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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시 지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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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시 지리 연구

박상진

나는 통영시를 선택하였지만, 통영을 잘 알지도 가보지도 않았다. 통영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통계청에서 일할 때 통영시 인구조사데이터를 입력하던 도중 통영시의 지도를 보게 되었고, 통영의 섬들과 바다, 해안가에 있는 집들이 너무나 멋져 일을 잠시 멈 추고 위성지도만 계속 봤던 기억이 있다. 당연히 나는 통영을 가본 적이 없었고, 방 학 때도 어딜 가지 않고 대전에만 있었기에 더욱더 지도로 보았던 통영을 아름답게 보였다.

그런데 연구주제를 보면 나는 지역은 통영시를 선택했지만 아산시 인구 연구와 달리 이번 조사는 통영시의 인구가 아닌 지리를 선택하였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 통영시의 지도를 보고 반한 만큼 통영의 지리에 대해서 조사해 보고 싶었고, 두 번째는 인구를 조사하면서 인구의 변화에 가장 큰 요인은 지리라고 생각했기에 이 전에 조사했던 인구 연구를 더욱 깊숙이 연구해본다는 의미로 선택하게 되었다. 즉 지리연구에서는 인구 연구, 경제 연구도 필요한 만큼 연구에 포함될 수도 있 수 있다 는 나만의 의미이다.

나는 지리라는 주제를 확정하는데, 시간은 화요일 저녁부터 수요일 오후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처음에 통영의 지리를 조사하는데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나는 일단 경상도자체를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영을 알기 이전에 경상도라는 곳이 나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통영은 당연히 가보지 않았고, 대구도 가 본 적이 없고, 부산도 가본 적이 없었다. 가본 곳이라고는 초등학교 때 가본 경주와 2년 전 친구들과 해돋이를 보러갔던 포항의 호미곶이 전부였다.

수요일 저녁, 수업이 없는 나는 인터넷을 켜고 네이버에 통영을 검색 한 후 통영이 표시된 상태에서 경상도를 살펴보았다. 진주도 보였고 고성군도 보였다. 통영을 통해 거제도를 갈 수 있다. 부산과는 생각보다 먼 거리였고, 그냥 이런 곳이구나 하고 지 도를 보고 있었다.

지도를 보던 중에 통영시의 지리를 연구하는 접근하는 방법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 게 되었다. 일단 나의 상태는 통영시에 대해서 우리나라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아는 정도 였고, 지금의 상태에서 통영의 지리에 대해 어떤 질문을 할 수 있을까?

- 통영의 도시는 어떻게 성장하였을까?

- 통영의 삼국시대 부터의 지명은 무엇이었을까?

- 통영하면 관광이 먼저 떠오르는데 관광사업에 통영의 지리가 어떻게 이용되고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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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 임진왜란 당시 통영에서 해전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곳일까?

-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는 얼마나 걸릴까?

- 통영의 인구는 몇 만 명일까? 통영의 시가지는 어떤 모습일까?

- 통영은 어떤 도시로 기록되어 있을까?

- 과거 통영을 나타낸 지도는 어떤 지도일까?

- 통영이라는 지명은 무슨 의미로 불린 지명일까?

- 통영의 섬은 몇 개 일까? 통영의 항구는 어느 정도의 규모 일까?

- 통영의 바닷길은 어떨까?

- 통영에는 어떤 하천이 있을까? 통영에는 산성이 있었을까?

- 통영의 경제규모는 어느 정도 일까?

- 통영과 거제시는 아산시와 천안시처럼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통영에는 평지가 많을까?

