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篠齋 徐淇修 詩 硏究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2

Share "篠齋 徐淇修 詩 硏究"

Copied!
22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篠齋 徐淇修 詩 硏究

1)

이 현 일*

❙국문초록❙

소재(篠齋) 서기수(徐淇修, 1771~1834)는 대표작인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가 최근에 학계에 보고되면서 그의 생애와 산문 문학의 일단이 소개된 바 있다. 그러나 정조 연간에 배양되어 순조 연간까지 활동한 수많은 문인 학자들 중에서 한몫을 담당했던 사람임에도 아직까지 그의 시문학에 대한 연구는 진척된 바가 없었다.

이 논문에서는 그의 시세계를 네 가지 측면에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그의 발자취를 따라 초기에 남긴 기행시를 살펴 보았다. 두 번째로 그의 갑산(甲山) 유배 시절의 작품들에 주목하여 그곳의 풍속과 백두산 기행을 읊은 작품을 살펴보았다. 세 번째로는 유배 이후의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 중에서 특히 삼연(三淵) 김창 흡(金昌翕, 1653~1722년)의 「갈역잡영(葛驛雜詠)」을 본받아 잡영(雜詠) 형식으로 지은 작품에 주목하였다. 마 지막으로 임진년(壬辰年, 1832)의 극심한 가뭄과 홍수를 읊은 작품을 읽어 보았다.

그의 시세계를 전체적으로 총괄하면, 서기수는 평범한 풍경과 정서를 비범하게 표현하는 것에 장기가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비범한 광경과 경험을 범상하지 않게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은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주제어] 서기수(徐淇修), 󰡔소재집(篠齋集)󰡕, 조선후기 한시, 함경도 갑산(甲山), 백두산(白頭山), 임진년(壬辰年, 1832) 자연재해

❙목 차❙

Ⅰ. 들어가며

Ⅱ. 서기수(徐淇修)의 시세계

Ⅲ. 나오며

Ⅰ. 들어가며

소재

(

篠齋

)

서기수

(

徐淇修

, 1771~1834)

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경화벌열 가문의 하나인 달성 서씨 가문에

* 성균관대학교 조교수 / translator@paran.com

(2)

서 태어나서 소년시절 주로 강화학파의 영향권 안에서 수학한 것으로 보인다

.

순조

1

(180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탄탄대로를 걸어가던 서기수는 순조

5

(1805)

정순왕후

(

貞純王后

)

가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정치 적 격변이 있을 때 큰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된다

.

김달순

(

金達淳

, 1760~1806)

이 실각하고 재종형인 서형수

(

徐瀅修

, 1749~1824)

등이 그 일파로 지목받아 유배를 당할 때

,

모종의 복잡한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죽음 의 문턱에까지 갈 뻔하였던 것이다

.

다행히 순조의 배려로 위기를 넘기고 함경도 갑산

(

甲山

)

으로 유배를 떠 나게 된다

.

순조

10

년 해배된 이후에도 계속 야인 생활을 하다가 순조

22

(1822)

에야 고성

(

固城

)

현령

(

縣 令

)

으로 다시 벼슬실에 나아기 시작하여 벼슬이 예조 참판에 이르렀다

.

1)

서기수의 문집인 󰡔소재집

(

篠齋集

)

󰡕은

4

(

) 4

(

)

으로

,

본질적인 차이는 거의 없는

2

종의 필사본이 각 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데

,

이 글에서 텍스트로 삼은 것은 장서각본이다

.

1

에는 대략

20

대 초반부터 순조

21(1821) 1

월까지의 시

194

(

)

,

2

는 순조

22

(1822)

고성현령으로 부임한 뒤부터 순조

33

(1833)

까지의 시

150

제가 실려 있다

.

시의 배열은 대체로 편년순인 것으로 판단되 지만

,

간혹 순서가 뒤바뀐 곳이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

2)

그의 문학적 성취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갑산 유배 시절에 백두산을 직접 등반하고 지은 「유백두산기

(

遊白頭山記

)

」를 꼽을 수 있다

.

이전까지의 백두산 기행문이 대체로 정계비

(

定界碑

)

를 세울 때의 답사와 관 련되어 내용이 공식적이고 무거울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다

.

또 그렇지 않더라도 간략한 일기식 기록 방식 을 취하거나 경세적인 성향이 농후한 경우가 주류였다

.

이와 달리 서기수의 작품은 조선후기 경화세족의 소 품취가 짙게 반영되어 읽는 재미가 가장 풍부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

필자는 선행 연구에서 그의 생애

,

가계와 함께 이 작품을 집중적으로 분석했으며

,

아울러 보론

(

補論

)

으로 서기수의 당숙인 서명응

(

徐命膺

, 1716~1787)

의 「유백두산기」의 텍스트에 대한 여러 문제를 논한 바 있다

.

3)

따라서 그의 생애나 가계

(

家系

)

등에 대해서는 이미 앞의 글에서 기술한 바 있으므로

,

이 글에서는 그의 시세계를 집중적으로 논하기로 한다

.

우선 유배 이전 초기의 시들 중에서는 그가 발자취를 따라 남긴 기행시들에 대해서 주목하려고 한다

.

그 리고

,

그의 삶에서 중요한 전기

(

轉機

)

가 되었던 갑산

(

甲山

)

유배 생활에서의 작품들 중에서는 그곳의 자연적 민속적 특징이 두드러지게 포착된 두 편의 장편 고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

그 다음에는 해배 이후 야인 시절 에 김창흡

(

金昌翕

, 1653~1772)

의 영향을 받아 지은 칠언절구 연작을 통해 그의 학술과 문예에 대한 생각과 일상의 흥취를 읽어보고

,

마지막으로 만년의 작품들 중에서는 가뭄과 홍수가 연이어 전국을 강타해 온 나라 가 극심한 도탄에 빠진 모습을 생생히 묘사한 두 편의 장편 고시를 논해보려고 한다

.

1)김달순 옥사(獄事)로 실각한 김매순(金邁淳, 1776~1840)과 서유구(徐有榘, 1764~1845) 등이 복권되어 다시 벼슬길에 나아 가게 된 것은 서기수가 벼슬길에 다시 나아간 지 2년 후인 순조 24(1824) 무렵이다. 서기수의 가계와 생애에 대해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현일, 「篠齋 徐淇修의 <遊白頭山記> 연구」, 󰡔古典文學硏究󰡕 42, 韓國古典文學會, 2012, 420~429쪽 참조. 2)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현일, 위의 글, 429쪽 참조.

3) 이현일, 위의 글, 참조.

(3)

Ⅱ. 서기수(徐淇修)의 시세계

1. 초기의 기행시

서기수 자신이 남긴 글 중에서 그의 시를 바로 언급하기 위한 글은 아니지만

,

그의 문학적 지향을 알 수 있는 글을 한 대목 읽어보는 것으로 본론을 시작하려 한다

.

우리나라 사람의 글은 부솔(傅率)하다는 것은 김삼연(金三淵)의 말인데 세상에서 확고한 평으로 여 긴다. 나는 유독 우리나라 글이 부솔한 것 중에서도 산수기(山水記)처럼 심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째서인가? 자후(子厚, 柳宗元)의 심담초각(深湛峭刻)을 배울 수 없으면, 육무관(陸務觀)의 울타리 아 래로 기어들어간다. 날씨를 기록하고 행정을 밝히며, 음식, 기거(起居), 농담 등등을 붓 아래 모조리 뭉 뚱그려서 도무지 두서가 없고, 때때로 솔숲 길에서 갈도(喝道)하는 살풍경을 범하기 마련이라 속되기 가 쉽고 공교롭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우리나라의 명산을 물리도록 유람하여, 개마(盖 馬), 금강(金剛), 속리(俗離), 단구(丹邱), 천마(天磨), 아사(阿斯, 필자-九月山을 가리킴)에 모두 발길 이 닿았지만, 오직 개마에 대해서만 유기(遊記)를 남기고 나머지는 짓지 않았던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 하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케케묵은 습기(習氣)에 빠질 것을 몹시 두려워하여, 도리어 단율(短律)로 경치를 묘사하고 회포를 말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4)

스스로 자부하는 여행가였던 서기수는 백두산

,

금강산

,

속리산

,

단양팔경

(

丹陽八景

),

천마산

,

구월산 등을 여행했지만

,

유기

(

遊記

)

를 남긴 것은 백두산 등반 때뿐이라는 것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

유종원

(

柳宗元

)

의 고 묘

(

高妙

)

한 수단은 배우기 어렵고

,

부득이하게 육유

(

陸游

)

의 󰡔입촉기

(

入蜀記

)

󰡕처럼 일기식으로 잡다한 내용 을 담는 것은 사양하겠다는 것이다

.

그래서 차라리 절구나 율시로 그때그때의 풍광과 회포를 기록하여 남겠 다는 고백이다

.

여기서 두 가지 점을 주목해야 하는데

,

하나는 범상한 작품에 만족하지 않겠다는 문인으로서 의 자부심이고

,

다른 하나는 그의 초기 시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기행시들의 창작 배경이다

.

