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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손의 예술철학 연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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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예술의 방법, 체험, 진리, 창조에 대하여

주 재 형*

1)

Ⅰ. 베르그손의 사유에서 예술론의 위치

Ⅱ. 예술에 대한 하나의 정의

Ⅲ. 예술의 방법

Ⅳ. 예술의 체험

Ⅴ. 저자의 죽음?

Ⅵ. 예술과 지속

Ⅶ. 예술에서 진리와 창조

Ⅷ. 결론: 고전적 예술론의 갱신과 그 너머

* 단국대학교 철학과 교수

이 논문은 한국미학예술학회 2020년 봄 정기학술대회 기획심포지엄을 위해 준비한 원고 의 일부이다. 이 논문의 심사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이 여러 가지 유익한 조언들을 제안해 주었다. 그를 모두 반영할 수는 없었지만, 더 완성도 높은 논문이 되도록 신경써주신 심 사위원들께 감사드린다.

* DOI http://dx.doi.org/10.17527/JASA.6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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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베르그손의 사유에서 예술론의 위치

예술과 관련하여 베르그손의 사유에는 하나의 흥미로운 역설이 존재한다.

그 역설은 바로 그의 저작들에서 예술이 중심적이면서도 주변적이라는 점이다.

베르그손의 철학은 예술가와 예술체험을 사유의 특권적 모델로 삼고 있다고 보아 도 무방할 정도로 예술은 그의 사유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여러 연구자 들이 이 점을 지적하고 있지만,1) 무엇보다도 베르그손 그 스스로가 자신의 철학이 예술과 맺고 있는 본질적인 상관관계를 다음과 같이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제가 생각하는 철학은 과학보다는 예술에 더 가깝습니다. […] 예술과 철학은 그것들의 공통 기반인 직관 안에서 함께 만납니다. 저는 심지어 다음과 같이 말하겠습니다.

철학은 하나의 유이고 상이한 예술들은 이 유의 종들에 해당합니다.”2) 이러한 친연성으로 인해 베르그손의 사유는 당대 문화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또한 러셀과 같은 이들이 그의 철학을 진지한 학문적 대상이 아닌 것으로 폄하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의아스러운 점은 바로 베르 그손이 예술 자체에 관해서는 한 권의 책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3)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장 단순한 대답은, 싱클레어의 표현을 빌어, 베르그손의 철학은 그 자체로 “예술적인 철학(artistic philosophy)”이라고

1) 보름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는 예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형이상학이 가능 한 증거로 취한다. 마치 예술가의 실천이 철학자의 이론이 부딪히는 문제들을 미리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해결한 듯이 말이다!” Frédéric Worms, “L'art et le temps chez Bergson. Un problème philosophique au cœur d’un moment historique”, in:

Société d'études soréliennes, vol. 21 (2003), pp. 153-166 (DOI: 10.3917/mnc.021.0153), p. 155. 보다 최근에는 싱클레어 또한 이 점을 지적한 바 있다. Mark Sinclair, Bergson (London/New York: Routledge 2020), p. 177.

2) Henri Bergson, Mélanges (Paris: PUF 1972), p. 843. 이는 1910년 11월 11일 조르주 애멜(Georges Aimel)과의 대담에서 한 말이다.

3) 이 점은 일찍이 샤를 랄로가 지적한 바 있다. Charles Lalo, “Promesses et carences de l'esthétique bergsoniennes”, in: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 vol. 48 (1941), pp. 301-314, p.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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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것이다.4) 예술은 베르그손의 철학에 너무 깊숙이 스며들어 일체를 이루고 있기에 독립된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베르그손이 실제로 예술에 관해 쓰고자 했다는 전기적 사실을 고려 하면 다른 대답이 가능하다. 1907년 창조적 진화를 출간한 이후 그는 한 인터뷰 에서 예술에 관해 쓸 수도 있음을 내비친 바 있다.5) 그는 창조적 진화 이후의 연구 주제로 예술론과 도덕론 사이에서 망설이는데 결국 도덕론을 택해서 1932년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을 마지막 주저로 출간하게 된다. 그러니까 베르그손은 예술 대신 도덕의 문제를 다룬 것인데 그 이유는 정신적 에너지에서 이미 짐작 해볼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강연문 「의식과 생」에서 베르그손은 예술과 도덕 사이에 명확한 위계 관계를 세워놓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관점은 중요하지만, 결정적이지는 않다. […] 도덕가의 관점은 이보다 더 우월하다.”6) 베르그손이 보기에, 도덕가는 예술가보다 생의 본질을 보다 더 근본적으로 파악할 뿐 아니라, 도덕가의 창조가 다른 인간들을 창조자로 만드는 창조라면 예술가의 창조는 물질 적인 것에 새로운 형태를 부여하는 데 그친다.

그러므로 베르그손이 유독 예술에 대해서 독립적인 저작을 저술하지 못한 어떤 적극적인 이유가 있었다기보다는, 단지 그에게 더 우선적인 연구주제들이 있었던 것일 뿐이다.7) 만년의 베르그손은 예술에 관해 여전히 관심을 갖고 있었

4) Mark Sinclair, “Bergson's philosophy of art”, in: Interpreting Bergson, ed.

Alexandre Lefebvre and Nils F. Schott,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 pp. 87-103 (DOI: 10.1017/9781108367455.006), p. 88.

5) 1909년 벤루비와의 대담에서. Isaac Benrubi, Souvenirs sur Henri Bergson (Neuchâtel: Delachaux & Niestlé 1942), p. 32 참조.

6) 앙리 베르그손, 정신적 에너지, 엄태연 옮김 (그린비 2019), p. 35. 엄태연이 역자주 에서 잘 밝혀놓고 있는 대로, 미학과 도덕 간의 이 위계 관계는 1911년의 원래 강연 문에서는 없었던 것으로, 1919년 정신적 에너지에 재수록되면서 변경된 것이다. 1차 세계 대전을 전후로 베르그손의 사유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7) 이 점에 대해서는 Brigitte Sitpon-Peillon,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 suite de L'Evolution créatrice? Genèse d'un choix philosophique entre morale et esthétique”, in: Annales bergsoniennes Ⅳ, ed. Anne Fagot-Largeault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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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단지 그럴 여력이 없었다.8)

예술의 이론적 중심성과 텍스트적 주변성 간의 이 역설이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의 사유로부터 독자적인 예술 철학의 가능성을 끄집어내는 일은 여전히 가능할 것이다. 그러한 재구성의 시도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어떤 것인 가? 우선, 그의 이론 철학 곧 지속의 형이상학과 예술에 대한 이해 사이의 연관이 무엇인지 해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의 텍스트들로부터 재구성 될 수 있을 그의 잠재적 예술론이 예술에 대한 철학적 이해에 어떤 새로운 빛을 던져줄 수 있는지도 과제 중 하나일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술에 대한 그의 사유로 부터 베르그손 철학 전체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이 연구에서 우리는 이 과제들 중 일부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베르그손의 몇몇 텍스트들로부터 예술에 관한 그의 사유를 끌어내어 그가 쓰지 않았던 책의 일부를 써보고자 하는 것이 이 연구의 목표이다. 물론 이 짧은 연구를 통해서는 우리가 방금 거론한 과제들마저도 충분히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다만 그의 초기 텍스트들을 통해 그의 예술론의 일반적 윤곽을 소묘 하고, 이를 통해서 이 예술론이 어떻게 그의 지속 형이상학에 기초해 있는지, 그리고 이 예술론이 미학의 몇몇 문제들에 대해 어떤 새로운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Frédéric Worms (Paris: PUF 2008), pp. 325-338 (DOI: 10.3917/puf.fagot.2008.01.0325), pp. 332-335를 보라.

