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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tion of Namhansanseong Government Office in the Late Chos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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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후기 남한산성 관아건축의 변천

김 기 덕

*1)

(중부대학교 강사, 공학박사)

주제어 : 남한산성, 읍치, 관아, 행궁, 이아, 수어영, 유수부

1. 서론

1-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남한산성은 유사시에 국왕의 피난처로 조성 된 산성취락이자 군사도시이다. 일반적인 조선 시대 군현(郡縣)의 행정중심지, 즉 읍치(邑治) 는 오랜 시간에 걸쳐 취락이 형성되고 통치시 설인 관아가 들어서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그 러나 남한산성 읍치의 조성 배경은 군사적이고 피난적인 목적으로 조성된 신도시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읍성을 축조한 경우에는 읍성 안이 곧 읍치가 되는데, 남한산성과 같이 산성 에 읍치를 두는 경우1)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 다. 그러나 지방행정의 중심지인 읍치로 조성 되었다면 여타의 지방 읍치와 동일한 시설과 구성체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조선후기 남한산성은 산성에 입지한 읍치로 서 행궁과 수어영(守禦營)이라는 군영이 들어

* 교신저자, 이메일: [email protected]

이 논문은 남한산성 학술세미나(2010년)에서 발표하였던

「남한산성 읍치와 관아시설 고찰」, 한국건축역사학회 학술대회(2011년)에서 발표하였던「남한산성 성곽시설과 관아의 지적변화(연구보고서-남한산성 지적변천사 연 구)」라는 2편의 논고를 종합하여 정리한 것이다.

1) 대표적인 읍치로는 평안도 영변대도호부의 철옹성(영 변산성)과 17세기 중엽∼19세기 초반까지 경상도 칠곡 도호부의 읍치였던 가산산성을 들 수 있다.

서 있고, 또한 유수부(留守府)라는 특별 행정 구역으로 여타의 일반 군현과는 차별되는 읍치 였다. 이러한 특수한 읍치에 설치된 관아의 인 적구성과 시설, 그리고 그것들의 역사적 변천 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남한산성의 읍치 또는 관아건축에 관한 연구로는 남한산성과 주변 취락의 형성과 생활상, 그리고 행정중심지의 해체 등을 지리 학적 측면에서 다룬 연구2)와 남산산성을 임란 후 새롭게 계획·조성된 성곽도시라는 도시사적 측면에서 다룬 연구3), 그리고 남한산성의 축성 과 행궁 및 객관의 건립을 공사 책임자와 함 께 규명한 연구4)가 있다. 한편 성곽과 관련하 여 체성과 여장의 축성시기 및 축성법을 밝힌 연구5)가 주목된다.

이상과 같이 기존 연구는 대부분 남한산성 의 성곽과 취락의 형성 및 공간구성 등을 다 2) 홍금수, 「山城聚落硏究 : 南漢山城 廣州邑治의 形成 과 衰退」, 한국지역지리학회지, 제10권 제2호, 2004 3) 김헌규, 「임진왜란 이후 성곽도시의 대안으로서 정 비된 산성도시 “남한산성”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논문집(계획계), 21권 11호, 2005. 11

4) 柳承宙, 「南漢山城의 行宮·客館·寺刹建立考」, 韓國 史硏究(120), 2003. 3

5) 李天雨, 「南漢山城 築城法에 관한 硏究」, 명지대 석사논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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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광주부의 고읍터(여지도 부분, 규장각) 루고 있으며 내부의 주요한 시설, 특히 관아의

구성과 시대적 변화 등을 다룬 연구는 전무하 다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남한산성 읍치의 형성과 그에 따 른 성내의 주요시설, 특히 관아건축의 형성과 시대적 변화에 따른 변천과정을 밝히는데 목적 을 두었다.

현재 남한산성 내의 행궁 및 관아시설은 발 굴을 통해 복원된 건축물이 대부분이며, 현재 도 복원작업이 계속 추진되고 있다. 남한산성 관아의 세부적인 고찰은 추후 발굴조사 후로 미뤄져야 할 것이나 관아시설의 위치 추정 및 변화과정은 추후 발굴 및 복원연구에 기초자료 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2. 연구의 범위와 방법

본 연구는 성곽의 축성과 함께 조성된 행궁 과 읍치의 이전으로 건립된 행정관아 및 군영 시설들을 주된 고찰 대상으로 한다.

남한산성으로 광주(廣州)의 읍치가 이전된 1626년(인조 4)부터 갑오·을미개혁으로 전통적 인 지방제도가 해체되고 근대적인 시기로 이행 하는 19세기 말까지를 시간적 범위로 하였으 며, 연구의 공간적인 범위는 광주부의 통치행 정시설이 위치한 읍치의 중심, 즉 산성내부로 한정하였다.

현재 광주 읍치의 행궁권역에 대한 발굴조 사와 복원공사는 대부분 완료되었지만 관아에 대한 발굴은 객사터와 연무관 주변 등에 국한 되어 있다. 따라서 남한산성 관아건축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은 다음과 같은 사료를 활용하였 다. 관련문헌으로는 『輿地圖書』, 『廣州府邑 誌』, 『重訂南漢志』등의 읍지류와「남한산 성도」, 「광주전도」 등의 고지도 등을 대상 으로 하였으며, 또한 관아의 위치추정과 변천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구한말 토지대장인

『量案』과 일제강점기에 측량된 1912년 『지 적원도』, 1911년 『土地調査簿』그리고 현재 의 지적도 등을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연구 방법은 고지도와 읍지류 등 사료를 통 해 행궁 및 관아시설을 시기별로 파악하고

『量案』과 일제강점기 지적공부(地籍公簿)를 분석하여 조선후기이후 관아의 위치를 추정한 후, 관아건축의 변천과 배경을 구명(究明)한다.

2. 남한산성 광주(廣州)읍치

2-1. 광주와 남한산성 읍치의 연혁 1) 고읍(古邑) 광주의 연혁

조선시대 광주부의 읍치는 인조 4년(1626)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옮기게 되는데, 원래 광 주읍치가 있던 곳은 광주부의 동부면, 즉 지금 의 하남시 일대6)이다. 조선시대 문헌기록을 통 해 고읍 광주의 연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광주는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처음

6) (사)경기도향토사연구협의회, 『숲과 역사가 살아있 는 남한산성』, 경기농림진흥재단, 2008, 18쪽(기전문화 재연구원에 의해 백제의 궁궐터로 추정되던 하남 교산 동 유적이 고려시대 이후 광주부의 관청건물로 드러났 다. 한편 한양대학교 박물관은 이성산성이 백제의 도성 이 아니라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유하고 쌓은 한산주의 치소성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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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한강 남쪽, 한산 (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궁궐을 짓고, 도 읍을 옮겨 남한성이라 하였다고 한다. 후에 신 라의 문무왕이 한산주로 고쳤다가 뒤에 남한산 주, 그리고 경덕왕 때 한주로 다시 고쳤다. 고 려 태조 때 지금의 군명인 광주로 고쳤으며, 성종 2년에 12목 중의 하나가 되었다. 현종 때 에는 전국 8목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조선에 서도 광주목으로 계속되었다. 고을의 동쪽에 있는 검단산이 진산이고 읍치의 남쪽에 일장산 성이 있는데 높고 험하며 둘레가 3,993보라고 하였다.7)

그리고 조선 중종 25년(1530)에 완성된『新 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광주 읍치의 진산은 고을 동쪽 7리에 있었던 검단산이고 고을 남 쪽 5리에 일장산이 위치하고 있는데 일명 남 한산이라고 하였다.8) 한편 광주의 고적(古蹟) 으로는 온조왕고성과 일장산성이 있는데, 일장 산성은 신라 때의 주장성(晝長城)이며 신라 문 무왕이 쌓은 것으로 둘레가 86,800척, 높이가 24척의 석축성이라고 하였다.