이제 그가 유 람한 각 권역별로 대표적인 작품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

「단발령 斷髮嶺」

峽行殊未已 산골짝 가도가도 끝이 없으니

始知葱嶺艱 비로소 총령(葱嶺)이 험난한 줄 깨닫게 됐네. 危登石櫃閣 아슬아슬 석궤각(石櫃閣)을 겨우 올라가 遠見匡廬山 아마득히 광려산(匡廬山)을 보는 격일세.

4)󰡔篠齋集󰡕 卷3, 35a, 「申紫霞崧緣錄跋」: “東人之文傅率, 此金三淵語也. 世詫以爲鐵枰.(필자-枰은 秤()의 誤寫로 생각된다) 余獨謂東文傅率, 莫如山水記之甚. 何者? 子厚之深湛峭刻, 旣不可學, 則輒匍匐于陸務觀樊籬下. 記陰晴, 著程里. 於是乎飮食、

起居、諧笑, 凌雜畢湊筆下, 漫無剪裁, 往往犯松間喝道之戒, 其易俗而難工也. 固宜余素倦遊域內名山, 如盖馬、金剛、俗離、丹 邱、天磨、阿斯, 皆足跡所到. 唯盖馬有記, 餘皆闕然. 誠恐墜東人腐頭巾中, 還不如短律近體之猶可寫景抒懷耳.”

(4)

方丈高低處 절집들은 높고 낮은 곳곳에 있고 烟雲明黑間 구름 안개 환하거나 어둑하거나. 導吾雙白鶴 길라잡이 노릇하던 두 마리 백학 先去杳難攀 저 멀리 먼저 떠나 못 따라 잡네.5)

「장안사 長安寺」

講鍾廖亮出林中 숲속에서 들려오는 강당의 우렁찬 종 白塔之西寺路通 오솔길은 백탑의 서쪽으로 통했구나. 山不在天行卽到 산 높아야 하늘 아래, 가다 보면 닿게 되고 石皆成佛色還空 바위 모두 부처 됐나 빛깔 되려 공(空)하구나. 雲連萬檜吟風葉 구름 덮인 회나무 숲 바람 읊는 나뭇잎들 霜薄千崖背日楓 서리 내린 골짜기들 해를 등진 단풍나무. 最是水寮幽絶處 물가 근처 요사채 참으로 고요한 곳

點燈留客愧圓公 등불 켜고 머무는 손 원공(圓公)에게 부끄럽네.6)

앞의 시는 단발령에서 금강산을 바라보면서 쓴 작품이고

,

뒤의 시는 금강산을 대표하는 명찰

(

名刹

)

중 하 나인 장안사를 읊은 작품이다

.

앞의 시에서는 단발령을 석궤각에

,

금강산을 광려산에 비유하며 단발령의 험 준함과 금강산이 속속들이 보이는 이곳의 전망을 묘사하고 있다

.

두 번째 시는 장안사로 가는 길의 험준함과 그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하고 있는데

,

특히 함련에 묘미가 있다

.

마지막 구의

원공

(

圓公

)

에게 부끄럽 다

고 말한 것은 동산

(

洞山

)

원선사

(

圓禪師

)

와 남선사

(

南禪師

)

가 한밤중 서로 침묵한 체 지냈으면서도 도력

(

道力

)

을 알아본 일화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며

,

일종의 겸사라 할 수 있다

.

7)

「화강 가는 길 花江途中」

行邁淹晨暮 밤낮 없이 먼 길 떠나 가는 길이라 衣裳峽氣凉 옷에는 산골 기운 서늘하구나. 秋光生貊國 가을 빛은 맥국(貊國)에서 돋아나면서 山色落魚梁 산 때깔은 낚시터로 떨어지는데, 雨外村砧急 빗소리 너머로 다듬이 급박해지고 霜前崖菊香 서리 앞둔 국화꽃은 향기롭구나. 花江頻悵望 화강 자주 돌아보는 서글픈 마음

5) 󰡔篠齋集󰡕 卷1, 3a.

6) 󰡔篠齋集󰡕 卷1, 3b.

7) 󰡔林間錄󰡕 卷下: “洞山圓禪師嗣雪竇.……時南禪師住黄檗, 因出邑相見於净戒寺. 南公黙無所言, 但焚香, 相向危坐而已. 自申時 至三鼓, 圎公即起, : ‘夜深, 妨和尙偃息.’ 趨出, 明日各還山. 南公偶問永首座, ‘汝在廬山, 識今洞山老否?’ 永曰: ‘不識. 止聞其 名久之.’ 進曰: ‘和尙此囘見之如何人?’ 南公曰: ‘奇人!’ 永退問侍者, ‘汝隨和尙, 見洞山夜語及何事?’ 侍者以實告. 永笑曰: ‘疑殺天 下人.’”

(5)

沙鳥暫相將 물새가 잠시나마 벗을 해주네.8)

「삼일포 三日浦」

蒼松湖寺路 푸른 솔 숲 호수가 절집 가는 길 紅葉郡山秋 붉은 단풍 온통 물든 산속의 가을. 冉冉樓光凈 언뜻언뜻 다락 풍경 맑고도 곱고 輝輝沙日流 반짝반짝 사장(沙場) 위로 햇빛은 흘러. 仙郞杳無跡 화랑님들 까마득히 자취 없는데 詩釋偶同舟 우연히 한 배에 탄 시인과 스님. 靈境待吾入 신령한 땅 나 오기를 기다렸었나 荷花種列洲 섬들마다 연꽃이 피어났으니.9)

앞의 시는 강원도 내륙을 흐르는 화강

(

花江

)

부근을 지나며 보이는 이런저런 가을 든 산촌의 풍광들을 묘 사한 작품들로서 특히 미련

(

尾聯

)

은 화강 주변의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작자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

뒤의 시는 관동팔경

(

關東八景

)

중의 한 곳인 삼일포에서 지은 작품으로

,

전체적으로 삼일포를 선경

(

仙境

)

으로 만들고 있는데

,

특히 마지막 두 구의 표현이 재치있다

.

「한벽루 寒碧樓」

下馬淸風縣 청풍현 닿아서 말을 내리니 江樓翼瓦齊 강루의 지붕은 나래를 편 듯. 閭閻靑嶂合 이문(里門)이 푸른 산과 하나가 되고 鳴吠白雲迷 닭 울음 개 소리 흰 구름 속 아마득하네. 漁唱樽前入 뱃노래는 술 통으로 들려오는데

花飇濂外凄 주렴 밖 낙화들은 처량하구나. 直須橫一葉 모름지기 조각배 한 척을 띄워

看月錦屛西 금병산(錦屛山) 서쪽에서 달을 봐야지.10)

「도담 島潭」

島北島南春水澄 섬의 북쪽 남쪽으로 봄물은 맑디맑아 樵風撥棹縠紋增 순풍(順風)에 배 띄우니 비단 물결 넘실대네. 篷牕面面看衡嶂 봉창으로 보이는 건 형산(衡山)의 봉우리요 仙洞時時似武陵 신선 골짝 때때로 무릉도원(武陵桃源) 꼭 같구나. 峭壁霞殘紅未了 절벽 물든 저녁노을 붉은 빛 끝이 없고

8) 󰡔篠齋集󰡕 卷1, 3b~4a.

9) 󰡔篠齋集󰡕 卷1, 4a.

10) 󰡔篠齋集󰡕 卷1, 5a.

(6)

汀洲鳥沒碧相仍 물가의 새 잠수한 곳 벽색(碧色) 계속 이어지네. 何來五馬踟躕立 어디서 온 수령이 머뭇머뭇 서 있으며

愁殺烟鬟喚不譍 연환(烟鬟)이 응답하지 않는다고 시름하랴!11)

앞의 시는 청풍 한벽루의 제영시

(

題詠詩

)

로서 청풍현에 닿자마자 보이는 한벽루의 날아갈 듯한 자태를 묘 사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

고지대에 위치한 이 고을의 특징적인 풍광

,

한벽루에서 보이고 들리는 시적인 이미 지들을 차례로 묘사한 뒤 눈앞에 보이는 강물에 배를 띄우고 금병산 주위로 뱃놀이를 떠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였다

.

뒤의 시는 단양팔경

(

丹陽八景

)

중의 한 곳인 도담

(

島潭

)

을 읊은 작품이다

.

도담삼봉

(

島潭三峰

)

의 풍광을 중국의 형산

(

衡山

)

과 무릉도원에 비기면서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불게 물드는 저녁 노을

,

흰 물새 자 맥질하는 너머로 펼쳐진 푸른 강물을 대비시키고 있다

.

마지막 두 구는 󰡔옥대신영

(

玉臺新詠

)

󰡕에 실린 옛 시 에서 끌어온 것인데

,

12)마지막 구의

연환

(

烟鬟

)’

은 주지하듯이 두 가지 뜻이 있다

.

곧 여인의 풍성한 머리숱 을 의미하기도 하고

,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낀 산봉우리를 가리키기도 한다

.

여기서는 물론 두 가지 뜻을 포개어 쓴 것이다

.