- 통영은 언제 시가 되었을까? 등

당장 10분만 생각해 보아도 수많은 질문들이 생각났다. 나는 접근 방법을 수업시간에 배웠던 방법을 활용하기로 하였다. 바로 수업시간을 통해 처음 들어가 보았던 국사편 찬위원회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기록원, 문화재청 등 통영의 사료를 알아 볼 수 있 는 곳을 선택해 보았다. 또한 해당 사이트를 접속하기 이전에 통영시에 대해 소개된 통영시 홈페이지를 방문하기로 하였다.1)

통영시홈페이지에는 통영의 연혁에 대해 나와 있었다. 기존 아산시와 다른 점이라면 아산시의 경우 백제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백제시대의 지명이 쓰여 있었고, 통영의 경우 가야와 신라시대의 지명이 나와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삼한시대의 경우도 아산 은 마한이었지만 통영의 경우 변진의 12국 중 고자미동국에 속한다고 나와 있었다.

매우 생소한 지명이었다. 삼한의 경우 마한, 진한, 변한만을 알고 있었는데, 당연히 이들 3개의 명칭 중에서 속할 줄 알았다. 하지만 변진이라는 명칭은 처음 들어보았 다. 혹시 앞에 ‘변’자가 있는 걸로 봐선 변한이 아닐까? 일단 변진을 네이버에 검색해 보았다.

검색을 하니 위키백과에 변진에 대한 설명이 나왔다.2) 변진은 12국으로 나뉘어져 있 는데 통영시 연혁에는 고자미동국으로 통영이 속한다고 나와 있었다. 위키백과는 고 자미동국을 통영에 위치하는 국가명이 아닌 고성군 고성읍에 있는 국가로 검색결과가 표시 되었다. 현재 결과로 보면 통영이라는 명칭은 당연히 삼한시대에는 존재하지는 않았고 고성군에 속해 있던 것으로 알게 되었다. 즉 지금의 통영시가 자리 잡으면서 도시의 형성이 된 시기는 생각보다 이후 이고 고대의 역사는 고성군의 역사 중 한 부 분으로 통영시의 역사가 포함됨을 알 수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들어가 사료를 검 색해 보았다.3)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나는 고자미동국을 검색해 보았고 한국사데이터베

1) 통영시청: http://www.tongyeong.go.kr/main/

2)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 3) 국사편찬위원회: http://www.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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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에서 10건의 검색결과가 나왔다. 도서 중 삼국유사에서 1건 중국정사조선전에서 2건, 한국고대사료집성 중국편에서 1건이 연속간행물에서 1건, 목록, 연구논저에서 5 건이 검색되었다. 삼국유사 1건을 검색을 클릭해 보니 ‘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한조의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고착국’ 이라 는 사료를 찾았다. 즉 고성은 고자미동국 혹은 고착국으로 불렸고, 이 당시 통영지역 은 고성의 영향력 안에 있던 지역으로 풀이된다.

고성군의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았는데,4) 고성군이 경덕왕때 고자군의 지명이 고성군 으로 변경되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지난 연구에서 빌렸던 단행본인 ‘한국 행정지명 변천사’에서도 이 내용을 알 수 있었다.5)

이후 가야시대에는 소가야에 속한다고 나와있었다. 나는 소가야에 대해서 알아본 적 이 없었기에 도서관에서 단행본 두권을 빌려보았다. 책은 ‘한국 고대사 속의 가야’6) 와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7)이다. 또한 소가야와 관련된 논문을 찾았다. 바로 ‘소가 야의 고고학적 연구’8)이다.

‘소가야의 고고학적 연구’ 부분에서 통영의 고분에 대해서 읽어 보았는데, 처음 시작 부터 이런 쓰여 있던 문장은 ‘통영은 다른 시군구에 비해 유적이 부족하다.’ 였다.

아니 그렇다면 통영은 사람이 살기 좋지 않은 지리적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냥 바닷가라서 중심지로 성장할 수 없던 걸까?

가야의 중심국가의 위치 멀어서 였을까?

통영은 가야에게 어떤 지역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그런데 논문에서 통영은 유적이 부족하다고 하였지만, 통영 옆에 위치한 거제의 경우 다양한 가야의 고분을 소개하고 있다. 통영처럼 부족하다는 말도 없었다. 그렇다면 통 영은 가야의 중심지라기 보다는 가야인의 무역로 였던 걸까?

