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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esearch on the Use and Architectural Changes of Sungnyemun in King Yeongjo's Re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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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x.doi.org/10.7738/JAH.2012.21.3.045

영조 대 숭례문 문루의 하층 사용과 건축 변화에 대한 연구

조 상 순

*

(문화재청 학예연구사,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 박사과정)

주제어 : 숭례문, 영조, 전좌(殿座), 헌괵례(獻馘禮), 계단, 마루, 면장

1. 연구 목적과 배경

본 연구는 2008년 2월 10일 화재로 훼손된 숭례문1)을 복구하면서 관련 문헌을 찾아 고증 작업을 하던 중 발굴된 자료를 토대로 작성되 었다. 숭례문 복구사업에는 좌우 성곽 및 지반 을 조선 중후기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것도 포 함되어 있다. 복원은 관련 고문헌 기록과 옛 사진 자료, 해체수리 및 실측조사 보고서 등에 바탕을 두고 있다.2)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성곽 문루건물인 숭례

* 교신저자, 이메일: [email protected]

1) 조선 태조 7년(1398)에 창건되어 세종 29~30년(144 7~1448)에 새로 짓고[新作], 성종 9~10년(1478~1479) 에 중수되었다. 1961~63년에 문루 및 육축 일부에 대한 해체수리가 이루어졌다.

2)『서울南大門修理報告書』(1966년)와 『崇禮門 精密實 測調査報告書』(2005년)를 기초로 수리 사실에 대한 분 석을 통하여, 숭례문의 건축적 특성을 규명하는데 중점 을 두고 있다. 숭례문은 1961년 7월 20일부터 1963년 5 월 14일까지 1년 10개월에 걸친 수리를 통하여 많은 부 분이 변형되었다. 이는 당시 전문가들의 견해를 근거로 그렇게 변형한 것이며, 변형 사유는 보고서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기록과 일치하지 않거나, 사유가 불명확한 부분 등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여, 현재 평면, 의장, 목구 조기법 등 다양한 부분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문은 조선 초기의 기법과 양식을 유지하고 있 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숭례문의 도성 방어 기능의 중요성과 도성 제도에 대한 관심과 논 의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증대되었다.

숭례문은 또한 숙종~정조 연간에는 의례를 비롯한 도성 방어 기능 이외의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다.

숭례문에서 실시된 의례로는 기청제(祈請 祭), 기우제(祈雨祭),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행 례(行禮), 사신 등의 전별연 등이 있었다. 그런 데, 숭례문을 의례용 공간으로 적극적으로 사 용한 시기는 영조(1694~1776) 연간이다. 영조 는 숭례문의 문루를 전좌(殿座)3)와 헌괵례(獻

3) 전좌는 본래 임금이 국사를 논의하기 위하여 정전에 나와 앉는 일을 말한다. 전좌에 대해서는 다음의 『조선 왕조실록』숙종실록 2권 1년(1675) 1월 23일 기사를 참 조하기 바란다. ; “예전에는 임금이 큰일을 만나면 백성 을 불러다가 크게 묻는 일이 있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 는 전하께서도 어느 날 대궐의 문루(門樓)에 납시어, 서 울 안 방리(坊里)의 크고 작은 사민(士民)의 장소(壯少)·

부로(父老) 등을 크게 모아 놓고, 근시(近侍)들에게 나누

어 명해서 큰 흉년과 큰 역질과 산릉(山陵)의 역사(役

事)와 객사(客使) 때문에 근심하고 지친 것을 가엾이 여

기고 위로하는 뜻으로 묻고 그 고통과 억울한 일을 묻

고, 그 기로(耆老)와 행의(行義)가 있는 자를 표창하게

하시며, 유사(有司)에 명하여 한대(漢代) 원년(元年)에

우주(牛酒)를 내려 주고 봄에 진대(賑貸)하던 제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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馘禮)4)를 위한 공간으로 주로 사용하였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숭례문과 같은 문루에서 전좌나 헌괵례와 같은 의례가 행해진 기록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영조 연간에 숭례문에서 전좌가 집중적으로 있었던 것은 두 번의 전란 을 겪어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왕권을 강 화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전좌에 대한 숙종과 영조의 견해를 통하 여 알 수 있었으며, 더불어 숭례문이 문루 기 능 외에 어떤 장소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새 롭게 조명할 계기를 제공하였다.5)

본 연구는 조선시대 왕실 관련 사료에 나타 난 기사를 분석하여, 숭례문 하층의 구성과 공 간 사용 등을 고찰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연구 중심이 임금의 행례와 관련되어 있음으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와 같은 왕실 관련 사료를 조 사의 대상으로 선정하였고, 부분적으로『화성 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등을 참고하였다.

먼저 전좌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고, 전좌가 갖는 의미와 상징성에 대하여 정리하였으며, 이와 함께 헌괵례와 영제 등 관련 의례를 분 석하였다. 마지막으로 사료에 근거하여 숭례문 내부 공간에 대하여 고증하고,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변형된 부분에 대하여 고찰함으로써, 숭례문 문루의 사용과 건축 변화에 대하여 고

자급(資級)·미포(米布)·주식(酒食)을 내리고, 주대(周代) 의 제도처럼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고 드러난 해골을 덮 고 썩은 육신을 묻어 춘령(春令)을 시행하고 옥수(獄囚) 를 내어다 묻는 동안에는 대우(大禹)가 죄인을 보고 운 의리처럼 질곡(桎梏)을 벗기고, 또 옥중에 있는 기간을 줄여서 신탄(薪炭)을 주어 송대(宋代)의 제도처럼 때때 로 탕목(湯沐) 을 내리셔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것도 민심을 기쁘게 하는 한 가지 일이 될 것입니다.”

