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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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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 스힐레벡스 인간학의 현대적 함의 -

권영파*

(서강대학교 ‧ 신학 ‧ 박사과정)

이규성**

(서강대학교 ‧ 신학 ‧ 교수)

I. 서론

II. 스힐레벡스의 인간이해 1. 향주적 인간

2. 세계 안에서 하느님 앞에 서는 인간 3. 역사의 고통 앞에서 신비에 개방된 인간 4. 실천을 이끄는 희망의 보편적 구원성 III. 스힐레벡스 인간학의 함의

1. ‘참 소중한 당신’

2. 보다 나은 세계를 함께 창조하는 인간 IV. 결론

논 단

가톨릭대학교 인간학연구소

인간연구 제43호(2021/봄)

https://doi.org/10.21738/JHS.2021.04.43.159

* 공동주저자

** 공동주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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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살아가는 순간이 질문으로 가득 찬다. 무엇을 먹을까라는 반복적인 질문에서부터 최첨단 과학기술 개발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질문이 우리 삶을 수놓는다. 이렇게 보면, ‘호모 퀘렌스(Homo Quærens)’가 인간 의 특성을 가장 잘 집약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질문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의미와 직면한 사태를 해석하는 가운데 모든 사태와 경험을 정합적이고 논리적이며 필연적 체계로 설 명하려고 노력한다. 종교도 각 전승 안에서 인간과 우주의 의미를 전해 준다. 그러나 종교는 다른 영역과 달리 강렬한 종교체험으로부터 출발 하여 이 체험을 전승 가운데 해석하며 지평을 확장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 시대에 세계와 인간에 대한 질문은 과학이 모두 답하는 듯 보인다. 우주의 기원으로부터 질병과 재해의 원인을 넘어 행 동과 심리, 더 나아가 종교체험까지 과학이 설명하려는 장면을 목격한 다. 이렇듯 과학이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렌즈를 채색할 때 모성애나 이타적인 희생에서도 유전자의 진화전략만이 보이게 된다.

이처럼 과학적 사고가 점차 우리 사고에 깊이 파고드는 현실에서 종 교가 제시하는 세계관이 우리 경험을 정합적이고 필연적으로 설명하는 체계를 제공할 수 있을까를 묻게 된다. 만약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생 활 고된 경험의 의미가 신앙의 내용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신앙과 일상 모두는 그 생생함을 잃을 수 있다. 하젠 휘틀의 다음 발언도 이를 뒷받 침한다.

현대 가톨리시즘을 강타한 최대의 불상사는 교리와 예비자 교육에서

하느님 자체와 종교를 구명하는 데는 주력하면서도 이 모든 것이 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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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부단히 규명하지 않은 데 있다.

우리가 대치하고 있는 신 없는 인간과 이 세계는 인간과 세계 없이 홀로 존재하는 이러한 신에 대한 반동에서도 기인한다.

1)

그런데 현대 종교가 직면한 위기를 감안할 때 이러한 하젠 휘틀의 지적은 비단 그리스도교에게만 해당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종교인구의 감소가 그리스도교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종교에서 감지되는 종교인구 감소는 인간의 자기 이해와 자기존중감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 종교 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인간의 존재와 일상의 의미를 궁극적 존재와 연 결시켜 바라보는 시야를 열어주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안고, 벨기에에서 태어나 네덜란드 교 회에서 활동했던 스힐레벡스(Edward Schillebeeckx, 1914–2009)의 저술에 나타난 인간이해를 정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도미니코 수 도회 사제로서 스힐레벡스는 그 자신을 신학자 보다는 사목자로 자처 하며 동시대인의 사고방식에 녹아들어 생생하게 빛나는 그리스도교 진 리 전달 방안을 고민했다.

스힐레벡스는 ‘시대의 징표’를 읽으며 신자들뿐 아니라 교회 밖의 동시대인들을 독자로 설정하며 활발한 저술활동을 폈다. 도미니칸으로 서 아퀴나스 신학에 뿌리를 박았던 그의 신학은 다양한 철학·신학 사 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일상의 경험’을 하느님 체험과 연결시키는 작업에 주력했다. 이러한 작업에서 스힐레벡스는 세상의 고통과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인류의 연대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정리 한다.

1) 하젠휘틀, 심상태 역, 하느님-과학시대를 위한 신론 입문, 바오로딸, 1996.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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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스힐레벡스의 모든 논고는 인식론과 형이상학, 해석학 등을 견고하게 축조한 가운데 전개된다. 특별히 그의 인간학은, 모든 신학자 에게서 그러하듯이, 신론과 긴밀하게 연결되며 창조-구원-종말을 관통 하여 전개된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본 논문에서는 신학적 요소 를 가능한 배제하며 스힐레벡스의 인간학에서 우리의 존재와 경험에 스며든 초월적 의미가 어떻게 정리되는지를 살펴보고, 그의 인간학이 현대인의 자기이해에 주는 의의를 정리하려 한다.

II. 스힐레벡스의 인간이해

600여 편의 저술을 남긴 스힐레벡스는 라너(K. Rahner, 1904-1984) 와 더불어 현대 신학의 거장으로 꼽힌다. 그는 신신학(Nouvelle Théologie)의 조류 속에서 세계와 소통하는 교회를 고민하며 활발하고 적극적인 학문활동과 사목활동을 전개했다. 그렇지만, 방대한 그의 작 품 목록에서 신학적 인간학을 다룬 단독 저서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스힐레벡스의 인간학을 그의 작품에서 추출하는 작업을 할 수 있다.

스힐레벡스의 신론과 그리스도론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듯, 스힐레 벡스는 형이상학적 진리를 규명하기보다 인간에게 경험되는 바를 중심 으로 전체 신학논고를 전개한다. 그의 신학사상에서 신학과 인간학이 동전의 양면과 같이 전개되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스힐레벡스 신학에서 신학과 인간학의 관계는 다음 문장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하느님은 인간학을 드러냄으로써 신학을 그려낸다. 하느님은 신학을 드러냄으로써 인간학을 그려낸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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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스힐레벡스는 아퀴나스 신학에 뿌리를 두지만 고전적인 ‘신- 인간 이해’를 고수하지 않는다. 스힐레벡스의 인간학은 단순히 인간존 재의 본질을 규정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스힐레벡스 인간학의 관 심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인간을 구원으로 부르시는 ‘하느님과 인 간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처지와 미래를 그려내는 데 집중된다.

스힐레벡스 신학에서 ‘인간을 위한 하느님 God for human being’

에 관한 논의는 인간의 의미에 대한 논의와 직결된다. 그에 따르면, 인 간의 진정한 의미는 인간의 신비와 하느님의 신비를 모두 관통할 때 실 현된다. 여기서 하느님께 많이 의존할수록 자신을 초월하는 가운데 진 정한 자아에 가까이 도달한다는 논의흐름이 치밀한 신학 논고 위에 개 진된다. 또한, 인간의 경험과 하느님의 은총 및 활동을 긴밀하게 연결 하는 스힐레벡스 신학의 구도에서 신앙의 정치적이며 신비적인 특성 간의 상보관계가 드러난다.