사실 가야라는 국가가 영토가 딱 정해진 국가라기 보단 문화나 정치적으로 어느정도 영향력이 있는 중심지가 여러 개의 나라로 나뉘어져 있을 뿐 “통영이 중심지다.” “아 니다.”는 굳이 확고히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도로 머릿속에 나뉜 것을 매우 좋아하기에 소가야의 지도에 통영이 포함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너무나 궁 금하다.

택리지에는 바닷가 마을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바닷가에 사는 것은 강가에 사는 것만 못하고, 강가에 사는 것이 시냇가에 사는 것만 못하다.”9) 이중환의 택리지 가 가야시대에 쓰인 것은 아니지만 가야시대에도 어느 정도 적용가능한 말은 아니었 을까?

즉, 당시 통영은 사람의 중심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고성군 연혁과 통영시 연혁을 통해 고려시대 이전까지 고성군과 통영시의 연혁이 같은 것을 확인해 볼 수

4) 고성군: http://www.goseong.go.kr/index.asp 5) 이병운, 『한국 행정지명 변천사』이회, 2004

6) 가야사 정책연구위원회,『한국 고대사 속의 가야』 혜안, 2001

7) 김태식,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 2. 가야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나?』 푸른역사, 2002.

8) 하승철, 「소가야의 고고학적 연구」 경상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5.

9) 이민수 『국한문대역 택리지』 평화출판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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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 고려시대 이전 통영 자체적으로 영향력이 있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 그렇다면 통영이 주목받았던 때는 언제 일까?

두 번째 질문은 생각 보다 어렵지 않게 답을 찾았다. 통영이 조선시대의 계획도시라 는 점이다.10) 조선시대와 계획도시라면 수원이 생각난다. 그런데 통영이 계획도시 이 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도시는 한번쯤은 들어봤던 계획 도시였다.

금요일 오후 나는 업무를 마치고 돌아와 연구를 시작하였다. 통영이 나타난 지도가 있지 않을까? 고려이후 연혁이 고성에서 나뉜 것으로 봐선 따로 지도가 있을 것이다.

일단 이전에 인구조사에 찾았던 여지도서를 찾아보았다.11)

여지도서 번역본 중에서 경상도 1권에서 통영을 찾아 볼 수 있었다. 통영의 고지도와 통영의 변천연혁 등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여지도서 말고 다른 지도들도 있지 않 을까? 저번 과제에서는 여지도서만 찾아보고 더 이상 찾아보지 않았었기에 좀 더 많 은 지도들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일단 여지도서의 좌수영지 지도의 다섯 영지인 감영, 통영, 좌병영, 우병영, 좌수영에 서 통영을 찾아 볼 수 있었다. 또한 통영지가 따로 있음을 알 수 있었다.12) 통영은 충청, 전라, 경상, 삼도의 수군통제영을 의미하는데, 오늘날 통영시에 위치해 있으며, 임진왜란 1953년에 충무공 이순신이 첫 통제사를 맡아 한산도에 진영을 설치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통영은 삼한시대에서 삼국시대를 지나 고려, 조선으로 오면서 수군 의 중심지로 거듭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어제 조선의 계획도시는 통제영을 의미 하였다.현재의 해군본부의 중심지가 진해 로 알고 있는데, 이 당시 통영을 선택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통영이 중요해진 것일 까?

- 통영은 왜란(倭亂)이후 통영은 어느 정도의 규모로 성장했을까?

- 국가기록원에서 이 기록을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 수군통제영은 조선후기 어떤 모습이었을까?

- 수군통제영의 위치는 정확히 어디였을까?

- 현재 수군통제영의 유적은 남아 있을까?

