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원론 5강
2013년 4월 4일 목요일 오후 1:58
발제자 입장에서 질문은?
발제자: 사실문제와 권리문제가 어떤 의미인지… 이거 자체가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어요.
들어가는 말에서 보시면- 종교철학이 종교적 현상에… 에서 권리문제라고 했는데. 조금 이해가 안 갔습니다.
5페이지 종교와 예술에서- 범신론적 경향이 심미주의적인 경향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질문하고 싶습니다.
교) 두 개는 개념을 위한 질문이고. 토론을 위한 질문은? 그건 물론 발제자만 책임질 꺼는 아 니니까.
발) 어…
교) 먼저 던진 질문. 어휘죠.
사실문제- 권리문제. 여기 권리는 정의, 가치 같은 뜻이에요. 사실 vs 당위(규범). 그런 뜻으로 새기면 됩니다. 그런 것들은 종교현상학, 종교사회학 등 벌어지는 현상이야. 종교현상학이라는 것 이, 여기 헤센이 쓰는 현상학과 같기도 다르기도 한 의미의 현상학이 있어요. 넓은 의미의 현상 학과 좁은 의미의 현상학. 그 안에 종교현상학. 200년 전 종교학이 시작하면서 탄생한 것은 비 교종교학이에요. 하지만 비교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할 것 아니야. 외적인 기준이 가능하다는, 문 화제국주의적인 발상. 그래서 종교학의 태동 자체가, 문화사적인 동기에서 불순했어요. 기독교가 긴긴 세월 동안 홀로 충분했는데. 중세를 지배했잖아요. 근데 다른 종교를 만났잖아. 다른 종교와 의 만남 가운데 어떻게 관계를 지을 거냐- 17세기에서는 당연히 15-16세기까지의 태도를 견지 하는 거였어요. 다른 거를 만나도, 기독교밖에 없다고 했어요. Christianity만 있어요. 그래서 one and only true religion. 그런데 이러면 종교학이 필요 없어요. 굳이 기독교를 종교라고 부를 필요가 없잖아. 신앙만 말해도 되잖아. 신앙과 이성의 관계만 말하면 되지, 밖에서 종교의 범주를 보고 여러 종교 중의 하나로 볼 필요가 없는 거야. 하지만 중세도 시작은 그랬어. 18세기 가 되면서 달라져. 자연과학의 발전, 그리고 산업혁명으로 대중화가 돼. 계몽주의가 뭐야. 16세 기 비춰지기 시작한- 중세의 암흑에서 벗어나(근세의 눈으로 보면- 현대는 그렇게 보지 않아).
과학자만 하던 것을 18세기에서는 대중도 해. 빛을 비춰줘. 그러니 enlightment야. 물적 토대가 되니 정신적 토대도 돼. 그러다보니, 16세기까지의 고전적인 패턴을 재천명한 것이 확 달라지기 도 하고, 다른 동네의 사람들도 존엄하게 인간답게 살아갔다는 거야. 다른 것 다 틀렸다고 할 수 없어. 그 대신에 나온 것이- 우리가 가장 우월해. 가장 옳아. 그래서 비교가 나와. Superiality의 top이 돼야. Highest religion. 다른 종교들은 옛날에 종교도 아니고, 틀렸다가, 낮은 단계로 인 정해주는 거야. 그러다 20세기 넘어와서는? 19세기 중엽- 어떻게 돼? 다른 종교들을 열등한 것 으로만 보기에는- 그건 기독교의 잣대야. 이렀을 때 종교학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거야. 기독교 안에서의 논리로만 highest로 끌고 가지 말고, 밖에서도 설득력이 있도록, 최고 단계의 종교라는 것을 해보자. 아니면, 아닐 수도 있어. 좌파 우파가 동시다발적으로 나오면서 종교학이 나왔어.
그러니 기독교 내부의 고런 전략과도 맞물려 있었어. 그리 시작하니 종교 자체- 추상적 개념적 정의의 종교가 종교학이라면- 그 다음 단계- 본래의 목적을 위한 작업가설적인 단계지. 그 다음
단계가 비교종교학이야. 외형적으로는 절대적인 기준을 세우고 이만 저만 하겠다, 등거리적인 접 근을 하겠다- 하지만 결국은 어떻게 돼요. 비교종교학은- 사실의 문제로 각 종교들 사이에 비교 평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숨겨진 전략은 여전히 highest religion의 전략을 품은 동네 도, 그것도 포기해야한다는 동네도 있었고. 그게 한 150-200년 전이에요. 현대의 시작과 함께 시작된 일이야. 객관적으로 봐도 여전히 최고다 라고 말하려는 애들도 포함해서, 객관성을 추구 했는데- 어불성설이라는 것이 드러나죠. 실증주의와 함께 좀 득세했는데. 가치중립으로 접근해서, 검증과 반증이 가능하다… 하지만 가치중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나왔죠. 인문과학 사회과학에서 비판과 함께 논란이 되었죠. 실증주의와 대립각을 세우는 삶이다 실존이다 현상이다가 부각되면 서- 등거리적 객관성의 종교학이 아니라, 각 종교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현상학으로 전환해야 한 다. 같은 위상에 있으면서 비교종교학과 종교현상학은 달라요. 등거리적인 객관성과 고유성의 인 정. 전자는 객관성이 가능하다, 후자는 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전자는 문화제국주의를 따라갔어.
결국 기독교가 기준이 됐어. 하나의 입장으로 평정하는 방식으로 제국주의가 되었지. 종교현상학 은 문화상대주의로 입장을 전환, 종교현상학이 부각이 되는 거야. 이런 것만 해도, 아직까지 사실 문제에요. 비교종교학은 가상적으로라도 설정했다면, 후자는 비교하는 reference가 달라야 해.
현상이 무가치하지 않아. 거기서 다 나와. 사실이라는 내용을 담는 현상에서 시작하는 거야. 사태 자체로 돌아가자. 그런 것들이 이제. 종교학의 기본 몸통이 되는 거야. 그 다음에 종교학이 기존 학문과 관계를 가지니까 종교철학 종교심리학 종교사회학도 나오는 거야. 근데 심리학과 사회학 의 방법론이 대조적이야. 종교학 안에 지류로서 random choice로 나오는 게 아니고. 미시적이 고 개체적인 접근은 심리학이, 전체주의적인 접근은 사회학이 할꺼야. 현상 사건 경험 행위, 둘 다 이거로 해. 뭉뚱그려서 사실이라고 할 수 있어. Sache. 다 그래. 근데 종교철학은 아니다! 라 는 거야. 가치, 당위, 규범의 문제다. 종교철학은 현상, 사실을 다루는 것이 아니야. 현상 사건 경험 행위를 직접 다루는 것이 아니야. 일련의 연쇄고리를 아우르는! 그런 것들이 내용, 준거가 되겠지. 아우르는 의미를 다루는 거야. 의미. 여기서 키워드는 의미입니다. 그 의미 때문에 종교 와 다른 연관된 장르를 두고 이 편 저 편을 봐. 구별과 연관, 연관과 구별이야. 그 상반된 관계 의 방식으로 보려는 것은 의미야. 권리 문제는 너무 문자적인 해석이고. 가치. 그렇게 새기면 돼 죠. 범신론 신비주의는 큰 맥락에서 이야기하게 될 꺼고. 계보상으는 그렇게 되겠죠. 이건 단어만 이 아니라, 맥락을 훑어야 하고. 그때 안 하면 이야기해주고.