이번 장에서는 스힐레벡스에게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인간의 실존적 처지가 하느님 체험으로 연결되는 흐름을 정리하려 한다.

1. 향주적 인간

스힐레벡스 인간학의 특징을 집약하는 개념은 향주적 자세 theologal attitude3)이다. 스힐레벡스는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으로 경

2) Schillebeeckx, “Faith Functioning in Human Self-understanding”, T. Patrick Burke(eds.), The Word in History: the St. Xavier symposium, New York: Sheed and Ward, 1966, p. 53. 본 논문에서 인용된 스힐레벡스의 저술이나 강연의 원 출처는 다음 자료를 따랐다. Bibliography of Edward Schillebeeckx 1936-1996. compiled by Ted Schoof, Jan Van de Westelaken, Baarn, 1997.

3) 본 연구에서 theologal은 ‘향주적’으로 번역한다. 이러한 번역은 우리나라 교리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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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할 수 없는 하느님과의 친교를 강조하기 위해 이미 사용되지 않는 신 조어 neologism를 사용한다.4)

나는 하느님과 인간 간의 상호주체성과 서로 간의 친교를 표현하기 위해 ’theologal’이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여기서‘theologal’은 본성 안에 있는 암묵적 심연의 차원을 나타내는(중략),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의 초 자연적 관계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지시하는 (중략) ‘초월론적 tran- scendental’이라는 단어와 구별되어 사용된다.

5)

스힐레벡스가 ‘향주성’을 통해 말하려는 바는 하느님에 의해, 하느 님께로 정향된 상태로 창조된 인간 존재의 본성이다. 이를 통해 그는

virtus theologica는 향주덕으로 번역되었다가 비교적 최근에 이르러 대신덕으로 번역된 사실을 반영한 선택이다. 연구자는 향주적이라는 번역이 스힐레벡스가 이 단어를 선택한 취지에 적합하다고 판단한다.

4) Ibid p. 59. 미주 1; Schillebeeckx, “Life in God and Life in the World”, God and Man, New York: Sheed and Ward, 1969, p.161, fn 4. 스힐레벡스는 여러 곳에서 theologal이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다고 언급하며 ‘신조어neologism’를 사용하는 데에 대한 양해를 구 한다. 스힐레벡스가 언급한 바와 같이, theologal은 영어와 독일어, 네덜란드어에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영어의 경우, 17세기 초까지 향주덕 theological virtues을 의미할 때 사용되었다고 Oxford English Dictionary에 나타난다. 이 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theologal은 19세기 후반까지도 큰 교회에 속해서 신학이나 성경을 강의하는 강사를 지칭 하는 단어로도 사용되었다. 영어의 경우, theologal virtues가 theological virtues로 변형 되면서 이 단어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한편, Cessario에 따르면, 가톨릭 교리서의 영 어번역본에서 이 구분을 다시 소개했다고 한다. (이에 관하여, R. Cessario, “Capreolus on Faith and the ‘Theologal’ Life” Essays in Medieval Philogophy and Theology in Memory of Walter H. Principe, CSB, Burlington: Ashgate, 2005, p.136)이에 비해 불어 와 스페인어의 경우, 영어의 theologal과 theological의 구분이 아직도 남아있다. 불어의 경우 전자는 théologal로 후자는 théologique 로 사용된다. 불어에서 전자는 영어에서 이 전까지 사용되었던 두 가지 의미로 사전에 나타난다. 즉 교회에 속한 강사의 의미 외에도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실천과 관련하여 이 단어가 사용된다. 스페인어의 경우 아직도 teológal과 teológica가 구분되며 라틴어 virtus theologica에 대응해서 teológal을 사용하 고 신학이라는 의미를 표현할 때는 teológica를 사용한다.

5) Schillebeeckx, “Faith Functioning in Human Self-understanding”,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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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질문의 지평이자 질문의 궁극적인 지향점 인 하느님에게로 다가선다는 초월론적 인간학의 노선과 분명한 구분을 두려한다.

스힐레벡스에게 하느님은 인간 활동의 ‘동기motive’이자 궁극적인 지향점이다.6) 그에 따르면, 인간이 궁극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하느님 에 의해 하느님께 정향되었고 은총으로 이를 알게 되는, 인간의 실존이 다.7)

한편, 스힐레벡스는 세상 안에서 의미와 가치를 묻고, 윤리적인 결 단과 행동을 하며 종교를 통해 궁극에 다가가려는 인간의 노력을, 향주 성이 작용한 모습으로 간주한다. 스힐레벡스에게서 하느님으로 인해 존재하는 인간8)이 실행하는 윤리적 덕은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지닌 자 연적 덕이 아니다.9) 윤리적 덕은 인간 안에 심겨진 향주성이 작용한 결 과로 이해된다. 이 연장선에서 스힐레벡스는 정의와 진리, 형제애를 추 구하는 인간의 노력 안에 하느님의 활동을 본다.10) 또한 그리스도교 이

6) Schillebeeckx, Christ the Sacrament of the Encounter with God, CW (이하 CW), p.11/15, fn 14. 한편, 이하 본문의 인용각주에서는 총서의 경우, 원저나 첫 영어번역본의 출판년도 표기 없이, 총서의 페이지/영어본의 페이지를 표기하기로 한다. 이 총서는 스힐 레벡스의 탄생 90주년을 기념하여 2004년에 스힐레벡스 연구자들이 선정한 11권의 주요 저술로서, Schillebeeckx, The Collected Works of Edward Schillebeeckx (이하 CW로 약 기), London; T&T Clark, 2014로 출판되었다.

7) Schillebeeckx, “The Non-Conceptual Intellectual Element in the Act of Faith: A Reaction”, Revelation and Theology, CW , (이하 CW ) p.262/65-66. CW 에는 영 어번역본 Revelation and Theology. London/Sydney: Sheed and Ward, 1967와 The Concept of Truth and Theological Renewal (같은 내용으로 출판된 뉴욕판의 책제목은 Revelation and Theology 이다), London/Sydney: Sheed and Ward, 1968 이 포함되었 다. 영어본의 경우, 미국판과 유럽판의 페이지가 다르다. 총서에 표기된 원판의 페이지는 유럽판 페이지이다.

8) Schillebeeckx, “Dialogue with God and Christian Secularity” God and Man, New York:Sheed and Ward, p. 230.

