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적벽돌(赤甓乭) 생산사에 관한 연구
조 홍 석 *1)
(목원대학교 건축학과 박사)
김 정 동
(목원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주제어 : 근대, 전돌, 적벽돌, 벽돌, 형성과정
1. 서론
1-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근대 적벽돌 건축의 경우, 상당수가 현존하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관리소홀로 인 한 노후화와 보수공사시 원형고증의 어려움 및 기술적 한계 등으로 인해 하자발생 및 원형훼 손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 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실증적 사료의 발굴․
분석을 통한 역사성 확립과 더불어 지속적인 기술개발을 통한 안정된 시공품질의 확보가 요 구되고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적벽돌 건축의 효과적 보존을 궁극적 목표로 단계별 추진과제 를 설정하고, 먼저 근대시기 새롭게 사용되기 시작한 ‘적벽돌(赤甓乭)’의 생산사를 고찰, 그 특성을 규명함으로써 적벽돌 건축의 역사성 확 립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1-2. 연구의 범위 및 방법
본 연구는 실학파에 의해 벽돌 생산기술의 개혁이 본격화되는 18세기 중반부터 주체적 산업화가 이루어지는 1960년대까지를 중심으 로 벽돌생산의 근대화 과정을 고찰하였다.
먼저, 고서(古書)를 중심으로 용어의 어문학
* 교신저자, 이메일: [email protected]
적 형성과정을 고찰하여 개념정의가 명확치 않 은 관련 용어를 구분․정의하였다. 다음으로 개항이전, 벽돌의 근대화 모색과정을 비롯하여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적벽돌의 생산방식 및 규격, 그리고 규모 등의 변화를 중점분석하 고, 더불어 해방이후 전개되는 표준규격(KS) 의 변화과정을 함께 고찰하였다.
2. 용어(用語)의 정의
그간 ‘벽돌’에 대한 표기는 품종 및 용도 그 리고, 시대의 변화 등에 따라 목적에 맞게 다 양한 형태로 불리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들은 개항이후 근대화과 정을 거치면서 대부분 사라졌는데, 특히 서구 에서 유입된 ‘적벽돌’의 등장과 일제강점기의 일본식 용어가 함께 병용되면서 점차 명확한 정의가 희석된 채 여러 용어들이 함께 혼용됨 에 따라 각각의 용어가 지니는 고유한 의미를 적절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본 장에서는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문 헌상 표기되었거나 통용되고 있는 벽돌 관련 용어를 중심으로 어원을 고찰하여 용어가 지니 는 의미의 명확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2-1. 벽돌의 정의 및 구분
광의적으로 ‘벽돌’은 ‘비금속무기질 원료를 단일 또는 두 가지 이상 혼합하여 이를 성형, 가열 또는 화학적으로 경화시켜 규격화한 건축 재료’
1)
로 정의되고 있다. 또한, 국립국어연구원 에서 발간한 『표준국어대사전(2000)』에서는‘벽돌’과 ‘연와’에 대하여 ‘진흙과 모래를 차지 게 반죽하여 틀에 박아서 600~1,100℃에서 구워 만들거나, 시멘트와 모래를 버무려 틀에 박아 건조한 네모진 건축재료’라고 정의하여 시멘트 벽돌까지 그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
협의적으로는 ‘점토, 고령토 등을 주원료로 하여 혼련․성형․건조․소성시켜 만든 것으 로 주로 바닥 및 벽체구성에 사용되는 건축재 료’를 지칭하는 것으로 『한국산업규격(KS, korean industrial standards)』에서 정의하고 있는 ‘점토벽돌(L4201)’과 같은 개념으로 해석 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간 우리나라 벽돌의 명칭에 대해서는 송 재선
2)
과 박성형3)
의 연구를 통해 몇 가지의 유 형으로 정리된 바 있다. 송재선의 경우, 시 대․용도․재료 등에 따라 다양하게 불리던 벽돌명칭을 체계화하였고, 박성형의 경우, 주로 근대이전에 사용되었던 전통 벽돌인 ‘전돌(벽 전)’에 대해 고문헌을 중심으로 근거를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라 하겠다.하지만, 전자의 경우, 다양한 표현에 대한 근거가 다소 불충분하고, 후자의 경우, 고증된 내용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결론 도출이 미흡 하다고 판단된다. 예를 들어, ‘전’과 ‘벽’의 통칭 으로 ‘벽전’을 사용하는 데 근거가 된 화성성 역의궤에 대한 분석에서 ‘전’과 ‘벽’, 그리고,
1) 송재선, 『벽돌공학(상)』, 한국적연와협회, 1987, p.23.
2) 송재선, 『우리나라 벽돌』, 한국점토벽돌산업협동조 합, 1991.
3) 박성형, 「한국건축의 벽전사용과 그에 따른 건축특 성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 석론, 1998.
‘벽전’이 바닥 포장 및 벽체용 등 다의적 의미 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장기인의 ‘한국건축사 전’에서 ‘벽전’을 ‘벽돌’과 ‘방전’의 총칭으로 사 용한 것은 전통적 개념의 벽돌인 ‘전돌’로 한 정하여 해석되는 것이 타당하며, 따라서 언어 의 보편성을 감안할 때 ‘벽전’이 현대적 개념 을 포괄하는 용어로 보기에는 적절치 않다.
특히, 우리나라와 근대화과정이 유사한 중국 과 일본의 경우, 근대적 의미의 서구식 벽돌에 대해 별도의 명칭을 부여함으로써 역사적 특성 에 따른 의미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4)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전통적 의미의 벽돌 은 문화재청의 『문화재수리표준시방서(200 5)』를 토대로 ‘전돌’로 정의
5)
하고, 근대적 의 미의 서구식 벽돌은 ‘적벽돌’로, 그리고, ‘벽돌’은 이를 통칭하는 용어로 정의함으로써 보다 명확한 의미전달을 도모하였다.
벽돌 (甓乭)
전돌(塼乭) 전통적 의미의 점토벽돌 적벽돌(赤甓乭) 근대적 의미의 점토벽돌 [표 1] 역사적 관점에서의 벽돌 구분
2-2. 용어의 형성과정
‘벽돌’의 어원을 살펴보면, 문헌상으로는 12 세기 초에 발간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 使高麗圖經, 1123)』에서 벽돌을 뜻하는 용어 로 ‘추(甃)’를 사용한 것이 처음이다. 이후,
『삼국유사(三國遺事, 1283)』에는 ‘전(塼, 磚)’
이 사용되었으며, 『고려사(高麗史, 1451)』에 서는 ‘전(塼, 磚, 甎)’을 비롯하여 ‘벽(甓)’이 처 음으로 벽돌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4) 중국의 경우, 벽돌은 ‘좐 터우(砖头, zhuān tóu)’, 적 벽돌은 ‘홍 좐(紅磚, hong zhuān)’으로 구분하고, 일본은 벽돌을 ‘렝가(煉瓦, れんが)’, 적벽돌을 ‘아카렝가(赤煉瓦, あかれんが)’로 표기하고 있다.
5) 『문화재수리표준시방서』에서는 흙으로 구워 만든 전통적 개념의 벽돌을 ‘전돌’로 통칭하고, 두께가 얇고 주로 바닥 깔기에 사용되는 것을 ‘방전(放塼)’, 주로 벽 체에 사용되는 것을 ‘전벽돌(塼甓乭)’로 분류하고 있다.
