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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사벽화묘의 고구려 관련성에 대한 하마다 고사쿠의 논문-임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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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마다 고사쿠의 논문

임찬경(국학연구소 연구원)

【자료소개】

濱田耕作, 「遼陽附近の壁畵古墳」『東亞考古學硏究』, 岡書院, 1930

(2)

【해설】

1918년 8월 중국 요녕성 요양(遼陽) 일대에 폭우가 쏟아져 전답과 가옥 이 물에 잠기는 홍수가 발생했다.01) 요양을 끼고 흐르는 태자하(太子河) 동쪽에 위치한, 영수사촌(迎水寺村)으로 불리던 그 지역도 크나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1919년 5월 이후 제방을 복구하기 위해 땅을 파던 중 벽화 가 그려진 고분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영수사벽화묘(迎水寺壁畫墓)라 부 른다.

여기에 소개할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02)의 논문에서 밝혔듯, 발굴 당 시 이 고분은 만주(滿洲)에서 가장 중요한 고분 중 하나로 주목 받았다.

고분의 규모는 물론, 여순(旅順)과 요양 등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 다른 고 분들과 비교하거나, 더 나아가 벽화가 있다는 점으로 보나, 확실히 다른 고분들과 구별되며 특별히 주목받을 수 있는 고분이 바로 영수사벽화묘 였다.

그러나 발굴 초기에 몇 편의 관련 논문으로 소개되었던 영수사벽화묘 는, 1930년 이후 더 이상의 관련된 언급 없이 학계(學界)의 관심 밖으로 완전히 밀려난 것처럼 보인다. 특히 한국의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영수사 벽화묘에 대한 그 어떠한 연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의주시하여 살펴 보면, 그 빈틈없는 외면이 오히려 더 놀랍고 또 신기할 정도이다. 이렇도 록 철저한 외면에는 무언가 색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영수사벽화묘 가 지닌 어떤 특징이 그 외면을 초래한 것은 아닐까?

영수사벽화묘가 지닌 가장 큰 특징은, 발굴 초기에 그 고분의 고구려

01) 遼陽縣志編纂委員會辦公室編, 「遼陽縣志』, 1994, 29쪽.

02)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 1881~1938년) : 고고학자. 도쿄 제국대학에서 서양사학 및 미술사를 수업하고, 1916년 교토 제국대학에 일본 최초의 고고학강좌가 창설되며 교수 가 되었다.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1893~1983), 스에나가 마사오(末永雅雄, 1897 1991), 고바야시 유키오(小林行雄, 1911~1989) 등이 그의 제자이다. 일본 고고학을 정 립하여 “일본 고고학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通論考古學』(1922) 등의 저서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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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성이 매우 비중있게 언급되었다는 점이다. 1919년 6월에 영수사벽화 묘를 직접 발굴한 야기 쇼자부로(八木奘三郞)03)는 1921년 2월에 발표한 논문에서, 영수사벽화묘의 벽화에 나타난 인물의 민족관계를 분석하면서 그 인물이 “고구려족의 유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분명하게 언 급하였다. 1919년 말에 현지에 가서 직접 그 고분을 살펴본 쓰카모토 야 스시(塚本靖)04)도 1921년 3월에 발표한 논설에서 “고분의 연대에 대하여, 야기씨(八木氏)는 한대(漢代)의 것이라고 하고, 교토대학 모씨(某氏)는 고 구려 시대라고 했다고 전해 들었다. …나는 오히려 벽화의 성질로 보아 고구려시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 여긴다.”고 언급하였 다.05) 1920년 11월에 영수사벽화묘를 직접 고찰한 하마다 고사쿠(濱田耕 作)도 1921년 7월에 발표한 논문에서 “벽화의 성질은 조선의, 이른바 고 구려의 고분과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에, 쓰카모토(塚本) 박사 및 나이토 (內藤) 박사 등의 설(說)에 따라 고구려라고 해도 좋다고 본다. …이 문제 는 오늘에 있어서도 거의 결정하기 어렵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단지 고구 려설이 조금 더 온당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할 뿐이다.”06)라며, 고구려 관련 성을 분명하게 언급했다.

