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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의 진정한 정신을 발견하는 유쾌하고 감동적인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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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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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Vol. 36, No. 2, pp.195-200

<서평>

가르침의 진정한 정신을 발견하는 유쾌하고 감동적인 여행

(파커 J. 파머의 󰡔가르칠 수 있는 용기󰡕)

백 지 은(서울광진학교)

아침에 학교에 나서는 길, 나는 운전대를 잡고 ‘오늘도 무사히’라는 기도를 읊조린다. 그리고 바 삐 나오는 퇴근길, 아무 일 없이 하루가 지나갔음에 감사한다. 별난 학생들, 완전히 내 것이 되었는 지 회의감이 드는 교과 내용, 생계의 수단이 되는 교직, 학교라는 공간에서 만난 동료들과의 관계 등 모든 것이 나를 괴롭히는 날이 있다. 그러나 아이들의 미소가 유난히 사랑스럽고, 스스로도 수 업이 즐거워 신이 나며, 학교에서의 일상이 감사하고 보람찬 날이 있다. 이러한 좋은 날과 어려운 날을 겪으면서 나는 왜 이렇게 힘든 교사를 자처할까 고민한다. 이 책에서는 나에게 답을 주었다.

왜냐하면 나는 ‘교직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학생, 학습, 교직을 사랑하기 때문에 애쓰는 교사들을 위한 책이다. 교직을 그토록 사랑한다면, 문제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다 름이 아니라 문제를 파고드는 것이다.

교사들에게 교직을 택한 동기를 묻는다면 아마 교과에 대한 열정, 학생들에 대한 사랑 등을 댈 것이다. 그러나 여러 해 교직에 있으면서 그 동기는 조금씩 사라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하 면 그 동기를 다시 불 지필 수 있을까? 책에서는 우리를 교직으로 보냈던 그 힘들을 다시 되새겨 보는 것을 권하고 있다. 그 두 가지란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스승과,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과목 (학과)이다.

먼저 스승의 힘은 교과적인 가르침이 전부가 아니고, 학생의 내면에 진리를 일깨워주는 능력에 있다. 그 능력은 여러 해가 지나고 나서야 빛을 발하기도 하는데, 진리를 깨달을 때 우리는 스승에 게 깊은 감사를 깨닫게 된다. 비록 감사의 마음이 뒤늦게 찾아온다고 해도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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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인격적인 성숙을 나타내는 것이고, 동시에 학생들의 미성숙한 태도를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 는 관용의 자세가 될 것이다. 교직에 들어오고 나서 스승에 대한 진정한 감사의 마음을 느끼는 때 가 많다. 가르침을 주시던 모습, 작은 행동으로 큰 감화를 주시던 모습, 때로는 인격적으로 학생을 대해주시던 모습 등을 되돌이켜보며 나는 어떤 교사인지 나의 민낯을 마주보고 다시 그 거울을 닦 아내는 것이다.

다음으로 사람들은 특정 과목에 큰 매력을 느껴서 교사가 되기도 한다. 내가 가르치는 과목에 대한 큰 열정은 이 진리를 다른 사람과도 나누고 싶다는 의지를 갖게 한다. 나도 ‘특수교육’이라는 학문에 마음 가득 열정을 품고 욕심을 낸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으로 학생들을 대하며, 존 경하는 스승님의 말처럼 ‘30번 물어보는 학생에게 31번 웃으며 대답해줄 수 있는’ 교사로 거듭나기 를 매일 소망한다. 전문가로서 나를 연마하고 내 학과에 통달하기 위한 노력들은 다시 초심으로 돌 아가라고 교사를 일깨운다.

그러나 다시금 동기를 불 지피려 애쓸 때에도 매일의 일과에 상처받을 때, 나만 나약한 교사가 아니라는 다른 이의 고백은 마음에 한결 위안을 준다. 제인 톰킨스의 <고통 받는 사람들의 교육학>

에서 톰킨스는 교사로서 자신의 강박증을 고백하고 있다. 자신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다음의 세 가지에 더 관심이 많다고 말한다. “첫째, 학생들에게 내가 얼마나 똑똑한 교사인지를 보여주는 것. 둘째, 학생들에게 내가 얼마나 지식이 많은지를 보여주는 것. 셋째, 학생들에게 내가 얼마나 수 업 준비를 충실히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 나는 이처럼 교실에서 세 가지의 연기를 해 왔는데, 그 진정한 목적은 학생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나를 훌륭하게 생각하도록 유도하 려는 것이었다.” 톰킨스의 이 솔직한 고백에 나는 조금도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교사가 과연 있을까? 없을 것이다. 나의 능력 부족이 폭로될까 봐, 나의 연기를 더욱 매끄럽고 부드럽게 꾸미려고 애쓰지만, 학생들은 교사로부터 진정한 것들은 배우지 못하고 은폐의 방법만 배우게 되는 것은 아닐까?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넘을 수 없고, 교사가 학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좋 은 수업이다. 그러나 좋은 수업에 방해가 되는 요인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교사들의 답변은 대부 분 ‘학생들’이라고 말할 것이다.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했다. 주의력이 산만하다, 예의가 부족하다,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등 학생들의 단점을 열거해가며 왜 나의 수업이 좋은 수업이 아닌지를 방어 하려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와 관련하여 책에서 나온 재미있는 비유를 소개하고 싶다.

