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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손남훈*

목 차 1. 들어가며

2. 조언자적 위치 창출과 유토피아로서의 조국 이미지 3. 결여의 공통 감각 구축과 민족 주체성 회복이라는 공통 과제 4. 민족 주체성 회복의 구체적 방식- 4월 혁명 정신 계승론 5. 나가며

<국문초록>

재일한인 지식인 매체 뺷한양뺸 연구는 주로 문학 작품과 비평에 한해 논의가 전 개되어 왔다. 그러나 뺷한양뺸의 편집 방향은 문학보다 담론의 양상을 분석할 때 명 확한 의미가 궁구될 수 있다. 본 논문은 뺷한양뺸의 문학 작품보다는 담론에 집중함 으로써 1960년대 뺷한양뺸의 매체적 성격을 밝히고자 한다.

뺷한양뺸은 재일한인 지식인들이 한국 문제에 ‘조언자’적 위치를 자처했던 매체다.

뺷한양뺸은 전근대 한국을 유토피아적인 공간으로 설정하고 가치를 부여하여 민족의 자긍심과 애국심을 높이는 한편,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뒤떨어진 현재의 한국을 비판하면서 민족 주체성의 회복을 강조했다. 그런데 민족 주체성 결여는 재일한인들의 상황이기도 했다. 따라서 민족 주체성 회복은 한국민과 재일 모두의 공통 과업이 되어, 한국민과 재일의 동일성을 상상하게 하는 한편, 뺷한양뺸의 한국 개입 논리를 강화시키는 근거가 되었다.

민족 주체성 회복을 구체화하기 위해 뺷한양뺸은 1960년 4월 혁명 정신을 호출 했다. 그런데 민족 주체성 회복은 뺷한양뺸이 내세운 근대화의 기반이기도 했다. 그 리하여 4월 혁명 정신은 정치적 혁명의 당위성보다는 혁명 정신의 내면화가 강조

*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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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 군사정권의 ‘인간개조론’에 부합하게 되었다. 이러한 4월 혁명 정신의 순치 화는 1960년대 뺷한양뺸이 반정권적이기 어려웠던 사정과 관련된다. 그러나 군사 정권은 뺷한양뺸의 민족 주체성 강화 논리와 4월 혁명 세력에 대한 옹호가 내포한 불온성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결국 뺷한양뺸은 1974년 조작된 ‘문인 간첩단 사건’으 로 인해 한국 반입이 금지되어 완전히 잊히고 말았다.

주제어 :뺷한양뺸, 재일한인, 조언자적 위치, 민족 주체성, 유토피아, 근대화, 4월 혁명

1. 들어가며

뺷한양뺸(편집 및 발행 김인재)은 1962년 3월 1일 창간하여 1984년 3월호(통 권 177호)로 종간된 재일한인 지식인 매체다. 그러나 오랜 기간 동안 발간되 었음에도 아직까지 뺷한양뺸에 대한 연구는 부족한 형편이다. 본고는 뺷한양뺸의 1960년대 담론을 중심으로 살핌으로써 그 특성을 규명하는 데 초점을 둔다.

기존의 뺷한양뺸 연구는 크게 매체의 성격을 밝히는 논문들1)과 문학 작품을 중심으로 뺷한양뺸의 성격을 규명하는 논문들2)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그런

1) 이헌홍, 「뺷한양뺸 소재 재일한인문학의 연구 방향과 과제」, 뺷한국민족문화뺸 제25집, 부산 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5.04; 소명선, 「재일한인 에스닉 미디어의 계보와 현황」, 뺷일 어일문학뺸 제30집, 일어일문학회, 2006.05; 이재봉, 「국어와 일본어의 틈새, 재일 한인 문학의 자리 -뺷漢陽뺸, 뺷三千里뺸, 뺷靑丘뺸의 이중 언어 관련 논의를 중심으로」, 뺷한국문 학논총뺸 제47집, 한국문학회, 2007.12.

2) 뺷한양뺸에 대한 기존 연구를 장르별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시 : 하상일, 「1960년대 뺷한양뺸 소재 재일 한인 시문학 연구」, 뺷한국문학논총뺸 제47집, 한국문학회, 2007.12; 손남훈, 「뺷한양뺸 게재 시편의 변화 과정 연구 -庚連과 鄭英 勳의 시를 중심으로」, 뺷한국문학논총뺸 제70집, 2015.08; 손남훈, 뺷뺷한양뺸 게재 재일 한인 시의 주체 구성과 언술 전략뺸,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02.

소설 소설 소설

소설소설: 한승우, 「뺷한양뺸지에 드러난 재일지식인들의 문제의식 고찰」, 뺷어문론집뺸 제36집, 중앙어문학회, 2007.03; 고명철, 「1960년대의 뺷한양뺸에 실린 소설의 문제의식- 뺷한 뺸의 매체사회학적 위상을 중심으로」, 뺷한국문학이론과 비평뺸 제46집, 한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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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전자의 경우, 뺷한양뺸 텍스트 자체에 대한 검토보다는 재일한인 문학이라는 큰 범주에 집중하고 있으며 후자는 뺷한양뺸 게재 작품의 성격을 뺷한양뺸 담론의 경향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뺷한양뺸은 문학 작품을 게재한 매체이 기도 하지만, 다양한 논문이나 평문들을 특집으로 기획한 매체이기 때문에 뺷한양뺸의 성격을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담론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특히 기존 뺷한양뺸 연구가 주로 1960년대 발간된 문학 작품과 비평 텍스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정을 고려하면 1960년대 뺷한양뺸의 성격을 재검 토하는 것은 향후 이어질 뺷한양뺸 연구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1960년대 뺷한양뺸의 특성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당대 뺷한양뺸 언술 의 성격부터 파악하여야 한다. 즉 뺷한양뺸은 한국에 대한 ‘조언자’적 언술이 라는 점이 전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뺷한양뺸은 재일한인 지식인에 의한 한국 개입을 의도한 매체라는 것이다. 기존 연구는 뺷한양뺸의 디아스포라적 성격을 규명하거나 비평사적 맥락에서 뺷한양뺸이 지닌 위치를 복원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뺷한양뺸이 재일한인 지식인 중심의 발화체라는 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분히 그들의 한국을 향한 발화라는 점이 강조

이론과비평학회, 2010.03; 지명현, 뺷재일 한민족 한글 소설 연구- 뺷문학예술뺸과 뺷한 뺸을 중심으로뺸,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08.

평론 평론 평론 평론

평론: 허윤회, 「1960년대 참여문학론의 도정-뺷비평작업뺸, 뺷청맥뺸, 뺷한양뺸을 중심으로」, 뺷상허학보뺸 제8집, 상허문학회, 2002.02; 박수연, 「1960년대의 시적 리얼리티 논의- 장일우의 뺷한양뺸지 시평과 한국문단의 반응」, 뺷한국언어문학뺸 제50집, 한국언어문 학회, 2003.05; 하상일, 「1960년대 문학비평과 뺷한양뺸」, 뺷어문논집뺸 제50집, 민족어 문학회, 2004.10; 하상일, 뺷1960년대 현실주의 문학비평 연구- 뺷한양뺸, 뺷청맥뺸, 뺷창 작과비평뺸, 뺷상황뺸을 중심으로뺸,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김유중, 「장일우 문학비평 연구」, 뺷한국현대문학연구뺸 제17집, 한국현대문학회, 2005.06; 고명철, 「민 족의 주체적 근대화를 향한 뺷한양뺸의 진보적 비평정신- 1960년대 비평 담론을 중 심으로」, 뺷한민족문화연구뺸 제19집, 한민족문화학회, 2006.12; 조현일, 「뺷한양뺸지의 장일우, 김순남 평론에 나타난 민족주의 연구」, 뺷한국문학이론과비평뺸 제43집, 한국 문학이론과 비평학회, 2009.06; 하상일, 「장일우 문학비평 연구」, 뺷한민족문화연구뺸 제30집, 한민족문화학회, 2009.08; 하상일, 「김순남 문학비평 연구」, 뺷우리문학연구뺸 제31집, 우리문학회, 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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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야 한다. 거기서부터 뺷한양뺸의 언술 특징이 궁구될 수 있으며, 재일한 인 지식인들이 왜 한국의 여러 문제에 개입하려 하는지, 어떠한 방식으로 언술 주체의 입지를 창출해내는지를 살핌으로써 뺷한양뺸의 전반적인 성격 이 명확히 드러날 수 있다. 따라서 본고는 1960년대 뺷한양뺸의 담론을 중심 으로, 재일한인 지식인들이 한국 문제에 개입한 발화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서 논의하고자 한다.