2) 남한산성 읍치의 연혁

남한산성에 광주읍치가 시작된 것은 조선 인조 4년(1626)에 남한 구성(舊城)을 개축하고 읍치를 성내로 옮기면서부터이다.9)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여러 차례의 수축논의가 있었는데 커다란 진전이 없다가 광해군 때인 1621년 일 부 수축10)이 되었으며, 본격적인 남한산성 수 7)『國譯 朝鮮王朝實錄』, 世宗實錄, 地理志, 京畿, 廣州 牧(국사편찬위원회, http://sillok.history.go.kr)

8)『新增東國輿地勝覽』, 卷六, 京畿, 廣州牧, 山川條(한 국고전번역원, http://db.itkc.or.kr)

9) 廣州市·廣州文化院, 『국역 重訂南漢志』, 建置, 2005, 40쪽(重訂南漢志는 1844-46년간 광주유수였던 홍경모가 1847년(헌종 13)편찬한 광주읍지로서, 1779년(정조 3) 서 명응이 미처 완성하지 못한 ‘남한지’와 기타 舊志를 보 완하여 펴낸 13권 분량의 읍지이다. 본 연구에서 활용한 국역본은 2005년 광주문화원에서 규장각 소장의 ‘중정남 한지’(奎4068)사본을 국역한 것이다.)

축은 인조 2년(1624)부터 인조 4년(1626) 사이 였다. 수축 결과 남한산성은 성의 둘레가 6,297보 되었고 여장이 1,940개, 옹성 4개, 대 문이 4개, 암문이 9개, 125처의 군포, 그리고 사방에 장대가 설치되었다. 뿐만 아니라 상궐, 하궐 등 행궁과 객관인 인화관도 함께 건립되 었으며, 한흥사와 국청사 등 9개 사찰이 창건 되었다.11)

<그림 2> 광주전도(1872년, 규장각) 한편 숙종 12년(1686) 봉암외성을 쌓았고, 19년(1696) 한봉외성을 쌓았다. 또한 숙종 31 년(1705) 봉암의 두 포루를 증축하였고 45년 (1719) 신남성을 쌓았다. 그리고 영조 15년 (1739) 한봉성을 개축하였고 20년(1744)에는 원성(元城)을 중수하였다. 영조 28년(1752) 신 남성 돈대를 쌓았고 정조 3년(1779) 원성을 다 시 수축하였다.12)

1626년 이렇게 남한산성의 축성이 완료된 10) 광해군 13년(1621) 淸의 침입을 막고자 백제 및 신 라가 축성했던 土城을 石城으로 개축하였다.(한양대학교 박물관, 『남한산성 지표조사보고서』, 1986, 16쪽) 11) 廣州市·廣州文化院, 『국역 重訂南漢志』, 城池, 宮 室, 佛宇條, 2005 참조

12) 廣州市·廣州文化院, 『국역 重訂南漢志』, 城池, 2005, 4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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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남한산성 행궁권역 (조선고적도보 부분) 후, 인조는 산성에 수어청을 설치하고 광주 등

진(鎭)의 군무를 절제하게 하고 목사로 하여금 방어사13)를 겸하게 하였다. 인조 11년(1633) 목사로 토포사를 겸하게 하였고 15년(1637)에 는 목사를 승격하여 부윤으로 하였다. 영조 35 년(1759) 유수와 경력을 없애고 수어사를 두었 으며, 옛날처럼 경청을 설치하고 부윤으로 방 어사와 전영장을 겸하게 하였다. 그리고 정조 19년(1795) 다시 경청을 없애고 유수가 수어사 를 겸하게 하여 본성에 출진케 하였으며 판관 을 두어 전영장을 겸하게 하였다.14)

남한산성 읍치의 진산은 청량산(淸凉山)으 로 과거에는 일장산 또는 남한산으로 불리었으 며 안에 기우단이 있다고 하였다.15) 행궁과 동 문까지 연결되는 전면 도로와 건물들의 좌향을 볼 때 읍치의 조성과 행궁의 건설은 청량산을 진산으로 하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의 지방제도는 갑오개혁(甲午改革) 에서 광역지역의 부(府)와 하위단위인 군제로 일원화하였으며, 각 지방관리들에게 집중되었 던 행정통치권, 조세부과와 징수권, 재판권 등 을 분산시켜 각기 별도의 기관에게 이양했 다.16) 1895년 5월, 이때 광주 유수부는 서울 한성부의 관할 아래 광주군으로 편성되었다.

그러나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1896년 8월 갑오·을미개혁에서 단행된 전국 23부제를 다시 13도로 개정하고 각 도에는 관찰사를 파견하 여 5등으로 구분된 군을 관할하게 하였다. 이 때 광주부는 경기도의 1등군 부윤을 두었으며 13) 조선시대 종이품(從二品) 서반 외관직으로 경기도·

강원도·함경도·평안도의 요지를 방어하기 위하여 두었던 병마절도사의 다음 직위이다.(http://people.aks.ac.kr) 14) 廣州市·廣州文化院, 『국역 重訂南漢志』, 職官, 2005, 63-65쪽

15)『廣州府邑誌』(奎12180, 1871년경), 山川條(한국학문 헌연구소 편, 邑誌-경기도편, 아세아문화사, 1985) 16) 왕현종,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과 갑오개혁』, 역 사비평사, 2003, 274-276쪽

그 밑에 향장, 순교, 수서기, 서기, 통인, 순졸, 사령, 사용, 사동, 객사진, 향교직 등을 배치했 다.17) 1906년 지방구역 정리로 강화부, 개성부 와 함께 군으로 격하되었으며 이듬해 1907년 중부면 산성리에 군청이 설치되는 등 큰 변화 를 겪었다. 1917년 중부면 산성리에 있던 군청 을 경안리(현재 경안동)로 이전하였고 1937년 경안면이 광주면으로 개칭되었다.18)

2-2. 남한산성 읍치의 주요시설 남한산성 광주읍치의 주요시설은 행궁과 주 변의 궁실, 지방통치행정을 위한 행정시설, 수 어영의 군영시설, 사직단, 여단의 여러 제사시 설, 그리고 조선후기 전국적으로 활성화된 장 시를 들 수 있다.

