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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INFORMATION FOR CHEMICAL ENGINEERS, Vol. 37, No. 5, 2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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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양 재건축사사무소 ELEPHANTS [email protected]
무더운 여름이 가고 날씨가 쌀쌀해지는 계절이 돌아왔 다. 아직 몸은 여름에 익숙한데 기온은 갑작스레 낮아지는 시기이다. 이럴 때쯤 아파트에서는 여름철 내내 공급하지 않던 난방을 간헐적으로라도 시작한다. 일반 가정집에서 도 슬슬 동절기를 대비한 보일러 가동을 시험해보곤 한다.
바야흐로 한반도 전역이 ‘따스한 아랫목’을 향해 변신을 준 비하는 기간인 것이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의 특징중 가장 독특한 부분을 꼽 는다면 아마도 ‘온돌’일 것이다. 동아시아 전통 건축물의 기본적인 구법이 중국으로부터 시작되었기에 많은 부분에 있어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많은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 나 온돌만큼은 이웃 국가들과도 확연히 차이가 날 뿐 아니 라, 전통 목구조 방식이 줄어든 현대의 주거 방식에 있어 서도 바닥 난방의 형태로 면면히 이어져 우리 생활에 빠질 수 없는 요소로 자리 잡은지 오래이다. 한국인이라면 ‘따 끈한 방바닥’이 없는 겨울은 상상할 수가 없으며, 해외 생 활을 하는 이들이 이내 그리워하는 정서적, 물리적 그리움 의 대명사가 되어버린지 오래이다. 온돌은 한반도 북부 혹 은 만주에서 기원전 3세기경이나 그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 로 보인다.
1)동시대의 고대 로마에서도 온돌과 비슷한 원리로 덥히 던 하이퍼코스트(Hypocaust) 방식이 있었고, 전세계적으 로도 이와 흡사한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어, 온돌 자체를 한반도 지역의 독창적인 발명으로 보기는 힘들다. 하이퍼 코스트는 규격화된 석재나 벽돌 기둥을 일정 간격으로 쌓
1) “연해주 한민족사 ‘2300년 맥’ 찾았다…옥저·발해 ‘쪽구들’ 발견”, 경향신문, 20070817
고 그 위를 로마식 콘크리트 판으로 덮어 구들을 형성한 후 바닥을 덥히는 방식이었다. 주로 대중 욕탕이나 대규모 공중 건물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많은 노동 력과 연료가 필요했으므로 유지 비용 또한 높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결과적으로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하이퍼코스 트 방식은 사실상 명맥이 끊긴 반면에 온돌은 소규모 가옥 에 주거용으로써 취사 행위와 함께 복합적으로 구성됨으 로써, 한반도에 특화된 방식으로 깊게 뿌리를 내릴 수 있 었다.
온돌은 삼국 시대를 거쳐 점차 한반도 중남부에서도 사 용하였으며 당시 바다 건너 일본에 진출한 도래인들의 유 적
2)에서도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아직까지는 방 내부의 전체가 아닌 일부의 ‘쪽구들(부분구들)’ 형식이었 으며, 이는 지금도 중국 북동부와 자금성 내부의 일부 실 에서 볼 수 있는 캉(炕)의 형태로도 유추할 수 있다. 이러 한 온돌이 방 전면을 덥히면서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된 시 기는 고려시대이다. 방 전체를 난방하려면 필연적으로 아 궁이가 실외로 나갈 수 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이는 부 엌과의 연계를 통해 부뚜막이라는 주방 시설과의 결합으 로 나타났다. 지금의 현대 주거에서는 ‘부엌+식탁’ 공간 을 방과 분리하여 하나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우리 의 전통 주거에서는 ‘부엌(부뚜막/아궁이)+방(온돌)’이 ‘패 키지 유닛’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면 높이의 부엌 바닥 에 아궁이 높이를 더해서 온돌 방바닥과 마루의 높이가 결 정되었으며, 방 전면의 난방효율을 위해 작은 출입구와 창
2) 일본의 옛수도 교토시의 인근 시가현 오츠시립역사박물관에는 이 지역에서 발굴된 온돌(외줄고래) 유적이 전시되어 있다.
건축 잡상 (3)
온돌과 세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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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ICE, 제37권 제5호, 2019을 내고 낮은 천장과 작은 실내 공간을 계획하였다. 이렇 듯 ‘전면 온돌’의 등장은 단순히 난방 방식의 확대가 아니 라 이 땅의 주거 형태가 가지는 특징들에 고스란히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온돌은 여러 실중 일부 방이나, 특정 계층 위주로 사용되었으며, 지금처럼 서민층까지 확산되 어 거의 모든 방들과 대다수의 주거에 온돌을 설치하게 된 것은 17~18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가능해졌다.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온돌의 대중화는 생 각보다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셈이다.
