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중대 정치사를 통한 향가 이해의 편의성과 ‘통설’의 구축 과정
1. 역사주의적 방법론의 이해
1) 역사주의적 방법론의 관점
① 작품을 통한 작가의 추정(전기 연구).
② 작품 활동의 무대가 되었던 시대에 대한 면밀한 관찰.
③ 될 수 있는 한 과거의 시대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역사적 재구성, historical reconstruction).
④ 역사적 재구성을 위한 비문학적 사실들의 광범한 수집.
⑤ 문학을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로 보는 태도.
⑥ 이 결과(문학)가 제2의 원인이 되어 제3의 결과를 낳는다고 보는 관점.
⑦ 민족성, 민족이념 등 문학을 결정하는 요소들의 추구.
2) 역사주의적 방법론의 실제
① 원본(text)의 확정 : 善本 또는 先本을 확정하는 작업과 원전비평, 변증.
② 언어의 역사성 : 음운론, 어휘, 구문.
③ 작가연구 : 포괄적 연대기, 문학적 초상화, 유기적 전기(비평적 전기) ④ 작가와 작가 사이의 영향 관계.
⑤ 문학사의 문제 : 사실 배열 / 작품 상호 영향 관계 / 작자와 독자의 경험 / 반복되는 양상.
⑥ 문학 특유의 관습
2. 신라 중대 정치사를 보는 관점
1) 정치사·사상사에 대한 통설(이기백)
① 정치사 : 중대에서 하대로의 변혁을 전제왕권 추구 과정에서 왕권과 신권의 갈등으로 이해.
· 신라사의 시대 구분 : 上代/中代/下代(삼국사기), 上古/中古/下古(삼국유사).
- 上→中은 사기는 武烈王代(삼국통일), 유사는 法興王代(불교전래)로 서로 다름.
- 中→下는 일치함 : 景德王代~惠恭王代(근래에는 宣德王代~元聖王代로 보기도 함).
· 혜공왕대(765~779) 사료의 해석
- 11년 金隱居의 난(왕의 즉위를 고하는 사신=왕당파 / 그러나 반란).
: 앞선 4년의 大恭, 6년의 金融의 난은 왕을 적대한 반란으로, 그 성격이 다름.
- 10년(金良相 상대등 임명)~13년 사이 견당사 8회 파견
: 새로 집권한 金良相 일파의 배경 구축 vs. 혜공왕 일파의 정권 회복을 위한 시도.
- 11년 官號의 복고 : 경덕왕에 의한 중국식 관호(전제왕권 지향) 청산
= 중대 이전 귀족 연합체의 복고에 대한 열망.
- 14년 김유신 자손(6년에 난을 일으킨 김융)의 伸寃.
- 金志貞의 반란을 진압한 김양상이 혜공왕과 후비들을 살해하고 자립함(宣德王:780).
· <원가>의 이해 : 신충이 두 친구와 함께 경덕왕 22년 斷俗寺에 출가할 무렵 지었다 함.
이로써 볼 때 이 <怨歌>는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신충이 등용되기 전에 지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차라리 그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지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이 <怨歌>는 王의 사랑을 받던 寵臣이 失意의 末年을 노 래로 읊어 自慰한 것이요, 그렇게 강요당한 世態의 變化를 원망한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 단속사 : 신충, 金邕과 정치적 입장이 같은 왕당파였던 李純이 건립한 절로, 率居의 維摩 (재가불교의 이상적 체현자)像이 있었음.
② 사상사 : 몇몇 고승의 전기 또는 종교 개념 위주로 보는 관점을 지양하고, 사회사 중심 해석 시도.
→ 계층 결정론의 시각이 매우 강하여 사상사의 ‘주체’가 사라짐.
단순 선후관계와 인과관계 사이의 구분이 이루어지지 않음(고대사 연구의 제약).
· 신라 정토신앙의 유형
- 念佛에 의한 現身往生信仰 : 염세적 경향이 큰 낮은 신분 처지에 어울리는 사상으로 파악.