몇 년 전 나는 한 실험대학의 학장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당시 어떤 명문대학에서 실험 프로젝트를 2년째 실시하는 중이었다. 그는 방금 교수회의를 마치고 나왔는데 표정 을 보니 뭔가 일이 잘 안 돌아가는 것 같았다.

“무슨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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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물었다.

“교수들은 오전 내내 학생의 질에 대해서 개탄했습니다. 좀 더 의욕적인 학생들을 모 집하지 않는 한 이 실험 프로젝트는 실패할 거라고 입을 모아 말하더군요.”

“그래서 학장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한참 동안 듣고만 있었지요. 아무튼 교수들은 학생들이 틀려먹었다는 얘기를 계속했 습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가 한 마디 했습니다. 당신들은 환자를 더 이상 보내지 말아 달라고 요구하는 병원 의사 같군요. ‘우리는 환자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 몰라요. 그 러니 우리를 좋은 의사로 만들어주는 건강한 환자들만 보내 주세요.’ 당신들은 지금 이렇 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p. 98, <공포의 문화>)

이 책에서는 문제 학생들을 일명 ‘지옥에서 온 학생’이라고 부른다. ‘지옥에서 온 학생’들은 교사 들로 하여금 분노와 좌절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학장의 비유는 많은 교사들에게 경종을 울릴 것이 다.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된다.’는 말의 위력을 새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교사가 학생을 도저히 손을 댈 수 없는, 치료가 불가능한 대상이라고 생각하면 교육의 의지는 사라지고 내가 가르 칠 수 있을만한 더 나은 상태의 학생을 찾는 데 급급해질 것이다. ‘지옥에서 온 학생’은 처음부터 그런 학생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학생이 겪는 곤경을 통해 그가 처한 상황을 깊이 성찰하게 되고, 이러한 성찰은 교수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모든 책임이 학생에게 있다고 진단하여 교사들의 결점을 덮어 두는 것 은 학생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교사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교사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다양한 공포를 토로한다. “아무리 일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학부모와의 관계가 힘이 든다, 학생들을 다루기가 쉽지 않다” 등을 하소연하면서도 교사들의 마음에는 또 다른 공포가 있다. 바로 학생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다. 교실에 들어섰을 때 학생들의 무기력한 모 습, 그건 비장애학생뿐 아니라 내가 만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교구를 늘어놓고 학생의 주의 를 집중시키기 위해 아무리 애를 써도 멍한 눈길로 나를 쳐다볼 때, 교사는 학생의 신호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선생님 수업은 정말 지루해요. 선생님이 설명하는 것은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 어요. 선생님이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 듣겠어요.” 교사는 학생이 보내는 공포의 신호를 경 멸의 신호로 이해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학생들 역시 교실이라는 공간은 공포의 대상으로 느낄 수 있다. 어려운 학과, 또래들 간의 긴장, 권위적인 교사 등의 환경에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이 러한 태도를 온 몸에 두르고 있는 학생을 교사는 바로 ‘지옥에서 온 학생’으로 낙인찍고 마음의 문 을 닫아버리는 건 아닌지 나 스스로도 성찰해보게 되었다. 에릭 에릭슨은 성인의 발달에 대해 ‘정 체감(stagnation)'과 생산성(generativity)’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공포를 느낄수록 교사들은 정체감(stagnation)을 택하고,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무관심한 태도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교직의 슬럼프로 이어지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서 한 발 나아가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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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중년의 교사가 학생과 교육에 대해서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고 아무런 희망도 없게 되 는 것은 그리 이례적인 일도 아니다. 교직에 품었던 큰 희망이 무참히 깨지는 순간, 또는 자신의 경험을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하는 순간 냉소주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이런 강렬한 냉소주의를 늘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 냉소주의의 이면에는 한때 교직에 대해 품 었던 강렬한 희망이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희망을 되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 다. 왜냐하면 그 강렬한 느낌이 아직 그대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만 이해된다면, 이런 냉소주의는 희망을 재생시키는 씨앗이 된다.(p. 109, <공포의 문화>)

희망을 재생시키는 씨앗으로써 에릭 에릭슨이 제시한 것은 ‘생산성(generativity)'이다. 교사가 학 생들을 두려워하는 만큼, 학생들도 우리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공포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병에 걸린 사람이 병 자체는 아니듯이, 공포 를 느낄 수 있지만 교사 자체가 공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훌륭한 선배 교사를 볼 때, 나는 내가 추후 교직의 모든 것을 알고, 아주 유능해지고, 경험도 풍부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지금에 는 그런 날이 결코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나는 그저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털 어놓고, 그에 따라 적절한 행동을 취함으로써 돌파구를 찾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체감 (stagnation) 대신 생산성(generativity)에 도달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위와 같은 마음의 성찰과 더불어, 동료 교사들의 커뮤니티는 교직의 시련을 이겨낼 힘을 준다.