- 다른 지도에서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여지도서를 찾으면서 읍지를 알게 되었다. ‘경상도 읍지’이다.13) 경상도 읍지는 현재 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규장각을 검색해보니 내게 맞는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바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시대 토지자료 서비스’이다.14) 나는 경상남 도를 클릭했는데, 내가 생각한 지역명과 다르게 나왔다. 남해현? 산청군?

10) 김재홍, 『통영의 도시성장과 공간구조』 UUP(울산대학교 출판부), 2004.

11) 변주승, 『여지도서 경상도 1권』 디자인흐름, 2009 12) 미상, 『통영지(統營誌)』, 시대는 근대로 추정.

13) 『경상도 읍지(慶尙道 邑誌)』.

14)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시대 토지자료 서비스: http://kyu.snu.ac.kr/yan/main/main.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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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현은 지금의 남해군을 뜻하는 건가? 산청군도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보긴 하였다.

그런데 남해현은 하나가 아니었다. 또한 남해현은 어디선가 본 듯한 지명이었다. 남해 현은 내가 생각한 남해군이 맞았다.15)

결과적으로 통영은 고려시대에는 남해와 거제에 삼한시대와 삼국시대, 신라시대는 고 성에 속해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야 통제영이 통영의 주춧돌역할을 하기 시작 하였다.

- 수군통제영의 위치는 정확히 어디였을까? 이 질문에 대해 논문을 찾아 보기 시작하 였다. 나는 ‘조선후기 경상도 지역사회의 형상과 현장 조선후기 통제영의 공(公)해 구 성과 변천’16)을 찾았다. 통제영의 위치에 대한 내용을 찾았는데,

통제영은 처음에는 한산섬에 있었는데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멀어서 고성으로 옮겼는 데, 배를 숨기는 데는 편하였으나 갑자기 당하는 변란을 막는데는 불편하였다. 통제사 로 오는 이들이 우선 편한 것만 생각하여 능히 고치지 않고 두었는데, 공이 통제사가 됨에 미쳐 개연히 적당 지형을 헤아려 진영을 두룡포로 옮기게 되었다.

두룡포는 검색결과 통영의 옛지명으로 나왔고 현재의 통제영의 위치가 표시되었다.

통제영의 위치가 한산도에서 바로 두룡포로 옮긴 줄 알았으나 통제영은 여러 곳을 거 쳐 지금의 위치로 옮겨진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정유재란으로 한산진영은 물론 전라 좌수영마저 폐허가 되자 통제영은 전세에 따라 일정한 본거지 없이 옮겨 다니게 되었 다. 전란 후에도 통제영은 선조 32년(1599년)에는 전라좌수영인 여수에 있다가 선조 34년(1601년)에는 경상우수영인 거제 오아포로 본영을 옮겼으며, 이듬해인 선조 35년 (1602년)에는 다시 고성 춘원포에 옮겼다가, 선조 36년(1603년) 제6대 통제사인 이경 준이 통제영을 두룡포(頭龍浦)로 옮길 것을 정하고 세병관을 비롯하여 백화당, 정해당 등 일부 군영관아를 건설하였으며 이듬해 선조 37년(1604년) 본영을 현재의 통영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17)

토요일 오전 나는 통제영과 관련된 논문을 다운 받았다. ‘조선후기 경상도 지역사회의 형상과 현장 조선후기 통제영의 공해 구성과 변천’18) ‘조선후기 통제영의 건설과 도 시경관의 변화’19) ‘조선시대 통제영에 관한 연구 군사 행정 시설을 중심으로’20) ‘조선 수군 통제영 연구 경상수영을 중심으로’21) 등의 논문이었다. 딱히 논문들이 어떤 이

15) 신정일, 『새로 쓰는 택리지9: 우리산하』 다음생각, 2012.

16) 김현구, 「조선후기 경상도 지역사회의 형상과 현장 ; 조선후기 통제영의 공(公)해 구성과 변천」 부산 경남사학회, <역사와 경계> 83권0호 (2012), pp.105-161.

