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주차
시민성의 형식과 내용
◎ 학습 목표
시민성을 형식과 내용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시민 교육의 원리를 추론할 수 있다.
주제 개요
시민성은 일종의 방법적 원리인가? 아니면 구체적인 행위와 관련된 규범적 가치인 가? 즉, 인지적 능력인지 아니면 정의적 기준인지를 묻는 말이다. 예를 들어, 비판적 사고, 보편화 가능성을 충족하는 판단, 합리적 사고, 의사결정 등은 전자와 관련되는 반면 공동체 의식, 준법, 타인의 배려, 정직 등은 후자와 관련된다. 그리고 이러한 차 이는 형식과 내용의 대비로 환원된다. 형식 관점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문제가 되는 사태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요구되는 절차나 원리 등을 적용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시민성으로 보는 입장으로서 주체의 자율성에 기초한 합리적 판단 능력에서 시민성을 구한다. 이에 비해 내용으로 보는 관점은 좋은 행위와 나쁜 행위를 구별해 주는 규범적 기준에 따라 해야 할 행위와 하지 말아야 할 행위를 구체적으로 제시하 는 입장으로서 사회적 실행이나 도덕적 관례, 덕목 등에 시민성을 정초한다.
형식과 내용의 대비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대비와 동형적이며 이성과 전통, 그리고 옳음과 선의 대비와도 동형적이다. 또한 이러한 대비는 시민성의 성격에 관한 오랜 논쟁의 토대로 작용해왔다. Kohlberg가 말하는 ‘도덕적 판단 능력’에서 논쟁의 전선을 확인할 수 있다. Kohlberg에 의하면 가치를 내면화 하는 것은 교화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현실에서 직면하는 도덕적 문제 사태에 대응할 수 없게 될 뿐이기 때 문에 문제 사태에 대응할 수 있는 보편화 가능성이 높은 판단 능력이 요구된다고 본 다. 시민성에 대한 이러한 형식 관점과 내용 관점은 교육의 장에서 발달주의와 덕목 주의(또는 사회화)로 연장된다. 형식주의는 학습자가 지닌 잠재력으로서의 생래적인 능력을 확대ㆍ심화하는 것을 교육으로 보는데 비해 덕목주의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덕 목을 학습자의 품성으로 내면화하는 것을 교육으로 본다.
사회적 관계의 표준
민주정치의 전형으로 전해지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삶은 폴리스(polis)를 기초로 해 서 이루어졌다. 시민은 폴리스라는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동형성을 지닌 부분으로 존 재했다. 오늘날 시민성 또는 시민 자질로 번역되고 잇는 citizenship이라는 용어의 어 원인 CIVITAS에도 이러한 의미가 잘 나타나 있다. 라틴어로서 CIVITAS는 ‘국가나 공동체를 구성하며 이를 위해 기능하는 개인이나 제도의 역할’이라는 뜻으로 사용되 었다. 다시 말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지녀야 할 책임, 공동목적, 공동체 의식 등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Butts, 1991,xix).
citizenship이라는 말은 시민이라는 citizen과 자질, 조건이라는 ship이 합성되어 만 들어진 만큼 그 말 속에는 다름 아닌 시민으로서 요구되는 자질이라는 뜻이 담겨 있 다. 개인으로서 요구되는 자질이 아니라 특정한 공동체의 구성원, 즉 시민이라는 지위 에서 요구되는 자질을 지칭하는 개념인 셈이다. 시민성이라는 말이 이러한 특성을 지 니고 있음은, citizenship에 friendship과 membership의 의미가 들어 있다는 점에서도 읽을 수 있다.(Proctor, 1988). 여기서 말하는 friendship이나 membership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요구되는 자질이라는 공통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Proctor에 의하면, Socrates가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하기 보다는 죽음을 선택한 이유가 공동체에의 소속 감을 삶보다 더 중시했기 때문이며, 이것이 곧 membership이 된다. friendship 역시 오늘날 단순히 우정을 의미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MacIntyre(1984) 에 따르면, Aristoteles가 제시하는 friendship은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가 추구하는 목적에 대한 인식의 공유와 목적 달성에의 헌신을 토대로 맺어진 유대감을 의미한다.
