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말기 이른바 ‘사소설’계열의 작품들은 일찍이 연구자들에 의해 주목받아 왔다.258) 조선어 글쓰기의 공간이 극도로 좁아지고, 문학이 정치에 압도당하고 있는 시기 문단의 명망있는 작가의 내면의 흐름을 읽어 낼 수 있는 사소설들은 연구자들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소설'이라는 용어로 계속해서 이들 작품들을 지칭한다면 신변소설이라는 또 다른 소설의 범주와 혼합되어 논 의되기 쉽고 ‘나’와 ‘1인칭’이라는 소설적 형식으로 한정해 버릴 우려도 있어서 본고는 이러한 자기 지식적 소설을 ‘심경소설’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해 고찰해
257) 무주암주인,「文藝閑談- 소설과 시와」,『春秋』, 1942.5.
258) 일제말기 작가들의 '사소설'계열 작품들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들은 다음과 같은 논문들이 있 다.
방민호, 「채만식문학에 나타난 식민지적 현실 대응 양상」,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0.
진영복,「한국 근대소설과 사소설 양식」,『한국현대문학연구』15, 2000.
김흥기,「채만식 소설에 있어 ‘사소설’의 특성」,『한국문학이론과 비평』14, 2002.
방민호, 「일제말기 문학인들의 대일 협력 유형과 의미」, 한국현대문학연구 22 , 2007.
배개화,「‘문장’지 시절의 박태원 - 신체제 대응양상을 중심으로」,『우리말글』44, 2008.
보고자 한다.
‘사소설’이라는 개념에서 ‘심경소설’이라는 변별적인 개념을 끌어 들인 사람은 쿠메 마사오였다. 심경소설을 사소설로부터 구별하여 사소설보다 더 진보한 단 계에 있는 것이 심경소설이라 명명한 것259)이다. 그렇다면 사소설의 ‘진보한 모 습’이라는 심경소설은 어떠한 범주를 의미하는 것일까?
심경이란……일종의 ‘자세의 안정’이다. ……요컨대 입각지가 확실함을 뜻한 다. 그곳에서부터라면 어느 곳을 어떻게 보든 항상 틀림없이 자기일 수 있다.
마음의 거처인 셈이다.260)
259) 久米正雄, 創作指導講座,「「私」小説と「心境」小説」, 文芸講座7, 文芸春秋社;『近代文学 大系』6、角川 書店 , 1973.1.
260)心境を私小説と決定的に結びつけたのは久米正雄の「私小説と心境小説」(一九二五年)だっ た。久米によれば、心境小説とは「作者が対象を描写する際に、其の対象を如実に浮ばせるより も、いや、如実に浮ばせてもいいが、それと共に、平易に云へば其の時の『心持』六ヶ敷く`云へ ばそれを眺むる人生観的感想を、主として表はさうとした小説である」。久米が心境小説を第一 級の芸術と考える論拠は、芸術が別な人生の創造であるとは信じられず、せいぜい人生の再現で しかないという消極的理由と、芸術の基礎が「私」にあるという積極的理由からなる。平凡な人 生も記録するに足る。ただし、「『私』をコンデンスし、――融和し、濾過し、集中し、攪拌し、
そして渾然と再生せしめて、しかも誤りなき心境」を描いたものこそに芸術的な価値がある。
「心境とは、是を最も俗に解り易く云へば、一個の『腰据わり』である。それは人生観上から来 ても、乃至は昨今のプロレタリア文学の主張の如き、社会観から来てもいい。が、要するに立脚 地の確実さである。其処からなら、何処をどう見ようと、常に間違ひなく自分であり得る」。
(심경소설을 사소설과 결정적으로 결부한 것은 구메 마사오의「사소설과 심경소설」(1925년) 이었다. 쿠메에 의하면 심경소설이라는 것은「작자가 대상을 묘사할 때에 다른 대상을 여실히 드러나게 하는 것보다도, 아니, 여실히 드러나게 해도 괜찮지만, 그것과 동시에, 쉽게 말하자면 그때의「마음 」을 말하면 그것을 관조하는 인생관적 감상을 주로 하여 표현하려는 소설이 다.」쿠메가 심경소설을 제일급의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논거는 예술이 특별한 인생의 창조라고 는 믿을 수 없고, 겨우 인생의 재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극적 이유와 예술의 기초가 「나」에 게 있다고 하는 적극적 이유로부터이다. 평범한 인생도 기록하는 데에 족하다 .다만「 나」를 콘텐츠로 하고,――융화하고, 여과하고, 집중하고, 교반하고, 그리고 혼연히 재생하게 하고, 그러 나 자만없는 심경을 그린 것이야말로 예술적인 가치가 있다.