<郁面西昇> : 여종이 산 육신 그대로 정토에 왕생함.
<布川山五比丘> : 평민 신분일 가능성이 큰 염세적인 인물들.
<廣德嚴莊>(<원왕생가> 전승담) : 신 삼는 일(광덕), 화전민(엄장).
- 追善에 의한 死者往生信仰 : 현세 긍정적 경향을 지닌 왕·귀족에게 걸맞는 것으로 판단.
<文虎王法敏> : 아우 김인문을 위해 관음도량(생전)/미타도량(사후) 설치.
<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 <鍪藏寺 阿彌陀佛造像記>, <大成孝二世父母>.
- 功德에 의한 死後往生信仰 : 재력을 갖춘 6두품 또는 하급귀족에게 어울리는 신앙.
<郁面西昇> : 욱면의 주인은 살아있는 동안 느긋하게 그러나 꾸준히 신앙함.
<調信> : 뉘우친 이후 사재를 털어 절을 지음.
- 공덕에 의한 현신왕생신앙 : 지방 村主 출신으로 京位를 얻은 인물의 좌절감 반영.
<南白月二聖 努肹不得 怛怛朴朴> : 미녀의 해산을 도와준 경제 상황.
- 공덕과 추선이 결합된 정토신앙 : 추선 역시 공덕의 일종임에 유의함.
<月明師 兜率歌>의 <祭亡妹歌> 전승담 : 작자의 신분이 복합적임(승려+낭도).
2) 통설에 대한 계승과 반론
① 계승(김두진) : 신라 화엄사상을 전제왕권 강화의 이념적 도구로 해석함(← 一卽多, 多卽一).
· 신라사상사 : ‘전제왕권 + 일반 민 vs. 귀족’의 구도
→ <普賢十願歌> 창작 배경을 광종과 균여의 연대로 볼 수 있음.
· 사상사를 정치사에 종속된 것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매우 큼.
· 이기백이 주목했던 하급 귀족(6두품)의 긍정적 가능성에 대한 해석이 실종됨.
②반론(김상현)
: 전제왕권에 대한 강조는 화엄사상 나아가 신라 중대의 사상사적 동향에 대한 誤導로 이어짐.
· 불교는 정치적 수단,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지지받은 신앙, 사상이었음.
· 신라 중대는 政敎分離의 경향이 진전되어 불교계와 정치의 운용은 별개였음.
· 경덕왕이 만난 고승들은 왕권의 ‘조력자+비판자’의 역할을 함께 했음.
(國師, 王師는 상징적 존재였을 뿐, 국정에 참여·간섭하지 않았으며, 이념을 제공할 리 없음.)
· 이들의 해석은 ‘호국의지’를 지나치게 강조했던 한 시대의 소산에 불과함.
3. 역사학의 성과 원용
: 박노준, 신라가요의 연구(1982)
· <安民歌> ← 이기백의 구도(경덕왕대 = 왕당파 vs. 반왕당파) 상당 부분 수용
2. 信忠 : 金思仁[반왕당파 – 작성자 주]의 뒤를 이어 상대등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孝成王 때부터 寵臣이었 으며 경덕왕 때에 와서도 최고관직을 역임할이만큼 왕의 신임이 두터웠다. 신충이 상대등직에 머물러 있던 왕 16년에서부터 22년 사이에 예의 漢化정책이 단행되었으니 이는 그가 왕당파에 속하는 인물이었음을 분명히 확 증해주는 사실이라고 이교수[이기백-이하 같음]는 말하고 있다. 또 이교수는 삼국유사 信忠掛冠條에 나타나 있는 기사 중 그가 관직을 떠난 동기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파에 의한 정치적 정세가 그로 하여금 은 퇴를 강요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교수는 신충의 <원가>를 효성왕 때의 작품으로 보지 않고 그가 관직에서 밀려난 경덕왕 말년에 지어진 작품이라 推斷함으로써 앞서의 결론을 補遺하고 있다. <원가>의 제작연대에 대해 선 이교수 견해에 승복할 수 없으나 신충이 왕당파에 속한 인물이라는 점에 관해선 이교수와 의견을 같이 한다.