이렇듯 시민성은 분리된 개인에게 요구되는 자질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시민에게 요구되는 자질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시민성이라는 개념은 독립된 개인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로 묶여진 사회의 구성원임을 전제한다. 즉, 시민성의 구체적인 모습은 비록 시대와 장소에 따라 서로 다르게 그려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시 대와 특정한 사회에서 형성된 사회적 관계에 근거해서 요청된 자질이라는 점에서 공 통점을 지니고 있다. 달리 말해 시민성은 곧 ‘사회적 관계’에서 요구되는 행위의 표준, 즉 사회적 관계의 맥락에 비추어 요구되는 행동방식인 셈이다. Proctor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관계 또는 사회는 전체(whole)에 해당되고 행위의 표준 또는 시민은 부분 (part)에 해당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는 완성품과 부품의 관 계가 아니라 우주와 소우주내지는 원형과 예의 관계에 있다. 즉, 전체에 포함된 요소 가 부분에도 포함되어 있음을 뜻한다. 다만 사회에 대응하는 전체가 그 자체로 완전 하고 완성적이냐 아니면 변증 과정에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을 뿐이다.
만약 특정한 상황에서 주어진 사회가 그 자체로 완전하고 완성적인 것으로 간주된 다면 주어진 사회가 안고 있는 비합리적인 요소를 드러낼 수 있는 인지적 판단 작용
이 원천적으로 거부된다. 구성원으로서의 시민은 오로지 주어진 사회 즉, 전체를 모방 하고 지향하는 부분으로서의 역할 이외에 달리 전체에 관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Aristoteles나 Cicero등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진 사고방식이기도 하다.1)
다른 사고 방식이 없을 수 없다. Aristoteles나 Cicero와 같이 전체를 그 자체로 완 전하고 완성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부분과의 관계에서 부분의 표준으 로 작용하기는 하나, 전체는 부분에 의해 재평가되고 재해석되어야 하는 불완전하고 진행 중인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이하에서 논의될 시민성의 형식 측면이 전체를 재평가하는 데 작용하게 되며, 아울러 이 때 부분에게 요구되는 시민성이 바로 형식 측면에서의 시민성이 될 것이다. 전체는 부분의 표준이면서 동시 에 부분은 전체를 평가의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전체로서의 사회는 공동체 관계, 가족관계, 사제 관계, 동료 관계 등 MacIntyre가 말 하는 온갖 활동양식(practice)을2) 통해 형성된 모든 관계를 포함한다. 시민성은 나와 타인 관계, 타인과 타인 관계, 나와 공동체 관계, 타인과 공동체 관계 등, 삶의 과정에 서 나타나는 일체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행위의 표준을 의미한다. 가족의 구성원으로 서 가족관계에서 요구되는 행위의 표준이 시민성이며, 동료관계에서 요구되는, 교육 관계에서 요구되는 행위의 표준이 곧 시민성이며, 그리고 지역주민 관계에서 요구되 는 행위의 표준이 시민성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민성이라는 개념은, ‘사회적 관계에서 요구되는 행위의 표준’으 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정의는 시민성이 ‘관계’와 ‘행위’ 그리고 ‘표준’의 세 요소로 구성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세 요소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의미를 지니 고 있다.
첫째, ‘관계’에 대해 말하자면, 시민성은 사회와 분리되어 있는 개인을 상정하는 것 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간주관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주체를 상정한다. 시민성 은 고도에서 사는 사람이나, 수도 정진하는 사람 또는 사회로부터 격리된 정신 질환 자를 상정하여 요구하는 행위의 표준이 아니다. 나와 너의 관계에서부터 나와 공동체 의 관계, 그리고 너와 공동체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공유하는 전통으로 전해지고 있는 삶의 형식에서 행위의 표준이 구해진다. 요컨대, 전체와 부분과의 관계에서 전체를 지 향하는 부분에게 요구되는 것이 시민성인 셈이다.
둘째, 시민성은 궁극적으로 ‘행위’로 나타나야 함을 전제한다. 그 행위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품성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따지는 것은 다음의 문제다. 마치
1) 이러한 사고방식은 전체주의로 연장되는 경우가 많으며, 실제로 현대 정치 사상가 중에는 Aristoteles 에게 전체주의적이라는 비판을 가하는 이가 적지 않다.
2) MacIntyre는 practice를 사회적으로 형성된 공동적인 인간 활동의 일관되고 복합적인 양식으로 본다.
아울러 활동 양식에 적합한 탁월성의 기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활동 양식에 내재되어 있는 가치가 실현되며, 그 결과로써 탁월함에 도달하는 인간의 능력이 확장되고 또한 활동 양식에 내재된 목적가치 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이 체계적으로 확장되는 것으로 본다.