8) 1934년 벤루비와의 대담에서 당시 75세였던 베르그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학적 문제들을 제대로 다루려면, 제가 이전 책들을 쓸 때 그랬듯이 그에 관한 자료들을 연 구해야 하는데 저는 그러기에는 너무 늙었습니다.” Isaac Benrubi, “Entretien avec Bergson”, in: Henri Bergson: Essais et témoignages recueillis, ed. Albert Béguin and Pierre Thévenaz (Neuchâtel: Editions de la Baconnière 1943), pp. 365-371, p.

368. 실제로 베르그손은 1934년 논문집 사유와 운동을 출간한 이후 1941년 죽을 때 까지 어떤 책도 출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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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예술에 대한 하나의 정의

베르그손의 첫 저작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의 1장은 “심리적 상태들의 강도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여기에서 베르그손은 깊은 감정들부터 빛의 감각, 근육감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심리 상태들을 차례로 분석 한다. 이 분석의 목표는 심리적 상태들이 동질적인 양(강도량)으로 측정될 수 없는 이질적 다수요소들의 복합체임을 보여주는 데 있다. 심미적 감정은 그 중 하나로 논의된다. 그러므로 베르그손은 철학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하는 첫머리에서부터 이미 예술적 감정의 문제와 만나고 있다. 사실 그가 여기에서 개진하는 심미적 감정의 분석은 미와 예술을 그 자체로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럼 에도 우리는 이 텍스트에서 베르그손이 매우 간략한 방식으로나마 예술의 본질을 제시하는 압축적인 문장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술의 목표는 우리의 인격성이 발휘하는 능동적인 혹은 차라리 저항적이 라고 할 힘들을 잠재우고, 이로써 우리를 어떤 완벽한 유순함의 상태로 유도하는 것인데 이 유순한 상태 속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암시된 관념을 실현하게 되고, 표현된 감정과 공감하게 된다.”9)

다소 긴 이 문장은 다수의 개념들로 구성된 하나의 복합체로서, 주의 깊고 끈기 있는 분석을 요구한다. 우선 이 문장은 예술의 목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예술 체험은 무엇인지에 관한 다음의 두 명제들로 분석된다.(따라서 이 문장은 창작자 미학과 수용 미학에 관한 두 가지 주장을 결합시켜놓고 있다.) 1) 예술, 곧 예술가는 우리의 인격성이 갖는 저항하는 힘들을 잠재우고(endormir), 우리를 어떤 완벽한 유순함의 상태로 유도한다(amener). 2) 이렇게 유도된 상태에서 예술을 감상하는 관객인 우리는 암시된 관념을 우리 스스로 실현하고, 표현된 감정과 공감한다. 이제

9) Henri Bergson, 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Paris: PUF 1889), p. 11. 원문의 표현들을 집중 분석해야 할 필요 때문에 이 논문에서는 부득이하게 국역본을 따르지 않고 프랑스어본에서 직접 번역하여 인용하겠다. 이 저작은 이하 본문 에서는 시론으로 약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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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명제를 차례로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보자.

Ⅲ. 예술의 방법

첫 번째 명제에서 우리는 예술의 효과가 잠재우다, 유도하다라는 두 개의 동사로 규정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이 효과들은 우리의 인격성이 갖는 저항력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잠재우다, 유도하다라는 동사들은 베르그손이 곧이어 서술하듯이 최면 상태와 관련된다. “최면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보통 사용 되는 기법들이, 예술의 기법들에서 보다 약화되고 세련된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정신화된 형태로 재발견된다.”10) 예술은 ‘약화되고 세련된 그리고 정신화된’ 최면 기법들인 것이다. 예술과 최면을 이렇게 근접시키는 것은 양자가 우리의 의식에 비슷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의식을 잠재우고 어떤 특정한 상태로 유도하는 효과이다.

그렇다면 예술과 최면은 무엇을 잠재우는가? 베르그손이 우리 인격성의 능동 적인 또는 차라리 저항하는 힘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가 이 힘들에 대해 ‘능 동적(active)’이란 형용사보다는 ‘저항적(résistant)’이라는 형용사를 선호하는 까닭은 문제의 문장에서 함께 등장하는 ‘유순함(docilité)’과의 대조를 통해 이해될 수 있다.

우리들의 인격, 내면은 각자의 고유성을 갖고 있어서 외부의 영향에 저항하고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예술과 최면기법은 이러한 인격의 두터운 외투를 제 스스로 벗어 던지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이렇게 외부에 저항하는 외투를 벗어던진 우리 각자의 내면은 이제 간단한 ‘암시’에도 쉽게 순응하는 ‘유순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우리 내면을 둘러싼 이 저항적 외투, 외부 영향에 맞서서 자신의 내부를 유지 하는 힘들, 따라서 한 마디로 말해 우리의 인격 자체를 규정하는 자아 동일성의 10) Henri Bergson, 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p.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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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력은 외부 세계를 이 동일한 자기를 중심으로 조직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그 저항력들은 세계 안에서 의식적 존재자가 실천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토대를 마련 해준다. 그러므로 이 힘들을 잠재운다는 것은 의식으로 하여금 실천적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며 외부 대상을 유용성의 관점에서 재단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 인격의 저항하는 힘들을 잠재운다는 베르그손의 관념은 칸트라면 ‘무관심성’의 관념으로 표현했을 예술의 특징11)을 유사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재정식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재정식화는 실천적 삶으로부터의 거리 두기가 예술의 가능 조건임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진다.

예술을 특징짓는 무사심한 관조는 단지 감상자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니다. 무사심한 관조의 바탕에는 인간이라는 특정 생명체가 도달한 안정적인 삶의 수준이 가능조건으로 놓여 있다. 즉 베르그손은 예술의 무관심성에 대한 생명 철학적 설명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최면과의 유비는 예술이 갖는 몰입의 힘을 독특한 방식으로 해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무사심한 관조라는 관념의 한계를 넘어선다. 감상자는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작품의 세계 속에 깊이 연루되지, 그 세계로부터 거리를 둔 채 단순히 관조하지 않는다.

