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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경꾼의 삶의 양상

2.2 주변인으로 살아가기

김향숙의 작품에서는 주로 타협과 저항을 적절히 바꿔가면서 삶을 일 궈가는 ‘낯익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담담한 목소리로 일상을 그려내면서 도 그 속에 깃든 삶에 대한 통찰과 본질적인 문제를 예각화 시키는 날카 로움이 숨어있다. 조남현은 ‘표면상으로는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를 취하 고 있지만 속으로는 속악한 존재들과 삶에 대한 분노 또는 절망감을 묻 어 두고 있다’86)고 김향숙을 평가하였다. 그리고 작가 자신 또한 어느 좌 담에서 ‘낮은 어조’로 ‘어긋남 그 자체’를 드러내기에87) 주력했다는 일관 된 창작적 태도를 밝히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작가적 성향은 ‘일상성’88)이 라는 용어로 수렴되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는 심리주의 창작방법이라 는 꼬리표와 함께 김향숙 소설의 특징 혹은 극복되어야 할 한계로 평가 되었다.

일상과의 단절이 흔히 자유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삶을 송두리째 뺏기

86) 조남현, 「말기적 사회병리 현상 통찰」, 『조선일보』, 1991.3.17.

87) 김향숙은 한 좌담에서 당시 준비하고 있는 장편소설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서술 했다. ‘50대 중반에 이른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인데요. 초등학교 동창인 그들은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들보다 훨씬 짧다는 삶의 유한성을 절감하며 사회 구성원 으로서도 배경인물로 물러서야 하며 멀지 않은 날에 노년의 삶이 다가온다는 걸 받아들이기도 해야 한다는, 삶의 새로운 어떤 지점에 이른 인물들이지요. 그들이 처한 시대적 상황이며 현실 그리고 저마다의 상처가 어우러진 이야기를 낮은 어 조로 하려 했어요. 밖으로 드러나는 열정의 분출 대신 객관적인 시선을 놓치지 않으면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어쩔 수 없는 성 차이에서 비롯되는 어긋남도 당위 성의 자 보다는 어긋남 그 자체를 그대로 드러내 보이려 했지요.’ (김향숙, 박범 신, 송기원, 이경자, 「우리 시대의 작가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실천문 학』, 실천문학사, 2002.2, 411면.)

88) 대표적으로 이광호는 『수레바퀴 속에서』의 해설에서 ‘상황의 논리에 굴복하고 때로는 저항하면서 살아가는 낯익은 인간들의 내면적 모습’을 ‘일상적 삶에 대한 섬세한 심리적 탐색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이 주목된다’고 하였다(이광호, 「전 환기 삶의 심리적 현실」, 『수레바퀴 속에서』 해설, 창작과비평사, 1988.). 이 외 이상금은 ‘일상성의 물결 속에 병리적 시대인들이 갖는 가냘픈 희망’(이상금,

「김향숙 論:문학, 삶의 이해를 위한 기관」, 『오늘의 문예비평』, 1991.12. 108 면)이라고 했고 고미석은 ‘일상의 그늘에 잠재한 뒤틀린 인간의식을 꼼꼼하게 그 려내고 있다’고 하였다. (고미석, 「왕성한 활동 여류작가 폭넒은 주제」, 『동아 일보』, 1986.8.13.)

는 일일 수도 있다. 이점을 잘 보여주는 인물은 「바다의 선물」89) (1986)에 등장하는 남편이다. 남편은 회사에서

휴양지로 가족여행을 다녀올 기회를 얻게 된다. 일과 사람들에게 놓여나 아름다운 자연 속에 묻히면 한없는 자유로움을 맛볼 줄 알았으나 고작 삼일만에 무료하고 답 답함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다가올 온전한 내몫의 긴 시간 이 두려워진다는 젊은 남성의 고민은 ‘늙음’은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 는 문제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퇴직 후의 자유로운 시간을 기대하는 현 대인들의 고단한 일상과 세계에 대한 관여 없이 보내는 시간도 결국은 고역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상 속에서 자기를 위한 시간을 마련할 필요성과 노인들의 사회적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요청하고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어떤 하오」(1985)의 주인공 중년 남성은 사무실의 경기가 나빠지면서 실업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면서 ‘어떤 하오’에 이전된 사무실로 출근하는 일과 를 묘사한 단편소설이다.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는 자신의 실적이 낮다는 사실이고 그것은 ‘나이’가 마침내 장애물로 등장하였음을 의미하 였다. 부품 판매 상담이라는 직업 특성상 구매 담당자들은 자신보다 젊 은 사람을 상대하기 편해하는 환경이었다. 이러한 맥락은 ‘여성’을 상대 하는 일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직업 환경과도 연관되는데, 이러한 성별과 나이에 따르는 사회적 제한이나 소외적 경험은 ‘젊은 남성’이라는 ‘근대 의 이상적인 인간 모델’과 맞닿아 있다. 나이에 따라 결정되는 위계질서 는 직급에 따르는 위계질서와 충돌되면서 나이에 비하여 직급이 낮은 위 치에 있으면 어느 순간 불편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친 한 친구가 뇌일혈로 사망했다는 소식으로 처리된 결말은 자못 의미심장 하다. 일상은 언제 어떻게 단절되어버릴지 모르며 일상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김향숙의 다른 단편소설 「저 석양 속으로」(1984)에서는 현직에서 물 러났어도 열정적으로 세계에 관여하고자 하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버

