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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Function of Mats the Banquet space in th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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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1598-1142 (Print) / ISSN 2383-9066 (Online) https://doi.org/10.7738/JAH.2020.29.6.079

궁궐 연향 공간의 지의(地衣) 연구

A Study on the Function of Mats the Banquet space in the Joseon Dynasty

석 진 영*1) Seok Jin-Young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 연구원 · 군산대학교 건축공학과 강사)

Abstract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 rituals that were celebrated in the palaces were mainly held inside the palace and in the courtyard of the palace. Mats were spread on the floor of the place where the ritual was held. The mats spread in the Joseon Dynasty rituals divided the space in various ways, and in particular, they were spread in a certain form in the spaces of royal wedding, customs, and court banquet. Mats were the primary physical element that divided the royal ritual space of the Joseon Dynasty, and functioned to elevate the general space to the ritual space. In the ritual space, mats were spread inside the palace, and divided the courtyard of the palace into left and right in a symmetrical form to distinguish the hierarchy of the participants. Mats with special and white patterns were spread in the external ceremonial space and mats with flower and colorful patterns were spread in the internal ceremonial space. This was the subdivision of the Confucianism's male-female division through the mat. The pattern of the mat that divided the space of the royal family elders also meant longevity to reflect the filial thoughts of the Confucianism through the mat. Mats were a physical element for subdividing the royal family and the participants in the hierarchy of the space where the ritual is held, and it also performed a subdividing function between the royal participants. In other words, in the Joseon Dynasty ritual space, mats were temporarily spread while the ritual is being celebrated and functioned to elevate the space to a ritual space.

It is confirmed that the fact that the mats were temporarily spread to divide the space into the hierarchies according to the status and were subdivided into colors and patterns to perform the function to reflect the subdivision of the royal family according to Confucianism and the statue of filial piety in the ritual.

주제어 : 궁궐, 왕실, 의례, 연향, 지의

Keywords : Palace, Royal family, Ritual, Banquet, Mat

1. 서 론

궁궐에서 거행되는 연향 공간에는 왕실의 위계에 따 른 공간이 구획되었다. 연향 공간의 일반적인 형식은 차일을 배설하고 바닥에 지의를 까는 형식이다. 지의는 돗자리를 이용한 깔개 형식으로 구조적 형식을 갖추는 것은 아니다. 지의는 연향이 거행되는 전각과 月臺, 補 階, 殿庭 공간에 다양하게 배치되었다.

왕실 연향 공간에 다양하게 구획된 깔개 형식의 지 의의 기능을 알아보며 색상과 문양 등이 다른 기준은

* Corresponding Author : [email protected]

이 연구는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추진 중인 문화재기술연 구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궁궐 의례1)에 관한 연구는 수준 높은 단계에 이르렀지만 연향의 건축에 관한 연 구는 미비하다. 지의와 관련하여 정자각 지의2)와 防 寒3)의 깔개 등의 연구가 있다. 지의에 관한 세부적 연 구는 아직 미비하다. 연향은 궁궐에서 거행되며 연향이 거행되는 공간적 구성과 구성을 위한 요소들이 다양하 게 이루어진다. 그와 더불어 왕실의 위엄을 고스란히

1) 조재모,「朝賀 儀禮動線과 宮闕 正殿의 建築型式」, 대한건축학회 논문집 : 계획계 26.2 (2010): 185-194.「英·正祖代 國家儀禮 再整備와 宮闕建築.』 대한건축학회 논문집 : 계획계 21.12, 2005, 217∼224쪽 2) 장경희, 「조선후기 왕릉 정자작 내부 의물 연구: 산릉도감의궤를 중심으로」, 역사민속학, (33), 2010, 145∼185쪽

3) 이종서, 「고려∼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防寒 설비와 炊事 도구」, 역사민속학, (24), 2007, 4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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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영하여 화려하게 거행된다. 그에 따른 구성품들은 각 각의 구성에 따른 격식과 규범이 있었고 그에 따라 배 설되었다. 연구 사료는 조선후기에 집중되어 있어 연구 에 한계가 있지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의궤, 궁 중기록화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지의의 용례 기준은 바닥에 배설되는 다양한 자리의 용어 가운데『진작의궤』·『진찬의궤』에 기록된 용례 인 지의로 궁궐 연향 공간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자리의 용례와 왕실 地衣

2.1 자리의 용례

조선이 유교적 이념을 기반으로 국권을 확립하면서 의례에 등장하는 요소들은 유교 기준을 명확히 따르는 양상을 보인다. 궁궐의 연향 공간에는 행사의 목적성과 장소의 중요도를 감안하여 바닥에 깔개를 배치하였다.

지의는 여러 가지 용례로 사용되는 자리 가운데 돗 자리를 이어 붙여 크게 만든 것으로 의례나 연향에 깔 아 사용한 자리를 말한다. 우선 바닥에 깔아 사용한 자 리의 다양한 용례를 먼저 살펴본다.

우선 자리를 까는 것에 대한 기록은 <三國史記>의

<車騎條>에 "수레의 휘장은 왕골자리를 사용하였다."

는 기록이 있고, <職官條>에는 席典이라는 관청이 있 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전문적으로 자리를 만들던 장인 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기 귀족들은 털이나 비단으로 된 깔개를 사용 하였다. 이 중에서 毛氈은 냉기를 차단하는 기능으로 깔았다. 고려부터 조선전기 기록에서는 방바닥에 모직 물을 깔아 방한한 사례들이 쉽게 확인된다.4)

모전은 연산군일기에도 보인다. 연산군은 羊毛氈 10 장과 오래된 돗자리를 月山大君 집으로 보내주었다.5)

상류층에서 사용한 모전은 온돌이 보편화되지 않았 음을 알려준다. 상류 주택에서 毛氈보다 보편적으로 사 용했던 바닥재를 살필 필요가 있다. 상류주택의 바닥재 는 궁궐의 공간에서도 사용했을 연관성과 관련이 있 다.6)

자리는 고려에서 社稷神인 后土氏와 后稷氏의 신위 에 왕골자리를 깔았다. 왕실에서는 文席, 彩席, 花文大

4) 이종서, 「고려∼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防寒 설비와 炊事 도구」, 역사민속학, (24), 2007, 41∼68쪽, 50쪽

5) 『燕山君日記』 권34, 연산군 5년 8월 29일(丙辰) “傳曰 羊毛氈十 張 舊陳席全數 輸送于月山大君家.