전혀 모르는 어떤 사람의 행위를 설명해야 하는 관찰자가 일차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정보는 자신이 관찰하고 있는 행위 외에 달리 무엇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시민성은 행위자의 의도나 믿음 또는 이유 등에 우선하여 행위를 문제 삼는다. 물론 행위를 보 다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행위와 관련된 맥락을 알아야 하지만 이때의 맥락 역 시 맥락 자체를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다.
셋째, 특정한 사람의 행위를 시민성의 맥락 속에서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은 같은 맥 락 속에서 타인의 행위 역시 시민성에 비추어 동일하게 평가할 수 있음을 전제한다.
이 말은 A에게 적용되는 행위의 표준과 B에게 적용되는 행위의 표준이 같아야 함을 의미한다. 즉, 나에게 적용되는 평가의 틀이 타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자신에게 적용되는 시민성과 타인에게 요구되는 시민성간에 통약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미 그것은 시민성의 세계를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시민성과 아닌 것을 구별해 주는 기준이 있어야 그 기준에 따라 행위를 평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듯 시민성은 ‘관계’와 ‘행위’, 그리고 ‘표준’을 의미 요소로 성립한다. 따라서 시 민성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설명하고 평가한다 함은, 그러한 관점에 관계와 표준, 행 위 등의 요소가 어떻게 가정되어 있는지, 다른 관점과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그 리고 그러한 입장을 따를 때 실제적으로 시민교육에 주는 시사는 무엇인지 등을 따지 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민성을 ‘내용’으로 나타내는 관점과 ‘형식’으로 나타내는 관점으로 구분해서 논의를 전개해 하는 한편, 각각의 관점이 지니는 가정들 을 드러내어 그것이 시민교육에 시사하는 바를 살펴보기로 하자.
사회적 관계의 표준
내용으로 보는 관점
Warnock(1974)은 시민성에 대한 관점을 심리적인 반영(psychological penumbra)으 로 보는 관점, 개인에게 실제적으로 중요한 것(actual importance in the individual)으 로 보는 관점, 보편화 가능성(universalizability)으로 보는 관점, 그리고 일반적 주제 (general topic)로 보는 관점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첫째 관점을 느낌(feel)과 관련된 것으로,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지적 형식에 기초한 원리와 관련된 것으로, 마지막 네 번째는 내용과 관련된 것으로 간주한다. 아울러 자신의 관점이 네 번째 관점 즉, 시민 성을 내용으로 보는 과점에 기초해 있음을 덧붙인다. Chazan(1945) 역시 시민성을 내 용으로 보는 관점과 형식으로 보는 관점으로 대별하고 있는데, 구체적인 덕목이나 규 범 등을 시민성으로 보는 관점을 전자로 분류한다. 물론 내용으로서의 시민성에 담겨 있는 구체적 의미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희랍 사
회에서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데 요구되는 자질에서 덕을 추구했으며, Aristoteles 는 종으로서의 인간에게 부여된 목적(the telos of man)을 지향하는 데 내재된 수단에 서, Franklin은 공리(utility or social well-being)에서, MacIntyre는 활동 양식에 내재 된 목적에서 각각 덕목 내지는 시민성을 추구했다.
이와 같이 내용에서 시민성을 추구하는 관점들이 그 내용의 구체와 의미를 차별화 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민성을 개인에서 비롯되는 것 즉, 행위 주체의 합리적인 판단 과 선택에 시민성을 정초시키는 형식 관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제시되는 표준으로서의 시민성을 전제한 뒤 그러한 시민성을 내면화하여 개인이 지녀야 할 품 성으로 본다는 점에서 공통된 뿌리를 두고 있다. 판단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면화된 품성에서 우러나오는 행위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한 개인의 품성은 삶의 시 작과 더불어 시작되고 삶과 더불어 존재하다가 삶이 끝나는 곳에서 함께 소멸하지만, 한 개인의 원리는 삶의 시작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과 규정성 그리고 공정성을 판단과 추론에 적용할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이 갖추어질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품성에 근거한 행위가 판단에 우선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덕목과 같은 내용으로서의 시민성은 한 개인의 삶이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역사와 사회 속에 존재해 있으며, 개인의 삶은 그러한 역사와 사회가 지향하는 표준을 쫓아 의미있는 시작과 끝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시민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표준을 물려받고 물려주는 사람인 것이다. 물론 물려받은 표준과 물려주는 표준이 같이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물려받은 표준이 사회의 변화에 적합 하지 않거나 또는 비합리적인 경우에 그것은 더 이상 표준으로 작용하지 못하게 되 고, 시민은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표준을 만들어 그 표준에 자신들의 삶을 종속시키 고 그리고 그 표준을 후대에게 물려준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서조차 시민으로서의 삶의 시작은 전대에서 물려받은 표준과 함께 시작되며, 비록 그 표준이 변할 수 있다 하더라도 후대의 시민 역시 같은 과정을 따르게 된다.