그러나 그 이후, 위에 거론된 3명의 일본학자는 물론 일본의 학계 전체 에서도 영수사벽화묘에 대해 더 이상의 다른 연구성과를 내놓지는 않았 다. 물론 영수사벽화묘의 고구려 관련성에 대해 부정하는 입장을 짧게나 마 공개적으로 밝힌 적도 없다. 고구려의 강역이 압록강 중류 일대와 한

03) 야기 쇼자부로(八木奘三郞, 1866~1942년) : 고고학자. 1892년 도쿄 제국대학 인류학 교실에서 연구를 시작하여 이후 조선 이왕직박물관(李王職博物館), 여순박물관 등에서 근무했다. 저서에 『考古學硏究法』(1905), 『日本考古學』(1907) 등이 있다.

04) 쓰카모토 야스시(塚本靖, 1869~1937년) : 건축가. 서양건축 전공. 1923~1924년 일본 건축학회 회장 역임. 도쿄 제국대학 공학부 강당 및 교실(1919), 구 서울역(1925) 등을 설계했다. 건축 외에 미술, 공예에도 조예가 깊어 저서에 『支那建築』(1929, 關野貞와 공저), 『天目茶碗考』(1935) 등이 있다.

05) 塚本靖, 「遼陽太子河附近の壁畵ある古墳」『考古學雜誌』第11卷第7號, 1921, 225쪽.

06) 濱田耕作, 「遼陽附近の壁畵古墳」『東亞考古學硏究』, 岡書院, 1930, 425 4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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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의 중북부에 불과했을 것이라는 오랜 편견에 갇혀있는 한국의 식민 사학계는, 물론 영수사벽화묘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요양에 있는 그 고분은 원래부터 고구려의 강역 밖 서쪽 멀리에 있었던 것이므로 한국사와 관련지어 연구할 필요가 없다는, 그런 망상(妄想) 때 문임에 틀림없다.

영수사벽화묘는 그 고분의 구조는 물론 내부에 그려진 벽화의 내용에서 고구려 관련성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특징이 있다. 고분의 발굴자인 야기 쇼자부로(八木奘三郞)는 그 벽화를 아래의 [도면]처럼 모사(摸寫)했 고, 그의 관련 논문에서 고구려 관련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도면] 八木奘三郞의 벽화 모사도 중 주인공 관련 부분

벽화에 보이는 부부상(夫婦像)은 예로부터 중국식 석벽화(石壁畵)에는 없는 것이다. 이는 부여족의 선조인 주몽(朱蒙) 부부를 기리는 상태와 매 우 비슷한 바가 있고, 또한 그 계통은 조선의 고분벽화와 연관을 지니고 있기에 이를 고구려족(高句麗族)의 유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07)

07) 八木奘三郞, 「遼陽發見の壁畫古墳」, 『東洋學報』第十一卷第一號, 1921, 참조. 위의 [도 면]은 그 논문에 실린 모사도 중 주인공 관련 부분을 잘라내어 확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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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도면] 중 오른쪽에 앉은 주인공이 머리에 쓰고 있는 관(冠)은 전 형적인 고구려의 머리쓰개인 절풍(折風)을 연상하게 한다. 무덤 주인공의 벽화에서부터 고구려의 특색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야기 쇼 자부로(八木奘三郞)에 의하면, 이 고분의 벽화에 그려진 여러 종복(從僕 )들도 역시 한족(漢族)이 아닌 만주식(滿洲式) 인물임이 분명하다는 것이 다.

위에서 살펴보았듯, 1919년에 요양에서 발견된 벽화고분인 영수사벽화 묘에 대해 직접 현지를 고찰한 세 명의 일본학자가 각각 1921년에 남긴 관련 논문들에서 모두 고구려 관련성을 언급하였다. 이는 한국사학계의 고구려 벽화고분 연구뿐만 아니라, 요양 지역의 초기 고구려 강역 관련성 등은 물론 고구려사의 전반 연구에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 다.08)

본고에는 위에 소개한 세 편의 논문 중 한 편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 作)의 논문을 번역하여 실었는데, 이는 고구려 혹은 벽화고분 관련 연구 자들의 지속되고도 심층적인 논의의 활성화를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여기에 번역한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의 논문은 처음에 1921 년 7월에 발행된 『民族と歷史』第6卷第1號(鮮滿硏究號)에 실린 「南滿洲に 於ける重要なる古墳」이란 제목의 논문 중 ‘2.遼陽附近の壁畫古墳’이란 부 분이며, 뒤에 이 부분의 내용을 그대로 1930년에 발행된 『東亞考古學硏 究』에 「遼陽附近の壁畫古墳」이란 제목으로 분리해 실었는데, 본고에서는 1930년에 실린 그 논문을 변역하였다.

