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절에서 본고는 앞선 논의들을 경유하며 살펴본 바, 권미원이 동시대 장소 특정적 미술을 새롭게 사유하기 위해 제시했던 ‘잘못된 장소’, ‘일시
113) Moira Gatens & Genevieve Lloyd (1999), Collective imaginings:
Spinoza, past and present, Routledge, p. 80.
적 귀속’, ‘관계적 특정성’ 개념이 매시의 장소론으로 보완된다면, 권미원 이 본래 의도했던 바, 동시대 장소 특정적 미술의 이론적 기반이 마련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특히 본고는 그 한 가지 제안으로 ‘관계적 장 소 특정성’ 개념을 제시하고자 한다. 권미원이 동시대 장소 특정적 미술 의 지향점으로 제시한 ‘관계적 특정성’ 개념을 매시의 ‘관계적 장소’와
‘외부지향적으로 상호의존적인 장소의 특정성’ 논의로 보완함으로써 마련 되는 ‘관계적 장소 특정성’은 외부지향적인 유동성 속에서 ‘생성되는’ 장 소의 특정성을 지향하는 개념이다. 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장소 특정성, 지역 정체성을 탐구하는 동시대 미술 실천을 이해하고 지지할 수 있는 유효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한편, 권미원은 ‘잘못된 장소’의 논의를 희곡
<발파라이소>로 예시하며 이것이 미술 프로젝트였다면 장소 특정성에 대한 뛰어난 작품이었을 거라고 높게 평가했지만, 정작 오늘날의 장소 특정적 미술이 참고할 미술 실천의 예는 제시하지 않았다.(OPAA, 163) 이에 마지막으로 본고는 본고의 제안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크리스토, 잔 클로드와 제레미 델러의 작품을 사례로 ‘관계적 장소 특정성’을 동시대 미술 실천에 적용한 비평 모델을 제시해볼 것이다.
이제 다시 장소 특정적 미술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자. 앞서 살펴본 바, 권미원은 오늘날의 장소 특정적 실천이 미술과 장소의 관계를 규명 하고, 장소에서 존재하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보았다. 이에 권미원은 ‘잘못된 장소’와 그것이 예시하는 ‘일시적 귀속’, 그리고 ‘관계적 특정성’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장소를 탐구하는 동시대 미술에서 고려해야하는 세 가지 측면으로 새로운 장소 인식의 모델, 장 소와 관계하는 귀속의 모델, 그리하여 지향할 수 있는 장소 특유의 가치 의 모델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권미원의 개념들은 결과적으로 오늘 날의 장소 특정적 실천들이 유동성과 함께 지속되는 장소의 특정성을 지 향해야한다는 유의미한 방향은 제시했지만,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방법, 즉 유동성 가운데 특정성이 성립되는 방법에 대한 규명이라는 가장 핵심 적인 설명을 누락함으로써 구체성이 떨어지는 선언적인 주장에 그치고 말았다. 때문에 이 개념들은 그들이 고안된 본래 의도에도 불구하고 장
소 특정성이나 지역 정체성을 추구하는 것을 철지난 퇴행이나 정치적 반 동으로 평가절하는 회의적인 경향으로부터 이러한 동시대 미술 실천들을 정당화해 줄 수 있는 이론적 도구로 기능하지 못했다. 하지만 매시의 논 의에 따라, 장소의 특정성이 외부와의 역동적인 관계를 통해 구성되는 것으로서 필연적으로 외향적이고 상호 의존적인 것으로 규명된다면, 그 리하여 장소의 특정성이 그 반동성의 원인으로 비판받아온 기존의 폐쇄 적인 특정성 규명의 방식, 즉 외부로부터의 경계 짓기와 고립된 공통 항 목을 매개로 한 동일시의 방식 없이도 충분히 해명될 수 있다면, 이러한 매시의 논의로 보완된 권미원의 개념들은 장소를 탐구하는 동시대 미술 실천들을 지지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따라 논의를 정리해보자. 오늘날 장소의 문제를 탐구 하는 미술 실천은 첫째, ‘잘못된 장소’의 교훈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114)
