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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풍요 없이 계속될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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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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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강형준*

목 차 1. 들어가며

2. 성장에서 몰락으로

3. “이제 모든 것이 지역으로 돌아갔다”: 뺷손으로 만든 세상뺸 4. 풍요에서 희소성으로: 민주주의와 풍요 이미지

5. 나가며

<국문초록>

근대 민주주의 체제는 15세기 신세계의 발견을 통해 엄청난 자원의 변경을 얻 어내고, 그 과정에서 노예제와 식민화를 통해 유럽 시장의 확장을 일궈낸 서구 유 럽 문명의 풍요에서 그 사상적 기원을 갖는다. 근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성장 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상업 자본주의에서 산업 자본주의로, 나 아가 금융과 인지 자본주의로 쉴 새 없이 확장되면서 이제 지구상에는 그 어떤 ‘변 경’도 남아있지 않다. 지구 온난화, 자원 고갈, 사회적 갈등, 인간 본성의 변화 등 을 포괄하는 생태 파괴는 지금까지 자본주의가 소비하고 기생했던 그 환경 자체가 사라짐으로써 결국 자본주의마저 그 기반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농후함을 보여준 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익숙하게 여기던 근대 자본주의 문명 자체의 붕괴가 가능 한 것이다.

쿤슬러의 뺷손으로 만든 세상뺸이 그리는 석유-이후의 미래는 단지 ‘상상’에 그치 는 게 아니며, 자본-생태계의 한 문제인 자원 고갈, 그 중에서도 석유 에너지의 고갈이라는 합리적인 가설에 기반을 둔 ‘미래적 리얼리즘’ 소설이다. 이 파국서사 * 중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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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통해 생각할 수 있는 많은 문제 중 하나가 ‘민주주의와 풍요’ 간의 관계다. 쿤슬 러가 묘사하는 풍요 없는 세상은 민주주의가 사라진 전체주의적 디스토피아 세상 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적 삶의 방식이 다양한 정치체제 중 하나로 여겨지는 곳이 다. 이 소설의 스토리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집단은 기실 민주주의 체제, (사회주의 적) 권위주의 체제, 폭정 체제라는 세 개의 정치체제로 환원할 수 있다. 쿤슬러는 석유-이후 세계의 민주주의는 그만큼의 한계를 지닌다고 추론하고 있는 것이다.

파국서사가 상상하는 민주주의는 풍요가 사라진 세계에서의 민주주의다. 역사 적 민주주의가 물질적인 풍요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면, 그 풍요가 사라졌을 때의 체제 역시 민주주의일 것이라고 상상하기란 어렵다. 저성장 체제로 굳어져가 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하에서의 한국, 일본, 미국 등의 민주주의 체제는 각기 다르지만, 교과서적인 민주주의 체제의 후퇴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같다. 풍 요가 사라진 세계의 체제는 오히려 ‘힘 있는 자들의 지배’가 더욱 강력해지는 반민 주적 체제가 될 공산이 크다. 수많은 디스토피아 소설과 파국서사가 그리고 있는 세계가 바로 그런 세계다. 우리는 풍요 없는 세상을 그리는 파국서사를 통해 민주 주의를 생각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그토록 믿는 ‘상식’으로서의 민주주의라는 것이 역사의 변화 속에서는 부질없이 소멸할 수도 있는 취약한 개념이자 형체임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 없이 살자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서라도 이 자원의 풍요 혹은 희소성이라는 문제를 그 전에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 다. 현재 한국의 틀에서 말하자면, 우리가 지킬 민주주의는 청와대의 주인 교체에 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극단적으로 불균등한 자원의 배분이라는 그 문제에서 사실 은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제어 : 민주주의, 파국서사, 종말-이후 서사, 디스토피아, 희소성, 신자유주의,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 뺷손으로 만든 세상뺸

부르주아 사회는 도덕적으로나 지성적으로 재앙에 대비되어 있지 않다. 한편 에는 모든 실존적인 문제를 “문제”로 재정의해서 그 문제들 각각에 대한 “해결 책”을 찾으려는 자유주의적 기질이 있다. 다른 한 편에는 마법적인 경제 엔진의 효율성을 통해 무한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 가정이 있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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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재앙은 닥쳤었고, 다시, 또 다시 닥치게 될 것이다.

⼀ 다니엘 벨, 뺷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들뺸

만약 이 재앙이 스필버그 영화에서 보이는 그런 식이 아니라 수세기를 거치며 계속될 진짜 지겨운 어떤 것이라면 어떻겠는가?

⼀ 티모시 모튼, 뺷생태학적 사유뺸

1. 들어가며

2016년 10월말 이후 정권의 부패와 권력농단이 드러나면서 전국에서 수 많은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민주주의’를 외치고, 결국 대통령이 탄핵되고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어 다시금 ‘정상’을 되찾은 것처럼 보이는 이 시대 에 ‘민주주의’에 대해 사유하고 말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미디어를 통 할 때,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유사해 보인다. 행정부 최고 권력자의 부패에 대해 처벌하고, 정부-검찰-정당의 개혁을 통해 대의민주 주의 제도를 정상화시키고, 권력과 재벌 간의 유착관계를 청산하여 시민들 이 다시금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게 만들라는 것이다.

이에 더해 이명박-박근혜 정부 약 10년 동안 악화되었던 비정규직 문제, 청 년실업, 복지 약화, 재벌 권력 강화, 정보기관의 규제, 언론의 민주화 등이 함께 의제화되고 있다. 이 중 어떤 의제에 집중하는가에 따라 다르지만 헌 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인용 이후 대선출마를 선언했던 후보 다수의 목소 리 역시 이러한 시민들의 의견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요컨대, 오늘 한국에 서 ‘민주주의’를 외친다는 것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대의민주주의의

‘정상화’에 대한 요청이라고 할 수 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의 촛불집 회를 바라보고, 인권변호사로 거리에서 싸웠던 이가 대통령 자리에 오른 것 을 보는 심경은 벅차오르지만, 기실 우리들의 요청은 1987년 이후 형식적으 로나마 확립된 민주주의 제도와 실천을 ‘제대로, 정상적으로’ 하라는 외침 에 다르지 않은데, 이는 87년 체제 이후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민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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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제도’라는 것이 한 방향으로 진화하고 성숙하는 게 아닐 수도 있음을 말 해준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계속 ‘정상화’ 주변을 맴도는 오늘날의 민주주의 담론으로부터 한 발짝 벗어나보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글은 민주주의에 대한 천 편일률적 목소리에서 비껴나, 같은 문제에 다르게 접근하는 하나의 방식을 구체화해보려 한다. 이 방식이란 ‘파국서사를 통해 민주주의를 다시 읽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파국서사’(catastrophic narrative)란 ‘세상의 종말이라 는 상상적 상황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형식’을 말하는 것으로, 크게 ‘종말서 사’(apocalyptic narrative)와 ‘종말-이후 서사’(post-apocalyptic narrative) 로 나눌 수 있다.1) 파국서사는 각 서브장르마다 ‘종말’을 상상하는 내용이 너무나 다양하여 이를 단순화하여 말하기는 불가능하나, 절대 다수의 파국 서사는 그것이 본질적으로 종말로 가는 과정 혹은 종말 이후의 모습을 전 제한다는 점에서 강도의 차이는 있으되 기본적으로 현재의 질서를 비판적 으로 바라보(게 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우리의 주제인 ‘민주주의’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중에서도 현재의 민주주 의 질서를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다시 생각하게 하는 파국서사의 서브장 르는 종말-이후 서사, 그 중에서도 민주주의-이후의 삶의 방식을 그리는 어떤 이야기들이 아닐까 싶다. 이후 자세히 분석하겠지만, 민주주의-이후 의 삶의 방식은 현재의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가 아닌 물질적 조건을 배경 으로 삼는 이야기들에서 가능할 것인데, 이 글은 그 중에서도 ‘포스트-오일’