초점을 이렇게 맞춰봅시다. 제가 시작하면서 했지만- 원전이 아닌, 개론서를 보는 유일한 과목 이에요. 2차 문헌이야. 왜? 2차 문헌- 책 읽는 부담을 조금 줄여도, 큰 틀을 잡아보자. 문장을 살피는 밀도 있는 작업은 원전을 잡고 할 꺼에요. 칸트 헤겔 살필꺼야. 첫 과목은 개괄이야. 개 괄에서는- 작은 얘기보다- 가능하면 큰 틀에서 봐요. 여기서는 헤센과 함께 살필 수 있는 것은- 여기서는 자립성으로, 저는 고유성으로 풀었지만. 종교라는 것이, 삶에서 밀접한 이런 저런 영역 과 관계가 있겠지만- 해소, 축소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을 텐데, 무엇일까. 여기서 기독교는 바로 초월 같은 고유적인 언어로 주장하겠지만. 그렇게 하고 끝나면 거기서 끝나는 거야. 그런데 그러면? 삶과 현실, 문화하고 따로 노는 거야. 물리적으로는 같은 공간이야. 하지만 실제로는 따 로 놀아. 교회 언어는 교회 문 밖으로 가면 바로 안 써. 언어는 그냥 도구가 아니잖아. 생각 먼 저 하고 언어를 취한다- 언어에 대한 도구적인 관점이거든? 근세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린드벡 같은 양반. 교리의 본성에서 예리하게 분석하는데. 중세에서는 명제로, 주술 확언하게 진술되는 거라고 생각했어. 신앙은 다 주술 관계로 정리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 명제적인 신앙이지. 교리 가 명제적. 근데 근세로 넘어가면? 인간이 주체로 등장했어. 고중세 시대는 신에 관한 명제가 깔 끔하게 정리되었지. 그러니 교리고. 근세는 인간이 주체가 돼. 그러면 주체가 내지르지. 그래서
고백의 언어에요. 어떤 방식이 되느냐? 고백의 내용이 어떤 언어를 취하기 전에- 주술구조의 명 제적인 방식으로 정리되기 전에- 고백의 내용이 먼저 있고, 후에 이런 저런 일상 언어를 취하여 서 도구로 사용해서 표현한다. 언어는 철저히 도구에요. 사고 언어 이전의 경험, 고백. 그게 가능 하다고 봤어. 인간론이 그래. 언어는 도구야. 그래서 언어 안 써도 사고가 가능해. 다만 언어로 그렇게 표현해. 하지만 현대로 오면 달라져. 언어가 없어도 이런 저런 걸 할 수 있는- 후천적으 로, 부차적으로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라! 언어가 정신을, 인간을 직조한다! 도구가 없어도 인간은 정신활동을 하고 삶을 살아가는 것- 다른 도구면 되잖아. 하지만 현대는 도구가 아니라, 구성의 틀이에요. 언어가 그렇다는 것은 칸트에서도 그래요. 칸트와 하이데거 비교하면 딱이에요. 칸트가 아무리 선험적이라고 해도- 언어에 적용하면 그렇지. 근데 하이데거는 뭐야. 그렇게 되면서 린드 벡은- 그의 버전을 그대로 따르자면- 경험을 먼저하고, 언어로 표현한다. 경험이 먼저 있고, 그 걸 언어로 표현한다.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중요한 모드가 되는 것은, 경험의 본체가 먼 저 주체로 깔려 있는 거야. 주체, 인간중심주의적인 주체지. 그러니 근대성의 주체. 그러나 현대 는 더 이상 그런 주체가 아니죠. 더 이상 반복할 필요 없습니다. 근대 주체는 앎의 주체입니다.
앎은? 모름을 없애는 것이 지상목표야. 모름을 줄이고 줄여서 없애는 것이 목표야. 모름의 영역 은 불안, 공포야. 그걸 없애는 것이 앎이야. 결국 인간의 자구적 노력의 발악이야. 앎이라는 것이 그런 거야. 불안하지. 모르면 이름이라도 붙여. 아는 것처럼 착각이라도 해. 인간이 자기기만을 하는 매커니즘이야. 근대인간이 세운 언어관이었어. 하지만 현대는 삶의 주체야. 앎에서는 앎과 모름이 반대말이지만, 삶에서는 반대말이 아니야. 앎에서는 a와 not a가 반대말이지만, 삶에서는 아니야. 삶에서는 삶과 죽음은 반대말이 아니야. 함께 가는 말이야. 얽혀져 있어. 잘 얽혀지는 것 이 삶을 더 잘 영위하는 길이야. 개념적으로는 반대지만. 삶과 죽음의 관계가 그래. 삶은 죽음을 지배할 수 없어. 한대 같이 가야해. 옛날처럼 하나를 없앨 수 없어. 탈중심주의가 아니야. 여기서 언어는 도구가 아니야. 나를 직조해. 나를 엮어내는 것을 먼저 펼쳐내는 거야. 시공간이 먼저 펼 쳐져 있는 거야. 유구한 역사를- 우리의 DNA 속에 각인 되어있는 현실에 우리가 내던져진 거 야. 그렇게 살도록 저주된거야. 삶은 그런 거지. 그런 삶의 존재에서는, 그렇게 직조된 게 문화, 언어거든? 삶에서는 언어가 부분이 아니라 전체에요. 그물망이야. 언어문화 같은 거예요. 단순 도 구가 아니라. 그 맥락에서 문화를 보라고. 종교와 문화를. 누구지? 리챠드 니버가 여러 가지로 막 해봤는데- 참고해볼만하고, 그건 신학적인 버전이고. 여기서는 종교적인 거지. 이게 우리의 이 야기의 출발점이지. 개론적이고. 결론적인 종교와 문화의 관계. 마지막에 배치될 수밖에 없어. 이 따 뒷부분에 가서 정리하면서 설명을 할께요. 어쨌거나 되돌아가면, 종교와 문화. 1부의 이야기 를- 종교를 믿음이라고 한다면, 문화를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삶이야. 너무 따로 놀 잖아. 그런 현실. 직접적으로 겪고 있는 현실을 놓고- 이런 원론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어떻게 진단하고, 처방할 것이냐. 믿음과 삶의 괴리. 거리가 괴리가 되는 거지.
광우) 고유성을 마련 한 것이 오히려 분리를 가져오는 것은 아닌가요? 초월성을 강하게 얘기하 고 있는데. 기본적인 입장인- 성스러움의 체험에서 가까움을 극대화하고- 예술 도덕 철학을 발전 시켰는데. 헤센의 이런 논리- 그러면 종교의 내재성은 기본적인 것이 아닌가? 철학 안의 종교성 을 말할 수는 없는가? 굳이 종교와 철학을 나눠놓고 이야기하면 또 분리되는 거죠. 종교와 조금 떨어뜨리고 철학을 썼는데, 이거 주목해야 한다고 봐야 해요. 컴퓨터는 붙여도 빨간 줄 안 그어 지는데. 종교와 문화에서도. 문화와의 관계성- 오히려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더라고 요. 종교를 문화를 교정해주고 깊이와 근거를 주고… 종교가 크고 문화가 작은 것 같은 구도가 되는 거죠. 일상생활의 종교를 특성을 얘기하기보다는 따로 떨어뜨리는 것 아닌가. 이런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뭔가. 성스러움의 체험과 일상생활의 체험을 동시에 말할 수 있는 것은….