114) “‘제자리가 아닌 곳에’ 있는 것에 대한 사회적, 문화적 경험을 고려할 때, 어떻게 이러한 존재의 상태가 이런 상황을 다루는 작품 혹은 전시기획 활 동의 과정과 최종적인 형태에 반영될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클레어 도허 티는 권미원의 ‘잘못된 장소’ 개념에 기반한 ‘잘못된 장소감’(a sense of the wrong place)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Claire Doherty (2008), “Public Art as Situation: Towards an Aesthetics of the Wrong Place in Contemporary Art Practice and Commissioning”, Out of the Studio! Art and Public Space, Z33, pp. 10-11. 또한 도허티는 권미원의 논의를 참고 하여 이처럼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미술 실천들을 기존의 장소 특정성과 구별되는 ‘장소에 위치한 실천’(the situated practices)으로 이론화하고자 한다. 이는 첫째 유동적인 장소 인식, 둘째 사회적인 것과 관계에 대한 추 구, 셋째 창조적인 중재자, 활동가로 재정의된 미술가의 역할과 특정 지역 공동체와 장기간 협업하는 형태의 작품 제작 방식이라는 핵심적인 요인들 의 결합으로 제시된다. “첫째로, 권미원이 말한 것처럼, 만약 “내가 잘못된 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feeling out of place)이 후기 자본주의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대한 문화적 징후라면”, ‘장소에 위치’하게 되는 것은 실질 적으로 기각된다. 이런 이유로, 이 책에서 논의되는 미술 작품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장소를 가변적이고(shifting) 파편화된 개체로서 인정하는 유동적인 상태(state of flux)로서 경험에 대한 강조이다. 둘째로, 니콜라 부리요(Nicolas Bourriaud)가 그의 “관계 미학에 관한 베를린에서의 편 지”(Berlin Letter about Relational Aesthetics)에서 말한 것처럼, [최근 미 술에서] 새로운 어휘가 등장했는데. 그것은 “미니멀 아트와 유사하고 사회 적인 것(the socius)을 기반으로 한다.” 부리요는 관계 미학이 소외, 즉 새 로운 “네트워크 사회”를 특징짓는 노동의 분업과 공간의 상품화를 피하기
말하자면, ‘올바른 장소’나 ‘잘못된 장소’의 경험은 장소 자체의 선험적 특질이 아닌 장소와의 관계를 통해 인식되는 것임을 고려하고, 자신이 있는 장소에 속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잘못된 장소’의 경험이 갖는 전복 적 효과를 사유함으로써 본질주의적인 장소 결합적 정체성에 대한 믿음 을 해제한다. 또한 장소는 외부로부터의 폐쇄나 경계 짓기 같은 내부지 향적인 방식이 아닌, 수많은 사회적 관계의 교섭과 절합을 통해 구성되 는 것임을 인지함으로써 ‘장소 귀속’과 정착주의의 한계를 극복한다. 그 런데 이런 ‘잘못된 장소’의 교훈을 고려한다는 것은 단순히 장소에서 길 을 잃는 것 혹은 끊임없는 이동이나 우연성을 추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둘째, ‘일시적 귀속’의 방식으로 장소와 관계해야 할 것이다. 이는 특 정한 위치에 전적으로 귀속되지 않으면서 장소와 관계하는 방식으로, 장 소와 유동적으로 관계함으로써 고정되지 않은 다중적인 정체성과 의미의 생산의 잠재적 가능성을 추구한다. 동시에 이는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또 한 귀속의 방식으로서, 장소와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특정성의 차원과 도 관계함으로써 ‘장소 상실’과 유목주의의 한계를 극복한다. 여기서 장 소의 특정성은 외부로부터의 폐쇄, 대비가 아니라 장소의 외부가 장소의 축적된 역사와 관계함으로써 만들어진 혼합의 독특함으로 보장되는 것으 로, 외부와의 유동적인 결합을 통해 생성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일시적 귀속’의 방식으로 장소와 관계하는 미술 실천은 장소에 존재하는 역사, 문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특정성과 불균등한 조건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이들과 상호작용을 시도한다. 