이렇듯 삶의 방식으로서 요구되는 행위의 표준을 역사와 사회 속에서 구하는 입장 은 판단에 앞서 따르고 내면화해야 할 구체적 덕목과 같은 내용에서 시민성을 구하는 입장이다. 다만 시민이 따라야 할 행위의 표준으로서의 시민성이 새롭게 변화해 갈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받아들이는 한편, 그러한 변화의 여지를 판단과 선택의 합리 성에 맡긴다.
형식으로 보는 관점
시민성을 형식으로 보는 관점은, 특정한 가치나 덕목 등을 시민성으로 표준화해서 행위 주체에게 전달(transmission)할 수 없다는 데 공통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그 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에는 다음의 두 가지 문제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우선, 특정한 가치나 덕목을 객관화시켜 모든 사람, 모든 사회에 적용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특정한 가치나 덕목은 그러한 덕목이 적용되는 특정한 사회에 한해서 표준 으로 적용될 수 있을 뿐이라는 즉, 상대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의심한다. 예컨대, Kohlberg는, 평가 행위의 사실에 관한 진술내지는 가치에 관한 사실적 진술이 사회에 따라 다르다는 것에 근거하여 가치의 상대성을 도출하고 있는 Skinner의 주장을 문화 적 상대주의와 윤리적 상대주의를 혼돈하는 자연주의적 오류로 간주한다. 즉, Kohlberg는 윤리적 상대주의를 자연주의 오류를 범하는 것으로 비판하면서 윤리적 절 대주의를 주장하는 셈이다.
다음으로 시민성을 형식으로 보는 관점은, 특정한 가치나 덕목을 시민성으로 내세 울 경우 그것이 시민성으로 성립할 수 있는 타당한 근거를 갖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 고 그것을 외적으로 강요하는 교화에 빠져 버린다는 비판을 제기한다. Kohlberg가 덕 목과 같은 내용을 가르치는 입장을 덕목주의(bag of virtue)로 비판하는 것도 이러한 문제 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시민성을 형식으로 보는 관점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내용을 거부하는 대신 모든 판단과 선택의 권위가 개인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는 대안적인 입장을 내세우게 된다. 즉, 일정한 절차와 원리에 따라 주어진 사태에서 요구되는 시 민성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지적 능력을 시민성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판단과 선택은 인지적 활동 영역에 속한다.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 하게 되는 성향 또는 품성과 달리,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자율적인 숙고와 추론을 토대로 결정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시민성이 된다. 따라서 어떠한 판단이 옳은 판단 이며 어떠한 선택이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의 발달을 곧 시민성의 발달로 보는 셈이다. 즉, 시민성은 지적 능력이라는 형식이며, 이러한 형 식 속에 담긴 내용은 처음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행위 주체의 지적 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은 행위주체의 자율적 판단에 의한 선택을 어떻 게 정당화할 수 있느냐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기도 하는데, 이 입장은 이러한 비판 에 대한 답변을 합리성에서 구한다. 즉, 판단의 옳음과 선택의 정당화를 합리성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합리성의 조건을 충족하고 있는 판단과 선택이 옳 음과 정당성을 보장받는다. 이렇게 볼 때, 형식에서 시민성을 추구하는 관점은 선택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관점으로 부를 수 있다.3)
이렇게 시민성을 형식으로 보는 관점이 합리성을 근거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택의 합리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선택을 합리적으 로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 하는 물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대해 선택의 합리성을 중시하는 관점은, 판단 주체가 따라야 할 절차나 원리를 제시한 뒤 그러한 절차나 원 리를 충족하고 있는 선택을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답변한다(Chazan, 1985). 예컨대, 선
3) 합리성과 관련된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지식의 합리성(rationality of knowledge) 이고 다른 하나는 선택의 합리성(rationality of choice)이다. 전자는 주로 실재를 문제 삼는 인식론과 관련되어 있는 반면, 후자는 윤리적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본 장에서 사용하는 합리성은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후자를 의미하는 것임을 밝혀둔다.