2. 조언자적 위치 창출과 유토피아로서의 조국 이미지

뺷한양뺸은 한국의 근대화에 담론의 초점을 두고 있다.3) 이는 거꾸로 말해 서 자신들이 처해 있는 재일한인으로서의 삶에 대해서는 다소 비중을 덜하 고 있다는 점을 뜻한다.4) 그렇다면 뺷한양뺸이 초점화하고 있는 담론이 어째

3) “뺷한양뺸은 창간 이후 10여년간 초지일관하여 애국애족의 깃발을 높이 추켜들고 자주․

자립․민족적 단결을 도모하려는 불변한 신조에서 꾸준히 발행되어 국내외의 동포들로 부터 절대한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있는 교포사회의 유일한 권위있는 민족지이다.” 김기 심․김인재, 「성명서」, 1974년 6․7월호, 한양사, 130면. (이하 뺷한양뺸을 인용할 때에는 필자, 글제목, 연호수, 면수만 기재한다) “이는 ‘전근대적’인 한국이 나아가야 할 ‘근대화’

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뺷한양뺸 나름의 세 가지 원칙이기도 하다. ‘자주’가 민주주의 원칙 의 수호와 결의를 되새기면서 정권 비판의 논리를 근거하는 원리라 한다면, ‘자립’은 정 치적․경제적 예속을 거부하는 대항담론의 생산과 남북 통일을 지향하는 근거가 된다.

한편, ‘민족적 단결’은 전통 문화의 재발견을 통해 민족 동일성의 감각을 구축함으로써 공동체의 상상력을 현실화하는 정신적 토대가 된다.” 손남훈, 뺷한양 게재 재일 한인 시 의 주체 구성과 언술 전략뺸, 위의 논문, 14~15면.

4) 한승우 또한 뺷한양뺸이 “재일한국인이 만든 잡지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한양>에는 재 일 동포들의 이야기가 첨예하게 진행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편수 역시 많지가 않 다”(한승우, 앞의 논문, 254~255면)고 지적하고 있다. 소명선 또한 “「한양」이 60년대와 70년대의 일본 사회의 변동에 대한 언급과 정치적인 언설이 배제되어 있다는 점”을 지 적한다. 다만 소명선은 “65년 한국 정부의 베트남 지원부대 파견, 같은 해 재일한인의 법적 지위와 깊은 관련이 있는 한일국교정상화, 80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과 광주사태, 그리고 전두환대통령에 의한 제5공화국 출범 등과 같은 당시의 한국 정세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 (소명선, 앞의 논문, 169면)고 말하는 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뺷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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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재일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처지보다 생활의 기반이 되고 있지 않은 한국의 현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까?

먼저 세대론적 입장에서 살펴보자면, 뺷한양뺸은 김인재와 김기심(뺷한양뺸 을 발간한 한양사 사장)을 비롯한 재일한인 1세대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한국어 매체로 보인다. 즉 뺷한양뺸은 재일한인들의 생활 전반을 지 배하는 일본어가 아니라, 재일한인 1세대들의 정신적 기반이 되는 한국과 한민족, 그리고 무엇보다 민족적 정체성을 잘 나타내주는 한국어로 자신들 의 의견을 표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재일 2․3세대들이 생활 의식으로서의 현실과 민족 의식으로서의 당위 가 분열되어 있음으로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실존적 조건으로 받아들 일 수밖에 없었다면, 재일 1세대의 경우, 일본에 머물고 있는 실존적 조건 이 민족 의식이라는 당위적 지향을 압도하지는 못했다. 말하자면 1세대에 게 현실과 당위는 등치하는 것이었다.5)

따라서 재일 1세대에게 일본은 2․3세대들과는 달리, ‘이역만리’의 타향으 로 인식될 뿐, 내가 태어나고 자란 자기 정체성을 증명해 줄 공간은 아니다.

더욱이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고 경제적으로 빈곤한 한국의 상황은 그들이

뺸은 이들 문제에 대해 특집과 간담회 등을 마련하여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한 편, 문학작품을 통해서도 심도 있게 다루었다.

5) “재일 한인 1세대 시문학은, 이후의 2, 3세대와는 달리, 민족적 정체성의 혼란을 보이지 않는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김정훈․정덕준, 「재일 한인 시문학 연구- 재일 1세대 작품을 중심으로」, 뺷한국문학이론과비평뺸 제38집, 한국문학이론과비평학회, 2008.03, 183면. 장사선은 이러한 재일 1세대들의 문학적 경향을 ‘내셔널리즘’으로 파악 하고 “이들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한국적이고 민족적인 것’은 앞장에서 언급한 개화기 에 생성된 한국 민족주의를 뜻한다. 개화기에 ‘제국주의’ 또는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생성된 민족주의가 재일 한민족 작가들의 작품 속에 계승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장사 선, 「재일 한민족 문학에 나타난 내셔널리즘」, 뺷한국현대문학연구뺸 제21집, 한국현대문 학회, 2007.04, 414면. 정리하자면, 내외부의 강력한 위협에 맞서 재일 1세대는 민족주의 로 무장하여 대항했고 그것이 문학적 양상으로 나타난 바, 적어도 1세대 작가들의 문학 에서는 이후 세대와는 달리 민족 정체성에 대한 혼란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는 1세대 지식인이 중심이 된 뺷한양뺸의 담론적 지형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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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갔을 때 쾌적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되지 못한다. 비록 일본에 살고 있는 그들이 디아스포라로서의 고통 속에 있다 하더라도, 한국 내 생활의 기반이 조성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6) 뺷민주 조선뺸을 비롯한 대다수 재일한인 매체가 일본어로 발간된 것이 일본 내 한 인의 실상을 알리고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되었다면, 뺷한양뺸 의 한국어 발간은 생활 현실로서의 일본에 집중하기보다 민족 정체성의 유 지와 지속을 전제로,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고국의 실질적인 생활 여건을 개선 하고자 하는 목적성이 더 강했음을 알려준다.7) 1960년대 뺷한양뺸의 논지가 한국의 근대국민국가 건설, 즉 근대화에 닿아 있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렇다면 뺷한양뺸은 재일한인들의 한국을 향한 발화를 어떠한 전략으로 가능하게 했는가? 뺷한양뺸은 한국에 대한 재일한인들의 발화 집결체를 자처 했다.8)재일한인들이 한국민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갖고 있는지 세밀하게

6) 재일한인 문철호의 글이 이러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권리를 가진 사람이 되어 떳떳하게 일하고, 근심 없이 살며, 당당하게 나다닐 수 있으면 된다! 어엿하게 세워지는 나라의 나도 한개 어엿한 백성이 되자! 적어도 내 아들 딸들 대에는 그렇게 되자! 그런 데 어떻게 되었는가? 한국에서는 내 아들 딸 맞잡이들마저가 어떤 모양으로 되어가고 있는가? 나날이 어망차망해지니 무서운 일이 아닌가? 자라나는 내 자식새끼들을 데리 고 그런 데로야 돌아갈 수 없지 않은가, 나는 그것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면 좋은가.”

문철호, 「노두단상」, 1962년 9월호, 168면.