명칭 출전 의미
전
塼 삼국유사, 고려사, 동문선, 신증동국여지 승람, 경세유표, 한국건축사전, 건축토목 대사전, 건축용어대사전, 표준국어대사전
혼용 甎
고려사, 동문선, 신증동국여지승람, 훈몽 자회, 서애집, 북학의, 열하일기, 화성성 역의궤, 만기요람, 경세유표, 국한회어, 한국건축사전, 표준국어대사전
磚 삼국유사,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북 학의, 임원경제지, 화성성역의궤, 한국건 㼷 축사전-
벽 甓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훈몽자회, 북학의, 열하일기, 화성성역의궤, 경세유표, 목민심서, 국한회어, 조선어사전, 조선어사전 수정증보 판, 우리말큰사전, 우리말큰사전(문세영) 추 甃 선화봉사고려도경, 신증동국여지승람, 훈몽자회, 북학의, 열하일기
영 瓴 훈몽자회
적 甋 -
정 㼗 -
유 絫瓦, 累瓦 -(고어)
녹 㼾 -
사 -(고어)
이 㼢 -
전벽 甎甓 서애집, 경세유표, 표준국어대사전磚甓 서애집 전돌 塼乭 한국건축사전, 표준국어대사전(≒전석) 벽전 甓甎 화성성역의궤, 한국건축사전
고전 古甎 한국건축사전 전와 磚瓦 한국건축사전
연와 煉瓦 조선어사전 수정증보판, 표준조선말사전,우리말큰사전, 우리말큰사전(문세영) 연미석 煉尾石국한회어
벽돌 甓石(-)
국한회어, 표준조선말사전, 우리말큰사전, 우리말큰사전(문세영), 건축용어집, 건축 토목대사전, 표준국어대사전
甓乭 조선어사전, 조선어사전 수정증보판, 표준조선말사전 壁乭 한국건축사전, 건축용어대사전
벽와 甓瓦 우리말큰사전, 표준국어대사전 전체 磚砌 화성성역의궤
체전 砌磚 화성성역의궤 벽체 면전 眠磚 임원경제지 측전 側磚 임원경제지 방전 方塼 한국건축사전
바닥 방만전 方墁磚임원경제지
벽장돌 壁長乭한국건축사전 영적 瓴甋 북학의 영벽 瓴甓 -
동 㼿 -
백 瓸 -
황판전 楻板磚임원경제지 지붕
추 火瓦 -(고어) 추전 甃塼 - 우물 정벽 井甓 - 정앵 井甇 -
도전 刀磚 임원경제지 홍예,
국전 鞠磚 임원경제지 묘혈
혹 -(고어) 흙
이전 泥塼 - 벽돌
[표 2] 문헌에 나타난 용어 및 의미 [표 2]는 19세기 초까지 발간된 주요 문헌
6)
을 비롯하여 최근의 국어사전7)
및 건축용어사전8)
을 토대로 벽돌 관련 용어들을 정리한 것으로‘추(甃)’, ‘전(塼, 磚, 甎)’, ‘벽(甓)’ 등이 벽돌을 의미하는 단어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 시대 변화에 따라 여러 형태로 결합되어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추(甃)’의 경우, 『선화봉사 고려도경』이후 꾸준히 사용되었으나, 『열하 일기』이후의 문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것으 로 미루어 18세기 말부터는 거의 쓰이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며, 이외에 몇몇 표현들은 현재 거의 사용되지 않거나 고어(古語)가 되었다.
또한, ‘전’의 경우는 ‘塼’, ‘磚’, ‘甎’ 등 여러 형태의 한문이 병용되었는데, 주로 ‘塼’이 많이 사용되었고, ‘벽(甓)’과 더불어 19세기 말까지 단독 또는 다른 단어와 결합되어 빈번히 사용 되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식 명칭의 등장과 함께 거의 쓰이지 않다가 해방이후, 건 축용어사전을 중심으로 다시 사용되기 시작하 면서 주로 전통적 개념의 벽돌을 지칭하는 용 어로 고착화되었다.
9)
6) 동문선(東文選, 1478), 훈몽자회(訓蒙字會, 1527), 신 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 서애집(西厓 集, 1633), 북학의(北學議, 1778), 열하일기(熱河日記, 1780),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18C말), 화성성역의궤(華 城城役儀軌, 1801), 만기요람(萬機要覽, 1808), 경세유표 (經世遺表, 1818), 목민심서(牧民心書, 1818) 등
7) 분석대상으로 선정한 국어사전은 국문학 상 역사적 의미를 지닌 사전의 초판과 증보판 그리고, 국립기관에 서 편찬한 사전을 선정함으로써 분석의 객관성을 확보 하였다.(이준영 외, 『국한회어(영인본)』, 태학사, 1986(1895) ; 문세영, 『조선어사전』, 조선어사전간행회, 1938. ; 문세영, 『조선어사전 수정증보판』, 조선어사전 간행회, 1940. ; 이윤재, 『표준조선말사전』, 아문각, 1947. ; 문세영, 『우리말큰사전』, 삼성문화사, 1957. ; 한글학회, 『우리말큰사전』, 삼성문화사, 1957. ; 국립국 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 두산동아, 2000.) 8) 분석대상으로 선정한 건축용어사전은 다음과 같다.
(장기인, 『건축용어집』, 대한건축학회, 1958. ; 장기인,
『한국건축사전(한국건축대계4)』, 보성문화사, 1985. ; 신현식, 『건축토목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5. ; 김 평탁, 『건축용어대사전』, 기문당, 1996.)
근대기를 거치면서 ‘벽돌’은 가장 일반화된 용어로 자리 잡게 되는데, 현재 『표준국어대 사전』 상에는 순 한국말로 정의되어 있으나, 사전에 따라 ‘壁乭’과 ‘甓乭’ 등의 한자가 병기 되어 있어 일반적으로 함께 통용되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연와(煉瓦)’가 ‘벽돌’
과 함께 사용되었는데, 당시의 영향으로 현재 일부 사용되고 있기는 하나 통용되지는 않고 있다.
(1) ‘벽돌’이란 용어의 등장
본 연구의 조사자료를 기초로 분석한 결과,
‘벽돌’이란 용어가 등장하는 문헌은 『국한회어 (國漢會語)
10)
』가 처음이다. 이 사전은 표제어 를 한글로 쓰고 한자로 뜻을 풀이한 ‘최초의 대역사전(對譯事典)’으로 ‘건(乾)’과 ‘곤(坤)’ 2 책(冊)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 가로 21cm, 세로 32.8cm 크기에 27,000여개의 표제어가 수록되어 있는데, ‘우리말을 표제어로 사용한 최초의 사전’이란 점에서 국문학 상 중요한 사 료로 평가되고 있다.『국한회어 (건)』의 ‘국문자집 (하)권’에는
‘벽돌’에 대한 뜻풀이로 ‘壁石’이란 한문표기와 함께 영문 ‘Brick’이 표기되어 있는데, 이를 통 해 ‘Brick’의 번역어로 ‘벽석(壁石)’을 쓰고, 이 를 ‘벽돌’로 발음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국한회어 (곤)』에서는 한글 ‘벽돌’
을 ‘甓(벽)’과 ‘甎(전)’ 그리고 ‘煉尾石(연미석)’
등의 한문으로 다시 뜻풀이를 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 외에 벽돌과 관련하여 사용된 명칭은 확인되지 않았다.