1) 궁실 및 관아시설

헌종 14년(1848)에 간행된『重訂南漢志』에 기록된 궁실로는 상궐(上闕)과 하궐(下闕), 좌 전(左殿)과 우실(右室), 재덕당, 한남루, 인화 관, 사관평행궁 등이다. 남한산성 광주부가 다 른 읍치와 다른 점의 하나는 유사시 대피할 수 있는 피난행궁이 입지한 것을 둘 수 있다.

남한산성 행궁은 후금의 위협과 이괄의 난 후 남한산성이 본격적으로 축성되면서 성곽과 함께 건립되었다. 그러나 행궁에서 상궐과 하 궐의 본래 건립 목적은 유수가 근무하기 위한 17)『官報』 第397號, 建陽元年 8月 6日(勅令 第36號) 18) 광주시·광주문화원,『廣州市史』(제1권), 2010, 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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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라고 하였다.19) 먼저 내행전(상궐)과 외행 전(하궐), 그리고 재덕당과 좌전 및 우실, 다음 으로 좌승당, 일장각, 그리고 한남루 등이 차 례로 증축되었다. 즉 인조대에 행궁영역, 숙종 시기에 좌전 및 우실, 그리고 순조대에 들어 유수의 집무처인 좌승당과 일장각, 한남루 등 이 완성되었다.

한편 광주부 읍치가 남한산성으로 이전되고 수어청이 설치되면서 행정을 위한 관아시설과 군영시설들이 성내의 주요한 곳에 입지하게 되 었다. 초창기에는 남한행궁의 건물들이 광주부 의 치소를 겸하였고 다른 이아(貳衙)20) 시설도 행궁의 우측(남쪽)에 배치하였다. 이러한 구성 은 수원유수부에서 볼 수 있는데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외관인 수원부사(뒤에 유수)가 집 무하는 지방행정의 관아로 사용하다가 왕의 원 행시에는 왕의 거처로 이용되었다.21)

광주부의 관아시설은 크게 유수겸 수어사의 집무시설, 판관의 이아, 그리고 수어영 관사들 로 구성되는데, 이는 감영(監營)의 관아와 유 사하다. 유수와 관련된 시설은 좌승당, 일장각, 그리고 본부아사이고 판관의 이아는 제승헌, 내아, 향청, 서리청, 속오군관청, 옥 등이며, 수 어영 시설로는 수어영(연무관), 비장청, 교련관 청, 서리청, 표하청, 군뢰청, 영노청 등이다.

2) 제사시설

『重訂 南漢志』의 단묘조22)를 살펴보면, 먼저 사직단은 영조 11년(1735)에 고읍에서 여 기로 옮겨 세웠고 남단사의 우측에 있었다. 사 19) 廣州市·廣州文化院, 『국역 重訂南漢志』, 宮室, 2005, 68쪽

20) 원래 貳衙는 監營이 소재한 군현에서 감사를 대신 하여 일반 행정을 담당하는 判官의 관아를 지칭하기도 하고, 또한 일반 군현의 재지사족들로 구성된 향청을 일 컫기도 한다. 여기서는 전자의 개념에 해당한다.

21) 수원시, 『수원 화성행궁』, 2003, 65쪽

22) 廣州市·廣州文化院, 『국역 重訂南漢志』, 壇廟, 2005, 100쪽

와 직의 두 단으로 되어있으며 담장을 두르고 네 개의 문과 각이 있었다. 여단은 북문 안에 있으며, 문묘는 광주향교에, 성황단은 북문 안 의 동쪽 언덕위에 있다고 하였다. 그 밖에 인 조 16년(1638) 백제 시조 온조왕과 이서를 배 향한 온조왕묘(숭렬전)가 서문 안에 있고 숙종 14년(1688) 건립한 현절사가 동문 안에 현존하 고 있다.

3) 교육시설

광주향교는 원래 고읍 서쪽 2리쯤에 있었다 가 숙종 29년(1703)에 고읍터로 옮겨 세웠는 데, 산성 북쪽에서 10리 거리이며 대성전, 동·

서무, 전사청, 제기고, 명륜당, 동·서재, 내·외 신문 등을 갖추고 있었다.23) 광주향교는 읍치 의 이전과정에서 산성내로 옮기지 않고 고읍에 그대로 존속하여 다른 지방군현의 입지조건과 다름을 알 수 있다.

4) 상업시설

광주부에 개설된 장시는 1개월 6개시의 5일 장으로 9개의 장이 서고 있었으며 남한산성내 에도 2일과 7일에 열리는 성내장(城內場)24) 설치되었다. 읍치에 개설되었던 장시는 대개 사람들의 왕래와 물자의 수송이 원활하게 이루 어지는 교통의 중심지에 집중적으로 설치되고 있었으며 특히 객사 앞, 읍치의 대로변에 많이 위치하였다.25) 남한산성 읍치의 경우 성내에서 장을 개설할 만한 곳은 수어영(연무관) 앞의 넓은 공지26)로 조선후기 성내장이 개설되었던 곳이다.

23) 廣州市·廣州文化院, 『국역 重訂南漢志』, 學校, 2005, 102쪽

24) 廣州市·廣州文化院, 『국역 重訂南漢志』, 場市, 2005, 128쪽

25) 金起德, 「朝鮮後期 忠淸道 官衙建築의 配置體系」, 청주대 박사논문, 2002, 141쪽

26) 홍금수, 「앞의 논문」, 326쪽(「지적원도」와「토지 조사부」에 국유지로 등록된 1,229평 규모의 垈地로서 401번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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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남한산성 관아의 구성

3-1. 관아의 인적구성 1) 관제(官制)

조선왕조는 전국의 군현제 편성에 있어서 일반적인 행정체계와 다른 유수제라는 별도의 행정체계를 구축하였다. 조선후기 개성, 강화, 수원, 그리고 광주의 4도에 유수부를 설치하고 경관를 파견하여27) 특별하게 관리하였다.

『重訂南漢志』의 직관조를 살펴보면28), 광 주부에 설치된 관직으로는 유수, 남한수어사, 중군, 판관, 전영장, 검률, 전영중군, 그리고 삼 전도의 별장 등이 있었다. 유수는 2원(員)으로 1원은 비변사 제조를 겸하는 정2품 이상의 문 관이, 다른 1원은 경기관찰사가 겸임하였다.

그리고 남한수어사는 유수가 예겸(例兼)하였고 전영장은 판관이 겸하였다.