#) 그래서 우리가 성미성진 하는데, 여기는 진선미성으로 가잖아요.
광우) 헤센은 이렇게 보지 안잖아요. 태극처럼 융합되는 경우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철학의 종교성. 윤리의 종교성… 이런 식으로 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발제) 어떤 사람들은 철학 안으로 종교를 해소시키려고 하고. 이런 논거들을 얘기하잖아요. 종 교의 내재성이라는 부분. 그런 교차적인 부분에 있어서 사실인식을 한 상태에서, 종교 자체의 입 지는 어디냐?
광우) 동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성서에서 고백하는 하나님은 초월&내재의 하나님인데. 그러면 초월이 기본이고, 내재는 그냥 발현인가? 기본 성질이 빠지는 건가? 우리는 섞여버린다고 생각을 한다고 하지만, 내재성은 빠지나요? 그러면 동치가 아니죠. 가능하다고 생 각해요.
발제) 그건 순수 기독교 입장이 아닌가요? 초월&내재…
광우) 다른 동네도 그래요. 초월과 내재가 있죠. 함께하는 것이 설명이 안 된다는 거죠.
교) 그래서 지난 시간 말한 것처럼- 단순히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 내재의 분류하는 것.
사실 겹쳐진다는 거지. 그런 얘기를 하기는 하는데.
하여튼. 초점은 이렇게 두고 봅시다.
우린 이 텍스트가 교본도 아니고요, 따라야 할 준칙도 아니고요. 오히려- 어떤 텍스트든지, 어 떤 자료든지 검토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죠. 물론, 그런 비판이 의미가 있죠. 그렇다면- 문 화를 이루는 각 영역. 구체적인 장르, 총체적인 범위로서 문화와 종교. 이미 뻔한 답일 수 있지 만, 뻔한 답이 의미롭게, 정말 삶의 현실에 의미롭게 연관될 수 있는 방식. 그러면서 흡수통합되 지 아니하고. 열심히 견지하려고 했지만, 어느 정도 과도하게 한 쪽으로 강조한 측면은 있지만, 어떻게 보완수정할 수 있을까. 함께 생각할 수 있겠죠.
오늘이야 말로. 제가- 그 뭐죠? 시작하는 거잖아. 스미스 책은 간보기로. 하여간. 종교라는 문 제를 다루기 위해 최소한 이 정도 생각은 하고 들어갑시다. 개념화의 역사와 현재 쓰여지고 놓여 진 자리. 그런 취지로 본 것이고. 이제 좀 본격적으로, 종교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써 시작하는 건데. 더 개론적인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성미선진도 이 맥락에 맞춰서 보완적인 것이 필 요하다고 생각해요.
$) 근데요. 철학-도덕-예술-문화를 뒀잖아요. 앞에서는 어쨌든 동일성 차이성 다 했고, 상호보 완관계다 라고 얘기했는데. 문화를 여기다가 삽입한 것은- 삶을 더 보기 위해서가 아닌가. 삶으 로서의 종교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다른 것을 아우르는 의미가 있고. 그리고 기독교가 문화에 적대적이었던 것이 나와요. 종교는 원래 삶이고, 문화에 적대적이면 안 되죠. 그런데 기독 교는 그러지 못했죠. 그래서 종교철학의 나아가는 길을 제시한 것이 아닌가. 저에게는 이런 의미 가 있어요.
교) 그렇지. 분명히 철학도덕예술과 문화는 달라요. 층위가. 문화는 삶의 전 범주를 일컫는 말 이 될 것이고. 앞에 것은 일면이 될 것입니다.
%) 일면인데. 단순한 느낌이 들었는데. 어- 믿음을 갖게 되면- 철학적으로 엄청 공부하지 않아 도, 그렇지 않아도- 믿음을 갖게 되었을 때. 다른 것의 가장 높은 부분이- 만나는 것이 너무 좋 았어요. 내가 진짜 못 배우고 가난하고, 대개 그런- 어떤 위치에 있는 각자의 삶이, 내가 믿음을 가졌을 때- 철학을 가진 사람과 똑같거나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 대개 좋더라고요. 그래서 공평 하다고 생각했어요. 믿음이 없었을 때 너무나 부조리하지만, 믿음을 가지면 삶의 가치가 높아지 는구나.
$) 종교가 문화의 완성으로 보는 시각은 종교 전반이 아니라 기독교의 시각이 아닌가. 종교가 우위이고 목표고 근거면- 결국 삶과 적대시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교) 자. 저하고만 얘기하시지 마시고. 지금 나온 얘기에 대해서 좀 해보시죠.
광우) 역사적으로 볼 때. 로마제국과의 관계 속에서 변증가들이 변증하잖아요? 순교자 유스티 누스 왈: 당신들이 얘기하는 기독교는 오해다. 우리 기독교는 오래된 종교다. 오래된 종교라고 이 야기해요. 신생종교 가지고 혹세무민한다는 비판을 거부해요. 하나는 문화에 대한 긍정과 당신들 이 믿는 것에 대한 부정이 같이 있어요. 기독교가 취한 방식은 같이 있어요. 근데 부정이 계속 강조되는 것은 초월이 강조되니까 그런 것 같아요. 세계와 점점 멀어지고… 그래서 성모와 성인 이 들어오고. 스미스가 말하는 하나로써 찾아가고… 그걸 헬라철학의 아르케 찾는 열정과 합쳐져 서 세상과 떨어지죠.
하지만 세상에 대한 부정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수도원 운동 같은 것도 산 속에 있지만, 결국 수도원 운동이 세상을 바꿨거든요. 하지만 현재 우리 기독교가 연결성을 놓쳤다는 거죠. 제가 얘기한 것도 그런 차원이에요. 이 끈을 잡아야 한다. 두 개의 층이 있지만, 밑에서는 융합된 것을 얘기해야 하는데, 헤센조차도 말을 이렇게 하니까 분리로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 역 사적인 맥락이 있다고…
발제) 헤센이 어떤 기독교 중심성을 가지고 쓴 건가요?
교)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발제) 저는 여기서는 종교 자체로 보는 것 같아서.
우리가 얘기할 때 종교 문화 도덕 예술 단어가 따로 있는 것처럼- 종교라는 영역에 대해 그림 을 그리려는 노력에 대해서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교) 기본 출발은 당연히 그래. 그런데 그 뒤- 가지고 있는 것은 뭐.
주원) 저도 말씀하신 걸 좀 느낀 게. 종교철학, 도덕, 예술이 추구하는 게 진선미성이고. 성스 러움의 체험과 가치의 영역에서는 가장 근원적일 수 있지만- 종교가 성스러움의 가치를 추구한다 고 종교가 성스러운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게 오해되어서 종교가 추구하는 가치에 의해- 그러 면? 있을 수 있는 거리가 괴리가 되지 않나. 체험과 가치의 거리를- 그때는 누가 누구를 완성시 켜주거나 보충해준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생긴다고 봅니다.