상황에서의 삶을 그리는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James Howard Kunstler)

1) 국문학과 외국문학을 포함한 한국 문학계에서 ‘파국서사’라는 명칭은 그리 흔히 쓰이지 는 않는다. 파국의 상황을 다루는 문학을 통칭하는 합의된 명칭이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가장 흔히 쓰이는 명칭은 ‘재난문학’, ‘종말서사’, ‘묵시록 문학’ 등이지만, 각각의 명칭이 갖는 한계가 있어 보이기에(‘재난문학’은 ‘재난’이라는 사건만을 부각시 키고, ‘종말서사’는 종말-이후를 배제하며, ‘묵시록’이라는 개념 역시 종말-이후보다는 종말로 가는 분위기에 집중할 뿐 아니라 단어 자체에 기독교적 색채가 묻어있다) 나는

‘파국서사’라는 개념으로 ‘세상의 종말 전후’를 포괄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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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뺷손으로 만든 세상뺸(World Made by Hand, 2008)을 자세히 살피려한다.

이 소설이 그렇듯, 이 글 역시 민주주의에 대해 오늘날의 전형적 접근법 과는 다른 접근을 취한다. 질문은 이런 것이다. ‘민주주의는 풍요 없이도 계 속될 수 있을까?’ 파국서사는 현재의 질서와는 급진적으로 다른 (종말 전후 의) 질서를 상상하는데, 이 ‘다른 질서’ 속의 물질적 조건은 ‘풍요’와는 거리 가 멀다. 대부분의 파국서사는 물질적 풍요(material abundance)가 없는 세 상 속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거나 바라는 그런 민주주의와는 완전히 다 른 정치 질서가 지배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많은 디스토피아 소설에서 전체 주의나 권위주의 체제를 상상하듯, 파국서사 역시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민주주의는 사실 서양 근대 이후 역사의 특정 국 면에서 생겨난 ‘풍요로운’ 물적 조건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조건이 사라지는 순간 민주주의 역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가 그렇듯 민주주의도 인류 역사의 특정 기간 동안에만 존속하는 ‘역사적’

체제인 것이지, 그 자체로 절대적인 진리의 체제는 아닐 것이다. 파국서사 를 통한 반민주주의적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은 정치-경제 체제에 대한 시야를 비판적으로 확장시킴으로써, 현재를 낯설게 보게 만들 수 있으 며, 궁극적으로는, 다시, 오늘날 민주주의 담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되돌 아보는 모종의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다.

2. 성장에서 몰락으로

존 부어먼 감독의 영화 <자도즈>(Zardoz, 1974)에서 종말 이후인 2293 년의 지구는 ‘야만인’(Brutals)이라 불리는 이들에 의해 문명 이전의 상태로 몰락했고, 이 야만인들은 ‘영생인’(Eternals)이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숨은 엘리트층에 의해 통치받는다. 영생인은 야만인들 중 일부를 ‘몰살자’

(Exterminators)라는 이름의 전사 계급으로 만들어 다른 야만인들을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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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록 한다. 몰살자들은 영생인과는 접촉하지 않지만, 영생인이 만들어 작 동시키는 거대한 얼굴 모양의 비행물체 ‘자도즈’를 경배한다. 자도즈는 벌 린 입을 통해 몰살자들에게 총을 지급하여 그것으로 야만인을 죽이거나 노 예화하도록 사주하고, 몰살자들은 야만인이 생산한 곡물을 자도즈에 옮기 는데, 이 곡물은 몰살자들 모르게 영생인이 사는 비밀스런 풍요의 공간인 보텍스에 공급된다. 자도즈에 몰래 숨어 들어가 보텍스에 잠입하게 된 몰살 자 제드(션 코너리)를 통해, 영화는 영생인의 편안하고 문명화된 삶은 야만 인에게서 공급받은 풍부한 곡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평화롭고, 창조적이고, 지적인 존재들의 고도로 문명화된 유토피아적 공동 체는 이 문명의 복지를 지탱하는 노동을 하는 자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와 압제를 통해서, 그리고 노동하는 자들이 담당하는 무한한 물질적 공급을 통 해서만 유지되는 것이다.

<자도즈>의 보텍스가 식민지인인 야만인들의 노동을 통해 물질적인 안 정을 겪는 것과는 달리, 어술러 르 귄의 뺷빼앗긴 자들뺸(The Dispossessed, 1974)의 아나키스트 행성인 아나레스는 극심한 자원 결핍으로 고통받는다.

뺷빼앗긴 자들뺸은 아나레스와 우라스라는 두 개의 상반된 행성을 묘사하는 데, 이 중 아나레스는 우라스에 살았던 아나키스트 집단인 오도니안 분리주 의자들이 정착한 행성이다. 아나레스가 평등주의적이고, 탈집중적이고, 반 자본주의적인 이상적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아나레스인들은 가혹한 자연환 경을 견뎌내야만 한다. 자원의 결핍이 만들어내는 항상적 위협에서 살아남 고 이상적 사회를 유지하여 우라스의 식민지배 위협으로부터도 벗어나기 위하여 아나레스인들 모두에게는 육체노동이 의무적으로 부과된다. 이 과 정에서 아나레스인에게는 예술이나 과학 등 높은 수준의 문화 활동에 쓸 시간이 부족해지고, 아나레스가 낳은 천재 물리학자 셰벡은 우라스의 자본 주의 국가인 에이-이오(A-Io)로 일정 기간 떠나게 된다. 이 소설이 자유와 평등이라는 아나키즘의 이상을 보존하기 위해 투쟁하는 아나레스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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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있지만, “저 하늘 위 굶주린 이상주의자들의 조그마한 꼬뮨”이 우 라스의 원조 없이 스스로 지탱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불확실하며, 우라스는 끊임없이 이 작은 행성을 뒤흔들려고 한다.2) ‘일국 사회주의’라는 스탈린주 의 이론을 공격하며 트로츠키가 말하듯이, 물질적 풍요 없이는 “오직 궁핍 만이 일반화할 것이고, 궁핍과 더불어 필수품을 얻기 위한 투쟁이 생겨날 것이며, 그와 함께 모든 오래된 쓰레기들이 되살아날 것이다.”3)트로츠키는

“사회주의 사회는 (...) 이러한 물건들[기술과 상품]을 자유롭게 즐기지 않고 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고까지 주장한다.4) 자원 결핍이라는 조건 하에서 사회주의의 운명에 대한 트로츠키의 판단은 르 귄의 아나키스트 유토피아 인 아나레스의 곤경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물질적 풍요’라는 주제는 사회 체제의 유지에 관련해 핵심적 질문을 제 기한다. 하지만 물적 공급의 필수성과 사회적 안정성 간의 관계는 대체로 경시되기 일쑤이며, 무한한 경제적 성장에 대한 거의 보편적인 믿음 앞에서 는 대부분 사라져버린다. 우파가 성장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들을 자본주 의의 역동적 에너지가 극복할 것이라고 믿는다면, 좌파는 사회 복지와 재화 의 분배가 더 광범위하고 더 과감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표면적인 방향성은 달라 보이지만, 사실 우파와 좌파 모두 경제적 성장이 계속 될 것을 믿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신앙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5) 다니엘 벨이 지적하듯, “경제 성장은 발전하는 산업 사회의 세속 종교가 되 었다.”6) 벨은 이어서 그러한 경제 성장에 대한 믿음이 수요의 증가와 상품

2) Ursula K. Le Guin, The Dispossessed, New York: Harper & Row, 1974, p.135.