4) 헌괵지례 또는 수괵례(受馘禮). 적과 싸워 이긴 후 적장의 머리를 잘라 임금에게 바치던 예식

5) 이전의 숭례문 수리 및 변천과정에 대해서는 이강근,

「崇禮門 연구(1) : 修理史와 復元의 意義」(『(講座)美 術史』, 19호, 2002.12)와 국립문화재연구소, 『숭례문복 원자료집』(국립문화재연구소, 2008)를 참고하기 바란다.

증하고자 하였다.

연구 자료는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한국학중 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자료, 조선왕조실록, 승 정원일기 등을 참조하였다.

2. 의례와 숭례문

2-1. 숭례문의 현황

숭례문은 조선시대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 으로, 장대석으로 쌓은 육축 위에 중층 문루를 두고, 육축 중앙에 홍예문 1개를 둔 건축물이 다.6) 실록에 의하면 도성 방어를 위하여 대포 를 설치7)하거나, 점화실8)을 두어 화전(火箭)을 쏠 수 있게 하였다. 종각9)을 두어 시각을 알리 기도 하였고, 영조 때는 임금이 문루에 올라 중죄인을 처벌하거나 도순무사(都巡撫使)를 영 접하여 헌괵례를 받는 장소, 전좌하는 장소 등 으로도 사용되었다.

문루는 전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문루 상 층과 하층 중앙의 남북 2칸에는 마루가 깔려 있다. 하층 마루는 1961년 수리 전에는 장마루 였으나, 1963년 수리 후 우물마루로 변경되었 다. 이 우물마루는 2008년 화재 전까지 깔려있 었다. 1966년 발간된 『서울南大門修理報告

6) 이 형태에 대해서는 ‘월단누합(月團樓閤)’으로 묘사하 고 있으며, 이를 해석하면 홍예를 갖춘 기단과 문루, 문 루 좌우의 협문(夾門)으로 이해될 수 있다. 『조선왕조 실록』, 태조 10권 5년(1396) 9월 24일 2번째 기사 참조

; 築城役訖, 放丁夫. …(중략)… 又作各門月團樓閤. 正北 曰肅淸門, 東北曰弘化門, 俗稱東小門. …(후략)

7) 『조선왕조실록』, 선조 55권 27년(1594) 9월 10일 4 번째 기사 참조 ; (전략)… 請於南山及東大門、南大門, 各置大砲, 有時於夜間, 放砲相應, 以壯聲威.” 上從之.

8) 점화실이 실제로 운용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성종 95권 9년(1478) 8월 10일 2번째 기사 참조 ; (전략)… 但點火處大窄, 請崇禮門畢修後, 令 造點火之室.” 上曰 “可.”

9)『조선왕조실록』중종 82권 31년(1536) 7월 14일 2번

째 기사 참조 ; 報漏閣都監啓曰 : “興仁門、崇禮門懸鍾

事, 前日諸緣具已備, 其時有旱徵故停之. 今已入秋. 建鍾

閣懸之何如?” 傳曰 “如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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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x.doi.org/10.7738/JAH.2012.21.3.045 書』에는 현상변경 사항으로 양식과 보강을

위한 8가지 변경사항10)이 기록되어 있으나 장 마루를 우물마루로 변경한 사유는 기록되어 있 지 않다11).

2-2. 숭례문과 의례

숭례문에서는 다양한 의례가 이루어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영제(禜祭)에 속하는 기청제와 기우제이다. 영제는 비가 많이 오거나 날씨가 가물 때 행해졌으며, 영조 대 이전까지는 각 문의 홍예 아래에서 제사가 이루어졌으나, 영 조 대 부터는 문루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12) 원래는 홍예 아래에서 영제를 지내도록 되어 있으나, 비가 많이 오는 경우 문루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바꾸었는데, 그 이유 는 문루에서 지냄으로 신위가 더럽혀지지 않 고, 불경함을 피할 수 있으며, 제사를 지내는 관원과 신위가 같이 문루 위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13)

10) 양식상 변경으로 주두 및 헛초공 제거, 벽선(壁線) 의 헛초공 제거, 포벽(包壁) 제거가 기록되어 있다. 보강 을 위한 변경으로 추녀 가구(架構) 변경, 덧서까래 사용, 귀한대 머리 보강, 평방 이음 보강, 고주 머리 보강이 기록되어 있다.

11) 당시 공사에 참여한 김정기, 정대기의 증언에 의하 면, 수리 전 장마루로 되어 있었으며 임천과 조원재의 의견이 서로 달라 우물마루로 수정하였다고 한다. 한편 마루 이외에도 다양한 부분의 변경사항이 상당 부분 누 락되어 있다.

12)『승정원일기』영조 21년(1745) 7월 22일 33번째 기 사 참조 ; 翼謩曰, 李再章以爲, 自前禜祭, 設行於門內, 而 下布地排, 上設遮日云, 而臣使事知院吏, 往見興仁門, 則 排設祭位於門樓云矣. 上曰, 興仁門例於門樓行祭乎? 翼謩 曰, 似以門內泥濘, 獻官臨時變通矣. 上曰, 昨日禜祭所, 摘 奸宣傳官二員, 注書招入, 可也. 臣復基, 引宣傳官金永綬·

鄭與曾進伏. 上曰, 汝等昨往何門乎? 永綬曰, 臣往興仁門·

崇禮門矣. 與曾曰, 臣往肅靖門·敦義門矣. 上問永綬曰, 興 仁門排設, 何處爲之乎? 永綬曰, 昨日則虹蜺內, 而今日則 排設於門上矣. 上曰, 一體祀典, 不宜異同, 興仁門何可獨 行於樓上乎? 事體駭然, 而今旣設行於樓上, 則旋又移奉, 極涉褻瀆. 今番則姑爲仍行於樓上, 此後則設或水浸, 多積 沙土, 排設其上, 行祀於虹蜺內之意, 分付, 定式施行, 可也 13)『승정원일기』영조 32년(1756) 8월 26일 16번째 기

이와 같은 영제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4대문 에서 행해졌으며, 영제의 절차와 내용에 대해 서는 조선왕조실록14)에 규정되어 있다.