9) Schillebeeckx CW, p.132/227-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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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의 종교를 통해 궁극적 실재와 조우하려는 열정에서 하느님을 향하 는 인간의 정향성을 볼 수 있다고 스힐레벡스는 말한다.11)

이러한 스힐레벡스의 인간 이해는 종교간 대화 뿐 아니라 무신론자 들과의 대화와 협력에 유용한 이해라고 말할 수 있다. 스힐레벡스가 라 너와 비슷한 시기에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이의 근거가 되는 신학논의를 치밀하게 전개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2. 세상 안에서 하느님 앞에 서는 인간

스힐레벡스는 생물학적 진화론에 따른 인간 이해를 분명하게 거부한 다.12) 스힐레벡스에게서 “인간의 삶은 주체로서의 인간 안에서 이뤄지는 신적인 삶 divine life이다. 인간 삶의 충만함은 인간을 초월한다.”13) 그 의 인간 이해에서, 인간이 자신의 활동과 세계 안의 경험 안에서 하느님 을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느님이 인간의 삶 안에서 세상에 대한 사 랑과 구원을 실현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제시된다.

스힐레벡스는 하느님에 의해 ‘특별하게 창조된’ 인간을 하느님과의 대화로 규정한다.14) 여기서, ‘대화’라는 단어에서 감지되듯, 스힐레벡

10) Schillebeeckx, “Priest and Layman in a Secular World”, World and Church, CW (이 하 CW ) , p.25/33.

11) Schillebeeckx, CW, 7/9 참조.

12) Schillebeeckx, “Man and his Bodily World”, CW , p.187/244. 스힐레벡스가 진화론 을 거부하는 이유는 성경에 나타난 인간창조를 수호하는 것과 무관하다. 다양한 동시대 사상을 적극적으로 검토했던 스힐레벡스는 진화론을 따를 경우 육체와 정신의 합일체인 인간이 지닌 ‘자유’를 설명할 수 없다고 보았다. 스힐레벡스는 철학자들과 일부 신학자들 이 제시하는 인간 이해 안에 담긴 이분법적 사고를 지양하고 하느님과 세계 앞에 온전히 자유로운 인간의 실존을 강조한다.

13) Schillebeeckx, “The Non-Conceptual Intellectual Element in the Act of Faith: A Reaction”, CW , p.261-262/65(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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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에게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주체와 주체 간에 맺어지는 나-너 (I-Thou)의 관계로 이해된다.15) 하느님은 인간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인간에게 자신을 전달하시고, 인간은 자유의지로써 하느님을 거부하거 나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설정된다.

스힐레벡스는 인간 정신이 인식대상의 내적실재inner reality를 직 접 인식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실재를 인식하 는 것은 오직 세계 안에서 구체적인 사람과 대상을 만나는 가운데 발생 한다.16) 이때의 자의식은 누군가와 함께 있는 자신을 인식하는 것을 의 미한다. 이는 인간이 세계 안에서 신체를 통해 다른 인간과 관계를 맺 는 스스로를 실현한다는 전제를 드러낸다.17)

이처럼 스힐레벡스는 인간이 신체를 통해 누군가와 관계 맺으며 세 계 안에 존재하는 가운데 자신을 인식한다고 주장한다.18) 이로부터 스 힐레벡스는 인간이 세계 안에서 자신의 인식하는 바로 그 인식에서 계

14) Schillebeeckx, “Dialogue with God and Christian Secularity”, p.216.

15) Ibid, p.220. Hilkert는 스힐레벡스 인간이해에서 인간이 지니는 ‘관계’의 특성은 초기와 후 기에서 변화된 양상으로 이해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전기에서 관계는 Martin Buber 부버의 I-thou 이해 연장선에 있다면 후기의 이해는 E. Levinas의 이론을 수용하 는 가운데 사회적인 인격을 강조한다. 대부분의 스힐레벡스 연구자처럼 스힐레벡스 신학 의 시기 구분지점은 Hilkert의 경우에서도 스힐레벡스가 사회비판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 한 1970년대 초이다. 연구자는 Hilkert의 주장과 달리, 스힐레벡스에게 인간이 하느님과 맺는 I-thou의 관계성과 세계 내 인간과 맺는 사회적 관계성이 스힐레벡스에게서 초기부 터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본다. 그에 대한 분명한 근거를 “Man and his Bodily World”를 비롯한 다수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Hilkert의 입장은 M.C.Hilkert, “The Story of Jesus and Human Flourishing Schillebeeckx’s Later Soteriological Anthropology”, Stephan van Erp, Daniel Minch (eds.), T&T Clark Handbook of Edward Schillebeeckx, New York, T&T Clark , 2020, p. 267-268을 보라.

16) Schillebeeckx, “Faith Functioning in Human Self-understanding”, p.43.

17) Ibid, p.42.

18) 스힐레벡스에게 이 상태의 인간 의식이 계시발생의 조건으로 제시된다. “계시는 세계 안에 서 자기 이해에 도달하려는 인간 존재, 자기자신을 찾는 인간존재를 전제한다.” Ibid,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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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험도 일어난다고 말한다.19) 이 때문에 하느님은 세상 밖 어디에서 자신을 계시하지 않고, 인간은 세상 밖 어디서도 하느님을 알 수 없다.”

는 정식이 성립된다.

스힐레벡스는 이제 세계 내에서의 이러한 자기인식은 종교적인 religious 자기인식이라고 규정한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하느님의 대 화인 인간 규정에 따른다. 여기서 하느님 앞에 선 존재인 인간이 세계 안에서 갖는 자아인식은 ‘하느님 앞에 서서 세계를 향하는 인식’이라는 논리가 제시된다.20)

이 때문에 스힐레벡스에게서 인간이 세계 안에서 그리고 세계를 통 해서 갖는 각각의 모든 자기인식은 하느님에 대한 인식에 의해 구성되 며 하느님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는 설명이 가능하게 된다. 스힐 레벡스는 이 모든 논의를 종합한 후, 인간을 ‘인간과 사물의 세계에서 하느님과 함께 있는 인간’(being-with-God-in-this-world-of-men-and- things)으로 정의 내린다.21)

스힐레벡스에게서 인간과 하느님이 맺는 절대적이고 유일무이한 관계는 인간이 세계 안에서 모든 관계 안에, 그리고 이 관계를 통해, 인 간의 자아인식 안으로 침투한다. 이로써 스힐레벡스 인간학에서 인간 이 세계 내에서 맺는 모든 관계와 경험은 하느님의 신비와 연결되며 하

19) Ibid, p.45.

20) loc. cit. 스힐레벡스가 1966년에 발표한 이 글에서 세계 내의 자인식으로부터 종교적 인 식으로 옮겨 가는 과정에 대한 서술이 극히 짧고 그 내용도 특별히 과정의 전이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스힐레벡스의 신학 작품 전체를 펼쳐놓고 본다면 일 상의 자기인식으로부터 종교지평으로 들어서는 지점은 스힐레벡스에게서 피조물이 자신 의 유한성과 우연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보다 넓은 지평에서 모색하는 지점, 곧 한계체험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스힐레벡스가 이 글에서 언급한 종교적 인식단 계로의 전이는 이후에 ‘부정적 대조경험’으로 정교하게 정리된다고 말할 수 있다.