3) Leon Trotsky, The Revolution Betrayed: What Is the Soviet Union? Where Is It Going? Trans. Max Eastman, New York: Pioneer Publishers, 1945, p.295.


4) Leon Trotsky, Op. cit., p.57.

5) 그 점에서 우파와 좌파는 모두 문명의 진보가 계속될 것이라고 믿는 ‘진보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다.

6) Daniel Bell, The Cultural Contradictions of Capitalism, New York: Basic Books, 1996,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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및 원자재의 부족 같은 요소들로 인해 필히 인플레이션을 부르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중의 선호에 좌우되는 선거로 운명이 결정되는 민주주 의 정부는 경제 성장의 제한을 선택지로 고려하지 않으며, 대중의 희생을 요구하는 일도 없다. 1970년대에 벨은 “다음 수십 년 동안 사회-경제 정책 의 기본 골격은 자원(음식, 에너지, 원자재), 인구, 환경 간의 상호작용에 의 해 결정될 것”이라고 보았으며, 따라서 무한한 경제 성장과 궁극적인 사회 적 실패간의 관계가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큰 위협이 된다고 파악했다.7) 이러한 벨의 염려는 성장과 위기의 순환 사이클을 자본주의의 근본적 요소 라고 보았던 맑스의 주장과 공명한다. 자본주의는 한없이 성장해야지, 그렇 지 않으면 몰락에 직면하는 것이다. 뺷공산당 선언뺸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이 렇게 쓴다. “생산과 교환의 거대한 장치를 만들어낸 사회, 생산과 교환과 재 산의 관계들을 가지고 있는 사회로서의 근대 부르주아 사회는 자신의 마법 으로 만들어낸 지하세계의 힘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마법사와 같다.”8) 하지만 맑스의 공산주의 이론 역시 기술과 산업 발전이 인간으로 하여금

“필요의 영역”을 극복해내고 “자유의 영역”으로 진입하게 할 거라는 19세 기의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맑스는 자본주의 생산력의 도움을 받아 인 류가 결국 필요를 뛰어넘어 자유를 쟁취하게 될 때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에 자리를 내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맑스의 설명이 자본주의 가 가진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모순을 극복하는 형식으로 나타나기는 하지 만, 공산주의 역시 영원한 경제 성장을 전제로 삼고 있다. 철학자 존 그레이 가 주장하듯, 맑스와 케인즈 모두 산업의 힘이 모든 장벽, 그 중에서도 특히 천연자원의 부족이라는 장벽을 없앨 수 있다고 믿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위대한 경제학자들과 사회 이론가들은 거의 예

7) Ibid., p.237.

8) Karl Marx and Friedrich Engels, The Communist Manifesto, London and New York: Verso, 1998,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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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 없이 산업의 부흥으로 인해 결핍이 극복될 것이라고 믿었다. 맑스와 케인즈 는 많은 지점에서 근본적으로 의견이 다르지만, 현대 산업 경제학과 천연자원이 기본적으로 무관하다고 믿었다는 데에서는 일치한다. 맑스가 물건이 너무나 풍 부해서 가격을 따질 필요가 없어진 세상을 꿈꿨다면, 케인즈는 인류의 경제적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선언하는 데 있어 맑스에 크게 뒤처지지 않았다.9)

그레이로 하여금 영속적인 경제 성장이 파괴적인 판타지라고 믿게 만든 것은 생태 파괴와 자원 고갈의 문제들이다. 자본주의는 지구라는 행성의 운 명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지구 환경의 몰락은 지금껏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가장 큰 재난을 만들어낼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자 본주의는 영원히 순환하는 사이클 속에서 계속 점증하는 이익을 만들어내 기 위해 상품을 생산해내고 그것을 판매해야 하는데, 이렇게 ‘성장’을 지속 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자연‧인공적 자원도 모조리 써야만 한다. 이런 의미 에서, 자본주의에서의 모든 경제 활동은 생산이 아니라 “소비”다.10)자원의 소비 없이 자본주의 체제는 무너진다. 맑스가 지적하듯이, “모든 부의 원천 은 노동이 아니다. 자연이야말로 노동만큼이나 사용가치의 원천이다. 인간 의 노동력이란 그 자체로 자연의 힘이 외부로 나타난 현상일 뿐인 것이다 .”11) 따라서 자본은 마이클 하트가 생태적 공공제(ecological commons)라 고 부르는 것, 곧 “대기, 대양, 강, 숲, 그리고 그들과 상호작용하는 모든 형 태의 생명체를 포함한 지구 행성과 그것의 생태체계”의 착취와 파괴에 의 존하고 있는 것이다.12)자본주의의 핵심에는 불가피하고 심대한 모순이 도

9) John Gray, Heresies: Against Progress and Other Illusions, London: Granta Books, 2004, p.116.

10) John Bellamy Foster and Brett Clark, "The Ecology of Consumption: A Critique of Economic Malthusianism,” Polygraph 22, 2010, p.116.

11) Karl Marx, "Critique of the Gotha Program," The Marx-Engels Reader, Ed. Robert C. Tucker, New York: W. W. Norton, 1978, p.525.

12) Michael Hardt, "Two Faces of Apocalypse: A Letter from Copenhagen," Polygraph 22, 2010,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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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고 있으니, 자본 축적이라는 성격이 그 결과 발생하는 피해의 사회적 성격을 결코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전략이 공 적 영역의 사유화를 겨냥하고 있으나, 맑스가 “지하세계의 힘”이라고 불렀 던 생태적 공공제의 파괴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적 ‘소비 행위’를 막아서 생태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이 체제가 지속되는 것을 봉쇄하게 된다. 제이 슨 W. 무어에 따르면, 16세기의 초기 자본주의 이래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적 자본주의로 이어지는 생태적 공공제의 자유로운 전용은 이제 불가능하 게 되었다. 자연이라는 “공짜 선물”이 거의 고갈되었고 이제 다시는 예전처 럼 복구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가져갈 공짜 선물이 남아있어서 그것을 전용함으로 써만 유지된다. 북해, 알래스카, 서아프리카, 멕시코만의 유전 지대, 비옥한 토양 과 값싼 물을 쓰고 버릴 수 있는 남아시아의 녹색 농업지대, 값싼 금속과 석유로 인해 생산비용을 절감하게 만들었던 1989년 이후 구소련 블록의 세계시장으로 의 통합, 중국 빈농이라는 거대한 잉여 노동으로의 전용, 국가와 준국영 기업과 공적 서비스의 사유화 등이 바로 그 공짜 선물이었고, 이것은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거대한 변경은 이제 닫혀버린 것이다.13)

자원 고갈은 생태 파괴의 주요한 결과물로 이해될 수 있다. 현재 고갈되 고 있는 천연자원 중에서 석유는 그것의 전략적‧경제적 중요성으로 인해 도드라진다. 1859년 펜실베니아주의 타이터스빌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석 유는 자본주의의 재생산과 팽창을 가능하게 했던 핵심적 에너지였기 때문 이다. 현대 문명 전체가 석유에 의해 가능해진 저가의 에너지 체계에 기반 을 두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 시대는 “석유현대”(petromodernity)라는 이름

