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접수 ▸ 2011년 6월 30일 수정 ▸ 2011년 7월 29일 채택 ▸ 2011년 7월 29일
▒ 교신저자 김성수,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599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Tel 02-880-8995 E-mail [email protected]
朝鮮時代 醫員의 변화와 自己意識 형성
김성수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Study about the formation of doctors' identity in the Joseon(朝鮮) Dynasty
Seongsu Kim
Seoul National University Institute of Humanities
In the latter half of the Joseon(朝鮮) Dynasty, the medical world was encountering a great change. It is said that a large stream between the first half and the latter half of the Joseon Dynasty was a qualitative transition from official relationships to private relationships, that is, from adjustments by governmental power to contractual relationships between individuals. Doctors who can be said to be the core of the medical world became to be left in severer competition.
The fact that the number of people engaged in medical practice increased to the extent that doctors had to compete with each other implies that not only demand for medical care was increasing but also that medical care was becoming social service that must be shared by all people in the Joseon Dynasty rather than by small numbers of men of power.
Anyway, it seems like that, in the competition that was becoming fiercer, they tried to establish their authority in diverse methods unlike before. As an authority to determine the social positions of doctors in the latter half of the Joseon Dynasty, the government was still occupying an important position, but doctors tried to show off their medical techniques utilizing excellent teachers or books. Meanwhile, they were making efforts to improve treating skills and thereby they were contributing to the development of medical techniques although they were sometimes criticised because of radical treatment or fierce drugs.
In this process, it seems like that some doctors made efforts to establish the social meaning of medicine and their identity. In the short dialogue with Hong Yangho(洪良浩), Cho Gwangil(趙光一) was presenting the image of doctors as active and subjective beings. Pointing out the fact that in the society where feudal position systems were still impregnable, even the Confucian scholars who could be considered as a leading group could not but be passive in front of the sovereign power, he emphasized the fact that doctors could practice treatment as they liked. In that he re-discovered the meaning of treating people's diseases as a professional intellectual and that he was forming a subjective sense that medical techniques are active self expression, it can be carefully said that Cho Gwangil was obtaining his identity as a doctor. In the society in the Joseon Dynasty where the position systems were still valid and the value system under Neo-confucianism(性理學) supporting the system was impregnable, this change can be thought to be small yet quite meaningful.
keywords : doctors' identity, Cho Gwangil(趙光一)
Ⅰ. 머리말 이글의 의도는 전문 지식인으로써의 醫師1)들이 갖 는 사회적 위상이 역사적으로 어떠하였으며, 그들은
1) 일반적으로 의사라고 하면 근대국가 성립 이후, 국가에 의한 자격인 의사면허제에 의해 통제되는 정식의 의사를 말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이하의 서술에서는 의원이라고 칭한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형성해가고 있었 는지에 대해서 탐구하고자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대 상으로 하는 시기는 朝鮮時代로, 이 시기는 중세적 身 分制가 철저히 지켜지는 사회라는 점이 먼저 지목되어 야 할 것이다. 조선의 신분제 구성과 운영에 대해서 兩 班, 中人, 常人, 賤民의 네 가지 신분이 일찍부터 형성 되어 운영되었다는 입장과 원칙적으로 양인과 천민의 두 가지에서 점차 네 가지 신분으로 분화, 고착되어 갔 다는 의견이 여전히 대립되어 있다.2)
이러한 속에서 의원들에 대한 연구는 주로 中人階 層, 혹은 技術官을 구성하는 하나의 독특한 신분이라 는 입장에서 주로 이해되어 왔다.3) 그러나 이전의 연 구는 결국 조선이라고 하는 사회를 움직여 나가는 원 칙인 법전에 근간하여, 그들의 위상을 파악하는 데에 집중되었다는 점에서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이해에는 충분하였지만, 사회적·문화적인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 웠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게다가 조선이라고 하 는 사회가 어찌되었건 모범으로 하였던 六典體制에 근 거한 중세적 규범을 끝까지 고수하고 있었다는 점과, 이미 다른 연구들에 의해서 지적되는 바와 같이 조선 후기의 많은 사회적 변화, 그리고 의학·의료계에서 있 어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전 의 연구들은 법전규정이 갖는 靜的인 모습으로 사회적 변동의 動的인 양태를 파악하는데 분명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조선전기와 후기의 의학계의 큰 흐름은 公的인 관계 에서 私的인 관계, 즉 국가권력에 의한 조정에서 개인 간의 계약적 관계로써의 의료의 질적 전환이 이루어졌 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이러한 차이는 일반인이 의원들을 바라보는 입장, 그리고 의원들 자 신이 자기를 인식하는 태도에 있어서 많은 변화를 수 반하였을 것임은 분명하다. 이는 한 특수집단을 대하 는 사람들의 인식 변화뿐만 아니라, 집단이 차지하고 있는 역사적 지위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동시에 그 속 에 딸린 사회적 변화의 의미를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2) 이의 대표적인 연구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李成茂. 朝鮮 初期兩班硏究. 일조각. 1980: 韓永愚. 朝鮮時代身分史硏究.
집문당. 1997
3)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韓永愚. 「朝鮮後期 中人에 대하여-哲宗朝 中人通淸資料를 중심으로」. 韓國學報
. 1986;45: 許在惠. 「18세기 醫官의 活動樣相」. 韓國史硏究
. 1990;71: 李圭根. 「朝鮮時代 醫療機構와 醫官-中央醫療機 構를 中心으로」. 東方學志. 1999;104
의원들의 사회적 위상과 정체성에 대한 연구가 갖는 의의는 바로 이와 같은 점에서 찾아질 것이다. 그럼에 도 이러한 주제로써의 연구가 진행되지 못하였음은 결 국 연구자들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만큼의 자료들 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에 기인하기도 한다. 바로 그 점이 이 글에서 주목하는 의원 정체성 성립의 역사적 의의임과 동시에 한계를 말하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 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주목할 만한 작은 변화들이 보이는데 그것은 지식인들의 문집 속에서 의원들의 傳 記가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변화는 의원이 갖고 있는 사회적 역할에 변화가 나타 나고 있음을 보여주며, 또한 의원들에 대한 타자의 시 선과 의원들 자신에 대한 변화된 인식이 등장할 수 있 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이글에서는 매우 적은 사례 이기는 하지만, 문집 등에서 등장하는 의원들의 전기 를 중심으로 醫員像의 변화와 자기의식의 형성에 대해 지적하는 것으로 작은 시도를 시작하고자 한다.
Ⅱ. 조선의 의료제도와 의원의 변화
1. 조선의 의료제도 운영
“의원은 많은 경우 官品에 있는 자의 子弟로부터 생기 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존중한다. 의원은 스스로 약을 짓지 않고 처방을 기록하여 병가에 주어서, 藥鋪에 가서 약을 짓도록 한다. 그러나 이는 거의 서울에 한정되며, 다른 각 도의 의원은 대개 약포를 겸업하여 점포 앞에 藥局의 표찰 을 달고 영업을 하며, 환자들은 이들을 높이 보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醫에 대한 특별한 대책을 지니지 않고 있 기 때문에 누구라도 醫者가 될 수 있다.”