6)『成宗實錄』 권8, 성종 1년 11월 8일 壬午

席을 사용하였다. 北宋의 사신 徐兢은 <高麗圖經>에서

"고려의 제품은 매우 부드러워 접거나 굽혀도 상하지 않으며, 검은색 흰색이 서로 섞여 무늬를 이루고 침상 에 까는 정교한 것은 매우 우수하다."라고 할 만큼 뛰 어난 품질이어서 외국과의 교역품으로도 이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經國大典> 공장에 茵匠과 席匠이 있 는데, 인장은 長興庫에 8명이, 석장은 하삼도에만 총 338명의 외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에 동지사가 파 견될 때 많게는 한 번에 화문석 124장을 들여간다 할 만큼 우수한 특산품이었다. 滿花席, 滿花方席, 龍文席, 花文席, 彩花席 등의 왕골 제품은 궁중과 상류층에서 사용하였다.

제작기법 상 白席匠과 무늬를 만드는 花紋匠으로 나 뉘었다고 한다.

鋪陳은 조선 전기에 실내의 바닥을 덮은 재료를 통 칭하는 용어로 쓰였다. 포진은 여름철의 방습과 겨울철 의 방한과 관련된 기사에서 자주 등장한다. 1425년 여 름에 세종은 성균관 유생들이 습진에 많이 걸렸다는 말을 듣고 실내 설비의 개선을 명령하였다. 이 중에는 長官廳에 鋪陳하는 것이 들어 있다.7)

成均館과 四學의 유생이 포진을 스스로 마련하던 것 을 繕工監에서 지급하게 하고 3년마다 새것으로 갈게 하였다. 이때 薍簟을 지급하도록 하여 포진의 구체적인 재질이 확인된다.8)

薍은 물억새로서 부들을 뜻하므로 성균관과 사학의 기숙사에는 부들자리를 깔았음을 알 수 있다. 또 3년마 다 갈도록 한 것에서 계절을 가리지 않고 해어질 때까 지 계속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신분이 낮으면서 부유 한 자들이 바닥에 龍鳳彩席이나 滿花彩席을 포진하는 것을 금지하였다.9)

鋪陳은 대개 풀로 짠 돗자리로 거주공간에 늘 깔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닥 전면을 돗자리로 덮은 것은 임진왜란 때도 확인된다. 피난했다 돌아온 선조는 겨울 로 접어드는 10월에 월산대군의 저택을 수리하여 행궁 으로 삼았다. 행궁을 수리한 내역을 보면 도배할 때 쓰 는 菱花紙와 창에 바르는 窓戶紙, 그리고 바닥에 까는 鋪陳席子가 사용되었다. 포진이 여름철의 방습과 겨울 철의 방한에 유의하여 제작했음을 알려준다. 바닥의 냉

7)“上聞成均生多中濕疾 命左副代言金赭往審之 令工曹修東西齋各五間 爲溫堗 又令繕工監造給浴桶及板橙八十 長興庫造設長官廳鋪陳.(『世 宗實錄』 권29, 세종 7년 7월 19일 丙戌)

8)『成宗實錄』 권8, 성종 1년 11월 8일 壬午 9) 成宗實錄』 권14, 성종 3년 1월 22일 己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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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막고 습기를 흡수하는 것이 포진의 주된 기능이 었던 것이다.10)

1748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曺命采는 일본의 다다미를 한국의 등매석에 비겼다. 이로부터 일본의 다 다미처럼 두터운 돗자리가 조선후기까지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등매석의 두터운 돗자리는 현재 쓰이지 않을뿐더러 그러한 것이 있었던 줄도 잘 모른다. 돗자리는 으레 얇 게 짜서 둥글게 말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1748년까지 등매석이라고 불린 두텁게 짠 돗자리가 사 용되었다. 이로부터 조선후기의 등매석은 고려나 조선 전기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후기로 갈수록 용도가 줄 어 마침내 사라지게 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 면 조선전기에 실내에 깔린 돗자리는 등매석처럼 두툼 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11)

蒲團이라고 불린 돗자리도 있다. 이것은 바닥 전체를 덮는 포진과 달리 보료나 방석처럼 사용했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바닥에 배설하는 자리는 방한의 기능과 공간의 격식에 따라 모직물의 자리, 두꺼운 등 매석, 풀로 만든 포진, 왕골이나 갈대로 만든 자리 등 을 사용했다.

바닥에 까는 자리 가운데 地衣는 넓은 면적의 바닥 을 깔기 위해 여러 개의 돗자리를 이어 붙여 제작한 깔개를 의미한다. 자리를 연결하지 않고 낱장으로 넓은 공간에 깔면 자리가 움직여 안정되지 않으므로 서로를 이어 붙여 번거로움을 덜려 했던 것이다.12)

지의는 대규모 공간에 까는 자리의 용례이며 왕골과 갈대 등으로 문양에 차이를 두어 제작한 돗자리를 공 간에 따라 하나를 배설하고 혹은 2개, 여러 개를 이어 붙여 공간에 배설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고에서의 돗자리를 여러 개 이어 붙인 지의가 왕 실의 경축과 권위, 위엄을 보여주는 연향에 배설된 사 례를 분석하고자 한다.

2.2 왕실 地衣

지의는 연향뿐만 아니라 왕실의 의례 행사에 사용되 는 빈도가 매우 높다. 돗자리를 이어 붙인 것으로 의례 나 행사가 거행되는 공간에 배설하기가 용이하며, 많은 참석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10) 이종서, 「고려∼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防寒 설비와 炊事 도 구」, 역사민속학, (24), 2007, pp.41∼68, 52쪽

11) 앞의 논문, 53쪽

12) 영건의궤연구회『영건의궤』, 동녘, 2010, 870∼871쪽

태종시기 지의를 담당한 제용감에서 지의를 가장자 리에 대는 縇에 금선의 사용을 금하였고 명주로 바꾸 도록 중궁이 명하였다.13) 지의를 사찰에 불사하기도 하 였다.14)

지의의 관리 또한 엄중했으며15) 예종시기 지의의 관 리는 장흥고에서 하였고 이후 순조시기 왕세자 책례도 감에서 지의는 전설사에서 담당하였다.

