관점이 가능한데, 이것은 단지 관점의 다양성 때문이 아니라 대상 자체 내에 다양한 특성, 모순들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S. Zizek, The Parallax View, 시차적 관점, 김서영 옮김 [마티 2009] 참조).

진리로 해석하였다.

헤겔의 규정에 따를 때 이념 자체가 역사성을 띰으로 이를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의 내용은 애초에 특정한 것(고전 그리스 예술의 미)을 이상으로 제시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각 역사적 단계에 어떠한 이념이 진리로 구성되었 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예술은 그러한 진리가 구성된 그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가 어떠하였는지를 고찰하게 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더욱이 근대에는 이념 자체가 더 이상 하나의 실체적인 것, 보편적인 것으로 수용되지 않으면서 더욱 다양한 진리의 사후 구성이 가능해지고 또한 요구된다. 이러한 예술의 기능을 헤겔은 “형식적 도야”의 구상에서 명시하였다.

형식적 도야는 진리의 내용적 전수가 아니라 기존의 진리, 사태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게 하는 사유의 틀로서의 ‘형식적 보편성’에 이르게 하는 도야이다. 예술은 종교와 철학과 더불어 형식적 도야의 한 계기로 작용하면서 자신의 새로운 기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형식적 도야는 근대 혹은 우리 시대 예술의 문화철 학적 의미를 논하는 기초가 되는 동시에, 진리매개라는 측면에서는 사후 구성된 진리의 검증과 진리를 새로이 사후적으로 구성한다는 이중적인 역할을 예술이 할 수 있게 하는 틀이 된다. 형식적 도야가 ― 예술에서든, 종교에서든, 철학에서든

― 그러한 진리의 사후 구성의 틀 내지 기초가 된다면 헤겔에 있어서 진리를 사후적으로 구성하는 방향 혹은 근거는 ‘인륜성(Sittlichkeit)’이라고 볼 수 있다.

헤겔이 의미하는 인륜성은 가족과 시민사회를 거쳐 궁극적으로 국가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인간의 ‘자유’를 의미한다.74) 법철학에서는 법이야말로 인간의 자유의 산물이라고 규정하며 그 법은 인륜성을 본질로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헤겔의 주장에서도 법, 자유는 인간이 현실의 사태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성하며 새로이 형성해 나가야 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구성한다고 하는 것은 추상적인 올바름이나 인식론적 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각 시대의 잘못된

74) 예술과 인륜성의 연관에 관해서는 권정임, 「‘인륜성’의 구현으로서 예술작품 - 헤겔 예술론의 현대적 의미 고찰」, 미학예술학연구 54집 (2018), pp. 3-47 (DOI:

10.17527/JASA.54.0.01) 참조.

에피스테메와 이데올로기, 헤게모니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보다 참된 인륜성 및 자유에 가까워지려는 끊임없는 시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75)

헤겔은 예술철학강의에서 셰익스피어의 비극작품들(리어왕, 리차드왕, 맥베스, 햄릿 등)을 ‘참다운 독창성’의 예시로 들며 역사적 소재를 당대의 시대성에 적절하게 가공한 근대의 수작으로 평가한다. 셰익스피어 작품들은 본 연구의 관점에서 보면 예술의 사후 진리 구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많은 예술들도 이러한 성격을 띠고 있다. 일례로 최근 일민미술관의 ≪불멸사랑 Immortality in Cloud≫ 전시(2019. 2. 22-5. 12. 조주현 학예사 기획)을 들면, 이 전시의 기획취지는 “동시대성의 조건 하에서 역사가 어떻게 새로운 양식화를 이루는지, 특히 서로 다른 문화들, 종교들, 언어들 사이의 조우가 심화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어떻게 역사적, 민족적, 문화적 특질들이 ‘되쓰기(rewriting)’ 되고 있는 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여기서 인용된 ‘되쓰기’는 피터 바이벨(Peter Weibel, 1944- )의 용어로, 바이벨이 “우리는 모두 되쓰기의 시대를 경험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전지구적 규모로 미술사의 되쓰기, 정치적, 경제적 역사의 되쓰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 말은 곧 진리의 사후 구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76)

이와 같이 진리는 궁극적으로 개념과 대상의 절대적 동일성을 하나의 이념

75) 헤겔에게서 “예술적 진리는 객관적 사실 자체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아니라, 설령 그 러한 사실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개념에 일치하는 사태, 즉 참된 사태를 형상화하는 데” 있다고 볼 때 (권대중, 「사실적 진리와 예술적 진리: <세네카의 죽음>의 사례」,  美學 62집 [2010], pp. 1-30, p. 7), 예술에서 진리의 사후 구성은 삶의 현실이 인륜, 자유라는 개념에 부합하는가의 성찰에서 수행된다고 하겠다. 지젝과 라캉에 있어서도 윤리가 중요하다. 라캉은 정신분석학의 윤리에서 <안티고네>는 욕망과 법은 결코 합치될 수 없으나 “법을 벗어나 실재계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보는 반면, 지젝은 <안테고네>의 예를 통해 예술이 기존하는 체계의 한 계를 실제로 무너뜨림으로써 “세계 질서의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는 점을 강조한다 (김현강, 슬라보예 지젝, p. 123).

76) 조주현, 「21세기 ‘이야기꾼’의 등장과 역사 되쓰기의 예술실천: 일민미술관 ≪불멸사랑≫

(2019)을 중심으로」, 미학예술학연구 57집 (2019), pp. 159-181 (DOI: 10.17527/

JASA.57.0.06), p. 161.

으로 추구하지만 현실적 삶의 세계에서 진리는 ‘변증법의 계기적 진리’의 성격을 띨 뿐이며, 이 진리는 늘 새로이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예술은 각 역사적 단계 혹은 문화에서 논의된, 이상적인 것으로 파악된 진리와 사유들을 구현해왔다.

이러한 ‘과거의 현재로서의 예술’이 우리에게 정신철학적 및 문화사적 사유와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면, 오늘날 예술은 이와 더불어 현시대의 진리를 사후적으로 구성하여 제시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부분적일지나 여전히 진리 매개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알랭 바디우(A. Badiou, 1937- )가

“예술은 스스로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며 그 자체 “하나의 진리의 절차”라고 주장하는 바와, 예술에 내재하는 진리는 “사후적으로 구성된” 진리로 무한하고 다양하다고 보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77)

78)

77) A. 바디우, Petit manuel d'inesthétique (1998), 비미학, 장해순 옮김, (이학사 2011, 2쇄), p. 31, p. 24, p. 31.

* 논문투고일: 2019년 8월 11일 / 심사기간: 2019년 8월 16일-2019년 9월 8일 / 최종게재 확정일: 2019년 9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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