다음으로 실무담당자인 아전, 즉 서리는 80 인으로 규정29)되어 있으며, 통인 또한 다른 유 수부의 예에 따라 청직(廳直)으로 개칭하여 40 인을 두었다.30) 다만 광주부의 경우, 수어영과 유수부가 서리를 상호 통융(通融)31)하여 배치 함으로써 읍치의 행정과 군사행정이 분리되지 않고 진행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2) 영제(營制)

조선후기 서울과 외곽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5군영 가운데 수도방위 부대로서의 훈련도감,

27)『大典會通』吏典, 京官職, 正二品衙門·從二品衙門 (수원과 광주는 정이품 경관이 파견되고 개성과 강화는 종이품 유수가 파견되었다.)

28) 廣州市·廣州文化院, 『국역重訂南漢志』, 職官, 2005, 60-61쪽

29)『大典會通』吏典, 京衙前, 書吏(수원은 90인, 광주는 80인, 개성과 강화는 각 50인이다.)

30) 廣州市·廣州文化院, 『국역 重訂南漢志』, 故實(鎭營 을 내보낸 뒤 고친 節目), 2005, 587쪽

31) 廣州市·廣州文化院, 『국역 重訂南漢志』, 營制, 2005, 180쪽

어영청, 그리고 금위영이 있고 또한 수도외곽 을 방위하기 위해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수어 진지로 하는 수어청과 총융청이 있었으며, 훈 련도감은 급료병으로, 금위영과 어영청은 향군 을 중심으로, 수어청과 총융청은 둔전개설 등 에 의해 운영되는 편제였다.32)

『重訂 南漢志』에 기록된 남한산성 수어청 의 영제(營制)33)는 정조 19년(1795) 중앙 경청 을 없애고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게 하여 본성에 출진케 하면서 경영(내영), 외영, 그리 고 광주부윤이 겸하던 방어사의 방영(防營)을 하나의 영으로 하였다. 영의 관직으로는 유수 겸남한수어사 1원, 호방, 예방, 병방, 공방을 관장하는 군관 4원, 이아와 통융하는 서리 80 인, 청직 40인 중 24인, 그리고 판관과 중군이 1원, 향청의 좌수와 별감이 각 1인이다.

한편 고종 2년(1865)에 편찬된『大典會通』

에서 규정하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광주유 수를 겸하는 정2품의 수어사 1원, 정3품의 중 군 1원, 역시 정3품의 진영장 3원을 두었다.

전영장은 유수부의 판관이 겸하고 중영장은 양 주목사가, 후영장은 죽산부사가 겸하였다. 그리 고 별장 2원을 두었는데 여주목사와 이천부사 가 겸하였다. 다음 장관과 장교들로는 파총 2, 초관 26, 교련관 17, 기패관 19, 별군관 9, 수 첩군관 61인 등이 포함되었다.34)

관아건축에서는 직제명이 시설명을 나타내 기 때문에 건축적 구성은 직제명과 그 구성원 들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광주부의 행정 및 군사를 담당하는 관아건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1894년에 작성된 광주부의 영사례35)

32) 車文燮, 「守禦廳硏究(上)」, 동양학 (6), 1976, 69쪽 33) 廣州市·廣州文化院, 『국역 重訂南漢志』, 營制, 2005, 179-180쪽

34)『大典會通』兵典, 京官職, 守禦廳

35)『畿甸營事例』(奎12200, 1894년경) 廣州, 營庫, 十月 朔下(한국학문헌연구소 편, 邑誌-경기도편, 아세아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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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남한산성 전경(조선고적도보, 1910년경) 통해 파악된다.

위의 직임은 수어영과 이아의 직임이 함께 작성된 것으로, 영고에서 10월 한 달 동안 지 출된 관원, 원역(員役), 그리고 군교 및 군졸들 의 급료가 지급된 명단이다. 직임을 통해 각 직임들의 관련 관아를 추정해 볼 수 있으며, 광주부 읍치에서 실질적으로 급료를 받고 활동 하던 사람들과 관청이라고 할 수 있다.

3-2. 관아시설

『輿地圖書』에 기록된 광주부36), 즉 광주 부윤(府尹)이 경기방어사와 토포사 및 전영장 을 겸하던 시기(18세기 중엽)의 공해(公廨)는 행궁 231칸, 좌전 29칸, 우실 4칸, 군향창사 924칸, 객사 36칸, 관아 123칸, 향청 16칸, 주 사(州司) 11칸, 작청 27칸, 군기청 12칸, 관청 11칸, 종각 6칸, 형옥 21칸 등이다. 이때에는 행궁시설을 제외하면 여타의 지방군현과 유사 한 시설들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조 19년(1795) 이후에 정비된 광주유수부 의 관아시설은 행궁영역과 남한산성으로 출진 한 수어청 영역, 그리고 유수부의 일반 행정을 위한 이아 영역 등으로 구분할 있다.

1) 행궁 영역

조선후기 행궁 영역을 이루는 시설들로는 상궐, 하궐, 재덕당, 좌승당, 일장각, 한남루 등 이다. 그리고 객사인 인화관이 68칸 규모로 행 궁 전면에 위치하고 있었다.37) 상궐과 하궐은 사, 1985)

“中軍 裨將 檢律 前營中軍 敎鍊官 別破哨官 本廳所任軍 官 地水堂監官 旗牌官行首 牙兵訓御把摠 訓御哨官 馬兵 哨官 別軍官 知彀官 鍊武館監官 束伍把摠 捕盜軍官 二 廳所任軍官 中營廳所任軍官 肆覲坪正堂監官 左右洞領將 醫員 訓長 社稷監官 書吏 廳直 別破陳敎師 都訓導 射居 首僧 新南城直 四色匠手 弓人 汗峯山直 熟手 營繕使令 禮庫使令 官廳使令 官使令牌頭 轎軍牌頭 營奴 婢子 巡 牢牌頭 細樂手牌頭 雇馬等牌 崇烈殿直 顯節祠直 南將臺 直 西將臺直 四山直 四城門直 面主人掌務 左殿直 地水 堂直 女獄直 軍器使令 崇烈殿殿監 鄕廳座首”

36)『輿地圖書』京畿道 廣州, 公廨條

인조 2년(1624) 갑자(甲子)에 광주목사가 건립 하였다고 했는데 기와에 ‘乙丑 4月 日造’라는 명문으로 보아,38) 1624년 공사를 시작하여 다 음해 1625년에 완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좌전과 우실은 숙종 37년(1711)에 부윤 김 치룡이 함께 건립하였고 재덕당은 이보다 앞선 숙종 14년(1688)에 유수 이세백이 세웠다. 그 리고 한남루는 정조 22년(1798)에 건립하였고 객사인 인화관은 인조 2년(1624) 목사 유림(柳 琳)이 세웠다.