왕실 의례 장소 바닥에 가장 일반적으로 배설되었던 품목은 지의이다. 지의는 조선 초기부터 기록이 있지만 이전 시기부터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 다. 지의는 왕실의 의례가 거행되는 일반적인 장소에 상시 배설되었으며, 지의가 배설되는 공간은 의례 참석 자의 위차가 결정되는 공간이다.

연산군시기에는 지의 문양이 꽃무늬로 화려한 문양 이 제작된다. 후원16)에 깔거나 단오 進宴17)에 지의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런 돗자리를 만드는 것이 백성들 에게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18)

연산군 시기 滿花席과 綵花席이 집중적으로 제작되

13) 지난번에 제용감에서 바친 석자(席子)를 보니, 네 모서리에 모두 금선(金線)을 사용하였는데, 금선(金線)은 원래 본국의 생산이 아니 다. 이것 또한 긴요하지 아니한 허비이다. 즉시 사용을 금지하도록 하라. 중궁(中宮)이 이르기를, ‘가는 명주로써 지의(地衣)에 선을 두 른다.’고 하였으나, 이것도 또한 쓸데없는 낭비인 것이다. 즉시 목면 (木綿)으로 바꾸라고 하라. 대체로 내가 절용(節用)하는 까닭은 환관 (宦官)과 궁첩(宮妾)을 위한 것이 아니요, 또한 자손(子孫)의 계책을 위한 것도 아니다. 장차 근로자(勤勞者)를 대접하려는 것이다. (『태 종실록』 31권, 태종 16년 5월 1일 임진 6번째기사)

14) 거가(車駕)가 각림사에 이르자 절의 중[僧]에게 전지(傳旨)하기 를,"내 장차 지의(地衣)를 주겠고, 또 오는 9월에는 불사(佛事)를 하 겠다."고 하였다.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3월 5일 신묘 1번째 기사)

15) 대광명전의 지의 관리를 소홀히 한 장흥고 직장 이익수를 가두 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대광명전(大光明殿)의 지의(地衣) 가 더럽고 떨어졌으니, 청컨대 해당 관리(官吏)를 국문(鞫問)하소서."

하니, 명하여 장흥고 직장(長興庫直長) 이익수(李益壽)를 의금부(義禁 府)에 가두었다가 곧 용서하였다.(『예종실록』 2권, 예종 즉위년 12 월 16일 임인 3번째기사)

16) 후원에 깔 지의와 채화석을 각도로 하여금 갖추어 올리게 하다.

전교하기를, "후원에 깔 지의(地衣)와 채화석(綵花席)을 각도로 하여 금 갖추어 올리도록 하라."하였다.(『연산군일기』 55권, 연산 10년 9 월 9일 병신 2번째기사)

17) 단오 진연 때 쓰려고 채화석 5백 장을 경상도로 하여금 바치게 하다. 전교하기를, "단오의 진연 때에는 명륜당 및 섬돌 위의 지의 (地衣)는 채화석(菜花席)을 써야 하니, 경상도로 하여금 5백 장을 바 치게 하고, 내시객(內侍客)은 양편 재실(齋室)의 안 뜰에 자리를 베 풀라. 그날 비가 오더라도 그만둘 수 없으니, 가가(假家)를 지어서 비에 대비하라."하였다. (『연산군일기 』57권, 연산 11년 4월 15일 경오 2번째기사)

18) 꽃무늬 돗자리를 만든 것이 부당하다고 아뢴 자를 조사케 하다.

전교하기를, "전에 만화석(滿花席) ·채화석(綵花席)으로 지의(地衣)를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말한 자가 있었으니, 상고하여 아뢰라."하였다 (『연산군일기』 54권, 연산 10년 6월 7일 병인 12번째기사)

(4)

었다. 이후 조선후기에는 왕실에서 일반적으로 등장하 는데 지의의 문양 구성 수준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 다.

광해군시기 다양한 문양의 돗자리 등을 자세히 살펴 수리하였고 慶德宮 수리할 때에는 靑龍紋席을 준비하 게 하였다.19)

중종시기에는 기존에 배설된 지의를 집중적으로 수 리하였다.20) 선조시기에는 嘉禮에서 지의만 준비하고 다른 부분은 소략하고자했다.21) 왕실에서 지의는 의례 공간에 물리적 공간을 구획하는 중요한 품목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영조시기에는 강화도에 어진을 봉안하 는데 지의가 배설되었으며, 추석제22)를 지낼 때에도 지 의를 배설하였다.

문양의 종류는 壽福康寧 등의 문자나 기하문과 꽃문 양을 도안화한 화문 등이 있으며, 대부분 테두리를 두 르고 중앙에 중심 문양을 넣고 있다. 문양을 넣기 위해 서는 다양한 색깔의 용수초가 필요하다.

19) 전교하기를, "지난해에 진헌하고 남은 돗자리를 일일이 기록해 아뢰어 앞으로 수리할 때 사용하게 하라."하니, 호조가 아뢰기를 "용 문석(龍紋席) 39장, 만화석(滿花席) 1백 68장, 황화석(黃花席) 2백 10 장, 채화석(彩花席) 1백 24장, 만화 방석(滿花方席) 40장이 본조에 있 습니다."하자, 답하기를, "경덕궁(慶德宮)을 수리할 때 청룡문석(靑龍 紋席) 10여 장을 준비하게 하고, 각종의 자리는 장마다 들이게 하여 살펴본 후 다시 내리게 하라."하였다. (『광해군일기』139권, 광해 11 년 4월 4일 정사 3번째기사)

