Ⅶ. 청대(淸代) 문학 1. 시(詩)
청대의 시는 주로 당·송의 시풍을 높이고 본받아 쓰여졌다.
청 초의 시단을 영도한 대표적인 시인으로 전겸익(錢謙益;
1582~1664)과 오위업(吳偉業; 1609~1671) 두 사람을 들 수 있는데, 대략 이들의 시에 대한 견해 차이가 바로 청대 시단 을 당시(唐詩)를 받드는 유파와 송시(宋詩)를 받드는 유파의 둘로 나누게 한 출발점이 되었다. 곧 전 겸익이 명대(明代) 전·후 칠자(七子)들의 “시는 반드시 성당을 본받아야 한다(詩
必盛唐.).”고 한 태도를 공격하고 자기 나름대로 새로운 시풍 을 열었던 송·원의 시를 높이 평가하여 특히 송의 소식(蘇軾) 과 원의 원호문(元好問)의 작품을 좋아한 데서 송시를 받드는 유파의 출발이 되었고, 오위업이 백거이(白居易)의 시법(詩法) 을 본받아 당시 걸작이라는 칭송을 받았던<장가행(長歌行)>
등의 작품을 냄으로써 당시(唐詩)를 받드는 유파의 출발이 되 었다. 그런 가운데서나마 비교적 두드러진 것이라고 한다면 신운파(神韻派)의 왕사정(王士禎)과 격조파(格調派)의 심덕잠 (沈德潛) 및 성령파(性靈派)의 원매(袁枚)를 들 수 있겠다.
왕사정(王士禎;1634~1711)은 자가 이상(貽上), 호가 완정(阮 亭) 또는 어양산인(漁洋山人), 산동(山東) 신성(新城) 사람이다.
그는 장성한 후에 전겸익과 오위업에게 시학(詩學)을 물었으며 본격적으로 성당(盛唐)의 시를 내세웠다. 그는 특히 신운설(神 韻設)을 주장하여 한때 시단을 풍미하고 당시 청대 제일의 시 인이라는 추존(推尊)을 받았는데, 신운설은 본래 송대 엄우(嚴 羽)의 《창랑시화(滄浪詩話)》의 이론을 계승한 것으로, 시의 인 위적인 수식이나 논리를 반대하고 자연스럽고 청신한 신정(神 情)과 운미(韻味)가 있어 시가 선(禪)의 경지나 그림과도 같은 취향에 이르기를 주장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에 근 거하여 그는 42인의 당대(唐代) 시인의 작품을 선집(選集)한
《당현삼매집(唐賢三昧集)》에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는 수록하 지 않고 왕유(王維)와 맹호연(孟浩然)을 중심으로 뽑았고, 왕
사정의 이러한 주장은 청초에 전겸익의 영향으로 송시가 유행 했던 시단의 조류를 바꿔놓았다. 작품은 전고(典故)의 사용을 꺼리고 자연스런 표현으로 신운을 추구한 결과 짧은 7언 절구 (絶句)에서 좋은 성과를 올려 <진회잡시(秦淮雜詩)>·<진주절구 (眞州絶句)> 등과 같은 명편을 남겼다. 그러나 또한 언외(言 外)에 신운을 가질 수 있는 것을 목표한 나머지 전아(典雅)에 치우치고 수식과 조탁(雕琢)에 골몰하여 벽사(僻事)·기자(奇字) 가 많이 사용됨으로써 내용이 공소(空疏)해지기 쉬었으며, 이 점에서 제가의 가혹한 비평을 면하지 못하기도 했다.
2. 소설(小說)
1) 단편 소설(短篇小說)
청대 단편 소설의 대표적인 예는 포송령(蒲松齡)의 《요재지 이(聊齋志異)》이다.
포송령(蒲松齡;1630~1715)은 자가 유선(留仙), 호가 유천(柳 泉), 산동(山東) 치천(淄川)사람이다. 《요재지이(聊齋志異)》 16 권에는 지괴(志怪)와 전기(傳奇) 431편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 이 주로 귀신 이야기이기는 하나 인정(人情)에 어긋나는 것이 많지 않아 독자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귀신 세계로 끌려 들어가게 되고, 또한 문장이 세련되어 그 성가가 크게 높았다.
2) 장편 소설(長篇小說)
청대는 장편 소설의 황금 시대를 이루었다. 발표된 소설의 양도 명대에 비해서 훨씬 많고 내용이나 길이 역시 명대의 작 품에 비해서 훨씬 다양하고 긴 대작이 많다. 대체로 애정소설
· 사회소설 · 협의소설(俠義小說)로 구분해볼 수 있다. 그 중 에도 특히 애정 소설에 속하는 조점(曹霑)의 《홍루몽(紅樓夢)》
과 사회 소설에 속하는 오경재(吳敬梓)의 《유림외사(儒林外 史)》가 청대 소설 전체를 대표할 만큼 가장 널리 읽혔던 작품 이다.