21) Ibid,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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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님의 신비 안에 굳게 자리를 잡게 된다.22)

3. 역사의 고통 앞에서 신비에 개방되는 인간

스힐레벡스에 따르면 인간의 역사성으로 인해 인간의 모든 해석은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23) 모든 이해는 해석된 이해이다. 따라서 그 어떤 가치도 시공간을 초월하는 진리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스 힐레벡스에게서 진리는 인간의 활동을 통해 진리로서 드러나야 한다.

그런데 스힐레벡스 신학에서 인간이 지닌 육체-정신의 합일성은 동 시에 인간이 역사의 주체로서 역사를 그려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인간의 삶이 내재화된 신적 삶으로 규정되는 한에서 스힐레벡스에게 인간의 역사는 인간을 통해 활동하는 하느님의 구원역사가 된다. 이러 한 그의 역사이해에서 역사는 성사성을 갖는다. 그에게 역사는 하느님 이 인간을 통해 구원활동을 드러내고, 인간이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 는 계시의 장이다.

한편, 스힐레벡스 신학에서 인간의 역사성이 모든 경험을 신비의 영 역과 연결시킨다. 이러한 연결은 모든 관계에 내재하며 동시에 초월하

22) loc. cit

2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이후 스힐레벡스는 네덜란드 니메겐 대학으로 돌아가 해석학을 비롯한 여러 과목을 새롭게 강의한다. 이때부터 시작된 해석학적 성찰은 1967년에 미국에 서 강연하는 가운데 발전된 ‘비판적 부정성’ 개념으로 집약되어 이후 작품을 관통하는 비 판적-실천적 해석학으로 작용한다. 스힐레벡스의 해석학은 하이데거, 가다머, 불트만, 블 로흐, 몰트만, 메츠, 아도르노, 하버마스뿐 아니라 언어철학 등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가 운데 정립된다. 이러한 스힐레벡스의 해석학적 성찰은 스힐레벡스의 다음 저서에서 집중 적으로 다루어진다. Schillebeeckx, God the Future of Man, New York: Sheed and Ward, 1968. Schillebeeckx, The Understanding of Faith - Interpretation and Criticism, CW . 본 논문에서는 인간학에 집중하기 위하여 해석학적 논의 흐름을 다루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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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하느님의 자기전달로 인해 가능하다. 여기서 역사성이 신비성으로 연결되는 지점은 ‘부정적 대조 경험 negative contrast experience’ 또 는 ‘대조경험’24)의 자리이다. 이는 스힐레벡스 신학에서 인간의 역사성 이 이 경험을 직면하는 가운데 신비성으로 개방되기 때문이다.

스힐레벡스가 말하는 ‘부정적 대조경험’은 사회비판이론에 기대어 이해될 수 있다. 스힐레벡스는 아도르노가 제시한 ‘부정변증법’으로부 터 ‘비판적 부정성critical negativity’을 이끌어냈다.25) 그러나 아도르 노에게서 이론에 대한 비판적 부정이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고 공허한 챗바퀴를 도는 양상을 스힐레벡스는 따르지 않는다.26) 여기서 스힐레 벡스는 하버마스가 제시한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을 적용하여 구체적

24) ‘대조경험’이 처음 제시된 글은 1967년에 작성했다고 추정할 수 있는 “Theologische draagwijdte van het magisteriële spreken over sociaal-politieke kwesties/Church, Magisterium and Politics(1968)”이다. 이 글에서 그는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창설 한 까르뎅(Joseph Cardijn 1882-1967) 추기경을 언급하며, 까르뎅이 ‘대조경험’을 사용했 다고 언급한다. 이 글과 더불어 “De kerk als sacrament van dialoog”/“The Church as the Sacrament of Dialogue(1968)”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대조경험’이라는 용어가 나타난 다. 이 두 개의 글은 스힐레벡스가 1967년 11월 8일부터 12월 20일까지 미국에서 발표했 던 강의 원고이다. 스힐레벡스는 God the Future of Man의 서문에서 그가 이 글을 미국으 로 출발하기 이전에 작성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글과 이 글에 나타난 ‘대조 경험’은 그 가 사회비판이론을 분석한 글을 출판(1971년)하기 전에 이미 정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25) 보르그만에 따르면, 스힐레벡스 자신도 ‘부정적 경험’이라는 개념을 어디서부터 가져왔는 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보르그만은 스힐레벡스가 이 개념을 아도르노나 리꾀르로부터 가져왔다고 언급했지만, 그가 보기에 고통에 저항하는 비판적 부정성이라는 스힐레벡스의 통찰은 까뮈로부터 영향을 받았거나 또는 블로흐의 희망 이해를 따랐던 메츠나 몰트만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 Borgman, “Van cultuurtheologie naar theologie als onderdeel van de cultuur: De toekomst van het theologisch project van Edward Schillebeeckx”, Tijdschrift voor Theologie 34 (1994). p.350 각주 61.

26) 스힐레벡스는 에필로그의 미주를 통해 그가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을 차용했지만 그에 담긴 무체계의 체계 system of non-system는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밝힌다.

Schillebeeckx, "Epilogue: The New Image of God, Secularization and Man’s Future on Earth”, God the Future of Man, p.205. 미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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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경험의 종교적 의미를 ‘대조적 부정경험’으로 풀어낸다.27)

스힐레벡스가 말하는 ‘대조경험’은 직면한 사회문제에 관하여 그 자 신이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구체적인 윤리적 결 단을 내리게 하는 경험을 말한다.28) 그에 따르면 고통이나 악을 직면하 는 경험은 ‘부정적 대조경험’이다.

스힐레벡스가 고통이나 악의 경험을 부정경험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경험이 피해야 할 경험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때의 ‘부정’

은 아도르노와 하버마스 철학에 나타났던 태도와 상통한다. ‘부정’을 통 해 드러나는 바가 있고, 실천을 통해 진리로서 증명되어야 할 바가 있다 는 이해가 ‘부정적 대조 경험’ 안에 내포된다.

스힐레벡스가 ‘부정적인 대조 경험’을 통해 말하려는 바는 부정을 통해 이와 대조되는 긍정의 지평으로 옮겨 가는 움직임이다. 여기서 ‘긍 정’은 ‘부정’의 결과일 뿐 아니라 ‘부정’을 이끄는 기준이다. ‘부정’을 통 해 ‘긍정’ 앞에 개방되는 것은 악과 고통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깨닫 고, 이보다 나은 무언가를 찾는 움직임에서 긍정적인 것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힐레벡스에 따르면, 고통이라는 현실을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이보다 나은 무언가에 대한 긍정적 희망이 있을 때 가능하다. 이 긍정적 희망이 ‘부정적 거부’를 불러오며 희망을 현실화하는 지평으로 인간을 이끈다.

