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의 한국경제는 전쟁복구와 생산능력의 회복을 통해 자립적 경제구조를 수립하려는 목표를 가졌지만 만성적인 재정적자와 원조물자 의 불안정한 공급으로 인해 구조적인 어려움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승만 정부의 주된 경제성장 전략은 원조물자를 바탕으로 한 소비재 위주 수입 대체산업화였고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영역은 환율, 수출입, 원조, 정 부재산 불하 등 이었다(김일영 2001). 그러나 1957년을 기점으로 미국의 경제원조가 급속히 감소했고 1958년에 미국이 원조정책을 달러방위를 목 표로 전환하면서 환율 인상과 긴축정책이 요구됨에 따라 경기침체가 장 기화되었다(이명휘 2009: 95).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쿠데타의 목 적을 ‘혁명 공약’에서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①반공을 국시의 제일의(第 一 義 )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②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 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③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④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 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⑤민족의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⑥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 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그는 자신의 정권을 정당화하고 비합법적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승인을 얻고자 당시의 시급한 현안이었던 빈곤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어야 했다. 또한 경제개발 공약은 반공 의지를 강화시켜주는 작용을 해 비민주적체제에 대한 미국의 불신과 우려를 잠 재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불법적 수단이 경제발전이라는 목적을 위해 용인된 상황 속에서 어떻게 경제성장을 이룰 것인지의 문제를 해결 하는 것은 정권의 정당성과 지속성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이었다.
국가는 경제 성장의 대행자 내지는 주체로서의 기업을 요구하고 기업 역시 경제행위에 기본이 되는 각 종 인프라와 법률제도와 같은 공공재를 필요로 한다. 쿠데타 직후 부정축재자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조치는 양 가적인 효과를 냈다. 즉, 기업을 통제할 수 있는 국가의 우월한 힘 (power)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군부정권이 기업을 경제성장의 주된 주체 로서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부정축재자 처리 문제는 군부 쿠데 타의 체제이념과 형태, 전략, 그 선명성을 가름하는 예민한 체제적 사안 이었다(이병천 1999: 145).20) 장면 정부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 하에서 정
20) “한국 자본주의는 일제 이래 외래 식민주의자들의 이익추구를 보장했고, 해 방 후에는 관권과 결탁한 부정 축재자들을 위한 이윤추구를 방조하여 부패, 부정의 온상이 되었다”(박정희 1962: 130-131). 박정희 본인의 말이 무색하게 그 자신이 부정 축재자들을 미온적으로 처벌한 점은 주목할만하다.
경유착을 통해 부당하게 부를 축적해온 기업가들을 단죄하고자 했다. 삼 성(이병철), 삼호(정재호), 개풍(이정림), 대한(설경동), 금성(구인회), 동 양(이양구), 극동(남궁련) 등 1950년대 이후 급속히 성장한 재벌기업의 총수들이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었다. 정부는 1961년 4월 10일에 ‘부정축재 자처리법’을 제정하고 5월 17일까지 자수기간을 주는 등의 처벌 작업을 진행해가고 있었다. 이 와중에 5.16 쿠데타가 발생하였고 부정축재자에 대한 처리 문제는 박정희 군부에게 이양되었다.21) 불법적인 정권 창출과 정에서 과거청산의 문제는 체제정당성과 직결된 문제로 박정희 군부는 기업인들에 대해 강력한 처벌 의지를 보여주었다. 12명의 기업인들이 부 정축재자로 지목되었고 구속수감 되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부정축재자 처리위원회 이주일 위원장은 “부 정축재 기업인들에게 산업재건에 이바지할 기회를 제공키로 했다”며 석 방을 발표했다.22) 800억 환을 목표로 했던 최초의 환수액이 무색하게도 추징고지액은 부정축재위원회에서 부정축재액으로 발표한 726억 환의 5.8%인 83억 환에 불과했다. [표 3-1]은 부정축재환수액의 정정과정을 보여준다. 부정축재자 처리에 강경한 태도를 보였던 박정희 정부가 이토 록 급격하게 입장을 선회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1961년 7월에 발 족한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의 전신인 경제재건촉진회는 부정축 재 대자본가들은 외자교섭 능력과 자본 동원 능력을 갖추었기에 침체된 경기를 살리기 위해서는 기업인의 역할이 필수적으로 되살아나야 함을 주장했다. 즉, 부정축재자에 대한 처벌이 완화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전 경련 지도부는 ①벌과금 납부 대신에 그에 상당한 금액을 자신들이 제안 하는 공장(비료, 시멘트, 철강, 합성섬유, 혹은 정유공장)에 투자하겠으며,
21) “[이한구의 한국재벌사·34]대한유화-3 부정축재자로 몰리다”.
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20171113010003938 (검색일 2017.11.18.)
22) 21번 각주와 출처 동일.
(검색일 2017.11.18.)
②자신들은 해외 차관교섭에 나서겠다는 것, ③그 대신 정부는 금융지원 을 해달라는 것, 그리고 ④지어진 공장은 정부가 해당 기업가에게 원금 에 6%를 더한 가격으로 다시 팔 것23)을 군사정부에 제안했다.
[표 3-1] 부정축재 환수액 정정과정(단위: 백만 환)
출처: 김진현, “부정축재처리 전말서,” 『신동아』 (1964. 12), pp.158-177, 유호열(1996), p.94 에서 재인용.
군부정권과 전경련의 교섭결과 벌과금의 직접 납부 대신 공장을 건설 해 주식으로 대납하는 것을 골자로 부정축재처리법이 개정되었고 정부는 부정축재자에 대한 옹호 발언들이 쏟아냈다. 이후 부정축재자들은 제1차 경제개발계획24)의 주요 공장건설을 나눠 맡았고 집중적인 금융지원을 받았다. 공장 건설에 대한 부담은 예상보다 크지 않았는데 높은 인플레
23) “지배연합을 지배한 재벌”.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2405.html (검색일 2017.11.18.)
