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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박: 이론과 현실

제 2 절 부패, 발전정책의 조합 그리고 경제성장

과 금융혜택과 같은 이권들이 교환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정경유착 의 관계는 부패로 얼룩져 있었다.

포스코(POSCO) 역사박물관에는 당시 포항제철 건설을 도맡은 박태 준에게 박정희가 준 ‘종이 마패’36)가 있다. [그림 3-2]의 ‘종이 마패’를 방 패삼아 당시 설비구매 과정에서 공급업체에 상납과 리베이트를 받아내려 는 공무원이나 정치인들에 대항했다는 일화가 있다. 1964년 ‘철강공업종 합육성계획’에 따라 당시 대한중석의 사장이었던 박태준은 포항제철 건 설을 도맡았다. 1966년 대한국제제철차관단(Korean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 KISA)이 컨소시엄 형태로 설립되고 이들로부터 자금을 조 달받으려 했지만 차관자금은 부족했을뿐더러 미국과 세계은행(IBRD)의 소극적인 지원으로 난관에 처하게 된다. 이런 답답한 상황을 타개한 것 이 대일(對日) 청구권 자금이다. 이런 엄중한 상황 속에 박태준에게 밀어 닥친 정치인과 관료들의 외압으로부터 박정희의 친필 서명이 담긴 종이 마패는 그에 대한 박정희의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는 일화인 것이다. 문 제는 역설적이게도 이 종이마패의 존재가 그 당시의 부패실태를 고백하 고 있다는 점이다.

36) 박 사장은 만년필을 들어 ‘전문-목표-실천방법’ 순으로 자세하게 메모했다.

핵심은 “포철이 일본기술협력단과 협의하여 공급업체를 결정한다”는 것. “효 율성을 높이기 위해 간편 계약(수의 계약)을 하더라도 정부가 이를 보증해준 다”는 조항도 넣었다. 대통령은 메모를 읽고는 왼쪽 위 모서리에 친필서명을 했다. “이제 어려울 때마다 번거롭게 나를 찾아오지 말고 이걸 보여 주면서 소신대로 밀고 나가게.”

“[포스코 50년] 9.부실공사, 외압 원천봉쇄를 위해 ‘종이마패’까지 등장”.

http://www.kyongbuk.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024851 (검색일 2018.5.14.), [그림 3-2]도 동일 기사에서 인용.

[그림 3-2] 박태준에게 건네진 종이마패

다시 본래의 주제로 돌아가 보면, 신자유주의의 최소국가주의 주장을 반박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다음의 두 가지가 될 수 있다. 우선, 국가의 시장개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패수준이 낮은 사례를 찾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설령 국가의 시장개입으로 인해 부패가 있을지라도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 즉, 국가의 시장개입이 저성장의 원인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Fisman and Golden(2017)은 스칸디나비아의 국가들의 사례를 들어 국가가 다양한 규제를 통해 시장에 개입하지만 부 패 수준은 세계에서 가장 낮다고 설명한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는 시장에 ‘제대로 간섭하지 못하는’ 국가의 무능력함을 보여주 는 사례였다. 국가의 시장개입은 부패를 일으킨다는 것은 실증적으로 반 증 가능하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국가의 시장개입으로 인해 부패 발생 가능성이 높더라도 경제성장이 가능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본 연구는 박정희 시대 한국의 사례가 이를 보여줄 수 있는 적합한 사례라고 판단 한다. 2장에서 밝혔듯 자본, 투자, 소비를 적절히 통제하는 국가의 능력 이 부패와 성장을 양립가능하게 한 것이다. 박정희 시대 한국은 2장의 [그림 2-3]가 보여주는 민간투자와 정부투자 경로에서 모두 자유주의자 들의 주장과 달리 활발한 투자가 일어났다.

김상조(2003: 95-102)는 한국산업은행의『설비투자계획조사』의 자료 를 통해 한국 경제가 1960년대 중반 경공업의 수출산업화 시기와 1970년 대 중화학공업 건설시기를 거치며 제조 기업들의 설비투자가 양적, 질적 으로 대폭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1964년에서 1971년까지 12,686 억 원이었던 설비투자총액이 1973년에서 1979년 사이에는 총 186,380억 원 수준으로 10배 넘게 증가한다. 또한 1970년대에는 기존 설비의 확장 을 위한 투자가 생산력 증가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신제품 생산을 위 한 투자의 비중은 계속 증가한다. 10대 재벌 기업의 GDP 대비 부가가치 생산 비율은 1973년에 5.1%였던 것이 1978년에는 10.9%로 상승했으며 30대 재벌의 계열사는 1970년 126개 사에서 1979년 429개 사로 3배 이 상 급증한다. 1973-78년간 국내총생산은 연평균 9.9% 상승한데 비해 46 대 기업은 같은 기간 동안 연평균 22.8%나 성장할 수 있었다. 신생 기업 인 대우의 경우 연 53.7%씩 성장하기도 한다. 연구개발비 투자(정부, 민

간 모두 포함) 역시 1963년에 12억 원 수준이었던 것이 1977년에는 1,083억 원으로 급증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당시 기업들의 투자자금의 70% 가량이 외부에서 조달되었다는 것이다. 국가의 산업정책과 적극적 시장개입을 통한 금융지원이 있었기에 기업들은 투자자금을 조달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정부의 공공투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Kim & Leipziger(1993)의 연구에 따르면 1960년의 한국은 터키, 콜롬비아, 대만에 비해 사회간접자 본이 덜 구비되어 있는 상황이었지만 1960년대의 국내총투자(GDI)의 3 분의 1 이상이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투자되었다고 한다. 이는 1970년대 까지 지속되어 사회간접자본 투자비율은 말레이시아보다는 거의 2배 수 준에 달하고, 태국에 비해서는 50%나 높았음을 보여주며 전기, 도로, 철 도, 통신 시설 등이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조종화 외 2011: 88)의 2011년 연구보서에 따르면 영국과 미국의 정부지출의 경 제성장기여율이 정도가 2-3% 수준인 것에 반해 한국은 28.6%에 달한 다.37) 일본과 대만 역시 20%가 넘는데 이러한 특성은 정부주도 성장의 동아시아모델의 핵심적인 요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즉, 경제 성장과정에서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여 정부 관료의 강력한 추진력을 바 탕으로 중앙집권적 투자의사결정이 이루어지고 기업들은 이 결정을 충실 히 이행하는 방식의 정부주도의 경제발전전략의 운용에 따른 결과인 것 이다.

1960년대에서 1984년까지 한국은 항상 저축률보다 투자율이 높았다.

돈을 빌려서라도 투자를 해야 할 만큼 투자는 정체되지 않았다. 영국과 미국에 비해 한국은 약 6배 높은 수준으로 투자가 경제성장에 기여했다 (조종화 외 2011). 1인당 국민소득은 1961년 91.6 달러에서 1979년 1,746.7 달러로 증가했으며 경제성장률은 같은 기간 연평균 8.3%로 약

37) 실증분석은 1970년에서 2007년 동안의 연간 시계열 자료를 이용한 것이다.

10%에 달한 대만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다. 이를 통해 정부주도 산업 화의 대표 모델인 한국은 국가가 개입했기 때문에 민간 및 정부 투자가 부족했고 경제성장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설명할 수 없는 사례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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