27) 사회비판이론과 스힐레벡스 신학의 관계는 William L. Portier, “Edward Schillebeeckx as Critical Theorist: The Impact of Neo-Marxist Social Thought on His Recent Theology”, The Thomist, Vol 48, No. 3, 1984, p.341-367; 같은 저자, “Schillebeeckx’

Dialogue with Critical theory”, The Ecumenist, vol. 21 (1983), p.20-27에 자세히 분석 되어 있다.

28) Schillebeeckx, “Church, Magisterium and Politics”, God the Future of Man, p.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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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정적인 경험 안에서, 이와는 다른 상황이 개방된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발하는 단언적인 ‘예’라는 주장이 나온다. 이 예는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합의이다. 이때 알려지지 않은 것의 내용은 긍정적으로 규정 조차 될 수 없는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것은 우리가 사실상 그 어디서도 찾지 않는 다른 세계, 보다 나은 세계이다. 이것이 미지의 것에 대한 개방 성이다. 거부하는 근본적이고 철저한 radical 경험은 내용 없이 ‘예’를 드 러낸다. 왜냐면, 개방된 ‘예’는, 부정적인 것에 대한 항의의 기반이기 때문 이다.

29)

인용문에서 감지되듯 ‘예’는 ‘아니오’의 기반인 동시에 ‘아니오’를 강 화시키며 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스힐레벡스에게 대조경험은 다양한 인간의 경험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적인 계시가 지닌 보편적 차원을 설명하는 자료로 간주된다. 스힐 레벡스에게서 이 경험은 세계 안에서 인간이 갖는 전-종교적 pre- religious 경험으로 제시된다.30)

스힐레벡스에 따르면 광범위하게 퍼진 부정의와 고통 앞에서 인간 은 자신의 한계뿐 아니라 무엇이 자신의 존재에서 진짜로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고통을 야기하는 원인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하고 이와 다른 차원의 희망 지평에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찾게 된 다.31)

이상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스힐레벡스에게서 고통이라는 대조 경

29) Schillebeeckx, “Christmas Meditation: Being Made Man”, For the Sake of Gospel, London: SCM Press, 2012, p.47.

30) Schillebeeckx, Christ:The Experience in the Modern World” CW (이하 CW ) p.5/5; Church: The Human Face of God, CW (이하 CW ), p.5/5; “Theological Quest” Essays. Ongoing Theological Quests,CW , p. 154-156.

31) Schillebeeckx, ““Church, Magisterium and Politics”, p.15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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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의 인식론적 가치는 미래를 찾고 그 미래를 개방하는 앎이다.32) 고통 앞에서 인간은 무언가 그 너머에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스힐레벡스에 따르면 이러한 감지가 마주하는 고통과 불의에 항거하는 움직임을 일 으킨다고 정리할 수 있다.

4. 실천을 이끄는 희망의 보편적 구원성

스힐레벡스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고통에 분노하며 저항하게 하는 원천으로서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때 그가 제시하 는 희망은 블로흐가 언급했던 인본성 humanum33)이다.

스힐레벡스는 다원주의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지닌 긍정적인 시각 (관점)안에는 지속적으로 위협받고 있는 인본성 threatened humanum 을 실현하려는 공통적인 추구common search가 있다고 말한다.34)

32) 이에 관하여, CW , p.814/819

33) 스힐레벡스는 무신론적 휴머니즘의 취지가 그리스도교가 추구하는 바와 상통한다고 말한 다. 여러 글과 스힐레벡스 사상의 발전과정을 감안할 때 스힐레벡스가 humanum에 담아 내려는 내용이 휴머니즘의 원천과 상관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humanism의 번역 어로 사용되는 ‘인문주의’가 신중심적 사고체계에 반발하며 인간중심적 가치관을 강조하 는 면을 부각시키는 점을 고려하여, humanum을 인본성으로 번역한다. 한편, 스힐레벡스 자신이 humanum을 정의한 기록은 없지만. God Among Us에서 신약성경으로부터 humanum의 세 가지 은유를 말한다. 그 첫째는 모든 남녀가 더 이상 주인-하인의 관계로 지배를 더 이상 받지 않는 결정적인 구원 또는 급진적인 해방이다.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은유이다. 둘째는 각 개인의 행복과 완전한 구원이며 이는 육체의 부활이라는 은유에 해 당한다. 셋째는 인간의 삶에 필요한 생태적인 환경의 완성으로서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은유에 해당한다. 이에 관하여, Schillebeeckx, God Among Us The Gospel Proclaimed (이하 God Among Us), p.161-162. 이 비유를 종합할 때 스힐레벡스가 humanum에 담아 내려 한 세상은 평등한 세상에서 충족된 행복을 안전한 여건에서 누리는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34) Schillebeeckx, “Correlation Between Human Question and Christian Answer”, CW

, p.7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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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스힐레벡스가 언급하는 인본성은 궁핍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 인 사람에게 국한되어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인본성은 의미를 찾는 인간의 노력에 있는 보편적인 요소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인본성은 “비인간적인 상황에 서 ‘인간화 humanization’를 요구하고 동 시에 인간화를 향한 요구를 드러내게 하는 모든 저항의 원천이다.35)

스힐레벡스는 비인간적인 상황에 분노하는 사람 안에는 희망이 있 다고 말한다. 이때, 스힐레벡스에게서 해방의 행동을 지탱하는 것은 신 자, 비신자가 공유하는 인간 경험의 보편적인 요소인 희망이다. 그에 따르면, 고통의 경험은 해방의 실천을 지탱하는 희망에 대한 세부화와 해석이라는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이 희망 안에 앎의 요소가 있고 이것 이 이론으로 형성될 수 있다. 이때, 실천은 실천의 동기와 실천을 떠받 치는 희망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인간의 실천적 저항은 우리를 비추 는 전망을 드러낸다.

한편, 스힐레벡스는 ‘대조경험’을 신비주의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이때 스힐레벡스가 말하는 신비주의는 중재되지 않는 직접성이라는 요 소를 그대로 유지한다. 스힐레벡스는 단지 고요한 가운데 일어나는 하 느님 체험만을 보지 않고, 신비주의를 지시하는 세 가지 요소를 제시한 다.36)

그 첫째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깨닫게 하는 경험이다. 그것이 초월 적이건 내재적이건 간에 이전보다 총체적인 지평에서 전체성을 볼 수 있는 경험은 신비적 경험으로 간주된다. 스힐레벡스가 제시하는 신비 주의의 두 번째 특성은 그 자신이 경험한 바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 며 고뇌하고 질문을 던지게 하는 성질이다. 이와 더불어 스힐레벡스는

35) Ibid, p.80/92.