숭례문에서의 헌괵례에 관한 기록은 영조 4 년에 처음 나타난다.15) 이 기록은 사도(四都) 도순무사(都巡撫使)인 오명항16)이 흉적 정벌 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임금에게 그 결과를 보고하고 헌괵례를 거행한 기록인데, 이 기록 을 전후한『승정원일기』 관련 기사에는 헌괵 례를 위하여 숭례문을 사전에 점검하고 이에 관한 수리 또는 내부 공간 사용 등에 대한 계 획을 검토하는 등에 관한 많은 내용이 기록되 어 있다.

전좌는 이전에도 실행된 것으로, 대개 궁궐 의 정문에서 이루어졌으나 숙종과 영조는 개성 과 서울의 남대문을 자주 사용하였다. 개성 남 대문루에서 전좌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숙종 19년(1693) 9월 1일부터 보이며, 이보다 앞선 8월 29일 기록17)에서는 문루에서 전좌를

사 참조 ; (전략)… 上曰, 禜祭摘奸承旨入侍. 左承旨徐命 膺入侍. 上曰, 獻官在軍幕乎? 在家乎? 命膺曰, 或在帳幕, 或在依幕矣. 上曰, 祭物, 熟設於門樓乎? 命膺曰, 然矣. 上 曰, 禜祭時, 閉四門者, 以其樓上行祭故也. 祭物, 何可熟設 於樓上乎? 仍命承旨書之曰, 禜祭, 古行於門樓下, 而多有 褻慢之事, 故命行於譙樓, 其於北門, 設帳爲之事下敎, 今 聞承宣所奏, 祭物熟設, 亦爲於城上, 而措備則樓中在位版 之側云, 此專由於不設幕取便爲之之 意, 曾前樓下爲之時, 亦行於樓上乎? 況於北門, 熟設於門下云, 卽此一款, 其取 便可知, 其褻慢者不一, 造備神位之側, 一也. 取便不敬, 二 也. 典祀官以下, 與位版三日同處於樓上, 三也. 此必樓上 設祭之後若此故也. 當該獻官典祀官監察事, 當令該府處之, 而想非今官所爲, 其雖參酌, 若是褻慢不敬, 倖而開霽, 此 亦高高恤元元之意, 其亦幸矣. 此後祭物措備, 必也樓下爲 之事嚴飭. …(후략)

14)『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 오례 길례의식 구우영제 국문의(久雨禜祭 國門儀) 참조

15)『조선왕조실록』영조 4년(1728) 4월 19일 기사 참조

; 四道都巡撫使吳命恒振旅還朝, 軍南城外, 上出御崇禮門 樓迎之. …(중략)… 仍行獻馘禮, 命恒以金冑紅甲, 跪進賊 魁熊輔、希亮、崇坤三首級於壇下. …(후략)

16) 吳命恒(1673~1728).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공을 세워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에 봉해졌다.

17)『조선왕조실록』숙종 19년(1693) 8월 29일 기사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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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이유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영조 이전에는 숭례문에서 전좌를 한 기록 은 없다. 다만, 병자호란 때 임금이 급하게 피 난할 곳을 찾으려 할 때 잠시 숭례문에서 전 좌하였던 기록18)이 있다. 영조는 숭례문19), 돈 화문20), 홍화문21) 등에서 전좌하였고, 숭례문 에서 헌괵례를 포함하여 전좌한 것은 영조 대 가 유일하다. 영조는 숙종과 같이 전좌를 국민 과의 의사소통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숭례문 에서 행한 헌괵례와 전좌 기록은 [표 1]과 같다.

시기 목적

1 영조 4년(1728) 4월 19일 헌괵례 2 영조 31년(1755) 3월 8일 헌괵례 3 영조 31년(1755) 5월 6일 헌괵례 4 영조 31년(1755) 5월 21일 헌괵례 5 영조 38년(1762) 7월 20일 헌괵례 6 영조 38년(1762) 9월 17일 헌괵례 7 영조 39년(1763) 10월 3일 헌괵례 8 영조 40년(1764) 4월 21일 전좌 9 영조 48년(1772) 7월 27일 전좌 10 영조 48년(1772) 11월 23일 전좌

[표 1] 영조 대 숭례문에서의 헌괵례와 전좌

조 ; (전략)… “남문루(南門樓)가 저자 가운데 있어 알아 듣게 타이르기가 편리하다. 그러니 어가(御駕)를 돌릴 때에 남문루에 전좌(殿坐)하고 부로(父老)들을 모아 불 쌍히 여기고 조세를 감해주는 뜻을 타이르는데 일이 매 우 편리하고 적당하니, 대신들은 미리 강구(講究)하고 품정(稟定)하도록 하며 부로들도 일제히 남문루 앞에 모 이게 하여 친히 타이르는 곳을 만들도록 하라.”…(후략) 18)『조선왕조실록』숙종 16년(1690) 12월 14일 2번째 기사 참조

19) 영조의 숭례문루 전좌에 대해서는 이강근, 「崇禮門 연구 (Ⅰ)」에 일부 언급되어 있다.