유수가 정사를 보는 좌승당은 상궐의 왼쪽 담장 밖에 있었는데 순조 17(1817)에 유수 심 상규가 건립하였으며 하궐 왼편에 있는 일장각 은 순조 29년(1829)에 유수 이지연이 건립하였 다. 그밖에 행궁영역의 안팎으로는 많은 정자 가 건립되어 있었다. 좌승당에 부속된 유차산 루, 하궐의 서편 담장 밖에 순조 5년(1805)에 건립된 완대정, 그 아래에 순조 13년(1813)에 지어진 우희정, 좌승당 오른쪽 언덕위에 활쏘 기를 위한 곳으로 순조 17년(1817)에 건립된 이위정과 그 왼편의 이명정, 그리고 행궁 뒤 산기슭에 심상규가 건립한 옥천정이 있었다.39) 37)『廣州府邑誌』(奎12180, 1871년경), 行宮 (한국학문 헌연구소 편, 邑誌-경기도편, 아세아문화사, 1985) 38) 廣州市·廣州文化院, 『국역 重訂南漢志』, 宮室, 2005, 67쪽

39) 廣州市·廣州文化院, 『국역 重訂南漢志』, 樓亭,

(8)

輿地圖書

(1757-1765) 廣州府邑誌

(1842년경) 重訂南漢志

(1846) 廣州府邑誌

(1871년경) 南漢誌(伽藍誌) (1874)

守禦營

守禦營(100) 守禦營 守禦營(100) 守禦營

裨將廳 裨將廳

敎鍊官廳 敎鍊官廳

防營旗牌官廳(10) 旗牌官廳 旗牌官廳(10) 旗牌官廳

一廳(13) 本廳軍官廳 一廳(13) 本廳軍官廳

別軍官廳 別軍官廳

哨官廳(11) 親牙兵哨官廳 哨官廳(11) 親牙兵哨官廳 牙兵將官廳(21) 牙兵將官廳 牙兵將官廳(21) 牙兵將官廳 中營軍官廳(12) 中營軍官廳 中營軍官廳(12) 中營軍官廳 別破陣廳(16) 別破哨官廳 別破陣廳(16) 別破哨官廳

標下廳 標下廳

伺候廳 伺候廳

書吏廳(33) 書吏廳 書吏廳(33) 書吏廳

廳直廳 廳直廳

巡令手廳(7) 巡令手廳 巡令手廳(7) 巡令手廳

吹手廳(10) 吹手廳 吹手廳

軍牢廳(9) 軍牢廳 軍牢廳(9) 軍牢廳

訓導廳(4) 訓導廳 訓導廳(4) 訓導廳

細樂手廳(12) 細樂手廳 細樂手廳(12) 細樂手廳

官奴廳(13) 營奴廳 官奴廳(13) 營奴廳

僧徒廳(20) 僧徒廳 僧徒廳

執事廳(20) 執事廳(20)

軍餉倉舍(924)

貳衙

官衙(123) 貳衙(12) 制勝軒 貳衙(12) 制勝軒

內衙(24) 內衙(24) 內衙

鄕廳(16) 鄕廳(3) 鄕廳 鄕廳(3) 鄕廳

州司(11)

作廳(27) 作廳(22) 書吏廳 作廳(22) 書吏廳

軍器廳(12) 巡牢廳 巡牢廳

官廳(11) 馬廊 馬廊

刑獄(21) 獄(有房)

女獄 女獄

鐘閣(6) 鐘閣(6) 鐘閣 鐘閣(6) 鐘閣

知彀廳(8) 知彀官廳 知彀廳(8) 知彀官廳

二廳(19) 防營軍官廳 二廳(19) 防營軍官廳

束伍將官廳(15) 束伍將官廳 束伍將官廳(15) 束伍將官廳

捕盜廳(9) 捕盜軍官廳 捕盜廳(9) 捕盜軍官廳

本府衙舍(26) 本府衙舍(26)

[표 1] 조선후기 광주부 읍치의 수어영 및 이아시설(칸수)

2) 수어영 영역

조선후기 경청을 혁파하고 남한산성의 수어 를 위해 출진한 수어청은 수어영(연무관)과 군 영을 운영하기 위한 여러 시설들로 구성된다.

먼저 수어영은 군영의 중심건물로 과거 연무 당, 연병관이라 하였다가 정조 3년(1779)에 지 2005, 72-73쪽

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소속 관아로는 비장청, 교련관청, 기패관청, 본청, 군관청, 별군관청, 친아병초관청, 표하청, 사후청, 서리청, 청직청, 순령수청, 취수청, 군 뢰청, 훈도청, 세락수청, 영노청, 승도청 등이 수어사를 보좌하며 군영을 구성하였다.40) 40) 廣州市·廣州文化院, 『국역 重訂南漢志』, 官廨,

(9)

3) 이아 영역

이아 영역은 판관이 광주부의 일반 행정을 처리하는 읍치의 치소라 할 수 있다. 이아 영 역의 대표적인 건물은 제승헌으로 영조 25년 (1748)에 부윤 남태온이 지었고41) 판관의 내아 는 정조 20년(1796)에 세웠다.42) 이아의 행정 시설로는 향청, 지구관청, 방영군관청, 속오군 관청, 포도군관청, 서리청, 순뢰청, 종각, 마구, 옥, 여옥 등이 있었다. 한편 이아는 수어영(연 무관) 안쪽43)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남한산성 내에는 관아의 창고와 군영 의 창고가 여러 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輿地 圖書』의 창고조44)에 기록된 창고의 숫자만도 무려 16개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남한산성이 왕실의 보장처로서 유사시를 대비하여 조성된 곳임을 보여주며 특히 영고(營庫)는 200여칸이 되었다. 광주부 관아시설들에 대한 여러 읍지에 서의 기록은 시설의 유무와 규모 등에서 약간 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관제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이중에서 수어영과 이아 관련 관아들을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4. 관아건축의 변천

4-1. 관아의 위치 추정

남한산성 성내에 조선후기 관아시설로 현존

2005, 71쪽

41) 廣州市·廣州文化院, 『국역 重訂南漢志』, 官廨, 2005, 71쪽

42)『廣州邑誌』(奎10740, 1842년경), 公廨, “內衙 正宗朝 丙辰新建二十四間”(한국학문헌연구소 편, 邑誌-경기도 편, 아세아문화사, 1985)

43)『廣州府邑誌』(奎12180, 1871년경) 公廨 “貳衙 在守禦 營內凡十二間”(한국학문헌연구소 편, 邑誌-경기도편, 아 세아문화사, 1985)

44)『輿地圖書』京畿道, 廣州, 倉庫 “別庫 稤倉 營倉 南 倉 東倉 北倉 新北倉 新南倉 新豊倉 別倉 營庫 補餉庫 補關庫 賑恤庫 保障庫 軍器庫”(국사편찬위원회, 1973)

하는 것은 연무관과 수어장대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발굴조사는 행궁 권역과 객사에 대한 발굴조사가 대부분으로45) 이아와 군영시설들에 대한 위치 추정은 고지도 를 비롯하여 일제강점기의 지적공부(地籍公 簿), 그리고 현재의 지적도 및 발굴도면 등을 활용하였다.