7) 이러한 목적성은 창간호의 「창간사」에서부터 확인된다. “祖國의 지난날을 도리켜보아 그것으로 앞길을 밝히는 등臺로 삼을 것이며, 祖國의 江山을 돌아보아 우리의 生活을 設計할 것이며, 祖國의 現實을 살펴 國家 百年大計을 이룰 힘찬 再建에 이바지 할것 이다.” 「창간사」, 1962년 3월호, 9면.

8) “「잡지」는 문학자나 문학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생명의 무대다. 문학을 뜻하면서 자기 무대를 못 가졌든 우리들은 무대도 각본도 없이 노방(路傍)에서 즉흥극을 연출하는 나 그네광대 같았다. 길고 쓰라린 유랑이었다. 그러나 무대없는 나그네광대의 고민은 반감 되었다. 이제부터는 「한양」이 우리들의 편짝을 들어주리라. 지금까지 재일교포는 空氣 속에 쉽사리 흡수당해 버리는 말의 문화론은 성히 했다. 그것이 발자취마저 남지않는 허세일지라도 민족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든 것이다.

「한양」은 이 공허에 가까운 재일교포의 문화로부터 출발하여 버젓한 형상을 갖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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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볼 수 있는 매체인 것이다. 뺷한양뺸은 본국의 사정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조언하는 입장에서9) 한국 내 재일한인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일이라는 자신들의 위치를 강조하는 것은 효과적인 전략이 되지 못한다. 그보다는 한국과 재일의 동일성을 증명함으로써 발화 주체의 입지 를 창출하는 것이 효과적이다.10)이는 근대국민국가 건설을 통해 한국의 발 전을 도모하는 방향성과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근대국민국가는 무엇보다 민 족을 발견하고 그 역량을 구심으로 삼아 국가 체제를 구축해가는 청사진을 그리기 때문이다. 민족은 혈통의 동일성을 매개로 서로 다른 타자들을 공동 체로 구성하게 하는 핵심 근거가 되기 때문에 재일 또한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는 논리는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었다.11)

를 만들지 않으면 안될것이다. 생각하면 「한양」의 사명은 크다. 그리고 우리들의 「한양」

에 탁(托)하는 기대는 더욱 클런지도 모른다. 이 사명과 기대를 기반으로하여 재일교포 들의 문화의 꽃이 필것을 꿈꾸는 것은 내 뿐일까…….” 동경․안복기자(安福基子), 「재 일교포의 문화광장으로」, 1962년 6월호, 175면. 1960년대 뺷한양뺸은 민단계 재일 지식인 들의 한국발 발화로 요약될 수 있다. 재일한인들의 한국에 대한 담론 집결체로서의 역 할을 뺷한양뺸이 수행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인용문은 그에 대한 좋은 증거가 된다.

9) “필자는 한국 금융정책에서 응당 고려되어야 할 몇가지 점들을 고찰함으로써 시정당국 의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박영철, 「한국 금융정책에 대한 회고와 전망」, 1962년 12월호, 25면. 뺷한양뺸은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을 분석,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와 같은 근대화의 요구가 시정 당국에 충실히 반영되기를 바랐다. 이를 증명해 주는 것 중 하나가 뺷한양뺸 10주년 기념호(1971년 4․5월호)에 실린 축사다. 여기에는 김팔봉, 김동리와 같은 저명 문인 뿐 아니라 국회의원 김상현 등의 축사가 실려 있다.

이는 한국에 대한 뺷한양뺸의 영향력을 자부하는 것이면서 뺷한양뺸과 한국 인사들과의 관 계를 희미하게나마 설명해주는 단초가 된다. 따라서 매체를 중심으로 한국의 정치계, 문화계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10) “수난의 상흔이 아직도 다 가셔지지 않은 조국의 앞날은 다난하다. 우리는 지금 거기에 살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방관자가 아니다. 우리는 조국과 함께 울고 조국과 함께 웃을 운명을 지닌 하나의 동포들이다.” 「권두언」, 1963년 1월호, 15면.

11) 이를테면 뺷한양뺸 창간호를 읽게 된 청주 시장을 지낸 홍원길은 「나의 봄마지膳物」이 라는 글에서 “國內가아닌 日本이라는 不利한 与件下에서 崇高한 指標아래 모든 惡條 件을 무릅쓰고 우렁찬 進軍을한 「漢陽」의 슬기롭고 늠름한 모습에 어찌 感嘆치않을수 있으랴만 그것보다도 祖國에서 버림받았던 僑胞들이 祖國에바치는 丹誠에 國內同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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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뺷한양뺸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한국의 이미지가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우선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국=한국’은 한국민과 재일한인 모두의 공통 관심사이자 발언의 대상이므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의 창출은 곧 공통의 문제와 해결 방안을 과업으로 설정하는 첫 단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1963년 9월호 ‘원고모집’란에 “국내 동포와 재일교포들을 보다 밀접히 연결 시키고 오래동안 해외에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교포들에게 조국에 대한 인식 과 사랑을 가일층 깊게 하는데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드릴 목적으로 다음과 같은 요령으로 독자 여러분의 원고를 모집하는 바입니다”, “■모집하는 원고 는 「내고향의 자랑」입니다.”라면서, “재일교포들의 애국심을 북돋는데 도움 이 될 수 있는 내용으로 그 지방의 아름다운 산천, 자랑스러운 역사와 명승고 적, 문화유산, 옛날부터 전해오는 전설과 일화, 민요와 인물, 그 지방출신의 名臣․大學者․작가․예술가 그리고 지방고유의 풍습과 特産등 아무쪼록 우리조국의 悠久한 역사와 문화, 아름다운 민족성과 기백을 보여줄 수 있는 재료들을 엮어주시면 좋겠읍니다. 지방에 따라 그중 어느 하나를 소개하실 수도 있겠고, 또는 다양한 내용을 담으셔도 좋겠읍니다.”(184면)라고 독자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이는, 각각의 지역이나 사물들을 고향 또는 고국이라 는 단일한 존재들로 인지되게 하고 그를 통해 일본이나 서구 문화 같은 다른 대상들과 차이를 식별해내게 하여 공통 감각을 구축하는 전략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12)

그러니까 「내고향의 자랑」 꼭지는 고향 표상을 통해 조국의 이미지를 구체

의 한사람으로 어찌 自己罪意識과 함께 祖國愛로 뭉처지는 共感의世界, 漢陽의広場 에서 相逢하는 사람에 한줌의 눈물이 없을수 있으랴….”고 소회를 밝히고 있다. 홍원길,

「나의 봄마지膳物」, 1962년 5월호, 177면.

12) 장영란에 따르면, 공통 감각은 각각의 대상물들을 인식하고 이를 단일한 것으로 인지하 여, 다른 대상물들 간의 차이를 식별해냄으로써 만들어진다고 한다.(장영란, 「아리스토텔 레스의 공통 감각과 의식의 문제」, 뺷철학연구뺸 제40집, 철학연구회, 1997.06, 5면) 뺷한양뺸 의 <내 고향의 자랑>과 같은 고향 이미지 구축 방식은 이에 부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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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함으로써 재일한인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한편, 이를 민족 동일성의 감각으 로 승화시켜 애국심과 자긍심을 고취13)시키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구성되 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한국이 재일한인에게 그리워하고 돌아가기를 소망할 만큼 가치 있는 대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수정같이 맑은 하늘에 떠 흐르는 흰구름, 먼산 가까운산의 농담이 층층한 산 색, 높고 낮은 連峰 파장(波狀)을 이룬 능선(稜線) 이 모두가 우리 옷차림에 나 타나는 구김살과 주름살 광택과 陰影의 交叉인양 싶다. 맑은 물 푸른 언덕 아지 랑이 가물거리는 들길, 어데다가 한복차림을 내 빛어도 제대로 어울리는 아름다 움, 냇가에 빨래하는 아낙네의 조촐한 차림차림이 물빛과 어떠하며 나물 캐는 처녀의 연분홍 저고리가 연록색 풀빛과 그 어떠한가? 이것과 저것이 딴 것이 아 닌것같이 자연그대로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박원석, 「한국의상에 대한 단상」, 1962년 6월호, 45면.