4)19세기 후반 부산 일본인 거류지에 세워진 부산의 원에 근무했던 고이케 쇼지키(小池正直)의 견문기록 으로, 이것이 갖고 있는 의학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이 미 신동원의 연구에 의해서 매우 적절하게 지적된 바 있다. 신동원은 17세기 후반의 기록과의 비교를 통해 당시 조선 사회에서 나타나는 의학사적 맥락을 몇 가 지로 나누어 의미 부여를 하였다. 그 중의 하나는 “존 중받는 의원은 관품 있는 집안 출신이며, 그렇지 않은
4) 小池正直. 鷄林醫事. 1888. p.53-54.
의원은 약포를 운영하면서 약을 짓는 의원이었다.…의 원의 질을 관리할 국가적 차원의 대책이 없었다.”는 점 이다.5)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존중받거나, 혹 은 그렇지 못한 의원을 구분하는 계기가 바로 官品 있 는 집안 출신 여부였다는 점이다. 결국 의원이 갖는 권 위의 근간은 그가 갖고 있는 의학적 성취, 의술적 숙련 도와 같은 실제 의료행위와 관련된 것이 아닌 관품의 유무에 있었다. 즉 조선이라고 하는 중세적 사회 혹은 중앙집권적 국가에 관료로 등용되었는가의 여부에 있 었다는 점이다. 물론 관품의 유무는 결국, 醫科를 통과 했거나 혹은 뛰어난 의학, 의술로 국가에서 인정되었 다는 것을 의미하였으므로, 의원에 대한 국가 자격이 라고도 볼 수도 있지만 엄연히 근대국가의 의사면허제 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또한 의과를 통해 배출되는 인력이 당시 조선에서 요구되었던 의료 인력에 비해서 턱없이 낮은 수준이었 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국가 관료로써의 官醫의 의미 는 축소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조선의 관직체계는 행 정직과 기술직이 이원적으로 운영되는 체제였으며, 조 선의 국가 운영을 규정한 經國大典을 비롯한 법전에 정리된 관직 역시 기술직이기 보다는 대부분 행정직의 숫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래에서 기술하듯 조선의 중앙집권적 국가 의료기구를 운영하는 이면에 숨겨져 있는 기본적 한계였다. 그와 같은 한계에도 불 구하고 법전에 규정된 조선의 의료제도를 통해서, 제 도권에 속한 의원 즉 官醫들이 어떠한 업무를 하고 있 었는지는 명확하게 살펴볼 수 있다.
국가의 의료기구와 관의는 크게 중앙정부와 지방에 소속된 의원으로 양분되었다. 조선 초기 국가제도의 정비과정에서 중앙 의료기구의 명칭과 업무 등이 차례 로 확정되어 갔으며, 최종적으로 경국대전에서 三醫 司, 즉 內醫院․典醫監․惠民署와 함께 活人署를 중심으 로 하는 국가 의료기관으로 정리되었다. 삼의사 가운 데 제일 먼저 설치되었던 것이 전의감이었다. 전의감 은 太祖 원년 문무백관의 제도를 정할 때에 설치되었 다.6) 이때 전의감은 藥材의 조달과 王室 및 朝官의 진 료, 약재의 賜與, 약재의 재배와 채취, 외국약재의 구 입 및 판매, 의서편찬, 의학교육 그리고 取才 등 국가
5) 신동원. 「조선후기 의원의 존재 양태」. 한국과학사학회지.
2004;26-2. p.199.
6) 太祖實錄 권1, 太祖 원년 7월 丁未.
의 모든 의료사업을 관장하였다. 이후 世宗 25년 내의 원이 독립하면서 왕실에 관한 업무가 이전됨으로써, 전의감에서는 종친과 조관에 대한 의료만을 담당하게 되었다.7) 혜민서는 약을 典賣하고 일반 민의 구료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초기에는 惠民局으로 불렸으나, 世 祖 6년 濟生院과 합쳐지면서 기구가 확대되었다.8) 이 외에 진휼을 담당하면서 전염병이 발생하였을 때에 구 료 업무를 담당하는 활인서도 존재하고 있었다.9) 따라 서 이들 삼의사 및 활인서에 소속된 관의들의 업무는 왕실과 관료, 그리고 일반 민의 질병 치료, 약재의 조 달과 분배, 의서 편찬과 의학 교육, 전염병 방역 등 국 가의료에 관계된 대부분의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 중앙의 의료기구 외에도 지방에도 의원과 그에 소속된 官醫 내지 醫生들도 있었다. 전의감 설치에 이 어 태조 2년에 全羅道按廉使 金希善에 의해 界首官마 다 醫院을 설치하여 生徒를 교육하고 지방민을 치료하 도록 하자는 방안이 마련되었다.10) 端宗 즉위년에는 任元濬이 여러 도의 좌우 계수관에 醫局을 설치하여 약을 제조하여 팔도록 하자고 진언하였고,11) 다시 睿 宗 즉위년에는 李仁畦가 각 道마다 의원 세 곳을 설치 하여 은퇴한 醫員과 醫生 중에서 의술에 뛰어난 사람 을 골라서 의관을 삼도록 하자는 의견을 냈다.12) 이러 한 과정을 거쳐 경국대전에서는 지방의료를 담당하 는 관의로 醫學敎諭, 審藥 및 醫生 등을 규정하였다.
의학교유는 지방의료의 중심적 존재로서 각 도에 설치 된 의원에 1명씩 파견되어 의생교육과 함께 지방 관료 와 백성들의 치료를 담당하였다.13) 심약은 전의감과 혜민서 소속의 의관으로 각 도에 파견되어 약재의 채 취에 종사하였다. 한편 의생은 의학교유로부터 교육을 받는 한편 교유를 보좌하여 지방민의 질병치료를 직접 담당하였다.14)
7) 太祖實錄 권4, 太祖 2년 11월 己巳 및 世宗實錄 권100, 世宗 25년 6월 戊戌.
8) 世祖實錄 권38, 世祖 12년 正月 戊午.
9) 世宗實錄 권148, 地理志 漢城府. 활인서의 운영에 대해서는 李相協. 1996. 「朝鮮時代 東・西活人署에 대한 考察」. 鄕土 서울. 1996;56 참조.
10) 太祖實錄 권3, 太祖 2년 정월 乙亥.
11) 端宗實錄 권1, 端宗 즉위년 5월 丁巳.
12) 睿宗實錄 권2, 睿宗 즉위년 12월 壬辰.
13) 太宗實錄 권32, 太宗 16년 8월 己巳.
14) 世宗實錄 권44, 世宗 11년 4월 癸巳.