지인이 이 근방의 지방관으로 부임하여 함께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

.

「속리산으로 가며 向俗裡」

名山在何虛 명산은 어느 곳에 솟아 있는가 天際辨雲林 하늘가에 구름낀 숲 보일 듯 말 듯. 路轉千峰去 길 꺾이면 산봉들 떠나가는데 花明一澗深 시내 따라 오솔길엔 꽃들은 환해. 偶然流水側 우연히 흐르는 물 곁에 갔다가 偏感旅遊心 특히나 객수가 느꺼워지네. 杖屨非眞迹 옛 발걸음 남겼었던 곳은 아니나 峩洋奏舊音 산 높고 물 도도한 옛 곡조 연주하네.13)

「법주사 法住寺」

十二虹橋路不窮 무지개 다리 열 둘 넘어 가는 길 끝없더니 大羅天竺一時通 대라(大羅)와 천축(天竺)이 한 번에 통했구나. 深春佛殿金銀氣 깊은 봄 불전에는 금은기(金銀氣) 가득하고 落日僧廊鍾磬風 저녁 해 승사(僧舍)에는 바람결 쇠북 경쇠. 簇簇峯含微雪色 빽빽 솟은 봉우리들 눈빛 약간 머금었고 層層樹露亂雲中 겹겹의 나무들은 구름 속에 언뜻 뵈네. 荒哉義釋傳經意 의신(義信)이 불경 전한 그 뜻이 황당하니

11) 󰡔篠齋集󰡕 卷1, 5b.

12) 󰡔玉臺新詠󰡕, 「日出東南隅行」: “使君從南來, 五馬立踟躕.”

13) 󰡔篠齋集󰡕 卷1, 4a.

(7)

莫是瞿曇道欲東 이 땅에 불도(佛道)를 전파하기 위함 아닌가?14)

앞의 시는 속리산으로 출발하면서 지은 시이다

.

함련

(

頷聯

)

은 특히 산 넘고 물 건너 길을 가는 정취를 묘 미있게 묘사한 것이고

,

경련은 흐르는 물을 보면서 특히 객수에 빠지는 시인의 예민한 심사를 말한 것이다

.

미련은

,

비록 이곳을 자신은 처음 와보지만

,

예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아름다운 산과 물의 이미지를 이곳 에서 찾을 수 있음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뒤의 시는 속리산을 대표하는 절인 법주사를 읊은 작품이다

.

두 번째 구의

대라

(

大羅

)’

는 도교

(

道教

)

에서 말하는 삼십육천

(

三十六天

)

중에서 가장 높은 하늘을 가리키는 데

,

수련 전체는 법주사가 속리산 속에서도 높은 곳에 있어서 찾아가기가 어려움을 강조한 것이다

.

함련과 경련은 법주사 안팎의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한 것이며

,

미련에서는 유자

(

儒者

)

답게 법주사를 창건했다고 전 해지는 의신

(

義信

)

이 불법을 우리나라에 전파하려 한 사실이 못마땅함을 말하였다

.

이상 살펴본 작품들은 모두 산수기

(

山水記

)

를 대신하여 그때그때의

경치를 묘사하고 회포를 말하기

[

寫景 抒懷

]”

위하여 지어진 작품으로 각지의 풍광과 객회

(

客懷

)

가 잘 버무려져 있다

.

2. 유배지의 풍경과 정서

서기수의 유배지인 함경도 갑산은 국토 최북단에 자리한 곳으로 늘 그 옆의 삼수

(

三水

)

와 함께 오지

(

奧地

)

의 대명사로 병칭되는 곳이다

.

서울에서 너무나 먼 이곳에서 거의

5

년을 보내면서 서기수는 남다른 경험을 하고 주목할 만한 작품

2

수를 남겼다

.

하나는 자신의 형이 보낸 시에 차운하면서 이곳의 풍토를 묘사한 작품 이고

,

다른 하나는 백두산을 올라보고 지은 작품이다

.

먼저 전자를 살펴보자

.

「이주

(

夷州

)

의 풍토에 대해서 서술하는 말로 삼가 큰형님께서 보내 주신 사십운을 따라 짓다 以夷州風土記言

,

謹次伯氏寄示四十韻」의 전반 부는 갑산의 풍토와 민정

(

民情

)

에 대해 서술하고

,

후반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잘 자란 조카들을 찬탄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

󰊱 遙依北斗望京國 멀리 북두에 의지하여 한양을 바라보니 關路一千里有餘 변방까지 지나온 길 천리가 넘습니다.

雷播春循言也怕 뇌(雷), 파(播), 춘(春), 순(循)처럼 말만 해도 무서운 험한 고을 閩巴越雟險何如 민(), 파(巴)나 월휴(越雟)와 비교하면 험난함이 어떠할까요? 圓扉生出君恩重 옥문(獄門)에서 살아 나왔으니 임금님 은혜 무거우나

絶域孤投客恨歔 외딴 곳으로 외로이 떠나 왔으니 나그네는 한스러운데, 屈子秋蘭悲澤畔 굴원(屈原)의 가을 난(蘭)을 못가에서 슬퍼하고 惠連春草夢鄕閭 사혜련(謝惠連)의 봄 풀 돋는 고향을 꿈꾸었습니다.

󰊲 漸見湖山還媚嫵 점차 이곳 풍광 익숙해지니 도리어 아름다와 보이고

14) 󰡔篠齋集󰡕 卷1, 4ab.

(8)

慣聽獠語不愁沮 사투리도 익숙히 듣다 보니 시름겹지 않습디다. 飯登粟麥芒猶刺 상 위에 오르는 조며 보리는 껄끄러워 입을 찌르고 羹作韭葱活欲舒 국 속의 부추나 파는 생것이라 펴질 듯합니다. 峒戶生平初見稻 산속 사는 사람들은 생전 처음 벼를 보고 官娃到老不知魚 관기(官妓)들은 죽을 때까지 물고기를 모른답니다. 亭廚坐臥同猫犬 정주에서 개나 고양이와 함께 생활하고

棧路薪樵捷鼬狙 벼랑길로 나무할 때는 원숭이처럼 민첩합니다. 聞是女眞曾管轄 듣자니 일찍이 여진족의 영토였다가

自從麗代襲冠裾 고려 시대부터 의관을 착용하게 되었답니다. 樺皮屋制從丁字 자작나무 껍질로 덮은 집은 정자(丁字) 모양이고 杉木窓楞指丙墟 삼나무로 만등 창문은 남쪽으로만 났습니다.

椵笠狗衣同介族 피나무 갓 개가죽 옷은 개족(介族, 갑각류나 거북)과 같고 鶉居鴝飮又毛茹 누추하게 살며 날 것을 먹고

甿風疾病惟穰鬼 병나면 오로지 귀신에게나 빌고

祭品粢盛只斫畬 제사에 쓰는 곡식은 단지 화전(火田)에서 나온 것일 뿐.

󰊳 採藥漚麻充戶役 약초 캐고 삼을 짜서 호역(戶役)을 납부하고 佃貂獵鹿供官漁 담비와 사슴 잡아 관가에 바치는데,

豆箕民斂心何猂 백성들 달달 볶아 거두어들이는 마음 어찌 그리 사나운지? 鞭達令嚴背出蛆 명령 엄해 채찍질에 등이 터질 지경입니다.

營餉縣租俱責稅 군영이며 고을이며 모두 세금 독촉에

氷塹雪壑謾愁疽 얼음 구덩이 눈 골짝 다니며 동상(凍傷)을 걱정합니다. 幨帷漢郡誰宣化 수레 타고 고을에 도착하여 누가 임금의 성덕을 펼 것인지15) 杼軸東民已竭儲 동녘 백성들 이미 재산을 모두 탕진하였습니다.

󰊴 惡瀨象奔同灩澦 코끼리 날 뛰듯 거센 여울은 염예퇴(灩澦堆)와 마찬가지고 重巒劍束捴環滁 겹겹 산봉우리 칼을 묶어세운 듯 온 고을을 둘러쌌으며, 土黃嶺勢長蛇伏 토황령(土黃嶺) 형세는 긴 뱀이 웅크린 듯

鼻白峰光匹練紓 비백봉(鼻白峰) 산 빛은 흰 비단을 펼친 듯. 四月山寒霜氣中 사월에도 산은 추워 서리 기운 싸늘하고

九秋風急雪飛踈 가을에는 바람 거세 드문드문 눈발이 날립니다.16)

󰊵 偏憐蕙服空離玦 옥결(玉玦) 없이 혜복(蕙服)만 입은 것이 안타까우니 誰識鑾坡舊校書 뉘라서 한림원(翰林苑)의 교서랑(校書郞)을 알아보겠습니까. 祿閣燃藜慙蔑學 천록각(天祿閣)에서 명아주 때며 보잘 것 없는 학문 부끄러웠고 柏梁授簡竊虛譽 박량대(柏梁臺)에서 문장 지어 헛된 명예를 훔쳤습니다. 官盤五夜宣金橘 오경(五更)의 관반(官盤)에는 하사하신 금귤(金橘)이 나오고

15) 庾信 ≪宇文公神道碑≫: “幨帷入境,貪殘者解印; 冕旒從政,仁義者郊迎 16) 󰡔篠齋集󰡕 卷1, 17a~18b.