36) 이에 관하여, CW , p 6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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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경험 가운데서도 상호적인 사랑의 기억을 가지고 살 수 있다면 이를 신비적 경험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확인되듯이, 스힐레벡스에게 신비경험은 종교적 경험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니는 희망에 비추어 현실의 부 정적인 요소를 간파하고, 새로운 지평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어떠한 희 생에도 불구하고 연대 안에 실천을 지속할 때 대조경험은 신비경험이 된다. 이처럼 스힐레벡스에게서 인간의 종교성은 사회성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가운데 일상 생활 안에서 신비의 지평을 감지하는 계기를 제 공한다.

그런데, 스힐레벡스에게서 ‘부정적 대조 경험’ 이 구원과 신비의 경 험이 되는 것은 이 경험 안에서 고통이 바로 사라지는 마술이 일어난다 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스힐레벡스에게 ‘대조경험’이 하느님과 만나 는 경험이 되는 이유는, 곧 인간의 자신의 존재지평을 온전히 인식하는 경험이 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저항과 울부짖음 안에서 세상을 구원 하시는 하느님의 활동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고통 앞에서 저항하며 울부짖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인격화된 은총에 의해 이미 대답을 받았다. 이 은총에 힘입어, 그들은 타인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실천적 시도를 행한다. 이 실천 안에서 하느님은 당신을 세상을 드러내신다.

이처럼 스힐레벡스 신학에서 고통이라는 수동적인 경험과 하느님 나라의 실천이라는 능동적 경험은 인간 실존의 종교적 차원을 드러낸 다.37) 고통 앞에서 분노하며 ‘아니오’라고 저항하는 실천은 하느님 통치

37) 이러한 주장은 그의 글 여러 곳에 나타나지만, 쉽고 감동깊게 전해지는 글은 God Among Us에 실린 다음 강론 원고이다. “Jesus the Prophet”, p.44 “God as a Loud Cry” 76,

“Belief in Jesus as Salvation for the Outcast”, p.149-151, “Christian Identity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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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실천이다. 스힐레벡스는 이러한 변혁의 실천을 하느님의 다스림을 실천하는 행동으로 보고 이를 정치적 성스러움으로 부른다.38)

이러한 스힐레벡스 신학에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신비적인 차원 과 정치적인 차원을 갖는다”39). 스힐레벡스가 여기서 말하는 정치는 사 회적 투신commitment이 집약된 형태를 의미한다. 이에 비해 신비는 하느님 사랑 또는 하느님 경험이 집약된 형태를 의미한다.40) 스힐레벡 스에 따르면,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를 위한 투신은 그리스도인을 특징 지우는 유일한 표지가 아니다. 이는 전례적 기도의 진정성이 드러나는 장이다.”41)

III. 스힐레벡스 인간학의 함의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통해 스힐레벡스 인간학에서 구체적인 일 상의 경험이 궁극적인 실재인 하느님과 연결되는 장면을 확인했다. 또 한 스힐레벡스가 인간이 직면한 불의와 고통에 분노하며 이를 개선하기

Human Integrity, ” p.156, 이 외에도 “Doubt in God’s Omnipotence,” For the Sake of the Gospel, p.93-94를 보라.

38) 정치적 성스러움은 “Shall We Sing the Lord’s Song?”, God Among Us, p.185 를 보라. 고 통체험을 공동체험으로 바라보고, 보다 나은 세상 건설을 위한 투신과의 연결은, Schillebeeckx,“Christmas Meditation- Being Made Man”, For the Sake of the Gospel, p.47을 보라.

39) Schillebeeckx, Jesus in Our Western Culture- Mysticism, Ethics and Politics, London:

SCM Press, 1987, p.75.

40) Ibid, p.72.

41) Schillebeeckx, “A Glass of Water for a Fellow Human Being”, For the Sake of the

Gospel, p.62 스힐레벡스는 동료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은 모든 것을 품으시는 하느님

사랑의 특별한 형태라고 말한다. 이러한 입장은 “Justice, Peace and the Integrity of Creation”, For the Sake of the Gospel. p.150에서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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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 노력하는 연대가 지닌 의미를 어떻게 제시하는지도 살펴보았다.

이번 장에서는 서론에서 언급했던 문제, 곧 과학기술이 종교 영역을 침범하는 현실에서 스힐레벡스의 인간학이 긍정적인 답으로서 제시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1. 참 소중한 당신

자살 인구가 급증하는 현대 한국 사회는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자살을 방지하기 위한 각종 대책 마련에 고심한다. OECD 가입국 중 최 상위를 기록하는 한국의 자살 상황은 날로 극악해지는 범죄 행태와 더 불어 종교인에게 막중한 부담을 안긴다. 이 상황이 종교인에게 부담으 로 다가와야 하는 이유는 종교가 이들이 자신의 삶에서 의미와 기쁨을 찾을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책임을 함께 지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으로 스힐레벡스의 인간이해를 살펴볼 때 가장 눈에 들어 오는 내용은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참 소중한 존재’로 설명 되는 인간이해이다. 스힐레벡스는 인간의 존엄성을 하느님과의 직접적 인 친교가 가능한 인간의 위치에서 찾는다. 누구나 종교와 무관하게 하 느님의 은총 안에 머물고, 하느님은 인간이 맺는 모든 관계 안에 내재하 며 당신에게로 개개인을 이끄신다.

스힐레벡스 인간학은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창조하신 후 관여하지 않는 역사와 인간을 말하지 않는다. 또한 인간의 본성을 변화하지 않는 진리성을 확보한 교리에 따라 설명하지도 않는다. 스힐레벡스는 무신 론과 세속주의 흐름이 무엇을 쫓는가를 관찰하고 ‘미래로서의 하느님’

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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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안목은 비그리스도인에 안에서 활동하는 하느님의 은총을 설명하려는 스힐레벡스 신학의 자세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스힐레벡스 는 무신론자와 세속주의의 조류가 고통이 없고 발전된 미래와 인간다 운 세계를 추구한다는 점을 간파했다. 이후, 스힐레벡스 신학에서 종말 론과 ‘미래의 하느님’이 차지하는 비중은 급격히 높아졌다.

스힐레벡스에 따르면, 보다 나은 미래를 건설하려는 인간의 모습에 하느님의 모습이 담겨 있다. 하느님은 인간의 미래로서 인간이 어디를 향해야 할지를 보여주며 인간의 열정을 통해 실천을 이끄시는 분이다.

이러한 이해구도에서 인간의 모든 활동과 존재는 하느님과 연결되어 소중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스힐레벡스 인간학에서 하느님의 인간 사랑은 인간을 통해 실현된다.

스힐레벡스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활동과 존재에서뿐만 아니라 이웃한 인간에게서, 특별히 고통받는 이웃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본다.