조점(曹霑; 약1719~약1764)은 자가 설근(雪芹) 또는 근포(芹 圃), 기인(旗人) 출신으로 남경(南京)에서 자랐다. 만주 귀족
집안에 태어나 증조부에서 아버지 대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재 정 관계 요직인 강녕(江寧)의 직조(織造)를 세습받아서, 강희 (康熙) 황제가 남순(南巡)할 때 네 번이나 그 집을 행굴으로 삼았을 만큼 호화로운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나이 10세를 전후하여 아버지가 직조를 사직하고 북경 (北京)으로 돌아간 이후 가세가 쇠락하여 그는 중년 이후를 교 외에서 가난 속에 살다가 비참한 생애를 마쳤다. 《홍루몽》은 그러한 비참한 생활 속에서 화려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여 쓴 자전적 소설이다.
《홍루몽》은 가보옥(賈寶玉)이라는 귀족의 집안이 몰락해가는 과정 속에 그를 둘러싼 이른바 금릉십이차(金陵十二釵)라는
열두 미녀들의 이야기를 엮어놓은 것으로, 처음엔 조설근이
《석두기(石頭記)》란 제목으로 80회까지 써서 세상에 내놓은 미완성 작품이었는데, 그가 죽은 뒤 고악(高鶚; 1795 전후)이 그의 의도에 따라 40회를 더 써 보태어 지금 유행하는 120회 본으로 완성시킨 것이다. 이 소설의 가장 중심이 되는 줄거리 는 가보옥과 그의 내종매 임대옥(林黛玉) 그리고 이종매 설보 차(薛寶釵)가 대관원(大觀園)에 함께 살면서 벌이는 삼각 연애 의 비극이다. 작품 속에 가씨 집안 전성 시대의 지극히 호화 로운 생활이 다각적으로 잘 그려져 있고, 주인공들로부터 하 녀들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의 미묘한 성격의 차이를 집어내듯이 그리고 상호간에 움직이는 심리를 남김없이 묘사
하고 있다.
조설근의 80회에 고악이 속작한 40회는, 임대옥의 죽음과 가 씨 집안의 목락 그리고 가보옥의 출가를 써서 비극으로 끝맺 었다.
오경재(吳敬梓;1701~1754)는 자가 경헌(敬軒), 호가 문목노인 (文木老人), 안휘(安徽) 전초(全椒) 사람이다. 부유하고 명망있 는 집안에 태어나 넓은 학문을 닦고 문장에도 능하였으나, 호 탕한 성격 때문에 오래 가지 않아서 유산을 탕진해버리고 가 난한 생활을 하였다.
당시는 누구나 팔고문(八股文)이라는 형식에 얽매인 문장을 공부하여 과거 준비를 하는 데만 급급하면서 이른바 성현의
길을 숭상한다고 내세우는 것이 사류(士流)의 공통된 폐단이었 다. 그러나 오경재에게는 과거 준비에 급급하는 선비들이 천 하게 보이고 수단을 가리지 않고 벼슬 길에 연연하는 자들이 추악하게만 보였다. 이러한 유림(儒林)들의 생태를 쓴 것이 바 로 《유림외사》이다.
《유림외사》는 사대부 계급의 허위에 찬 부패한 생활을 날카 롭게 풍자한 것으로, 제작 시기가 《홍루몽》(1750년대 말~1760년대)보다 약간 먼저(1740년대)이나 같은 시기에 널리 읽혔다. 오경재의 원본은 50회본이었으나 전하지 않고, 이후 55회본·56회본·60회본이 나왔는데 모두 후인이 작자의 문집 중에서 관련된 말을 뽑아 늘렸거나 보작(補作)해 넣은 것이고
그 중 56회본이 가장 유행하던 것으로 몇 가지 다른 판본이 전하고 있다.
3)만청 소설(晩淸小說)
만청(晩淸), 특히 청조(淸朝) 최후의 20년 가량은 중국 소설 사상 소설 문학이 양적인 면에서 가장 번창한 시기였다.
당시 각 신문에서 소설을 다투어 실었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 로 소설만을 다룬 잡지들도 많이 나왔다. 자신이 직접 소설을 쓰기도 했던 사람들로서 맨처음 양계초(梁啓超)가 발생한 「신 소설(新小說)」(1902)이다.
만청 소설을 대표하고 또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견책소설을 들지 않을 수 없 다.
견책소설이라는 용어는 노신(魯迅)이 그의 《중국소설사략(中 國小說史略)》에서 처음 사용한 말로서, 풍자 소설과 구분해 쓴 말이다. 이 부류의 소설은 특히 광서(光緖) 경자년(庚子 年;1900) 이후에 더욱 성행하였는데, 이들은 예외없이 사회의 병폐와 탐관 오리의 폐악을 파헤쳐 직접 매도한 것으로 무너 져가는 조국을 걱정하는 지식인들의 분노의 표현이라 하겠다.
지식인들은 개혁의 뜻을 품고 적개심에 불타 유신(維新)과 애 국을 외치며 부국 강병의 길을 향해 진력하였으나, 무술정변
(戊戌政變;1898)이 구 세력 앞에 힘없이 실패하고 그 2년 후 인 경자년에 의화단(義和團) 사건이 일어났으며 또 정부는 이 를 원만히 수습하지 못하고 오히려 심각한 외제(外帝)의 간섭 만을 초래하게 되었다. 국민 앞에 그 무력함을 드러낸 정부는 마침내 신망을 잃고 나아가서는 무서운 공격을 받게 되었다.
소설에 있어서는 이면을 들춰내어 폐악을 백일하에 폭로하고 시정(施政)에 대해서도 가차없는 규탄을 가하며, 때로는 이 필 봉이 풍속·습관에 까지 미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