9) 『표준국어대사전(2000)』상 ‘전(甎, 塼)은 흙을 구워 정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의 납작한 벽돌 모양으로 만든 동양의 전통적 건축 재료로 여러 가지 모양과 무늬가 있으며, 주로 바닥과 벽의 재료’로 정의되어 있다.
10) 이준영, 정현, 이기영, 이명선, 강진희에 의해 1895 년에 편찬된 국어사전으로 『국한회어』는 “국문(國文) 을 한문(漢文)으로 풀이한 글모음”이란 뜻으로 표지에는
‘국한회화(國漢會話)’라고 되어 있으나, 서문의 내용상 일반적으로 ‘국한회어’를 주된 표기로 사용하고 있다.
<그림 1> 국한회어 건(상) 및 곤(하) (2) 일본식 표기인 ‘연와’의 병용
1910년 한일합병에 따라 국어에 대한 표현 규제가 강화되면서 강점중반기까지는 국문으로 작성된 사전의 편찬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 러나, 1930년대에 들어 차츰 사전편찬에 대한 노력이 일기 시작하여 1938년에 ‘인쇄본으로 출간된 최초의 국어사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문세영(文世榮)의 ‘조선어사전’이 편찬되었다.
이 사전은 2년 후인 1940년에 수정증보판이 발간되는데, 이 두 사전의 비교를 통해 일제강 점당시, 벽돌과 관련된 용어의 표기상 변화가 확인된다. 내용을 살펴보면, 초판에서는 벽돌과 관련된 명칭으로는 ‘벽:’, ‘벽돌’ 등의 표현만이 확인되었으나, 수정증보판에서는 벽돌의 일본 식 표기인 ‘연와(煉瓦)’가 추가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또한, ‘전’을 비롯한 여타 전통적 명칭은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일제의 ‘민족문화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배제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벽돌’과 ‘연와’가 일제강점기에 가장 대표적인 명칭이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2> 조선어사전 초판(상) 및 수정증보판(하)
(3) 용어사용의 표준화
해방과 더불어 한글사전 편찬이 본격화되면 서 한글학회의 『우리말 큰 사전(1947)』을 비 롯하여 이윤재의 『표준조선말사전(1947)』, 문세영의 『우리말 큰 사전(1957)』 등이 차례 로 간행되었는데, 이들 사전에서도 벽돌을 지 칭하는 용어로 ‘벽돌’과 ‘연와’는 수록된 반면,
‘전’과 ‘전돌’은 여전히 표기되어 있지 않다.
이후, 대한건축학회를 중심으로 건축용어에 대한 표준화작업이 시작되면서 1958년에 장기 인이 집필한 ‘최초의 건축용어사전’인 『건축용 어집』이 발간되었는데, 일본 건축학회가 발행 한 『일본 건축술어집』을 기초로 하여 약 3,000단어가 수록되었다.
내용을 살펴보면, 재료별 분류에서 ‘벽돌’이 란 용어와 함께 다양한 공법 및 방식이 소개 되고 있는 반면, ‘전’ 및 ‘전돌’ 등에 대한 기록 은 확인되지 않으며, ‘연와’에 대한 표기가 없 는 것으로 보아 일본어의 번역과정에서 ‘벽돌’
로 통칭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1985년에 수정․보완하여 『한국건축사전』으로 재발간 되는데, 여기서는 ‘벽돌’을 포함하여 ‘전’, ‘전돌’
에 대해서도 언급되고 있으며, 이후 발간된 관 련 용어사전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국어사전의 경우에는 최근까지 ‘연와’에 대한 설명이 언급 되고 있는 반면, 건축 관련 용어사전에서는 이 를 확인하기 어려운 데, 이는 일식 건축용어에 대한 한글화 작업의 결과가 반영된 것이라 하 겠다. 그리고, 현재 사용되고 있는 국어사전 가운데 대표적인 『표준어대사전(2000)』 상에 는 ‘전돌(塼乭)’대신 ‘전석(塼石)’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현재 건축 및 문화재 현장에서 통용되 는 용어의 보편성을 감안할 때 ‘전석’을 ‘전돌’
로 표현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기라 하겠다.
또한, ‘연와’에 대한 설명에 있어, ‘벽돌’에 대한 중복된 설명을 삭제하고, ‘벽돌의 일식(日 式) 표기’라는 점을 명기함으로써 고유 용어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한편, 일식 용어의 오․남 용을 방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된다.
구분 전 전돌 벽돌 연와 기타
국한회어(1895) ○ ○ 벽, 연미석
조선어사전(1938) ○ 벽:
조선어사전
(1940, 수정증보판) ○ ○ 벽:
표준조선말사전(1947) ○ ○ 벽돌집
우리말큰사전
(1947~57, 한글학회) ○ ○ 벽, 벽돌집,벽와 우리말큰사전
(1957, 문세영) ○ ○ 벽:
건축용어집(1958) ○ 방전
한국건축사전(1985) ○ ○ ○ 군벽돌,
벽전, 방전 건축토목대사전(1995) ○ ○
건축용어대사전(1996) ○ ○ ○ 연와점토
표준국어대사전(2000) ○ ○ ○ 전석, 벽와 [표 3] 주요 사전에 수록된 벽돌 관련명칭
3. 근대적 벽돌생산의 모색(18C~1910)
3-1. 실학파에 의한 전돌의 근대화 임진왜란이후, 조선은 수도 주변의 성곽 개 보수공사를 시행하면서 본격적으로 전돌(塼乭) 을 사용하기 시작
11)
하였는데, 이는 실학사상에 힘입은 바가 크다. 특히, 대표적인 실학자인 초정(楚亭) 박제가(朴齋家, 1750~1805)와 연 암(燕岩)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경우, 각각 『북학의(北學議)』와 『열하일기(熱河 日記)』를 통해 벽돌이 갖는 건축 재료로서의 우수성과 경제성을 강조하면서 당시 청나라의 벽돌생산기술과 축벽기술 등을 소개하였다.12)
1796년(정조20) 9월에 축성된 화성성의 경 우,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근대적 기술로 이 루어진 전축성곽으로 『화성성역의궤』
13)
의‘도설(圖說)’에는 소성 가마의 축조방법 및 전 돌 생산과정 등이 그림과 함께 설명되어 있다.
특히, 건축당시 사용된 벽돌은 전국에서 벽 돌장(甓乭匠)을 소집하여 ‘천공개물요제(天工 開物窯制)’라는 새로운 공법으로 제조되었는데, 이를 위해 처음에는 광주 왕륜(旺倫, 현 경기 도 의왕시 백운산 부근)에 가마를 두고 소성하
11) 1743년부터 2년여에 걸친 강화성 개축공사시 현지 에서 전돌을 생산․축성하였고, 1778년(정조 2)에는 남 한산성을 전돌로 개축하였으며, 1794년에 착공하여 1796 년에 준공된 수원 화성성(華城城) 역시, 현지에서 전돌 을 생산하여 축성되었다.
