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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鐸의 書法에 대한 肯定

Ⅳ. 儒家審美思想과 書法批評

2) 王鐸의 書法에 대한 肯定

趙孟頫와 같이 貳臣이라는 汚名을 쓰고 藝術成果도 함께 抹殺된 書家들 이 많은데 그 중에는 王鐸도 있다.

王鐸(1592-1652年)은 河南 孟津사람으로 明末淸初의 書家이다. 그의 字 는 覺斯 또는 覺之라고도 하였으며, 號는 嵩樵, 十樵라고 하였다. 明나라 天啓年間에 進士에 급제하여 禮部尙書, 東閣大學士의 벼슬을 지냈다. 明나 라가 망하면서 淸나라에 歸順하여 또 禮部尙書의 벼슬을 한 그는 『淸史 列傳 에 ‘貳臣’으로 烙印찍히면서 人格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明나라 朝廷에서 그 몸은 膴仕267)에 進入하였는데, 本 朝廷이 새로 設立될 初期 에 第一 먼저 歸順하여 다시 鄙陋하게도 벼슬을 하였는데 大節이 없으므로, 참으 로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였다.268)

267) 膴仕: 高官厚祿, 『詩經 , 「小雅·節南山」, “瑣瑣姻亞, 則無膴仕.”

268) 『淸史列傳 , “在明朝身躋膴仕, 及本朝定鼎之初, 率先投順, 洊陡列卿, 大節有亐, 實不齒于人類.”, 由智超, 『中國書法家全集·王鐸 , (中國, 河北敎育出版社, 2002, 3), p.170, 재인용.

이렇게 그 當時에는 王鐸과도 같은 사람을 史書에서 사람취급도 하지 않았다. 王鐸의 書法은 王羲之의 傳統을 이어 받아 眞, 行, 草書 여러 書體 에서 아주 巨大한 成果를 거두었는바, 趙孟頫의 ‘軟媚’한 書風과는 달리 주 로 힘이 넘쳐나는 書體를 構想하였으며, ‘强勁’한 風格으로 世上에 이름을 남겼다. 특히 巨輻의 作品에 漲墨을 잘 썼으며, 草書는 一筆書의 代表人物 로 손꼽힌다. 그의 豪放하고 創意的인 書法은 古今中外에 莫大한 影響을 끼쳐왔는 바, 中國書法史上 하나의 巨大한 山으로 指目받고 있다. 하지만 政治生涯의 汚點은 씻을 수 없는 것으로서, 그로 하여금 몇 백 년래 複雜 하고도 爭議가 많은 人物로 되게 하였다. 書風은 비록 ‘剛勁’하나, ‘貳臣’이 기 때문에 사람은 骨氣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서로 矛盾되는 점이 아닐 수 없다. 趙孟頫의 書風은 ‘軟媚’하나 王鐸의 書風은 ‘剛勁’한 탓에, 사람은 비록 ‘骨氣’없으나 書法은 否定할 方法이 없었다. 王鐸의 書法에 대 한 評價가 相當히 많은데 그 중 代表性的인 것을 例를 들면 아래와 같다.

明나라의 書學은 柔·媚를 崇尙하는 氣風이 盛行했는데, 王鐸과 張瑞圖가 그 積 習을 깨고 氣·骨을 세웠는 바, 비록 入神의 境地에까지는 到達하지 못했으나 不朽 의 이름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269)

王覺斯의 人品은 頹喪하지만 書法은 슬그머니 北宋 大家의 風格이 있다. 어찌 그의 인품으로 하여 書法을 廢할 수 있으랴.270)

王覺斯 鐸의 서법은 魄力이 있고 沈雄하여 丘壑과도 같이 峻偉하다.271)

이렇듯 王鐸의 書法에 대한 評價는 趙孟頫의 書法에 대한 評價와는 判 異하게 氣骨이 있고 힘 있는 風格의 所有者라는 것이 普遍的인 結論이다.

趙孟頫와 王鐸은 모두 ‘貳臣’이라는 汚名을 쓰고 骨氣없는 人間으로 취

269) 淸, 梁巘, 『評書帖 , 由智超, 上揭書, p.182, 재인용.

270) 淸, 吳德旋, 『初月樓論隨筆 : “王覺斯人品頹喪, 而作字居然有北宋大家之風, 豈以其人而廢之.” 由 智超, 上揭書, 같은 쪽 재인용.

271) 淸, 秦祖永, 『梧陰論畵 : “王覺斯鐸, 魄力沈雄, 丘壑峻偉.”, 由智超, 上揭書, 같은쪽 재인용.

급을 받은 사람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書法에 대한 品評은 判異한바 사람 들에게 많은 思索의 餘韻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