08) 요양 지역과 고구려의 강역 관련성 연구 : 최근 여러 고대 문헌을 근거로 고구려의 첫 도읍인 졸본이 대릉하와 의무려산 일대였으며(임찬경, 「고구려 첫 도읍 위치 비정에 관 한 검토」『선도문화』제20권, 2016), 이런 관점에서 요양 지역은 고구려 초기부터 줄곧 고구려의 강역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임찬경, 「『고려도경』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 연대와 첫 도읍 졸본」『국학연구』제19집, 2015). 또한 요양 지 역은 고구려 초기부터의 강역 범위에 포함되었음은 물론, 장수왕이 427년에 천도한 평 양이 바로 요양 지역이었다는 연구도 발표되었다(임찬경, 「『수경주』를 통한 고구려 평 양의 위치 검토」『국학연구』제21집,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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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번역】 영수사벽화묘 발굴과 그 성격에 대한 하마다 고사쿠의 논문 1편

09)

요양 부근의 벽화고분(遼陽附近の壁畵古墳),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 『東亞考古學硏究』, 1930.

규모의 크기로 보나, 여순(旅順)에 있는 목양성(牧羊城)이나 영성자(營 城子) 부근의 고분에 비교하거나, 더 나아가 벽화가 있다는 점으로 보나, 다른 유례(類例)가 없는 만주(滿洲)의 고분이 바로 대정(大正) 7년10)에 요 양(遼陽)의 태자하(太子河) 북쪽에서 발견된 이 고분이다.11) 이 고분에 대 해서는 최근에 이미 야기 쇼자부로(八木裝三郞) 및 쓰카모토(塚本) 박사 등의 전문적인 연구자들이 여러 방면에서 발표한 것들이 있으니, 지금 다 시 자세히 설명할 것도 없다. 그러나 필자도 작년 11월에 이 고분을 한번 볼 기회를 얻었었고, 또한 야기(八木) 덕분에 여순박물관(旅順博物館)에 서 발굴된 벽화를 모사(摸寫)한 것 등을 살펴보았기 때문에, 여기에 간단 히 소개해 보고자 한다.

09) 이하 자료의 번역에서 필자주는 본문에서 괄호 속에 기입했고 모든 각주는 역자주이 다. 또 명확한 오식이나 오류로 판정되는 점은 바로잡았다.

10) 대정(大正) 7년은 1918년이다.

11)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가 1918년에 고분이 발견되었다고 서술한 것은 오류이다. 야 기 쇼자부로(八木奘三郞)의 논문과 당시 요양에 대한 지방지(地方志)의 기록을 연관시 켜 보면, 1918년에 8월 요양(遼陽) 지역에 큰 홍수가 났고, 1919년 5월 이후 제방을 복 구하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그 과정에 한 기의 무덤이 발견되었으며, 1919년 6월 무렵 에 야기 쇼자부로(八木奘三郞)가 현지에 가서 석곽의 윗부분만 노출된 상황을 보고 토 양을 걷어내고 들어가 석실(石室) 안의 구조와 벽화를 처음 확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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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73圖 遼陽附近地圖

이 고분은 지금 지상(地上)에 봉토(封土)의 자취조차 남아있지 않다. 이 곳을 방문한 사람은, 도대체 여기 어디에 고분이 있는 것일까 하고 이상 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땅을 조금 파서, 묘실(墓室) 천정(天井)의 조 금 열린 구멍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 보면, 십수 ‘조’[疊]12)나 되는 큰 묘실 이 존재한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전체는 장방형(長方形)의 형 태로, 천정(天井)도 평면이며, 다만 북쪽으로 작은 부실(副室)이 붙어 있 다. 필자는 쓰카모토(塚本) 박사와 같이, 역시 남쪽이 입구라고 생각한 다. 묘실을 구성한 재료는 이 지방에서 생산되는 캄브리아기(Cambrian Period) 판상(板狀)의 석판석(石板石)으로 아주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반

12) ‘조’[疊]는 일본에서 면적를 계산할 때 사용하는 단위이다. 1‘조’는 세로가 1.82m이며 가로가 0.91m인 직사각형으로 면적은 1.656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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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시 이 부근에 있는 작은, 이른바 석관(石棺) 계통의 고분과 같은 재료로 서, 단지 그 형식을 크고 복잡하게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도리이(鳥居) 도 일찍이 이와 다소 비슷한 「대석관(大石棺)」을 요양(遼陽)에서 발굴하고 있다.