다른 것 다 그만두고 그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계속 왕의 복을 빌었다는 사실만 가지고서도 그를 왕당파로 규정 하는 일에 주저할 필요는 없다.
3. 金邕 : 사기 경덕왕 22년조에 ‘上大等信忠 侍中金邕免’이라 하였다. 이로 보면 김옹은 신충과 정치적 노선을 같이 한 인물로 간주할 수 있으니, 김옹도 곧 왕당파로 규정함이 옳을 것이다. 유사 信忠掛冠條에 ‘景德王 22 年 癸酉忠與二友相約 掛冠入南岳’이라 하였으니 이 기록은 사기의 그것과 同質의 것임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신 충과 함께 남악에 들어간 이우 중의 한 사람이 곧 김옹임은 더 말할 여지가 없다.[그러나 근래에는 김옹이 훗날 김양상과 공존을 지속하고 있는 점을 근거로 반왕당파로 보는 견해도 있다. - 작성자 주]
4. 良相 : 양상이야말로 경덕왕 때는 물론 혜공왕 때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반왕당파에 속해 있던 인물이다. 김옹의 뒷자리를 양상이 차지한 것은 경덕왕이 그를 신임하여 임명한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김옹 등의 왕당파 신하 들을 제거하고 오른 것이라고 이교수는 보았다. 양상이 반왕당파의 거두임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는 근거로는 혜공왕 말년 그 스스로가 자립하여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혜공왕 때에 양상이 보여준 반왕당파적 행동 일 체를 알아내는 일은 이교수의 논문 「신라 혜공왕대의 정치적 변혁」에 미루기로 한다.
① 민본주의 : 민을 위하여 군·신·민의 파벌의식을 모두 없앨 것을 직언한 내용임.
② “구믈ㅅ다히 살손 物生 / 이흘 머기 다라” : 경제적 위기에 대한 불안감.
③ 五岳三山神의 현신(上帝로부터의 벌) → <안민가>를 통해 타개하고자 함.
④ 榮福僧의 문제 : 신하들의 추천을 물리치고 예전의 월명사와 같은 옷차림의 충담사를 맞이함.
· <제망매가>는 평범한 사람의 죽음 의식을 바탕으로 했으며, 거창한 종교나 시대정신과는 무관함.
· <모죽지랑가>, <우적가>를 몰락한 화랑단의 정황에 비추어 해석함.
· <헌화가>에서 ‘老翁’의 정체 : 절벽까지의 지름길을 알고 있던 시골 노인.
· <서동요>에서 서동의 정체 : 실제로 신라와 通婚했던 동성왕으로 보아야 함(귀족의 딸).
→ 연구 목적 :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 문학적 가치가 큰 해석은 무엇인가?
[참고] 작가 충담사에 대한 기본 관점(김승찬, 신라향가론, 1999)
충담사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첫째, 뜻이 높은 <찬기파랑사뇌가>를 지은 것으로 보아 사뇌가 창작의 대가인 동 시에 절의 있는 화랑(기파랑)을 모셨던 낭승이었으며, 둘째, ‘납의를 입고 앵통을 짊어진 것’을 보아 원효나 혜공처 럼 검소한 불자생활을 신조로 한 승려였으며, 셋째,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달여 남산의 삼화령에 있는 미륵세존에게 공양하는 것’으로 보아 미륵세존을 숭앙한 승려였고, 넷째, 왕이 그를 왕사(신라시대에는 국사라 칭하 였음)로 봉하려 하자 굳이 사양하면서 받지 아니한 것으로 보아 권위나 권좌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고매한 인격자 인 동시에 왕사(국사)라는 직분이 불교계나 통치권에 직접 참여하지는 아니하나 통치권과 민중의 갈등을 완화하고 완충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인데 이 직분을 거절한 것으로 보아 통치권에 타협하기를 꺼린 민중편에 선 승려였으며, 다섯째, 그가 지은 <안민가>의 내용으로 보아 호국애민사상을 지녔던 지성인이었다.