2. 官醫와 儒醫에서 業醫로
조선의 정비된 국가 의료기관에 속한 관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과정을 거쳤을까? 삼의사 가운데 전 의감과 혜민서에서는 의학생도라는 이름으로 각각 50 명, 30명을 교육하였다. 물론 이러한 의학생도는 중앙 관계 이외에도 지방에서도 행하여졌는데, 지방행정기 구의 크기에 따라 8명에서 14명까지의 의학생도들이 있었다. 이들을 기반으로 의과시험이 치러졌으며, 18 명을 뽑는 初試와 9명을 뽑는 覆試에 합격하면 의관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의과 장원은 종8품, 2등은 정9 품, 3등은 종9품을 받았으며 차차 승진해서 높은 품계 로 나아갔다.15)
의과는 의관이 되는 첫 관문만을 말한 것이었으며, 의과에 합격하였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바로 의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불안정한 농 업경제에 기반을 두고 있는 조선의 사회적 생산력은 국가적 지출을 감당하기에도 부족했기 때문에, 특히 하급관료에 속하는 의관들에게까지 충분한 경제적 혜 택이 돌아가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러다보니 의료 기구 에 속한 관직의 수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으며, 급여마 저 충실하게 지급되지 못하여 순환제로 근무하고 근무 한 기간만을 계산하여 급여를 주는 遞兒職으로 운영되 었다. 앞서 언급한 중앙의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 등 의 의료전문 기관과 함께, 議政府나 六曹 등 각사에 소 속된 의원, 그리고 지방에 설치된 의원에 딸린 醫學敎 諭․審藥을 다 합쳐봐야 몇 백 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현실은 그것의 유지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제껏 많은 연구들에 의해서 조선에서 마련된 의료 제도나 운영이 이전의 국가인 고려에 비해 의료의 대 상이 넓어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음이 지적되었다.
그럼에도 조선의 의료체제는 분명 근대적인 것과는 매 우 달랐다. 무엇보다 조선의 의료제도는 국왕, 양반관 료, 수도인 漢陽을 위주로 하고 있었다. 한양에 밀집된 인구에 대한 의료활동에 혜민서 하나로는 충분하지 않 았으며, 더구나 지방에는 한양보다 더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양을 비롯하여 각 지역에서도 의원 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 서 관의와 함께 조선 전기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바로 儒醫였다.
15) 이러한 과정에 대해서는 孫弘烈. 韓國中世의 醫療制度硏究.
수서원. 1988 참조할 것.
유의는 유학자들 가운데, 의학적 소양을 갖추고서 실제 의료활동에 나서는 인물들을 지칭하였다. 유의가 대거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의원의 부족이라는 필요성과 함께 조선 전기 세종대에 醫書習讀官을 설치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즉 “의술은 모름지기 陰陽五行 의 生克消息의 이치를 연구하여 아는 자라야 능히 병 을 진찰하고 약을 쓸 수 있습니다. 또 옛적 좋은 약처 방이 儒醫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16)는 논의로 마련된 의서습독관제도를 통해서, 세종대에는 醫方類聚와 같은 거질의 의서를 편찬할 수 있었다. 의서의 편찬에 참여할 정도로 유학자들은 의학에 깊은 이해를 갖게 되었고, 그것이 유의로 활약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의서습독관을 거쳐 유의의 모습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 례가 16세기 안동에 세거하였던 李庭檜(1542-1612) 라는 인물이다. 그는 의서습독관을 거치면서 얻은 의 학지식을 바탕으로 침술을 통해 질병 치료에 적극적으 로 나서고 있었다.17)동시에 안동지역의 의료에도 관 심을 가지고 있어서, 의학에 대해 유학자들과 토론하 기도 하고 자신이 직접 의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의서습독관 이외에도 자신의 필요에 의해 의학활동, 즉 의서를 편찬하거나 의료가 부족한 지방에서 의료활 동에 나서는 인물들도 있었다. 經驗方‧活人新方을 저술하였고 개인적으로 의료활동을 하였던 朴英 (1471-1540)이나, 의학박사가 되어 교육에 힘쓴 趙晟 (1492-1555), 黙齋日記의 저자로 알려진 李文楗 (1494-1567)도 성주지역에서 의료활동을 하고 있었 다. 이처럼 조선전기에는 국가 의료기구에 속한 의관 들과 함께 다양한 형태로 의료활동에 참여하는 유의들 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재정문제에 봉착 하면서 의서습독관이 폐지됨으로써, 이를 통해 유의로 진출하는 사례는 사라졌다.18)
이 이외에도 민간에서 의원이 되는 길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약재를 취급하는 상인들이 이에 해당할 것 이다. 조선에서는 의료를 담당한 관청에 필요한 약재 를 각 지역에서 貢納이라는 이름으로, 특산물인 약재 를 중앙에 납부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
16) 世宗實錄 권65, 世宗 16년 7월 庚子.
17) 이정회의 활동에 대해서는 김성수. 「16세기 鄕村醫療 實態와 士族의 대응」. 韓國史硏究. 2001;113을 참조하시오.
18) 硏經齋全集 外集, 권56, 筆記類, 蘭室譚叢, 「醫學習讀」, “國初 最重醫學 擇士族年少聰敏者 屬習讀官 能盡通諸書 授顯官 選生 員進士 爲習讀官敎授 計仕準圓點 許赴館試…故如北牕等諸賢 亦皆與此 今則技專於賤士 夫罕有習者”
후 代納의 형태인 防納으로 전환되는데, 그 가운데 방 납에서 약재를 매매하는 사람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16세기 중반 黙齋日記에 나타나는 약재상과 같은 존재는 이후 의원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큰 사람들이었 다.19)
어찌되었건 의원의 존재가 다양화되는 것은 조선후 기의 일인데, 里鄕見聞錄에 등장하는 20여명의 의 원들을 분석한 신동원의 연구에 의하면, 조선후기 의 원이 되는 방법으로 의과를 통한 관의의 의원양성, 의 서습독관의 교육, 의관의 家業化, 민간에서 의원이 되 는 길 등이 있었다고 한다.20) 그 중에서도 민간에서 의원이 되는 방법으로는 스승, 집안내력, 獨學 등이 손 꼽혔다. 이와 같은 방법을 통해서 점차 의원의 존재형 태는 관의나 유의에서 業醫로 전환되는데, 즉 상업적 으로 의학을 전문하는 사람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 다. 이들 업의는 다양한 방식으로 의학을 공부하였고, 조선후기 의료의 상업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업의가 등장하는 방식은 의학의 교육이 당시에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 고찰할 수 있는 방편이 되고, 동시에 의학의 권 위가 성립하는 방식에도 실마리를 줄 수 있다는 점에 서 교육의 형태를 중심으로 업의의 등장을 간단하게 검토해보도록 하자.
우선 첫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이 스승에 의한 교육이 다. 신동원이 민간의 의원을 분석하면서 사용한 이향 견문록은 의원들의 기록을 가장 잘 집약하고 있으므 로 이를 대상으로 고찰하면, 등장하는 20여명의 의원 들 가운데 대다수는 사실상의 독학 아니면 집안내력을 통해 의원이 된 경우였다. 그 중에서 적은 수이지만 스 승이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는 朴淳의 스승인 白光炫, 申老人에게 침술을 알려준 스승, 李同을 고용했었던 林國瑞21) 등이다.