20) 정원에 종묘에 사용되는 돗자리·요 등을 다시 만들도록 전교하 다. "오늘 경연에서 종묘의 포진(鋪陳)·지의(地衣) 및 잡물(雜物)이 누추하고 훼손되었다 하니 예조로 하여금 다시 만들도록 하고, 봉상 시(奉常寺)의 제복(祭服)도 다시 만들도록 하라.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자주 헌관(獻官)이 되었었는데, 봉상시의 제복이 지극히 누 추하고 심한 악취가 풍겨 내가 일찍이 미안하게 여겼었다.(『중종실 록』 24권, 중종 11년 4월 13일 갑자 2번째기사)

태일전을 수리하다. 종묘(宗廟) 등에서 적간(摘奸)803) 한 단자(單子) 를 내리면서 일렀다. "종묘(宗廟)·사직(社稷)의 망그러진 제기(祭器) 따위 물건은 개배(改排)시켜야 하거니와, 궐도(闕到)804) 한 수복(守 僕)은 추고(推考)하라. 또 태일전(太一殿)의 짚자리로 된 지의(地衣) 가 죄다 망그러졌다 하는데, 제향소(祭享所)에서 초석을 지의로 삼는 것은 무례할 듯하니 전례를 상고하여 정석(正席)으로 개배해야 하겠 다." (『중종실록』 64권, 중종 23년 윤10월 3일 신미 1번째기사) 21) 정원에게 가례 도감을 설치하지 않도록 전교하다. 비망기로 정원 에 전교하였다. "가례 도감(嘉禮都監)은 조사(詔使)가 나올 때에는 일 이 많아서 차출할 겨를이 없을 것이니, 본조(本曹)가 우선 스스로 살 펴서 행궁(行宮)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집을 하나 가려 도배하고 지의(地衣)만 준비하여 대령하고 있다가 비(妃)를 정하는 그날 이우 (移寓)하도록 예조에 일러서 회계(回啓)하게 하라.(『선조실록』 144 권, 선조 34년 12월 20일 계미 2번째기사)

22) 임금이 명릉(明陵)에 나아가 친히 추석제(秋夕祭)를 행하였는데, 때는 곧 숙묘(肅廟)께서 탄강하신 절일(節日)이다. 임금이 익선관(翼 善冠)과 천담복(淺淡服)을 갖추고 홍살문에 이르러 망릉례(望陵禮)를 행하고 이어서 정자각(丁字閣)에 나아가 의식대로 제사를 행하였으 며, 제사가 파한 뒤에 능 위를 봉심(奉審)하고 난간석(欄干石) 앞에 부복하기를 잠시하였다가 도로 소차(小次)로 들어와 지의(地衣) 위에 앉았는데 도승지가 방석(方席)에 오를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 다. 이어서 홍살문에 나아가 사릉례(辭陵禮)를 행하였다. (『영조실 록』 98권, 영조 37년 8월 15일 신사 2번째기사)

돗자리 틀에 날을 건 다음날 사이에 바늘대로 골을 걸어서 좌우 각 두 번씩 넣어 바디로 짜 올리는 것이 白席이다. 백석에 무늬를 놓고 부들로 맨 자리를 內供 席으로 하여 화석花席 밑에 받치고, 가장자리는 바탕의 문양 색감에 따라 청색, 흑색, 자주색, 갈색포로 회랑을 꾸민다. 자리를 종합해보면 여러 종류의 자리들이 실 內·外 공간에 여러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중에서 지의는 <그림 1>과 같이 돗자리를 이어 붙인 대형의 돗자리로 공간의 규모에 따라 여러 개를 이어 붙여 공간에 우선적으로 배설하는 자리이다.

대공간의 영역을 일차의 물리적 공간으로 구획하기 위해 여러 개의 지의를 이어 붙인 형태를 확인 할 수 있다.

地衣

그림 1. 윤두서, 서총대친림연회도의 돗자리를 이어 붙인 대 규모의 地衣, 18세기제작 (출처 : 해남윤씨 종가 소장)

왕실의 의례에 사용된 예는 다양한 의례에서 알 수 있다. 왕실은 다양한 목적과 규모가 크고 작은 행사가 거행되었고 그러 때마다 전각의 마당에 지의를 배설하 였다.

참여자의 위계 구분이 필요한 경우에는 지의 위에 한 개의 돗자리나 2개 등의 돗자리를 이어 붙인 단석 을 깔아 구분하였다. 이를 더욱 세분화하기 위해서 다 양한 문양의 방석을 단석 위에 깔아 자리로 참여자의 위계를 공간에서 구체화하였다.23)

1819년 효명세자의 관례가 진행된 의례에서도 지의 를 살펴볼 수 있다. <그림 2>의 전각에 백문 지의를 23) 석진영,『朝鮮時代 宮闕 宴享 空間의 建築的 特徵』,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박사학위논문, 2020, 145쪽

(5)

깔았다. 또한, 전정 좌측에 1개, 우측에 2곳에도 백문지 의의 크기를 다르게 하였다. 輦을 세우는 공간에도 지 의를 깔아 참여자를 구분하고 의례에 필요한 왕실의 물품을 두는 공간에도 지의를 깔아 공간의 구분을 세 분화하였다. 지의가 관례가 거행되는 공간에 일정한 형 식을 갖추어 구획된 것을 알 수 있다. 의례가 거행되는 전각에는 지의를 넓게 깔아 주요 공간을 구성하고, 전 정의 공간은 참여자를 지의로 구분하였다.

그림 2. 《수교도(受敎圖)》첩 중 <임헌명빈찬의도(臨軒命賓贊 儀圖)>,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산릉의 정자각에 깐 지의는 궁궐 내 전각 중 종묘의 정전, 국왕의 어진을 모신 眞殿만이 원형대로 지의가 깔려 있을 뿐 나머지 전각의 내부는 맨 바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궁궐 전각에 지의를 깐 것은 궁 궐의 품격을 드러내기 위해서인데, 현재까지 유독 종묘 나 진전(현 신선원전)에 지의가 여전히 깔려 있는 것은 선대왕의 신주나 어진을 모신다는 典禮공간으로서의 신성성 때문일 것이다. 선대왕과 왕후의 혼백을 모신 왕릉의 정자각의 전돌 바닥 위에 2중의 지의를 깔아야 하는 이유 또한 이와 마찬가지였다.24) 정자각의 지의는 백문석, 별문석, 초석, 유문석, 황화석, 채화석, 용문석 등이 있다.