(9)

天語三時接綺䟽 화려한 궁궐에서 임금님 말씀을 아침 저녁으로 들었습니다. 譏切梁鵜恒戒惕 다리 위의 다리의 사다새를 풍자한 말을 늘 경계해야 했었는데17) 夢驚隍鹿豈虛徐 꿈 깬 뒤 숨긴 사슴 어찌 천천히 찾을 수 있겠습니까?18)

󰊶 謾敎一字黃庭誤 한 글자 󰡔황정경(黃庭經)󰡕을 잘못 읽어 竟致重雷白日噓 끝내 큰 우레 소리 맑은 날 울렸습니다. 罪我還應知我者 나를 죄 준 이가 나를 알아주는 이요

非天自作怨天歟 하늘이 아니라 스스로 지은 죄니 하늘을 원망하겠습니까. 批鱗徒負遼東子 역린(逆鱗)을 거슬림에 도리어 요동자(遼東子)를 저버렸고, 失馬還隨塞北居 말을 잃고 도리어 북쪽 변방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如醉如狂無恥漢 취한 듯 미친 듯 염치없는 놈이고

不忠不孝可憐渠 불충하고 불효한 가련한 자입니다.

󰊷 店月楊州如夢寐 양주(楊州)의 객점에서 본 달이 꿈속 같은데 春風梅嶺又居諸 봄 바람 부는 매령(梅嶺)에는 또 세월이 지나갑니다. 白鬚紅頰嗟賢伯 흰 수염과 붉은 볼의 어진 형님 생각하는데

犀角牛衣惱遠予 우의(牛衣)에 서각대(犀角帶) 차림 멀리 저를 근심케 합니다. 聽雨秋燈如昨耳 가을 등불에 비 소릴 듣는 것은 작년과 같다가

聆鴻曉枕忍堪且 새벽 잠자리 기러기 소리는 차마 못 듣겠습니다. 閨書每慴心熬火 집에서 오는 편지 매양 두려워 마음은 타들어가고 庭訓追思淚滿裾 아버님 가르침 생각해 보면 눈물로 옷깃을 적십니다. 却擬塤篪來日侍 형님 아우 훈(壎)과 지() 불며 모실 날을 생각하니19) 休敎常棣一春蘧 아가위가 봄날 갑자기 놀라지 않게 하소서.

人情今舊徒論雨 세상 인심 예나 지금이나 단지 안 좋을 때 따지는 법 世事滄桑戒折車 세상 일 급변하여 수레 전복됨을 경계합니다. 諸侄衣冠俱鳳鷟 여러 조카들 의젓하여 모두 봉황 같으니 羣兒翰墨孰龍豬 아이들의 문장 솜씨 우열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 回瞻蘭署如天上 고개 돌려 승정원(承政院)을 하늘처럼 우러러보다 却把夷州作我廬 이주(夷州)를 내 집 삼아 살으렵니다.

炎火崑岡誰玉石 거센 불길 곤강(崑岡)을 덮치니 옥석(玉石) 구별 되겠으며 文章夔蜀振瓊琚 문장은 기주(夔州) 촉주(蜀州)에서 걸작을 산출했다지요. 閒中覓伴書爲上 한가함 속에서 벗 찾으니 책이 으뜸이고

身外無求夢亦虛 몸 밖에 구하는 것 없어서 꿈 또한 허허롭습니다. 雪窖鼠身空播越 눈구덩이 쥐 신세로 부질없이 옮겨 갔으니

西城酹傔謾躕躇 서쪽 성에서 종의 무덤에 술 뿌리고 머뭇거렸습니다.

17) 󰡔詩經·曹風·候人󰡕: “維鵜在梁, 不濡其翼.” 鄭玄箋: “鵜在梁, 當濡其翼, 而不濡者, 非其常也, 以喻小人在朝, 亦非其常.”

18) 󰡔列子·周穆王󰡕: “鄭人有薪於野者, 遇駭鹿, 御而擊之, 斃之. 恐人之見之也, 遽而藏諸隍中, 覆之以蕉, 不勝其喜. 俄而遺其所藏 之處, 遂以爲夢焉. 順塗而詠其事, 傍人有聞者, 用其言而取之.”

19) 󰡔詩經·小雅·何人斯󰡕: “伯氏吹壎, 仲氏吹篪.”

(10)

三乘禪偈須陶冶 삼승(三乘)의 선게(禪偈)로 모름지기 도야(陶冶)하고 一部朱書屢洗梳 한 질의 주서(朱書)를 자주 자세히 읽어 보면서, 聞道朝廷天日朗 듣자니 조정의 해가 밝으시다니

金雞將待報春初 장차 금계(金雞)가 봄을 알리기를 기다리렵니다.20)

󰊱은 갑산이 얼마나 외딴 곳인지를 말하고

,

자신을 살려 준 순조의 은혜에 감사하면서도

,

어쩔 수 없는 향 수와 울적한 심사를 토로하고 있다

.

3

구와 제

4

구의 뇌주

(

雷州

),

파주

(

播州

),

춘주

(

春州

),

순주

(

循州

)

및 민

(

),

(

)

월휴

(

越雟

)

는 모두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오지로 유배지 중에서도 극악한 곳이다

.

21)

8

구의

사혜 련

(

謝惠連

)’

은 사령운

(

謝靈運

)

이 꿈에 사혜련을 보고 영감을 받아

池塘生春草

라는 시귀를 지은 착각한 것으 로 보인다

.

22)

󰊲는 그곳의 풍토에 대한 서술이다

.

그곳의 사투리와 척박한 환경

,

입에 맞지 않은 음식

,

심지어 쌀과 물 고기도 본 적이 없는 백성들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

15

구의

정주

(

亭廚

)’

에 대해서는

부엌에 온돌을 두 니 십 무

(

)

정도는 될 만한데

정주

라 일컫는다

.”

라는 자주

(

自註

)

를 붙여 설명하고 있다

.

23)

19

구와 제

20

구는 가옥의 형태를 묘사한 것인데

,

각각

주택의 제도는 모두 정자

(

丁字

)

모양이다

.”

24)

창문은 모두 남쪽 으로 낸다

25)라는 자주가 붙어 있다

.

󰊳은 주로 갑산의 민막

(

民瘼

)

을 서술하고 있다

.

이 척박한 곳까지 부세 독촉이 심한데

,

특히 제

29

구 뒤에 는

고을에 병영곡

(

兵營穀

)

이 있어

,

갑산 백성들의 깊은 병이 되고 있다

.”

26)라 자주를 달아 밝혀 놓았다

.

󰊴 는 그곳의 험난한 산천 형세와 여름에도 눈이 내리는 기후를 서술한 것이다

.

󰊵는 자신이 과거에 급제하고 예문관검열

(

藝文館檢閱

)

을 지내던 때를 꿈처럼 회상한 것이며

,

󰊶은 자신이 겪은 고난을 우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에서 제

55

구 뒤에는

다락원에서 전별하던 자리를 가리킨다

.”

27)라는 자주를 달아 놓고 있는데

,

가 족들과 이별하던 때의 일부터 시작하여

,

유배 생활의 괴로움

,

형님에 대한 그리움

,

잘 자란 조카들에 대한 칭 찬까지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

󰊸은 두보

(

杜甫

)

의 시가 만년에 촉과 기주

(

夔州

)

에서 표박할 때 더 좋아진 것처럼 이번 유배 생활이 자신의 문장을 단련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

불서

(

佛書

)

와 주자서

(

朱子書

)

를 번갈아 보면서 좋은 날이 올 때를 기다리겠다는 다짐으로 끝맺고 있다

.

79

구 뒤에는 따 라온 종을 곡했다는 자주를 달아 놓고 있다

.

28)

20) 󰡔篠齋集󰡕 卷1, 17a~18b.

21) 󰡔元城語錄解󰡕(四庫全書本): 公曰: “安世除諫官三日, 有大除拜. 安世便入文字, 凡二十四章, 又論章惇十九章. 及得罪, 惇必欲見 , 人言: ‘春循梅新, 與死爲隣, 高竇雷化, 說著也怕.’ 八州惡地, 安世歴遍七州.” 解曰: “惇、卞之害元城也, 無所不用其機矣. 自今觀之, 嶺海之所謂惡地, 如春、梅, 如雷、化, 斯亦險矣. 而元城歴焉, 亦卒無恙, 何哉? 在我之誠心直道, 夫固有以勝夫險也. 莊生曰: ‘人心險於山川.’ 惇、卞以之. 易曰: ‘履道坦坦, 幽人貞吉元.’ 城以之. 讀者合而觀焉, 知所擇矣.”