박순은 백광현의 전기에 제자로만 부기된 경우이지 만, 분명 그가 의원활동을 함에 있어서 스승이었던 백 광현의 후광은 컸을 것이다. 스승을 적극적으로 기재 한 것은 신노인에게 침술을 알려주었던 인물로, 그는 일본에 가서 침술을 떨쳤을 정도의 사람이라고 높여지
19) 黙齋日記 1561년 8월 24일, “京來貿藥人來遺芙蓉香二條 出見問名 則宋長己云”
20) 신동원. 앞의 논문 참조. 이중에서 의서습독관은 16세기 후 반에 폐지가 되었으므로, 조선 후기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21) 임국서가 瘇醫였다는 사실은 靑莊館全書 권66, 「入燕記上」에 나온다.
고 있었다. 이동의 경우 의원인 임국서에게 고용되어 일하고 있었음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 분명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스승을 기록하는 것 은 조선 전기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었다. 그들 의 사제관계가 어떻게 맺게 되었는지, 스승에 의한 교 육과 훈련이 어떠하였는지 현재 전혀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스승이라고 하는 존재가 등장하고 서 술되는 데에는 특별한 의미부여, 즉 자신이 의원으로 서 갖는 권위와 정체성의 근거로써 활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이해된다.
둘째로 검토할 것은 독학으로 의원이 되는 경우였 다. 앞서 박순의 스승이었던 백광현의 경우는 그야말 로 독학을 한 사람이었다. 그는 원래 馬醫였는데, 자신 의 침술 경험이 많아지면서 침의로 이름을 날리게 된 사람이다. 그 외에도 景岳 張介賓22)의 의서를 읽고서 의학의 이치를 깨달아 명의가 되었다는 李喜福의 경우 도 있다.23) 백광현과 이희복의 사례와 같이 독학의 경 우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백광현이 마의에 서 출발하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가 의서를 읽고 의학을 공부하였을지 의문이다. 그에 비하면 이희복은 분명 식자층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독학이라고 하더라도, 임상적 경험과 의서 학습으로 크게 구분되 었을 것이다. 그리고 임상적 경험에 의지하는 편은 아 무래도 의서의 해독능력이 부족한 계층에 해당할 가능 성이 크며, 그에 반해 의서를 근거로 하는 경우 조선후 기 사회변동에 따른 신분제의 변동에서 주로 탈락한 양반층에 속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들 사이에서는 의 서를 해독할 수 있느냐를 두고서, 의원들 내부에도 서 열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가령 정조대에 활약했던 皮載吉은 아버지가 治腫醫 이기는 했지만, 부친이 일찍 죽는 바람에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글을 전혀 읽지 못했으며 그저 아는 것이 약재들을 다려서 고약 을 만드는 것뿐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그가 항 간에서 의원 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의원의 대열에는 합류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물론 그의 고약이 효험이 있어서 결국에 內鍼醫가 되었고, 나아가 羅州監牧官이 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24) 피재길의 사례에서
22) 張介賓(1563-1640)은 明대의 유명한 의사로, 그는 溫補學說을 주창하였으며 저서로 類經, 景岳全書 質疑錄 등을 남겼다.
23) 里鄕見聞錄 권9, 「李同樞喜福」(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역.
글항아리. 2008. p.640)
24) 耳溪集 권18, 傳, 「皮載吉小傳」, “皮載吉者 醫家子也 其父
보듯이, 의서를 읽지 못하는 의원은 더 낮은 등급으로 여겨졌음이 분명하다.
세 번째는 가문내력으로, 여기서는 대대로 의관을 지낸 중인 집안을 제외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조선후 기에는 중인계층에 의해 기술관 직위가 세습화되는 경 향을 띠고 있으므로, 의관을 내는 집안의 출현은 당연 한 경향이기 때문이다. 그와 다르게 조선후기 유학자 들 가운데 의학을 전문하고, 나아가 집안 대대로 전승 하는 사례도 등장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조선후 기 과거제 운영의 문제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申維翰(1681∼1752)은 대대로 관직을 지내거나 유력 한 가문이 아니면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하는 것이 점차로 어려워지면서, 이에 낙담한 사람들이 종종 賣 藥에 종사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25)
가령 南公轍(1760-1840)이 언급한 의원 許嶷은 본 래 유학자였음에도 과거를 포기하고, 의학을 전업한 인물이었다. 허억이 과거를 포기한 이유는 알 수 없으 나, 앞서 신유한이 언급한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鄭來僑(1681-1759)가 언급한 金萬㝡의 경우, 집안이 대대로 유학자였으나 집안이 쇠락하면서 조부 와 부친이 모두 의학을 전업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 의 조부와 부친이 어떤 의원이었는지 명확하지 않지 만, 그가 어려서 가난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뛰어난 의 원이 아니었던 듯하다.26)
유학자로써 의학을 전업하는 것이 단순히 삶의 방편 을 위한 소극적인 태도만은 아니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 申大羽(1735-1809)가 기록을 남긴 蘇泰元이라 는 의원이다. 소태원은 7대조와 6대조가 大司諫을 지 냈을 정도로 현달한 가문이었지만, 고조인 永福이 禧 陵參奉을 지낸 이후 집안이 출사를 하지 않았다. 그 영 향으로 가세가 기울었는지, 소태원 역시 어려서부터 의학을 전공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조카뻘인 洙悅을 후사로 삼으면서, 의학을 가르쳤다.
業治瘇 善合藥 旣歿 載吉尙幼 未及傳父術 其母以聞見 敎諸方 載吉未嘗讀醫書 但知聚材煎膏已 一切瘡瘍 賣以自給 行于閭 巷間 不敢齒醫列”
25) 靑泉集 권6, 雜著, 「題宜閒錄」, “我朝三百年來 文武之士 繇科 第而進者 非世祿華閥 百不能一致崇顯 所以悲歌落拓之徒 往往 隱於賣藥”
26) 浣巖集 권4, 墓文, 「金澤甫(萬㝡)墓誌銘」, “金君澤甫名萬㝡 系出湖南之光州 家舊衣纓族 而後世淪微 其上祖與父業醫 君少 孤而貧 嗣爲醫學”
蘇泰元 은 어려서부터 의학을 직업으로 삼았는데, 그의 처방이 매우 기묘하였다. 일찍이 洙悅에게 말하기를 “의술 이 비록 작은 道이지만, 그것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은 至極 하다. 神明의 일에도 참여할 수 있으며 民生을 구제할 수도 있다. 내가 지금 네게 의학을 전수하는데, (의학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식에게 자애로운 것과 그 뜻이 같다.