4. 방증 자료를 통한 실증적 추론
: 윤영옥, 신라시가의 연구(1982)
· <處容歌> : 여러 곳에 산견되는 처용 관계 문헌의 집성이 필요함을 주장하고, 문헌별로 교차 검토.
→ 재래신앙과 외래신앙의 교묘한 관계가 성립하는 사례로서 주목함.
① 헌강왕대의 태평성대 묘사는 실상은 비판적 서술임(← 東國通鑑의 유사 표현 참조).
② 학성(지금의 울산) 개운포에 왕림한 것은 東海 海神(국가 수호신)에게 기도 의식을 행하려 함.
③ 학성은 國行祭所가 있었으며, 신라불교의 유입로였음이 다수 문헌에 발견됨.
[大東史略] 有人處容(處容東海靑龍之子 靑龍與日本南海白龍相鬪失藪遣子求救)者하야 詣王前歌舞하고…
/ 皇龍寺 阿育王 丈六尊像 설화도 이러한 실상을 반영하는 것이며, 慈藏이 佛經, 佛骨, 佛具를 유입해 온 것이 모두 울산을 통해서였음(자장이 만난 神人=동해 용왕=처용의 아버지?).
④ “後人異之, 作是歌(高麗史)” → <처용가>는 처용의 작품이 아님.
⑤ 驅役 노래는 따로 있었거나, 주술의 기능은 노래가 아닌 처용의 畵像에 있었음.
→ 憑神된 처용 가면의 입으로 노래가 불릴 때, 진정한 <처용가>임.
<처용가>는 외래종교 유입 이전의 재래신앙과 醫巫呪術에 바탕한 노래임.
⑥ 처용=靑龍=東海龍.
· <처용가>는 역사인가, 설화인가? - N. Frye, Literature and Myth 참고
신화와 위사(false history) 사이에는 기이하고도 고집스런 연관이 있다. 즉, 신화가 나타내주는 것은 과거에 일어 났던 사실이 아니고, 현재에 존재하는 사실을 정당화해주기 위하여, 그것이 과거에 일어났던 것으로 이야기되는 것 이다. 이처럼 신화는 현상(Status quo)을 합리화해주는 사회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신화는 단지 우리가 행하고 있 는 그 사실들을 우리가 왜 행하고 있는가 하는 이유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런 사실들을 왜 계속 행 해야만 하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 <慕竹旨郞歌> : 전승담의 기록 / 창작 동기의 현실 맥락 / 역사적 동기 등을 함께 고려함.
① 죽지랑 관련 기록(유사·사기) 검토
- 죽지랑의 아버지 述宗은 6부 귀족회의 6인 가운데 1인이었음.
- 전제왕권의 필요에 의해 신설된 執事部의 시중을 맡았음.
- 진덕여왕 3년(649) 백제 殷相의 7성 습격 때 김유신과 함께 출격하는 등 군공을 다수 쌓아 2등 伊湌의 지위에까지 오름.
② 죽지랑의 생몰연대 추정
- 진덕여왕~신문왕까지 4대 45년간 재상을 지냈고, 유사 제목에 따르면 효소왕대 인물인데,
유사의 앞뒤 기사를 보면 시기순으로 편집되었으므로 70년 이상 장수하였음.
(그러나 득오 사건 자체가 효소왕대에 일어났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음: 박재민) ③ <효소왕대 죽지랑> 기록의 특이성
- 牟梁里에 대환 과도한 징계 : 관직에서 출신자를 모두 축출함.
- 圓測(613~696)에게 승직을 주지 않음 : 渡唐 상태였으며, 승직이 아직 없을 연배가 아님.