초갓집 돌각담 밑에서도 해마다 싱싱히 자라 흰눈이 펄펄 날리는 날에도 오히 려 활짝 꽃을 피우는 매화, 고향집 그 한그루 매화나무의 기억이 눈앞에 서언하 다. (중략) 일인들의 기질을 맞추어 한때 활짝 피었다 한꺼번에 지고마는 벗꽃과 어찌 비기랴. 사랑에 차고너그러우며 오래도록 한뜻을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 민 족의 정신적 상징인 매화같은 꽃이 그 얼마나 청초하며 갸륵한가.

-신상인, 「설중매」, 1963년 1월호, 202면.

나의 고향은 경상도에서도 산깊고 물 맑은 곳이다. (중략) 들판엔 철을 따라 아름다운 꽃이 피었고 사람들은 철을 따라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한없이 근면하

13) 1962년 10월호 <편집자에의 편지>에 실린 히로시마 거주 최상근 독자는 “한양을 읽을 때마다 나에게는 흐뭇한 민족적자부심이 되살아 옵니다. 나는 이제 어데에서나 자기가 한국청년 임을 떳떳이 말할 수 있게 되었읍니다. 한양이 나에게 그러한 자신을 불어넣 어 주었읍니다.”(182면)라고 언급한다. 또한 1962년 11월호 <편집자에의 편지>에 실린 재일 독자 이철성은 “「한양」을 애독하고서 고국에 대한 지식도 차차 늘어져 가고 재일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을 할 수 있게끔 사고방식 역시 다르게 만들어 줍니 다.”(187면)라고 말한다. <편집자에의 편지> 꼭지에 이러한 독자평이 실린 것은 뺷한양뺸 의 의도에 독자의 감상이 부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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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마음이 티없이 맑고 언제나 낙천적이며 이웃끼리 서로 화목한 그 정다운 사람들 의 소리는 나의 어린 시절을 곱게곱게 수놓으면서 나의 살이 되고 또 뼈가 되었다.

-김동하, 「타령단상」, 1963년 1월호, 204면.

제시된 세 편의 글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재일한인이 상상하는 고향은 어릴 적 체험에 바탕을 둔, 어른들의 경제적 어려움과 고통 은 떠올릴 수 없는 유토피아적인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다. 더욱이 고향 정경 에 대한 묘사가 대체로 소박한 농촌 공동체와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중심으 로 이루어지고 있어 전근대적이고 모성어린 공간으로 상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한국민에게도 마찬가지다. 마치 고향에 돌아가기만 하면 어릴 적 순수했던 시절로 되돌아 갈 수 있을 만큼 평화롭고 따스한, 낭만적 공간 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다가갈 수 없지만 가치 있는 공간으로 고향(=한 국)이 한국민과 재일한인 모두에게 가치매김되고 있는 것이다.

몇달 전 고향 집에서 온 형님의 편지에서 알리는 소식은 이런 것이었다. … 점점 살아 가기가 힘들다는 것, 목숨이 붙었으니 살아 있나보다 생각이 들지 죽 지못해 산다는 것, 또 어느 곳에서는 아이를 내다 버리는 사람들과 자살하는 사 람들, 특히 집단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 그러니 너는 철없이 덤비지 말고 시자 좋으면 그곳에 꾹 눌러 있으라는 것….

-김동하, 「어린것의 곁에 앉아」, 1962년 12월호, 166면.

하지만 당대 한국이 숙명처럼 짊어진 가난은 재일한인이 현실적으로 한 국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이유로 주어진다.14)한국민 또한 현재의 고통이

14) 한국의 가난조차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물적 토대로 주어진 경우도 초기 뺷한양뺸의 기사 에서 발견된다. 그 대표적인 예를 1962년 6월호에 실린 「아름다운 人情佳話」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여기서 뺷한양뺸 편집부는 한국의 가난하지만 따뜻한 공동체를 보여주는 사 례들을 모아 현실적인 이상향으로서의 한국을 그리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사 례다. “자기사정을 돌보지않고 휴지와 폐품을 모아다가 팔아 그돈으로 불행한 학생을 돕고있는 두 여대생의 미거(美擧)가 있다. (중략) 휴지와 폐품을 팔아 모은 돈으로 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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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때문임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뺷한양뺸 소재 재일한인들의 글에는 전 근대적 유토피아의 공간으로 한국(=고향)을 상상하는 묘사가 주를 이루지 만, 동시에 한국의 경제적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루 속히 근대적 경 제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중적 태도가 모순된 그대로 결합되 어 있다. 거의 매호마다 빠지지 않고 실려 있는 한국 경제를 진단하고 대책 을 마련하는 정론적 성격의 글들은 시, 수필 등 문학 작품에서 상상적으로 재구성 되어 있는 한국의 전근대적 농촌 풍경 묘사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디아스포라의 고향에 대한 정감은 그리움과 비애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생각은 당사자에게 심적 고통만 가중 시킬 뿐, 실제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물적 토대를 만들어주지는 못하기 때 문이다. 반면, 한국 개입을 의도한 뺷한양뺸은 우선 ‘조국=한국’이 얼마나 가 치 있는 공간인지를 강조한다. 그래야만 한국에 대한 상황 진단과 적폐 지 적, 적절한 개선 방안 제시라는 나름의 개입 방식이 당위적인 가치를 가지 게 될 뿐 아니라, 발언의 권위 또한 확보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결여의 공통 감각 구축과 민족 주체성 회복이라는 공통 과제

뺷한양뺸 소재 재일한인들의 글에는 단지 고향에 대한 유토피아적 감상으 로만 끝나지 않고 이를 고향에 대한 사랑과 애국심으로 승화시켜, 한국의 결여된 바를 지적하고 개선의 당위를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경우가 많 다. 이 점은 뺷한양뺸의 편집 방향이 다른 재일한인 매체들과 구별되게 하는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공부할수 없게된 그어린 두형제들에게 온정을 던져주었던 것이다. (중략) 두 어 린형제들에게 던져진 온정은 눈보라치며 얼어붙는 추위속에서도 봄빛을 보는듯 훈훈한 인정가화의 꽃을 피웠던 것이다.” 편집부, 「아름다운 인정가화」, 1962년 6월호, 6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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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요새와서 무턱대고 외국 본따기를 좋아하는 한국인들은 기괴망칙한 옷들을 입고 거리에 나타남을 보게된다. 속옷인지 겉옷인지 자리옷인지 나드리 옷인지 모를 옷들 무슨 式이니 무슨식이니 해서 총집같은 홀태바지가 껑충껑충 뛰어다니는가 하면 그 色調가 얼숭덜숭 야단스러운 빛깔이어서 무늬가 사람들 을 위협(威脅)이나 하는 듯 구역이나게 하는것도 많다.

또한 유난히 아름다운 우리한국 여성들의 의상이었마는 괴상스러운 차림이 대조적으로 나타나서 사람들을 자못 불쾌하게도 한다.

의젓하면서도 요조하고 명랑하면서도 점잔하고 화려하면서도 수수한 우리 한 국민의 정취를 어디다 팽개치고 스카트자락은 허벅다리에 까지 기어오르고 육 체미를 자랑하는 듯 앞가슴을 내흔드는 해괴망칙한 차림차리가 거리에 범람하 고 있다.