이와 아울러, 현대 미학을 접한 독자들에게는 친숙할 들뢰즈의 칸트 미학 해석의 주요 논제들도 베르그손의 이 텍스트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 이른바 미적 판단이 보여주는 능력들의 자유로운 일치, 해방적 일치라는 관념은 ‘완벽한 유순 함의 상태’라는 표현 속에 담겨 있다.12) 외부의 어떤 암시에도 쉽게 따를 수 있을 만큼 감상자의 감성과 지성은 유연해져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대상을 우리의 실천적 필요에 따라, 우리의 도식에 따라 재단하고 인식할 필요성으로부터 벗어난 우리의 의식은 우리의 내부에서 벗어나 대상과 자유롭게 공감한다. 이러한 해방

11) “취미의 사안에 있어 심판자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사상의 실존에 마음이 이끌려서는 안 되고, 이 점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무관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임마누 엘 칸트, 판단력 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9), p. 194.

12) 질 들뢰즈, 「칸트 미학에서의 발생의 이념」,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편역 (이학사 2007), pp. 177-217, pp. 183-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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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일치를 베르그손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우리의 지각능력은 이제 이런 종류의 조화에 젖어들게 되어, 공감적으로 감화 되기 위해(être émue symphatiquement) 장애물이 사라지기만을 항상 기다리고 있는 감성의 자유로운 비상(le libre essor de la sensibilité)을 멈춰 세울 어떤 것도 없다.”13)

이 문장 또한 많은 것을 말하고 있기에 여기에서도 세심한 분석이 필요하다.

적어도 우리는 세 가지를 이 문장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다.

첫째, 예술은 우리의 감성이 갖는 숨겨진 능력을 드러낸다. 자신을 억압하는 장애물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 능력은 자신의 상관자로 역시 평소에는 숨겨져 있는 세계, 진정한 실재의 세계를 갖고 있을 것이다. 예술을 통해 우리의 감성은 실천적 사용의 굴레에서 벗어나 참다운 세계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는 능력이 된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능력들의 우월한 실행”이라 말한 것이 아닌 가?14)

둘째, 감성의 자유로운 비상, 즉 감성의 자유로운 발휘는 대상에 대한 공감적 감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다시 칸트적 어법으로 이를 바꾸어보자면, 미적 판단에서 발견되는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일치는 단지 인간 정신의 능력들 간의 관계일 뿐 아니라 대상 판단의 형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대상과 관련된다.

칸트는 이러한 미적 판단이 인식적 함의를 갖지 않는다고 말했다.15) 하지만 베르 그손이 여기에서 공감적 감화라고 부르는 것은 후에 그가 ‘직관’이란 명칭을 부여 하게 될 그 경험으로서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인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공감적 감화라는 표현은 예술 뿐 아니라 형이상학의 가능성에 관한 칸트와 베르 그손의 근본적인 차이를 간직하고 있다. 예술은 실재(또는 실재의 진리)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식의 모델이다. 베르그손의 철학이 근본적으로 미학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13) Henri Bergson, 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p. 12.

14) Gilles Deleuze, Différence et répétition (Paris: PUF 1968), p. 190.

15)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 비판, pp. 206-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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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지금 이 문장은 예술이 아니라 자연미에 관한 논의의 와중에 등장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런 종류의 조화’는 자연에서 발견되는 부분들 간의 대칭의 조화 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정상적인 비례를 가진 존재자들, 즉 우리의 주의가 형태의 어느 한 부분에 고정되지 않고 모든 부분들에 골고루 분할되는 그런 존재자들을 보여준다.”16) 이러한 조화는 우리에게 유용할 수 있는 대상의 특정 부분에만 주목 하는 우리의 실천적 주의를 잠재움으로써(또는 적어도 그러한 선택적 주의의 사용을 방해함으로써), 대상 전체에 주목하면서 대상과 공감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베르그손이 들뢰즈와 분명하게 달라지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들뢰즈에게 있어 능력들의 자유로운 일치가 어떤 불일치의 일치라는 폭력적인 형태로 발생한 다면(“상상력과 이성의 일치는 실제로 불일치 속에서 산출되며, 쾌감 또한 고통 속에서 산출된다.”17)), 베르그손에게서는 조화에 의해 유도되며 마치 잠자는 상태와 비슷한 보다 평온한 형태로 발생한다.

이 마지막 지점과 관련해서 두 가지 추가적인 언급을 간단하게나마 해 두자.

우선, 베르그손 또한 실재의 인식을 위한 방법적 특징으로 폭력을 이야기한다.

일상적인 사고 습관과 폭력적인 방식으로 단절함으로써만 우리는 참다운 실재의 인식에 이를 수 있다.18) 하지만 이러한 폭력을 동반한 인식은 예술보다는 형이상 학의 특징에 속한다. 따라서, 예술에 대해서 베르그손은 조화에 의한 순응과 유순 함을 이야기하고 들뢰즈는 폭력적 해방과 불일치의 일치를 말하는 것은 두 사람이 각각 예술의 고전적 형태와 현대적 형태를 염두에 두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또한 두 사람이 예술과 형이상학에 대해 갖는 이해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술과

16) Henri Bergson, 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p. 12.

17) 질 들뢰즈, 「칸트 미학에서의 발생의 이념」, p. 197.

18) 철학이 사유의 비탈을 거슬러 올라가는 폭력을 요한다는 점은 베르그손의 텍스트들에서 빈번하게 언급된다. 이러한 생각은 대표적인 방법론 텍스트인 「형이상학 입문」 뿐 아니라, 가령 창조적 진화와 같은 텍스트들에서도 발견된다. 국역본에서 “[…] 정신을 위반하고 지성의 자연적 경향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라고 번역한 문장(앙리 베르그손,

창조적 진화, 황수영 옮김 [아카넷 2005], p. 63)에 해당하는 원문의 표현은 “정신에 폭력을 가하다(faire violence à l'espri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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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대한 들뢰즈의 방대하고 복잡한 이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베르그손에 국한해 말하자면, 베르그손에게 있어 예술은 개별자에 대한 인식인 반면 형이상학은 보편적 인식이며, 예술이 감성적인 것인 반면 형이상학은 감성을 넘어선 지성적 면모를 간직한다.19)

다음으로, 베르그손이 자연미와 관련하여 조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자연 안에서 예술의 최면 기법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것이 조화이기 때문이다.20) 그러 므로 베르그손의 예술 이해에는 최면 기법의 관념이 근본적인 것으로 놓여 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시론의 심미적 감정 분석에서 베르그손은 ‘표현하다 (exprimer)’와 ‘암시하다(suggérer)’라는 두 동사를 체계적으로 대립시켜 사용한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대립은 시론에 국한되지 않고 베르그손 철학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예술은 단지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암시한다. 이 암시는 물론 최면 기법을 특징짓는 말이다. 표현이 단지 드러내는 것이라면, 암시는 강압 적이지 않은 방식으로(따라서 가능한 저항을 잠재우면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감상자 스스로 체험하도록 유도한다.