문덕) 이 책에서 종교체험, 철학과의 차이성을 얘기하면서 대상을 놓고 하는 이해인 반면에- 종교는 직접 겪는… 그 무엇으로부터~ 종교를 이해하는 본질 의미를 쓰겠다. 그렇게 출발할 수밖 에 없는 것 같은데. 그러면 발제자가 말한 것 같은 일들이 생기죠. 그게 문젠데. 쓰레기는 아닌 데. 그 쓰레기를 얼마나 많이 썼어. 그 사람 개인적인 체험으로는 쓰레기라고 고백하거든요. 그런 현상 속에서- 아까, 그렇게 착각하는 순간 삶을 배반하는 순간이 나올 수 있는 것 같아요. 도덕 을 함부로 무시하든지. 왜 그렇게 되는지. 안 되게 하는지는 고민해야 할 거 같아요.
^) 고백적 차원에서- 그런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나. 린드벡도 불가능성을 얘기하지 않습니까. 로컬 상황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전통을 지켜야 그 안에서 참된 종교성도 발견될 수 있다. 각각의 로컬을 인정해야하는 측면에서 다원적이지만, 고백적인 측면에서는 그래야 진정 성이 있다는 거죠.
&) 자기 내적인 고백에서 충만을 느끼지만, 그걸 강요하면 제국주의가 되는 거죠.
$) 축적적 전통과 신앙의 얽힘을 말하는 것 같은데. 스미스와 같은 개념으로, 삶으로서의 사태 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 삶을 완성시켜야 하는 것으로 하면- 도덕적 완성자가 되어야 한다는 방식 자체가 문제라는 거죠. 헤겔적인 진화의 방식이 문제다. 삶의 사태. 그 자체로 바라봐야 한다는 거죠.
$) 그래서 현상학적으로 제시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한 것 같아요. 형이상학적인 것과 결 합되지 않으면 안 되고.
*) 같은 의견- 같은 맥락에서 말하자면. 종교를 너무 철학… 구분했을 때. 종교는 신, 초월을 강하게 부여하고. 의미를 나눈다고 했을 때. 그러면 항상 종교에서 저쪽으로 가야하는 방식. 상호 영향이라고 하지만, 결국 종교에서 저쪽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종교도 사실- 종교의 역사성이라 는 것이 있고, 주어진 부분이 있지만, 요구되는 부분도 있는데. 그런 걸 배제하고, 초월적이고 인 간에게 영향을 주어야만 하는- 그렇게 하다보면, 그 종교가 오히려 삶을 거부하게 되는 왜곡이 발생하는 지점이 있다고 보고. 종교와 문화에서도. 그 종교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완전히 섞여있는 부분도 있는데, 너무 종교 위주로 본 것이 아닌가.
&) 근데 종교철학자로서, 개념화하기 위해 하나의 개념을 세울 수밖에 없지 않나. 그렇게 정리 한 것이 아닌가. 개념화해서 접근하는 거잖아요. 강을 건너는데, 건너면 배 필요 없는 게 아니고 -
*) 너무 성급한 거 아닌가-
&) 100쪽에 이리 간명하게 설명한 게 아닌가.
문덕) 고유성 얘기할 때. 철학과 동등한 자리에서 비교해서 이것과 다르다- A와 B 같은데, 그 런 것 같지는 않아요.
발제) 근데 말씀하신 것처럼, 종교중심성을 가지고 얘기하는 느낌은 받았어요. 이 글의 목적 자체가 그러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인데- 또 그게 그래야 하는 거고.
문덕) 종교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다른 것 전체를 포함하고, 사이사이 관계라든가. 구분하지 않는- 통합적 성격 때문에 그렇지 않나.
발제) 환원주의적인 입장을 비판하는 것 같아요.
$) 종교를 종교 하나로 보면 안 될 것 같은데. 기독교가 확 흡수되지 않은 입장을 봐야할 거 같아요. 종교와 철학- 기독교가 그 사이에서 행한 것이 뭉뚱그려지는 거죠. 종교가 이렇게 가야 하는데. 기독교가 그 사이에서 큰 영향을 줬다는 것 같아요.
문덕) 기독교는 옆에 두고. 철학 안에 다 있는 것 그게 아니고. 철학- 철학과 도덕과- 종교가 철학을 해소할 수 없죠. 근데 이런 저런 부분이 종교 안에서 한꺼번에 교차되면서 동시에, 작용 하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있어요. 헤센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 잘 그려진 당근- 천국행 그려진 그림보다 못하지 않고… 예술적인 좁은 입장이지만, 어떻 게 엄청나게 그려진 성화랑… 일상적 대상을 그림과- 거기서도 하나님이 느껴졌고.
문덕) 철학은 세계에 대한 이해. 종교는 삶의 구원 이런 거다. 그런데- 세계를 잘 이해하면, 구 원이 안 되나요? 세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불교가 상당히 거기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데. 종교와 철학의… 헤센의 경계설정이 모호해지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 그래서 앞의 세 개는 앎의 차원으로 다루는 것 같아요. 나란하게. 상호교호적인. 구도 자체 를 그렇게 짠 느낌이.
^) 초월성 자체를- 매개라는 차원으로. 분과들을 이야기하는데, 매개가 하위가 아니고, 종교와 삶적으로, 유기적으로 엮여있다는 차원에서 그런 가능성조차도 지향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궁극이 초월에 의존되지 않느냐.
문덕) 초월도 좋은데. 뒤쪽에 인격성도 나오니까- 질적 초월은 그냥 초월이죠. 도덕의 종교성 하면- 그거 자체에서 도덕의 어떤 초월이니까, 공간 안에 내재하던 아니던 문제가 안 될 거 같 고. 헤센의 초월성이 뭔지는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교) 진하게 검토할 화두가 몇 개 잡혔어요. 그거 다 다룰 수는 없겠고. 잠시 쉬었다가. 시작하
는 마당이니까. 강의하고, 보충하겠습니다.
이런 제목들이 이렇게도 얘기할 수도 있고. 오늘의 맥락에서는 제목을 바꿀 수도 있죠. 중요한 건 이제-
해볼게. 이게 연습장이야.
자. 이거 안 지워져?
자.
그-
아까 잠깐 얘기했지만, 철학적 신학이라는 분야 안에서 철학적 신학이 1번이에요. 종교철학에 서는 종교철학이에요. 종교철학 원론이라고 해달라고 했는데, 안 되었는데. 하여간, 원론에서 해 야 하는데. 전에 철학적 신학에서 했던 이야기지만, 이렇게 훑어봤을 때- 한- 1/3 정도는 본 적 이 없는 것 같아서- 공유하는 차원에서. 출발점이기 때문에. 지나가는 길이면 체크하기는 어렵지 만, 공유하는 차원에서 해볼게요. 오늘 헤센이 종교와 철학, 도덕, 예술, 문화의 관계에서 구별과 연관에 관한 이야기를 훑으면서 이 성미선진 그림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꺼리들이 있어서, 함 께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적은 종교와 문화. 종교와 문화가 삶을 이루고 있는 지엽적인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왜 부분인지는 이 맥락에서 나올 터인데.
어-
어쨌든. 종교와 문화. 믿음과 삶의 관계에 좀 더 바람직한 그림. 종교에 대한 철학적인 반성이 면서,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개입도 없이 벌어지는 현상 사건 경험을 카메라 돌리듯이 보여주는 심리학 현상학이 아니라- 당위적으로 이래야 마땅하다는 의미의 작업! 삶과 믿음의 연관성을 드 높일 수 있겠는가? 함께 공유해봅시다.