양풍이 범람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이 엽기적이고 색조적인 기풍이 풍미 하고 있는 이 말세적인 악취미가 휩쓸고 있는데 대하여 실로 개탄하지 않을수 없다. 입기는 제 한 개인이 입어도 보기는 전국민이 보는 것이다. 단 한사람의 추태도 전국민의 체모를 더럽힐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 멋대로 입으면 그 만인 것이 아니라 한복이나 양복들이 우리한국민 일반의 감정에 부합되어야 하 며 아름다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고 민족적 문화전통에 입각한 건전한 덕성 과 우아한 정취에 부합되는 의생활을 영위하는데 노력해야 할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원석, 「한국의상에 대한 단상」, 1962년 6월호, 47면.

헌데 오늘 어떤 사람들은 어느덧 서구풍의 장미를 자랑하며 애완하는 별취미 들을 배우고 있다. 요염하도록 짙은 색깔이나 색정을 자극하는 진한 향기를 함 부로 뿜는 마의 꽃들이 규방으로 엄습한다. 그러나 그 꽃의 침노를 나무람은 다 못 색깔이 현란하다고 냄새가 야릇한데만 있지 않다. 그 현란한 빛깔이 규수들 의 깨끗한 몸에 번지는 것이 못마땅한 때문이다. 그 야릇한 냄새가 규수들의 청 초한 몸에 배이는 것이 못마땅 하기 때문이다. (중략) 먹고 입고 칠하는 것만 닮 은게 아니라 뇌리에서 사고하고 심금으로 느끼는 것 모두 서양식으로 심화되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신상인, 「설중매」, 1963년 1월호, 202~20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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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 편의 글은 한국의 고귀한 전통문화와 민족 주체 의식이 서구 문화 의 무분별한 범람으로 사라져 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다시금 민족 주체성 을 회복해야 한다는 당위를 역설하고 있다. 앞서 인용한 전근대적이고 유토 피아적인 고향을 상상하는 도입부와 달리, 위에 인용한 후반부의 이와 같은 당위적 언설은 한국의 현실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고자 하는 재일한인 지식 인의 의지가 드러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15)

그런데 민족 주체성 회복이 시급하다는 주장은 단순히 한국이 서양 풍속 에 물들었다고 진단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뺷한양뺸은 정치․경제․사회․문 화 전반에서 민족 주체성을 가지지 못한 한국의 현실을 비판하고 주체성과 자립성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① 우리의 생활주변에는 犯罪를 낳게 하는 産婆役들이 또한 적지 않다. 애숭이 들이 깽映畫를 본따고 청년들은 보기에도 흉칙스러운 키스「신」에 매혹되어 性의 난맥상을 이루게 한다. (중략) 한 때 「트위스트」의 狂風이 젊은 세대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던가. 지금은 「림보」의 물결이 젊은 세대들을 흔들어 놓고 있다. 걷잡 을 수 없는 이 리듬의 난무가 과연 이나라 젊은 세대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이러한 것들은 다 젊은 세대들로 하여금 누구나 타기할 現實을 직시할 수 없게 하고, 現實에 대한 그들의 義로운 반항을 무마케 하는 아편으로는 되며 젊은 세대

15) 전반부에는 아름다운 고향 산천을 그리다가 후반부에는 한국의 결여된 바를 지적하는 이와 같은 글의 전개 방식은 경상도가 고향인 재일한인 김동하의 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나의 고향은 경상도에서도 산깊고 물 맑은 곳이다. (중략) 들판엔 철을 따라 아름다 운 꽃이 피었고 사람들은 철을 따라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한없이 근면하고 마음이 티없이 맑고 언제나 낙천적이며 이웃끼리 서로 화목한 그 정다운 사람들의 소리는 나의 어린 시절을 곱게곱게 수놓으면서 나의 살이 되고 또 뼈가 되었다. (중략) <도라지타령>

이 <도라지맘보>가 되면서 산골 처녀들과 친숙한 그 연연하고 고운 도라지꽃의 影像은 흐려지고 어느 낯선 이방인의 주정을 돋구는 賣笑婦의 분냄새만 풍기게 되었으니 도라지 들도 그 망칙스런 가락에 얼굴을 붉힐 것이다. 그립다 한없이 그립다. 내 고향 땅 흙 내음이 배어있고 너그럽고 다감한 마음씨를 노래하는 흥겨운 민요들이 언제나 들려올 것이냐? 생활이 있는데는 노래가 있다고 하거니 고국의 노래를 잃는데 대해서 겨레로서 어이 쓸쓸하지 않겠는가! 노래를 찾아야 한다. 민족의 정서가 자라고 뻗어나고 꽃피어야 한다.” 김동하, 「타령단상」, 1963년 1월호, 204~20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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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장래의 棟梁으로 길러내는데 百害無益함은 두말할 바 없다.

-김인재, 「한국의 사회현실과 학생」, 1964년 4월호, 13면.

② 모더니즘을 추종하여 정신이 팔린 동안에 줏은 것은 생경한 외래어와 二0 세기 병든 지성의 파편들이며 잃은 것은 우리의 전통과 한국 고유의 정서이다.

실존주의를 쳐다보고 따라 다니다가 얻은 것은 허무와 절망, 감금된 개아의 내 면적 자아와 부조리한 생의 끝없는 소모와 향락 뿐이며 잃은 것은 민족공동의 운명을 개척하고 역사의 未來를 신뢰하여 고투하는 이 나라 사람들 속에 뿌리 깊이 뻗어 온 민족적 낙천성이다. (중략) 실존주의적 인간관도 다른 극단의 죄과 를 범하였다. 주체적 인간을 역사적 현실에서 떼어 내서 인간실존을 그 내면세 계에서 고립화시키고 추상화시켰으며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인간의 능동적이고 목적의식적인 행동과 실천을 차단하는 독단을 범했다. 여기에 실존주의적 반항 과 참여의 한계성이 있는 것이다. 巨巖을 등에 지고 천길의 벼랑을 목적없이 오 르고 내리는 시지프스의 끝없는 고행이 남긴 여운은 서구적 개인본위의 에고이 즘을 낳은 것 뿐이며 20세기 시민문화의 위기가 고하는 고독과 절망과 인간 허 무의 노래 뿐이다. (중략) 오늘 한국문학의 위기는 실로 리얼리즘을 배척함으로 써 문학의 민족적 주체를 상실하고 있는 데서 오는 위기 같다. 이 땅이 가난의 극한지대라고 하여 문학이 반드시 빈곤해야 한다는 법도 없으며 정치와 경제가 위기에 처하여 있다고 하여 문학이 반드시 위기에 처해야 한다는 법도 없다. 물 론 문학이 정치와 경제의 위기에 밀착하여 뒤꼬리를 따르는 경우에는 같은 위기 에 직면한다. 반대로 주체적 인간의 자유를 옹호하고 민족적 주체 속에서 살아 있는 리얼리즘의 문학만은 이 모든 위기 속에서 허리를 펴고 눈을 뜬다.

-김성일, 「민족적 주체와 한국문학」, 1966년 8월호, 188~196면.

③ 민족주의란 바로 민족애의 민족의식과 민족감정을 기초로 하는 주체적 행동 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 종속을 탈각하고 자립경제의 수립 과 앞으로의 번영을 획책하고 한편으로 「네오․코로니얼리즘」과 맞서 이겨 나가 기 위하여서는 먼저 민족의 주체성이 확립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과감한 주체 적 행동이 있어야만 한다. 주체성의 확립이란 우리의 경제적 자립과 발전의 문제가 어디까지나 우리민족 자체의 문제로서 「주체적」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 미한다. -김성두, 「민족주의와 경제자립」, 1964년 8월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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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이 문화적인 면에서 주체성과 자주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한 다면 ②는 문학에서의 주체성 확립을 ③은 경제적인 자립을 각각 주장하고 있다. 또한 1963년 10월호 ‘편집후기’에 “정치에서의 자주와 주체, 경제에서 의 자립의 확립없이 우리는 진정한 독립도, 그리고 오늘의 세기적인 빈곤에 서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298면)고 언급함으로써 정치적인 자주성의 확립이 필요함도 역설하고 있다.