그러니 사람을 貴賤으로 나누지 않도록 조심하고, 네가 의술을 베푸는 데에 나태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하였 다. 그런 까닭에 비록 천한 노예라고 할지라도 그에게 부탁 을 하면 가지 않은 적이 없었고, 반드시 병의 증상을 살피 고 처방을 고찰하는데 마음을 다하였다. 이에 병자 중에 그를 만나 치료를 받고서 특별한 효과를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27)소태원의 경우에는 자신이 의학을 전업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자로 삼은 자식에게도 의학을 가르치고 있 었다. 이는 의원에 대한 사대부들의 인식이 여전히 비 판적이었고, 조선후기 개혁적인 학자로 이름이 높은 丁若鏞 역시도 자신의 아들이 의원을 하는 것에 대해 질책 하였던 것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이와 같이 조선후기로 가면서 다양하게 학습한 업의 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만의 임상경험을 통해 명성을 높여가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스승에게 배우기도 하고, 유명한 의서를 바탕으로 자신의 의학 지식을 연마해가고 있었다. 단언하기 어렵지만, 의원 으로서 갖는 권위의 배경이 의관을 지냈느냐의 여부가 여전히 중요했겠지만, 한편 누구에게 배웠는지, 그리 고 어떠한 의서를 공부하였는지도 중요한 요소로 부각 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선후기 관료등용의 경직화에 따라 탈락한 양반층이 의학으로 전업하는 것을 적극적 으로 실행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은 業醫 증가의 다른 배경이 되었다.
27) 宛丘遺集 권5, 墓文一, 「蘇君墓銘」, “君少業醫 其方甚奇 嘗語 子洙悅曰醫之術雖小道 其造極也 可以參神明 可以濟民生 吾今 授女以學 然孝於親而慈於子 其情則同 愼毋以人貴賤 勤慢女 所操之術 故雖下賤儓隷 有請君未嘗不往 往必察九候審方劑 必盡其心 病之得君而治者 無不有異效焉”
Ⅲ. 조선후기 의학의 상업화
1. 의원의 증가와 경쟁
다양한 형태로 업의가 증가하면서, 특히 도성인 한 양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 私設 의원은 급속하게 팽창 하고 있었다. 1914년 官報의 기록을 토대로 분석한 신동원의 연구에 따르면, 사대문 안에는 인구 1만 명 당 의원이 15.92명에 달하는 수준이었다.28) 이와 같 은 수준은 이미 조선후기의 기록들 속에서도 종종 언 급되기도 하였다. 1750년 陵幸에서 돌아오는 길에 英 祖가 ‘嘗百草’ ‘濟衆’ 등의 휘황찬란한 간판을 내건 藥 契들이 길가에 널려있던 것을 본 것이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29)
성리학적 경제관에 근간한 “務本抑末”, 즉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천시하였던 조선에서 이러한 현상은 그리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조선 후기 인구 가 집중되는 도성 내에 많은 약국이 개설되는 것을 두 고 왕이었던 영조는 그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이 해하고 있었다. 영조는 “성안의 사람이 어찌 반드시 농 사를 지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도성의 확대와 인 구의 밀집에 따른 상업적 의원의 증가가 고래로 이해 되는 풍속이 퇴패하여 세속이 末業을 쫓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보았다.30)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하더라 도, 약국이 증가하면서 그들 사이에 경쟁은 피할 수 없 는 일이었다. 영조는 이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약국의 근원을 물을 것 같으면, 인구가 날로 늘어나 살 아갈 방편이 지극히 어려운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불쌍하 나 또한 분수를 지키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文도 아니고 武 도 아니며, 士도 아니고 常民도 아니면서, 京中에서 遊衣 遊食 하면서 편안히 앉아서 살고자 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사치가 날로 심하고, 그 기교는 점점 심하여져서 서로 이기 기만을 힘쓴다.
31)28) 신동원. 앞의 논문. p.204.
29) 承政院日記 冊1059, 英祖 26年 8月 21日(辛卯)
30) 承政院日記 冊1110, 英祖 30年 8月 10日(丁巳), “上曰 近來 百姓之生理益艱矣 動駕之時 猶惜一日之所售 至於設店此等處 亦可見生理之日艱矣 都城內藥局牌 處處有之 古何嘗然哉 (李) 重祚曰 世俗漸漸趨末 故然也 上曰 不然 城中之民 何必農作耶”
31) 承政院日記 冊1230, 英祖 40年 5月 20日(辛未), “若問藥局 之本 生齒日盛 生道極艱之致 其雖矜惻 亦不守分之致 何則 非文非武 非士非常 京中遊衣遊食之類 其欲坐而食之者 而其
영조가 우려하는 문제는 약국을 개설하는 사람들이 文․武, 士․常이라고 하는 국가에서 파악하는 身分과 國 役體制에 소속되지 않았다는 점과 함께 그들에 의해서 사치가 심하여지고 또한 약국의 개설이 많아짐으로 인 하여 경쟁이 치열해졌음이었다. 경쟁의 심화는 저질 약재 유통, 가짜 약의 판매 등의 사회적 문제도 유발하 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약국에서 간판을 내걸고 경 쟁적으로 영업하는 것에 대해서 정부에서는 무척이나 신경을 쓰고 있었다. 영조 40년에는 간판을 함부로 설 치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조치하였고, 다음 해에는 다 시 허락하기도 하였지만,32) 결국 약국의 揭板을 다시 금지하였다.33) 어떠한 방식이든 약방의 범람을 규제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약국의 범람에 따른 과다한 선전과 의원들 사이의 경쟁은 결국 의학의 상업화를 의미하였고, 위에서 언 급된 역기능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의학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 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부정적인 측면만이 주로 언급 되었으며, 그에 대한 비판은 의원의 자질 문제로 비화 되고 있었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지식인 중의 한 사람 인 星湖 李瀷(1681-1763)은 과거의 의원과 현재의 의원을 두고서 다음과 같이 비교하고 있었다.
聖人 이 醫學을 창안하고 藥材의 성질을 알아내어 일찍 죽는 것을 구제했으니 의학이 백성을 살리는 데 공이 큰 것이다. 그러므로 옛 사람은 일부러 의원이 되기를 원하는 일도 있었으나 지금은 의술에 종사하는 자가 일찍 죽는 것을 구제하는 것에 마음을 쓰지 않고 오로지 돈벌이 할 기회만 엿본다.
34)보통의 識者들이 자신들의 현실을 비판할 때, 대체 로 과거 성인이 살던 시기나 어느 정도의 治道가 이루 어지고 있었던 시기를 빗대어서 현재는 그렇지 못한 시기라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익의 의원들에 대한 비판은 크게 별다른 것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 럼에도 그가 지적하고 있듯이 당시의 의원들에게 있어 서 致富의 수단으로 되어갔음은, 적어도 조선후기 늘 어나고 있는 사설 의원과 약국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 었던 상업적 경쟁관계의 한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
奢日甚 其巧轉甚 互相務勝”
32) 承政院日記 冊1240, 英祖 41年 閏2月 18日(癸亥) 33) 承政院日記 冊1300, 英祖 46年 正月 26日(甲辰) 34) 星湖僿說, 권9, 人事門, 「庸醫殺人」
의원과 약국의 상업화는 조선후기 진행되던 상업의 발전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 표적인 것이 都庫의 발달인데, 특히 약국에서의 買占 賣惜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산지에서 의 약재 가격이 상승하고 있었고, 그에 따른 부정한 약 재의 유통이 자행되고 있었다.35) 결국 의약과 관련된 상업화는 의원과 약재 모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 지만, 이익의 비판은 의원의 자질 문제에만 국한된 측 면이 있었다.