하다 안 되면 칠판에 쓰고.
제목이 이렇게 되어있어요. 神과 人間의 만남의 구조와 계보, 그리고 신학의 발생. 동일하게 신 과 인간의 만남. 이것과 관련해서 어떻게 층위를 연결할 수 있을 지. 일단 그 뜻으로 새겨도 좋 겠다.
인간과 종교의 관계를 죽음으로 묶어내. 그러면 어디로 간다고? 힘으로 간다고. 힘이 먼저야.
그래서 이 그림이 잘못되었어. 힘을? 신이라고 말했어(신을 말하는 종교). 신이어서 힘이 아니라, 힘이어서 신인 거야. 힘이 없어도 신인가? 적어도 본회퍼 이전에는 신이 아니야. 무력적인 힘.
종교적인 인간과 관련되어서는 힘입니다. 각성해서 이루는 성을 말하는 종교든, 공분모에요. 이걸 진작에 내용 정리해서 스크린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옛날에 그린 그림으로 작업하고 천 천히 바꾸자고 했는데 여전히 안 바꿨네요. 죄송합니다. 힘으로서의 신에 대해 만나는 체험이 이 렇게 되는 거야. 두려운 신비와 매혹적인 신비. 물러나게 하는 신비와 다가가게 하는 신비. 둘 다 황홀함이야. 그래서 두려움과 이끌림. 신으로서의 힘은 둘다 말해요. 구약은 신약에 비해 칼라 가 너무 두려움으로 말하기는 하지만, 등장인물과 신의 관계는 또 앙모하는 관계에요. 이 양면성 을 한데 묶어서 거룩함이에요. 오늘 말한 종교. 구체적인 종교가 아니라, 종교적인 삶의 종교에 요. 물상화된 제도적인 종교 이전에- 명사 이전, 동사의 종교. 그런 역사 속의 종교. Homo religiosus. 첫 체험의 모습이죠. 그런데 이 거룩함은 참 비일상적이에요. 당연하죠. 신비니까. 그 래서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야. 가시덤불에서 만나는 야웨. 모세가 만나는- 모세가 기다린 것도 예상한 것도 아니야. 자세히 드려다보니, 거룩한 땅이니… 예측불가능성. 당연히 그런 성질 이죠. 그런데- 이 거룩함 자체가 갖는 성질인데. 얘가 그 자체로 좋아? 같이 가지면서도 이렇다 보니까. 얘(이끌림)는 예측불허해도 괜찮은데. 두려움이 예측불가능하면 무서운 거야. 그래서 결
국? 두려움 때문에 비일상성은- 비일상성은 때로 삶의 활력소가 되기도 하는데. 두려움을 요체로 하는 비일상성은 불안의 원천이 돼요. 그래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힘을 왜 구했어? 힘을 극복 하기 위해서지. 이렇다 보니까- 불안의 원천이 되었어. 그래서 비일상성을 일상화하는 거예요. 그 래서 구체적으로 반복하고 재현. 그래서 예측가능화시켜. 그렇게 되면- 함께 딸려올 수밖에 없는 두려움을 예측가능한 것으로 만드니,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어. 그런데 어떻게 이뤄지냐? 상징으 로 이뤄져. 종교에서는 실재야. Divine reality. 실재와의 직접적인 맞딱드려. 그걸 상징화시켜.
그게 예술. 음악이나 미술. 일상화시켜. 예술이라는 방식으로 일상화시킨 거예요. 그래서 예술이 라는 게 상징이 되지. 그리고 추구하는 것인 아름다움. 결국 종교에서 참됨으로 파생이 되더라라 는 의미에서 화살표고. 문화사적으로는 거꾸로. 반대방향의 화살표도 있지. 아름다움으로 거룩함 을 도모해. 근데 이 상징은? 음악, 미술의 예를 들 수 있는데. 이 동네, 저 동네의 한계가 있어.
공유되기가 어려워. 상징 자체는- 나름대로 풍부하게 해석과 음미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공유 가능성, 모호성 때문에 다음 단계로, 모호성을 극복하는 단계로 진보하게 되죠. 공간의 확대로.
이제는 말과 글을 가지게 됩니다. 언어를 도모해서. 그래서 나오는 것이 신화에요. 그걸 도덕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신화가 도덕은 아닙니다. 그러나 반도덕이라고 해도, 이렇게 정 리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이 틀에서는 도덕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도덕은 선을 추구하죠. 선 을 통해 미, 그리고 성. 점프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계보의 진화과정을 이렇게 순서를 잡아서 전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근데 신화는- 당연히 일상화시켰는데- 신화가 사용하는 언어는 아직도 상징성을 지녔습니다. 영상적인 언어에서 문자적인 언어로. 이미지에서 말과 글로 넘어왔 는데. 모양새는 달라졌지만, 상징을 상당히 지니고 있어. 그래서 상징적이야. 상징이라는 것은 심 볼. 가리키는 것입니다. 도덕과 거룩함은 거리가 상당해요. 가리킬 수도 있지만, 빗나갈 수도 있 어요. 풍부하지만, 다의적이지만, 그건 곧 모호해. 신화의 언어의 상징성을 극복하기 위해 보편 화. 그래서 개념화가 일어나. 개념은 끌고 들어와. 그리고 잡아. 틀 안에 집어넣어. 상징은 가리 키기만 하지만, 개념은 정의를 해. 학문은 근데 선도 미도 성에 대해서도 해. 뭘로? 진을 기준으 로. 상징은 실재를 드러내게 하는 것이 기능이에요. 근데 신화를 개념으로 읽게 되면- 상징이라 는 풍부함이 찌그러져. 참됨의 테두리 안에서 아름다움과 착함을 봐. 참됨의 기준을 만족시키면 괜찮지만, 아니면 곤란해. 개념의 틀 안에 잡혀야 해. 보편이라는 카테고리에서 보면 넓어진 것입 니다.
그래서 아닌 게 아니라, 성미성진의 관계가- 두 개의 동심원이야. 가치의 문화적인 계보과정에 서는 성이 가장 가운데 원이고, 다르게 보면 진이 가운데 원이야. 그런데- 요거만 보면, 이거나 저거야. 어떤 면에서는 이렇고, 어떤 면에서는 저건가. 밑에꺼는 오늘 얘기에 딱 맞지는 않지만- 헤센은 결국 기독교를 염두에 두지만- 기독교를 보면- 기독교에서는 성이 시원적인 의미에서 기 독교야. 핍박받고 억압받던 카타콤 시절, 원형. 종교적인 삶, 경건한 삶이야. 규범이 아니고. 스미 스에게 적용됩니다. 일상화시키려니까 예전예배를 갖게 되고, 문화가 질퍽하게 연결 돼. 그러다가 문자를 갖게 되니 성서. 그러다 신과 학이 연결 돼. 신학이 그냥 만난게 아니라, 성으로 미로 선 으로 진으로 만나게 된 거야. 이 신학의 그림을 그린 건 플라톤이야. 문명을 보면서 그렸어. 어 쨌든.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동방정교회는 이 시원의 그림을 가장 진하게 그리고 있어요. 패러다 임 1-6까지 큉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데. P1야. 그게 시원적인 기독교인데, 그걸 갖고 있는 교회는 없어. 하지만 P2는 있어. 하여간, 교회사에서- 종교적인 삶을 P1으로 설정한 게 중요해!