조선의 궁궐에는 전각마다 엄청난 수량의 자리가 필 요했다. 흉례만 국한하더라도 국장이 언제 발생할지 모 르는데다가, 국상 기간 동안 국장도감, 빈전․혼전도감 및 산릉도감에서 사용하는 건물이나 假家마다 모두 자 리를 깔았기 때문에 상설아문인 장흥고에는 언제나 많 은 양의 자리를 저장해 두고 있었다. 때문에 산릉도감

24) 장경희, 「조선후기 왕릉 정자작 내부 의물 연구:『산릉도감의 궤』를 중심으로」, 역사민속학, (33), 2010, 145∼185쪽, 174쪽

에서도 장흥고에 비축된 자리를 엮어 지의로 사용하였 으며, 간혹 비축된 물량이 없거나 필요한 물량이 부족 하면 도감에서는 각도에 분정하거나 강화도의 교동에 서 별복정을 하여 충당하였다.25)

정자각의 지의는 자리를 여러 장 잇대어 정자각 내 부의 규모로 연결해야 했고, 제상 위에 깔 좌면지를 만 들 때에도 유둔 여러 장의 폭을 이어 붙여야 했으므로 넓은 공간이 필요하였다.

1688년 장렬왕후의 휘릉 때 지의를 꿰매거나 유둔을 서로 길게 잇대어 連幅하였던 상황을 일례로 들 수 있 다. 당시에 전례로 삼은 것은 같은 동구릉 구역에 산릉 을 조성하였던 1674년 인선왕후의 영릉이나 1683년 명 성왕후의 숭릉 때를 전례로 삼았다. 영릉이나 숭릉 때 에 동구릉의 목릉 재실에서 연폭을 했기 때문에 동구 릉에 산릉을 조성하던 숭릉 때에도 목릉의 재실에서 바느질을 했다.26) 책례를 비롯하여 산릉에도 지의가 사 용되었다.

1844년 헌종 가례가 열리는 공간에도 전각 내에 백 문지의가 배설되고 월대 하단의 공간은 동·서 측에 각 각 큰 규모의 지의가 배설되었다. <그림 3>의 지의는 가례가 열리는 공간에 일차적으로 구획되는 양상이 이 전 시기와 동일하게 나타난다. 또한 가례가 열리는 중 심 전각을 중심으로 배설하고 전정의 공간은 左와 右 로 구분하여 좌·우 대칭 구조도 이전시기와 비슷하다.

지의는 신분에 따른 공간 구획에 따른 일차 바닥구조 로 전각, 월대, 보계 다음 순의 위계로 왕실 의례 공간 에 다양하게 사용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림 3. 헌종가례진하계 지의, 1844, (출처:동아대학교 소장) 25) 앞의 논문, 175쪽

26) 앞의 논문, 177쪽

(6)

3. 연향 공간 地衣

궁궐에서 거행되는 進宴, 進饌, 進爵 등의 연향은 경 축과 장수 등의 목적으로 거행되었다. 이런 연향을 통 해 백성들에게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웅장하고 화려하 게 보여줄 수 있었다.

연향의 주인공이 대비인 여성일 경우 유교적 이념이 반영되어 남과 여를 구분하기 위한 구성요소들이 나타 난다. 연향에서 조선후기 대비의 권력이 강해지는 시기 에는 연향 공간에서 여성의 공간이 확장되고 자리의 문양도 여성과 장수를 상징하였다.27)

연향에서 공간을 구분하는 일차 물리적 요소가 지의 이다. 지의는 크기별로 공간의 위계에 따라 순차적으로 깔았다.

1700년경 장수를 축하하는 연향 공간의 지의는 <그 림 4>와 같다. 경축하는 장소를 살펴보면 참여자들의 자리가 補階와 地衣로 구분하였다.

보계로 연회 공간을 단으로 구분하고 보계 상단과 하단에 지의를 배설하였다. 연회 공간은 참여자와 공연 공간의 영역을 구분하였으며 지의의 문양은 단색이다.

보계로 연회 공간의 위계를 구분하고 연회에 필요한 물리적 공간을 확장시키는 기능은 지의가 하였다. 또 한, 일사와 비에 대비한 차일을 구획하여 연향공간이 실내공간화 되었다. 연향 공간에서 지붕의 차일과 바닥 의 지의가 일차적 요소임을 확인 할 수 있다.

地衣

地衣

그림 4. 선묘조제재경수연도, 18세기 후반에 배설된 地衣 27) 석진영,『朝鮮時代 宮闕 宴享 空間의 建築的 特徵』,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박사학위 논문, 2020

궁궐 연향 공간에 지의가 배설된 구체적인 사례는 1795년(정조 20) 惠慶宮을 위해 거행된 봉수당진찬에서 확인할 수 있다.『園幸乙卯整理儀軌』, 排設에서 혜경 궁의 위차에 배설된 품목은 아래와 같다.

배설, 봉수당진찬에소용되는 것이다.

○봉수당온돌 마제문지의 1부(호조의 수리 때에 준비한 것을 그대로 쓴다), 하배채화지의 1부, 연평상 1좌, 채화 등메 1좌, 상배용문단석 1건, 연화방석 1좌, 표피방석 1 좌, 만화안식1좌, 남관직안식 1좌, 십장생병풍 1좌, 협방 마제문지의 1부, 대청마제문지의 1부, 표피방석 30좌, 진 채병풍 2좌

○전퇴 서에 가깝게 동향하여 어좌를 설치한다. 마제문 지의 1부(호조의 수리 때에 준비한 것을 그대로 쓴다), 하배채화지의 1부, 연평상 1좌, 상배용문단석 1건, 만화 방석 1좌, 표피방석 1좌, 용문안식 1좌, 홍광직안식 1좌, 십장생병풍 1좌, 대주렴 6부, 청사장3폭부 2건28)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봉수당 온돌에 구획된 혜경궁 의 자리는 마제문지의, 채화지의, 위에 뚜꺼운 채화등 매, 평상, 용문양의 한겹의 돗자리, 방석, 안식, 병풍 등 으로 구성한다. 협방과 대청은 마제문지의를 배설하고 방석을 구획하였다.