온돌은 이후 근대를 거치면서 세계와 조우하게 된다.
100여년전 구한말에 한반도를 찾았던 외국인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빵처럼 사람이 구워지는’ 온돌에 대한 강한 인상 을 기록으로 남겼다. 특히 이들은 온돌 자체가 가진 바닥 난방의 효용성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3), 취사와 함께 난방 이 가능한 효율성에 대해서도 주목한 바 있다.
4)심지어 일 본 전통의 고타쓰에 비해 온돌이 위생적이고 효율적이므 로 이를 만주와 일본의 동북 지방에 널리 보급하자는 의견
3) '조지 길모어는 조선 가옥은 “방바닥이 따뜻하기 때문에 겨울에 도 두텁게 입지 않고서도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라고 하고, 또 온 돌은 “경제적으로나 편리함으로나 보나 주거용으로 가장 적합하 다”라고 했다.' p73, 온돌의 근대사, 권석영, 일조각, 2010 4) '이사벨라 비숍은 온돌에 대해 “10세의 아이들이 운반할 수 있는
양의 마른 잎이나 잡초로 12시간동안 섭씨 21도 이상의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대단히 경제적인 난방 장치”라고 했다.' p72, 온돌 의 근대사, 권석영, 일조각, 2010
도 있었다.
5)이후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한반도에 이식된 일본 식 주거 방식에도 온돌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남방 계통 의 일본식 주거 양식이 겨울의 혹한을 견딜 수 없었기에 가옥내 일부에 북방계 문화인 온돌방을 두거나 한옥을 별 동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발전였다. 이에 따라 여름에 시 원한 다다미 주거 문화(일본가옥)와 겨울에 적합한 온돌 가옥(한옥)이 이색적인 절충방식으로 결합한 하이브리드 주거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6)또한 이 시기에 들어 온돌은 한반도 밖으로도 진출하게 된다. 당시 일본은 혹독한 겨울 이 있는 홋카이도 및 사할린 등의 북방 영토 개척을 위해 서 온돌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검토하였다. 일부 관사에 온 돌방을 설치하거나 홋카이도 박람회에서도 온돌 모형을 전시하며 홍보하기도 하고, 재일 조선인 노동자들의 숙소 및 일부 가옥 등에 온돌을 축조하기도 하였다. 이후 본격 적인 전시 체제에 돌입하면서 온돌 설치 비용, 축조 기술 자 수급 등으로 널리 확산되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홋카이 도의 몇몇 민가에서는 이 시기에 축조된 온돌의 흔적이 발 견되고 있다.
7)5) '모리오카 농림고등학교 고수였던 다마리 기조는 코타쓰 폐지를 주장한 글에서 그 대안으로 온돌을 추천하고 장려했다', p80, 온 돌의 근대사, 권석영, 일조각, 2010
6) 1930년대 김종량의 주거 실험과 H자형 주거, 백선영, 2005 7) '2004년 재건축으로 해체된 80년 이상된 오타루시의 저택에 온돌
이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고, 아사히카와시의 80년 이상된 한 저 택에도 온돌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p235, 온돌의 근대사, 권석영, 일조각, 2010
그림 1. 온돌의 아궁이와 부뚜막.
(출처: https://www.cha.go.kr)
그림 2. 로마시대 하이퍼코스트 유적.
(출처: https://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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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 그러나 여전히 온돌은 여러 문제가 있었는데, 일단 구
들 자체가 재료적 특성상 두껍고 무거우므로 2층이상의 고 층에는 설치가 어려웠으며 연료 공급으로 인한 산림 황폐 화가 발생하였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왕겨·연탄·석탄 활용을 장려하며 관련 기구들을 고안하고, 열효율을 높이 기 위해 아궁이 입구를 막는 칸막이 덮개(분구)를 만들거 나, 수증기나 화덕을 활용하여 온돌의 경량화를 시도하기 도 하지만, 여전히 현대화에는 한계가 있었다.