예술은 이미 완성된 정보를 전달하듯이 작가가 의도한 바를 감상자에게 주입 하지 않는다. 사르트르의 말을 빌자면, 예술 작품은 감상자 각자의 상상적 자유가 건설적 창조의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이정표이다.21) 우리가 비극에 몰입하여 원치 않는 파국의 종말을 향하는 극의 전개를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듯 보일 때에도, 실제로 그 극의 인물들의 감정들, 극적 세계에 실재성을 부여하는 19) 베르그손에게서 예술과 형이상학 간의 또 다른 주요한 차이는 방법론적 차이이다.

예술이 최면의 기법을 사용한다면, 형이상학은 이미지들의 기법을 사용한다.(Henri Bergson, “Introduction à la métaphysique” in: La pensée et le mouvant (Paris: PUF 1934), pp. 177-227, pp. 185-186). 후자는 전자에 비해 폭력적이며 그런 만큼 보다 주 체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을 요구한다.

20) 조화로운 형태를 볼 때 우리의 주의는 더 이상 선별적으로 작동하지 않게 된다. 조화 로운 형태는 부분들에 모두 동등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유도함으로써, 유용성과 필요에 따라 대상 형태의 한 부분만을 주목하고 나머지는 시야에서 배제하는 방식의 인식을 방해하는 것이다.

21) 장폴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명환 옮김, (민음사 1998), p.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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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사항들, 그리고 사건들의 전개가 갖는 의미들 등은 감상자 자신의 정신 속에서 그 자신의 감정과 사유와 욕망을 재료로 하여 매 순간 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감상자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로, 그의 절대적 자유가 예술의 경험 밑바탕에 놓여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옴짝달싹할 수 없이 작품에 몰입되어 끌려가면서도 예술의 체험에서 부자유를 느끼기는커녕 더할 나위 없는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작가가 이미 작품을 창조해서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을 뿐이라고 우리가 믿지 않는다면, 따라서 실제로는 작가가 던져놓은 이정표들을 따라 우리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작품을 창조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면, 예술의 경험은 더 이상 불가 능할 것이다. 그 때 우리의 예술 경험은 한낱 주관적인 몽상과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작품의 세계가 작가라는 타자에 의해 우리의 예술 체험에 앞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작품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사르 트르는 이를 ‘인도된 창조’22)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또한 ‘유도된 주체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손이 최면 기법을 모델로 예술을 설명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수용과 창조를 조화시키는 예술의 이 독특한 면모를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Ⅳ. 예술의 체험

이 최면의 암시와 함께 우리는 이제 원래 문장의 두 번째 명제에 관한 논의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된다. 두 번째 명제는 예술에서 감상자가 체험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암시된 관념을 실현하게 되고, 표현된 감정과 공감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술은 관념과 감정을 내용으로 갖는다.

그런데 예술을 지나치게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러한 주장은 보편적 적용가능성 면에서 심각한 한계에 봉착하는 것 같다. 음악이나 문학의 경우에는 22) 장폴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p.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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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장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령 세잔의 사과 정물화는 사과를 바라보는 세잔의 감정이나 관념을 표현한 것일까? 현대의 추상 회화들에 이르면 의구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베르그손의 입장은 낡은 주정주의 내지 주의주의의 한 변형에 불과해 보인다. 더군다나 이 주장은 베르그손 자신의 사유의 일관성과 관련 해서도 문제를 야기한다. 이 입장은 베르그손이 예술에 부여하는 형이상학적, 인식적 기능과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웃음에서 베르그손은 명시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이 그것이 회화든 조각이든 시든 음악 이든 간에 예술은 우리가 실재 자체와 대면할 수 있게끔, 실제적으로 유용한 상징, 관습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일반성, 결국 우리에게 실재를 가려 보이지 않게 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 예술은 분명 실재를 보다 직접적으로 투시한 것에 불과하다.”23) 예술의 이러한 인식론적 목적과 예술은 인간의 감정, 관념을 암시한다는 예술론은 어떻게 양립 할 수 있는 것일까?

이 반론들에 대한 대답은 베르그손의 예술론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이해로 이끌 것이다. 이 대답들의 실마리는 시론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발견된다. 시론을 쓸 무렵인 1887년, 당시 클레르몽페랑의 블레즈 파스칼 고등학교 교사였던 베르그 손은 미학을 주제로 두 번의 짧은 강의를 한 바 있다. 베르그손의 다른 고등학교 강의들이 그러하듯이 이 강의는 베르그손 자신의 철학을 제시한다기보다는 개괄 적으로 미학을 소개하고 있다. 그럼에도 주의깊은 눈으로 볼 때, 이 강의록에는 이미 베르그손 자신의 색채가 담겨 있다. 우리는 바로 이렇게 베르그손의 사유를 읽어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이 강의록을 우리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살펴볼 것이다.

예술이 감정이나 관념을 표현한다는 주장과 관련하여, 베르그손은 이 강의 록에서 플라톤의 고전적 견해를 언급한다. “플라톤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아름다운 대상과 마주할 때, 그 대상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그 대상이 보여주는 형태를 우리가 마음 속에 품은 명확한 어떤 한 관념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23) 앙리 베르그손, 웃음, 정연복 옮김 (세계사 1992), pp. 12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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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이에 따를 때 아름다움이란 대상의 물질적 형태를 통해 표현된 비물질적인 관념과 이상(곧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성립하며, 역으로 우리가 어떤 한 물질적 대상 안에서 비물질적인 관념 또는 이상을 알아볼 때 우리는 그 대상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예술은 신이 물질과 관련하여 몰두한 정돈작업을 재개하여 이 물질에서 더욱 완벽한 정도로 우리가 구상한 이념이나 전형(type)이 표현되게 하는 데에서 성립한다.”25) 이렇게 해서 예술은 신의 창조작업을 이어받은 인간적 창조 작업이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인간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플라톤적 기원을 갖지만 전적으로 플라톤적이지만은 않은 이 고전적 예술론에는 하나의 심오한 관 념이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대상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게 아니라 대상과 다른 우리 인간들이 그 대상을 우리가 생각한 하나의 이상과 비교하는 판단에 의지해서만 아름답다”는 것, 따라서 “아름다움은 우리 정신 안에 있지 대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관념이다.26)

이로부터 베르그손은 다음의 귀결을 이끌어낸다. “우리는 오직 우리만을 인식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간적인 것만을 좋아한다. 역으로, 인간적인 모든 것은 우리를 즐겁게 한다.”27) 그런데 이 귀결은 앞서의 고전적인 예술론을 확장 하는데, 왜냐하면 인간적인 모든 것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관념이나 이상 뿐 아니라 다른 것들, 곧 감정과 노력 또한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 대상 안에서 어떤 관념을 알아볼 때뿐 아니라, 감정이나 노력을 알아볼 때에도 그 대상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것으로 나타난다. 베르그손이 이러한 확장을 당대의 24) Henri Bergson, Cours Ⅱ. Leçons d’esthétique. Leçons de morale, psychologie et métaphysique, ed. Henri Hude (Paris: PUF 1992) (DOI: 10.1016/0191-6599(94)90030-2), p. 39.