이처럼 뺷한양뺸은 한국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근대국민국가 발전을 위한 최우선의 과제라고 생각했다. “우리 비록 해외에서 조국건설에 직접 보탬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을지언정 자주․자립하는 국민만이 도달할 수 있는 그런 알찬 근대화를 바라는 마음 그지없다.”16)는 이덕성의 언급은 뺷한 양뺸이 바라보는 한국의 현상황이 민족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전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한국은 정치적으로 미국에 대한 예속이 심화되고 있으 며17) 경제적으로는 한일 협정 이후 일본 차관 도입으로 한국 경제의 일본 의존이 심각해지고 있을 뿐 아니라18)사회 문화적으로도 미국․일본에 대한

16) 이덕성, 「자주적인 근대화를!」, 1967년 3월호, 209면.

17) 이를테면 송건호는 「4․19의 의의」(1965년 4월호)에서 냉전구도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전세계적인 상황을 진단하면서 한국도 더 이상 미국의 도움만을 얻으며 안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민족 주체성 확립의 필요성은 단지 한국 내의 민족주의의 발흥을 통해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한 한국 내 상황에서만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국제정세를 살펴볼 때에도 필요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18) 1965년 6월 22일 한일 수교가 이루어지자 뺷한양뺸은 1965년 7월호에 특집 <자립경제건 설을 위하여>를 꾸려 5편의 논문을 실음으로써 한일수교에 따른 경제적 예속이 심화될 것임을 우려한다.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자립 경제’를 주장한다. 특히 김기심은 “원조는 지난 날 우리 민족의 자립정신을 마비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민족경제 발전에 큰 저해를 주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자립정신을 발양시키는데 있다. 자립정신 은 민족경제의 발전과 경제적 자립을 달성하는 데서 근본문제다. 자립정신이 발양되지 못한다면 아무리 긴 세월과 아무리 많은 원조를 받드라도 쓸 떼가 없다.”(김기심, 「민족 경제와 자주정신」, 1965년 7월호, 53면)고 주장한다. 한일수교가 일본의 원조를 얻기 위 한 박정희 정권의 기획에서 시작되었지만 미국 원조로도 해결하지 못한 경제적 피폐함 을 일본 원조로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립정신을 갖지 못하게 하고 경제적 예속 만 심화될 수 있으므로 먼저 자립 정신을 함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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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존이 높아져 자주 정신을 해친다는 점을 꾸준히 지적한다. “주체의식은 한국근대화의 목적과 방향을 규정한다. 무엇 때문에 우리 국가의 근대화를 달성하려 하며 어떠한 방향에서 그것을 추진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열쇠를”19) 제공하기에 민족 주체성의 회복이 선결 과제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뺷한양뺸의 주체성 회복 강조 논리는 한국의 위기를 타개할 방 책으로 주어진 것이지만 재일한인과 한국민을 민족 동일성의 논리로 포섭 하고자 하는 편집진의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한국민이 결여하고 있는 민족 주체성은 사실 재일한인들이 결여하고 있는 것이기 때 문이다. 다시 말해 뺷한양뺸은 한국민과 재일한인이 동시에 결여하고 있는 민 족 주체성 회복이라는 공통의 과업을 설정함으로써 한국민과 재일의 경계 를 지우고 한국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지식인 언술 주체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역사와 정치적인 문제, 경제문제 등을 공부하게 되고 자기민족이란 것 과 분리돼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느꼈읍니다.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적 주체성을 확립해 가기 위해서는 한국적인 것을 몸에 지녀야겠다는 것을 느꼈읍니다. 우리 말, 우리 역사는 물론이고 생활 풍습에 이르기까지 자기의 것을 갖지 않으면 일 본의 그것에 埋沒되어 가지 않겠는가 하는 걸 최근에는 특히 느낍니다.

-김인순․양동주 외 3명, 「4․19의 교훈」, 1966년 4월호, 180면.

1966년 4월호에 실린 <교포학생좌담회>는 김인순(동대대학원 수사과정), 양동수(동대4년, 한청중앙신문부장), 배경륭(와세다대 3년, 한학동중앙부위 원장), 강동준(동양대2년, 코리어문화연구회회장), 허규민(동양대 2년, 코리 어문화연구회부회장)을 초대하여 박원석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인용문은 배 경륭 학생의 언급인데, 요지는 4월 혁명이 전통과 민족을 되새기게 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4월 혁명이 대통령을 하야시킨 정치적 혁명이라면, 재일한

19) 함원태, 「한국에서의 근대화문제」, 1964년 9월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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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2세대들에게 4월 혁명은 민족적 자긍심을 발견하도록 이끄는 정신적 혁명 으로 환기되고 있다.

64~5년에 걸친 한일회담은 재일한인들에게 역설적으로 민족 주체성 논 의의 중요성을 환기했다. 4월 혁명 담론이 경제적 근대화와 정치적 민주화 의 민족 주체성 담론으로 전화되는 과정에서, 뺷한양뺸의 한일국교 정상화에 따른 일본의 문화적 침략에 대비한 논의는 문화적 주체성을 확립하고자 하 는 당위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민과 재일한인이 공통 적으로 결여하는 민족 주체성 회복은 60년 4월 혁명 정신의 내면화와 실현 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재일한인 2~3세대에게서 그 시작 시점을 확인코자 기획된 대담이 <교포학생좌담회>였던 것이다.

4. 민족 주체성 회복의 구체적 방식 - 4월 혁명 정신 계승론

4월 혁명은 단지 기존의 정치체제를 타도한 세속적인 정치의 문제가 아 니라 재일한인과 한국민이 공히 놓치고 있었던 ‘민족 주체성’이라는 새로운 가치와 세계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뺷한양뺸은 4월 혁명을 통한 민족 주체 성의 발견이라는 테제를 내세움으로써 디아스포라 의식과 결합된 4월 혁명 담론의 독특성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뺷한양뺸의 4월 혁명 담론은 1962년 7월호 「정신혁명의 기본문제」

에서 강영준이 말한 바와 같이, “인간개조 의식혁명의 방향”을 명백히 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우리 민족에게 고유한 그러한 민족성의 기본주류인 애국 애족 사상, 민족적 단결심, 자주정신과 근면성에 입각하여 그를 적극 발양시키는 한편 일부 국민들, 특히 상류계층의 의식과 생활양식을 사로잡 고 있는 사대주의적 의타심과 극단한 자기본위적 사고방식 및 생활 습성들 을 반대하며 기타 민족과 인간의 고귀한 정신세계를 해치는 외래의 퇴폐적 사상을 배격하는 데로 정신혁명의 방향이 돌려져야”(12면)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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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필자는 4월 혁명을 통해 발현된 혁명정신이 민족성의 발견과 자 주적 태도의 정립을 위한 정신 혁명․민족 개조로 나타나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는 군사정부가 혁명과업 완수를 위해 산업, 경제, 문화, 사회의 구조 를 근대화하고 구악과 부패를 일소하며 퇴폐한 국민도의를 바로잡기 위한 원동력으로 ‘인간 개조’를 강조20)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논리다. 그런데 필 자는 “혁명정부가 의식혁명을 위한 슬로간으로 제창하고 있는 문제들은 필 요한 것들이오 좋은 문제들”(14면)로, “의식혁명에 있어서 혁명정부는 도의 의 앙양으로 민족적 협동의식을 배양하는 것을 주요한 목표로 내세우고 있 는데 두말할것 없이 이것은 중대한 의의를 가진 문제의 하나이다. 오늘 정 부당국이 제시하고 있는 모든 혁명과업이 성과적으로 추진되자면 민족적 단결이 이루어져야 하겠고 이에 있어서 사상 의식의 통일은 핵을 이”(15면) 룬다고 하여 5․16 군사정권이 혁명정신을 통한 민족성 발견이라는 테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 대해 특히 동감했다. 물론 군사정권이 ‘재건국민운동’

을 구심으로 삼고 대중을 계몽하면서 전통과 민족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궁극적으로 북한을 의식한 공산주의 극복을 목적으로 하 고 있었다.21)군사정권은 민족 주체성의 확립보다 ‘자주의 인간’, ‘협동의 인 간’, ‘합리의 인간’, ‘역행(力行)의 인간’, ‘건강의 인간’ 다섯 가지22) 목표를 내세우는 것에 더 중점을 두었다.