12) 박제가는 『북학의』의 ‘내편(內篇) 벽조(甓條)’에서 당시 중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전돌의 모양과 소성 가마, 그리고 생산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전돌의 보 급을 위해 관청이 주도하여 벽돌을 대량생산해야 함을 제안하고 있으며, 『북학의』의 ‘내편(內篇) 성조(城條)’
에서는 축성 재료로 돌에 비해 전돌이 우수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박지원은 『열하일기』의 ‘도강록 (渡江錄)’에서 전돌의 성형방법과 함께 시가지에서 본 전돌 가옥의 장점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함과 아울러 숙 소의 전돌 구들이 방바닥을 고르게 하고, 빈틈이 없어 구들용재로서도 우월하다고 격찬하고 있으며, 성의 축성 재로서의 우수성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다.
13) 1796년(정조20)에 의궤청(儀軌廳)에서 편찬하여 1801년(순조1)에 정리자(整理字)로 인쇄하여 간행됨.
였으나, 운반거리상 문제로 수원 화성 북성(北 城) 밖과 서봉동(棲鳳洞, 현 경기도 화성시 정 남면 서봉산 부근)에 다시 가마를 설치하고, 벽돌을 생산함으로써 처음으로 근대적 의미의 벽돌생산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18세기 말에는 풍석(楓石) 서유구(徐 有榘, 1764~1845)가 『북학의』 및 『열하일 기』를 비롯, 국․내외에서 편찬된 주요 기술 서를 참고하여 농업 전서인 『임원경제지』
14)
를 저술하였는데, 「섬용지」편에는 중국 기술 서인 『천공개물(天工開物)』15)
을 토대로 벽 돌생산과정 및 소성정도에 따른 품질에 대해 상술되어 있다. <그림 3>은 『천공개물』에 수록되어 있는 벽돌제조과정에 관한 삽화로 왼 쪽은 생벽돌을 만드는 광경이고, 가운데와 오 른쪽은 ‘천공개물요제’에 대한 것이다.<그림 3> 『천공개물』에 수록된 전돌성형(좌) 및 소성(중, 우)장면
특히, 가운데 것은 ‘매탄소전요(煤炭燒磚窯)’방 식을 묘사한 것으로, 매탄
16)
을 둥글게 뭉쳐 생 벽돌과 교차되게 쌓아 벽돌을 소성하는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고, 오른쪽 그림은 ‘전와제 수전수요(磚瓦濟水轉銹窯)’ 방식을 표현한 것14)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라고도 하고, 총 113권 52 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용은 총 16부분으로 나누어 기술되어 있다.
15) 송응성(宋應星, 1587~1664)이 1637년에 발간한 중 국 명나라시대(1368~1644)의 과학기술서로 농업·공업·
산업·교통운수·병기제조 등에 관한 생산기술과 공예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16) 중국 춘추전국시대에는 ‘석열(石涅)’, 또는 ‘열석(涅 石)’이라 불렀고, 위․진․당․송나라 시대에는 ‘석탄’, 명나라 시대에는 ‘매탄’이라 하였다.
으로 생벽돌의 색깔을 바꾸고, 광택을 나게 하 기 위해 가마위에 물을 붓는 ‘전수(轉銹)’과정 이 묘사되어 있다.
이렇듯 실학자들에 의한 벽돌의 새로운 생산기 법 소개와 이를 국내에 적용하기 위한 노력은 건축 재료로써 벽돌의 대중화를 위한 벽돌생산 기술의 근대화에 기폭제로 작용하였다.
3-2. 개항과 적벽돌 건축의 등장 우리나라 최초의 적벽돌 건축로는 부산 일 본관리청(1879, 김정동), 세창양행 사택(1884, 윤일주), 배재학당 강당(1887, 장기인․오창희), 서울 일본영사관(1896, 김홍식) 등이 언급되고 있으나, 연대의 불확실성 및 사료부족 등으로 현재까지 명확히 고증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양식 건축물에 사용할 적벽돌 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약현성당 과 명동성당의 건축을 위해 1890년대 초, 와서 현(瓦署峴)에 벽돌 제조소(한강통 연와소)를 설치하면서부터이다.
명동성당은 1885년에 입국한 코스트 (Eugene Jean Georges Coste, 高宜善, 184 2~96)신부가 설계한 적벽돌 건축물
17)
로 1892 년 5윌 8일에 정초식을 거행하고, 중국에서 수 입한 벽돌을 사용하여 공사를 시작하였다.<그림 4> 명동성당의 정초식(좌) 및 공사장면(우)
*참조:경기도박물관, 『먼 나라 꼬레』, 경인문화사, 2003, p.200 외
당시 국내에는 적벽돌 생산기술자 및 공사 기능공을 구할 수 없는 상황으로 부득이 중국 에서 쿨리(Coolie 또는 Cooly, 苦力, 벽돌공)를
17) 1896년 코스트신부가 질병으로 선종(善終)하자 프와 넬(Victor Leuis Poisnel, 朴道行, 1855~1925) 신부가 공 사를 맡아 1898년 5월 29일에 축성되었다.
비롯하여 미장이와 목수를 고용하였으며, 일부 일본인 인부를 고용하기도 하였으나, 감독관의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
18)
특히, 중국인 기술자들은 당시 불안정한 정 세의 영향과 공사목적에 따른 필요성에 의해 입출국이 빈번하여 공사가 일시 중단되기도 하 였다. 또한, 미숙한 조적기술로 인해 구조적 문제가 발생하여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A. I.
Scredin. Sabatin)으로부터 건축기술 및 구조 에 관한 자문을 받기도 하였는데, 하자 검토과 정을 통해 당시 상황이 재료 및 하중에 의한 구조적 결함이 아니라 경험부족으로 인한 기술 적 문제였던 것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19)
이후, 1894년 7월에 발발한 청일전쟁의 영 향으로 중국으로부터의 벽돌수입이 중단되자 코스트 신부는 벽돌제조소를 설치하고, 벽돌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신도 였던 김흥민(金興敏)에게 벽돌생산기술을 가르 쳐 그를 벽돌공의 감독관으로 임명하였다.
이즈음 공사관․영사관․상관․성당․교회 등이 주로 양식(洋式)으로 건축되면서 적벽돌 에 대한 수요도 급증하였으나, 벽돌생산기술이 보편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여 [표 4]에서와 같이 1908년을 기점으로 벽돌수입량이 급증하기도 하였다.
연도 벽돌(기와) 비고(단위:장)
1901 14,188 기와포함
1902 26,583 기와포함
1903 76,581 기와포함
1904 36,017 기와포함
1905 143,151 기와포함
1906 151,101 기와포함
1907 108,288 기와포함
1908 1,240,052(12,052)
일본(벽돌 및 기와수입) 중국(벽돌수입) 1909 1,401,084(37,084)
1910 1,347,120(20,120)
[표 4] 1900년대 벽돌 수입현황
*참조:통감부, 『통계연보』, 1907~1910.
18) 『뮈텔주교일기』, 1896. 5. 28.
19) 『뮈텔주교일기』, 1893. 8. 30.