22) 󰡔南史·謝惠連傳󰡕: “恵連年十歲能屬文, 族兄靈運加賞之, : ‘每有篇章, 對惠連, 輒得佳語.’ 嘗於永嘉西堂思詩, 竟日不就. 夢見恵連, 即得池塘生春草, 大以為工. 嘗云: ‘此語有神功, 非吾語也.’”

23) 自註:竈置坑堗, 可數十武, 號曰亭廚.”

24) 自註:宅制皆丁字形.”

25) 自註:戶牖皆向南.”

26) 自註:邑有兵營穀, 爲甲民痼瘼.”

27) 自註:指樓院餞席.”

(11)

이 시기에 지어진 중요한 작품 중에 반드시 언급해야 할 작품으로 또 백두산을 등반하고 지은 「백두산대 택

(

白頭山大澤

)

」이 있다

.

이 시는 그의 산문 중 대표작인 「유백두산기

(

遊白頭山記

)

」의 자매편이라 할 수 있 는 장편의 칠언고시

(

七言古詩

)

인데

,

연지봉

(

臙脂峰

)

에서 백두산 정상까지 오른 과정과 정상에서 목도한 광경 을 시로 읊은 것이다

.

29) 대택

(

大澤

)

은 물론

천지

(

天池

)’

를 가리킨다

.

󰊱 白頭之山天下脊 백두산은 천하의 등줄기로

萬古撑宵一卷石 만고토록 돌기둥처럼 하늘을 떠받치며,

白頭之澤川瀆宗 백두산 대택(大澤)은 강과 냇물의 종장(宗匠)으로 金景敞雲寶氣積 금빛 햇살 뭉개구름 보기(寶氣) 가득 쌓여 있네. 玉缺流落下大荒 옥결(玉缺)이 유락(流落)하여 광활한 황무지에 떨어져서 羌笛楊柳夷州客 변경의 봄 낯선 풍경 이주(夷州)30)의 나그네가, 一上壽宮瞻遠黛 한번 수궁(壽宮)에 올라 먼 산을 바라보니 紫烟幕幕沈圭璧 자주빛 안개 자욱하게 옥 같은 벽랑에 가라앉네. 整翮思矯哂夏虫 날개를 가지런히 하고 날고자 하는 여름 벌레 비웃고31) 廓盪天外窺禹跡 아득한 저 하늘 너머에서 우(禹)임금 자취를 엿보고저. 朝飮三池夕臙峯 아침에 삼지(三池)의 물 마시고 저녁에 연지봉(臙脂峰) 오르니 時維夏仲月生魄 이때는 한여름에 초승달 돋을 때라.

夜半大澤發洪鍾 한밤중 대택(大澤)에서 큰 종소리 울려 퍼지니 時雨將降鳴虩虩 단비 오려 우르릉 울리는 것이었으나,

精誠宵寐如有遌 밤새 산신을 직접 뵈옵는 듯 정성껏 기도 올리자 衡岳開雲今我亦 형악(衡岳)에서 구름 개 듯 지금 나도 효험 봤네. 天貌日容兩皎潔 하늘은 활짝 개고 해는 환히 비치고

朔風淅淅吹長策32) 북풍은 쉭쉭 지팡이로 불어 왔네.

󰊲 崩崖鑒斷開土門33) 깎아지른 절벽 아래 토문강(土門江)을 기준으로 烏剌短碣分疆場 오랄총독(烏剌總督) 세운 비석 국경을 나누었네.

捫參歷井冒垂堂 위험을 무릅쓰고 삼성(參星)을 붙잡고 정수(井宿)를 지나고서 却顧所歷還驚啞 거쳐 온 곳 돌아보다 도리어 깜짝 놀랐구나.

婉蟺秀色揷晴昊 구불구불 빼어난 모습 푸른 하늘에 꽂혔으니

太行王屋千萬尺 태행산(太行山) 왕옥산(王屋山)처럼 천만척이나 높은 듯.

28) 自註:哭天傔故云.”

29) 서기수의 당숙인 서명응 역시 갑산에 유배되었을 때 백두산을 등반하고 「遊白頭山記」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한유(韓愈)

「남산(南山)」 시의 운()으로 「白頭山詩, 用韓文公南山詩韻」라는 작품을 지었다. 이 작품에 대해서 보다 자세한 것은 이국 , 「조선시대 「南山詩」 차운시의 양상과 문학적 특징」, 󰡔어문논집󰡕 70, 민족어문학회, 2014, 57~63쪽 참조.

30) 王之渙, <凉州詞二首>之一: “黄河遠上白雲閒, 一片孤城萬仞山. 羌笛何須怨楊柳, 春光不度玉門關.”(󰡔全唐詩󰡕 卷253) 󰡔新增 東國輿地勝覽󰡕 卷49, 「咸鏡道」, <甲山都護府>: “[郡名] 虛川, 夷山, 甲州.”

31) 󰡔文選󰡕, 孫綽, 「游天臺山賦」: “哂夏蟲之疑冰, 整輕翮而思矯.” 李善注引 󰡔方言󰡕: “, 飛也.”

32) 淅淅:대본에는 浙浙로 되어 있으나, 淅淅의 잘못으로 생각되어 바로잡았다. 33) 鑒:대본에는 殹()+()로 되어 있으나, 鑒의 잘못으로 생각되어 바로잡았다.

(12)

春氷未泮秋雪瀌 봄에도 얼음 안 녹고 가을에도 눈이 펄펄 嶽頂不斷四時白 산꼭대기 끊임없이 사시사철 하얗구나. 淑氣融融湊靑邱 맑은 기운 은은하게 청구(靑邱)에 어리어서 勢若萬馬奔平陌 그 기세가 만 마리 말떼가 평원을 달려가듯. 南起銕嶺達京邑 남쪽으로 철령(銕嶺)을 일으키고 서울까지 닿았으며

北峙長白控朔磧 북쪽으로 장백산(長白山)이 솟아올라 삭방(朔方) 사막 휘어잡았네. 天地荒荒目力窮 거친 하늘과 땅 시력이 다하도록 조망하노니

滅沒胡山失雲翮 호산(胡山)은 보일락 말락 좇던 새 자취를 잃었노라.

󰊳 劈開翠峽走雲雷 푸른 산골 가르고서 구름 우레 달리더니 一望澒洞涵鉅澤 넘실대는 큰 못을 넣었구나.

放杖茫然若有失 지팡이 던지고 멍하니 서 있노라니

萬頃玻瓈界天碧 만경(萬頃)이나 되는 유리가 하늘과 잇닿아 푸르구나. 遠看是色近却空 멀리 볼 땐 색이 있더니 다가서니 투명하고

日月相戛寒湱湱 해와 달이 서로 닿고 싸늘한 한기가 느껴지네.

苕流天目毓人傑 초계(苕溪)는 천목산(天目山)에서 흘러 인걸(人傑) 키우고34) 河出崑崙散地脈 황하(黃河)는 곤륜산(崑崙山)에서 나와 지맥(地脈)으로 흩어지네. 列嶂包澤含蓮房 늘어선 봉우리들 대택(大澤)을 연방(蓮房)처럼 감쌌는데 北缺一罅黑流齚 북쪽으로 한 줄기 물이 흘러 흑룡강(黑龍江)의 원류가 되네.35) 一山膚骨分表裏 온 산의 피부와 뼈가 안팎으로 나누어져

矗立雲根工刻畫 늘어선 바위들은 공교롭게 새겨낸 듯. 雙闕瓊臺湧出空 궁궐과 누대가 하늘에서 솟아나고 猛獸奇鬼森欲拍 맹수와 귀신들이 빽빽히 튀어나올 듯. 層層戴石倒澄漣 켜켜이 쌓인 바위 맑은 물에 거꾸로 비추고 煥爛靑黑黃白赤 오방색 그 빛깔이 찬란하구나.

若爲燃得牛渚犀 만약 우저서(牛渚犀)가 있어 태울 수 있다면36)

直燭蜿蜿神物宅 바로 신물(神物)이 사는 곳을 환히 비출 수 있었을 텐데.

󰊴 窮髮天地載職方 이 세상의 북쪽 끝이 직방(職方)에 실렸으니 濡足褰裳秦漢辟 진한(秦漢) 시절 발 적시고 치마 걷으며 개척했던가. 奇哉造物爲此弄 기이하도다! 조물주가 묘한 솜씨로

攫土搏沙元化闢 흙과 모래 주물러 이렇게 빚어 놓다니! 衆山左海列兒孫 동해의 여러 산들 자손들처럼 늘어서니

34) 󰡔漢語大詞典󰡕: “苕溪, 水名. 有二源: 出浙江天目山之南者爲東苕, 出天目山之北者爲西苕. 兩溪合流, 由小梅、大淺兩湖口注入 太湖. 夾岸多苕, 秋後花飄水上如飛雪, 故名.”