圖版第40 遼陽太子河北壁畵古墳

1. 古墳所在地 2.3. 墓室內部 4. 旅順博物館移置後石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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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는 4개의 석관(石棺)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이 각각 석벽(石壁) 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다른 자세한 설명을 하자면 복잡해지기 때문에, 이는 쓰카모토(塚本) 박사의 논문에 양보하기로 한다. 단지 하나 말해 두 고 싶은 것은, 야기(八木)의 논문에 첨부된 이 고분의 도면과 쓰카모토(塚 本) 박사의 실측도(實測圖)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야기(八木) 의 도면은 급하게 한 조사로 보이기에, 쓰카모토(塚本) 박사의 도면에 더 욱 신뢰를 둔다는 증거로서 나의 약측도(略測圖)를 여기에 제시한다.

第74圖 遼陽太子河北方古墳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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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는 대묘실(大墓室)의 주위 및 부실(副室)의 벽면에 있다. 다른 자세 한 서술도 또한 번거롭기에 그런 서술은 야기(八木) 및 쓰카모토(塚本)의 논문에 양보하고, 평면도(平面圖) 중에 간단한 적요(摘要)를 첨부하기로 했다. 단지 이 중 주의해야 할 것은, 도면 중의 일부는 부실(副室) 안의 주 방을 나타낸 것으로, 새나 짐승을 처마에 매달아 놓은 모습은 마치 한화 상석(漢畵像石)에 있는 광경과 같다. 또한 대묘실(大墓室)의 남쪽 벽에 의 관(衣冠)을 갖춘 남녀가 서로 마주앉아 있는 모습은, 이 무덤의 벽화에 여 러 차례 반복되는 주제로, 조선 평양 부근의 고구려 고분 속 벽화와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단지 조선의 것은 완전히 정면 방향의 벽화가 대부분인 것에 비해, 이 고분은 약간 반측면(半側面)을 묘사하고 있어,13) 퍼스펙티브(perspective) 즉 원근감(遠近感)을 주는 시도가 더해졌다. 이 는 벽화로서는 그들보다 진보된 양식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그러나 시대가 새로운 즉 더 늦은 시기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 다). 좀 더 재미있는 벽화는 동쪽 벽의 우차(牛車), 서쪽 벽의 견마(牽馬 ) 정도일 것이다.14) 채색은 모두 호분지(胡粉地) 위에 더해져 적색(赤色)이 특히 명확하게 남아 있는 것 외에는 흑색(黑色), 황색(黃色) 정도가 겨우 보이는 정도이다. 필자가 베스트·코닥(Vest Pocket Kodak)15)으로 어렵 게 찍은 벽화(서쪽 벽)의 사진을 여기에 붙여 넣어둔다(圖版第40).

13) 이 번역본 앞의 [해설] 중에 제시된 [도면]에서 보듯, 마주앉은 무덤 주인의 반측면이 벽화에 그려져 있다.

14) 야기 쇼자부로(八木奘三郞)의 모사도에서 동쪽 벽의 우차(牛車), 서쪽 벽의 견마(牽馬) :

15) 베스트·코닥(Vest Pocket Kodak, ヴェスト·ポケット·コダック) : 미국의 East- man Kodak Company가 1912년에 내놓은, 당시 가장 인기를 끌었던 사진기이다. 렌 즈 등 부품 구성에서 조금씩 변화를 거쳐 기능을 향상 시키며 1935년까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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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에서 발견된 유물은 고전(古錢) 여러 종류[반량(半兩) 1, 오수(五銖 ) 60, 화천(貨泉) 2]와 토기 파편뿐이므로, 이 고분은 일찍이 도굴되었음 이 명확하다. 토기 중에는 가옥 모형의 일부, 양이부배(兩耳附杯), 구기[