이처럼 조선후기 약국과 의원의 운영은 단순히 ‘務 本抑末’이라는 관점에 의해서 통제되지 못할 정도로 이미 활성화 되었고, 정부에서도 의학을 통한 영리행 위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 그 럼에도 당시에는 약국만이 주로 경제활동으로써 파악 되었는데, 실제로 약국의 경우에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여 문제를 해결하여도 충분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원의 경우에는 차원이 달라서 자질의 문제라 할 수 있는 人性과 함께 의학적 능력에 대해서도 판가 름이 필요하였다.
2. 의원의 資質論과‘醫有三品’
조선시대 국가에서 의원에게 특별한 자격을 부여한 적은 없었다. 이는 조선이라는 국가의 의료장악력이 취약하다는 것을 의미하였는데, 다른 한편으로 병자들 에게 있어서는 의원을 선택함에 있어서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널리 회자되었던 말이 바 로, “醫不三世 不服其藥”라는 명제였다. 이를 두고서 李好閔(1553-1634)은 매우 적절한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호민이 말하는 것이 실제 벌어진 일인지 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당시 사람들의 의원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수는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가 남긴 “老醫는 맹랑하게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의원이 있었는데, 그의 의술이 과연 정밀한지 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나이가 많은 의원이었다.
환자가 있는 집에서 병 때문에 와서 문의하니, 그 의원 은 전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예사롭게 약을 권하였다.
그런데 약을 살펴보니, 세속의 진부한 처방으로 다른
35) 조선 후기 의원의 상업화 및 약재유통에서 발생했던 사회문제와 해결을 위한 논의에 대해서는 김성수. 「朝鮮後期 私的 醫療의 성장과 醫業에 대한 인식 전환」. 醫史學. 2009;18-1을 참조 할 것.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사람은 불쾌한 채 돌아 가서는 화를 내며 다른 사람에게 말하였고, 다른 의원 을 구해보라는 권고를 듣게 되었다. 이후 그 사람은 시 장에서 어떤 의원이 좌판을 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의원은 깔끔한 용모와 뛰어난 언변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의 좌판 앞에 張仲景의 金櫃玉函과 같은 의서와 다양한 약재들을 늘어놓고 장사를 하는 중이었다. 그 의원에게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니, 의원은 전의 처 방이 잘못되었으며 처방을 바꾸지 않으면 3일 이내에 죽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의원의 의론이 陰陽 五行의 이치나 劉完素 張從正 등의 의학이론까지 미치 지 않는바가 없어서 매우 신뢰가 되었다. 이에 환자의 집에서는 良醫를 만났다고 하여, 이제 병을 고쳤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약을 두 번 세 번 먹어도 오히려 병은 심해질 뿐이었다.
이호민은 그에게 老醫와 시장의 의원과의 차이점을 하나하나 짚어준다. 노의가 놀라지 않았다는 것은 그 가 경험이 많은 노련한 의원이었다는 것을 말하며, 그 의 처방이 진부한 것 같지만 거기에는 치료의 순서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시장의 의원은 나 이든 의원과는 정반대에 있는 사람이다. 즉 의서를 보 아도 임상의 병에 맞추어 파악할 수 없으며 약의 사용 도 마찬가지여서, 결국 그가 보여준 여러 의서들과 현 란한 말솜씨는 자신의 부족한 의술을 속이기 위한 방 편일 뿐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가 처방을 바꾸지 않 으면 3일안에 죽을 것이라고 하는 말은, 남을 헐뜯고 자신을 과장하는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 다.36)
이호민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의원들이 갖고 있는 의 학지식과 기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그 정보를 알기 는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예로부터 회자되었던 병이 발생하기 전에 未然에 치료하는 것이 가장 좋은 치료 라는 인식은 예방의학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그 치료가 과연 예방치료로써 효과적인 것 이었는지 판단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와 같은 담론은 유지되고 있었으며, 權榘 (1672-1749)와 같은 사람은 이를 두고 ‘醫有三品’이 라고 개괄하고 있었다. 권구에 따르면 上醫는 미연에 방비하는 것이고, 中醫는 병에 걸린 환자를 그나마 잘 치료하는 것이며, 下醫는 저급한 기술로 망령되이 치 료하여 환자에게 도리어 害를 입히는 것이었다.37)
36) 五峯先生集 권7, 論, 「老醫不孟浪殺人論」
그런데 각각의 치료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하 지 않다는 점에서, 치료의 적절성 여부는 과정이 아니 라 오로지 치료의 성과로서 판단될 수밖에 없는 성격 이 있었다. 게다가 조선 후기, 특히 도성의 많은 의원 과 약국들이 경쟁하면서는 이 상황은 더욱 격화될 소 지가 컸다. 즉 경쟁의 양상은 치료 효과를 보다 빠르고 분명하게 하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의원들은 효과가 증명되지 않은 처방들을 사용하거나 의서에서 통용되 는 정도를 넘어서는 과도한 치료를 하는 등의 부작용 이 나타났다.
鄭宗魯(1738-1816)는 과거의 名醫들이 치료의 핵 심으로 삼았던 것은 元氣를 북돋움으로써 客氣와 邪氣 를 몰아내는 것뿐으로, 병이 나을 뿐만 아니라 몸도 온 전할 수 있었는데, 지금의 의원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38)
지금의 의원들의 일에 이르게 되면 (옛날의 의원들처 럼) 그렇지 않아, 옛 처방은 버리고 새로운 방법을 세울 뿐만 아니라, 鍼灸도 분수에 넘치고 湯液도 峻烈한 정도를 지나쳐서 잠시 병의 상태가 좋아지기를 힘쓸 뿐, 근본의 계책은 돌아보지 않는다. (효과를 보면) 점차로 스스로 기 뻐하고, 다른 사람들도 효과가 빠름을 좋아하여, 扁鵲과 倉公 이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한다.
39)정종로는 의원들이 효과가 불분명한 처방을 사용하 고, 침구와 탕액이 정도를 넘어서 과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는 그러한 사례 로써 특정 의원들인 郭善源과 任禎같은 부류가 그와 같은 인물이라고 비판하였는데, 현재 기록에서 이들에 대하여 확인할 수 없다. 대신 그가 자세하게 언급한 李 生과 黃生의 사례를 통해서 그 실태를 보면 다음과 같다.