35) 洪良浩, 󰡔耳溪外集󰡕 卷12, 󰡔北塞記略󰡕, <白頭山考>: “黑龍江, 在黑龍江城東, 古名黑水, 亦曰完水. 又名室建河, 亦名斡難河. 源出喀爾喀北界肯特山, 土人謂之敖嫩河.”(󰡔叢刊󰡕 242, 364a)

36) 󰡔晉書·溫嶠傳󰡕: “[溫嶠]至牛渚磯, 水深不可測, 世云其下多怪物, 嶠遂燬犀角而照之. 須臾, 見水族覆火, 奇形異狀, 或乘馬車著 赤衣者. 嶠其夜夢人謂己曰: ‘與君幽明道別, 何意相照也?’ 意甚惡之. 嶠先有齒疾, 至是拔之, 因中風, 至鎮未旬而卒.”

(13)

五嶽中州相仲伯 중국의 오악(五嶽)과 우열을 다투누나.

萬象宙合八冥觀 우주의 삼라만상을 명관(冥觀)할 수 있다 여겼더니37) 登泰反覺區中偪 태산에 올라서 도리어 지역이 좁은 것을 깨달았구나.

南至福州北瑟海 남쪽으로 복주(福州)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슬해(瑟海)에 이르며 扶桑若薺暾出赫 붉은 해가 솟아나는 부상(扶桑)이 냉이처럼 보이네.

祝融炎炎不敢驕 뜨거운 축융(祝融)도 감히 교만하게 굴지 못하니38) 晴雪長空落巾幘 맑은 날에도 쌓인 눈이 두건으로 떨어지기 때문이지. 女眞白鹿越朝鮮 여진(女眞) 땅 흰 사슴이 조선으로 넘어오고 鴨綠江光瀉木柵 압록강 물빛이 목책(木柵)에 드리우네. 踞豹攀鶻依神力 산신령 힘을 빌려 표범 타고 송골매 잡았으니

信我人窮非天阨 진실로 내 곤궁함 사람 탓이지 하늘이 내리신 게 아니로구나. 北來瓌賞冠平生 북쪽으로 쫓겨 왔다 평생 으뜸 유람하니

不恨九死瓊崖謫 경애(瓊崖)에서 나오며 동파(東坡)가 하신 말씀 내게도 해당되네. 聞道世人失烟霧 듣자니, 세상 사람들 안개 속에 길 잃었다니

何異風逆三山舶 삼신산(三神山) 다 갔다가 역풍 만난 격이겠지!39)

전체적으로 운각

(

韻脚

)

은 입성

(

入聲

)

맥운

(

陌韻

)

에 속한 글자들을 위주로 하면서

,

중간중간 상평성

(

上平 聲

)

동운

(

冬韻

),

하평성

(

下平聲

)

양운

(

陽韻

),

거성

(

去聲

)

대운

(

隊韻

),

상평성 동운

(

東韻

),

입성

(

入聲

)

약운

(

藥 韻

),

입성 설운

(

屑韻

),

상평성 원운

(

元韻

),

하평성 마운

(

麻韻

),

상성

(

上聲

)

호운

(

皓韻

),

입성 옥운

(

屋韻

),

하평 성 우운

(

尤韻

),

입성 집운

(

緝韻

),

상평성 회운

(

灰韻

),

입성 질운

(

質韻

),

상성 지운

(

紙韻

),

하평성 선운

(

先韻

),

상평성 제운

(

齊韻

),

거성 송운

(

送韻

),

상평성 한운

(

寒韻

),

입성 직운

(

職韻

),

상성 회운

(

賄韻

),

하평성 소운

(

蕭 韻

),

하평성 경운

(

庚韻

),

거성 우운

(

遇韻

)

등 여러 운부의 각운들을 다채롭게 구사하고 있다

.

󰊱은 백두산의 장엄한 형세와 자신이 백두산에 오를 결심을 하게 된 계기 등을 서술하고 있다

.

백두산 등 정 초중반의 여정은 일체 생략해 버리고 연지봉에 올라서 산신령에게 순조로운 날씨를 비는 장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

한유

(

韓愈

)

가 형산

(

衡山

)

에 오르기 전에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 효험을 본 고사

(

故事

)

를 본받았음을 밝히고 있다

.

시의 제목이 「백두산 대택」이니 만큼 갑산부에서 백두산 정상에 오르는 전체에 대 해서 서술하는 것은 산문인 「유백두산기」에 미루고 백두산 등반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대택에 집중하기 위 한 것으로 보인다

.

󰊲는 백두산 정상으로 오르면서 본 주변의 광활한 형세를 묘사한 부분으로

,

「유백두산기」에는 자세히 서 술되어 있는 백두산 정계비 문제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모두 생략하였다

.

대신 백두산의 까마득히 높은 모습 과 우리나라 산맥의 조종

(

祖宗

)

으로서의 형세를 웅장하게 묘사하고 있다

.

37) 󰡔文選󰡕, 孫綽, <游天台山賦>: “渾萬象以冥觀, 兀同體於自然.” 李善注: “, 昧也. 言不顯視也.”

38) 󰡔漢語大詞典󰡕: “祝融, 神名. 帝嚳時的火官, 後尊爲火神, 命曰祝融. 亦以爲火或火災的代稱.”

39) 󰡔篠齋集󰡕 卷1, 22a~23a.

(14)

󰊳은 이 시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부분으로 대택 주변의 기암괴석을 여러 대상을 통해 비유하면서 다채 롭게 자세하게 공력을 기울여 묘사하였으며

,

아울러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한 물속을 표현하기 위해 신화적 인 상상력을 동원하고 있다

.

󰊴는 백두산이 발견된 유래와 신비함에 대해서 다시 한번 서술하고

,

소식

(

蘇軾

)

의 어투를 빌려 자신의 이번 귀양이 이 유람으로 말미암아 헛되지 않았음을 강조하였는데

,

이 점은 「유백두산기」의 결말과도 상통한다

.

사실 이 결말부분을 제외하고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

「유백두산기」에서 문으로 서술한 것을 시로 바꾸 어 표현한 부분이 적지 않아

,

사실상 한시 판

(version)

「유백두산기」라 할 수 있다

.

3. 「갈역잡영(葛驛雜詠)」을 본받아: 일상의 흥취와 학예(學藝)에 대한 담론

󰡔소재집󰡕에는 해배 이후 복직하기 전까지 약

10

년 동안의 작품이

100

제가 채 못 실려 있는데

,

대체로 독 서와 시주로 소일하던 시절 치고는 수록한 작품이 많지는 않다

.

상당히 산삭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 다

.

이 시기의 창작 경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그 중에서도 「삼연옹의

갈역잡영

체를 본받아 절구 스 무 수를 지으니

,

때는 경진년

(1820)

오월 스무이레 流夏 新建候에 비내리는 중이다 效三淵翁葛驛襍詠體

,

賦 絶句二十首

,

時庚辰五月二十七日流夏新建候雨中也」40)라 생각된다

.

이 시기 그의 생활의 진솔한 면모를 단적 으로 보여 줄 뿐만 아니라

,

학문

,

문학

,

예술에 대한 그의 견해를 엿볼 수 있어서 중요하다

.

주제별로 작품들 을 묶어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

아라비아 숫자는 작품의 배열 순서를 가리킨다

.

먼저 그의 잔잔한 일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들을 읽어 보자

.

1

薰風陳陳動芸香 훈풍(薰風)은 자락자락 향풀 향기 일으키니 閱過牙籤手自忙 아첨(牙籤)들 펼쳐보는 손이 절로 바빠지네. 獨有老塊書屋畔 서옥(書屋) 옆에 오래 묵은 회나무 서 있기에 淸陰剩借四隣凉 맑은 그늘 실컷 빌려 주위가 다 서늘하네.

4

自從中歲謝芬華 중년부터 화려한 삶 사양한 이후로는 恰似山僧早出家 어렸을 때 출가한 스님처럼 살아왔네. 祗喜檐間多宿鳥 처마 밑에 자는 새들 많은 것이 반가우니

清晨聽我誦維摩 맑은 새벽 내가 읽는 󰡔유마경(維摩經)󰡕 들으려는 듯.

20

數畝新挑手種葵 몇 무(畝) 땅에 손수 심은 아욱을 막 북돋우니

40) 󰡔篠齋集󰡕 卷1, 50b~53a.

(15)

土膏生潤露含滋 흙 기름져 윤이 나며 이슬 머금고 잘도 자라네.

金薤玉糝吾何羨 금해(金薤)와 옥삼(玉糝)을 내가 무엇 때문에 부러워하리? 士大夫當此味知 사대부는 마땅히 이 맛을 알아야 한다네.

세 작품 중에서 앞의 두 작품은 벼슬에서 물러난 지식인의 독서에 침잠하면서 소일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 고 있으며

,

마지막 작품은 손수 채소를 가꾸면서 사대부들이 마땅히 이러한 검소함을 익혀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

다음은 그의 학문과 사상적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읽어보자

.

11

自有皇明三百載 명(明)나라 역사 삼백년 동안에 文成眞正大英雄 문성공(文成公)이 진정한 큰 영웅이라. 指揮如意論心性 능숙하게 지휘하며 심성(心性)을 강론하니 絳帳高開萬馬中 진영(陣營)에다 강좌(講座)를 개설한 셈이었네.