13) Jason W. Moore, "Crisis: Ecological or World-Ecological?" Depletion Design: A Glossary of Network Ecologies, Eds. Carolin Wiedemann and Soenke Zehle, Amsterdam: Institute of Network Cultures, 2012,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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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도 불리는 것이다.14)석유가 없다면 “현대적 전쟁기계도, 글로벌 운송 산업도, 통신혁명도 없었을 것”이다.15)우리가 아는 자본주의는 제만이 “석 유 자본주의”(oil capitalism)라고 부르는 경제 체제, 즉 “값싸고 손쉽게 조 달할 수 있는 석유 자원”에 우선적으로 기반하고 있다.16)자본주의가 석유 와 뗄 수 없이 얽혀 있기 때문에 석유 고갈의 가능성이 석유-이후의 미래 (post-oil future)에 대한 담론의 폭발을 이끌어낸 것은 당연하다. 예컨대 정 치학자인 토머스 호머-딕슨은 우리가 “실제적이고 악화된 석유 결핍을 경 험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세계 전체를 뒤흔드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고 주장한다.17)같은 맥락에서 드미트리 올로프는 미국 경제가 석유와 부 채에 의존해왔고, 이 둘 중 어느 하나에라도 문제가 생기게 되면 미국 경제 는 급작스러운 몰락을 경험할 것이라고 말한다.

석유는 미국 경제의 거의 모든 것에 에너지를 공급한다. (...) 석유 공급이 줄 어들수록 생산량도 줄어들게 되고, 경제 성장은 멈추게 된다. 안정된 상태에서 작동하도록 고안된 경제에서라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있겠지만, 미국 경제는 부 채에 의해 작동하고, 부채의 가치는 미래 성장의 전망과 연동되어 있다. 성장이 없으면 부채의 피라미드는 무너지기 시작하고, 일단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면 석유 수입 등과 같은 일에 쓸 돈이 부족해지게 된다.18)

석유고갈 상황이 가진 힘은 지정학적 갈등을 야기하게 될 가능성이 확실

14) Stephanie LeMenager, "The Aesthetics of Petroleum, after Oil!" American Literary History 24.1, 2012, p.60.


15) Imre Szeman, "System Failure: Oil, Futurity, and the Anticipation of Disaster."

South Atlantic Quarterly 106.4, 2007, p.806.


16) Ibid., p.807.

17) Thomas Homer-Dixon, The Upside of Down: Catastrophe, Creativity, and the Renewal of Civilization, Toronto: Knopf, 2006, p.85, p.100.

18) Dmitry Orlov, Reinventing Collapse: The Soviet Experience and American Prospects, Gabriola Island, Canada: New Society Publishers, 2011, p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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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 그레이는 경제적 가치를 가진 석유의 대부분이 페르시아만 같은 정치 적으로 불안정한 지역에 매장되어 있음을 지적하면서, 석유 매장지를 둘러 싼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열강들 간의 “거대한 게임”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한다.19)석유 고갈과 관련한 연구를 지속해왔던 쿤슬러는 석유를 둘러싸 고 벌어지는 군사적 긴장이 “궁극적으로 중동에서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지 역에서 전쟁을 촉발시키고 (...) 그것이 최후의 세계전쟁이 될 수 있다”고 예측하기까지 한다.20)

경제성장은 생태파괴와 자원고갈이라는 현실을 거슬러서 계속될 수 없 다. 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하면 정치‧사회‧문화의 체계들, 곧 전체 사회가 붕괴되기 시작한다. 이런 비상사태가 지속되면, 인간 문명의 총체적 붕괴 가능성도 가속화된다. 종말-이후 서사 중 ‘피크오일 소설’(peak-oil novel) 이라는 서브장르가 200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 종말-이후 서사와 마찬가지로, 하지만 석유고갈이라는 자 원부족 상황이 만들어낸 삶의 환경에 특히 집중하면서, 피크오일 소설은 대 개 이런 질문들을 던진다. ‘급작스런 경제-사회적 붕괴가 생겨나면 어떤 일 이 벌어질까? 붕괴 이후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붕괴의 시기에는 어떤 종 류의 태도나 습속이 생존을 위해 필요해질까?’ 이런 붕괴의 서사가 여전히 불필요한 걱정 혹은 마이너한 장르소설에 불과한 것으로 과소평가되지만, 사실 이런 종류의 파국서사는 기존 질서에 관해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문 화적 질문을 던지고 답을 탐구한다. “‘액체’ 근대가 ‘고체’ 근대를 대체하는 일이 (...) 최종적인 역사의 변환을 증명하는 것”이 되고, 혹은 조화롭게 공 존한다는 의미의 근대적 “콩비방스”(convivance) 개념이 의미를 상실한 대 신 생존이라는 형태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불확실성의 요소가 들어앉아

19) John Gray, Op. cit., p.119.

20) James Howard Kunstler, The Long Emergency: Surviving the Converging Catastrophes of the Twenty-First Century, New York: Atlantic Monthly Press, 2005,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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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현실이 들어섰을 때, 이 시기야말로—적어도 문학의 경우는 더욱 그 렇다—정상성의 취약함을 재고하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실행가능성에 질문을 던지며, 붕괴 이후의 삶을 상상해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시기일 수 있는 것이다.21)

3. “이제 모든 것이 지역으로 돌아갔다”: 뺷손으로 만든 세상뺸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의 소설 뺷손으로 만든 세상뺸은 문명 붕괴 이후의 삶이라는 주제를 탐구한다. 이 소설은 종말-이후 서사의 몇몇 지배적 관습 들에서 현저히 벗어나는 접근법을 취한다. 현대 문명이 붕괴한 이후의 세계 를 배경으로 하지만 이 소설의 어떤 인물도 유전조작으로 인해 만들어진 동물이나(뺷인간종말리포트뺸), 살을 뜯는 좀비나(<워킹 데드>), 사람을 먹 는 갱(뺷로드뺸)으로부터 도망 다니지 않는다. 다른 인기 있는 종말-이후 서 사들과는 달리, 이 소설에는 피에 굶주린 괴물도(뺷더 패시지뺸), 기괴한 휴머 노이드도(뺷나를 보내지 마뺸), 지성을 가진 로봇도(뺷아이, 로봇뺸), 전체주의 정권도(뺷칠드런 오브 맨뺸), 전염병도(뺷페스트하우스뺸), 시간여행도(<12 몽 키스>), 행성과 지구의 충돌도(<맬랑콜리아>) 등장하지 않는다. 극적인 역 동과 세계를 뒤흔드는 사건들로 가득한 다른 파국서사들과 달리 쿤슬러의 이 소설은 자동차 대신 걷거나 마차를 타야하고, 스마트한 인지노동 대신 육체노동에 종사해야 하는 새로운 환경에 스스로를 적응시키려 노력하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현실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쿤슬러의 이 소설 은 독자로 하여금 석유, 전기, 정부, 자본주의적 시장체제가 없는 삶을 상상

21) Zygmunt Bauman, Collateral Damage: Social Inequalities in a Global Age, Cambridge: Polity, 2011, p.37; ‘콩비방스’ 개념에 대해서는 Marc Abélès, The Politics of Survival, Trans. Julie Kleinman, Durham and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10,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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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액션으로 가득한 소설들보다 더욱 급진적이다. 쿤 슬러에게 ‘세상의 끝’이란 극적이고, 쾌감을 주는 할리우드식 생존서사가 아니라 자원고갈로 변화된 세상에 대한 현실적인 고찰과 닿아있다. 소설의 제목이 보여주듯, 쿤슬러의 종말-이후 세상은 석유에 의해 가능한 모든 편 의시설과 사치가 사라진 세상, 곧 “손으로 만든 세상”이다.22)