관아시설의 위치를 추정하기 위해, 먼저 1912 년 『지적원도』와 1911년 『토지조사부』에서 소유권이 국유지로 표기된 토지들을 대상으로 살펴보았다. 일제강점기 남한산성의 성내에서 국유지로 확인된 필지는 전체 1,176필지 중에서 모두 62필지로 전(田)이 40필지, 대(垈) 11필지, 답(畓) 1필지, 임야(林野) 5필지, 사사지(社寺 地) 4필지, 지소(池沼) 1필지였다.

62필지의 국유지 중에서 관아 및 창고시설 의 대지로 추정되는 필지는 우선 지목이 임야, 답, 그리고 사사지를 제외하고, 또한 행궁지와 읍치의 중심에서 벗어난 필지 등은 제외하면 대략 18필지 정도이다.

국유지로 등록된 이들 필지의 위치는 현재 건축물이 있거나 조선후기 고지도에서 표현된 건물을 통해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특히 현존하는 연무관과 수어장대는 『지적원도』

에서 위치를 명확히 알 수 있으며 영고(營 庫)46)의 경우는 1910년대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기타 동창(東倉), 이아, 종각 및 별고 (別庫), 성기고(城機庫), 수창(稤倉) 등은 1872 년 광주전도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45) 연무관 주변에 대한 시굴조사가 2009년에 실시되어 약보고서가 발간되었다. 조사결과 조선시대로 추정되는 건물지 형적 4개소, 석축시설 2기, 축대시설 1기, 석렬유 구 1기, 수혈 유구 4기, 폐와무지 1기 등이 확인되었다.

(광주시청·(재)한얼문화유산연구원,『연무관 해체보수공 사 문화재 발(시)굴조사 약보고서』, 2009, 9쪽) 46) 營庫는 지금의 남한산 초등학교 자리로 1911년 공 립광주보통학교의 설치인가(『朝鮮總督府官報』, 第263 號, 告示, 明治44年 7月 15日) 후 학교 건물로 전용되다 가 후에 철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0)

<그림 5> 남한산성의 국유지(1911년 토지조사부 / 1912년 지적원도)

<그림 6> 양안(1900년)에 등록된 연무대와 주변필지 한편 광무(光武) 4년(1900)에 작성된 경기도

광주부 문외동(門外洞), 현재 산성리 『量 案』47)에는 공해 23좌(座)가 등록되어 있다.

47) 조선시대 토지대장으로 1900년(光武 4) 量地衙門에 서 작성한 廣州府 22개面에 대한 것으로 표제는『廣州

府量案』으로 되어 있다. 총 70책 내에 中草本과 正書本 이 함께 있어서 各面에 대한 量案이 두 벌씩 重複되어 있다. 筆地마다 地番, 量田方向, 地形, 地目·㽝座數, 田畓 圖形, 四標, 田畓實積尺, 土地等級, 結負數, 時主·時作, 垈 地인 경우에는 垈主·家主와 草瓦間數가 명기되어 있다.

(http://e-kyujanggak.snu.ac.kr)

(11)

공해(公廨) 성내

구역 위치관계 토지조사부의

지번(추정)

관아

營奴廳

西部 북-도로, 동-가옥, 남-도로, 서-아사 935대

衙舍 북-산, 동-영노청, 남-작청, 서-산 935대

作廳 북-아사, 동-둑, 남-구거, 서-가옥 935대

樂工廳 中部 북-둑, 동-아병청, 남-도로, 서-둑 591대

牙兵廳 북-둑, 동-성기고, 남-도로, 서-악공청 591대

別巡校廳 北部 북-초관청, 동-가옥, 남-가옥, 서-산 595전

哨官廳 북-둑, 동-가옥, 남-별순교청, 서-산 595전

鐘閣 中部 북-가옥, 동-별고, 남-도로, 서-도로 581대

북-가옥, 동-가옥, 남-가옥, 서-가옥 526전

前官廳

北部

북-전작청, 동-도로, 남-가옥, 서-영고 378대

前作廳 북-전향청, 동-연무대, 남-전관청, 서-영고 378대

前鄕廳 북-산, 동-연무대, 남-전작청, 서-영고 379전

本衙舍 북-산, 동-가옥, 남-연무대, 서-전향청 391전

演武臺 북-본아사, 동-둑, 남-도로, 서-전향청 400대

창고

東倉 북-가옥, 동-전, 남-가옥, 서-구거 250대

稤倉 西部 북-구거, 동-전, 남-전, 서-전 867전

營倉 북-전, 동-전, 남-가옥, 서-전 ?

營庫 北部 북-산, 동-본작청, 남-구거, 서-가옥 378대

別庫 中部 북-가옥, 동-도로, 남-도로, 서-종각 581대

城機庫 북-둑, 동-가옥, 남-도로, 서-아병청 591대

[표 2] 광무 4년(1900) 양안에 등록된 관아시설

여기에서 관아시설은 20여동 정도로 성내의 서부, 중부, 북부에 산재하고 있으며 관속들의 청사와 창고시설로 구별된다. 청사는 영노청, 아사(衙舍), 작청, 악공청, 아병청, 별순교청, 초관청, 종각, 옥, 전관청, 전작청, 전향청, 본아 사(本衙舍), 연무대 등이며 창고시설로는 동창, 수창, 영창, 영고, 별고 등이 등록되어 있다.

『量案』에는 <그림 6>에서와 같이 관아가 위치한 필지가 다른 토지와의 관계 속에서 표 현되어 있는데, 상호 위치관계를 살펴보면 다 음과 같다.(표 2)

영노청―아사(衙舍)는 동서(좌우)로, 아사―

작청(作廳)은 남북으로, 악공청―아병청―성기 고(城機庫)는 좌우 일렬로 붙어있으며, 또한 초관청―별순교청은 위아래(남북)로 위치하고 있다. 한편 전관청(前官廳)―전작청―전향청은 남북으로, 그리고 이들의 서쪽에는 영고가 배 치되어 있으며 전향청의 동쪽으로 본아사(本衙 舍)―연무대가 남북으로 인접되어 있다.

객사, 영고, 연무대 등 관아의 위치를 명확

히 알 수 있는 필지를 기준으로 관아가 등록 된 필지의 상호 위치관계를 1912년『지도원 도』에 표시하면 <그림 7>과 같다.

위와 같이 1900년『量案』을 기준으로 할 때, 행궁 영역에는 작청, 영노청, 아사 등이 위 치하고 있었으며, 그 전면에는 악공청, 아병청, 성기고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현재의 연 무관 주변으로 본아사를 비롯한 전향청, 전작 청 등 본래의 이아 건물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4-2. 관아시설의 시대적 변화 1) 이아의 이건 및 중영(中營)의 축소 조선후기 남한산성 관아건축의 변천은 고지 도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 대상으로 삼은 고지도는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48)「남한산성도」(영남대박물관)와 1872 48) 위의「남한산성도」는 1711년에 건립된 좌전과 우 실이 나타나 있지 않고 또한 貳衙 관아들이 행궁의 남 쪽에 배치된 것, 그리고 수어영의 명칭이 鍊兵館으로 표 기된 점 등으로 볼 때 17세기 후반에 작성된 지도로 추 정된다.