3-3. 관영 건축조직 및 생산기술의 변화 (1) 탁지부 건축소의 설립
1882년 정부는 중앙행정기관을 개편, 도자기 담당의 ‘사옹원(司甕院)’과 기와를 생산하던
‘와서(瓦署)’, 그리고 영선(營繕)과 벽돌생산을 담당하던 ‘선공감(繕工監)’ 등을 ‘자전국(瓷塼 局)’으로 통합하여 궁궐 및 관수용으로만 공급 하던 건축자재를 민수용까지 생산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변경된 명칭을 통해 벽돌생산의 비 중이 높아졌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또한, 갑오개혁(1894)이 추진되면서 6월 28 일,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 의해 제정된 신 관제는 의정부와 궁내부를 구별하였는데, 의정 부 공무아문(工務衙門) 산하에 ‘건축국(建築 局)’, 궁내부 제용원(濟用院) 산하에 ‘영선사 (營繕司)’를 두어 각각 정부 및 황실의 건축업 무를 담당케 하였다. 이후, 을사늑약(1905)에 따라 통감부 체제로 변경되면서 정부 관련 건 축 및 토목공사의 업무를 통합하고, 1906년 9 월 28일에 『관보(官報)』를 통해 칙령 제55 호로 탁지부 건축소의 창설을 공포하였다.
20)
[표 5]는 당시 탁지부 건축소의 직원규모를 분석한 것으로 설립초기에는 탁지부 대신의 관 리 하에 건축과 기타공사에 관한 사무만을 담 당하였으나, 이후 칙령 제42호(1907.12.18. 고 시)와 제48호(1908.08.13. 고시)를 통해 대폭적 으로 인원을 확충함으로써 기능을 강화하였다.
연도 소장 서기관 사무관 기사 주사 기수
1906.09.28. 2 2 2 2
1907.12.18. 1 3 3 6 26
1908.08.13. 1 1 3 10 10 40 [표 5] 탁지부 건축소의 직원규모
*참조:度支部 建築所, 『建築所事業槪要 第1次』, 度支 部 建築所, 1909
또한, [표 6]은 탁지부 건축소에서 지은 건 축물 중 적벽돌 건축물을 정리한 것으로 설립 초기에는 단층 건물이 주로 건축되었으나,
20) 度支部, 『朝鮮財政施設綱要及配置一覽図』, 度支部, 1910, p.237.
1907년 이후부터 창고를 제외한 건축물 다수 가 2층 규모로 건축되었으며, 동아연초회사와 같이 민간회사 수탁공사도 일부 이루어졌다.
명칭 연도 구조 규모 공사비(단위:엔) 비고 경성세관 보세창고 1906 벽돌조 1층 38,800
진남포세관청사 1906 벽돌조 1층 58,390
탁지부 인쇄국 1907 벽돌조 1층 202,003 벽돌조 4동, 목조 6동 의정부청사 1907 벽돌조 2층 81,034
평리원청사 1908 벽돌조 2층 60,285
대한의원 본관 1908 벽돌조 2층 308,103 병실(7동) 및 부속동 포함 부산세관 연와창고 1908 벽돌조 1층 22,540 부산세관청사(1910, 2층)
광통관 1909 벽돌조 2층 49,352 내부(內部)청사 1909 벽돌조 2층 58,766
동아연초회사공장 1909 벽돌조 2층 23,294 수탁공사 탁지부청사 증축공사 1909 벽돌조 2층 47,500 1차 준공(1908)
농상공부청사 1910 벽돌조 2층 46,295
동아연초회사공장 1910 벽돌조 2층 41,716 수탁공사, 4동 인천세관연와창고 1910 벽돌조 1층 22,846
[표 6] 탁지부 건축소의 주요 적벽돌 건축물
*참조:度支部, 『朝鮮財政施設綱要及配置一覽図』, 度支 部, 1910, p.244.
(2) 관영 연와제조소 설립 및 호프만가마의 등장 탁지부 건축소의 설립과 함께 통감부는 건 축 및 하수배관공사에 필요한 벽돌․토관․기 와 등을 생산하기 위해 1906년 10월 31일에 탁지부 대신으로부터 연와제조소 설립위원을 촉탁(囑託)받아 ‘탁지부 건축소 공업부’를 조직 하여 연와제조소의 창설사무를 개시하였다.
21)
특히, 벽돌공장 설립과 관련하여 일본 대장 성(大藏省) 임시건축부 제1과장으로 재직 중이 던 야하시 켄기찌(失橋賢吉)에게 마포 연와제 조소의 설립타당성 검토를 의뢰하여 설치가 적 합하다는 보고
22)
를 받은 후, 탁지부령 제27호21) 김태중, 『구한말 탁지부건축소 부설 연와제조소에 관하여』, 경남대 공업기술연구소, 1985. 8, p.166.
22) ‘벽돌조는 목조에 비해 수명이 길고, 유지보수비가 적게 들며, 방화력이 우수한 장점이 있다. 또한, 한국은 기온변화가 심해 개방식 목조 가옥보다 밀폐식 벽돌조 가옥이 방한에 효과적이므로 양질의 벽돌을 저렴하게 공급할 경우 급격히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 하고, ‘한국 내 문명시설이 늘어나면 각종 공공건물과 공장 건설이 필수적이므로 관(官)에서 개량된 생산방식의 대규모 벽 돌공장을 설립하여 관영공사의 수요를 충당하는 동시에 민간공사에도 공급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시기를 고려하 여 민영으로 변경할 수도 있을 것’
(1906.12.07. 고시) 및 제7호(1907.03.07. 고시) 를 통해 작업회계 및 자본금 등을 규정하였다.
구분 수량 가격
총계 234,000엔
고정자본
토지 240,691㎡ 36,789엔 건축물 8,701㎡ 141,010엔
기계․도구 31,200엔
운영자본 25,000엔
[표 7] 설립당시의 연와제조소 사업규모
*참조:度支部 建築所, ibid.
공장 위치는 토질 및 교통 등을 고려하여 연와제조장은 마포(166,873㎡)에, 토관 및 기와 제조장은 영등포(77,058㎡)에 정하여 축조공사 를 실시, 1907년 4월경부터 벽돌을 생산하기 시작하였고, 같은 해 10월 설비공사를 완료함 으로써 벽돌생산이 본격화되었으며
23)
, 12월 27 일 칙령 제69호로 관제를 정식 공포한 이후 관공사뿐만 아니라 민간공사에까지 공급범위를 확대하면서 개항기의 벽돌생산을 주도하였다.탁지부 건축소 부설 연와제조소의 설립초기 에는 대한의원과 탁지부 청사 등에 소요되는 벽돌을 긴급히 공급하기 위해 오름가마 3기를 축조하여 재래식으로 벽돌을 생산하였으나, 1907년 8월에 독일식 호프만가마를 도입하고, 9월에 기계식 성형기 및 부대시설을 갖춤으로 써 기계식 벽돌생산이 본격화되었다.
<그림 5> 탁지부 건축소 연와제조소
*참조:度支部 建築所, ibid., p.232.
또한, 1908년 1월에는 일본 제일은행으로부 터 한국 총 지점 신축용 벽돌제조를 의뢰받아 같은 해 6월에 추가적으로 호프만가마의 축로
23) 山口精(야마구치 세이), 『朝鮮産業誌(中)』, 寶文館, 1910, pp.537~538.