25) Henri Bergson, Cours Ⅱ, p. 40.

26) Henri Bergson, Cours Ⅱ, p. 40. 베르그손은 이러한 견해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 끝까지 견지한 듯 보인다. 이 강의록으로부터 17년 뒤에 발표된 글 「라베송의 생애와 작품」

에서 베르그손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문장을 언급한다. “회화는 정신적인 것이다.”

Henri Bergson, “La vie et l'œuvre de Ravaisson”, in: La pensée et le mouvant (Paris: PUF 1934, pp. 253-291, p. 265

27) Henri Bergson, Cours Ⅱ, p.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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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 샤를 레벡(Charles Lévêque)의 견해라고 이야기하는 만큼, 그것이 베르그손 자신의 고유한 생각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28) 하지만 텍스트를 보다 면밀히 읽을 때, 예술을 관념의 표현이라고만 보는 독일 이상주의자들인 헤겔과 셸링에 대해 비판하며 감정 또한 예술에서 표현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 레벡의 입장이며, 여기에 노력 또한 추가해야 한다는 것은 베르그손 자신의 입장임을 알아챌 수 있다. 사실 감정뿐 아니라 노력 또한 예술의 내용으로 추가됨으로써, 인간중심주의적으로 보이는 고전적 예술론은 매우 일반적인 타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베르그손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가 어떤 풍경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사유를 통 해 그 풍경에 생기를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생명이 그 풍경에서 순환하는 것처럼 보이며, 풍경은 손에 잡힐 듯이 구체화된 생명의 드러남이다. 커다 란 산들이 그 산을 바라보는 이에게 심미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 산들을 일으켜 세운 노력을 생각하게 된다. 이 산 들은 우리 앞에서 우뚝 일어선 진정한 거인들이다.29)

커다란 산들이나 풍경들은 그 자체로는 인간과 무관하다. 그 산들이나 풍경이 인간의 관념이나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풍경 화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려진 풍경의 배후에서 우리가 어떤 인간 적인 노력을 감지하는 한에서이다. 세잔의 사과 정물화의 경우에도, 칸딘스키의 추상화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그 비인간적인 작품들에서 조차 그 사과를 실재처럼 만들어놓은 인간의 노력, 색들과 선들, 형태들을 배치한 어떤 인간적인 의도를 보게 된다. 그러한 것이 없다면 모든 예술작품은 사진과 더 이상 구분되지 않을 것이다.30) 가장 비인간적이고자 하는 예술작품조차도 그 28) Henri Bergson, Cours Ⅱ, p. 41.

29) Henri Bergson, Cours Ⅱ, p. 41.

30) 베르그손은 사진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사진을 예술과 구분 한다. “초상화는 사진과 다르다. 초상화는 물질적 실재를 그려낸다기보다는 화가가 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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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창조한 작가의 의도와 노력을 배제하고서는 작품으로서 성립할 수 없고 감상될 수 없다. 우리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대상들에서 우리가 어떤 인간적인 관념, 감정의 표현 또는 노력의 드러남을 볼 때, 우리는 “사물들에 대한 정신의 정복(conquête)”31)을 찬탄한다. 그 찬탄이 예술적 즐거움의 정체이다. 그러므로 베르그손은 아름다움이 매우 인간중심적인 것임을 인정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예술을 유아적인 환상과 비교한다. “아름다움에 관한 우리의 판단에는 어떤 인간 중심적인 환상이 섞여 있는데 이 환상은 이를테면 자신의 눈 아래 있는 모든 것에 생기를 불어넣고 인간화하는 아이의 환상과 비슷하다.”32)

Ⅴ. 저자의 죽음?

저자, 작가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현대 미학에게 이러한 베르그손의 예술론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에 불과할까? 하지만 아무리 작가가 작품 뒤로 사라져버리더 라도, 감상자는 그 작품을 어떤 단일한 의지와 사유를 가진 의식적 존재자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한 전제 없이 예술작품이 색채, 형태 등의 우연적인 조합과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가? 저자의 죽음은 저자의 명시적인 의도나 사상에 대한 작품의 전적인 독립성을 말한다는 점에서 타당하지만, 그것이 작품으로부터 어떠한 인간성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에 내재적이고 작품 자체를 구성하는 인간성으로서의 저자, 창조자의 관념은 예술 작품으로부터 제거 불가능하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을 셰익스피어 자신의 명시적 의도, 그의 시대정신과 분리시켜 읽을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를 실행하기 위해 셰익스피어의 텍스트들을 읽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이 텍스트들이 어떠한 통일성도 찾아볼 수 없는 우연적이고 무작위적인 낱말들과 문장들의 집합으로 생각할 수

인상을 그려낸다.” Henri Bergson, Cours Ⅱ, 44.

31) Henri Bergson, Cours Ⅱ, p. 42.

32) Henri Bergson, Cours Ⅱ, p.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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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으며 반대로 어떤 일관된 의도 하에 집필된 통일적 전체로 가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저자의 죽음이란 현대 미학의 명제는 텍스트로부터 가정되는 텍스트 내재 적인 저자, 텍스트 자체를 지탱하는 전제로서의 저자의 관념과 충돌하지 않는다.

