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문제의식
2.2.2. 지배
영이 고려하는 부정의의 다른 한 가지 층위는, 행위자들이 자기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침해당하는 문제이다. 영은 이 부정의의 유형을 ‘지 배’라고 명명하는데, 이 개념은 (억압 개념이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과거 사용되었던 의미에서 일부 벗어난 조건들을 지시한다. 전통적인 정치 철학에서 지배 관계는 지배자가 권위(authority)나 권력(power)을 통해 피 지배자에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사태를 지칭했다. 이 관계를 정당화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정당화된다면 어떤 조건 하에서 그러한지가 정치철 학이 설명해야 하는 근본적인 주제였다.217 그런데 지배관계를 국가 주권의 층위에서 이해하게 되면, 지배자의 통치라는 명시적 지배의 문제만이 문제 시되며 통치성의 영역 바깥에서 존재하는 권력관계는 지배의 범주에 들어 오지 않는다.
이와 달리 비판이론(critical theory)적 접근에서 지배의 문제는 국가적 통치성의 영역으로 한정되지 않으며, 시민들이 공적 논의에 참여하는 의사 결정 과정이 관료제(bureaucracy)나 거대 자본 등에 의해 제약당하는 사 태까지 포함하여 지시한다.218 특히 평등한 담론적 참여의 이념을 이론적으
216 3장에서 다루어질 정치적 책임에 대한 논의에서 나는 이를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217 이와 같은 전통적인 관점에서 지배를 규정하는 입장으로는 Wolff, (1998) In Defense of Anarchism, Berkeley, Californi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8.
218 물론 비판이론 내부에서도 이론가들마다 지배 개념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데, 가령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지배 개념을 사용하는 테오도르 아도르노
(Theodor Adorno)에게 이는 더욱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그는 인간이 정
치경제적으로 타인을 지배하는 사태뿐만 아니라, 외부 자연을 지배하는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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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정식화한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이상적 담화상황(ideal speech situation)’ 개념은 이후 정치·사회철학에서 부정의로서 지배의 문 제를 논의하기 위한 핵심적 전제로 자리잡았다. 행위자들은 공론장에서 자 유로운 의사표명 및 비강제적인 동의를 보장받아야 하며, 이러한 담론적- 민주적 절차를 통해 형성된 공적 의지는 강제성을 지닌 법적∙정치적 제도 의 정당성 기반이 된다.219
나는 우선 영의 정치이론에서 지배 개념을 설명하고, 뒤이어 부정의로서 지배의 문제가 논의될 필요성을 언급하려 한다. 하버마스의 담론이론은 행 위자들이 평등하게 공론장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며, 이에 대한 제약으로서 우리는 지배 개념을 정식화할 수 있다. 억압의 문제와 별도로 지배의 문제가 다루어져야 하는 이유는, 사회 집단이 경험하는 제약의 방 식이 서로 다양하게 제기되기 때문에 이를 추상적이고 일원적인 관점에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은 사회 구성원들이 응당 누려야 하는 자원의 분배에 국한되지 않는 정의론의 필요성을 논의한다. 정의의 문제를 분배에 국한시키는 현대 정의 이론의 많은 시도들은 행위자들이 응당 누려야 하는 자유와 권리의 문제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거나, 혹은 권리를 물건처럼 배분가능한 사물로 물화시켜 설명하는 우를 범한다.220 가령 롤스는 구성원들이 처한 지위의 문제를 도외시함으로써 사회 정의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해석한다. 이는 그
그리고 더욱이 인간 자신의 내적 자연까지 지배하는 삼중의 연관을 지배라는 개념틀로 문제시한다. 이에 대해서는 정호근, (2003) 「사회구성과 지배의 연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 계몽의 변증법 』 을 중심으로 」, 『 철학사상 』, 16(특별호1-2), 166-68.
219 Habermas, (1996) Between Facts and Norms: Contributions to a Discourse Theory of Law and Democracy, Cambridge, Mass.: MIT Press, 121.
220 Young, (1981) "Toward a Critical Theory of Justice," Social Theory and Practice, 7(3),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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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사회 정의를 ‘기본 가치(primary goods)’의 분배에 한정하여 이해하는 것과 연관된 문제이기도 하다.221 개인의 자유와 권리, 기회, 그리고 경제적 부로 이해되는 기본 가치들은 기본 구조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 있으며, 따 라서 사회 구조가 어떻게 이해되는가에 따라 달리 설정된다. 하지만 롤스 의 정의이론에서는 행위자들이 처한 관계와 맥락들이 구조적 관점에 반영 되는 길을 막아두기 때문에, 기본 가치가 개개인들이 삶의 지평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게 될 지 불분명해진다는 것이 영의 비판이다. 추상적인 가 치로 이해된 자유와 권리, 의무와 부담은 마치 경제적 재화의 배분처럼 개 인들에게 분배되는 방식으로만 이해된다는 것이다.222
이와 같은 분배중심적 정의관의 문제는, 설령 분배 대상의 범위를 더 넓 게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남는다. 가령 롤스의 기본 가치 개념은 단 지 경제적 재화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권리, 의무를 포함한다는 해석을 제안하는 이들이 있다.223 혹은 영이 예로 드는 마이클 월저(Michael Walzer)의 논의는 어떤 단일 재화도 사회가 처한 역사적 맥 락을 넘어서는 필수 재화로 간주될 수 없음을 지적하며, 경제적 재화만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사회적 재화들, 즉 성원권, 안전과 복지, 여가, 교육과 같은 대상들을 함께 분배하는 복합적 평등(complex equality) 개념을 제시 한다.224 이러한 시도들을 통해 정책 입안자의 자리를 소수 집단에게 더 많 이 배분하거나, 공론장에서의 발언 기회 등을 그동안 배제되어 왔던 이들 에게 제공한다면, 이는 불균등한 권력 문제를 해소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221 Rawls, (1971) A Theory of Justice, 54.