를 시작하여 10월에 준공하고, 12월에는 성형 기 1기를 비롯한 부대시설을 완비
24)
함으로써 생산량이 급격히 증대되었다.연도 생산량 공급량 재고 벽돌 공급처
19071,892,996 1,891,678 1,318 대한의원, 의정부, 평리원, 인천수도수원지, 공업 전습소, 인쇄국, 세관공사부 관사, 벽돌가마축조 및 기타 순으로 공급
19085,499,263 5,088,964 411,617
인쇄국, 인천수도수원지, 제일은행, 광통관, 내각 (內閣) 벽돌담장, 탁지부 관사, 공업전습소 실습 실, 대한의원 의학부, 한성위생회, 통감부 철도관 리국, 평리원청사 부속동, 학부(學部) 관사, 농상 공부 관사, 대한의원 관사, 기타 순으로 공급
19096,205,407 6,538,115 78,549
인천수도수원지, 양조시험장, 탁지부 창고, 탁지 부 관사, 내부(內部) 청사, 내부(內部) 관사, 농상 공부 청사, 농상공부 관사, 학부(學部) 관사, 법부 (法部) 관사, 내각(內閣) 관사, 건축소 청사 및 관 사, 친위부 관사, 재정감독국 관사, 재무서 관사, 경시청 관사, 대한의원 부속동, 한성위생회, 경성 재판소 관사, 창덕궁 비원 식물실 본관, 궁내부 어원(御苑)사무국, 광통관, 인천등대국, 회계심사 국 부속동, 공업전습소 기숙사, 인쇄국 벽돌담장, 동아연초회사 경성공장, 제일은행 한국총지점, 주 차군 경리부, 평양 공소원(控訴院), 부산세관 창 고, 영등포감옥, 대전재판소, 대구 공소원, 인천세 관 배수공사, 대전 정부창고, 도량형과(度量衡課) 용산분실 개선공사, 개성 삼정국(蔘政局)인삼 시 식(試植), 재원조사국(財源調査局) 주안(朱安) 염 전, 기타 순으로 공급.
[표 8] 탁지부 건축소 연와제조소의 벽돌생산 및 공급
*참조:度支部, 『朝鮮財政施設綱要及配置一覽図』, 度支 部, 1910, pp.252~255.
한편, 탁지부 건축소도 1908년을 기점으로 일식 목조 의양풍에서 탈피, 적벽돌을 사용한 벽돌조의 절충주의양식으로 점차 변모하였는 데, 이는 건축소 체제정비에 따른 공장(工匠) 쇠퇴와 대장성 임시건축부의 영향력 증대, 그 리고 연와제조소의 호프만가마도입에 따른 벽 돌 대량공급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1910년에 탁지부에서 발간한 『탁지부 직원 록(度支部 職員錄)』에는 1907년 12월 29일에 공포된 칙령 제69호에 의해 개편된 조직의 구 성 및 업무내용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당시 오쿠무라 에이치(奥村英一, 1906.10 입 사) 소장(所長, 사무관)아래 전임 사무관(事務 官, 주임관) 및 기사(技師, 주임관)를 각각 한 명씩 두고, 주사(主事, 판임관)와 기수(技手, 판임관) 약간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24) 度支部 建築所, ibid., p.231.
<그림 6> 탁지부 연와제조소 직원명부
<그림 7> 탁지부 건축소 부설 연와제조소 관련 중앙행정기관 조직도
*참조:度支部, 『中央財政機關沿革一覽表』, 度支部, 1909.06.01.
또한, 연와제조소는 1908년 1월 1일, 관제를
‘경리과’와 ‘작업과’로 구분하고, 이를 1월 27일 에 관보에 공포하였다. 부서별 업무내용을 살 펴보면, 경리과에서는 관인(官印)보관, 직원․
시설물․공문서 등의 관리, 청부계약, 제품보 관과 주문판매에 관한 사항을 포함하여 작업과 의 사무에 해당하지 않는 사항에 대한 업무를 수행하게 하고, 작업과에서는 제품제작에 관한 지도와 감독․설계에 관한 사항 그리고, 제품 의 조사보고를 담당하게 하였다.
벽돌생산은 1년 중 주로 5월부터 11월까지 이루어졌는데, 9월과 10월에 생산량이 가장 많 았으며, 겨울에는 생산을 중단하였다. 또한, ‘일 표(日表)’․‘월표(月表)’ 등을 작성하고, 소성연 료를 가마에 공급하는 요분(窯焚)작업의 직공 에게 특별수당을 지급하는 등 연료절감 및 생 산능률 향상을 위한 방안이 모색되기도 했다.
3-4. 민영 벽돌공장의 설립
우리나라에 설립된 근대적 의미의 민영 벽 돌공장은 1897년 10월 경, 일본인 모리시타(森 下茂豐)가 서울 용산구 효창동(錦町) 13번지 일대에 설립한 연와제조장이 처음인 것으로 조 사되었다. 1897년 3월에 착공된 한강철교 (1900.07.)에 기술자로 근무
25)
하기도 하였던 모 리시타가 설립한 이 공장은 여타 문헌기록 및 설립당시의 협소하였던 규모 등을 감안할 때 1910년 이전에 생산이 중단되었던 것으로 추 정된다. 이후, 1901년부터 경부선 철도공사를 맡은 일본계 건설회사인 지기조(志岐組)가 벽 돌의 수급(需給)을 위해 영등포에 벽돌공장을 건설하고 본격적인 벽돌생산을 시작하였는데, 설립당시에는 단속가마 2기 정도를 설치하고, 철도공사용 벽돌만을 생산하였으나, 공사완료 후에는 일반 건축용 벽돌을 함께 생산하였다.1902년부터 일본인 벽돌공장이 계속 증가하 였는데, 대부분 일반건축용 벽돌을 생산하였다.
이 중 철도공사용 벽돌을 생산하기 위하여 창 립된 공장의 경우는 대부분 철도공사이후 일반 건축용 벽돌을 계속 생산하였다.
1901년부터 1910년까지 10년간에 설립된 벽 돌공장은 34개소로 창립연도를 보면, 1905년 이후에 설립된 것이 28개소로 러일전쟁이후, 일본인의 유입이 급증하면서 벽돌수요도 증가 한 것으로 판단된다.
25) 京城府, 『京城府史 2卷』, 朝鮮印刷株式會社, 1936, p.1023.
연도 생산액(원) 수입액(원) 1910 - 20,120 1911 - 22,795 1912 - 42,588 1913 - 99,966 1914 - 18,944 1915 - 16,762 1916 251,421 63,587 1917 363,925 516,249 1918 846,717 253,788 1919 1,441,645 324,378 1920 1,670,133 135,950 1921 1,215,133 75,361 1922 1,430,585 97,850 1923 1,086,644 93,891 1924 1,094,750 20,937 1925 739,512 43,366 1926 718,245 39,043 1927 901,546 39,092 1928 880,147 117,143 1929 1,036,395 183,948 [표 9] 일제강점기
벽돌생산 및 수입
*참조:小山一德, 『朝鮮の 窯業』, 1933, pp.554~555.