13

近世淸人毛大可 근세에 청(淸)나라 사람인 모대가(毛大可)는 亂嚷狂叫敢詆朱 함부로 지껄이며 감히 주자(朱子) 모독했네.

鷺州主客論詩說 백로주(白鷺州)에서 주객(主客)이 󰡔시경(詩經)󰡕 논함에 僭妄同歸莽大夫 참람하고 망령됨이 망대부(莽大夫)와 같은 무리일세.

첫 번째 시의

문성

(

文成

)’

은 양명학

(

陽明學

)

을 세운 왕수인

(

王守仁

)

의 시호

(

諡號

)

로 그는 군사 작전 중에 도 제자들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한 것으로 유명하다

.

보통 조선 시대 선비들은 간혹 왕수인의 공업

(

功業

)

이 나 문장

(

文章

)

은 인정하더라도 치양지설

(

致良知說

)

에 대해서는 퇴계

(

退溪

)

이후로 신랄한 비판을 가했었다

.

그렇다고 서기수가 주자를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쪽에 섰던 것도 아니다

.

두 번째 시의 작품 끝에

대가

(

大可

)

는 모기령

(

毛奇齡

)

의 자

(

)

이다

.

그가 지은 글에 󰡔백로주주객설서

(

白鷺州主客說詩

)

󰡕가 있는데 주자를 모독 한 내용이 많다

.”

라 자주를 달아 놓았다

.

41)

망대부

는 탁월한 문장가이자 학자였지만 왕망

(

王莽

)

에게 협조한 양웅

(

揚雄

)

을 가리킨다

.

비교적 사상적으로 개방된 인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는데

,

심정적으로는 양명학을 긍정하는 쪽에 기울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할 수 있다

.

다음은 그의 시문에 대한 관점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을 읽어보자

.

10

西京文氣孰挽回 서경(西京)의 문기(文氣)를 뉘라서 만회하리

41) 自註:大可, 毛奇齡字. 其文有 󰡔白鷺州主客說詩󰡕, 多醜詆朱子語.”

(16)

白虎羣書已冷灰 백호관(白虎觀) 여러 책들 이미 찬 재 되었는데. 孫叔衣冠徒露醜 손숙오(孫孰敖)의 옷과 갓 걸쳐도 한갓 추함 드러내니 于鱗諸子罪之魁 우린(于鱗, 李攀龍) 등 여러 사람이 큰 죄를 지었구나.

12

子美組治康樂辭 자미(子美, 杜甫)는 강락(康樂, 謝靈運)의 시를 연구하였으니 晋唐以後更無詩 진(晋)나라 당(唐)나라 이후 이런 시인들이 없었다네. 七言近體誰持世 칠언근체는 누가 세도(世道)를 유지했나?

前有眉蘇後受之 앞에는 미산(眉山) 소씨(蘇氏)요 뒤에는 수지(受之)라네.

첫 번째 시에서 명백히 복고파에 반대하는 그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

두 번째 시 마지막 구의

미산 소 씨

는 소식

(

蘇軾

), ‘

수지

는 전겸익

(

錢謙益

)

을 가리킨다

.

전겸익의 조행

(

操行

)

이나 문학에 대해서 생전과 사후 에 모두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지만

,

명말청초의 대가인 점은 분명하고

,

역대의 칠언율시 중에서 소식을 높이 평가한 점만은 옹방강

(

翁方綱

)

의 영향을 받았을 확률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

다음은 그의 서화

(

書畵

)

에 대한 관점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을 살펴보자

.

14

大癡筆意倪迂法 대치(大癡, 黃公望)의 필의(筆意)며 예우(倪迂, 倪瓚)의 화법(畵法) 東國應無此手佳 우리나라에 응당 이런 훌륭한 솜씨가 없겠지만,

水墨仁王山一幅 수묵으로 그려낸 인왕산 한 폭

家家障子鄭謙齋 집집마다 병풍에 정겸재(鄭謙齋) 그림 있다네.

18

二王柒板久塵棲 두 왕씨 칠판에는 오래도록 먼지가 쌓였으니 近日中原孰可兒 오늘날 중원에는 누가 훌륭한 사람인가? 白下屮書圓嶠偕 백하(白下)의 초서와 원교(圓嶠)의 해서

東人不識愛家鷄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안의 닭 아낄 줄을 모른다네.

첫 번째 시의 앞의 두 구에서는 원

(

)

나라 황공망

(

黃公望

)

이나 예찬

(

倪瓚

)

같은 대가의 솜씨를 가진 화가 가 우리나라에 없는 것을 안타까와하고 있는데

,

들고 있는 화가를 보아 서기수는 이른바 남종화

(

南宗畫

)

를 추종한 것으로 판단된다

.

그러면서도 우리 진경산수화의 거장인 정선의 인왕산 그림이 집집마다 걸려 있는 것을 언급하고 있으며

, “

정선

(

鄭敾

)

은 호가 겸재

(

謙齋

)

이며

,

산수

(

山水

)

를 잘 그렸다

.”

는 자주를 달아 놓고 있 다

.

42)

42) 自註:鄭敾, 號謙齋, 善畫山水.”

(17)

두 번째 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미 중국에는 왕희지

(

王羲之

)

부자와 같은 명필이 없다는 점을 말하면 서

,

근래의 대가로는 초서에는 윤순

(

尹淳

),

해서에는 이광사

(

李匡師

)

를 꼽고

,

그들의 글씨가 지금 중국의 대 가들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음을 은연중에 부각시킨 것이다

.

추사

(

秋史

)

김정희

(

金正喜

)

와 같은 사람이 보았 다면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겠지만

,

서기수는 소론 선배들이기도 한 두 사람의 명필을 이처럼 존숭하고 있었 던 것이다

.

4. 가뭄과 홍수를 겪으며: 지옥같은 임진년(壬辰年, 1832)

서기수가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인 임진년

(1832)

을 앞뒤로 조선은 국가적인 비상상황에 처해있었다

.

그 보다 두 해 전에는 온 나라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중에 급서

(

急逝

)

하고

,

그보다 두 해 뒤에는 순조가 세상을 떠나고 여덟 살의 헌종이 즉위하게 된다

.

그 한가운데 있는 이 해는 가뭄과 홍수가 한꺼번에 들어 온 나라가 큰 고통을 받게 되는데

,

이러한 상황을 서기수가 지은 두 편의 장편고시에서 생생 하게 엿볼 수 있다

.

「반가운 비 喜雨」

六月旣望夜三鼓 유월 기망(旣望) 한밤 중 삼고(三鼓)에도 天氣鼓熱如擁爐 하늘이 뜨거워 화로를 끼고 있는 것 같아, 病渴無寐欲狂叫 목이 말라 잠 안오고 미친 듯 소리 치고 싶었는데 陰雲四垂月色無 먹구름 사방에 드리우고 달빛을 가리더니, 朝起忽驚窓戶凉 아침에 일어나서 갑자기 창문이 서늘해서 놀랐으니 雨聲颼颼翻江湖 비소리 쏴아 하며 강과 호수 뒤엎을 듯.

淋鈴可致方千里 후두둑 사방 천리로 퍼져갈 수 있으니 霢霂知應起寸膚 가랑비가 응당 한 뼘 이상은 내렸으리라. 旱魃遠避不敢驕 한발(旱魃)은 멀리 달아나며 감히 교만 못 부리니 四隣耒耟騰讙呼 사방의 농부들은 펄쩍 뛰며 떠들썩하구나. 陂塘白水走千頃 저수지의 하얀 물은 천 이랑을 달려가니 一時枯苗盡回蘇 말라 죽던 싹들이 모두다 소생하네. 簾幙倏看蒼翠生 발 사이로 푸르름이 살아남이 문득 보이고 階下决明顔色敷 섬돌 아래 결명자(决明子)는 안색이 살아나는구나. 三伏炎蒸定如洗 삼복의 찌는 더위 필경 씻겨간 듯하여

瓦溜滿聽閒據梧 기와지붕 낙수물 소리 가득 듣고 한가로이 오동에 기대노라. 豊年穰穰多黍稌 풍년 들어 온갖 곡식 알알이 맺혀

願把八域作康衢 조선팔도 모두들 강구요(康衢謠)를 불렀으면. 老去自號粥飯僧 늙어가며 스스로를 반죽승(粥飯僧)이라 일컫는데

酒後耳熱歌擊壺 술 마신 뒤 귀 발그레한 체 술병 두드리며 노래하노라.43)

(18)

한여름밤 열대야에 시달리던 서기수는 아침에 일어나 뜨거운 대지를 적셔주는 단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였다

.

스스로를

반죽승

’,

곧 걸립승

(

乞粒僧

)

과 다름없다고 일컫으면서도 이렇게 좋은 일을 그 냥 지나칠 수 없어서 시를 지어 기쁨을 노래하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였던 것이다

.

그러나

,

이렇게 큰 기쁨을 주던 비는 곧 큰 재앙으로 변하고 만다

.

이때 내린 비가 가뭄을 해갈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달 가까이 쉼 없이 내리면서 거대한 홍수로 바뀌고 만 것이다

.