한편, 스힐레벡스 인간학은 이미 그리스도교인이 된 사람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42) 스힐레벡스 신학은 인간의 존재와 활동의 의미를 하느

42) 본 논문의 도입부에서 밝힌 바와 같이, 본 연구는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가 탈-종교적 현 대인에게 초월과 연결된 삶의 의미를 제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신학적인 논고를 가능한 최소화하여 글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스힐레벡스 인간이해가 주는 의미를 간략하게 제시하기 위해 그에게 ‘그리스도를 따름’이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정리하려 한다. 스힐레벡스는 뤼뱅의 도미니코 신학원에서 그리스 도론을 비롯한 교의신학 과목을 강의했다. 그에 따르면 이때의 그리스도 이해와 이후의 그리스도 이해가 자신의 신학 안에서 변화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을 대하는 독자는 그리스도론의 새로운 모습을 그의 저술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 전환적 모 습은 그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한 서술보다 예수를 경험한 사람들이 어떠한 맥락 위 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는지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스힐레벡스는 성서신학의 자 료를 최대한 촬용하며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 경험으로부터 ‘대조경험’을 추출한다. 그에 따르면 예수의 삶과 가르침, 죽음과 부활은 대조경험이다. 이 경험은 기존의 모든 진리 기 준을 새롭게 설정할 뿐 아니라 사회가 직면하는 불의와 고통, 아픔과 소외를 부정하며 새 로운 희망으로 이끄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스힐레벡스에 따르면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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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에게 뿌리박음으로써 나의 삶에서 하느님을 친밀하게 느낄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더 나아가, 종교를 떠나 공동선을 추구하며 실현하려는 모든 이들과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볼 수 있는 안목도 열어준다.

2. 보다 나은 세계를 함께 창조하는 인간

스힐레벡스 인간학에서 정치적 참여는 신앙의 정수를 의미한다. 신 앙인이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 신비 안에 보다 넓은 지평으로 옮겨가는 자리는 ‘투신’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힐레벡스의 이러한 입장은 인간이 역사의 주체라고 설정 하며 개진되지 않는다. 그에게서 인간은 역사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 는 하느님의 계속적인 창조사업의 동업자로 규정된다. 이러한 관계 규

예수 경험은 신앙인에게 하느님의 활동을 드러내는 장면이며, 예수의 가르침에서 가장 핵 심적인 내용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한 점이다. 스힐레벡스는 가난한 이를 위한 우 선적 선택과 고통과 불의에 맞서 이들과 연대하는 에수의 모습을 따라 사는 길이 그리스도 인의 길이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그에게서 그리스도인의 과제는 ‘비판적 부정성’으로 집 약된다. 여기서 스힐레벡스가 말하려는 바는 단순한 정치적 저항이 아니다. 스힐레벡스는 정치적 투쟁이 인간의 힘으로 개혁과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그리스도인의 실 천이 다르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역사를 이끄시는 하느님을 믿으며 이 세계에 지속될 악의 실재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종말론적인 희망을 두는 가운데 그리스 도의 가르침대로 불의에 저항하는 삶을 살아간다. 이 논문의 본문에서 제시되었듯이 스힐 레벡스가 말하려는 바는 예수에게서 그러했듯이 우리의 삶과 행동에서 하느님의 얼굴이 보이도록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스힐레벡스의 주장은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삶과 죽 음, 부활을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지금 여기서도 활동한다는 점을 자신의 삶에 서 실천을 통해 증거하며 신앙의 진리를 선포한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 정리에서 드러나 듯, 하버마스의 실천 이해가 스힐레벡스에게서 정행을 통해 드러나는 진리 주장으로 연결 된다. 그렇지만 삶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증거해야 한다는 스힐레벡스의 입장은 박사학위청구논문을 집약하여 출판한 CW1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스힐 레벡스 신학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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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 하느님을 인간 위에 놓거나 또는 하느님의 뜻대로 전개되는 역사 를 설명하지 않는다. 또한 인간의 노력으로 세상의 고통이 사라진다는 확신을 전제하지도 않는다.

스힐레벡스에게서 세상의 고통은 언제나 있고, 피할 수 없는 실재로 규정된다. 이 때문에 이를 제거하려는 노력은 자주 그리고 언제나 실패 할 수 있다.43) 하느님은 이러한 죄의 원인도 아니고, 죄를 방치하는 세 상 밖의 하느님도 아니다.

하느님은 대화자인 인간을 통해 인간 스스로 이에 저항하며 그 가운 데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보다 나은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투신하는 자신의 움 직임 안에서 하느님을 본다는 스힐레벡스의 주장은 이와 상통한다.

스힐레벡스는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에서 교회와 신앙의 역할을 설 명한다. 그에 따르면 신앙의 기능은 ‘비판적 부정성’이다. 그리스도인의

‘비판적 부정성’ 수행은 고통과 악에 분노하며 이를 개선하려는 부름에 긍정적으로 응답하며 실천의 장에 투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인의 삶과 실천이 지금의 고통스러운 세계와 다른 세계가 실제로 가능 하다는 희망을 주는 존재론적 신뢰를 근거 지워주는 기본적인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스힐레벡스는 주장한다.44) 그리스도인의 증거와 선교는 그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음을 보여주는 데서 실현된다.

이상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스힐레벡스의 인간학은 비그리스도인

43) Schillebeeckx, CW , p. 25. 스힐레벡스 신학에서 고통의 좌표와 의미에 관하여, Mc Manus, “Suffering in the Theology of Edward Schillebeeckx”, Theological Studies 60, 1999, p.476-491, H. Bergin, “Edward Schillebeeckx and the Suffering Human Being”, International Journal of Public Theology 4, 2010, p. 466-482.

44) CW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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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그리스도인 모두가 세상 안에서 사회성원으로서 사회발전에 적극적 으로 기여하며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의미를 신비와 연결하는 지점 에서 보여준다.

IV. 나가는 말

신학자보다는 사목자를 자처했던 스힐레벡스는 교회 밖에 머무는 이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며 그들을 품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을 전달하는 교회의 사명보다 그리스도의 현존과 활동을 보여주는 교 회의 임무를 강조했고, 인간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 했던 사목자였다.

이러한 스힐레벡스의 노력은 하느님 이해와 거울 관계에 놓인 인간 이해에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세계 안에 있는 인간의 실존과 모든 활동을 하느님과 연결시켜 이해하 는 가운데 하느님의 존재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주파수를 알려주었다.

이에 따라 우리의 삶은 종교와 무관하게 거저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 안에 머물며 모든 활동을 통해 하느님에게로 나가는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다. 또한 무엇보다 스힐레벡스가 제안하는 인간 이해는 삶에서 직 면하는 악과 고통을 이보다 더 큰 의미 지평에서 조명하며 ‘긍정적인 부 정’을 통해 개선하려는 노력의 자리를 비추어주었다.

스힐레벡스에게서 인간은 세계 안에 던져진 인간이 죽음이라는 한 계 앞에 자신과 세계의 의미를 묻는 존재에 머물지 않는다. 또한 끊임 없는 질문의 끝에서 지평과 질문 가능성의 조건으로 만나는 하느님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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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선 인간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스힐레벡스의 하느님과 인간은 친밀한 관계를 주체-주체로 맺으며 소통하는 가운데 지금 이 자리를 보다 나은 세계로 변화시켜가는 협력 자이다. 인간 없이 하느님이 드러나지 않고, 하느님 없이 인간이 존재 할 수 없는 구조가 그의 신학-인간학에서 나타난다.