(12)

<그림 7> 1900년 남한산성 관아시설의 추정위치(1912년 지적원도 부분)

남한산성도

(17세기 후반) 광주전도(1872) 행궁 상객사 하객사

중대문 대문 (재덕당)

행궁 좌전 우실

객사 인화관 인화관

수어영 중영 연병관 연무관

이아 이아 향청 관청

종각 이아 종각

창고

영고 동창 수창 영서창 남창 별고 군기 구군기 별창

북창

영고 별고 동창 수창 영창 남창 성기고 기타

지수당 온왕묘 삼신사우 서장대

남장대 동장대 북장대

지수당 숭렬전 현절사 서장대 남장대 사직

침괘정 [표 3] 남한산성 관아시설의 변화

<그림 8> 광주전도 부분(1872년, 규장각) 년 「광주전도」(규장각)를 비교, 분석하였다.

1899년『廣州府邑誌』(장서각)에 포함된 광주 부지도는 시기적으로 가장 늦게 그려진 지도이 지만 광주전도를 모사한 것으로 판단되어 제외 하였다.

1872년「광주전도」는 광주가 유수부로 승 격되고 수어영이 정착된 후에 그려진 지도로서 앞의 남한산성도와 몇 가지 차이점을 보인다.

물론 세부적인 표현에서는 남한산성도에 미치 지 못하지만 관아의 변화상을 밝히는데 여러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위의 두 지도는 시기적으로 150∼200년 정 도의 시차를 갖고 있다. 지도에 표현된 관아시 설들을 영역별로 구분하여 비교하면 [표 3]과 같다.

위와 같이 17세기 초반 광주부의 읍치가 남 한산성으로 옮겨진 후의 관아시설의 배치와 19 세기 유수부와 수어영이 통합되고 새롭게 관아 가 정착된 시기, 즉 읍치가 이전되고 약 2세기

(13)

<그림 9> 남한산성도(중영, 이아, 삼신사우)-고지도첩 (영남대학교 박물관) 정도 경과한 후를 비교할 때 몇 가지 변화상

이 나타났다.

먼저 광주부 행정 및 군사제도의 변화에 따 른 이아의 이건이다. 읍치의 조성시기에는 행 궁의 남쪽에 배치되어 광주부의 통치행정을 보 좌하다가 영조 25년(1748) 판관의 아문(衙門) 인 제승헌이 수어영 뒤편에 건립되면서 연무관 주변에 새로운 이아 영역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중군(中軍)의 집무처인 중영(中營)의 변화를 들 수 있다. 광주 유수가 수어사를 겸 하게 되면 군정을 담당하는 중군을 두게 되는 데,「남한산성도」에서 중영은 행궁의 전면인 객사의 맞은편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수어청의 남한산성으로의 출진 후 중군은 서울 에 머물다가 조련과 전최(殿最) 등의 일이 있 을 때에만 참여하는 것으로 군제가 바뀌면 49) 독립된 중영관아는 폐지되었다. 또한 현 49)『國譯 朝鮮王朝實錄』, 正祖 19年(乙卯), 11月 17日 (甲子) “유린이 아뢰기를,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아문이

절사의 이건을 볼 수 있는데, 현절사는 병자호 란의 삼학사인 오달제, 윤집, 홍익한 그리고 김상헌과 정온 등 오학사의 위패를 모신 사우 (祠宇)로 숙종 14년(1688)에 산성의 남서쪽 언 덕위에 건립되었다가 1711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50)되었다.

끝으로 행궁 권역의 확장을 둘 수 있다. 좌 전과 우실이 1711년 건립되었고 지도에는 보 이지 않지만 좌승당과 일장각, 그리고 한남루 (1798년) 등이 차례로 들어섰다. 특히 한남루 는 발굴조사51) 결과「남한산성도」의 행궁 앞

세 개나 설치되어 있으므로 원래 폐단이 발생할 단서가 없지 않습니다. 그 중에 서울에서 멀리 절제(節制)할 수 있는 것을 뽑아 본다면 바로 중군(中軍)이 이에 해당됩 니다. 지금 만약 기영(畿營) 중군의 예에 의거하여 경성 (京城)에 머물러 있게 하면서 조련과 전최(殿最) 등의 절목과 관련하여 때때로 와서 참여하게 한다면 관방(官 方)으로 보나 군제(軍制)로 보나 합당한 방편이 될 것입 니다. 하니, 따랐다.”

(국사편찬위원회, http://sillok.history.go.kr) 50) 廣州文化院,『顯節祠誌』, 2008, 8쪽

(14)

연못의 전면에 건축된 것이 확인되었는데, 정 조 22년 이후 행궁 영역이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유수부 및 군영의 폐지

고종 32년(1895) 갑오·을미개혁으로 조선왕 조의 지방군이 사실상 해체되면서52) 전국의 진영(鎭營)이 해체되고 각 관아공해와 토포기 구는 소재 부청(府廳) 혹은 군청으로 이속되었 다.53) 따라서 광주부의 군영시설들도 폐지되었 을 것이며, 군영이 제외된 광주부의 행정체제 및 시설 또한 새롭게 정비되었을 것이다.

조선후기 남한산성의 수어영은 연무관을 비 롯하여 100여칸이라고 하였으나 1900년『量 案』에 등록된 수어영 관련 시설54)로는 영노 청, 악공청, 아병청, 별순교청, 그리고 초관청 등 5개 관아만이 남아있다. 이 시설들은 모두 행궁의 전면 주위에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조 선후기 수어영 청사들이 연무관 주변이 아닌 행궁과 그 주변에 위치했던 것을 나타낸다.

한편 여기서 별순교청(別巡校廳)은 구한말 지방관제의 변화에 따라 새롭게 생긴 경찰관련 청사(廳舍)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설명을 볼 때, 이미 수어영 청사로서의 기능은 폐지되었 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광주부는 1896년 13도로 개정될 때 광주 부윤을 두었는데, 이때 광주 읍치의 행정 을 담당하는 실무관청은 행궁 및 행궁 주위에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광무 4년의『量案』를 통해 구한말 아사(衙 舍), 작청 등 행정관아의 위치가 확인된다.

즉 1896년 이후, 이아는 폐쇄되고 실무관청 51) 토지주택박물관·경기문화재단,『南漢行宮址(제7·8차 조사보고서)』, 2010 참조

52)『高宗實錄』, 高宗 32年(乙未) 7月 15日(癸丑) (국사 편찬위원회, http://sillok.history.go.kr)

53)『官報』第116號, 勅令 141號, 開國 504年 7月 18日 54) 앞의 3-2장, [표 2] 참조

은 행궁과 유수부의 본부아사(本府衙舍)55) 물에 이전된 것으로 파악된다. 유수부가 철폐 됨에 따라 판관(判官)은 폐지되고 이아 관련 시설은 광주 부윤의 통치행정시설로 통폐합되 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아의 이전는 1900년

『量案』에서 작청의 명칭과 위치, 그리고 이 아(貳衙) 관련 관아에서 전향청, 전작청 등 시 설명 앞에 ‘전(前)’ 또는 ‘본(本)’을 붙이는 것 에서 확인할 수 있다.