17) 김재홍, 『통영의 도시성장과 공간구조』 UUP(울산대학교 출판부), 2004. 14p.

18) 김현구, 「조선후기 경상도 지역사회의 형상과 현장 ; 조선후기 통제영(統制營)의 공(公)해 구성과 변 천」 역사와경계, Vol.83. No-[2012].

19) 김상환, 「조선후기 통제영(統制營)의 건설과 도시경관의 변화」 대구사학 Vol.105 No.-[2011].

20) 정학룡, 「조선시대 통제영에 관한연구 : 군사·행정 시설을 중심으로」 경상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 위논문, 2009.

21) 박춘자, 「조선수군 통제영 연구 : 경상수영을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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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 다운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냥 RISS에 통제영이라 검색하고 논문을 받았다. 그중 마음에 드는 논문은 4 개였다. 각각의 논문은 일단 제목에 통제영을 포함하고 있었다. 논문들은 통제영일 설 치된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었고, 당시 수군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 통영성의 규모는 얼만할까?

- 당시 몇 척의 배가 통영항에 있었을까?

- 통영 주변의 섬들은 방어에 어떻게 이용되었을까?

- 통제영시대에 항만시설은 어땠을까?

- 일제강점기에는 통영이 어떻게 계획되기 시작하였을까?

- 통영의 도로는 어떻게 연결되어져 있었을까?

- 통제영시대의 매립사업은 어땠을까?

- 조선시대 통영의 지리를 어떻게 이용하였을까?

- 한산도가 통제영의 첫 번째 위치였는데 당시 한산도의 인구는 얼마나 되었을까?

- 고성이나 거제와의 관계는 당시 어땠을까?

- 이충무공 이후 통제사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을까?

- 통제영 이외의 시설은 무엇이 있었을까?

통제영이 설치된 후 본격적인 통영이 도시적 성격이 나타나기 시작한 만큼 통제영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본격적으로 통영이 자리 잡기 시작한 만큼 통영의 지리를 본 격적으로 알아 볼 수 있게 된 것일까?

아직은 현재의 통영시 자리에 통제영만 설치되었고 아직까지는 고성군과의 관계가 끝 나지는 않는다. 한국지명유래집22)을 보면 아직까지는 고성현으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로 통영이 분리된 것은 아닌 것 같다. 해당 단행본을 보면 1917년 광 해군 10년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되고 두룡포(통영시)를 춘원면으로 변경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고종 때는 다시 고성군으로 춘원면이 복귀되어 통제영이 폐(廢)하게 된다.

나는 조선시대에도 땅을 매립하는데 궁금증이 생겼다.23) 우리나라 서해안이나 남해안 의 경우 리아스식해안을 조금씩 매립하여 땅을 이용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지만 조선시대에도 땅을 매립했다니 궁금하기도 하였다. 단행본을 통해 알아본 결과 통제 영시대 매립사업에 관한 기록은 1874년 고종 11년에 건립된 제193대 채동건 사적비 에서 내용을 확인해 볼 수 있다고 한다.24)

그런데 관련 논문을 찾아 본 결과 우리나라 간척사업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국가기록원에 들어가 간척사업과 관련된 기록이 없을까 검색해 보았다.25) 1966년 김

22) 국토지리정보원, 『한국지명유래집(경상편)』 진한엠앤비, 2015.

23) 윤양수, 「우리나라의 간척사업의 실태조사(1910년~현재)」국토연구 1('82.12) pp.198-211 1789-3450 KCI,1982.

24) 김재홍, 『통영의 도시성장과 공간구조』 UUP(울산대학교 출판부), 2004.

25) 국가기록원: http://www.archives.go.kr/next/viewMai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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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간첩사업을 시작으로 기록물들이 나왔다. 통영에서 간척 사업한 기록물도 국가기 록원이 보관하고 있을까?