심경이란, 옮음을 가장 일반적으로 알기 쉽고 말한다면, 한 개인의「자세의 안정」이다 .그것 은 인생관으로부터 나와도, 내지는 요즈음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주장과 같이 사회관으로부터 나와도 좋다. 하지만 요컨대 입각지의 확실함이다. 그곳로부터라면, 어디를 어떻게 보려고 해 도, 항상 틀림없이 자신이다. (久米正雄,「私小説と心境小説」,『日本現代文学全集 菊池寛・久 米正雄集』講談社, 1967, pp.409-410.)
이 간단한 진술이 심경소설의 핵심을 드러내는 말이다. 쿠메 마사오가 심경 소설의 내부에서 보았던 것은 타인으로 화신한 작가의 허상(虛像)이 아니라, 살 아 숨쉬는 인간으로서의 인상이다. 작품 내부에서 숨쉬는 작가 자신의 윤리·감 각·감정·사상 등 이른바 전인격적 존재가 내뿜는 빛이었다. 그 강렬한 빛 속에 서 그는 ‘자세의 안정’과 ‘입각지의 확실함’을 보았던 것이다.261) 작가의 전 생 애를 ‘색인(索引)’으로 삼아 작품을 읽는 심경소설의 독법은 사소설과 동일하지 만, 심경소설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작가의 윤리성, ‘자세의 안정’과 ‘입각 지의 확실함’이라는 데서 사소설의 세계와 변별점을 찾았다. 따라서 쿠메 마사 오는 심경소설의 연원을 자연주의의 자기고백에서 찾는 사관을 거부하고 오히 려 시라카바파(白樺派) 작가의 흔들림 없는 자기긍정에서 찾고자 했다.262) 문학 의 윤리성을 말할 때 근대적 윤리란 주인담론의 붕괴와 더불어 시작된다. 절대 적 윤리의 내용물이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덕도 자기보존의 노력보 다 먼저 생각될 수는 없다”는 스피노자의 말처럼 윤리의 내용이 규정되어 있지 않다. '네 의지의 준칙이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 수립이라는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칸트의 명령은 내용없는 형식, 다시 말해 윤리적 형식주의 이다. 칸트의 윤리적 형식주의는, 이처럼 도덕법칙을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성과 분리시킨다. 다만 자신의 내면의 자율성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 유일한 원칙이 다. 다시 말해 공동체의 주어진 도덕률이 아니라 저마다의 입각점에서 자신의 윤리를 정립해야 하는 것이다.
주지하듯 일제말기 작가들은 신체제담론의 이데올로그가 되어 이른바 집단 적 주체로 거듭나야 할 상황에 직면했다. 차승기에 따르면 욕망의 내재화 --전 시체제에서 극적으로 드러나는 식민지/제국 체제의 미시정치학은 그 내부의 삶 과 욕망을 식민지/제국이 열어(=닫아) 놓은 생명-정치의 울타리 안으로 내재화 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식민지/제국의 생명-권력은 이 울타리 바깥을 죽음과 동일시하게 만들면서 욕망의 흐름을 식민지/제국 내부로 흡수하고자 했다. 이른 바 황민화 정책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일련의 조치들이 이러한 내재화를 추동시 키는 계기로서 기능했다고 할 수 있다.263). 일상을 영위해 나가야 할 일반인들
261) 미요시 유키오, 『일본문학의 근대와 반근대』, 소명출판, 2002, pp.245-24.