전각 기둥 밖에 전퇴 위차에 정조의 자리인 시연위 의 공간은 마제문지의, 평상, 단석, 방석2개, 안식 2개 로 구획되었다. 외부와의 구분을 위해 朱簾과 靑紗帳을 달았다. 온돌에는 마제문의 돗자리를 이어 붙이고 채화 지의, 채화등매로 자리를 구획하였다.

등매는 정조 이후 연향과 관련한 의궤의 기록에 나 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순조시기 이후 연향 공간은 지의와 단석의 돗자리로 바닥 마감이 정착된 것으로 생각된다.

퇴칸은 마제문지의, 채화지의를 배설하고 협방과 대 청은 마제문지의를 구획하였다. 연향 공간에는 우선적 으로 지의가 배설되었다.

<그림 5>는 奉壽堂進饌으로 봉수당과 앞 마당은 보 계 마루를 배설하여 연향을 거행하였다. 봉수당진찬은 수원 화성에서 열린 연향으로 행사에 참여한 사람이 많았다. 연향의 공간이 국한적인 봉수당진찬은 봉수당 문 밖의 마당도 연향 공간으로 구획하여 참여자 공간 으로 구성되었다. 봉수당 문 밖의 공간 은 중앙에 위치 하여 가장자리를 청무명으로 두른 대규모의 지의를 배 설하였다.

28)『원행을묘정리의궤』, 수원화성박물관역사자료총서1, 498∼499쪽

(7)

地衣 補階 + 地衣

그림 5. 奉壽堂進饌(1795), 地衣 (출처 : 화성행궁소장)

지의는 진작의 연향 공간의 위계에 따라 규격, 개수, 문양이 다르게 구분되어 배설되었다. 지의를 연향 공간 에 우선적으로 깔아 대공간을 구획하는 기능을 하였다

기사진표리진찬은 1809년(순조 9) 1월 22일에 창경궁 景春殿에서 순조가 惠慶宮에게 箋文과 致詞, 表裏를 올 리고, 2월 27일에 혜경궁에게 進饌을 올린 연향으로 습 의를 하는 공간에는 行步席이 배설29)되었다.

행보석의 문양과 크기 등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하기 어렵다.

純元王后의 보령 40세를 경축하기 위해 1828년(순조 29) 국립국악원, 『역주 기사진표리진찬』,한국음악학총서11, 2020, 87쪽

28) 2월에 열린 진작을 기록한『戊子進爵儀軌』에서 지 의가 연향에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경전내외배설(慈慶殿內外排設)

자경전 동온돌, 하배별문(下排別紋) 7장을 붙인 지의 1 부, 4장 반을 붙인 지의 2부【모두 선(縇)은 청무명】청 동퇴, 별문 12장을 붙인 지의 1부, 서온돌 하배별문(下排 別紋) 5 1/4장을 붙인 지의 2부, 4장을 붙인 지의 1부, 4 장 반을 붙인 지의 1부, 3장 반을 붙인 지의 4부【모두 선은 청무명】, 상배채화석등매 12좌, 채화방석 12좌

【모두 선은 자주(紫紬)토주(吐紬)】, 청서퇴 별문 6장을 붙인 지의 1부, 9장을 붙인 지의 1부, 가퇴 별문 11장을 붙인 지의 1부, 북퇴 별문 7장 반을 붙인 지의 1부, 4 1/4장을 붙인 지의 1부, 3장 반을 붙인 지의 1부, 대청 채화 30장을 붙인 지의 1부【선은 자주토주】, 남퇴 별 문 23장을 붙인 지의 1부, 남퇴 별문 23장을 붙인 지의 1부, 북퇴 별문 14장 반을 붙인 지의 1부【선은 청무명.

이상은 전에 쓰던 것을 보수하여 그대로 사용함】보계 45칸 별문 75 1/4장을 붙인 지의 1부, 64장을 붙인 지의 1부, 15장을 붙인 지의 1부, 13장 반응 붙인 지의 1부, 12장 반을 붙인 지의 1부, 12 1/4장을 붙인 지의 1부

【모두 선은 청무명. 이상은 전에 쓰던 것을 보수하여 그대로 사용함】30)

살펴보면 慈慶殿 別紋과 彩花 문양의 지의를 사용하 였으며 가장자리를 댄 縇은 청색무명을 사용한다. 다 만, 채화방석의 縇은 紫紬31)吐紬32)로 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방석으로 위계를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다.

1829년(순조 29) 순조 등극 3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己丑進饌의 지의는 <그림 6>의 明政殿進饌으로 파악 해볼 수 있다.

外宴이 열린 명정전 전각 내부 ①은 별문 돗자리를 연폭한 지의를 깔고 다른 공간은 백문 돗자리를 연폭 하여 깔아 연향 공간을 크게 구분하였다. 왕의 위계가 지의 문양에 반영된 것이었다. 퇴칸과 殿庭 등은 白紋 의 지의를 배설하며 가장자리를 대는 선은 청색의 무 명으로 대었다. 즉, 외연 공간에서 자리를 배설하는 일 차 마감의 위계가 전각 안의 별문, 퇴칸을 비롯한 전각 밖은 백문으로 크게 나누었다. 전각 안의 공간은 왕의 위계를 반영하고 문양으로 신하와의 공간을 구분하였 다. 月臺의 지의는 白紋 90장을 붙인 地衣, 즉 대규모 의 지의를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배설하였으며 지의 의 가장자리는 청색의 무명으로 둘렀다.

30) 이의강(역) 외,『국역순조무자진작의궤』, 보고사, 2006, 232쪽 31) 자줏빛이 나는 명주를 말한다.

32) 바탕이 두껍고 빛이 누르스름한 명주를 말한다.