20)『승정원일기』영조 4년(1728) 3월 24일 55번째 기사 참조 ; 以兵曹言啓曰, 今此敦化門樓上, 殿座受捷時, 侍衛 各差備節目, 所當磨鍊, 而時刻忙急, 勢難變通. …(후략) 21)『승정원일기』영조 25년(1749) 8월 6일 22번째 기사 참조 ; (전략)… 予仍以小轝, 詣弘化門內, 陞東橋詣樓.

承·史自西橋詣樓入侍, 領左相一例入侍. 侍衛只兵曹·摠府 入直人員, 而摠府·兵曹堂郞登樓, 其餘皆止於門內. 洞開三 門, 世子祗迎後, 自西橋登樓侍坐, 而宮官二人陪登. 恤畢, 先下樓祗迎. 予入內後還內. 京兆堂郞, 率部官, 門外序立.

殿坐後, 先後行四拜, 而四民不拜. …(후략)

[표 1]에서 볼 수 있듯이 헌괵례와 관련된 사용이 빈번한데, 영조가 숭례문을 헌괵례의 장소로 선정한 이유는 영조 4년(1728)『승정원 일기』22)에 잘 나타나 있다. 기사 내용에 의하 면, 첫 번째로 앞서 전좌하였던 돈화문의 계단 (梯道)이 높아 오르기 어려웠으며, 두 번째로 장수가 원정에서 돌아올 때 앉아서 바라보기 좋기 때문에 예전부터 숭례문에서 전좌하고자 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영조 대 이전에 숭례문에서 임금이 공식적으로 전좌한 적이 없 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절차나 숭례문에 대한 사전 조사가 필요하였고, 첫 번째 헌괵례를 준 비하는 과정에서 숭례문 문루 하층 공간에 대 한 건축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2-3. 숭례문 하층 공간 분석

숭례문을 비롯한 조선시대 서울의 4대문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월단누합(月團樓閤)’으 로 정의될 수 있다. 조선시대 도성 문루 제도 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으나, 실록 등에서 일부 자료23)를 찾아볼 수

22)『승정원일기』영조 4년(1728) 4월 15일 26번째 기사 참조 ; (전략)… 都巡撫獻馘時處所, 將定以何處耶? 上曰, 卿或慮有郊迎之擧耶? 此則當不爲之, 而欲受俘於崇禮門 矣. 卿等之意何如? 光佐曰, 崇禮門樓前有女墻, 通望有礙, 恐不如敦化門之高爽矣. 上曰, 敦化門則梯道甚高, 頃日登 陟時, 亦甚爲難. 且將士遠征以還, 而予則只於近門, 坐而 待見, 亦似不可, 故必欲以崇禮門爲之矣. …(후략) 23)『승정원일기』숙종 37년(1711) 7월 11일 29번째 기 사 참조. 돈의문 건립 감독 명을 받은 김석연이 돈의문 의 누각 건립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상소에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비교하고, 돈의문에 중층 누각을 둘 수 없는 이유 등을 언급하였다. ; 第惟門樓之制, 於門上內外兩邊, 只設虹霓石, 虛其中間, 以大木鋪之, 蓋爲建樓之後, 木板 若或有改易之事, 則就其可改之處而改已, 而樓則自如也.

若盡設虹霓石而後, 或有石縫生罅, 不得已改易之擧, 則勢

將竝撤門樓而後, 乃可改石, 故有樓之門, 則必鋪木板於中

間, 崇禮·興仁兩門, 是也. …(중략)… 且崇禮·興仁兩正門,

則始創之時, 爲設高大之門, 廣闊其臺址, 故設屬樓, 自爾

妥帖. 敦義門則設門狹小, 其不及於崇禮·興仁兩門者, 自內

到外, 則十五尺許, 從北抵南, 則二尺許, 其上臺址之狹隘,

如若設層樓, 則恐不無下尖上重之慮矣. …(후략)

또한 영조 20년(1744) 3월 17일 10번째 기사를 보면, 임

금이 돈의문에 올라 성첩(城堞)의 형태에 대하여 살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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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x.doi.org/10.7738/JAH.2012.21.3.045 있다. 도성 문루의 형식은 조선 중기 이후 돈

의문, 창의문 등의 건립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 로 보이는데, 기본적으로 숭례문과 흥인지문의 규모를 벗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008년 화재 전의 숭례문 문루는 전면 5칸, 측면 2칸으로, 문루 하층의 어칸 바닥은 홍예 의 상부에 해당하여 우물마루로 구성되어 있었 고, 상층 바닥은 장마루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림 1> 숭례문 문루 하층 평면도

기록에 의하면 문루 하층이 전좌 및 영제, 헌괵례 등에 사용되었고, 전좌에 따른 공간 사 용의 위계(位階)를 추정하면, 중앙 마루에 임 금이 위치하고 좌우에 신하들이 시립(侍立)하 였을 것이다. 그러나 화재 전 숭례문은 이러한 사용에 맞지 않으며, 관련 기록을 조사한 결과, 수리를 거치면서 변형되었음을 확인하였다.

협문의 위치 또한 그간 좌우 대칭 평면임에 도 동문과 서문의 위치가 대칭되지 않아 단순 히 동문이 상층 계단으로의 통행 편의성을 위 해 비대칭으로 놓여졌을 것이라고 추측되었다.

그러나 최근 동측 성곽 복원을 위해 동편 계 단을 해체하면서, 계단과 관련된 조선 시대 석 축 유구가 발견되었다. 이 유구는 숭례문에 임 금이 임어(臨御)하였던 기록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고 그 제도에 대하여 묻자, 이수항(李壽沆, 1685~?)과 김상적(金尙迪, 1708~1750)이 심양성지(瀋陽城池) 도형 (圖形)을 언급하여 설명하고 있다.