교사들의 모임에서는 교직에 대한 집단적인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나 역시 처음 교직에 발을 디뎠 을 때 선배 교사들의 경험 어린 조언을 듣고, 학생을 대하는 연륜을 관찰하면서 매일 매일 배워나 갔다. 그러나 교직은 모든 공적인 직업 중에서 가장 독립된 직업이라는 점에서, 그 배움이 계속 이 어진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교사는 학생들 앞에서 가르치지만 동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수업을 한다. 이것 은 외과 의사나 법정 변호사와는 대비된다. 이들은 자신의 직업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 앞에서 직무를 수행한다. 변호사는 다른 변호사들 앞에서 자신의 담당 사건을 변호하기 때문에 업무상의 하자가 곧 모든 사람에게 노출된다. 외과의사는 전문가들이 보는 앞에서 수술을 한다. 그들이 의사의 손이 떨리는지 어떤지까지 알아보기 때문에 의사가 실수할 가능성은 적어진다. 하지만 교사는 희생자들 외에는 아무런 증인이 없기 때문에 ‘외과용 거즈를 잃어버리거나 엉뚱한 사지를 절단해도’ 알 수가 없다.(p.259, <커뮤니티 속에서 배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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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비유와 같이, 교사는 교실에 들어가는 순간 문을 닫는다. 교실에서 나오면 교실에서 벌어진 일, 벌어질 일에 대해 공유하지 않는데 이러한 현상을 ‘소외주의’라고 하기보다 ‘학문적 자유’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독립성은 역으로 교사를 상처 입히기도 한다. 교원능력개발평가를 생각해보 면, 교사를 평가하는 방법으로 설문지를 돌린다. 교직이라는 복잡한 직무를 기껏해야 10개 남짓의 문항으로 평가하고, 교사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평가를 당하면서 사기가 떨어진다. 그러나 교육 현 장인 교실의 문을 계속 닫아 놓을 때 대안적인 평가 방식은 고려할 수 없다. 가르침의 모습은 다양 할 것이고 이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방법은 교실의 문을 열고 동료 교사의 수업을 보는 것이다. 교 직 생활에서 도움이 필요하고 성장하고자 하는 교사는 커뮤니티에 기꺼이 참여해야 한다. 모두가 겪는 시행착오를 나누지 않으면 나 역시 실패를 거듭하며 좌절하게 된다. 아이들의 빛깔이 모두 다 르듯이 교사들의 가르침도 그런 것 같다. 어떤 교사의 잘 짜여진 수업에 감탄하기도 하고, 또 다른 교사의 상담 기술이 매우 뛰어나서 놀라기도 한다. 교직 문화가 비교적 수평적이라는 것은 교육 커 뮤니티가 활성화되기 위한 큰 장점이다. 교사들이 대화를 통해 상처를 회복하고, 전문성을 키우고, 선(善)을 이루게 되기를 희망한다.

나는 교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버둥거리며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여기 저기 기웃거리는 교사인데 왜 요령과 기술을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는지 답답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나의 내면 풍경 을 파고드는 것에 그 해답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르친다는 행위는 겉으로 드러나는 대신 마음으 로 느낄 수 있는 것인데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만 고민하고 가르치는 대상인 ‘누구’에 대 해서는 무관심했음을 고백한다. 짧은 교직기간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 반향어가 심했던 3학년 여학생이 첫 수업 중 책상에 물을 쏟았다. “때린다 너!”라고 소리치던 아이를 보며

“절대 안 때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거야.”라고 대답해주었다. 5년 동안 가르치던 그 아이가 졸 업하던 해, 똑같은 실수를 하고나서 나를 보며 “그럴 수도 있는 거야!”라고 혼자 내뱉는 말에 뭉클 했다. 교사로서 마음의 중심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 이 책은 중심이 ‘학생’에 있어야 한다고 계속 나를 다독이며 위로해준 고마운 책이다. 글을 맺으며 내가 존경하는 윤지형 교사의 ‘교사 탐구를 시작하며’의 글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나는 ‘선생들’ 집단은 믿지 않지만 삼천리강산 곳곳의 학교와 교실에 숨어 있을 ‘선생 님’은 믿는다. 이건 억설(臆說)이 아니다. 요컨대 나는 내 가까운 주위에서만 해도 무수한 아름다운 ‘선생님’을 본다. 그 선생님 하나하나 속에서 또한 한량없는 ‘인간’을 보기도 한 다. 이건 행복한 일이다. 그들은 도처에 다양한 얼굴로 존재한다. 21세기 독립군, 열혈 지 사, 혁명가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 하면 샌님 같은 선비, 눈빛 맑은 구도자의 얼굴을 하고 도 있다. 만능 재주꾼에 약방 감초가 있는가 하면 산 같고 바다 같은 호인도 있으며 섬 세한 예술적 영혼의 소유자도 있고 겸손하고 부지런한 상머슴의 풍모를 지닌 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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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손을 내밀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라도 그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교육의 희망 을 묻는 사람이라면 필경, 지금 이곳에서 생명의 나무로 서 있는 ‘교사’에게 먼저 눈을 돌려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p. 9, 󰡔나는 왜 교사인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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