地衣

(8)

그림 6. 명정전진찬도(上), 明政殿進饌 地衣추정도(下), 1829

① 殿內, 1-1 別紋 33장 반을 붙인 地衣 1부, 1-2 33장을 붙 인 地衣 1부, 1-3 18 ¼장을 붙인 地衣 1부, 1-4 17장 반을 붙 인 地衣 1부, ②前階 : 白紋 48장을 붙인 地衣 1부 ③ 西階 : 白紋 24장 반을 붙인 地衣 1부 ④ 東階 : 白紋 14장 반을 붙 인 地衣 1부 ⑤ 月臺 : 白紋 90장을 붙인 地衣 2부[모든 縇은 靑木] ⑥白紋席

연향 공간에서 신하 공간의 지의는 위계가 높은 신 하의 자리와 배위에는 백문의 돗자리와 방석이 배설되 었다. 위계가 낮은 신하의 자리에는 백문석의 지의만 구획하여 구분하기도 하였다.

즉, 외연이 거행되는 공간의 지의는 일차적으로 물리 적인 연향공간을 구획하는 기능을 하였고 연향 공간에 구획되면서 그 공간을 의례상의 공간을 격상시키는 기 능도 수반하게 되었다.

그림 7. 자경전진찬도(上), 慈慶殿進饌 地衣추정도(下), 1829

①大廳 : 彩花 60장 반을 붙인 地衣 1부[모든 縇은 자주토주 (紫紬吐紬)] ②東溫堗 : 彩花 4장반을 붙인 地衣2부 ③西溫堗 : 彩花 4장 반을 붙인 地衣 4부 ④北退 : 別紋 7장반을 붙인 地衣 1부,4 ¼ 장을 붙인 地衣 1부, 3장반을 붙인 地衣 1부 ⑤ 南退 : 別紋 23장을 붙인 地衣 1부 ⑥北半寢 : 別紋 4장을 붙 인 地衣 1부,4장반을 붙인 地衣 1부 ⑦北半寢 : 別紋 7장을 붙인 地衣 1부 ⑧西退 : 別紋 6장을 붙인 地衣 1부,9장을 붙 인 地衣 1부 ⑨假退 : 別紋 11장을 붙인 地衣 1부 ⑩別紋 63

¼ 장을 붙인 地衣 1부 ⑪別紋 52 ¼ 장을 붙인 地衣 1부 [모든 縇은 靑木] ⑫15장을 붙인 地衣 1부 ⑬15장반을 붙인 地衣 1 부 ⑭4장반을 붙인 地衣 1부 ⑮11장반을 붙인 地衣 1부 ⑯7 장반을 붙인 地衣 3부

기축진찬의 內宴이 열린 자경전에 배설된 지의를

<그림 7>로 파악하면 다음과 같다. 자경전 내연의 공 간에 지의를 연향 공간 전체에 참여자의 자리에 배설 하였다. 자경전 전각 內 大廳 공간의 ①부분 지의는 彩

(9)

花 지의를 배설하는데 가장자리를 덧댄 縇은 자주색명 주이다. 동온돌과 서온돌의 ②③은 대청보다 규격이 작 은 채화지의가 배설되었다.

<그림 7>의 자경전 ④⑤⑥⑦⑧⑨의 退 공간은 別紋 의 지의를 깔았다. 전정의 보계 공간 영역도 별문의 지 의를 위차에 맞게 규격을 다르게 하여 배설하였다. 지 의를 두르는 선은 청무명을 대어 전각과 보계, 전정 등 에 맞추었다.

기축진찬의 지의를 위와 같이 외연과 내연으로 세분 화하여 살펴보면 연향 공간 전체적으로 배설하여 왕실 과 참여자의 신분에 맞는 규격과 문양에 따라 구획되 었다.

명정전 외연의 지의는 별문과 백문을 사용하였으며, 자경전에서 열린 내연의 지의는 채화문과 별문을 사용 하여 배설한 것을 알 수 있다. 외연에서 별문 지의의 가장자리에 대는 선은 청색이며 내연에서 채화지의 선 에 대는 색은 자색이다.

외연의 연향에서는 채화의 지의가 배설되지 않은 것 을 알 수 있으며 내연의 연향 공간에서는 백문의 지의 가 배설되지 않았다.

『己丑進饌儀軌』의 修理 부분을 보면 補階 98間이 배설되었는데 보계의 한 間의 크기를33) 참고하여 지의 의 규격을 추정해보고자 한다.

보계 한 間의 크기는 2.39X2.39m로 홍좌판 2개로 구 성되었다. 월대 위 보계 98間에 백문 90장을 이어 붙인 지의 2개가 배설되었으니 지의 한 장은 보계를 구성하 는 홍좌판의 규격과 같은 2.39m의 半인 1.2m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지의 한 장의 규격은 2.39x1.2m로 판단 된다.

정조시기의 마제문지의는 순조시기 1809년 이후 연 향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종합해보면 외연과 내연의 공간에서 외연보다 내연 에서의 지의 배설이 더욱 세분화되어 구획되었다. 이는 외연에는 여성이 참여하지 않고 내연에 여성이 참여하 여 연향이 거행되는 공간에서 여성 참여자의 위계를 구분하기 위해 지의로 공간을 세분화 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지의의 문양과 색으로 유교적 남·여 구분을 세분화하였다.

1848년(헌종 14)에 거행된 戊申進饌과 조선말기 1901 년 거행된 辛丑進饌에서도 <그림 8>과 같이 지의가

33) 석진영·한동수 『조선후기 궁중의례에 사용된 보계(補階)의 유형 과 세부 구조에 관한 연구』,건축역사연구, 2018. 27.2, 89∼100쪽, 93

배설되었다. 살펴보면 1848년 헌종 무신진찬은 악공의 자리에 청색의 선을 두른 백문지의가 배설되었다.

1901년(고종 38) 고종 신축진찬에서는 백문지의 위에 신하들이 자리하고 신하 자리 위에 있는 왕세자 拜位 자리에는 彩花單席이 깔려 있다.

왕세자의 공간에 배설된 지의로 신하와의 위계에 구 분을 두었다. 즉, 왕실과 신하의 정치적 위계질서를 세 분화하기 위한 물리적인 요소가 지의였던 것이다.

지의의 가장자리에 대는 縇도 외연의 청색 선과 내 연의 자색 선과는 다르게 제작되었다.