3. 숭례문 하층 공간의 고찰

3-1. 헌괵례와 전좌

영제의 경우 기청제, 기우제에 관련된 신위 를 모시고, 이에 대한 부정기적인 제사를 실행 하였으며, 참여 인원은 비교적 소규모였다. 제 사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고, 영조 이전까지는 홍예 하부에서 영제가 진행된 점을 감안할 때 영제와 연관된 숭례문 문루 공간의 사용은 그 리 중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 금을 비롯한 다수의 관료와 많은 군중이 참여 한 헌괵례와 전좌에는 숭례문 문루 공간이 적 극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영조 때 숭례문에서 헌괵례가 처음 실행된 것은 영조 4년으로, 이를 위해 영의정이었던 이광좌24)가 사전 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내용 은 『승정원일기』영조 4년(1728) 4월 15일 20번째 기사25)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24) 李光佐, 조선 후기의 문신(1674~1740). 경종 3년 (1723)에 우의정, 영조 원년(1725)에 영의정에 올랐다.

25) (전략)… 光佐曰, 臣往見崇禮門矣. 上曰, 何如? 光佐 曰, 其處蓮池南邊大村, 居兩大路之中, 而其村家, 逼在蓮 池頭, 肅靜牌當立於門外, 而其外軍兵排立, 旗幟羅列, 又 設轅門, 則轅門當在蓮池頭, 而百官班列, 當序立於其外, 其中大村遮隔, 左右不通望, 甚爲苟艱. 門樓上廳板, 年久 腐破爲慮矣. 卽見石柱上加土, 土上築板, 此似年久不實, 而此則以新材耳機數三頭, 橫亘其上, 則保無他憂, 樓上面 墻, 若又毁破, 則別無壅塞處, 樓簷梢低, 而亦可臨望, 轅門 外池邊, 賊首可懸處, 亦僅有之. 其他更無餘地, 軍兵結陣 後, 士民無瞻望之所, 是甚可悶. 歸時自把子廛橋, 瞻望敦 化門, 則甚有法制. 頃日獻馘時, 猶未知前街之若是彰豁, 若設行於敦化門樓上, 則在下遠望, 如在九天上, 軍幕外士 民, 猶可瞻望簇立, 實勝於崇禮之狹窄苟艱矣. …(중략)…

上曰, 李順蒙, 何如人也? 光佐曰, 其時武士, 而乃名將矣.

南門殿坐, 形勢苟簡, 士民瞻望, 亦且壅隔. 又有城垣毁敗 之勞, 不如出御敦化門, 而獻馘矣.…(중략)…若出臨崇禮門, 則必須預承傳敎, 軍兵排立, 道路修治, 可以及期, 廳耳機 亦可修補矣. 泰億曰, 若不苟簡, 則崇禮固好, 而苟簡爲可 悶矣. 光佐曰, 出征將士, 集賢迎勞有故例, 此不必親勞, 且 有城垣毁破之慮, 敦化門最爲便好矣. 都承旨金取魯曰, 敦 化門則當有浮階矣. 光佐曰, 別御樓則薄松板, 合齒平鋪, 御門則門基址不培築, 故低陷, 不如下輦御殿坐之爲暢豁矣.

…(중략)… 光佐曰, 南門臨幸時, 百官依陵幸時例, 堂上以

上, 以靑戎服, 堂下, 以桃紅, 當爲備着, 而此時, 忙急難行

矣. 承旨鄭錫五曰, 門內則無紅衣之規矣. …(중략)… 上曰,

(6)

에 따르면, 문루에는 청판(廳板), 즉 마루가 있 고 이것이 오래되어 손상되었고, 여기에 새로 귀틀(耳機) 3두(頭)를 그 위에 가로지르면(橫 亘其上) 문제없다(則保無他憂)고 되어 있다.

또한 마루(廳) 귀틀(耳機)을 수보(修補)해야 하며, ‘임금이 임하는 마루(別御樓)는 얇은 송 판(薄松板)’이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평 활하게 걷는 것에 합치(合齒平鋪)된다’고 기록 되어 있다. 이 마루는 장마루를 뜻하며, 화재 전 문루 하층의 우물마루의 모습과 다르다.

헌괵례와 관련하여, 『승정원일기』 영조 4 년(1728) 4월 19일 기사26)에는 문루에 입시하 는 관원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데, 임금을 제외 하고 12명이 임금 앞에 엎드리고(以次進伏), 여기에는 승지, 가주서(假注書), 기주관(記注 官), 기사관(記事官) 등이 포함된다.27)

地形苟簡, 則百官當減, 而國之午門, 何必苟簡也? 光佐曰, 敦化門外, 則路傍百官序立, 馬步軍, 左右排立, 依勢觀瞻, 俱爲正大矣. 上曰, 此則不然, 敦化門樓殿坐時, 近侍, 每傳 傳敎於樓下, 其不親聽傳敎, 則崇禮·敦化一也. …(중략)…

摠戎使率領, 不緊侍衛, 不入樓上, 挾門外羅立, 崇禮門內 設布帳, 傳語軍以六十名定出, 百官則下馬步出, 崇禮門, 分東西序立, 禮畢後, 還入水閣橋南邊, 左右陣內分東西, 祗迎出征軍兵, …(후략)