그런 교회사 책이 없어. 다른 교회사는 모두 예수에서 시작해. 이런 의미를 가지고 출현했다! 자 자. 어쨌든. 하는데. 그런 그림이고. 시원 기독교가 형성이 돼. 그리고 동방은 시원에서 성서까지 있겠지. 하지만 서방- 중세교회는 시원을 잃어버렸어. 동방에게 주고 와. 그리고 예전에서 신학까
고중세 근세 현대
지성 의지 감정
합리 정통
의지 자유
신비 경건
지 와. 개신교회. 이런 거 저런 거 다 잃어버리고- 물론, 예전이 없지는 않지. 하지만 성상파괴의 이름으로 오직 성경으로 만을 외치면서 성서-신학의 범위에 있어. 물론, 이 그림의 층위들은 레 벨이 달라. 위에 있는 것- homo~ 라인은 인류의 시원적인 시대야. 연대기적인 게 없어. 시원의 표출 양식, 말과 글을 한참 있게 되다가, 역사적, 문화적 자료. 예술과 신화의 조각들이 있어. 신 화는 BC 20세기. 학문은 BC5세기. 근데 기독교 버전으로 오면- AD1세기부터 펼쳐질 때, 동방 에서 개신교까지. 그래도 동방교회가 P1 아니더라도, P2는 있고. 카톨릭은 P3. 개신교는 P4.
말하고 싶은 것은 진선미성인데. 어떤 것은 어떤 거일까.
일상성은 성 중심의 동심원이야. 근데 정반대의 순서도 생각할 수 있어.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이제부터인데. 요거 치우고. 참에서 시작되는 또 다른 그림이 있어.
그림을 좀 더 그려야 하는데.
성미선진이고, 진에서 학문이 시작했잖아. 고대 중세 근세 현대에 이르거든.
저 앞에서 했으니까 반복하지는 않고.
감정이야 말로 육체로 넘어올 수 있어.
세로가 공시적 구조고, 가로가 통시적 구조야. 지의정이라는 구조. 동시다발적으로 발현되었어.
신관. 그 사이 대립을 뚫고 의지가 나왔어. 고대에는 합리-의지가 싸웠는데, 중세에 의지가 나왔 어. 하나님의 인격성이라는. 그래서 삼대사조가 형성이 돼요. 신의 이야기지. 하지만 결국 그건 인간의 정신의 뿌리야. 하지만 고중세는 그걸 몰라. 그래서 신의 모습들이야. 그러나 근세에서 인 간이 주체가 되면서, 변해. 정통적인 신? 말이 안 되지. 그래서 인간에게 적용이 돼. 근세에서는 신앙에 대해 지정의가 싹 돌지. 고중세에는 신에 대해 싹 돌고. 지의정. 시대를 구성하는 공시적 인 축이면서도, 통시적인 축이야. 고중세는 지성, 근세는 의지. 현대는 감정. 고중세는 사실 지성 과 감정이 양대구조야. 지성이 압도하고. 이론적으로는 대립이지만, 지성이 압도해요. 고대는 말 할 필요도 없지. 철학의 시대야. 지성의 지배지. 중세는 종교의 지배시대에 나와. 여전히 마찬가 지 지성이 종교에서도 압도적이야. 스콜라신학- 학자의 신학이야. 신앙에 토대를 두고 이성을 향 하든, 이성이 토대든- 이미 깔려진 이성과 관계 지어야겠다는 scholarcitism. 그로부터 근세는 중세말의 의지라는 제3요소. 루터에서 데카르트라는 일련의 흐름. 루터-데카르트-칸트-헤겔. 노 골적으로 의지를 말하지(헤겔은 용광로이지만). 철학사, 종교사 다 그렇지. 종교의 개혁이라는 것 은- 지의정이지만, 의지에 가장 호소를 한 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 다 흘러왔는데. 우리 시대. 현대. 고중세에서는 교리, 근세에서는 고백 또는 윤리야. 근데- 그 시대에는 먹혔지. 고대 에는 교리가 맞지. 근세에는 새로운 이성이 나오니, 교리로 안 돼. 그래서 윤리로 가. 근데 현대 로 넘어가니까, 안 돼. 교리? 고대에는 돼도- 인식론적인 성찰을 근대에서 거친 단계니까. 탈종 교화와 세속화가 이뤄지는데. 그리고 윤리? 세속윤리로 충분하지, 더 낫지도 않은데. 공격을 받 아. 그래서 지성과 의지가 표방한 게 다 안 돼. 그래서 감정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 탈바꿈하는 작업. 일련의 흐름들인데. 감정이라는 세 번째 요소를 등장시키면서, 현대를 알리게 돼죠. 슐라이 어마허를 대표로 하는. 다 아는 얘기입니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진- 지성을 기준으로 거슬러 올라보니까- 학문이 등장하고 나서, 계 보도 이렇게 흘러갔지만. 노란 것은 인간의 정신 요소에요. 진은 지성, 선은 의지, 미는 감성. 여 기서 영성 얘기도 할 수 있을 거예요. 영성은 또 다른 요소가 아니라, 전체를 아우르는. 그래서 정 자리를 만들자면, 성에 배치할 수 있죠. 이런 일련의 흐름인데, 정반대로 갈 수도 있어요. 성 미선진으로 갔는데, 학문의 궤적을 보니 거꾸로 가. 진선미성. 전인적 삶- 영성 아니야, 영성! 흐 름을 이렇게 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건 이 궤적을 따른 흐름이고요. 근데 아까 두 개의 동심 원 했죠? 충분히 답을 하고 남았겠지만- 실제 이런 계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잘 보십시 오. 정말 전개되는 현상을 가장 먼 거리에서 분석- 쭉 살핀 거야. 말하자면, 사실적인 기술과 묘 사라고 할 수 있어. 가치판단을 개입하게 되면- 이건 사조의 이름을 열거한 것에 불과하지. 가치 평가에 들어가면- 구체적으로. 지의정인데- 神이든 信이든 마찬가지인데. 지난 학기 포이에르바 하의 투사와도 연관이 되는데. 아. 저기 이미 다 있네. 자. 神이 어떤 식으로 그려지느냐? 힘을 말하는 신이었고. 갈고 다듬어서 진으로 가서, 진의 궤적을 따랐는데. 이 동네, 저 동네를 보니 까.