<그림 8> 1900년대 벽돌공장의 연대별 설립추이
또한, 지역별로는 서울․경기지역에 17개소 가 설립되어 전체의 절반정도를 나타내고 있 고, 소유주체별로는 일본인 소유가 28개소로 전체 벽돌공장에 82%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 머지는 중국인 소유(4개소, 12%)와 관영공장(2 개소, 6%)의 분포를 보이고 있어 당시 식민지 화의 여파로 벽돌산업에서도 일본인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9> 개항기의 주요 벽돌공장 위치도
*참조:陸地測量部, 『朝鮮地形圖集成-京城(1/10,000)』, 朝鮮總督府, 1917
4. 일제주도의 벽돌생산(1910~1945)
4-1. 일제강점 전반기
(1) 자본유입과 벽돌산업의 성장
벽돌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수입에 의존하던 기존방식은 원거리 수송에 따른 높은 운임 등 으로 인해 벽돌의 가격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 하였다. 당시, 통감부 통계자료에 의하면 1909 년 일본에서 수입한 벽돌은 1,364,000장이고, 수입액은 37,080원이므로 벽돌 1개당 평균가격
은 0.0252원 정도였는데, 이는 국산 벽돌값에 비하면 68%정도 비싼 것이었다. 1915년에는 전국에 벽돌공장이 36개소로 증가하였으나, 연 간 생산량은 14,188천장으로 1개 공장 당 평균 390,000여 장을 생산하던 영세한 수준이었다.
[표 9]는 일제강점기 의 벽돌 생산 및 수입 액을 정리한 것으로 1910년 이후 점차 벽돌 수입액이 증가하다가 1914~5년에 2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선박의 공급이 어려워짐에 따 라 수입물량이 급감하 였는데, 이는 전쟁 이 후, 일본자본이 국내 벽돌산업 진출을 본격 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국내의 기존 벽돌업체들도 시설을 확장하여 생산력이 증
대되기 시작하여 1920년 이후부터는 수입액이 점차 감소하였다. 일제는 전쟁특수로 인한 호 경기를 맞게 됨으로써 잉여 자본의 벽돌산업에 진출이 본격화되어 기존 공장에 대한 시설투자 가 증대되었다. 또한, 1915년에 비하여 1920년 에는 5개의 공장이 증가하였는데, 내용적으로 법인이 7개소나 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영 기업도 7개소로 증가하는 등 벽돌공장이 점차 대형화되기 시작하였다.
[표 10]은 1924년 당시의 벽돌공장 현황으 로 국내 벽돌수요의 증가에 따라 일본자본의 진출이 본격화되어 총 59개소로 급증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중 형무소에서 운영하던 관영 벽돌공장의 경우, 벽돌 생산량이 9,793,316장으로 총 생산량의 24%를 차지하고
구분 공장
수 생산량 생산액
장 % (원) 서울․경기 14 18,775,360 46.14 615,171 평양․평남 6 7,665,571 18.81 158,481 부산․경남 6 3,526,700 8.67 76,480
함남 3 2,005,996 4.94 45,370 전북 4 1,794,000 4.41 34,711 경북 3 1,657,190 4.08 36,695 함북 7 1,231,000 3.03 22,085 평북 5 1,219,431 3.01 24,976 전남 6 997,100 2.46 26,516 황해 2 798,820 1.97 14,682 충남 1 625,390 1.55 14,009 충북 1 372,120 0.92 12,180 강원 1 59,860 0.01 2,394 계 59 40,718,538 100.00 1,094,750 [표 11] 일제강점 전반기 벽돌공 장의 지역별 분포현황(1924.현재)
구분 공장수 (%) 기업
형태
개인 42 71.2 법인 8 13.6 관영 9 15.2 계 59 100 소유
주체
한국인 5 8.5 일본인 54 91.5
계 59 100
자본 금
5천원 이하 21 35.6 6천~1만 11 18.6 11천~5만 19 32.2 6만~10만 2 3.4 11만~20만 3 5.1 21만~30만 1 1.7 31만~50만 2 3.4 계 59 100 [표 10] 일제강점 전반기 벽돌공장의 구성현황(1924.현재) 있었는데, 소유주체별로
는 일본인 공장이 54개 (91.5%)로 벽돌산업 전반 을 장악하고 있었다.
민족자본에 의해 설립 된 민영 벽돌공장은 1916 년 3월, 최기서(崔基瑞) 가 함경북도 함흥군 북주 동면 운흥리에 설립한
‘운흥(雲興)연와제조소’가 처음이다. 이후, 1922년 3 월에 ‘강경문(姜鏡紋)연 와공장’과 ‘최영배(崔永 培)연와공장’이 설립되는
등 1924년 현재 5개의 공장이 운영되었으나, 총 자본금이 13,800원으로 영세한 수준이었다.
이는 공장별 생산실적에서도 확인되는데, 당 시 일본인 소유의 벽돌공장 1개소의 연평균 생산량이 690,136장 정도였는데, 이에 비해 한 국인 소유 공장의 총 생산량은 550,000장 정도 로 일본인 소유 1개 공장의 연평균 생산량보 다 낮은 수준이었다. [표 11]은 1924년 당시의 벽돌공장의 지역별 분포 및 생산규모를 정리한 것으로 전국
59개 공장에
서 연간
40,718, 538장 의 벽돌이 생 산되었다.
지역별로는 경기도( 서울 포 함 ) 가 18,77 5,360장 으로 전체의 45.14%를 차 지하고 있어
벽돌생산을 주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다음으로는 평안남도와 경상남도 순으로 나타 났다.
(2) 민영 벽돌공장의 호프만가마 도입 일제강점 초기인 1910년대의 벽돌 생산설비 를 살펴보면, 성형공정이 기계화되기 시작하였 고, 소성로는 일(一)자 형태의 단속로와 도염 각로(倒焰角爐)가 반 연속로인 오름가마(登爐) 로 변경되는 한편, 신설되는 대규모 민간 공장 을 주축으로 연속로인 호프만가마가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민영공장에서 호프만가마가 도입된 것은 1915년 5월에 설립된 조선요업주식회사에서 1919년에 설치한 것이 처음
26)
으로 이는 탁지 부 건축소 연와제조소에 비해 12년 정도 늦은 것이었다. 일본인 야마구치(山口太兵衛)가 자 본금 50만원을 들여 영등포 일대에 설립한 이 공장은 벽돌공장으로는 처음으로 법인등록하 고, 성형공정을 최초로 기계화하는 등 당시 국 내 최대 규모의 벽돌공장이었다.<그림 10>는 1921년에 작성된 지도상에 영 등포일대의 주요시설을 표기한 것으로 ‘요업회 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데, 1930년대 촬 영된 <그림 11>과 비교하여 규모 및 설립시 기 등을 감안할 때 조선요업주식회사였을 것으 로 추정된다.
<그림 10> 조선요업주식회사(추정) 위치도(1921)
*참조:陸地測量部, 『朝鮮地形圖集成-京城(1/10,000)』, 朝鮮總督府, 1922.
26) 송재선, ibid., 1991, p.154.
<그림 13> 낭화관
*참조:朝鮮建築會, ibid., 1933.12, p.29.