89) 김향숙, 「바다의 선물」, 『문학사상』167, 문학사상사, 1986.9

지가 직접 내면세계를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노처녀 딸의 서술로 이루어 진 일인칭 소설이다. 주인공 아버지가 딸에게, 즉 타자의 시선에 비춰진 모습은 다소 ‘병적’으로 보인다. 공로패, 감사패, 화려했던 젊은 시절을 담은 사진틀로 둘러싼 방에서 칩거하며 신문을 읽거나, 정부 당국자에게 정책을 건의하는 편지를 쓰거나, 방안에 진열된 공로패를 광채가 날 정 도로 닦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는다. 특히 손님이 오면 언제나 이 방에 들게 하여 그 물건들에 깃든 일화들을 세세하게 설명하는데 문제는 아버 지의 이러한 욕망이 지나치다는 것이었다. ‘텔레비전 시청료를 받으러 온 징수원이나 적십자회비를 받으러 온 동직원, 전기 검침원들’까지 방에 들 이기 시작했으며 지나가는 안면 있는 사람한테는 두 번, 세 번 방으로 불러들인다는 것이다.90) 현재의 삶에서 과거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 다는 것이 딸의 불만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또한 ‘꿀이니, 인삼이 니, 당근이니, 각종 영양제’를 챙기며 자신의 건강을 관리하고 자신의 세 계를 축소시키지 않고 적극적으로 젊은이들과 교류하고자 한다. 건강한 젊은 사람과는 달리 늙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과거’가 되고 ‘몸’이 되어 간다.

“건강한 사람은 자기 바깥에 머무른다. 그에게 속한 공간에, 떼려야 뗄 수 없이 자아와 맞물린 세계에 나아가는 게 건강한 사람의 태도다. 그러나 늙어 가는 사람은 갈수록 세계를 잃어가는 ‘나’가 된다. 한편으로 그는 정신과 몸 의 기억을 끌어모은 과거로 ‘시간’이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갈수록 더 자신 의 ‘몸’이 된다.” (장 아메리, 『늙어감에 대하여』, 돌베개, 2014, 69면.)

위 인용문에서 『늙어감에 대하여』의 저자 장 아메리는 ‘늙어감’의 문 제를 다루면서 공간과 시간에 대한 언급은 여기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 아버지의 철저한 건강관리는 늙어가는 사람이 갈수록 자신의 ‘몸’

이 되어가는 경험을 의미하며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몸을 의식하지 않고 도 생활할 수 있으나 여기저기 아픈 곳이 생겨나는 사람에게는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기 방에 칩거하며 자신에게 몰두하고

90) 「저 석양 속으로」, 68면.

있다는 점은 늙어가는 사람은 자기 바깥에 머무르는 공간이 점점 축소되 어간다는 것을 말해주며 자신에게 몰두하면 할수록 소통의 단절을 경험 하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인 면적을 차지하는 방이라는 공간으로의 축소 와 자기 바깥의 세계라는 공적 활동을 진행할 수 있는 공간의 축소도 의 미하고 있다. 공간뿐 아니라 시간에서도 건강한 사람은 미래에 머물러 있으며 출세하려는 욕구와 같은 분발력을 지니지만 늙어가는 사람은 과 거의 비중이 점점 커져만 가는 것이다.

「모래 위의 시간」(1984)에서 등장하는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회고담 을 계속 말해주는 할머니도 ‘과거’가 되어 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경자가 유학에서 학위를 받지 못하고 상념에 잠겨서 벤치에 앉아 있었던 순간, 낯선 할머니가 옆에 앉더니 자신의 과거를 경자에게 말하 는 것이다. 젊은이의 미래의 진로에 대한 고민과 늙은이의 과거에 대한 회고가 만나는 이 장면은 선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각자의 상이한 ‘시간’

의 의미를 가늠하게 만든다.

젊은이는 자신이 시간을 앞에 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젊은이 앞에 놓여있는 것은 그가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는 세계일 따름이다. 그리고 동시에 젊은이는 출세하려 안간힘을 쓴다. 반면 노인은 대부분의 인생을 등 위에 두었다. 그러나 남은 생애마저 더는 실감나게 살 수 없다. 노인의 인생 은 다름 아닌 모아놓은 시간, 살아진 시간, 이미 살아 생기를 잃어버린 시간 이다. (장 아메리, 『늙어감에 대하여』, 돌베개, 2014, 37면.)

시간의 경험은 미래에 남은 시간의 길이에 따라서 상이한 의미를 띠게 된다. 건강한 사람은 미래 시간의 폭이 넓어서 시간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남은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면 일상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의 비중 은 커지게 된다. 이 점에서 늙어가는 사람과 건강을 잃어가는 사람은 같 은 감정을 공유하기도 한다. 「문 밖에서」(1985)는91) 젊은이가 죽음이

91) 이 작품은 TV드라마로 제작된 바 있다. KBS1 TV밤 10시 TV문학관에서 방영 되었고 외부제작사인 동현프로덕션의 첫 작품이라고 한다. (이용주, 「TV드라머 에 외부제작진 참여 본격화」, 『조선일보』, 1986.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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