쿤슬러는 이 소설을 쓰기 3년 전인 2005년에 뺷장기 비상 시대뺸라는 책을 통해 석유고갈이라는 임박한 현실과 그것이 미국 사회에 미칠 영향을 다룬 바 있다. 이 책에서 쿤슬러는 지구 온난화에 의해 야기되는 생태적 황폐화 와 더불어 석유의 고갈이 희소한 자원을 둘러싼 지역적‧지구적 전쟁을 촉 발시킬 것이라고 예견한다. 이런 사태 속에서 궁극적으로 인간은 전통적인 국가 장치를 유지할 수단을 확보하지 못하여 아나키 상태로 가게 될 것이 고, 이제 파편화된 인간은 소비자본주의에 연동된 생활방식에서 벗어나 지 방 공동체, 농업, 물물교환 경제, 육체노동 등으로 규정될 전원적 생활방식 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이런 미래의 모습에 쿤슬러가 부여하는 명칭이

‘장기 비상 시대’(the long emergency)이다. 쿤슬러가 바라보는 장기 비상 시대의 모습은 민주주의-자본주의가 약속하는 기술 기반의 발전되고 풍요 롭고 더욱 인간적인 미래가 아니다.

장기 비상사태라는 환경은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그것의 반대가 될 것이 다. 풍요 대신 배고픔이, 따뜻했던 곳에는 추위가, 여유가 있었던 자리에 노력이, 건강이 있었던 곳에 질병이, 평화가 있었던 곳에 폭력이 있게 될 것이다. 이 새로 운 상황에 우리는 우리의 태도, 가치, 생각을 적응시켜야 하고, 그래서 우리는 근 미래의 우리 모습 혹은 과거의 우리 모습을 인지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생존 자체가 다른 모든 관심사들을 굴복시키는 세상 속에서는 삶에 대한 비관적 시선이 재등장하기 쉽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일반적인 인간의 본성이 가진 한 22) James Howard Kunstler, World Made by Hand, New York: Atlantic Monthly Press, 2008, p.142. 이후, 이 소설에서의 인용은 괄호 안에 페이지수를 표기하는 것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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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들과 그것이 특히 죽음이라는 보편적 상태와 맺는 관계를 냉철하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삶은 훨씬 더 현실적이 될 것이다. 상대주의라는 퇴폐적인 사치는 미 래의 묘지 안에서 잊히게 될 것이다. 아이러니, 세련됨, 첨단의 ‘쿨’함은 겨울을 나기 위해 충분한 음식을 생산하기 위해 힘쓰는 사람들에게는 기묘한 것 혹은 설명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장기 비상상태 속에서, 아무 것도 제공하 지 않은 채로 어떤 것을 얻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23)

쿤슬러가 바라보는 미래는 홉스적인 불안정이 지배하는 세계에 가깝다.

황량한 미래의 전망을 내어놓음으로써 쿤슬러는 우리 시대의 지배적 문화 에 대한 비판 뿐 아니라 “미래의 몽유병에 빠져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 운 현실 감각을 일깨워준다.24)

뺷손으로 만든 세상뺸은 사회학적인 뺷장기 비상 시대뺸의 문학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석유-이후 시대 뉴욕 주 북부의 ‘유니온 그로브’라는 가상의 마을에서 살아가는 소규모 집단의 이야기이다. 마을 밖의 세상은 혼 돈에 빠져 있다. 미국은 중동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의 전쟁에서 패했고, 대통령은 군사 쿠데타로 실각했으며, 지하디스트는 워싱턴과 LA를 폭격함 으로써 연방정부 자체가 유명무실해진데다가, 전염력이 강한 멕시코 독감 이 미국 전역에 퍼져서 수많은 미국인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장밋빛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약속했던 세상은 악몽의 현실로 대체되었으니, “지구 는 평평해지기를 그치고 다시금 매우 동그래졌다”(23). 정부도, 경제도, 석 유와 전기도, 자동차도, 텔레비전과 인터넷도 없으며, 오직 혼돈만 있다. 이 런 아나키적 상황 속에서 어둡고 폭력적인 인간 행동이 터져 나온다. 조직 폭력,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계급갈등이 다시 퍼져나간다(148-9). 현시대 가장 강력한 단일 제국이었던 미국이 갑자기 전형적인 제3세계로 변해버린 것이다.25)

23) James Howard Kunstler, Op. cit., p.303.

24) Ibid.,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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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배경이 되는 유니온 그로브는 많은 면에서 평화로우나, 문명 붕 괴에 의해 역시 영향을 받고 있다. 인류학자의 정확성을 가지고 쿤슬러는 이 마을에서 벌어진 거대한 변화들을 기록하는데, 그 중 가장 특기할만한 점이 ‘자동차 문화’의 소멸이다. 쿤슬러에게 자동차 문화란 한계를 모른 채 기술 진보라는 판타지에 몰두했던 지난 시대의 미국 문화를 상징하는 것이 다. 소설에서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인물들이 자동차와 연관되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 노 인이 반쯤 찬 기름으로 자동차를 몰다가 죽어버리는 장면(183)이 그렇고, 과거에 ‘바이크족’이었던 웨인 카프가 현재 ‘장군’으로 불리며 폭력적인 갱 단을 이끌면서 유니온 그로브를 위협하는 것 등(28-9)은 그 예다. 자동차와 함께 소멸된 것의 목록은 이어진다. 쇼핑몰(11), 기계(18), 커피와 후추(24), 교외지구(31), 고층빌딩(317), 대도시(85), 자본주의 경제(16), 정치와 관료 제(169-70) 등등. 소설 속에서 옛 시절의 일로 소개되는 이 모든 항목들이 값싼 화석연료로 만든 에너지에 의존한 현대 산업 문명과 직간접적으로 연 결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들은 쿤슬러가 “고-엔트로피 경제”(high-entropy economy)라고 부르는 자본주의의 유물인 것이다.26)

산업 문명의 붕괴 이후 유니온 그로브의 삶의 방식은 전근대적이고 지역 적이다. 사람들은 다른 마을과 동떨어져 살고(“5마일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길이 없지,” 3), 말을 타고 다니며(“때로 온 세상에 말 냄새 가 나는 것 같았다. 언젠가 말 한 필을 소유하는 게 내 소망이었다.” 5), 모 든 이들이 농업에 종사한다(5). 마을에서의 삶은 전반적으로 평화롭고 사람

25) 미국에서 파국서사가 일정한 위치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세계 유일의 단일 헤게모니를 가져왔던 미국이 몰락할지 모른다는 불안 에 있을 것이다. ‘미국의 제3세계로의 추락’이라는 모티프는 모든 파국서사에서 공히 등 장한다. 실제 역사 속에서 ‘제3세계화’를 경험해본 적 없는 미국은 파국서사라는 상상적 형태를 통해 이를 경험한다. 최근 파국서사의 인기가 시작되었던 시점이 2001년 9/11 이후라는 사실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26) Ibid.,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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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우호적이다”(9). 동요하고 폭력적인 도시의 모습과는 달리, 유니온 그 로브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장소로 그려진다. 1장에서 주인공 로버트가 마을로 진입하는 길에서 낯선 이와 우연히 마주칠 때, 그가 타인 에게서 가장 먼저 보는 것은 그의 말과 마차이지 그의 외양이 아니다(5-6).