26)『승정원일기』영조 4년(1728) 4월 19일 33번째 기사 참조. ; 戊申四月十九日巳時, 大駕南門樓受馘擧動, 上具 戎服, 出宮時, 右副承旨鄭錫五所啓, 大駕降輿時, …(중 략)… 仁政門外乘馬, 行到廣充橋, …(중략)… 上御南門 樓. 兼領兵曹事李光佐, 都承旨金取魯, 左承旨柳綎, 右承 旨趙命臣, 左副承旨權益淳, 右副承旨鄭錫五, 同副承旨趙 顯命, 假注書李裕身, 金壽鏶, 事變假注書金尙翼, 記注官 閔珽, 記事官李周鎭, 以次進伏. 上曰, 彼扎駐者, 都巡撫軍 耶? …(중략)… 上曰, 樓上隘窄, 雲寶劍外, 侍衛不緊, 差 備姑爲退出, 可也. …(중략)… 光佐曰, 都巡撫先已入來結 陣, 故百官序立之地, 甚狹窄云. 令宣傳官出往摘奸, 如果 狹窄難容, 則號令排陣, 何如? …(후략)

27) 가주서(정 7품)는 주서의 임시 대리이며, 주서는 승 정원일기를 기록한다. 기주관(정 5품 또는 종 5품)은 춘 추관 소속으로, 사료가 될 시정을 기록한다. 기사관(정 6~9품)은 춘추관 소속으로, 실록 기초자료인 시정기를 기록한다. 이들의 배치에 따른 공간 사용에 대한 분석은 별도 연구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기사관은 좌우 협칸 등에 위치하여, 무릎을 꿇고 앉아 기록하였을 것이며, 이 때 바닥이 현재의 흙바닥이 아닌 전돌 등으로 마감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 초석의 문루 안쪽 부분이 직선으로 다듬어져 있어 이같은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림 2> 숭례문 종단면도

이들 의례의 실행시 면장(面墻)28)이 문제가 되었다. 즉 임금이 문루에서 의자에 앉아 바깥 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헌괵례와 전좌 때마다 면장 일부가 철거되었다. 『승정 원일기』영조 4년 4월 28일 기사29)에는 4월 19일의 헌괵례를 위한 면장의 철거와 개축 계 획이 기록되어 있고, 개축 완료 보고30)가 이어 지고 있다. 이러한 면장 철거와 재시공은 영조 31년 3월 8일31)과 5월 21일32) 헌괵례, 영조 48년 11월 23일 전좌33)에서도 볼 수 있다.

28) 문루 주위의 담과 성벽 여장(女牆)을 구분하기 위하 여, 문헌에 기록된 것과 같이 면장으로 표현하였다.

29)『승정원일기』영조 4년(1728) 4월 28일 21번째 기사 참조 ; 權益淳, 以訓鍊都監言啓曰, 今番受馘, 擧動時, 崇 禮門樓上前後面墻撤毁處, 左右傍近竝十七間許, 當日爲始 改築之意, 敢啓. 傳曰, 知道.

30)『승정원일기』영조 4년(1728) 5월 11일 35번째 기사 참조 ; 金潗, 以訓鍊都監言啓曰, 今番受馘擧動時, 崇禮門 樓, 前後面墻撤毁處, 今已畢築之意, 敢啓. 傳曰, 知道.

31)『승정원일기』 영조 31년(1755) 4월 18일 24번째 기 사 참조 ; 蔡濟恭, 以禁衛營言啓曰, 本營分授崇禮門樓面 墻, 前已撤毁矣. 燔甓, 昨已畢役, 故明日爲始, 改築之意, 敢達. 令曰, 知道.

32)『승정원일기』 영조 31년(1755) 7월 19일 18번째 기 사 참조 ; 趙載洪, 以禁衛營言達曰, 本營分授崇禮門樓面 墻, 前已撤毁矣. 燔甓昨已畢役, 明日爲始, 改築之意, 敢 達. 令曰, 知道.

33)『승정원일기』 영조 48년(1772) 11월 23일 16번째

기사 참조 ; 又以兵曹言啓曰, 今此崇禮門擧動時, 門樓南

面女堞, 令分授禁衛營, 撤毁之意, 分付, 何如? 傳曰, 允.

(7)

http://dx.doi.org/10.7738/JAH.2012.21.3.045 3-2. 숭례문 문루 하층 공간 고증

앞서 언급된 자료를 근거로 숭례문 문루 하 층 공간에 대한 고증을 시도하였다. 사진 자료 로 가장 오래된 것은『조선고적도보』에 있는 것으로 문루 하층 마루는 장마루다.

<그림 3> 하층 전경(『조선고적도보』)

<그림 4> 하층 평면(마루 부분, 1961년, 해체 전) 해체수리 공사 전인 1961년에 작성된 도면 에도 장마루로 실측되어 있다. 그러나 공사가 완료되어 가는 시점에 발간된 『서울特別市史 -古跡編(1963)』에는 홍예 상부에 남아 있는 귀틀 홈을 이용한 마루로의 복원계획도 <그림 5>가 수록되어 있다.

<그림 5> 서울특별시사 수록 문루 하층 평면 이 도면은 공사가 완공되기 전에 작성된 것 으로, 책자 발간 당시에는 이러한 형태의 마루

로 복원될 것으로 예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34).

<그림 6> 문루 하층 어칸 마루 해체후 (2011년) 앞서 언급한 영조 4년 4월 15일 『승정원일 기』를 근거로 살펴보면, 원래의 마루는 <그 림 6>의 원 안에 보이는 석재의 홈을 이용하 여 <그림 5>와 같은 마루였던 것으로 보이는 데, 남북 인방에 닿아 있는 귀틀을 제외하면, 새 귀틀35)의 수를 3개로 묘사한 기록과 일치 한다. 이 위에 전좌를 위하여 얇은 송판(薄松 板)으로 된 마루, 즉 장마루로 설치한 것으로 판단되며 이는 1961년 숭례문 해체 전 도면과

『조선고적도보』에 나타난 장마루36)와 일치 한다.