24) “1961년 7월 22일 경제기획원을 발족시키고 이듬해 1차 경제개발계획 5개년 계획을 내놓는다. 주요 목표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제발전을 위한 전력과 석탄 등의 주요 에너지원을 확보한다. 둘째, 시멘트, 비료, 정유를 만 드는 공장 등의 기간산업을 확충하고 사회간접자본을 충족시킨다. 셋째, 농업 생산력을 높여 농가의 소득을 올려 국민경제의 구조적 불균형을 시정한다.
넷째, 수출 진흥을 주축으로 국제수지를 개선한다. 다섯째, 과학기술을 진흥 하는 등 자립경제를 확립한다”(조희연 2007).
1차 결정 2차 결정 3차 결정
이병철 2,400 1,030 800
정재호 1,000 490 361
이정림 550 288 387
설경동 330 148 481
백남일 380 352 356
남궁련 250 40 128
이양구 170 83 316
김성곤 240 192 143
이션을 고려하지 않은 기존의 벌금액을 몇 년 후 현금이나 현물로 납부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또 성공적인 공장의 경우에는 개인 소유로 전환 시킬 수 있었으며 실패한 경우에는 또 다른 차관 사업을 추진하면 그만 이었다.25) 결국 이들 부정축재자들은 허정, 장면, 박정희 3대 정권 하에 서의 전 재산 몰수의 위기에서 벗어나 군부의 동반자로서 ‘근대화의 주 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부 보증과 후취 담보 제공 형 태로 외자를 도입할 수 있는 특권을 군부에 요구해 받아내기도 했다(이 병천 2002). 혁명군 특별수사대가 기업인들을 연행하고 구속하는 과정은 국가의 대자본에 대한 우월성과 강한 통제력을 보여주는 제스처와 같았 지만 그 실상은 대자본의 회유와 흥정 속에서 국가-기업 간 타협이 이 루어진 것이었다.
부정축재자처리를 통해 내자를 동원하고자 했던 본래의 목표를 달성 하지 못한 박정희는 다른 방식으로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한다. 예금동결 조치를 통해 정권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음성자금을 동결해 경제개발 계획에 소요되는 자금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 시행된 통화개혁 은 기존의 화폐 단위인 ‘환’을 ‘원’으로 바꾸고 10환을 1원으로 교환했다.
화폐 단위를 바꾸어 버리면 새 화폐를 얻기 위해서 장롱 속에 묻혀 사용 되지 않고 있는 돈이 억지로라도 시장에 나올 것이고 그 돈을 바꿔주면 서 산업개발공사라는 장기투자재원관리회사의 주식으로 전환해 경제개발 에 이용하려는 목적이었다.26) 1962년 6월 9일 밤 0시에 전격적으로 단행 된 화폐개혁은 한국은행 총재나 경제기획원27) 장관조차 모르게 극비리
25) “지배연합을 지배한 재벌”.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2405.html (검색일 2017.11.18.)
26)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http://nlcollection.nl.go.kr/front/detail/detail.do?rec_key=CO0000076788&categor y_id=CA0000000035 (검색일 2018.5.15.)
27) 1961년 설치된 경제기획원은 이름 그대로 경제개발계획을 기획하는 역할을 했지만 이들의 실질적인 정책집행 능력은 예산 및 결산에 대한 권한을 갖는
에 진행되었다. 그러나 원조국가인 미국은 자신들의 동의 없이 화폐개혁 을 단행한 것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였고 예치기간이 1년 미만인 예금의 일부마저 동결한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매점매 석, 물가폭등, 기업 자금난 등의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했다(김일영 2001: 105). 이 조치는 화폐단위를 10분의 1로 절하하는 효과만을 가져왔 을 뿐 계획한 내자동원은 달성하지 못했다. 결국 7월 13일에는 봉쇄시켰 던 98억 원에 달하는 예금을 전면 해제하고 1962년 12월 17일 공식기자 회견을 통해 박정희는 화폐개혁이 확실히 실패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 었다(조희연 2007: 40-41).
내자동원과 관련해 박정희 정권이 직면한 다른 문제는 시중은행에 대 한 소수 재벌의 과도한 지배 문제였다. 본래 시중은행은 미군정으로부터 귀속재산을 불하받아 정부가 그 주식의 70%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4-57년에 이루어진 수차례에 걸친 주식공매를 통해 1957년이 되면 시중은행이 소수 재벌의 사금고로 전락했다(김일영 2001: 105-6).
자금공급원을 확보하는 것이 정권의 생존 차원에서 중심적인 문제로 대 두되자 민간은행에 대한 통제력을 국가가 소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61년 6월에 제정된 ‘금융기관에 대한 임시조치법’은 시중은행 주식의 10% 이상을 소유한 민간 대주주의 의결권 행사를 제한하고 은행감독원 장의 금융기관 선임권을 규정했으며 대주주 주식의 양도 및 질권 사용을 금지한 조치였다. 대주주의 인사권을 부정하는 이러한 조치로 정부는 민 간 시중은행의 인사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배영목 2012: 8-9). 은행 법을 개정해 국책은행인 한국은행과 산업은행뿐만 아니라 시중은행을 실 질적으로 국유화시키는 조치 역시 이루어졌다.
자금조달과 관련해 1960년대 이후 한국 기업이 성장하게 된 여러 요 인 중 하나는 한마디로 말해 ‘금융특혜’이다. 정부가 금융자원을 배분할
데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