로버트는 숨거나 방어하려고 하지 않으며, 이들은 오히려 악수하며 날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다른 종말-이후 서사에서 타인이야말로 궁극의 위 협으로 제시되는 반면, 쿤슬러의 이 소설 속에서 ‘인간’은 치명적인 위협으 로 그려지지 않는다. 이 변해버린 세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협은 자연 자 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쿤슬러는 뺷장기 비상 시대뺸에서부터 석유-이 후 시대가 도달할 때 가장 안정적으로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장소는 대도시 로부터 벗어난, 물과 숲과 대지가 갖춰진(수력, 과실, 농경) 작은 시골 마을 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유니온 그로브는 바로 이런 쿤슬러의 ‘이상’을 전형 화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유니온 그로브가 석유시대의 붕괴 이후 살아 갈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그려진다 해도, 거주민들은 여전히 생존을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한다. “역사의 로드킬”(239)인 이들로서는 “가혹할 정도로 육체적인”(17) 삶에 적응하지 않을 경우 결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4. 풍요에서 희소성으로: 민주주의와 풍요 이미지

뺷손으로 만든 세상뺸이 묘사하는 가능태로서의 세계는 기술이 아니라 자 연 자체에 의해 지배된다. 값싼 화석연료가 만드는 에너지에 의해서만 가능 한 대량 생산, 대량 소비, 대량 커뮤니케이션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소 설 속 모든 이들은 손으로 하는 노동에 의해서만 삶을 지탱해갈 수 있다.

소설 속에서 강조되는 육체노동의 필요성은 석유문명의 붕괴에 의해 촉발 될 삶의 리듬 변화를 환기시킨다. 언제나 필수재화의 부족이 존재하고, 자 원과 상품이 풍부했던 시대가 사라지면 사람들은 스스로 물건을 제조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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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살아갈 수 있다. 붕괴-이후의 세계에서 다시금 희소성(scarcity)이 표면 화되는 것이다.

현대인들—최소한 선진 산업사회에 사는 이들—에게 희소성의 문제는 익숙하지 않을 것이지만, 사실 희소성이라는 조건은 인류 역사에서는 언제 나 기본 상태였다. 그레이에 따르면 “역사 전체에서 전쟁은 금과 은, 강과 옥토에의 접근권을 둘러싸고 발생했다.”27)정치학자 윌리엄 오펄스 또한 인 류 역사 대부분에서 자원을 쟁취하기 위한 갈등은 보편적이었다고 말한다.

어떤 이유로든 희소성의 짐이 일시적으로 가벼워진 상대적으로 짧은 몇몇 기 간들을 제외하면, 불평등, 억압, 갈등은 정치적 삶에서 매우 돋보이는 특징이었 다. 이것은 통치자의 성격을 비롯한 다른 간헐적인 요소들의 결과로 조금씩 증 대하거나 감소하는 데 그쳤다.28)

고대 철학자들은 희소성을 인간 조건에 불가피하게 결합되어 있는 제약 으로 받아들였다.29) 가령 뺷정치학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제한된 자원만 있는 조건 아래서 어떻게 선한 삶을 살 것인가의 문제를 깊이 의식하고 있 다. 그는 정치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자원의 양에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 으며, 따라서 대규모 인구로 잘 통치는 국가(도시)를 만들어내기란 불가능 하다고 보았다. “위대한 국가와 인구가 많은 국가는 동일하지 않다. 게다가, 인구 많은 국가가 좋은 법에 의해 운영되는 일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어렵다는 것을 경험이 보여준다. 어쨌든, 우리는 인구수를 제약하지 않은 채 로 잘 운영되는 헌정이라는 명성까지 가진 국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30)

27) John Gray, Op. cit., p.115.

28) William Ophuls, Ecology and the Politics of Scarcity Revisited: The Unraveling of the American Dream, New York: W. H. Freeman and Company, 1992, p.190.

29) David Lewis Schaefer, "Economic Scarcity and Political Philosophy: Ancient and Modern Views," International Political Science Review 4.3, 1983, p.280.

30) Aristotle, The Politics, Trans. T. A. Sinclair, London: Penguin, 1981, VII. 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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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에서 현재에 이르는 시기는 희소성이라는 근본적 조건으로부터 예외가 된 시기이다. 그런 변화를 만들어낸 주요한 원인으로는 신세계의 발 견, 석유라는 고열량 에너지의 발견, 기술의 급격한 향상 등을 꼽을 수 있 다. 15~16세기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식민화는 경제적으로 폐쇄되어 있 던 유럽 문명이 거의 무한해 보이는 천연자원에 접근하여 이를 소비함으로 써 팽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9세기 말 석유의 발견과 상업화 는 자본주의의 생산력을 극단적으로 가속화했다. 19세기 이래 더 많은 원자 재와 더 많은 노동력과 더 넓은 시장의 확보를 위해 전세계로의 팽창을 추 동하던 서구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그 전까지 통합하지 못했던 지역을 포함한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을 식민화할 수 있었다. 무어와 오펄스에 따 르면,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원인은 신세계의 발견이었다. 이 사건은 유 럽 주요 열강들에게 전례 없는 경제적 발전을 가능케 하는 기회를 주었으 며, 이를 통해 현대 문명을 특징 짓는 제도와 가치들이 생겨나게 되었다.31) 희소성에서 벗어나는 팽창이 가능했던 이 시기의 사상들 역시 희소성이 라는 조건에서 벗어나 있으며, 이로부터 현대적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이 성립하기 시작한다. 근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사상사에 우뚝 솟아 있는 존 로크는 뺷통치론뺸에서 자신의 노동을 사용해 자연 상태의 어떤 물질을 자신의 사적인 물건으로 확보하여 합법적으로 전유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 명하고 있다. 로크는 인간이 자기 노동으로 물건을 확보하면, 그 물건은 배 타적으로 자신의 재산이 되어야 한다고 쓰는데, 그 이유는 “최소한 타인들 에게도 물건은 보편적으로 충분하고도 양질인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이 다.32) 배타적으로 소유되는 사유재산이라는 이 개념으로부터 개인의 권리 개념이 탄생하며, 그로부터 다시 현대적인 민주주의의 원리가 탄생한다. 이

1326a25.

31) Jason W. Moore, Op. cit., pp.74-77; William Ophuls, Op. cit., pp.190-191.

32) John Locke, Two Treatises of Government and A Letter Concerning Toleration, Ed. Ian Shapiro,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03,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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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한 로크의 주장은 인간이 풍부한 자원에 접근 가능했던 유럽의 특정한 역사적 상황을 명백히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33)중상주의적 자본주의의 선 구적 정치경제학자인 아담 스미스 역시 경제 발전에 있어 모든 규제를 제 거함으로써 번영이 가능해지며, 그 결과 인간이 봉건적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스미스의 희망적인 주장 아래에 놓인 것 역시 신세계로 팽창하는 유럽의 역사적 현실이라는 조건이 놓여있다. 칼 맑스는 산업화된 경제의 생산력에 대해 훨씬 더 낙관적이었다. 뺷자본뺸 3권에서 맑스는 이렇 게 쓴다.