이를 잘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보르헤스의 유명한 단편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33)를 들 수 있다. 삐에르 메나르라는 가상의 작가에 대한 유사 평론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단편의 내용은 간단하다. 메나르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일부와 토씨 하나까지 일치하는 작품을 썼는데, 이 단편의 화자(곧 이 가상의 메나르론을 쓰고 있는 평론자)는 완벽하게 동일한 이 두 텍스트가 사실은 완전히 다르며 메나르의 것이 세르반테스의 원작보다 비할 수 없이 우월한 작품이라는 점을 능청스럽게 논증한다. 보르헤스의 이 단편은 동일한 텍스트가 저자의 의도와 지배를 벗어나 상이한 맥락에서 얼마나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가를 보여주고 따라서 포스트모던적인 저자의 죽음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으로 독해될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은 텍스트를 세르반테스로부터 떼어내 삐에르 메나 르와 결부시킴으로써 이 돈키호테의 모든 문장들은 20세기 프랑스 상징주의라는 컨텍스트 속에서 재독해되고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메나 르의 텍스트가 갖는 가치는 세르반테스의 텍스트와 대조시킬 때에 비로소 드러난 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상호 텍스트성[intertextuality]). 텍스트의 의미 가 더 이상 저자의 의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컨텍스트에 의해 결정된다 는 것, 그리고 텍스트가 어떤 컨텍스트 속에 놓일 수 있을 가능성은 무한하다는 것만큼 텍스트의 자율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 단편의 화자가 익명의 비평가라는 사실 또한 이 관점에서 볼 때 더없이 의미심장하다. 저자의 죽음을 선언하며, 텍스트의 의미 담지자로 독자를 내세우는 바르트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독자는 하나의 글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인용들이 남 김없이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기입되는 공간이다. 텍스트의 통일성은 그것의 기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지에 있다.”34)

3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픽션들, 황병하 옮김 (민음사 1994), pp. 6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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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이 제목에서부터 텍스트의 저자를 명시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할 수 없다. 저자가 아무리 더 이상 텍스트의 비밀을 간직한 자가 아닐지라도, 저자가 갖는 최소한의 텍스트적 기능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관계를 성립시켜주는 역할이다. 삐에르 메나르는 메나르 그 자신으로 있으면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다시 쓰려는 기이한 야심을 품는다. 이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있는 그대로 놔두면서 그 모든 문장들이 세르반테스가 아니라 메나르 그 자신의 표현이 되도록 만드는 일이다. 이를 위해 메나르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책을 외국어로 다시 쓰기 위해 온갖 노고와 수많은 불면의 밤들을 바쳤다. 그는 수없이 원고를 다시 쓰고 또 다시 쓰고, 집요하게 교정을 가했고, 그리고 수천 페이지에 해당하는 그 원고들을 모두 찢어 버렸다.”35) 그 결과로 나온, 세르반테스의 것과 정확히 동일한 메나르의 텍스트에서는 사라진 메나르의 이 노력들을 볼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노력들을 전제로 할 때에만 돈 키호테의 문장들은 메나르의 맥락에서, 20세기 상징주의자의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텍스트의 표면에는 기입되어 있지 않은 것, 그래서 독자가 텍스트로부터 직접 읽어낼 수 없는 것은 바로 메나르가 결국 썼다가 파괴했던 모든 문장들이다.

메나르의 텍스트는 이 헤아릴 수 없는 파괴의 배경 위에서 생존한 것들이며 바로 그 점이 세르반테스의 문장들과 정확히 동일한 메나르의 문장들에 무한히 풍부한 의미를 부여하게 해 준다.36)

결국 저자의 죽음은 저자를 삭제하지 않고 푸코가 정확히 지적한 바 있듯이37)

34) Roland Barthes, “La mort de l'auteur”, Le bruissement de la langue (Paris: Seuil 1984), pp. 61-67, p. 66. 실제로 보르헤스의 이 단편은 바르트의 논의들과 정확히 일치 하는 상호 텍스트성과 읽기의 문제에 관한 논의에서 끝나고 있다.

3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p. 87.

36) 이처럼 메나르라는 작가의 존재와 결부될 때에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들의 배경을 통해 작품의 의미가 풍요로워지는 현상에 대한 묘사로는 보르헤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pp. 84-86 참조.

37) Michel Foucault, “Qu'est-ce qu'un auteur?”, in: Dits et écrits I. 1954-1975, ed.

Daniel Defert and François Ewald (Paris: Gallimard 2001), pp. 817-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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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환원 불가능한 기능에 주목하게 만든다. 간단히 말해 저자는 텍스트를 다양한 해석과 독해의 대상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앞서 사르트르를 언급하면서, 감상자가 예술 작품에서 창조적 자유를 발휘하려면 그 작품이 저자에 의해 이미 완성된 것으로서 그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 믿음이 있을 때에만 우리는 작품을 의미 있는 총체, 따라서 해석 가능한 총체로 간주할 수 있다.

베르그손이 말하는 “사물들에 대한 정신의 정복”이란 관념은 사실 이와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신의 정복은 사물들의 다양성 안에 통일성을 불어넣는 것이며 그래서 대상들을 어떤 하나의 질서에 따라 정돈하는 것이다. 그 때 아름 다운 대상에서 “우리는 가령 분자들의 집적물과 같은 것이 아니라, 어떤 하나의 목적을 향해 있는 수단들을 지각하게 되며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아름다운 것은 항상 목적성을 함의하는 것이다.”38) 예술에서 발견하는 인간적인 것이란 예술 작품을 의미 있는 총체로 만들어주는 저자의 기능인 것이다.39)

Ⅵ. 예술과 지속

그렇다면 저자는 정확히 어떻게 작품을 구성하는 다양성을 통일하고 다수성에 질서를 부여하는가? 풍경과 풍경화, 인물의 얼굴과 초상화를 구분해주는 것, 곧

38) Henri Bergson, Cours Ⅱ, p. 42.

39) 오해를 피하기 위해 추가하자면, 이러한 저자의 기능은 바르트가 비판하는 저자의 개념과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다. 저자란 작품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작품에 대한 무한한 해석의 공간을 개방하는 가능 조건이다.

바르트가 비판하는 저자가 작품의 열쇠를 쥐고 있는 자로서 실증적인 규명의 대상이자 독립적인 실재라면, 가능 조건으로서의 저자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작품의 의미를 규정하는 데 개입하지 않으며 어떠한 독립적인 실재성도 갖지 않는다. 저자는 감상자가 작품의 통일성을 보증해주는 존재로서 전제하는 것으로서 감상자, 독자의 경험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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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작품들이 자신이 묘사하는 대상들에 부여하는 내밀한 통일성과 질서는 대체 어떤 것인가? 우리가 따라온 강의록의 논의는 이 질문을 제기하지 않고 끝난다.

하지만 우리는 시론의 텍스트로 돌아와 끊어진 길을 다시 연결할 수 있다. 시 론은 다수성에 부여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통일성을 이야기하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그 통일성은 바로 ‘지속’이다. ‘지속’이란 이질적인 다수들의 상호침투에 의한 통일을 가리킨다. 예술에 고유한 통일성의 정체를 해명하려는 문제는 이렇게 해서 베르그손의 예술론이 그의 철학과 어떤 연관을 맺는지 보다 분명하게 살펴 보도록 우리를 이끌 것이다.