李生 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어디 사람인지는 알 수 없 다. 하루는 바람처럼 나타나서, 스스로 의술에 능하다고 말하였다. 처음부터 질병의 輕重은 묻지도 않고 침을 놓는 데, 醫經에서 1-2푼이라고 했으면 번번이 6-7푼을 놓았으
37) 屛谷集 권6, 雜著, 「醫說」, “醫有三品 上焉者之於醫也 禁於 將然者也 中焉者之於醫也 及其已然而治之則已緩矣 其下者 操術固已疎矣 而又用智妄施 則其不殺人者鮮矣”
38) 立齋遺稿 권16, 說, 「醫說」
39) 立齋遺稿 권16, 說, 「醫說」, “至於今世之醫則不然 背棄古方 刱立新奇 鍼焫踰越分數 湯液過加峻利 務爲一時之快 而不顧 本根之計 沾沾然自以爲喜 而人且悅其近效 以爲扁倉復起”
며, 3-4푼이라고 한 것은 번번이 8-9푼이 넘었다. 뜸을 하 는 것도 의경에서 7-14장이라고 한 것을 번번이 42-49장을 넘겼으며, 21-28장이면 56-63장을 넘겼다. 그가 침을 놓고 뜸을 하는 穴의 자리가 맞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積聚 가 흩어지고, 울체된 기운이 흐르게 되어서는 장님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걷게 되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신기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혹자가 말하 기를 사람의 脈絡은 관계되는 바가 매우 미묘하여 비록 효과가 있는 듯하지만, 후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생에게서 침을 맞고 뜸을 받은 사람들이 잇달아 죽으면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게 되었다. 또 黃生이 라는 자가 있어서, 스스로 處士라고 칭하였는데, 그의 의술 이 이생과 비슷하였다. 그가 경솔하게 침을 놓고, 뜸을 하 는 것이 이생보다 심하였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그에게 가는 정도가 이생보다도 심하였다.…옛날의 의원들이 병 을 치료할 때에는 반드시 眞元의 기운을 보양하고서 바깥 의 邪氣를 공격하였다. 빠른 효과에 급급해하지 않고, 병자 로 하여금 병이 저절로 나가고 기운이 온전해져서 그 원래 의 수명을 마치도록 하였다. 지금의 의원들이 병을 치료하 는 것은 元氣의 虛實을 살피지 않고 오로지 공격하는 것을 能事 로 생각하여, 눈앞의 즐거움만을 구하고 장래의 근심 을 고려하지 않는다. 병자들이 비록 일시적으로 효과를 볼 수 있지만, 원기가 이미 사그라져 죽음이 멀지 않으니 어찌 신중하지 않겠는가?
40)이생과 황생과 같은 의원들이 과도하게 침을 놓고 뜸을 하였던 것은 결국 앞서 언급된 의원들 사이에서 의 경쟁이 치열해짐으로 인하여 보다 분명한 효과를 보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던 사정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병자들은 의원들을 선택하는데 있 어서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까닭에 권구는 의원에게는 세 가지 등급이 있다고 말한 이후에 의원의 선택에 신중하라고 당부하고 있었다. 의원들의 자격에
40) 立齋遺稿 권16, 說, 「醫說」, “有李生者 不詳族里 而一日飄然 而至 自言能醫 初不問病之輕重 鍼人經一二分者 輒過六七分 三四分者 輒過八九分 焫人經一二七壯者 輒過六七七壯 三四 七壯者 輒過八九七壯 其下穴之當否 未知其果何如 而積者潰 聚者散 滯者行淹者流 盲者視跛者行 遠近人士 莫不神且異之 或曰 人之脈絡 關係甚微 雖似有近效 後必有悔 旣而受鍼焫於 李生者 相繼死 無復存者 又有黃生者自稱處士 而其術似李生 其輕慢鍼焫 尤不及李生之愼 而人奔趍之 過李生焉…古之醫師 之治病也 必養其眞元 攻其外邪 不急近功 而使病者病去而氣完 以終其天年 今之醫師之治病也 不計元氣之虛實 惟以攻伐爲能 只求目前之快 不圖將來之憂 病者雖得一時之效 其元氣已索然 而死亡無日 豈不可愼也哉”
대한 국가적, 사회적 규정이나 제한들이 존재하지 않 는 이상, 결국 환자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문제였다.
자기 몸을 아끼고 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사람은 의원을 선택하는데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개 사람들의 지혜라는 것이 이미 드러난 것은 알 수 있지만, 미래에 나타날 것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반드시 신기하고 마음을 즐겁게 할 만한 자취가 분명하게 드러나서 볼 수 있게 된 이후에야 비로소 믿는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선택하는 것은 항상 드러난 것에 있지, 드러나지 않은 것에 있지 않다.
41)그러나 그의 의견에 따른다고 해서 세 가지 등급의 의원 가운데 上醫를 알아내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다만 치료의 성공사례라고 하더라도 그 환자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오랜 시간을 두고 확인하고, 그에 대한 신 뢰가 쌓인 이후에야 의원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醫 有三品’은 黃帝內經素問에서 언급한 “성인은 이미 병이든 것을 치료하지 않고, 병이 들기 전에 치료한 다.”42)를 다시 확인한 것에 불과하였다.
상의, 중의, 하의가 混在하는 한, 의원에 대한 사회 적 인식은 기본적으로 제고되기 어려웠다. 단언하기 어렵지만 상의보다는 중의가 많을 터이며, 중의보다는 하의가 많았을 것인데, 아무래도 당시의 사람들이 접 하기 쉬운 의원은 주로 하의였을 것이다. 게다가 상업 적 의학 시장의 급격한 성장에 따른 의원의 이익추구 경향과 맞물려, 일반인들은 의원들에게 부정적인 시선 을 보내고 있었다. 이는 의원들 간의 개별적인 문제이 기도 했지만, 근대국가에서 의사자격을 분명하게 규정 하고 철저하게 감독하는 것과 같은 국가적 대안이 마 련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 그와 같은 현상을 부추 기고 있었다.
Ⅳ. 조선후기 의원의 자기의식 등장
1. 의원에 대한 타자의 시선
41) 屛谷集 권6, 雜著, 「醫說」, “知愛身而欲求病之治者 可不審於 所擇哉 然凡人之智 能見已然 不能見將然 必其神奇可喜之跡 有爀然可觀者 然後方信之 故其所取者 常在彼而不在此也”
42) 黃帝內經素問 「四氣調神大論」, “聖人 不治已病 治未病”
조선시대 의원들은 전문 지식인으로써 자신들을 어 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이는 이글의 전개에 있어서 규명하여야 할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의원들이 자신에 대한 글을 거의 남겨 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고찰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그렇지 만 의원들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각을 통해서 논의를 시작해보자.
앞서 조선 후기 많은 수의 의원들이 존재하고 있었 고, 그들 사이에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었음을 말하였 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른바 명의라고 소문이 날수 록 경쟁과는 무관하게 의원들의 태도가 고압적으로 변 하는 것도 일반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러한 세태를 丁 若鏞(1762-1836)은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었다.
醫書 란 매우 어려워 외우기 어렵다. 歌訣이나 帖訣은 몇 가지씩 외우면서도, 痘疹의 한 가지 증세를 논함에 있어 서는 그 조목을 분석하고 변형하여 方書가 매우 많아졌다.
그러므로 지금의 의원들이 다 외울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어째서 병을 앓는 집에 가면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잘난 체를 하며, 종이를 펴서 붓을 들고 손 가는 대로 금방 써 내려가는가? 또한 前胡, 柴胡, 羌活, 獨活 등을 한번 보고는 휘갈겨 써서 한 글자도 고치지 않으며, 큼직한 글씨로 필력 도 힘차게 처방문을 땅에 던지면서 곁눈질로 살핀다. 그러 면 주인은 공손하게 주워 조심스레 보다가 한 가지를 지적 하며 可否를 논하면 의원은 번번이 성을 내며 말하기를
“그것이 염려스러우면 쓰지 말라. 나는 고치든 말든 모르 겠다.”라고 한다. 아! 자기가 聖人이 아닌데 어찌 이처럼 자존할 수 있는가?