이것을 숭례문 복구와 연관지어보면 먼저

<그림 7>과 같은 화재 전 상태로의 복구를 고려할 수 있다. 수리 전 상태로 되돌리는 것 으로, 문화재 수리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감

34) 당시 공사에 참여하였던 정대기 도편수에 따르면, 임천은 육축에 있는 홈을 이용한 우물마루로, 조원재 도 편수는 수리 이전의 장마루로 시공하기를 원하였으며, 결국 제3의 안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35)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홍예널 상부에 있던 장귀 틀 받침목의 연륜연대 분석 결과 태조 창건시로 판명되 어, 창건 당시의 마루 형태가 이와 같았음을 알 수 있 다. 문화재청, 『숭례문 목부재 연륜연대 분석 및 기증 목재 기초조사』, 2011, 97~98쪽 참조.

36) 박송판이 걷기에 평활하여야 하는 어루(御樓)에 사

용된다는 점은 임금과 관련된 궁궐건축물 내부 마루에

장마루가 종종 나타나는 것과 일치한다. 흥인지문 문루,

일제강점기 도면에 나타난 광화문 문루, 경회루 등은 모

두 장마루로 되었다. 한편 장마루는 길고 좁은 목재 편

을 가공하여야 하는 가공상의 어려움과, 목재 건조에 따

른 수축과 변형이 심한 소나무의 특성상 민간에서는 거

의 사용되지 못하고, 궁궐건축 일부에서 나타나고 있다.

(8)

안한 복구안이다. 그러나 앞서 고찰한 결과 이 우물마루는 영조 때 수리 전후의 마루와 아무 런 연관성이 없으며, 최근 수리 때 수리 전과 수리 중 발견된 마루 흔적을 고려한 복구안을 절충한 것이다.

<그림 7>

우물마루 복구

<그림 8>

우물마루 복원

<그림 9>

장마루 복원 두 번째로는 <그림 8>과 같이, 남아 있는 귀틀홈을 이용한 복원이다. 이는 가장 이른 시 기로의 복원이라는 특징37)을 갖게 되나, 마루 높이가 초석면보다 낮아지며, 마루 귀틀의 결 구 방식에 대한 고증이 필요하다.

세 번째는 장마루로의 복원이다. 이는 숭례 문이 문화재로 지정된 1962년 12월 10일, 현재 와 같은 우물마루로 변형되기 이전 형태로 복 원된다는 의미가 있다. 이는 영조의 숭례문 사 용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고려하고, 숭례문이 좌우에 성곽을 거느린 도성 성문으로서의 역할 을 하였던 가장 가까운 시기인 조선 후기라는 시대적 특징을 반영한 안이다.38)

한편 헌괵례와 전좌로 인한 문루 하층 공간 활용 기록을 분석하면서, 동서 측면에 위치한 계단과 협문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앞

37) 군사적 관점에서 볼 때, 문루와 홍예 사이, 즉 1층 마루 아래를 병장기 보관고로 사용하여 유사시 사용하 기 위한 도성방어시설로서의 기능과 부합한다. (<그림 2> 종단면도 참조)

38) 1961년 해체수리 전에도 육축의 홈을 이용한 귀틀 마루가 아래에 있고, 그 위에 장마루를 깔기 위한 장선 과 장마루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는 이전의 역사적 흔적 을 모두 포함할 수 있는 최선의 복원안으로 판단된다.

서 언급한『승정원일기』영조 4년 4월 19일 기사에 의하면, 임금이 숭례문에 오르기 위해 궁에서 나와 인정문까지는 소여(小輿)로 이동 하며, 인정문에서 말을 타고(乘馬) 광통교를 거쳐 숭례문에 도착하였다. 영조 31년39) 기록 에는 임금이 소여를 타고 숭례문에 임하였고, 숭례문에 오를 때 소여를 탔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계단 폭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는 데, 가마는 계단석과 나란한 방향으로 올라야 하며, 계단 상부에는 임금이 가마에서 내릴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2011년 숭례문 육축과 동측성곽 복원부 연결 을 위한 계단 해체 중 옛 계단 유구가 발굴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림 10>

<그림 10> 숭례문 동편 계단 석축 유구

<그림 11> 동측 계단부 (1904, George Rose) 이 유구는 <그림 11>에서 볼 수 있듯이 동 편 계단폭이 현재 보다 넓었음을 말해주며, 실 측 결과 계단폭은 약 5.2m로 확인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난 장안문 자료40)를 보면, 계단폭은 17척 2촌으로 이를 환산하면 약 5.2m로 이와 일치한다.41)

39) 『승정원일기』영조 31년(1755) 5월 20일 15번째 기 사 참조 ; (전략)… 上曰, 百官服色, 皆以時服爲之. 出榻 敎 有傳敎曰, 今日乃日次, 提調旣承問候, 勿爲問候, 湯劑, 加劑五貼以入, 上乘小輿, 臨御崇禮門, 爲日出時矣.

40) 『화성성역의궤』권수(卷首) 도설(圖說) 장안문 기 사 참조 ; 長安門. [扁額. 前參判曺允亨書.] 城之北門也.