勺] 등이 있다. 오수전(五銖錢) 안에는 사출오수(四出五銖) 하나, 무륜오 수(無輪五銖) 네 개가 포함되어 있다. 반량(半兩)은 전한(前漢), 오수(五 銖)는 보통 전한(前漢) 무제(武帝) 혹은 의제(宜帝), 화천(貨泉)은 왕망(王 莽)의 시대, 사출오수(四出五銖)는 후한(後漢) 영제(靈帝) 시기의 것이라 고 말한다. 또한 무륜오수(無輪五銖)를 야기(八木)의 설에 따라 어쨌든 한 대(漢代)의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고전(古錢)을 근거로 이것은 대체로 후한(後漢) 시대의 고분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토기를 보아도, 만주 (滿洲)의 다른 한대(漢代) 고분에서 나온 것과 성질이 같기 때문에, 시대 를 후한(後漢)이라고 해도 지장이 없으리라 본다. 그러나 벽화의 성질은 조선의, 이른바 고구려의 고분과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에 쓰카모토(塚本 ) 박사 및 나이토(內藤) 박사 등의 설(說)에 따라 고구려라고 해도 좋다고 본다.

후한(後漢)이건 고구려이건, 연대적으로 말하자면 모두 서기 1, 2세기 무렵의 것으로 두 가지 설(說)이 같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고분 벽화도 물론 한대(漢代) 회화(繪畵)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이 닮아 있다고 해도 직접적으로 딱히 고구려의 것이라 할 수는 없다. 단, 요양(遼陽) 부 근의 것은 벽돌무덤과 석관(石棺) 등 이렇게 두 가지 종류이다. 전자(前者 )는 중국 각지의 무덤과 비교했을 때 보통 한인(漢人)의 것이라 하고, 후 자(後者)는 조선의 고구려와 같은 석재(石材)로 하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 의 것으로 하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그리고 이 논리로 말하자면 고구려 설이 옳다고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이 벽돌무덤이나 석관 (石棺)에서 발견되는 유물은 완전히 동일하여 그 차이를 전혀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벽돌을 사용했던 한인(漢人)들도 이 적절한 석재가 많이 있 었던 요양(遼陽) 부근에서는 석관(石棺)을 만들었다고 해도 결코 불합리

(12)

하지 않다. 그러한 점으로부터 생각해 보면, 이 문제는 오늘에 있어서도 거의 결정하기 어렵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단지 고구려설이 조금 더 온당 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할 뿐이다.

한(漢) 혹은 고구려인가 하는 문제는 젖혀 두고라도, 또한 벽화의 미술 적 가치나 보존의 정도는 조선의 것과 비교해 뒤떨어진다고는 해도, 이 고분이 만주(滿洲)에서 가장 중요한 고분 중 하나라는 것에 이론(異論)이 없다. 이미 조가둔(刁家屯)의 고분은 벽돌을 전부 여순박물관으로 옮기어 그 후정(後庭)에 다시 세워진다고 하고, 요양(遼陽)의 이 고분도 요양의 백탑공원(白塔公園)에 옮겨 보호를 더할 계획이 있다는 소식은 기쁜 일이 다. 필자는 그것이 하루 빨리 실행되기를 희망해 마지않는다.

【 참고논저 】

八木奘三郞君, 「遼陽發見の壁畫古墳」『東洋學報』第十一卷第一號 塚本靖博士, 「遼陽太子河附近の壁畵ある古墳」『考古學雜誌』第11卷第7號 有高巖君, 「太子河畔の古墳」(『滿洲日日新聞』, 大正八年六月)

關野博士等, 『朝鮮古蹟圖譜』第二冊(李王職發行, 朝鮮古墳壁畵集) 鳥居龍藏博士, 『南滿洲調査報告』 等

【부기(附記)】

이 논문은 「남만주에서의 현저한 고분(南滿洲に於ける顯著なる古墳)」이 란 제목을 붙였던 글의 후반부인데,16) 다른 부분은 앞의 여러 글에 자세히

16)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의 이 논문은 1921년 7월에 발행된 『民族と歷史』第6卷第1號(

鮮滿硏究號)에 실린 「南滿洲に於ける重要なる古墳」이란 제목의 논문 중 ‘2.遼陽附近の 壁畫古墳’이란 부분이었다.