지속 개념은 시론의 2장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지만 1장에서도 이미 이 개념을 전제하거나 또는 적어도 그 개념을 겨냥하여 여러 의식 상태들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진다. 심미적 감정에 대한 분석과 지속 개념과의 연관은 “감정의 풍 부함”에 관한 논의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한 작품이 얼마나 풍부한 감정을 암시하는가가 그 작품의 탁월성에 대한 기준이다. “한 예술작품의 미덕은 암시된 감정이 우리를 사로잡는 힘에서 가늠된다기보다는 이 감정 자체의 풍부함에서 가늠된다.”40)

그런데 풍부한 감정이란 무엇인가? 다수의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 감정이다.

사실 감정이란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풍부한 것이다. 모든 의식 상태들이 그러하 듯이 감정 또한 시간적이기 때문에 하나의 감정 안에는 과거와 현재에 걸쳐 존재 하는 무수한 이질적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다수성의 통일이 각각의 감정이 갖는 개체성을 이룬다. “대다수의 감정들은 그 감정에 스며들어 있는 수천가지 감각들, 감정들, 관념들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감정들 각각은 유일무이 한 것들이며 정의 불가능한 것이다.”41) 다수의 요소들은 서로 이질적이기에 하나의 양적인 통일을 이루는 구성요소일 수 없다. 각각의 요소들은 자신들의 이질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전체에 속해 있으며 그런 만큼 그 전체는 자신이 포함하고 있는 질적인 다양성을 보존하고 반영한다. 곧, 그 전체는 무어라 한 마디로 규정 40) Henri Bergson, 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p. 13.

41) Henri Bergson, 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p.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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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는 다채로운 색채를 띠게 되는데 그러면서도 단순히 이질적인 다수가 아무런 내적 상관관계 없이 외재적으로 모여 있을 뿐인 집합 이상의 통일성을 갖는다. 전체를 보려고 하면 전체는 자신을 이루는 다수의 요소들을 드러내고, 다시 요소들 각각을 보게 되면 요소들은 자신 안에 다른 모든 요소들을 머금고 있다.

그리고 전체와 요소, 전체와 부분 간의 이러한 상호 이행이 바로 과거와 현재가 분할 불가능하게 연결되어 진행되는 시간성의 고유한 운동이며, 역으로 시간적 흐름 속에서만 요소들의 이질적 다수성과 전체적 통일성 간의 모순이 해소될 수 있다. 이질적 다수성은 어느 순간 하나의 통일성으로 드러나고 다음 순간 이 통일성은 다시 다수의 요소들로 전개되는 운동이 지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작품과 인간의 감정, 관념, 노력 등 간의 관계는 이러한 지속의 통일성에 따라서 사유되어야 한다. 예술작품이 암시하는 감정은 단지 인간적인 감정만은 아니다. 보다 정확히 말해 예술작품을 구성하는 다채로운 감각적 요소 들이 지속의 방식으로 상호침투하여 형성되는 보이지 않는 통일성이 문제인 것이고, 그 통일성은 감상자에게 어떤 풍부한 감정의 방식으로 체험되는 것 외에는 달리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술이 “말로 표현될 수도 있는 기쁨이나 슬픔 따위의 감정의 밑바닥에서 말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지니지 않은 어떤 것,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감정보다도 그 인간에게 더 내적인 생명과 호흡의 일정한 리듬들”을 포착한다면,42) 이는 이러한 내적인 생명과 호흡의 일정한 리듬들이 곧 한 인간의 진정한 ‘실재’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물들의 진정한 실제 모습 또한 감정의 방식으로 드러날 것이다. “[예술가는] 색 자체를 위해 색을, 형태 자체를 위해 형태를 애호하기 때문에, 또한 그것들을 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자체를 위해 지각하기 때문에 형태와 색을 통해 투명하게 드러나는 사물의 내적인 삶을 보게 될 것이다.”43)

사물의 내적인 삶, 그것은 인간의 내적인 삶과 마찬가지로 지속하는 상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과거를 머금은 채 연속적 동일성을 유지하는 상태이다.

42) 앙리 베르그손, 웃음, p. 127.

43) 앙리 베르그손, 웃음, pp. 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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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사물이 지속의 개념을 통해 한 데 묶이는 한에서, 인간중심적 예술론과 형이상학적 예술 진리론은 모순 없이 통일될 수 있다. 예술이 하나의 철학적, 형이 상학적 인식이라는 명제, 즉 예술은 인간 뿐 아니라 비인간적 존재들의 본질을 우 리에게 드러내주는 인식적 가치를 가진다는 명제는 예술에서 우리는 인간적인 것 을 느낀다는 명제와 충돌하지 않는다. 인간과 사물은 지속이라는 본질을 공유하 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에서 제기했던 문제는 이렇게 베르그손의 지속 형이상학과 의 관련 속에서 해답이 발견된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베르그손이 어떤 논리에 따라 의식, 지속, 생 간에 굳건한 연결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그리고 그 와중에 이 세 개념 간에 어떤 관계가 성립 하고 있는지를 눈여겨 보아야 한다. 지속 개념은 인간의 정신과 사물 사이에 은밀하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친화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해준다. 「형이상학 입문」

에서 명백하게 제시한 바를 따라서 지속은 인간의 의식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 나지만 곧바로 모든 존재자들에게 확장된다.44) 이 확장과 함께 지속은 의식적, 정신적인 것을 넘어 이제 생명적인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의식과 지속 간의 본질적 연결은 지속 개념의 보편적 확장과 함께 점차 생명과 지속 간의 연결로 대체된다.

의식 개념보다 생명 개념이 모든 존재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다 유연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베르그손이 의식과 지속의 철학자인 만큼이나 생명의 철학자, 생철학자 (Lebensphilosoph)인 이유가 이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예술작품 체험에 관한 명제인 두 번째 명제(“우리는 우리에게 암시된 관념을 실현하게 되고, 표현된 감정과 공감하게 된다”)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것은 오직 이처럼 지속 개념을 통해 인간의 내적인 생과 사물들의 내적인 생 간의 연결이 확립될 때뿐이다. 그 때에만 가장 인간적인 방식의 감정이 어떻게 비인간적인 사물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방식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44) Henri Bergson, “Introduction à la métaphysique”, p. 208. 자기 의식의 지속을 “아주 특정한 하나의 긴장” 따라서 다른 긴장의 정도들의 가능성을 함축하는 것으로 파악함 으로써 유아론을 넘어서려는 베르그손의 독특한 시도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하고 본격 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이 문제는 별도의 과제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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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을 생명으로 대체하는 이러한 행보는 아무런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을 것인가? 베르그손 철학에서 의식과 생명의 관계 문제는 그 자체로 별도의 연구를 요하는 문제이다. 더군다나 예술론의 영역 안에서 이 문제는 1900년의 저작 웃 음을 면밀히 검토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접근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후속 연구에서 이 문제를 따로 다룰 것이다. 사실 베르그손의 초기 철학은 생명의 문제와 함께 중대한 변화를 맞이한다. 여기에서는 다만 다음의 점만 지적해두는 것에 그칠 것이다. 베르그손이 지속 개념을 존재자 일반으로 확대 적용하기 위해 생명 개념을 도입할 때, 생명 개념은 지속 개념에 은밀하지만 심층적인 영향을 끼친다. 생명 개념은 지속 개념으로 포괄할 수 없는 사태, 지속 개념의 외부에 있는 존재자의 사태를 향해 지속 개념을 넘어서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웃음에서 우리가 새로운 종류의 예술론, 매우 독특한 예술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근본적 으로 이런 연유에서이다. 하지만 이에 관한 논의는 우리가 말한 대로, 베르그손의 잠재적 예술론의 또 다른 장을 이룰 이야기이다.