즉 강영준은 5․16 군사정권이 4월 정신을 계승하여 펼친 정신 혁명과 의식 개조 정책에 특정 부분만을 강조하면서 정권을 긍정한 것이다. 민족 주체성에 대한 이와 같은 강조는 재일한인의 4월 혁명 담론의 한 양상을

20) 박호근, 「5․16 군사정부의 교육정책과 결정유형」, 뺷교육정치학연구뺸 제12권 2호, 한국 교육정치학회, 2005.12, 2면.

21) 허은, 「‘5․16’군정기 재건국민운동의 성격」, 뺷역사문제연구뺸 제11호, 역사문제연구소, 2003.12, 18면.

22) 손인수, 「한국 군정교육의 역사적 평가」, 뺷한국교육사학뺸 제13집, 한국교육사학회, 1991, 56~5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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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23)다만 이 글은 “민족적 협동의식의 배양 을 위해 혁명정부와 국가재건 국민운동 본부 당국에서 기울이고 있는 노력 은 충분히 이해되고 또 찬양해야 될 일이지만 여상의 방책들이 그 목적을 해결할수 있겠는지 아직 미지수가 아닌가 생각된다”(16면)고 말해 ‘혁명정 부’의 노력이 충분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주지는 않 는다. 그럼에도 ‘혁명정부’의 존재와 가치, 그 자체에 대해 비판하거나 부정 하는 태도는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저와 같은 의심은 군사 정권에 대한 무조 건적인 긍정이 가져올 뺷한양뺸의 한국 개입 언술의 한계를 벗어나면서 한국 문제에 대한 일정한 조언자의 입장을 자처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 게 하는 진술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4월 혁명 담론을 통한 민족 주체성 강화 논리는 박정희 정권이 일본과 미국에 대한 예속이 점차 심화되자 정권 비판의 핵심적인 이유로 자리매김 한다.

4월 혁명에 대한 정신적 측면의 강조와 함께 뺷한양뺸은 ‘혁명 주체 세력’

의 육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이야말로 민족 주체성을 자각하고 후진 한국의 근대화를 이끌 중추세력으로 자라날 것이기 때문이다.

23) 예를 들어 박원석은 재일 학생들과의 좌담회에서 “본국 학생들은 국토개발, 신생활운 동 등 여러가지 형태로 사일구 정신의 계승으로 볼 수 있는 운동을 하고 있읍니다. 교포 학생의 경우에도 국어를 배운다거나 교포사회의 민주화라든가 여러가지 형태로 사일구 정신이 계승되고 있고 그 하나의 표현으로서 교포들의 민족적 권익을 지키는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고도 보겠읍니다. 그러므로 사일구 정신의 계승을 단지 데모를 할 것인가, 학문을 할 것인가는 것으로 대립시켜 보는 견해는 성급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라고 말한다. 4․19 혁명 정신을 재일한인 입장에서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를 주요 의제 로 삼고 진행된 이 좌담에서 그는 혁명 정신을 정치적 참여(“데모”)로 실현하거나 소극 적으로 대응(“학문”)하기보다는 민족 정체성의 회복을 통한 재일 사회의 대응 차원에서 주문한다. 좌담회 참가자인 양동수 학생이 이 좌담의 가장 마지막 발언으로 “나는 사일 구는 다름 아닌 민족자주의 발현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민족적 자주에의 모색이 바로 사일구정신의 계승이라고 봅니다.”라고 한 것은 이 좌담의 결론을 요약하고 있는 것이 다. 김인순 외 5명, 「<교포학생좌담회> 4․19의 교훈」, 1966년 4월호, 18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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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층에서는 學徒들은 政治나 社會에 참여하지 말고 「象牙塔」속에서 공 부나 하고 學風과 校風을 세우라 하며 심지어는 이들의 愛國的 거동을 「亂動」

視까지 하였다. 물론 학생들이 國泰安民의 화목한 환경속에서 物質的․정신적 으로 自由로우며 國事와 民生을 근심하지 않고 진리의 상아탑에서 공부할 수 있다면야 얼마나 좋았을까? 이것은 우리 학생 자신들의 절실한 소원이었을 것이 다. 그러나 社會的 여건은 그렇게 되지 않았던 것이다. 더우기 4월의 아들 딸의 이름을 팔아 돈을 벌고 지위를 탐내며 民心수습의 計策에 이용하려는 政商輩 도 있었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강영준, 「한국 청년학도의 애국적 기백」, 1964년 4월호, 9면.

4월 혁명 이후, 뺷한양뺸은 4월 혁명 주체세력인 학생들의 역할을 긍정했 다. 한국의 대표적인 지식인 매체였던 뺷사상계뺸나 5․16 군사정권이 4월 혁 명 이후 제기된 근대화 담론에서 지식인의 역할을 중시하고 실제로도 군정 수행을 위해 지식인이 광범위하게 동원되었음에 비해24)뺷한양뺸은 기성 세 대를 포함하는 지식인의 역할보다는 신세대인 학생들에게서 4월 혁명 정신 을 계승한 ‘근대화’의 가능성을 발견하려 했다.

기성세대의 낡고 부패한 價値觀에서부터 젊은 세대들에게 오늘의 現實에 妥 協할 것을 說敎하려는 따위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다. 오직 젊은 세대들은 現 實에 拘束됨이 없이 巨視的인 立場에 서서 歷史의 方向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 가야 한다. -김인재, 「한국의 사회현실과 학생」, 1964년 4월호, 15면.

이는 ‘기성 세대=惡’, ‘신세대=善’으로 요약되는 세대론적 분절 의식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강영준 또한 1962년 4월호에 게재된 「韓國 靑年學徒의 愛國的氣魄」에서 “果然 오늘 民族의 창공을 배회하는 이 低氣壓을 가시 어 나갈 世代는 누구며, 果然 生活苦의 深淵에서 呻吟하는 百姓을 구출 할 世代는 누구이며 그들에게 진리와 과학의 씨를 뿌리고 거두어 들여야할

24) 정용욱, 「5․16쿠데타 이후 지식인의 분화와 재편」, 노영기 외 5명, 뺷1960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지식인뺸, 선인, 2004, 170~17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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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人公은 누구인가? 젊은 世代에 희망을 걸자! 現代의 이 必然의 목소리 를 다시한번 부르짖게 된다.”(11면)고 하여 청년 학생들에게서 한국의 밝은 미래상을 발견하려 했다. 그렇다고 해서 뺷한양뺸의 4월 혁명을 계승한 근대 화 담론이 지식인의 역할을 전적으로 부정하거나 폄하한 것은 아니다. 김인 재는 일찍이 1962년 12월호 「방황하는 지성」에서 4월 혁명의 담당자가 지 식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많은 언론인들과 문인들이 위험을 겁내지 않고 붓대를 휘두르고 교수 학자들 이 일신문제에 구애치 않고 주저없이 나서고 지조있는 지성인들이 모두 크나 작 으나 굽힘없는 민주이념을 가지고 부정에 항거하여 싸웠다고 말할 수 있다. 마 침내 지성의 청년들인 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사자와 같이 일으나 적수공권으로 이승만독재정권을 너머뜨리는 혁혁한 공훈을 세우지 않았는가. 4․19를 계기를 한국지성인들은 급작스레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중략) 사월의거로 이정권이 무너졌어도 사회현실은 꼬여만 가고 지식인들은 지성인으로서 자기의 사명을 인정받는 것은 고사하고 여전히 이단시 당해 왔으니 일제시대와 이정권시대의 그 불신 의혹의 고질화된 습성이 가셔지지 못하고 지속되게 된 것은 당연한 일 이라 하겠다. (중략) 한국의 지성인들이 언제까지나 그 숙명적인 달팽이 생활을 감수하고 완전히 체념의 세계에 빠져 들어가리라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다. 지 성은 그것을 용허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성인의 속성이기도 한 것이다. 방황하는 지성-그러나 그는 제 갈길을 갈 것이라고 믿어 마지 않는다.