(13)

서술한 조가둔(刁家屯) 및 목성역(牧城驛)의 고분 등에 관한 것이며, 중복 된 부분이므로 생략했다. 또한 이 고분은 그 뒤 여순박물관(旅順博物館) 으로 옮겨 놓게 되고, 지금은 그 박물관 앞마당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 끝)

(14)

【 역자후기 】

위 논문의 역자(譯者)는 이미 2017년 8월에 발행된 『仙道文化』제23권 에서 영수사벽화묘와 관련된 두 편의 논문을 소개하였으며, 또한 그 글에 서 영수사벽화묘와 관련된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의 논문을 이후의 기 회에 별도로 소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17) 이 3편의 논문은 모두 영수사 벽화묘에 관한 것이며, 동시에 모두 고구려 관련성을 언급하고 있어, 앞 으로 이 고분의 성격을 밝히는데 있어 매우 소중한 자료들이다.

위에 소개한 1921년의 논문에서 그 저자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는 영수사벽화묘의 고구려 관련성에 대해서 “그러한 점으로부터 생각해 보 면, 이 문제는 오늘에 있어서도 거의 결정하기 어렵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단지 고구려설이 조금 더 온당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할 뿐이다.”라고 결론 짓고 있다. 연구와 논쟁의 여지를 남겨두면서, 고구려 벽화고분으로서 더 검토해보자는 취지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는 1938년에 일생을 마감하 였고, 끝내 명백한 결론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뿐만 아니라, 한중 일 3국의 학계가 명확한 결론을 내놓지 못하는데 있어서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

금년 6월이면 영수사벽화묘가 정식으로 발굴된 지 100년이 된다. 그때 까지라도 그 벽화고분의 성격 특히 고분의 고구려 관련성은 분명하게 밝 혀져야 하지 않을까? 또한 이러한 심층적인 연구를 통해서, 현재 요양(遼 陽) 일대의 한국 고대사 관련성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연구가 시도되어야 하지 않을까? 요양(遼陽)이 고대의 양평(襄平)이었다는, 그러므로 고구려 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지역이라는 일종의 ‘역사적 편견’을 깨는 계기도

17) 임찬경 박지영, 「요양 영수사벽화묘의 고구려 관련성에 관한 두 편의 논문」『仙道文化』

제23권, 2017.8.

(15)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18)

본고의 역자는 앞으로 다양하고 심층적인 방법으로 영수사벽화묘에 대 한 연구 및 논의가 활발히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역자의 연구능 력 부족 등으로 검토가 미진한 부분은 앞으로 계속되는 연구를 통해 바로 잡으려 한다.

18) 고대의 요양(遼陽)은 결코 양평(襄平)이 아니었다는 논의는 다음의 논문을 참고할 수 있다. 崔恩亨, 「遼陽은 옛 襄平이 아니다」『백산학보』제85호, 2009. 본고의 역자 또한 고대의 요양(遼陽)은 양평(襄平)이었던 적이 없으며, 고구려 초기부터 줄곧 고구려의 강역에 포함되어 있었고, 장수왕이 427년에 천도한 평양도 바로 요양(遼陽) 지역이었 다는 입장이다(임찬경, 『수경주』를 통한 고구려 평양의 위치 검토」『국학연구』제21집, 2017). 역자는 요양(遼陽) 지역이 고구려 초기부터의 강역 범위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인식을 전제로 하면, 본고에서 언급하는 3명의 일본학자들이 영수사벽화묘의 고구려 관련성을 자연스럽게 긍정했던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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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史記』

『三國史記』

『薊山紀程』

『往還日記』

白鳥庫吉 監修, 『滿洲歷史地理』上卷, 南滿洲鐵道株式會社, 1913.

八木奘三郞, 「遼陽發見の壁畫古墳」, 『東洋學報』11(1), 1921.

日本學術普及會 編, 『民族と歷史』, 日本學術普及會, 1921.7

塚本靖, 「遼陽太子河附近の壁畵ある古墳」『考古學雜誌』11卷7號, 1921.

南滿洲鐵道株式會社社長室調査課編, 『滿蒙歷史地理硏究』, 滿蒙文化協 會, 1922.

南滿洲鐵道株式會社庶務部調査課編, 『滿洲旧蹟志(續)』, 南滿洲鐵道, 1929.

濱田耕作, 「遼陽附近の壁畵古墳」『東亞考古學硏究』, 岡書院, 1930, 滿州國文敎部, 『滿洲國古蹟古物調査報告書 第1編 錦州省之古蹟』, 國務 院文敎部(新京), 康德3年(1936年).

遼陽縣志編纂委員會辦公室編, 「遼陽縣志』,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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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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