첫 출발이 지성이야. 자기대상화를 했어. 그랬더니? 절대성이고 보편성, 무차별성이야. 근데 무 차별성에 대하여, 인간은- 보편적이고 무차별적인 우주적인 신- 지성이 그려낸 신은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근데 거기서 인간은 자기확인의 욕구와 충돌해. 충족시키지 못해. 그래서 충족시키기 위 해 인격화를 요구한다고. 알아가야 할 거 아니야~ 자기가 열심히 섬기는 놈하고 관계가 있어야 지. 그래서 인격화해야해. 이건 무차별화하고 달라. 그게 의지야. 이 의지는 도덕을 불러일으키겠 지. 이 도덕의 신은 도덕적 완전자야. 근데 그 도덕적 완전자의 신하고 인간은- 인간은 충족시킬 수가 없지. 그래서 또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지. 분열이 일어나. 그리고 죄의식이 나와. 죄의식은 어떡해. 구원을 요구하겠지. 구원은- 구원해주소서. 감정이야, 감정. 이 감정은 이제? 뭐가 지은 죄야? 구원을 요구해서 감정으로 갔는데- 이제 율법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겠지. 근데 어떤 사랑 이야- 살과 피가 지은 죄야. 그러니 살과 피로 씻고 구원해야 해. 그래서 성육신이 돼. 자. 이것 들이 신 그림이야. 포이에르바하의 투사야.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것은- 얘들 사이의 관계야. 지의정 사이에서는 이거 저거 유추할 수 있습 니다. 씨앗이 심겨져있어. 근데 투사된 신의 모습의 관계를 보자고. 절대성 보편성 무차별성. 전 능이야. 도덕적 완전자. 전선지선이야. 근데 얘 둘은? 무지하게 긴장이 돼. 신정론이 이거 해결하 려고 덤벼들었지만- 이미 엄연히 존재하는 악에 대해서 어떻게 해. 이 표상이 한데 얽히기에는 세상의 악이 너무 강력해. 뿌리가 달라서 그래. 같은 굴레로 가기에는 어딘가 속하겠지만, 엄연히 다른 뿌리거든. 또 죄의식은 기준이 돼. 그리고 성육신은 살과 피를 가져야 진짜 사랑이야. 성육 신 안 되고 못 베긴다는 거거든. 이 성육신은 기준이라기보다는, 너무나 자의적이고, 변덕스럽기 까지 하거든. 기준과 이건 정면으로 충돌해. 투사가 일련의 관계를 갖지만. 지성의 신, 의지의 신, 감정의 신이 따로 놀거든. 신정론이 해결하려다 못해. 감정-의지의 신도 안 돼. 그러면 공통 분모가 있을 것인가? 묻지 않을 수가 없어. 진리와 의지 사이의 신정론, 힘과 사랑 사이의 관계.
그림은 그렸어. 신학이 엄청 노력했어. 당위는 있어. 긴장을 엮을 수밖에 없지만, 신 안에 동시다 발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당위적인 주장이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그러나- 근데 이것만 당위야? 현실은 따로 놀 꺼야. 정직하게 보자면 그래. 실상을 봐.
실상을 보면, 구별성vs연관성, 차별성 하는데. 의미를 구실로 당위를 이야기하는데. 당위는 멋드 러지게 할 수 있어. 하지만 현실과 관련이 있어야 공허하지 않지. 지정의의 당위와 그러지 못한 현실. 근데 지의정도 그래. 여기 지의정이라고 했어. 근데 다 마찬가지 얘기고 표현만 달라.
그렇게 봤을 때. 얘네의 당위와 현실이 이런 모습이라고 할 때- 과연 현실적으로 이럴까. 좌락
이렇게 그려질까. 동심원적으로. 종교와 다른 것들. 연관되기만 해? 무관하기만 해? 다 좋은데, 당위적인 얘기라고. 이 현실적인 눈으로 보자면?
잠시 올려봐.
뭘 고발해야 하냐.
지의정이 지성의 신 의지의 신, 감성의 신. 당위. 공존불가의 긴장도 있어. 그래도 이것의 가능 성을 당위로 주장해. 하지만 현실은 따로 놀 수도 있다고. 아마 기독교인의 신 이미지는 막 이렇 게 빙글빙글 돌고 있을 꺼야. 충돌에 대한 느낌도 없이. 진지하게 파고 돌 때, 충돌과 긴장을 이 야기하지, 안 하면 편안하게 뒤죽박죽하지. 노예들의 편안함으로 충분히 가능해. 마찬가지로 성미 선진 동심원도 그러한데-
실상은? 성. 미. 선. 진.
반대는- 속. 추. 악. 위.
자- 줄을 그을 터인데- 가로 선은 그을 필요도 없어. 속추악위. 반대말도 그릴 필요 없어. 뻔 한 건 그리지 말고. 자. 성에서 추악위, 미에서 속악위, 선에서 속추위, 진에서 속추악.
당위 그림은 언제든지 멋져. 근데 당위에 기만당하지 않기 위해 스미스 책을 읽었어. 당위, 내 종교는 언제나 당위로 보잖아. 내내 그런 것처럼 성미선진으로 봐. 하지만 속추악위가 우리 삶에 는 더 많아. 성속의 구별, 재건설을 도모하는… 얘기했지만. 그런 맥락에서 더 이상 밑에 걸 제 겨놓고 볼 수가 없어요. 저 성을 봐. 나머지 예를 다 볼 필요는… 여러분이 찾아봐.
성. 거룩한데. 얘가 가로줄만 가는 게 아니라, 아래와도 줄기차게 연결이 돼. 성속은? 또 다른 차원이야. 가장 바람직할 수도, 가장 최악일 수도 있어. 이건 또 다르게 그려야 해. 성과 위. 기 독교 버전에서 봤을 때- 통일교라고 생각해. 얼마나 거룩하냐? 설명이 필요 없지. 위- 물론, 그 들은 위라고 생각하지 않아. 누구도 우상숭배라고 생각하면서 우상숭배 안 한다는 말처럼. 성과 악- 후- 내가 성공회대학교 다닐 때. 부천의 승리재단. 들어봤어? 영생교야. 영생교! 살인암매장 이 엄청 일어났던 곳인데. 내가 대학원 애들 데리고 한번 들어가려고 했는데, 어우. 주변만 기웃 기웃 거리다가. 말아버리고 말았는데. 종교의 명분으로, 거룩의 명분으로 무수한 악이 벌어질 수 있어. 통일교가 여기까지 갔는지는 모르겠고. 다른 기업행태 속에서 벌어지는 것은 기업이니, 종 교와는 좀 다르고. 성과 추. 뭐가 있을까. 통일교, 영생교. 으어. 내가 생각하다. JMS. 못 생겼잖 아. 못생긴 교주도 거룩함을 표방할 수 있어. 그거 보면서 나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 어.
%) 추한 예수 그림에서 거룩함을 그린 경우는 이거와 다른가요?
교) 왜 다르겠어. 단지 당위만이 아니야. 그들 사이의 관계에서 연관 구별- 당연히 그렇게 논 해야겠지. 다만, 과도하게 종교의 초월을 드라이브한 것 외에도- 중요한 것은. 철학과 도덕과 예 술에서 가치를 위쪽으로 깔고 있는 것 아니야. 하지만 현실에서 당위의 그림은 지극히 부분적이 고, 사실 비현실적이고, 더욱이 기만적이야.
여기서 성과 속을 하려면 그렇게 갈라질 꺼야. 성속의 미분화와 분리에서 재연합. 그 재연합의 뜻일 수도 있어. 또 한편으로- 그래서 양갈래가 필요한 것이 연관성과 차별성이야. 다른 것도 왜 안 그렇겠지. 미속? 미속은 좋아요. 미악은?
발제) 꽃뱀요.
교) 아, 좋아요.
종교의 현실을 살펴야 해. 당위로만 보지 말고. 스미스한테 경고를 받았지. 그래서 우리가 이 런 맥락에서 할 수 있지 않나 싶은 거예요. 성이- 미선진만이 아니라, 이 반대와도 쫙쫙쫙 얽히
는. 진과 속- 진이지만 추한 것. 얼마나 많아.
우리 스스로를 당위로 보는, 자기 기만적인 것에서 벗어나서 다른 것을 도모할 수 있지 않겠 나.