-김인재, 「방황하는 지성」, 1962년 12월호, 67~68면.

다만 김인재는 5․16 이후 지식인들이 올바른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 황에 처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침묵 양상은 일제와 이승만 정권 때부터 계속된 압박감이 “고질적이고도 숙명적인 생태”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라 분석했다. 그럼에도 그는 지식인의 본질은 반항의식에 있으므로 언젠가 제 목소리를 내는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숨기지 않는다.25)그러나 4월 혁명

25) 김인재가 진단하는 한국의 ‘무력한 지식인’의 이미지를 뒤집어 본다면 4월 혁명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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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계승 세력으로 학생을 지목하고 그들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높아짐 에 따라 그에 반하는 기성 세대와의 분절 의식은 더욱 노골화되며, 이는 기 성 세대인 기존 지식인에 대한 회의를 낳게 된다. 반대로 4월 혁명을 이끈 신세대=학생이야말로 혁명 이후 근대화 주체 세력으로서 제 역할을 감당해 야 한다고 본다. 이는 비단 한국의 학생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재일 한인 2․3세대들에게도 해당되는 ‘혁명 과업’이다. 뺷한양뺸이 대체로 재일한 인 문제에 그리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4월 혁명 정신을 재일한인의 입장에서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를 논제로 삼을 때에는 재일한 인 2․3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60년대 뺷한양뺸은 4월 혁명 정신을 계승되어야 마땅한 것으로 전제하 고, 민족 주체성을 회복하는 구심점을 여기서 찾으려 했다. 또한 한국․재 일을 가릴 것 없이 학생 세력이 중심이 되어 기존의 가치와 체계를 혁파하 고 ‘근대화’ 된 민족 공동체로서의 조국을 만들어 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이 와 같은 행복한 상상은 한국의 군사 정권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내기 시 작하면서 깨어지기 시작한다.

독주․독선이 판을 치고 민중이 억눌리고 민의가 짓밟히고 권력의 부패와 부 정이 근절되지 않고 있는 한,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 허공에서 배회하지 않을 수 없고, 민주주의운동은 끝날 수 없으며, 4․19정신은 긍정될 수도 꽃필 수도 없다. 이러한 여건하에서는 4․19의 민주정신은 항상 항거의 깃발을 들고 젊은 지성들의 반항정신을 고취하게 되며 온갖 사이비민주주의의 가면을 가차없이 벗기는 기수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중략) 4․19의 이념이 현실로 되고 4․19 의 민주정신이 꽃필 때까지 그 깃발은 내려지지 않을 것이며, 4․19정신을 계승

담론을 주창하는 뺷한양뺸의 재일한인 지식인들이 훨씬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현재 담당하고 있음을 천명하는 것과 다름 없다는 사실을 은연 중에 시사함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하지 못하고 있는 혁명 정신 계승론을 재일 지식인들이 적극 적으로 표명하는 역할을 떠안게 될 때, 뺷한양뺸의 한국 개입의 자리가 정당하게 확보될 수 있음을 암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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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민주주의운동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4․19가 정의였기 때문에 승리 했듯이 그 정신이 살아 있는 한 온갖 독재와 부정과 굴욕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 게 되리라는 것을 믿어도 좋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내일이 있다고 할 것이다. -김종만, 「4․19와 민족정신」, 1970년 4․5월호, 28면.

김종만은 1974년 이전에 작성된 뺷한양뺸의 글 중 가장 강도 높은 한국 정부 비판을 행하고 있다. 그런데 그 비판의 이유를 4월 혁명 정신의 올바른 계승과 발전을 현 한국 정권이 이루지 못했다는 데서 찾고 있다. 그는 “4․19는 민족 정신․자아에 대한 옹호였고, 외세의존과 굴종에 대한 부정이었다.”(27면)고 정의하고 “근대화는 녹쓴 민족적인 자아의 연마와 민족적 자존으로 이루어져 야 하는 것이고, 민족적인 자아의 광택을 흐리게 하고 있는 온갖 외래적이고 이색적이고 반민족적인 것의 거세와 세척을 전제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방은 그것이 어느 의미에서나 근대화작업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민족자존의식의 고양과 굴종과 자아상실증의 타파를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26면)라고 밝힌다. 현 한국 정 권은 4월 혁명 정신이 강조한 민족적 주체성을 상실하고 “근대화의 바람을 타고 밀려드는 외풍은 사회악을 조장하고 悖德悖倫을 퍼뜨리는 썩은 풍조를 실어 오고 있을 뿐 아니라, 민족자체의식을 좀먹고 사대의존의 허무적 사조를 유포시키고 있다.”(26면)는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민족 주체성이 전제되 지 않은 근대화는 4월 혁명의 부정일뿐만 아니라 모든 부정과 부패의 씨앗에 불과한데, 한국 정부가 이를 조장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1969년 3선 개헌을 통해 박정희 영구 집권의 기틀이 마련된 상황에서, 4 월 혁명 10주년을 기념하여 제출된 이 글은 한국 정부가 차관을 비롯한 경 제적 이익을 담보로 대미․대일 ‘굴욕 외교’를 펼치고 정상적인 민주 정치 제도가 뿌리내리지 못하는 한국의 정치․경제적 현실태를 4월 혁명을 키워 드로 내세워 비판한 것이다. 이제 4월 혁명 정신의 계승과 발전은 정신 혁 명․의식 개조와 같은 순치된 구호로만 새겨질 것이 아니라 4월 혁명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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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었던 독재 정치 타도를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 혁명의 가능성을 문자 그대로 타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글의 말미에 암시된 “우리의 내일”이라는 말이 지닌 함의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4월 혁명이 지녔던 분명한 적대의 대상은 이 글에서 “독재와 부정과 굴욕의 역사”라는 말로 뭉뚱그려져 있거니와 정권 그 자체를 혁명 되어야 할 대상으로 명확히 표면화하지는 않고 있다.

이와 같이 1960년대 뺷한양뺸의 4월 혁명 담론은 먼저 재일한인에게 일본 내 재일의 실질적인 처우 개선 문제를 고민하게 했으며, 한국민에게는 한국 의 근대적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정신적 토대로 상상하게끔 했다. 근본적으 로 1960년대 뺷한양뺸은 4월 혁명 정신을 민족적 동일성의 근거로 상상하면 서 궁극적으로 한국의 근대적 발전을 위한 내적 동력으로 사유했다는 점에 서, 혁명이 지닌 정권 비판적․저항적 성격은 무디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뺷한양뺸이 제기한 4월 혁명 정신을 통한 민족 주체성 회복 담론 은 한국민과 재일한인에게 공히 주어진 과업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논리적 추이는 1960년대 뺷한양뺸의 한국 개입을 효과적이고 긍정 적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일조했음도 부정할 수 없다.

5. 나가며

이상에서 밝힌 바와 같이 재일한인 지식인 매체 뺷한양뺸은 한국의 근대화 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기 위한 언술 전략을 구체화하여 매체의 위상을 확보 하고자 했다.

먼저 뺷한양뺸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정책 상에 결여된 부분을 지적, 대책 을 제시하는 ‘지식인’의 조언자적 위치를 자처함으로써26)한국 개입 언술을

26)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나와 상금도 각종연구에 종사하고 있는 선비들이 실로 부 지기수이며 이밖에 숨은 식자 문화인들이 적지 않은바 “漢陽”은 이분들에게 모름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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