43)뻣뻣한 태도로 일관하는 의원의 모습은 그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병가에서 느끼는 일반적인 감정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그는 분명 세간에 명의로 이름난 의원 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의원의 태도는 환자에게 恩愛로운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전통적인 잣대를 댄다면, 용납되지 못할 처사이기는 하다. 그렇기 때문 에 이향견문록에서 李益成을 칭찬하면서, 그가 “기 개와 절조가 있어서, 비록 가난하고 賤하여 보잘 것 없
43) 麻科會通, 吾見, 「俗醫」, “醫書最難 記誦歌訣 帖括能誦 幾件 就論 痘疹一症 其條柝變 異方書甚夥 今醫能盡誦乎 何乃每至 病家 擢頸逞顏 伸紙索筆 隨手立寫 前胡 柴胡 羌活 獨活 一瞥 揮洒 不復點改 大戈長脚 筆力豪健 颺紙落地 睨而視之 其主 人恭執謹覽 或摘其一味 議其當否 醫便艴然曰 慮斯勿 用 我不 知改 嗟乎 伊非聖人 安得自尊如是”
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힘을 다하여 치료하였으며, 예 절로써 대하지 않으면 비록 높은 벼슬에 있는 귀한 사 람이라도 그를 굽히게 하지 못하였다.”44)라고 말하였 을 것이다.
정약용의 비판은 개인 의원에 대한 심성적인 차원의 문제였을 뿐, 사회적 존재로써의 의원에 대해서 의견 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의원을 보는 관점에서 조금씩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조선 사회의 운영규칙인 신분제에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나 아가 직업의 관점에서 접근해 나감으로써 가능하였다.
가령 宋明欽(1705-1768)이 處世의 道理를 지킨다면 약국을 경영하는 것은 生理를 도모함과 함께 濟人의 방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나, 李瀷의 제자인 尹愭(1741-1826)가 사대부들이 몰래 이익을 도모하 기 보다는 농사를 짓거나 혹은 약을 파는 편이 낫다고 말하였던 것이 그 예이다.45) 이처럼 의원들에 대해서 일반인 혹은 지식인들이 점차로 우호적인 인식을 가지 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의원들 내부에 있어서 자신들 에 대한 자각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도 사 실이다.
南公轍(1760-1840)에 따르면, “세상 사람들이 의 원을 부끄럽게 여기고, 의원들도 그것을 근심으로 여 겼다”고 한다.46) 그 원인을 두고서 남공철은 의학의 필요성이 유학의 경전에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지, 실제로 필요하지 않아서는 아니라고 분석하고 있다.
조선을 움직이는 정치적 이념인 유학, 성리학에서 의 학의 중요성을 명확하게 하지 않았던 것이 주요 원인 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神農 씨가 百草를 맛본 이후로, 軒轅과 岐伯,
47)兪跗 와
48)扁鵲 의 처방이 경전에 나타나지 않았다. 유학자들은 이러한 까닭에 성인이 의약을 긴요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의심하지만, 그렇다고 또한 일찍이 폐지한 적은 없었다 .……성인이 의약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44) 里鄕見聞錄 권9, 「李醫益成」, p.623.
45) 김성수. 「朝鮮後期 私的 醫療의 성장과 醫業에 대한 인식 전환」.
醫史學. 2009;18-1. p.64-65.
46) 金陵集 권10, 書, 「與姜生師伯論醫藥書」, “然世之恥醫 醫者 之病也”
47) 헌원과 기백은 동아시아 전통의학의 시초가 되는 인물로, 한의 학의 경전이라고 할 黃帝內經은 이들의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48) 兪跗는 중국 고대의 의사로, 史記 扁鵲倉公列傳에는 兪跗가 복부를 절개하여 질병을 치료한 기술이 기록되어 있다.
성인께서는 그 운명을 알았던 까닭에 경전에서 특별히 상 세하게 말하지 않았던 것뿐이다.(즉 성인들은 자신의 운명 을 알았기 때문에 의약에 기대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세간에 의학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무엇을 수치스럽게 여 기겠는가?
49)이것은 남공철이 의원인 姜師伯에게 보낸 편지인데, 그에 따르면 강사백은 유학자이면서도 의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남공철이 우려한 것처럼, 강사백 역시 의학을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는 떳떳하게 인 식하고 있지는 못하였던 모양이다. 남공철은 그러한 강사백에게, “그대가 의학을 부끄럽게 여겨서, 그 치료 법을 숨기는 것은 仁者의 마음이 아니다”라고 말하였 다.50) 국가에서 의학을 仁政의 실현이라고 인식하여 중요하게 여겼던 조선전기 위정자들의 인식을 개인적 차원에 적용시킨 표현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사회는 특정 정파나 가문이 세력을 장악하는 상황이 전개됨으로써, 양반계층 내에서도 벌 열 가문과 그렇지 못한 가문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상 황이었다. 이는 조선이 신분제적으로 운영되는 사회였 다는 점에, 조선 후기만의 특수 상황이 더해진 것이었 다. 특별히 의원이라고 하여, 그와 같은 사회적 상황을 비켜갈 수는 없었다. 兪漢雋(1732-1811)은 전염병을 치료하는 의원 洪翼㬅의 전기를 지으면서, 시대상과 연관시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옛날에는 사람을 평가할 때에는 오직 그 사람의 행동거 지만을 보았으며, 사람을 등용할 때에는 그 사람의 재주만 을 보았다. 世敎가 쇠퇴하자 인물의 경중을 가리는 것이 그 사람의 행동과 재주에 있지 않고 집안에 있게 되었다.
집안이 높으면, 비록 사람이 용렬하고 마음이 곧지 못하며 어리석고 무식해도, 과장되게 칭찬하고 잘난 체하면서 거 들먹거린다. 집안이 낮으면, 그 사람의 기개와 의지가 뛰어 나고 훌륭하며 성품이 강개하지만, 배척하여 어두운 곳으 로 내몰린다. 어찌 잘못된 도리가 아니겠는가?
51)49) 金陵集 권10, 書, 「與姜生師伯論醫藥書」, “盖自神農氏嘗百 草以後 軒歧兪扁之方 不見於經 儒者以是疑聖人不汲汲於醫藥 然亦未嘗廢之 周禮醫師掌醫之政 令聚毒藥以共醫事 歲終則稽 其醫事 聖人未嘗不重醫藥 而惟其知命 故經特不詳言之爾 世 之學醫者 何所恥乎”
50) 金陵集 권10, 書, 「與姜生師伯論醫藥書」, “顧足下恥其術而 秘其方 恐非仁者之心也”
51) 自著 권14, 傳, 「㾐醫洪翼㬅傳 壬午」, “古者觀人惟其行 取人 惟其能 世敎衰 輕重人物 不在行能 在門地 門地高 雖闒茸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