이에 서기수는 이를 탄식하는 작품을 지었던 바

,

여기서 우선 그 서

(

)

를 먼저 읽어보자

.

임진년 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논과 밭이 다 갈라지고 샘물과 우물 또한 말랐다. 기우제를 다섯 차례나 지냈더니, 유월 열엿새에 비로소 비를 얻으니, 밤낮으로 크게 내리는 것이 이십여 일에 이르렀 다. 그 기세가 산을 뒤집고 땅을 흔들어, 동이를 뒤집고 옹기를 세울 정도로 조금도 쉬지 않았다. 종 묘며 왕릉이며 모두 물이 새거나 파손되고, 궁궐 건물과 성루(城樓) 또한 많이 무너지니 예조에서는 또 영제(禜祭)를 지내기를 청하였다. 뭍이 강이 되고 사람의 발자취가 거의 끊어질 지경이었다. 경성 (京城) 다섯 부(部) 안에서도 집이 떠내려가거나 무너진 경우가 곳곳에 있었고, 다친 사람이 무려 수 백 명이었으며, 근교의 산에서는 무덤들이 떠내려가 보이는 광경이 참혹하였다. 팔도에서 수재를 보 고하는 장계가 날마다 올라왔는데, 경기와 해서 지방이 특히 심했고, 호서 지방이 그 다음이었으며, 떠내려간 집과 사망자가 수천이 넘었다. 상께서는 어선(御膳)을 줄이시고, 형조에 명하여 옥사(獄事) 를 심리하여 귀양을 풀어주신 사람이 삼백여 명이었는데, 의금부의 귀양자 명단에서 죄가 중한 사람 들도 모두 용서하여 풀어주셨다. 올해는 가뭄과 홍수가 모두 들어 이미 큰 흉년인데, 또 초가을부터 팔월까지 하루도 비가 내리지 않은 날이 없었고, 내리면 폭우가 쏟아져, 온갖 곡식들이 물에 잠겨 시 들어 버려, 민심이 흉흉하니, 실로 자리에 편안히 있을 수가 없었다.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장편시를 지어 사실을 기록한다.44)

이제 본격적으로 작품을 살펴보자

.

「가을 장마를 탄식하며 秋雨歎」

󰊱 秋夜漫漫雨聲長 가을 밤 길고 긴데 빗소리도 오래가서 早旱晩澇備災荒 가뭄 들다 홍수 나서 큰 재난 구비되니, 四朔亢暘井泉涸 넉 달은 강한 태양 우물과 샘도 다 마르더니 三朔淫霖禾稼痒 석 달은 장마비에 벼와 곡식 시들하네.

43) 󰡔篠齋集󰡕 卷2, 34b~35a.

44) 󰡔篠齋集󰡕 卷2, 35ab, 「秋雨歎」의 序: “壬辰春夏大旱, 田疇盡坼, 泉井亦痼. 行祈雨祭五次, 至六月十六日始得雨, 通晝夜大注, 至二十餘日. 其勢如掀山震陸, 翻盆建瓴, 無頃刻休. 廟祀園寢, 俱有漏缺, 殿閣城譙, 亦多頹傷, 春曺又請行禜祭. 平陸成江, 行幾絶. 京城五部之內, 屋廬漂圮, 在在相望, 人命之致傷, 無慮累百人, 郊原之間, 塚墓汰落, 所見慘然. 八路水災之啓, 逐日登 , 畿海尤甚, 湖西次之, 漂戶死亡, 可累千計. 自上减膳, 先命秋曹行審理, 徒流放釋者, 爲三百餘人, 金吾謫籍中罪重者, 亦皆 宥釋. 年形旱澇具備, 已判大無. 又自初秋至于八月, 無日不雨, 雨輒暴注, 各穀沈墊自消, 人心洶洶, 實無以尊安繞榻, 明發呼燭, 作長篇詩紀實.”

(19)

瀉如翻盆急如箭 동이를 뒤집을 듯 화살처럼 빠르게 쏟아져 川陸無分白茫茫 뭍과 물이 구분 없이 하얗게 까마득하네. 每見羃羃雲黑色 매번 두껍고 짙은운 먹구름 보이다가

驀地長駈勢莫當 갑자기 길게 몰아쳐 그 기세 감당할 수 없다네. 廟社園寢及城闕 종묘 사직 왕릉 및 성과 대궐까지

榱桷甎堊亦被傷 서까래며 벽돌이며 석회가 모두 상했으며 里廬蕩析山麓崩 민가는 쓸려가고 산에는 사태났네.

人家野哭徹彼蒼 집집마다 곡하는 소리 푸른 하늘에 사무치니 至尊减膳哀痛詔 지존께서도 어선(御膳) 줄이시고 애통한 맘 표하시고, 慮囚掩骼恩溢洋 죄수들 죽을까봐 넘치는 은혜를 베푸셨네.

夜深不御乙丙枕 밤늦도록 못 주무시다 한밤중에야 주무시니 救荒長策賴廟堂 구황(救荒)할 큰 계책은 조정의 힘 필요하다네.

󰊲 人事由來速天怒 사람의 일은 예로부터 하늘의 노여움 초래하였으니

漢儒論詳傳五行 한(漢)나라 선비들 상세히 논하여 󰡔오행전(五行傳)󰡕에 전하였네. 列郡窫窳45)苛如毛 고을마다 사람 잡아먹는 짐승들이 터럭까지 들추어 가혹하고 債帥饕餮狼如羊 돈으로 벼슬 산 무장들은 이리가 양을 대하듯 탐욕스러우며, 士夫無恥譏相鼠 사대부들은 염치 없어 「상서(相鼠)」로 풍자할 만하고

吏胥舞文痛黠麞 아전들은 문서 조작 농간 부려 교묘한 노루 같아 분통터지는데, 固知人自累科宦 진실로 사람들이 벼슬에 목을 매서

役役營營一國狂 애쓰고 안달하며 온 나라가 미쳐 돌아갔자, 上帝赫臨動以威 상제께서 화내시며 위엄을 보이시니

堯水湯旱並湊殃 요임금 때 홍수와 탕임금 때 가뭄이 한꺼번에 들었네

󰊳 八月三夜秋水生 팔월 초사흘 밤에는 가을 강물 불어나서 江舡來繫市郭傍 강가에 있던 배들을 시장에 맬 정도이고 虹橋十二水聲中 개천(청계천) 열두 다리 물소리 속 잠겼구나. 兩部蛙鳴鬧林塘 두 부(部)에는 개구리 울어 숲이고 못이고 시끄럽고 諸路水警日相聞 팔도의 수재 경보(警報) 매일같이 들려 오고, 峽沿平等均懷襄 물길이 산을 덮쳐 산골이나 강가나 똑같아졌네. 王郊膏沃上上土 근기 지역 옥토의 상상답(上上畓)도

一望蓁莽絶稻梁 잡초만 우거지고 쌀 한톨 안 나갔네. 市米一斛一千錢 시장에선 쌀 열 말이 일천 전이니

行路饑色見翳桑 길에서는 굶주린 이들 예상(翳桑)46)을 보는 듯하네. 大農本無一年蓄 부농(富農)도 한 해 먹을 양식 없는데

備豫誰講豳八章 뉘라서 「빈풍(豳風)」의 「칠월(七月)」 강의하며 대비하였을까?

45) 窫窳:원문에는 㝣窳로 되어 있으나 󰡔山海經󰡕에 따라 바로잡았다.

46) 󰡔漢語大詞典󰡕: “古地名. 春秋晉靈輒餓於翳桑, 趙盾見而賜以飲食. 後輒爲晉靈公甲士. 會靈公欲殺盾, 輒倒戈相衛, 盾乃得免.”

참조

관련 문서

The influence of normalized middle school physical education and after school sports club on personality. Kim

In addition, I compared Kim Ki-Su 'Arirang' music score and current middle school music textbooks 'Arirang' score, which were presented at the National

* 韓國法制硏究院

Chang Goo Kang, Ah Hyun Park, Jang Ho Ha, Young Soo Kim, Joon-Ho Oh, Jeong Min Park, Soo Mee Kim, Seung-Jae Lee, Seung Hee Lee, and Han Soo Kim(KAERI). Fabrication

Chang Je Park, Kwoen Ho Kang, Sang Ho Na, Young Hee Kim, Ho Jin Ryu, Geun Il Park, and Kee Chan Song (KAERI). Geun-Suk Choi and

Ri s pe ns ,Mc Br i de -Chang,&amp; Re i st ma,2008) .선행연구( Ape l&amp; Thomas -Tat e , 2009 ;Cho&amp; Mc br i de -Chang,&amp; Par k,20 07) 에서는

Kim Su-Yeong is recommended as a representative poet in the participation literature of the sixties. But he has displayed his major creative writing in the

Sang-Keun Woo, Yong Jin Lee, WonHo Lee, Min Hwan Kim, Ji Ae Park, In Ok Ko, Jin Su Kim, Jong Guk Kim, Young Hoon Ji, Joo Hyun Kang, Gi Jeong Cheon, Chang Woon Choi, Sang M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