검색결과 통영의 73년 간척사업이 진행된 기록물을 발견하였다. 그렇다면 아산시도 간척사업을 진행한 기록이 있지 않을까? 찾아보니 아산시도 67년에서 73년도에 간척 사업을 진행한 기록이 있다. 73년에 정부는 대대적으로 간척사업을 진행하지 않았는 지 추측을 해봤다. 서산의 경우도 비슷한 시기의 간척사업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산시 연구랑 다르게 통영시는 오래된 도시는 아닌 것 같다. 아산시의 경우 오래전 부터 지역적 성격이 강한 모습이었는데 통영의 경우, 통영 자체의 모습이 아닌 통제 영만 설치된 곳으로 보인다.

통영의 경우 통제영시대 매립했던 곳은 현재의 중앙시장 위치가 매립위치라고 한다.

통영의 땅이 산지와 섬으로 대부분 이루어져 있어 평야가 적은 편인데 당시 매립을 통해 통영의 효과는 상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단행본에는 통영의 고지도를 보면 정량동 한전 인근 지역이 만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현재는 매립되어 육지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지도는 무엇일까?26) 한국고 지도연구학회에 들어가 보았다. 학회의 자료실에 들어가 보았는데 자료가 없었다. 아 쉽게도 내가 원하는 자료를 찾아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나는 인터넷 기사를 찾던 도중 통영고지도를 찾았다. 1830년에 만들어진 통영의 고지도 모습이었다. 통영의 거 북선호텔에서 1620만원을 주고 구입한 통영고지도를 확인해 볼 수 있었는데, 정말 통 제영 앞이 만으로 되어 있었다. 현재의 지도와 비교해 보았을 때 판판한 현재의 통영 의 모습과 달리 지금보다 리아스식해안이 심한 통영의 모습을 보았다.

조금만 파헤쳐 보았다면 지금의 해안선이 예전의 해안선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하지 만 현재와 다른 해안선을 찾아보니 교수님이 파헤쳐 보라는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 이 제서 알 것 같았다.

통영을 조사해보니 내가 살았던 아산시는 신창, 온양, 아산의 성격이 각각 특징이 강 했다. 물론 아산시는 내가 살았던 곳이라 성격 파악이 쉬운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 만 통영은 주변의 시와의 관계에 좌지우지 되는 것 같다. 아산시도 천안과 관계로 아 산시가 경제가 정해지긴 하지만 통영의 과거는 훨씬 심하지 않았나 싶다.

- 내가 잘 모르는 지역을 조사했을 때와 잘 아는 지역을 조사했을 때 어떤 관점으로 조사를 했을까?

통영과 아산을 조사했을 때 먼저 각 시청의 홈페이지를 방문했던 건 같은 시작 순서 였다. 아산시는 시청에서 소개된 것들을 보면 하나하나 추억이 떠올랐고 내가 소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통영의 경우는 그 동안 조금씩 들어보았던 것들이나, 내가 통영이 아니더라도 흥미를 가질 수 있는 부분을 조사하려는 것을 조금 느껴 볼 수 있 었다.

또한 저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저번 주 과제는 내가 그대로 써넣었던 부분들이 많았 다. 아산시 사이트에 있는 부분이나 혹은 단행본이나 논문에 있는 부분을 그대로 집

26) 한국고지도연구학회: http://www.oldmap.or.kr/sobis/kraom.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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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넣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 과제는 직접 넣은 부분은 없었다.

일요일 저녁, 지금까지 했던 과제를 살펴보았다. 지리적 부분이 적을 수도 있다는 생 각이 들었다. 지리라고 적고 조사를 시작했지만 전통적인 지리에 관한 부분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내용이 채워진 것은 통영을 찾기 위한 나만의 파헤치기가 아니었을까 한다.

통영이라는 땅에 통영의 정체성이 없었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고성의 역사가 통영의 역사였고 거제의 역사가 통영의 역사의 한 부분이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통영만의 무 엇인가를 찾고 싶었다.

아마 “여기서 부터는 통영이다.” 싶었던 부분이 통제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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