별문, 채화 문양과 색상 등이 다른 것은 유교적 이념 이 반영되어 왕실 어른에 대한 예, 장수를 기원하는 의 미를 지의에 반영하였다. 왕실에서도 어른에 대한 신분 의 세분화도 지의로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白 文 地衣

白 文 地衣 彩 花

地衣

그림 8. 戊申進饌 악공자리의 지의(1848) 上, 辛丑進饌에 배설된 白文地衣(1901) 下

조선시대 정조시기 연향의 규범을 기본으로 19세기 순조시기에 연향과 관련한 자재와 품목들이 진찬의궤 등에 정착되었다. 修理와 排設 등의 항목이『進爵儀 軌』·『進饌儀軌』에 정착되면서 연향공간에 구획된 다

(10)

양한 건축 구성요소들을 파악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순조시기 이후 의궤에 기록된 수리와 배설에서 조선 전기의 지의를 파악하기 어려운 점을 감안하고 조선후 기 연향 공간의 바닥에 깔아 사용된 지의의 종류와 크 기, 문양, 배설하는 위계에 대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파 악해 볼 수 있게 되었다.

4. 결론

궁궐에서 거행된 연향은 전각과 마당의 공간인 전정 에서 거행되었다. 연향이 거행되는 공간에는 地衣가 주 로 배설되었으며 지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地衣는 연향 공간의 위계에서 왕실과 참여자를 세분 화하기 위한 물리적인 요소이다. 또한, 왕실 참여자 간 을 세분화하기 위한 기능을 하였다.

地衣는 연향 공간을 구획하는 일차적 물리적 요소이 며, 일반적 공간을 의례상 공간으로 격상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연향공간의 지의는 전각에 배설된다. 뜰의 전정 공간 은 정조시기 중앙배치에서 순조 이후 左와 右로 나눈 대칭형식으로 배설된다. 지의로 참여자의 위계를 세분 화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地衣는 크게 外宴의 공간에는 別紋과 白紋지의가 배 설되었으며, 內宴의 공간에는 彩花문양과 別文지의가 배설되었다. 연향에서 지의로 남·여, 왕실과 신하의 신 분을 세분화한 것으로 판단된다.

마제문지의는 정조시기 연향에 주로 사용되지만 1809년 이후 연향에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순조 시기 이후 연향 공간에는 別紋, 彩花, 白紋의 지의로 통일된 것으로 판단된다.

地衣는 연향 공간의 위계에서 왕실과 참여자를 세분 화하기 위한 물리적인 요소이다. 또한, 왕실 참여자 간 의 신분적 세분화의 기능도 수행한다.

地衣는 궁궐 연향이 거행되는 동안 일차적으로 바닥 에 구획되어 의례상 공간으로 격상시키는 기능을 한다.

또한, 연향의 의례에 따라 신분에 따른 위계의 구분을 두어 공간을 구획하고 색상과 문양 등을 세분화하였다.

地衣는 왕실간의 위계 세분화와 유교 이념 등을 연 향에 반영하기 위해 상징적인 바닥 기능을 수행 한 것 을 확인 할 수 있다.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서울대학교 규장각 2. 『승정원일기』, 서울대학교 규장각

3. 『慈慶殿進爵整禮儀軌』,1827, 서울대학교 규장각 4. 『戊子進爵儀軌』, 1828, 서울대학교 규장각 5. 『己丑進饌儀軌』, 1829, 서울대학교 규장각 6. 『戊申進饌儀軌』, 1829, 서울대학교 규장각 7. 『壬辰進饌儀軌』, 1892, 서울대학교 규장각 8. 이의강(역),『국역순조무자진작의궤』, 보고사, 2006 9. 송방송(역) 외,『國譯純祖己丑進饌儀軌 1』, 민속원,

2007

10. 송방송(역) 외,『國譯純祖己丑進饌儀軌 2』, 민속원, 2007

11. 송방송(역) 외,『國譯純祖己丑進饌儀軌 3』, 민속원, 2007

12. 서한석(역) 외,『譯註己巳進表裏進饌儀軌 3』, 국립국 악원, 한국음악학술총서, 11, 2018

13. 영건의궤연구회,『영건의궤』, 동녘, 2010

14. 김상환(역),『순조관례책저도감의궤』, 국립고궁박물관, 2016

15. 김상환(역),『국역황태자가례도감의궤』, 국립고궁박물 관, 2015

16. 조재모. 『朝賀 儀禮動線과 宮闕 正殿의 建築型式.』

대한건축학회 논문집 : 계획계 26. 2010, 185∼194쪽 17. 조재모, 『英·正祖代 國家儀禮 再整備와 宮闕建築.』

대한건축학회 논문집 : 계획계 21. 2005, 217∼224쪽 18. 장경희,「조선후기 왕릉 정자작 내부 의물 연구:『산릉

도감의궤』를 중심으로」, 역사민속학, 33, 2010, 145∼

185쪽

19. 이종서, 『고려∼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防寒 설비와 炊事 도구』,역사민속학, 24, 2007. 41∼68쪽

20. 석진영·한동수 『조선후기 궁중의례에 사용된 보계(補 階)의 유형과 세부 구조에 관한 연구』,건축역사연구, 2018. 27.2, 89∼100쪽

21. 석진영,『朝鮮時代 宮闕 宴享 空間의 建築的 特徵』,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박사학위논문, 2020

접수(2020. 08. 28) 수정(1차: 2020. 10. 28) 게재확정(2020. 11. 05)

수치

그림 6. 명정전진찬도(上), 明政殿進饌 地衣추정도(下), 1829 ① 殿內, 1-1 別紋 33장 반을 붙인 地衣 1부, 1-2 33장을 붙 인 地衣 1부, 1-3 18 ¼장을 붙인 地衣 1부, 1-4 17장 반을 붙 인 地衣 1부, ②前階 : 白紋 48장을 붙인 地衣 1부 ③ 西階 : 白紋 24장 반을 붙인 地衣 1부 ④ 東階 : 白紋 14장 반을 붙 인 地衣 1부 ⑤ 月臺 : 白紋 90장을 붙인 地衣 2부[모든 縇은 靑木] ⑥白紋席 연향 공간에서 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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