자유의 영역은 필요와 외부 형편에 의해 결정되는 노동이 끝나는 곳에서만 진정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영역은 그 고유한 성질상 물질적 생산 영역을 넘 어서는 곳에 놓여 있다. 야만인들이 자신의 필요를 만족시키고, 자신의 삶을 유 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해 자연과 맞붙어야 하듯이 문명인도 그러하며, 문명인은 사회의 모든 형태 속에서 그리고 가능한 모든 생산양식 아래에서 그 일을 해야 만 한다. 자연적 필요라는 이 영역은 그[문명인]의 발전과 함께 팽창하는데, 왜 냐면 그의 필요 역시 팽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팽창을 만족시키는 생 산력 역시 동시에 팽창하게 되는 것이다.34)

그는 사람들의 결핍 증가에 다라 “자연적 필요의 영역”이 증가할지라도 근대적 산업 생산력의 혁명적 발전의 도움을 받아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헤겔의 역사철학을 따라 맑스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의 지 뿐 아니라 생산력의 진보에 의해서 자유의 영역이 달성될 수 있다고, 다 시 말해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에 의해 극복되면 오래된 인간사의 갈등 역시 궁극적으로 종료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맑스는 희소성의 종말

33) Jeremy Waldron, "Enough and as Good Left for Others," The Philosophical Quarterly 29.117, 1979, p.319.

34) Karl Marx, Capital: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ume Three, Trans. David Fernbach, London: Penguin, 1991, p.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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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사의 종말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35)진정, 자유, 민주 주의, 해방의 가치들에 형태를 부여했던 근대 서구의 사상가들은 모두 사실 은 식민주의적 기획에 의해 가능해진 무한한 경제적 팽창이 만들어낸 유럽 의 물질적, 기술적 이점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오직 그 틀 안에서만 사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풍부한 천연자원에의 접근이 가능하지 않았다면, 서 구 근대 정치철학자들의 이 모든 인간적이고 리버럴하고 평등주의적이며 민주주의적인 가치들은 실현될 수 없었을 공산이 크다.36)

불행하게도 풍요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자유롭고 인간적인 사회를 건설 할 수 있도록 인간에게 자원을 공급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변경의 발견 가능 성은 거의 사라졌다. 그럼에도 우리의 지배적인 정치 모델은 여전히 풍요의 약속과 무한한 성장의 기대에 얽매인 채로 남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니엘 벨은 자본주의 사회를 붕괴의 벼랑으로 몰아가는 것이 사회적 구조(기술- 경제 질서)와 문화(상징적-심리적 질서) 사이의 괴리라고 지적한 바 있다.

자본주의의 사회적 구조는 자원의 희소성에 의해 결정되고, 그렇기에 바뀔 수 있으며, 그 속에서 제한 없는 무한 성장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반 면 문화의 영역은 심리적 결핍감에 의해 지배되고, 그 심리적 결핍이란 무 한한 것이다. (미국의 경우) 과거에 이 두 영역은 청교도주의와 프로테스탄 티즘 아래에서 하나의 구조로 결합되어 있었다. “청교도적 기질”(인간의 타 락에 사로잡혀 생기는 성스러움에 대한 열망과 고뇌의 감각)과 “프로테스 탄트 윤리”(세속적 이익을 지향하는 실용성)이라는 문화적 가치가 각각 조 너선 에드워즈와 벤저민 프랭클린이라는 아이콘을 통해 미국 부르주아 사 회에서 지배적이었을 때, 경제와 사회적 구조는 일관되게 잘 관리될 수 있 었다.37)하지만 자기실현에 대한 근대적 믿음, 20세기 중반의 소비사회, 그

35) John Gray, Straw Dogs: Thoughts on Humans and Other Animals,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2002, p.167.

36) William Ophuls, Op. cit., pp.190-192.

37) Daniel Bell, Op. cit., pp.5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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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1960년대의 쾌락주의 등의 등장—이 모든 것은 시장의 논리를 따랐는 데—으로 인해 사회영역과 문화영역 간의 필수적 유대가 부식되었다고 벨 은 말한다. 벨에게 있어 이러한 변화들은 과도한 지출과 강박적 쾌락주의 문화를 만들어냈고,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구조의 기반을 심하게 뒤흔들었 다는 것이다. 벨에 따르면 이 사회적 구조와 문화 간의 괴리가 ‘현대 자본주 의의 문화적 모순’이다. 문제는, 소비의 문화가 자원의 희소성과 충돌한다 는 데 있다.

자원이 낭비할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한 곳에서, 혹은 개인이 고도의 불평등을 정상적이거나 정당한 것으로 수용하는 곳에서는 이 소비가 가능할 수 있다. 그 러나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더 많은 것을 원하고, 그것이 권리의 문제라고 여김 에도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면, 정치적인 요구와 경제에서의 한계 사이의 긴장이 발생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기 시작할 것이다.38)

희소성이 삶의 지배적 요소가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풍요가 더 이 상 소비 자본주의와 자유 민주주의의 기반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자마자, 다툼, 불평등, 제한, 억압, 극심한 경쟁이 뒤따를 게 확실하다. 윌리엄 오펄 스가 지적하듯이, “(현재 이해되는 방식으로서의) 개인주의, 자유, 민주주의 의 황금시대는 거의 지나”간 게 아닐까.39)우리에게 익숙한 편안한 삶의 방 식은 사라질 것이고, 인간은 자연의 가혹함과 일상의 위험 위에 감도는 영 속적 불안 속에 내팽개쳐질 것이다. 홉스가 뺷리바이어던뺸의 「행복과 비참 함과 연관된, 인간의 자연적 조건에 대하여」라는 장에서 관찰하듯이, 인간 은 위험의 상황 속에서 “지속적인 공포와 폭력적인 죽음의 위험”에 맞닥뜨 린다. “인간의 삶이란 고독하고, 불쌍하며, 끔찍하고, 잔인하며, 짧다.”40)

38) Ibid., p.23.

39) William Ophuls, Op. cit., p.192.

40) Thomas Hobbes, Leviathan, Ed. C. B. Macpherson, London: Penguin, 1985,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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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가며

역사적으로 근대 민주주의 체제는 15세기 신세계의 발견을 통해 엄청난 자원의 변경을 얻어내고, 그 과정에서 노예제와 식민화를 통해 유럽 시장의 확장을 일궈낸 서구 유럽 문명의 풍요에서 그 사상적 기원을 갖는다. 상업 자본주의에서 산업 자본주의로, 나아가 금융과 인지 자본주의로 쉴 새 없이 확장되면서 이제 지구상에는 그 어떤 ‘변경’도 남아있지 않다. 지리상으로 사라진 변경은 인간의 감정, 정동, 지식의 영역을 마지막으로 포섭했고, 인 간 내면까지 장악한 다음에는 사이보그와 휴머노이드의 세계, 곧 인공지능, 로봇공학, 생명과학 중심의 4차 산업혁명이 전면화될 것이다. 중요한 점은 무한할 것 같았던 천연자원이 한계를 맞이할 무렵 금융과 인지 자본주의가 헤게모니를 잡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이미 ‘노동의 종말’은 가시화되었고, 자본은 인간을 벗어나 숫자가 명멸하는 모니터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고 있 다. 다른 한 편에서는 자본주의 500년의 역사가 만들어낸 생태 파괴가 가속 화되고 있다. 자본주의는 애초부터 생태계를 필요로 했고, 자본주의와 결합 하는 순간 자연의 생태계는 ‘자본-생태계’(capitalist ecology)로 변모한지 오래되었다.41)지구 온난화, 자원 고갈, 사회적 갈등, 인간 본성의 변화 등 을 포괄하는 생태 파괴는 지금까지 자본주의가 소비하고 기생했던 그 환경 자체가 사라짐으로써 결국 자본주의마저 그 기반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농 후함을 보여준다.42) 다시 말해, 우리가 익숙하게 여기던 근대 자본주의 문 명 자체의 붕괴가 가능한 것이다. 쿤슬러의 뺷손으로 만든 세상뺸이 그리는 석유-이후의 미래는 단지 ‘상상’에 그치는 게 아니며, 자본-생태계의 한 문 제인 자원 고갈, 그 중에서도 석유 에너지의 고갈이라는 합리적인 가설(혹

41) Jason W. Moore, Capitalism in the Web of Life: Ecology and the Accumulation of Capital, London: Verso, 2015.