262) 미요시 유키오, 위의 책, p.243.
263) 차승기,「문학이라는 정치」,『현대문학의 연구』44, 2011.
이 ‘국민’으로 호출을 받고, ‘국민’이 견지해야 할 내면성을 요구받았을 때에 국 가적 호출을 거부한다면 그는 비국민이 되어 발가벗은 생명264)으로 추락할 것 이면, 문인 혹은 지식인이 '국민'의 호출을 거부한다는 것은 사회적 삶, 다시 말 해 사회적 무대에서 비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주체에 기투함으로써 주 체성을 세우려는 것을 꺼려한다면 역사적 전망을 확보할 수 없는 현실 속에 발 딛은 개인으로선 국가의 부름에 응대하지 않는 가장 적극적인 방식이란 결국 그것과 절연하기이다. 물론 대항하기라는 선택항이 있겠지만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다면 대주체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거리두기가 개인에게 가능한 최대치의 운신일 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어 떤 공동체에 속한 개인이 이를 실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본고가 심경소설이라는 개념265)을 차용하고자 한 것도 일제말기 ‘자기고백 적’ 글쓰기가 당시 작가가 처한 상황에 대한 소소한 묘사나 사건들을 통해 궁극 적으로는 ‘모랄의 견지’, ‘자기보존’이라는 자의식의 발로로서 '자기 지시적' 소 설들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소설의 형식인 ‘나’가 서술자로 등장하는 소 위 ‘1인칭 소설’ 266)이란 1930년대 이상, 박태원등의 심리주의 소설들도 지칭
264) 호모 사케르의 죽음은 아무런 종교적, 도덕적, 법적 의미도 없는 죽음이다. 그것은 곧 문명 화 이전의 죽음, 자연 상태에서의 죽음과 유사하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누구나 호모 사케르 가 아니었을까?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것이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의 삶 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호모 사케르는 문명화된 세계에서 추방되어 자연 상태로 내동댕이쳐 진 존재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호모 사케르가 된다는 것은 법적으로 구속되고 보호받는 삶에 서 아무런 보호도, 구속도 없는 자연적 삶, 즉‘벌거숭이 삶`la nudavita’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감벤은 추방을 통해‘벌거숭이 삶’이 만들어진다고 말한다(『호모 사케르』, p. 92 참조)
265)それでは、志賀が晩年に同じ題材を小説にしたとすれば、何が変わるのだろう。もちろん、作中 の「私」が母を亡くした子ども時代にもっていた心理は変わらないはずである。しかし、描き方 が違う。だからこそ、多くの私小説作家は同じ題材を何度も繰り返し描くのだ。心理と心境は異 なる。心理とは作中の人物のいずれももっているものであるのにたいして、心境とは作中の人物 をいかに「眺むる」か、造形するかという作者の視点なのである。
266) 장성규는「1930년대 후반기 소설 장르 인식 연구」(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12)에서 이태 준의 자전적 소설을 다음과 같이 고찰했다.
“1930년대 후반기 자전적 소설이 전통 서사 장르의 수용과 현재적 변용의 결과임을 살펴 보 았다. 이태준의 경우 『문장』지를 주재하며, '탁전' 장르의 서술적 특성을 중점적으로 수용한 다. 그 결과 자전적 소설 내에 조선 및 동양의 고전 텍스트를 삽입하여 스토리 이면의 주제의 식을 환기하는 장치로 활용한다. 그 결과 이들의 자전적 소설을 공동체에 대한 참회에 초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