222 Young, (1981) "Toward a Critical Theory of Justice," 290.
223 Lötter, (1999) "Rawls, Young, and the Scope of Justice," Theoria: A Journal of Social and Political Theory, 46(94), 92; Paden, (1998) "Democracy and Distribution," Social Theory and Practice, 24(3), 424.
224 Walzer, (1983) Spheres of Justice: A Defense of Pluralism and Equality, New York: Basic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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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이 보기에 이 시도들은 분배 정의의 협소함을 어느 정도 보충 하는 데에는 성공할 지 몰라도 분배 패러다임 자체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권리와 의무, 권력 등의 개념은 사물처럼 분배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가령 공론장에서의 발언권을 얻지 못한 누군가가 이를 받는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가 그 기회를 못 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용자와 노동 자 사이의 권력은 양자의 관계적 위치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이를 돈처럼 건네받을 수는 없다. 영의 설명을 인용하면, 분배 패러다임은 “분배의 논 리가 적용될 수 없게 되는 한계점을 인정하지 않”은 채, 물질적∙양적 대상 이 아닌 것들까지 환원하는 오류를 범한다.225 앞서 역량 계발에 대한 억압 의 해명에서 본 바와 같이, 자유와 권리는 그들이 놓여있는 사회적 연관, 즉 행위자들을 둘러싸고 제도들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 어떤 불합리한 관행이 존재하는지 등에 따라 충분히 보장받거나 그렇지 못하게 된다.
225 JPD, 24-25/69-73. 한편 분배 패러다임이 권력 개념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영 의 비판은, 에이미 앨렌(Amy Allen)이 지적하듯이 네 가지 층위에 걸쳐 있다 (Allen, (2008) "Oppression, Empowerment, and Transnational Justice," 158-
59). 첫 번째로 분배적 관점에서 권력은 “암묵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개인 행
위자들이 소유하는 물건처럼 구상”되고 있다는 것이다(JPD, 31/85). 둘째로, 설 령 권력이 관계적으로 이해되는 경우조차, 분배적 패러다임이 지닌 원자론적 개인관 속에서는 권력을 행사하는 개인과 이를 행사당하는 개인 사이의 이원적 설명만이 제공된다. 이는 지배의 문제가 지닌 복합적인 작용, 즉 “구조적인 지 배의 현상”을 간과한다(JPD, 31/85). 셋째, 분배 패러다임의 권력 이해는 너무 정형적이어서 권력이 고정된 패턴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전개되는 과 정이라는 점을 보지 못한다(JPD, 32/86). 마지막으로 분배적 관점에서는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된 것을 문제시하며 이를 더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방식으로 해답을 찾곤 하는데, 이는 “권력이 넓게 퍼지고 분산되어 있지만, 사회적 관계 들은 억압과 지배로 단단히 규정될 수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정확히 포착하 지 못한다(JPD, 33/88). 이때 영은 푸코의 권력 개념을 차용하며, “넓게 퍼진 행 위자들이 권력을 ‘갖지’ 않고서도, 혹은 특권을 누리지 않은 채로도 권력을 행 사하는 행위자라고 말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JPD, 3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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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비판이 분배 문제를 정의의 영역에서 제외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프레이저가 인정의 문제에만 집중하는 사회운동에 대해 비판한 바 와 같이, 정의를 다루는 관점은 행위자들의 자유와 권리를 다루는 가운데 재화 분배의 문제 역시 간과할 수 없다.226 다만 행위자들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는 정의관은 분배의 문제를 기존의 논의와 다른 방식으로 다룰 것을 요구한다. 부의 문제는 이미 생산되어 있는 재화를 재분배하는 것에만 초 점을 맞추는 대신, 분배가 이루어지는 (부의 생산관계를 포함한) 절차들을 고찰하는 방식으로 논의가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환의 필요성은 사회 집단 간에 존재하는 체계적인 권력 불균형, 즉 “한 집단(혹은 집단들) 의 구성원들이 다른 집단에게 체계적이고 반복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며, 다 른 이들이 갖지 못한 특권을 특정 집단에게 수여하는”227 지배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과제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이 영의 구상이다.
경제적 재화의 불균형이 계급 집단 간의 권력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한 대표적인 사상가로 영은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논의를 일부 인 용한다.228 마르크스는 사회 구성원들이 재화를 생산하는 생산수단의 소유 관계, 즉 생산 과정에서의 권력 문제를 사회 분석의 핵심요소로 설명한다.
인간의 필요와 생산력의 발전, 그리고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생산관계)는 서 로 불가분의 연관을 갖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생산양식(mode of
production)이라고 명명하는 이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는 정치 제도 및 사
상에 대한 근본적인 조건으로 자리잡는다.229 어떤 제도나 사상이 한 개인
226 Fraser, (1998) "Social Justice in the Age of Identity Politics: Redistribution, Recognition, and Participation," The Tanner lecture on human values, 19, 1- 67.
227 Young, (1981) "Toward a Critical Theory of Justice," 285.
228 JPD, 21/64.
229 Marx, & Engels, (1846) "German Ideology," in Marx-Engels Collected Works (Vol. 5): International Publishers Co,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