종교는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뿐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의 경험을 통 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한다. 그러나 종교 는 체험에 머물지 않고 이를 일반화와 보편화하는 과정을 통해 합리적 종교로 발전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역사도 이 과정을 겪으며 수많은 역사변화 과정에서 그리스도인과 세계에 의미를 전해주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스힐레벡스의 노력과 그 결과물인 인간학은 보 다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매진하는 노력과 신비적인 인간의 본성을 구체적인 경험 안에 녹여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스힐레벡스의 신학과 인간학은 화이트헤드가 제시한 종교 이해와 공명하며 일상의 신비를 향해 개방된 인간을 보여준다.

종교는 눈 앞에서 변천해가고 있는 유동적 사물들의 피안이나 배후, 또는 그 내부에 있는 무엇, 실재하면서도 실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무엇, 머나먼 저편의 가능태이면서도 최대의 현재적 사실인 그 무엇, 변 천하고 있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좀처럼 파악되지 않는 그 무 엇, 궁극적인 이상이 되면서도 그것에 대한 탐구가 가망 없는 일이 되고 마는 그 무엇에 대한 비전vision of이다. … 그 비전은 결코 힘으로 억압 하는 일이 없다. 그것은 항상 거기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의 성취가 영 원한 조화를 의미하는 그런 하나의 목적을 제시하는 사랑의 힘을 지닌 다.

45)

45) A. Whitehead. 오영환 역, 과학과 근대세계, 서광사, 277-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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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스힐레벡스의 인간학은 현대 세계에서 그리스도 교 밖에서도 인간 존재와 활동의 의미를 궁극적인 무엇과 연결시켜 일 상에 담긴 신비적 차원을 제시하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본성의 실현과 보다 나은 세계 건설이 동일선 상에 놓이는 그의 노선이 지나치게 발전지향적이며 낙관적인 이해는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또한 진화론을 수용하지 않는 그의 인간학이 과학을 통해 해석되는 수많은 경험들과 함께 어우러져 모든 사태를 설 명할 수 있는 정합적이고 논리적이며 필연적인 체계로 선택될 수 있을 지 자문해본다.

스힐레벡스 신학에서 인간이해는 하느님 이해의 거울상이다. 이 때 문에 창조-구원-종말이라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구조 위에 전개되는 스 힐레벡스의 인간학을 신학에 관한 언급을 가능한 배제한 채 정리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월적 존재에 대한 질문이나 관 심조차 보이지 않는 이 시대를 마음에 품고, 스힐레벡스 신학에서 분리 추출한 인간이해를 제시하려 했다. 이 작업이 진지하게 삶을 성찰하고 자신의 의미를 세계 안에서 묻고 보다 나은 내일을 건설하려는 이들에 게 하느님의 존재와 활동을 감지하고 다가갈 빛을 비추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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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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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초록 】

스힐레벡스는 신앙의 위기를 직면하며 다양한 사상과 시대조류에 응답하는 신학자였다. 그는 아퀴나스 신학에 굳건하게 발을 딛고 신학과 인간학을 동전 의 양면처럼 구성하는 가운데 그리스도교 밖의 동시대인들에게 공명할 수 있는 인간학을 제시했다. 스힐레벡스의 인간학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지니고 세계 안 에서 인간과 맺는 모든 관계 경험이 하느님과 연결되는 고리를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와 정신의 합일체로서 세계 안의 자기 이해를 통해 하느님 인식에 다다른다. 그에게서 보다 나은 세계를 건설하려는 인간의 열망과 궁극 적인 실재를 궁구하는 갈망은 하느님과 연결된 인간의 보편적 특성을 드러내는 모습으로 이해된다. 한편, 스힐레벡스는 세계 안의 고통과 악이라는 경험 앞에 서 분노하며 저항하는 경험의 의미를 정치신비주의 맥락에서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고통 앞에서 인간은 지금과는 다른 상황을 꿈꾸며 이를 실현하려는 움 직임을 실천한다. 여기서 희망은 고통과 악에 맞설 힘을 줄 뿐 아니라 현재를 딛고 세계가 나아갈 미래의 길을 보여준다. 스힐레벡스는 이처럼 고통과 악이 라는 부정적인 경험을 새로운 지평으로의 진입 순간으로 해석하며 정의로운 사 회 건설을 위한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사회정치 변혁을 위한 스힐 레벡스의 실천 이해에서 사회변혁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활동하 시는 하느님이다. 스힐레벡스에 따르면 이러한 지평의 변화와 투신 안에서 인 간의 진정한 자기실현과 하느님 경험이 일어난다. 스힐레벡스는 세상 안에 살 아가는 모든 경험과 관계 및 인간의 존재 의미를 초월과 연결하여 바라보는 시 야를 열어준다.

주제어: 스힐레벡스, 인간학, ‘인간과 사물의 세계에서 하느님과 함께 있음’, ‘비판적 부 정성’, ‘부정적 대조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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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Being Present with God in the world”

- Implication of Schillebeeckx’s Anthropology for Modern World -

Kwon, Youngpa

( The Sogang University · Theology · Ph.D. Candidate) Lee, Kyousung

(The Sogang University · Theology · Prof.)

As a theologian, E. Schillebeeckx was always ready to respond to a crisis of faith or of the Church. While his beliefs were grounded in Aquinas theology, he reflected on the contemporary currents of thought to build an anthro- pology around the theological themes of creation-salvation-eschatology. Using a coin with a side of theism and a side of anthropology, Schillebeeckx shows how all the daily experiences in which we use our free will to build relation- ships with our fellow human beings are linked to our relationship with a living God. According to Schillebeeckx, a human being is a unity of body and spirit, and only through this unity can man experience self-understanding and God.

To Schillebeeckx, all efforts towards constructing a better world and the pur- suit of an ultimate reality are signs of the universal nature of man who was cre- ated by God as a co-worker in continuing creation, salvation. Schillebeeckx al- so argues that the experience of suffering is the place to encounter God’s act of salvation. In Schillebeeckx’s theology, this moment of resistance to evil of the world bears a political–mystical meaning. Through this devotion to the construction of a better world, we can recognize that the One who is calling us to an intimate personal relationship is God Himself, Who is working in and through our resistance against the evils of this world. The anthropology sug- gested by Schillebeeckx widens man’s insight into the transcendent meaning of both our daily life and our existence in thi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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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 words: E. Schillebeeckx, anthropology, being present with God in the world of human beings and things, critical negativity, negative contrast experience.

투고 접수: 2021. 3. 8. 심사 완료: 2021. 4. 6. 게재 결정: 2021. 4. 6.

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