또한 수많은 사회적 관계가 교차 하는 장소에서 마주하는 갈등과 우연성, 비규정성을 교섭하고 이에 도전 하는데 방점을 둔다. 특히, 지역에서 ‘일시적 귀속’을 통해 공동체와 협업 하는 실천들은 동일성에 기반한 공동체의 성립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가 운데, 동일한 장소 정체성이나 물리적 인접함으로 상정되는 친밀함이 아 위해 작동한다고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문화적 실천이 도시 재생의 주요 구성요소로 인식됨에 따라, 미술가의 역할 역시 중재자, 창조적인 사상가, 선동가로서 재정의 되며, 이는 미술가와 특정한 그룹의 사람들, 디자인 과 정 혹은 상황(situation)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장기간의 개입을 위한 기회 들의 증가를 이끈다.” Claire Doherty (ed.) (2004), Contemporary Art From Studio to Situation, Black Dog Publishing, pp. 10-11.
닌 동일성의 부재, 거리감과 시공간적 ‘단절에 기반한 친밀함’을 바탕으 로 협업한다.(OPAA, 9)
셋째, 장소를 탐구하는 동시대 미술 실천들이 지향할 수 있는 장소 특 정성의 한 가지 모델은 ‘관계적 장소 특정성’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잘못된 장소’와 ‘일시적 귀속’에 비해, ‘관계적 특정성’ 개념은 그것이 동 시대 장소 특정적 미술의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논의의 양 자체가 적어 그 실체가 모호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본고 는 권미원의 ‘관계적 특정성’ 개념을 매시의 ‘관계적 장소’와 ‘외부지향적 으로 상호의존적인 장소의 특정’ 논의로 구체화하여 보완한 ‘관계적 장소 특정성’ 개념을 동시대 장소 특정적 미술의 지향점으로 제안하고자 한다.
본고가 제안하는 ‘관계적 장소 특정성’은 유동성과 특정성의 관계를 설정 하는 부분에서 ‘관계적 특정성’과 결정적인 차이를 갖는다. ‘관계적 특정 성’이 우리가 장소에서 마주하는 유동성과 특정성이라는 장소 경험의 양 극단을 함께 ‘지속되는’ 관계로 포괄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데 집중했다 면,(OPAA, 166) ‘관계적 장소 특정성’은 이들을 단순히 함께 공존하는 관계로 이해하는 것에서 나아가 양자를 보다 필수불가결하게 상호의존적 인 관계로 제시하면서 장소의 특정성이 유동성을 통해 ‘생성되는’ 차원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관계적 장소 특정성’을 띠거나 지향하는 실천들은 무엇보다 장소의 외부 자체가 장소를 구성하는 일부이기에 장소는 외부 와 맺는 유동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그 특정성을 구성해 낼 수 있다는 인 식에 기반하여 장소의 기존 역사, 문화 사람들과 관계한다. 또한 이는 장 소의 특정성이란 관계와 교섭을 통해 끊임없이 구축되는 것이므로 이를 비판적으로 재구축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면서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 로 장소의 특정성을 생성하고자 시도하는 미술의 실천적 경향을 뜻한다.
기존 장소와의 새로운 관계를 통해 장소의 우연성과 그 정치적 함의 를 탐구하고 그에 대한 비판적 감각을 생성하고자 한다는 의미에서, ‘관 계적 장소 특정성’을 탐구하는 실천들은 그 역사적 선례인 상황주의 인 터내셔널(I.S.: Internationale situationniste)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을 이끌었던 기 드보르(Guy Debord)에 따르면, 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