在行宮之左·稍東. 七百八十步. 巳坐亥向. …(중략)… 各

下. 闊六十七尺八寸·高二十三尺五寸·左右臥長·臺長. 各三

十二尺四寸. 石梯. 各二十三層. 闊十七尺二寸. …(후략)

(9)

http://dx.doi.org/10.7738/JAH.2012.21.3.045 좌우 협문의 위계는 유교건축의 일반적 원

칙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영조 때 창경 궁 홍화문에 전좌한 자료42)에는, 세자가 막차 로 간 뒤, 임금이 동편 계단을 통해 루(樓)에 오르며, 승상과 사관 이하가 서편 계단으로 오 르고, 세자가 삼문을 연 후 서편 계단으로 오 르는 등의 순서가 기록되어 있다. 영조는 문에 임하는 의주(儀註)43)를 정하였는데, 같은 방식 으로 숭례문의 좌우 협문이 구분되어 사용됨을 추정할 수 있다. 즉, 동문은 임금을 위한 동선 을 고려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4. 결론

지금까지 관련 문헌과 자료를 통한 숭례문 문루의 하층공간의 사용방식과 건축 변화 과정 에 대한 고증을 실시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 론을 얻었다.

41) 문화재청에서는 숭례문 복구자문회의(‘11. 4. 27)를 거쳐 동측 계단 폭을 발굴 유구에 맞춰 복구설계를 수 정하기로 결정하였고, 2012년 현재 이에 따라 시공 중이 다. 한편 화성 장안문 건립시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참고 하여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사료가 있다.『승정원 일기』정조 18년(1794) 10월 8일 34번째 기사를 보면 화 성의 성루(城樓) 높이를 흥인지문 높이와 같게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 (전략)… 上曰, 華城城役, 何如? 濟恭 曰, 城樓新成, 煥然改觀矣. 其高, 高於京東門, …(후략) 계단의 폭과 높이 등은 숭례문 육축의 높이와 함께 분 석되어야 할 사항으로 후속 논문에서 논할 예정이다.

42)『승정원일기』영조 25년(1749) 8월 6일 기사 참조 ; (전략)… 又命光毅書臨門儀注曰, 世子先就弘化門內幕次.

予仍以小轝, 詣弘化門內, 陞東橋詣樓. 承·史自西橋詣樓入 侍, 領左相一例入侍. 侍衛只兵曹·摠府入直人員, 而摠府·

兵曹堂郞登樓, 其餘皆止於門內. …(후략)

43) 영조는 임문휼민의(臨門恤民儀)를 지었다. 원래 명 나라 태사(太師) 초횡(焦竑)이『양정도해(養正圖解)』를 만들고, 책머리에 문왕(文王)이 사민(四民)을 구휼한 논 설을 실었으며, 숙종이 여기에 찬(贊)한 것을 더하여 의 주로 만들었다. 의주로 만든 것은 영조 25년이나, 숙종 대 자료를 참고하고, 일반적인 유교적 예법에 비추어 볼 때 동서의 위계는 이와 같다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 록』영조 70권 25년(1749) 8월 6일 1번째 기사 참조

1) 숭례문 문루는 의례와 밀접한 연관이 있 고, 특히 영조대 임금의 전좌 및 헌괵례 등의 행례시 마다 면장 일부를 헐고 개축하였다.

2) 숭례문 하층 어칸 마루는 임금과 관련된 조선 후기의 역사적 기록과 근래의 수리 전후 사실 등을 고려할 때 장마루의 형식의 복원이 타당하다.

3) 동측 등성계단은 일제 강점기 직전에 변 형되었으며, 화성 장안문의 예를 참고로, 발굴 유구와 관련 자료를 검토한 결과, 원래 계단 폭은 약 5.2m 이다.

4) 좌우 협문 위치와 계단 폭이 좌우 대칭 이 아닌 것은 임금과 관련된 의례에 따른 절 차와 유교적 위계를 고려한 것이다.

< 참고문헌 >

1.『朝鮮王朝實錄』,『承政院日記』,『華城城 役儀軌』,『朝鮮古蹟圖譜』

2. 이강근,「崇禮門 연구(Ⅰ) : 修理史의 復元 과 意義」, 『(講座) 美術史』, 19호, 2002 3. 국립문화재연구소,『숭례문복원자료집』,

2008

4. 서울특별시 중구청,『崇禮門 精密實測調査 報告書』, 2005

5.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서울南大門修理 報告書』, 1966

6. 서울特別市史 編纂委員會,『서울特別市史- 古蹟篇』, 1963

7. 문화재청,『숭례문 목부재 연륜연대 분석 및 기증목재 기초조사』, 2011

접수(2012. 3. 21) 수정(1차: 2012. 6. 8) 게재확정(2012. 6. 19)

(10)

A Research on the Use and

Architectural Changes of Sungnyemun in King Yeongjo's Reign

JO, Sang-Sun

(Research Associat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Ph. D. Candidate, Sungkyunkwan University)

Abstract

This research work is to analyz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f Sungnyemun especially in King Yeongjo's reign in Joseon dynasty. The result of this research is summarized as following:

1. Th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f Sungnyemun in King Yeongjo's reign are closely related with Confucian ceremonies such as Jeon-jwa and Heon-goek-rye. To perform these ceremonies, some lower walls of Sungnyemun's wooden pavilion were removed and used as ceremonial space. And after ceremony it was restored.

2. The floor type of center bay of the 1st story of wooden pavilion should have a type of floor using long and narrow fine tree plate, which is same type before the repair work of 1960's dismantlement.

3. The width of east stairway which is reached to east small gate, was changed just before Japanese's rule(1910~1945), should be broaden than present width, which is proven through the recent excavation.

4. The reason of asymmetric characteristic of locations of both east and west narrow-gate, and widths of east and west stairway, are related with order of King's ceremony.

※ Jeonjwa : a ceremony to see national affairs or receive royalty from officials in main hall or main gate of palace in Joseon dynasty (some times open to public)

※ Heon-goek-rye : a ceremony after win a war and offering to king enemy's ear or head in Joseon dynasty

Keywords : Sungnyemun, King Yeongjo, Jeonjwa, Heon-goek-rye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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