5. 결론

남한산성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읍치 가 아니라 수도권을 방어하기 위한 배도(陪都) 로서 새롭게 조성된 군사행정의 중심지였다.

읍치의 배경이 되는 청량산이라는 진산을 갖추 었고 여타의 군현 읍치와 같이 통치행정시설, 제사시설 등이 주요한 장소에 자리 잡았으며 성내의 중심부에서는 5일마다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읍치의 조성 목적이 유사시 왕 실의 피난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군사도시로 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왕이 머물 수 있는 행 궁과 이를 지킬 수 있는 군영이 설치됨으로써 여타의 군현 읍치와 차별성을 갖고 있었다.

17세기 읍치의 이전에 따른 남한산성 읍치 의 형성과 그에 따른 성내의 주요시설, 특히 관아건축의 형성과 시대 변화에 따른 변천 및 그 배경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조선후기에 나타난 남한산성 관아의 가장 큰 변화는 광주부 행정 및 군사제도의 변화에 따른 이아의 이건이다. 이아는 읍치의 조성시기에는 행궁의 남쪽에 배치되었다가 이 후 광주 유수부의 승강(昇降), 그리고 수어청

55) 本府衙舍는 1796년 貳衙의 내아를 신축할 때, 행궁 의 우측으로 기존 내아 건물을 옮겨다 지었으며 규모는 26칸이라고 하였다.(『廣州府邑誌』(奎12180) 公廨 “本 府衙舍 在 行宮右 二十六間 正宗朝丙辰移作貳衙內衙”)

(15)

경청의 설치와 혁파 등에 따라 감영(監營)의 이아처럼 별도의 영역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후 정조 19년(1795) 수어경청이 혁파되고 영구 히 남한산성으로 출진, 유수겸수어사의 일원체 제로 전환됨에 따라 연무관 주변에 완전히 정 착되었다. 이는 1900년 양안과 1912년 지적원 도 등을 통해 확인된다.

둘째, 고지도에서 확인되듯이 독립 아문(衙 門)인 중영관아의 폐지이다. 수어영의 군정을 담당하는 중군은 본래 행궁의 전면에 설치된 별도의 관아에서 업무를 처리하였으나 18세기 말, 수어청의 남한산성으로의 출진 후 서울에 대기하는 것으로 군제가 바뀌면서 기존의 독립 된 중영시설은 폐지되었다. 이는 하나의 성안 에 3개의 아문이 있을 경우 발생되는 폐단을 미리 막고자하는 의도였다.

셋째, 갑오·을미개혁 이후, 즉 19세기 말에 나타난 관아건축의 변화는 수어영의 폐지와 행 정관아의 정비라고 할 수 있다. 1895년 수어영 폐지로 유수가 수어사를 겸하는 일원체제가 무 너진 후 판관의 이아는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읍치의 행정은 광주 부윤이 담당하게 되면서 아사(衙舍), 작청 등 실무관아가 행궁 및 주변 으로 이전되어 광주부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또한 기존의 군영 시설들은 광주부 경찰관련 업무을 담당하는 관아로 변화되었다.

본 연구는 조선시대 문헌과 고지도를 통해 남한산성 관아의 구성과 변화상을 추적하였던 기존 연구의 틀을 확장하여 구한말(대한제국) 및 일제강점기 사료를 통해 관아의 위치를 확 인함으로써 그 변화상에 좀 더 실증적으로 다 가설 수 있었다.

<참고문헌>

1.『輿地圖書』,『大典會通』,『官報』

2.『國譯朝鮮王朝實錄』, (국사편찬위원회, http://sillok.history.go.kr),『新增東國輿地 勝覽』(고전번역원, http://db.itkc.or.kr) 3. 한국학문헌연구소 편, 邑誌, 京畿道편,『廣

州邑誌』(奎10740),『廣州府邑誌』(奎 12180),『畿甸營事例』(奎12200), 1985 4.『量案』(1900), 『土地調査簿』(1911),

『地籍原圖』(1912)

5. 광주시·광주문화원, 『국역 重訂南漢志』, 2005

6. 홍금수,「山城聚落硏究 : 南漢山城 廣州邑 治의 形成과 衰退」, 한국지역지리학회지, 제10권 제2호, 2004

7. (사)경기도향토사연구협의회, 숲과 역사가 살아있는남한산성, 경기농림진흥재단, 2008 8. 한양대학교 박물관, 『남한산성 지표조사

보고서』, 1986

9. 왕현종,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과 갑오개 혁, 역사비평사, 2003

10. 수원시, 수원 화성행궁, 2003

11. 金起德, 「朝鮮後期 忠淸道 官衙建築의 配置體系」, 청주대 박사논문, 2002 12. 車文燮, 守禦廳硏究(上), 동양학 (6), 1976 13. 광주시청·(재)한얼문화유산연구원, 연무관 해체보수공사 문화재 발(시)굴조사 약보고 서, 2009

14. 토지주택박물관·경기문화재단, 南漢行宮 址(제7·8차 조사보고서), 2010

15. http://people.aks.ac.kr 16. http://e-kyujanggak.snu.ac.kr

접수(2011. 8. 15)

수정(1차: 2011. 11. 7, 2차: 2011. 11. 25) 게재확정(2011.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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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tion of Namhansanseong Government Office in the Late Choson Dynasty

Kim, Ki-Deok

(Instructor, Joongbu University)

Abstract

Namhansanseong fortress (南漢山城) is not Eupchi (邑治) created for ages but the new settlement of public and military administration as Baedo (陪都) to defend capital territory.

Namhansanseong has Jinsan (鎭山) that is named Cheongnyangsan (淸凉山) and its government office building was located in the main place, also a periodic five-day market was being held in the center of fortress.

This study is find out the transition and its historical background of government office building on Namhansanseong by the relocation of Eupchi in the 17th century.

The conclusion of analysis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The main change of government office in the late Choson dynasty is to move Yi-a, administrative complex (貳衙) around Yeonmugwan (演武館). Since 1795, the 19th year of King Jeongjo (正祖), this was fixed by the end of the Choson dynasty on the unification of Magistrate which is also Defense Commander. In the second place, the military office on Jungyeong (中營) that is Junggun's (中軍) place of work was abolished by the reform of Junggun system.

Thirdly, transition of the end of the Choson dynasty is the abolition of Sueoyeong (守禦營) and the realignment of government offices. Namely, the administrative agency was moved to Haenggung (行宮) after the collapse of unification in 1895. Also former military offices was changed to police administration on Gwangju-bu (廣州府), Gwangju county level unit.

Keywords : Namhansanseong, Eupchi, Government Office building, Haenggung, Yi-a, Sueoyeong, Gwangju-bu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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