④ 창작 동기와 시기(본 작품 창작 당시 죽지랑의 생존 여부가 쟁점이었음) - 본문의 구성
: 득오가 익선에게 잡혀갔다가 풀려난 사건 → ‘初①’(죽지랑 탄생담) → ‘初②’(모죽지랑가) - 初得烏谷慕郞而作歌 : ‘죽기 이전 언젠가’로 재구성해야 함.
- 창작 시기 : 효소왕 1~5년(5년에 원측이 죽기 때문).
- 창작 동기 : 죽지랑에 대한 경건한 숭앙심(전승담에 묘사된 익선의 인격과 대조).
⑤ 탄생담에 따르면 죽지랑은 彌勒化生의 존재이지만, <모죽지랑가>에서는 익선의 세속성에 대비되 는 이상적 인간상임.
5. 신자료에 대한 갈망
: 김학성, 「필사본 화랑세기와 향가의 새로운 이해」, 한국고시가의 거시적 탐구 (1997).
· 美室의 <送郞歌> : 사다함 출정시(562?)에 미실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음.
바람이 불다고 하되 / 임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하되 / 임앞에 치지 말고 빨리빨리 돌아오라 / 다시 만나 안고 보고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 차마 물리러뇨. (정연찬 해독)
- 미실의 창작을 인정할 수 있다면?
① 현존 향가 중 最古의 것.
② 현존 사뇌가 양식 최초의 것.
③ 8수체가 10구체의 축약형이라는 가설은 무너짐.
④ 왕실 귀족 여인의 작품 ← 기존의 향가에 없는 여성화자의 출현.
⑤ 기존 향가의 제의적, 교술적, 송찬적 취향과는 구별되는 민요적 취향.
⑥ 담당층에 따른 선호 양식 체계화
: 화랑·낭도(8구체: 송랑가/모죽지랑가/처용가/도이장가), 낭도승려(10구체).
· 斯多含의 <靑鳥歌>(漢譯) : 사다함의 답가에 해당함.
청조여 청조여 / 저 구름 위의 청조여 어찌하여 / 내 콩밭에 머무는고//
청조여 청조여 / 곧 내 *** 청조여
어찌하여 / 다시 날아 구름 위로 들어가는고//
기왕에 왔으면 가지나 말 것을 / 또 간다면 무엇 때문에 와서 공연히 눈물나게 하고 / 애간장이 타 말라 죽게 하는고//
죽어 무슨 귀신이 되리 / 내 죽어 神兵이 되어 殿君 곁에 날아들어 / 아침마다 저녁마다
전군 부부를 보호하고 / 천년만년 길이 멸하지 않으리.
- 사다함의 창작을 인정할 수 있다면?
① 이 시기 ‘長歌’의 실체(4구체 반복 연장체+마지막 연에 몇 구 추가)가 확인됨.
/ 속요 <서경별곡>, <만전춘별사>와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에서 확인.
② 장가형 향가와 사뇌가형 향가의 공존 현상 확인.
③ 보다 고급음악(서정성이 더 높음)일 경우 향찰표기를 선호했던 현상의 추정.
④ <청조가> 양식의 후대적 계승 : 흥덕왕대 <앵무가>, 고려 예종대 <도이장가>.
· 기존 향가의 새로운 이해
① <혜성가> ← 화랑세기에 서술된 화랑 조직의 양상.
/ 이들의 직책이 좌방화랑(道義, 文事, 武事), 우방화랑(玄妙, 樂事, 藝事) 또는 전방화 랑(遊花, 祭事, 供事)일 가능성.
② <모죽지랑가>의 ‘花主’ : 풍월주의 正妻임이 밝혀짐(← 신라의 권력승계는 모계계승).
/ 모량부, 익선(대원신통) vs. 조정의 화주(진골정통?)
③ <처용가> : 가무를 잘한 처용은 무속인이 아니라 우방화랑에 소속된 묘화랑 7인 중 1인임 (← 동해의 7龍子 중 1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