이런 맥락에서-
아래 애들과의 관계를 보면, 현실적으로 분리된 신관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성미성진 동심원 도 동심원이 아니라 버거운 교집합, 더 정확하게 분리된 원들이야. 당위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 니야. 하지만 현실과 관련이 있어야 해. 그래서 현실에 대한 고찰이 필요해. 자립성 고유성 얘기 하는데- 그렇게만 보면서, 혹함에 빠질 수 있는, 당위 일변도의 위험성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 다음에 할 얘기는?
이 모든 것을 끌고 문화로 가야하는데. 문화는 또 뭐냐. 어… 이런 것. 문화로 갑시다.
용세- 다 그렸어? 피피티로 만들어야지. 삼빡하게 나올 거예요~
104쪽. 두 번째 문단 전체. 문화에 대한 비판적 기능에 대해 읊었어요. 그런데. 그 역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문화의 우상화에 대한 종교의 기능을 말했으면, 종교의 우상화에 대한 문화의 비판기능을 말해야 해요. 이 뒷부분이 비었군. 지적을 해야겠죠. 뒷부분이 없는 이유가 있어요.
이유가 뭐죠? 그림에 있어요. 조금 전에 있었지만, 올라갔어요.
인간- 자연을 원점으로 해. 초자연적인 구도로부터, 자연을 원점으로 해. 이게 16, 17세기 그 림이거든요. 거기서 자연과학이 나온 거야. 그러다가- 자연이 가지고 있는 공간범주. 초자연은 무 한이잖아. 자연은 유한이에요. 자연은 시공간적 범주를 가져요. 자연적인 외연의 확장이 사회로 나와. 이거 인간으로 본거야. 인간. 신중심 시대는 인간을 당연히 초자연으로 봤겠지. 근데 인간 중심적으로 보니 인간은 자연이야. 그래서 유한에서 무한으로, 긍정어에서 부정어로. 근데 이 자 연이, 외연의 확장으로, 사회로 읽혀졌어. 그러다가 시간적으로 역사로. 이게 19세기야. 자연사회 역사를 싹 묶으면? 이걸 우리는 문화라고 해. 이게 20세기야. 자연이 옛날부터 있었지. 하지만 인간이해. 인간관에 있어서 자연은? 16세기쯤에나 와서 위상을 차지합니다. 그 전에는 내내 인간 에게 자연은 왔다 사라져갈- 참된 것, 선한 것을 기대할 것 없는 것으로 여겨졌어. 플라톤과 함 께. 그러다 형이상학을 깨고, 형이하학, 과학이 나오니까 이렇게 그려졌어. 17세기 생물학 천문 학 발달… 말할 필요도 없어. 19세기는 역사사상가들의 세기야. 정점을 헤겔로 말할 수 있지만 헤로도토스의 역사 이야기가 아니고요, 인간을 역사의 눈으로 보는 거요. 문화- 사회, 옛날부터 있었지. 하지만 사회의 눈으로 인간을 보는거야. 여기서 사회구성체 논쟁이 나와. 개인이 먼저냐, 사회가 먼저냐. 다 이때 나와. 문화 마찬가지고. 20세기 들어와서, 20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딜타 이. 자연과 문화를 대조시켜. 자연과학, 정신과학. 문화가 딜타이에 의해 자연과 필적할만한. 자 연과 대비시키는 것으로. 사회와 역사에 대해- 기본 시공간적인 범주로 자연을 경작했어.
Culturing했어. 딜타이로 시작하지만, Lebensphilosophie얘기한 사람 다 그랬어. 문화라는 범 주를 가지고. 베르그송 등등. 옛날부터 문화는 있었지만. 자. 여기에 종교는- 나는 높이의 그림을 그리고 싶어. 높이를 향해 추구하는 종교, 깊이를 향해 추구하는 종교. 둘 다 초월이야. 둘 다 포 월이야. 포월로서의 초월. 그것도 초월의 종류지. 하여간, 높이든 침잠이든. 그러면 오늘날 무종 교인들은? 빨간 선 빼고 하얀 선, 문화까지. 근데 종교적인 인간? 점 가로 세로, 결합해서 면이 되지, 거기에 입체가 되지. 헤센의 마지막 장. 종교와 문화라는 것을 놓고 봐. 전체 차원으로서, 지평으로서 문화와 종교잖아. 면에 대하여, 면으로서 문화에 대하여 입체라는 삶의 규모적인 것 을 완성시켜주는 것이 종교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 그려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시작이야.
문화의 우상화에 대해 비판 기능이 있다. 입체여야 한데, 이게 다라고, 궁극이라고 말하는 문 화의 우상에 대해 종교가- 가로세로에 대해 높이가 말해야 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은 충분히 얘 기할 수 있어.
하지만- 종교의 우상화에 대하여, 문화는? 그리고 종교의 우상화는 어떤 비판기준이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할까? 대책이 없네? 가장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아래 것들이 할 수 있겠어?
광우) 종교 자체 내의 정화는 불가능할까요?
교) 문화가 종교 타락의 책임인가?
광우) 성서에서 바알종교처럼요. 종교의 우상화조차도, 문화라는 차원에서 일어나는.
진) 광우)
%) 종교를 우상화하고… 교리가 높아지고…
광우) 성스러움, 다른 것. 헤센의 논리에 따라- 교정해주는 것은 성스러움의 체험. 그래서 종교 의 개념. 자체적인 종교개념.
*) 기본적으로 종교든 성스러움이든. 자체 가능- 정화는 성찰을 통해 가능해야 한데. 구조 안 에 갇힐 때 성찰이 가능하냐? 기본적으로 그 논리가 불가능하다는 거죠. 그 구조를 벗어났을 때, 성찰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 기준을 어디로 보느냐.
광우) 성스러움이 기준까지 뛰어넘는다는 것이죠. 예언자는 이스라엘 종교 안에 있었지만- 구 조 밖에 나갈 수 있던 것처럼. 성스러움의 체험. 이 자체가 종교라는 거죠.
*) 예레미야 이사야 루터 칼빈. 역사 속에서 개혁이 의미가 있는 거지, 절대적인 성찰로서 볼 수는 없거든요, 그래서 역사 안에 갇혀 있다는 거죠.
교) 자. 시간관계상 마무리하는데. 다 열어놓고. 화두를 열어놓고. 제가 잊어버리더라도. 종교의 우상화에 대해서. 어떠한- 제어 장치가 있을지. 신율이어도 인간이 받아들여야 하잖아. 그러면 문 화는 거기에 의미가 없을 것인가. 점선면 입체. 저렇게 그려놓으니까- 낮은 단위고. 종교는 다 아울러서 완성하고. 그 그림에 따라 그려봤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마리를 그렇게 봤어. 상당히 타당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 문화까지 이르러서 유한이라고 했을 때. 초자연에 대하여. 바로 무한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은 아니야. 무한- 무한이라고 하는 체험될 수 없는 것을 체험의 언어 로 표현하는 것은 초월이야. 무한은 불가능해도 초월은 가능해. 그런- 위상으로, 틀로써 높이 깊 이라는 기하학적 이미지로써 저 문화, 직조된 문화와 관련 위치라면- 이게 단순히 부등호로만 쭉 갈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 자연<사회=역사<문화<종교는 아니라는 거야. 뒤집기 작업이야. 방향은 다르지만, 작업은 같애.
여기서 짜릅시다. 그리고 2주 후에,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