<그림 11> 1930년대의 조선요업주식회사(추정)
*참조:노형석, 『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 (주)생각 의 나무, 2004, p.270.
호프만가마를 도입한 또 다른 공장으로는
‘경기요업주식회사(1920.05)’가 있는데, 이후 두 업체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벽돌산업전반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자, 서울시내 6개 공장 중 경성형무소 마포연와공장을 제외한 5개 벽돌공 장(조선요업, 경성요업, 삼전연와, 목촌옥연와, 용산연와제조소)이 덤핑판매를 예방하기 위해 공동으로 ‘경성연와공동판매소’를 설치, 1920년 가을부터 공판을 개시하였다.
27)
구분 조선요업 경성요업
1기(호프만) 1기(호프만) 2기(호프만) 구조 2화점 28실 1화점 18실 1화점 14실
규모
가마 길이 81.8m 51.5m -
폭 14.5m 12.7m, -
높이 3.0m 2.9m, -
굴뚝내경
높이 39.4m 39.4m, 24.2m
상부 1.2m 1.51m 1.5m
하부 3.0m 3.0m 3m
1실 요적량 16,000장 18,000장 17,000장
연료 소비량 1.5톤 1.5톤 2.0톤
연간 생산량 약 800만장 약 760만장
소성파손율 10% 10%
연료 만주산 무순탄 만주산 무순탄
총 공사비 37,000원 -
[표 12] ‘조선요업’과 ‘경성요업’의 규모비교
4-2. 일제강점 후반기
(1) 을축년 대홍수와 벽돌공장의 대형화 1923년 9월 발생한 관동대지진 이후, 벽돌 조의 내진성에 대한 시멘트 회사의 강력한 문 제제기로 벽돌조 건축물은 급격히 감소한 반 면, 철근콘크리트조가 각광을 받게 되면서 벽
27) 공판가격은 조선요업주식회사의 판매가격으로 결정 하였는데, 평균가격은 2전 2리로서 일본에서 수입되는 벽돌가격(4전)에 비하면 싼 편이었다.
돌산업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와 함께, 국내 벽돌산업도 일대 변화를 맞 게 되는데, 1925년(乙丑年) 7월에 발생한 대홍 수로 인해 한강연안이 침수되면서 당시 국내 벽돌의 약 40%정도를 생산하던 조선요업주식 회사, 경성요업주식회사, 경성형무소 영등포연 와공장 등이 심각한 수해를 입었다.
이후, 관영(官營)이었던 경성형무소 영등포 연와공장는 복구되었으나, 조선요업주식회사와 경성요업주식회사는 당시의 피해를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폐업을 하게 된다.
<그림 12> 을축년 대홍수 당시의 용산
*참조:노형석, ibid., p.267.
이에 1926년 3월 7일,
‘조선연와건축조합’이 경 성 명치정(明治町)(현, 서울 명동)에 위치한 낭 화관(浪花館)에서 발회 식을 거행하면서 불황타 개를 위한 단결을 도 모
28)
하기도 하였다.또한, 1930년까지 이 어진 불황의 타계 및
대륙침략의 계기마련을 위해 일제는 1931년 만주를 침략하는데, 이로 인한 전쟁특수의 여 파로 점차 경기가 회복되면서 일본의 주요 벽 돌회사들이 우리나라에 공장설립을 본격화하였 는데, 1933년 설립된 일본인 소유의 ‘경성연와 주식회사’가 연간 500만장 규모의 생산력을 가
28) 朝鮮建築會, ibid., 1926. 3, p.68.
진 대규모 벽돌공장을 동대문 부근 용두리와 영등포 당산리에 각각 신설하는 한편, 1934년 과 1935년에도 동일한 규모의 공장을 고양군 뚝섬에 1개, 신흥군 번대방리(현, 대방동)에 2 개 공장을 증설하면서 국내 벽돌산업을 주도하 게 되었다. 이즈음 이외에도 많은 대형공장들 이 신설되어 1935년에는 전국에 77개소의 공 장이 운영되었는데, 법인체가 22개, 관영업체 가 8개, 그 외 47개 업체가 일반 개인 업체로 연간 86,333,000장의 벽돌을 생산하였다.
1940년에 이르러서는 벽돌공장의 수가 123 개로 급증하였는데 특히, 경성연와주식회사는 서울․경기지방에 8개소, 함경남도에 2개소, 만주 봉천(현, 중국 선양)에 1개 공장을 설치 하여 총 11개 공장에서 연간 약 7천만 장을 생산함으로써 벽돌재벌로 성장하게 되었다.
또한, 1935년부터 공장신설이 급증하기 시작 하여 1937년에는 20개, 1938년에는 18개 공장 이 신설됨으로써 일제강점기 중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공장유형을 살펴보면, 법인체가 34개, 관영업체가 8개, 개인업체가 81개소로 벽돌공 장의 대형화에 따라 일제강점 전반기에 비해 법인체가 급증하였으며, 자본 주체별로는 일본 인 소유가 99개소(80.5%)로 아직까지 벽돌산 업의 지배적 영향력을 보이고 있으나, 한국인 소유도 24개소(19.5%)로 대폭 증가하였다.
(2) 호프만가마의 확산
1940년 당시, 벽돌가마를 유형별로 조사한 결과, 전체 123개 공장 중 호프만가마가 66기 (53.7%), 오름가마(登爐)가 33기(26.8%), 단속 가마가 24기(19.5%)로 호프만가마가 전체의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러한 호프만가마의 보급은 생산량 증가로 이어져 1934년까지 점진적으로 늘어나던 생산 량이 1935년 이후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면 서 1936년에는 1억장을 돌파하였고, 1939년에 는 3억 1천만장 이상의 생산량을 기록하였다.
연도 생산량(장) 수입량(장) 1924 40,718,538 348,285 1925 44,521,253 332,241 1926 49,831,802 554,085 1927 55,713,162 320,922 1928 60,786,313 663,096 1929 49,813,284 1,259,685 1930 53,367,675 5,512,374 1931 53,209,965 1,269,387 1932 54,684,469 188,118 1933 60,848,602 805,413 1934 68,564,273 2,100,147 1935 86,323,231 2,048,109 1936 102,082,592 4,397,715 1938 134,027,870 3,038,301 1939 316,844,000 -
[표 13] 일제강점 후반기 벽돌생산 및 수입현황
*참조:조선총독부, 『통계연보』, 조선총독부, 1924~1939
<그림 14>는 일제강점 후기의 벽돌생산량 및 생산액을 지역별로 살펴본 것으로 여타 지 역에 비해 경기지역이 월등히 높은 가운데, 평 남과 함남지역의 상승곡선이 두드러졌으며, 충 북지역에서의 생산활동이 가장 저조하였던 것 을 알 수 있다.
<그림 14> 일제강점 후반기 벽돌생산추이
*참조:조선총독부, 『통계연보』, 조선총독부, 1925~1938
이후, 중일전쟁(1937)의 확전과 태평양전쟁 (1941)의 발발에 의한 징병 및 징용으로 생산 노동력이 감소하고, 연료통제가 강화되면서 일 부 군납이나 관납용 벽돌공장외에는 석탄배급 이 어려워짐에 따라 해방이전까지 대부분의 벽 돌공장은 거의 생산이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