42) ‘생태’라는 개념은 ‘자연환경’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인간-자본-자연환경을 모두 포괄하 는 거대한 개념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Timothy Morton, The Ecological Thought,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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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사실)에 기반을 둔 ‘미래적 리얼리즘’ 소설이다. 이 파국서사를 통해 생 각할 수 있는 많은 문제 중 하나가 ‘민주주의와 풍요’ 간의 관계다. 쿤슬러 가 묘사하는 풍요 없는 세상은 민주주의가 사라진 전체주의적 디스토피아 세상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적 삶의 방식이 다양한 정치체제 중 하나로 여 겨지는 곳이다. 이 소설의 스토리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집단은 기실 민주주 의 체제, (사회주의적) 권위주의 체제, 폭정 체제라는 세 개의 정치체제로 환원할 수 있다. 소설 속에서 유니온 그로브라는 민주주의 체제는 폭정 체 제에 맞서서 승리를 거두지만, 사실 유니온 그로브의 민주주의는 권위주의 체제를 동반자로 여길 뿐 아니라, 그것의 민주주의 자체도 현실주의적인 방 식으로 축소되고 수정된 차원에 그친다. 쿤슬러는 석유-이후 세계의 민주 주의는 그만큼의 한계를 지닌다고 추론하고 있는 것이다.43)

파국서사가 상상하는 민주주의는 풍요가 사라진 세계에서의 민주주의다.

역사적 민주주의가 물질적인 풍요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면, 그 풍요 가 사라졌을 때의 체제 역시 민주주의일 것이라고 상상하기란 어렵다. 저성 장 체제로 굳어져가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하에서의 한국, 일본, 미국 등의 민주주의 체제는 각기 다르지만, 교과서적인 민주주의 체제의 후퇴 양 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같다. 박근혜와 아베와 트럼프가 동시에 출현하 고, 두테르테와 브렉시트와 장 마리 르펜과 이슬람국가가 기정사실이 된 오 늘날 세계는 어쩌면 자유민주주의의 수정 혹은 후퇴 혹은 심지어 소멸까지 도 생각해보게 한다. 풍요가 사라진 세계의 체제는 오히려 ‘힘 있는 자들의 지배’가 더욱 강력해지는 반민주적 체제가 될 공산이 크다. 수많은 디스토 피아 소설과 파국서사가 그리고 있는 세계가 바로 그런 세계다.

43) 미국 드라마인 <워킹 데드>(The Walking Dead) 시리즈 역시 유사하게 분석할 수 있다. 릭 그라임스 집단은 구성원의 의사가 존중되고 표현되는 민주주의 체제이고, 그라 임스 집단이 만나는 다른 집단의 정치체제는 각기 다르다. 그러나 그라임스 집단의 민 주주의 역시 현실주의적인 수정을 거친 민주주의이고, 그 집단이 다른 체제의 집단과 만날 때 언제나 강력한 도덕적 우위를 갖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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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의 한국은 민주주의의 ‘정상화’를 외치며 민주주의적 열정을 불태 웠지만, 과연 박근혜가 아닌 새로운 대통령으로 문재인이 뽑힘으로써 형식 적 민주주의가 일시적으로 ‘정상화’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본이 장악 한 우리의 일상도 그렇게 민주주의적으로 변할까? 한국의 ‘부’(풍요)를 극 히 일부세력이 독차지하고, 다수 대중은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지금 광장에서 호명되는 그 ‘민주주의’는 그저 껍데기로 남을 뿐이고, 그 상황이 극단을 향해 치닫는다면 그 어떤 체제가 등장하게 될 지 는 아무도 모른다. 플라톤은 민주주의는 아나키를 만들어내고, 아나키는 다 시 폭정으로 이끈다고 썼다.44)하지만 플라톤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제대로 된 평등의 민주주의였다. 어쩌면 자본-생 태계의 균열로 만들어지고 있는 총체적인 난국의 끝은 플라톤의 상상보다 더 끔찍할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경험해보지도 못한 채 아나키 와 폭정으로 갈지도 모르고, 그 폭정에의 반항으로부터 새로운 과두제나 전 제주의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파국서사가 상상하는 미래 세계는 대개 민주 주의가 없거나 수정된 체제다. 우리는 풍요 없는 세상을 그리는 파국서사를 통해 민주주의를 생각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그토록 믿는 ‘상식’으로서의 민 주주의라는 것이 역사의 변화 속에서는 부질없이 소멸할 수도 있는 취약한 개념이자 형체임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 없이 살자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 자원의 풍요 혹은 희소성이라는 문제를 그 전에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다. 현재 한국의 틀에서 말하자면, 우 리가 지킬 민주주의는 청와대의 주인 교체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극단적으 로 불균등한 자원의 배분이라는 그 문제에서 사실은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4) Plato, The Republic, Ed. G. R. F. Ferrari, Trans. Tom Griffith, Camb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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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Can Democracy Survive the State of Scarcity?

-Rethinking Democracy through Catastrophic Narratives

45)Moon, Hyong-jun*

Modern democracy had its origin in the material abundance of Western European civilization, which had been developed and flourished through the discovery of New World, slave system, colonization and imperialism.

In other words, the development of modern democracy had an inevitable connection with the development of modern capitalism. By expanding from commercial capitalism to industrial capitalism, and finally to financial and cognitive capitalism, modern capitalism has left the world no ‘frontier’ whatsoever. Ecological devastation that modern capitalism has been accelerating makes possible the disappearance of environment itself, which modern capitalism has made its material foundation. This leads us to think about the collapse of modern capitalist civilization, on which modern democracy depends.

James Howard Kunstler’s World Made by Hand is a futuristic catastrophic narrative, in which the rational hypothesis of resource depletion, especially the question of peak-oil, plays a key role. Kunstler’s catastrophic narrative pushes us to consider the relationship between democracy and material abundance. In this post-oil world, modern democracy is not an essential political value but mere one political culture among many, e.g. socialist authoritarianism, theocratic authoritarianism, tyranny, etc. Kunstler speculate that democracy without material abundance necessarily has its own limitations.

Democracy viewed by catastrophic narratives is a limited democracy without material abundance. When democracy has been closely connected

* Chung-Ang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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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material abundance made by capitalism, then it is hardly imaginable that the democracy would be still working smoothly without such abundance. One can see nowadays not a few examples of democratic variations and/or deteriorations under the global system of neoliberal capitalism. Politics in the world without material abundance could be not a democratic system but non-democratic systems that hinge on dominance of the powerful rich, which has been imagined by mainstream catastrophic narratives. By reading catastrophic narratives, it is urgent for us to think about the future of democracy. The question of scarcity and abundance is the key idea when one should think about when he/she considers the vague prospect of modern democracy. Democracy is not just a purely political, philosophical, and ethical matter. It is rather a material and economic matter that starts and ends with the problem of resources and its distribution.

Key Words : Democracy, Catastrophic Narrative, Post-Apocalyptic Narrative, Dystopia, Scarcity, Neoliberalism, James Howard Kunstler, World Made by Hand

<필자 소개>

이름 : 문강형준

소속 : 중앙대학교 영문학과 전자우편 : caujun@naver.com

논문투고일: 2017년 6월 30일 심사완료일: 2017년 8월 15일 게재확정일: 2017년 8월 22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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