Ⅶ. 예술에서 진리와 창조

이 연구를 마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루어야 할 문제가 하나 더 남아 있다.

베르그손에게서 예술 진리론, 곧 예술은 존재에 대한 일종의 철학적, 형이상학적 인식이라는 관점은 예술 감정론(예술은 인간적 감정을 표현한다는 관점)과의 관계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은 인식일 뿐 아니라 창조 활동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사실, 베르그손에게서 예술은 가장 전형적인 창조 활동이다. 예술이 없었다면 창조가 무엇인지 인간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창조란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대상을 존재하게 하는 활동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술은 사물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주는 동시에 창조적인 것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인가? 창조와 진리라는 두 관념은 정반대되는 것 아닌가? 예술 진리론과 예술 창조론의 관계에 관한 이 문제가 바로 우리가 다룰 마지막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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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마크 싱클레어는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베르그손의 예술론에서 창조와 진리를 양립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기 위한 해석을 제시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베르그손에게서 예술적 창조는 창조적 진화에서 전개된 생명적 창조의 모델을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 생명적 창조는 전에 없었던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무로부 터의 창조)가 아니라 “창조적 행위 이전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적 요소들을 갖지 않는 기원적 통일성으로부터 [이 요소들을] 분리”해내는 활동이다.45) 따라서 생명의 창조나 예술의 창조 모두 한편으로는 전에 없었던 것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사물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된 것은 그 이전에는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지만, 그럼에도 기원적인 통일성 속에 이미 존재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창조와 진리는 이러한 타협안에 쉽게 응하지 않을 것 같다. 싱클레어는 분리라는 관념에 포함된 역설에 충분히 주의하지 않는 것 같다.

‘그 이전에는 없었던 요소들의 분리’란 엄밀히 말해 분리라고 할 수 없다. 분리해야 할 것이 애초에 없었는데 어떻게 분리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실 창조적 진화

에서 생명의 창조는 생명의 다양한 경향들의 분리, 분기(divergence)인 동시에 생명적 통일성의 다양한 변형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비, 본능, 지성이라는 생명 진화의 주요한 세 방향은 이 세 경향을 잠재적으로 갖고 있는 생명의 원초적 통일성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것들일 뿐 아니라 하나의 주요한 경향을 발전시킴 으로써 다른 경향들은 잠재화시킨 통일성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물 질과 기억에서도 이미 발견된다. 순수 기억은 모든 기억들을 하나로 융합한 전체 로서 이 순수 기억으로부터 특정한 개별 기억이 떠오르는 방식은 전체로부터 부분이 분리되는 방식이 아니다. 특정한 개별 기억은 전체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반대로 전체가 그 특정 기억을 중심으로 응축되어 이 특정 기억은 모든 기억 전체를 보이지 않는 배후에 두고서 떠오르기 때문이다.46)

45) Mark Sinclair, “Bergson's Philosophy of Art”, p. 100.

46) 싱클레어는 창조적 진화에서 베르그손이 세아이유(Séailles)를 언급하는 각주(베르그 손, 창조적 진화, p. 62 각주 36)에 주목한다. Mark Sinclair, “Bergson's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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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본다면 분리 관념을 통해 창조를 진리의 드러냄과 연관시키려는 싱클레어의 해석은 베르그손에게서 창조 개념의 의미를 보다 깊이 있게 탐구하지 못하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분리를 이해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임이 드러난다. 창조가 분리를 넘어서 어떤 총체성 자체의 예측 불가능하고 미리 결정할 수 없는 변화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진리와의 충돌은 더욱 첨예해질 수밖에 없다.

해결의 실마리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창조 개념의 의미를 변형시키는 것 이 아니라 예술적 창조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에서 주어질 수 있다.

우리는 앞서 베르그손에게서 예술은 대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암시한다는 것을 보았다. 따라서 예술은 대상의 진리를 고스란히 복제해서 우리에게 전달해주지 않는다. 반대로 예술은 대상의 진리를 향해 우리 스스로 나아가도록 이끌며 대상의 진리를 인식하는 것은 작품을 감상하는 우리들 자신이다. 예술 작품이 진리의 인식이라면, 이는 오직 우리가 진리를 인식하도록 유도한다는 점, 그 길을 보여준 다는 점을 의미하지, 우리가 스스로는 알아낼 수 없는 무엇을 직접 가르쳐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베르그손은 형이상학 자체도 이와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를 구성하는 지속에 대한 직관을 자기 스스로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어떤 것도 그에게 그 직관을 줄 수 없을 것이다.”47) 형이상학은 단지

of Art”, pp. 94-96. 싱클레어에 따르면, 세아이유는 예술적 창조를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전통적 관념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베르그손은 그에게 빚지고 있다. 다만 세아이유가 창조를 “요소들의 종합”으로 본 반면 베르그손은 이를 부정한다.

하지만 싱클레어의 주장과 달리 베르그손은 이 각주에서 무로부터의 창조를 논의하지 않으며, 그가 세아이유에게 동의하는 바는 생명은 창조라는 주장뿐이다. 게다가 싱클 레어는 이 각주에서 베르그손이 요소들의 잠재적, 선행적 존재 가능성 자체를 부정한 다는 점에 충분히 주의하지 않는다. 베르그손에게 요소들이란 “불가분적 과정에 대한 정신의 다양한 관점들”에 불과하다. 따라서 잠재적 요소들의 종합이든 분리든 간에, 창조는 요소들의 관점에서 사고될 수 없다. 생명진화 과정의 창조성은 우리가 말했듯이 단순히 기원적 생명의 원초적 통일성으로부터 잠재적인 구성 요소들이 분리되는 과정 으로만 생각될 수 없다. 창조는 또한 원초적 통일성의 예측 불가능한 변형적 증식 과정이기도 하다.

47) Henri Bergson, “Introduction à la métaphysique”, p. 18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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