온돌의 획기적인 변신은 세계적인 건축가였던 미국의 프랭크 로이트 라이트(Frank Lloyd Wright:1867~1959)와 한국의 온돌이 만나면서 시작된다. 1914년 겨울 당시 도쿄 의 제국 호텔 설계건으로 일본을 방문한 라이트는 어느 만 찬에 초대받아 온돌을 접하고 그 깊은 인상을 훗날 자서전 에 소개하였다. 이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쿄의 겨울은 지독하게 춥다. 음습한 추위여서 결코 얼거나 서리가 내리는 일은 거의 없지만, 도쿄는 그 때까 지 내가 가본 곳중에서 이탈리아를 제외하고는 가장 추운 곳 같았다. (중략) 어쨌든, 우리는 추위에 오들오들 떨게
될 것을 알았지만 오쿠라 남작의 도쿄 저택에서의 만찬 초 대를 받아들였다. 아니나 다를까, 식당은 식사를 할 수 없 을 정도로 추웠다. 나는 19코스 족히 되는 음식이 제공되 는 동안 내내 먹는 척만 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식사가 끝난 후에 남작은 아래층의 ‘한국방’이라 불리는 방으로 우 리를 안내했다. 방은 크기가 가로 11피트(3.35m), 세로 15 피트(4.57m)에 천장까지 높이가 7피트(2.13m) 정도 되었 다. 바닥에는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으며, 연한 노란색의 벽은 밋밋하기 그지 없었다. 우리는 터키식 커피를 마시면 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그곳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런데, 기온이 갑자기 바뀐 것 같았다. 결코 커피 때문이 아 니었다. 마치 봄이 온 듯 했다. 우리는 곧 몸이 따뜻해지고 다시 즐거워졌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는데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훈훈함이 감돌았다. 눈에 보이는 난 방 시설도 없었고 이것으로 난방이 되는구나 하고 바로 알 수 있을 만한 그 어떤 것도 없었다. 그건 정말이지 난방여 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기후적 사건이었다.”
8)온돌에 크게 감명받은 라이트는 곧바로 도쿄 제국 호 텔의 욕실 바닥에 전기 히터를 설치하도록 설계한다. 귀 국후에는 전기 히터 대신, 온수 순환 파이프를 바닥에 매
8) 3p,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온돌 체험과 그의 건축작품에의 적 용 과정 및 의미에 대한 고찰, 김남응외 2인, 2005
그림 4.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출처: https://en.wikipedia.org)
그림 3. 일식과 한식이 결합한 한일절충식 가옥.
(출처: 1930년대 김종량의 주거 실험과 H자형 주거, 백선영,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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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ICE, 제37권 제5호, 2019입하는 방식으로 건축물을 설계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지 어진 실제 사례가 ‘Jacobs House 1(1936~1937)’ 주택이 다. 이 건물은 1층 바닥 하부에 모래와 온수 파이프 시스템 을 매입후 바닥 콘크리트를 타설함으로써 우리가 익숙하 게 여기는 현대식 바닥 난방 시스템을 시도했다. 이후 라 이트는 ‘John Wax 회사 본부’에도 이를 적용하여 완성시 킴으로써 주거시설 뿐 아니라 일반 사무실 환경에서도 바 닥 난방의 현대화를 도모했다. 이밖에도 본인이 설계한 수 십여개의 건축물에 지속적으로 온돌의 원리에 기초한 바 닥 난방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이를 널리 전파하였다. 온돌 의 기원처럼 프랭크 로이드가 온수를 활용한 바닥 난방 시 스템의 창시자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실제로 ‘Jacob House1’ 이전에도 동시대 몇몇의 건물들이 이러한 온수 순환식 바닥 난방 시스템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이나, 앞서
제국 호텔 설계에서부터 전기 히터를 통한 바닥 난방 등을 계획한 것이나 이후에도 실질적으로 이를 지속적으로 설 계하고 설치하였던 점 등을 보았을 때 라이트가 이 분야에 있어 선구자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의 노 력과 함께, 건설 기술의 급격한 발전에 힘입어 ‘현대화된 온돌’은 전세계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겨우내 따스하게 집에서 뒹굴 수 있는 건 ‘전통 온돌 문화의 영향’이지만, 이를 경량화하여 아파 트처럼 겹겹이 층을 쌓아도 대다수의 집에서 바닥 난방을 누리게 된 건 ‘온돌이 세계와 만나면서 현대화된 힘’으로 가능해졌다. 이는 반대로 ‘과거의 전통’에만 매달리는 것만 으로는 ‘새로운 발전’을 이룰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스한 방바닥에 몸을 녹일 때면 한 번쯤 ‘전통과 현 대의 공존’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림 5. 현대식 온수순환용 바닥난방시스템.
(출처: https://en.wikipedia.org)
그림 6. Jacob House 1 의 외관.
(출처: https://en.wikip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