택: 자유로운 상황에서 다양한 대안에 대한 충분한 검토를 거친 선택, 소중화: 선택을 공적으로 언명하고 소중하게 여김, 행동: 실행으로 옮김이라는 절차를 제시하는 Raths(1977)나, 보편성(universality)과 규정성(prescriptiveness) 그리고 공정성 (impartionality)을 따라야 할 판단 기준으로 내세우는 Kohlberg(1981), 그리고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을 원초적 입장으로 전제한 뒤 평등한 자유(equal basic liberties), 최소 수혜자의 최대이익(the greatest benefit of the least advantaged), 기 회의 균등(a equality of opportunity)을 합리적 행위자가 따라야 할 원리로 제시하는 Rawls(1971) 등이 바로 이러한 입장에 있는 것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렇듯 선택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입장은 좋은 행동과 나쁜 행동을 구별해내는 데 관심을 갖기보다는 옳은(right) 판단과 그릇된(wrong) 판단을 구별해내는 데 주된 관 심을 둔다. 예컨대, ‘정직은 덕목이고 거짓은 악덕이다.’라는 진술을 회피하는 대신, ‘다 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될 수 있는 입장을 선택하라’
와 같은 보편화 가능성 원리를 충족하는 진술을 요청하게 되는 것이다.
형식과 내용의 관계
이렇게 시민성을 구하는 입장이 구분되기는 하지만, 두 입장의 관계가 대립되거나 배타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시민성의 측면을 달리하는 관계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하에서 논의될 일이지만, 내용으로서의 시민성이 특 정한 사회에서 행위의 표준으로 자리하기까지 합리적 판단 능력에 의존하였음은 물론 이며, 형식으로서의 시민성 역시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는 내용으로서의 시민성에 포 함된 합리적 요소를 기초로 하여 시민성의 새로운 합리적 지평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 문이다. 즉, 형식은 내용을 지향하고, 다시금 내용은 형식의 판단 대상이 되어 형식의 소재로 전환된다. 요컨대, 두 측면은 상보적이며 변증적인지를 각각의 관점에 들어 있 는 가정들을 중심으로 시민성의 요소인 관계와 표준, 그리고 행위와 관련지어 보기로 하자.
첫째, ‘관계’와 관련해서 각각의 관점은 서로 다른 가정을 지닌다. 우선, 덕목 등과 같은 내용으로 시민성을 나타내는 관점은 관계를 사회와 관련지어 그 속에서 구한다.
MacIntyre가 말하듯이, 삶의 형식으로서의 활동양식에는 구성원들이 따라야 할 좋고 나쁨과 우열의 기준이 들어 있으며, 활동양식 그 자체는 유기적인 삶의 모습을 취하 는 가운데 내재적인 가치와 목적을 추구한다. 그리고 활동양식은 그러한 가치와 목적 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일정한 관계를 구성원들이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따라서 활 동양식에 참여한다 함은 활동양식이 요구하는 관계를 표준으로 받아들임을 의미하며, 전통으로 내려오는 삶의 방식에 자신을 종속시키는 것이 된다.
이에 반해, 합리성에 근거하는 지적 판단 형식에서 시민성을 구하는 입장은 관계를
사회 속에서 구하지 않는다. 그 보다는 그러한 관계를 비판하거나 뛰어넘어 자율적이 고 독립적인 판단과 선택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고 그 속에 자신을 종속시킨 다. 전통으로 전해지는 일체의 관계를 따라야 할 표준이 아니라, 해방적 합리성4)을 위 한 평가의 대상이 된다. 기존의 관계에 들어있는 ‘그른’ 관계를 비판하고 ‘옳은’ 관계를 만들어 가는 선택과 창조의 세계인 셈이다. Kohlberg가 말하는 정의의 세계(6단계)가 그렇고, Rawls의 정의의 원칙이 그러하며, Kant의 자율성의 세계가 그렇다.
이렇게 관계를 사회와 분리시키느냐 아니냐에 따라 마음의 통일성과 계속성을 유지 해 주는 역할을 하는 자아에 관한 관점 역시 달라진다. 만약 관계를 사회 속에서 구 하는 내용 측면의 시민성을 중시한다면, 자아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관계를 받아들이 는 외부 지향적인 자아로 존재하게 된다. 자아의 뿌리와 원천은 공동체와 분리된 단 독자의 판단과 선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정체성과 역사적 정체성이 교차하는 유기체적인 전통에 있다. 요컨대, 전통을 자신에 선행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우리와 공 동체에 대한 소속감에서 자아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속해 있는 활동양식의 구성원으로서 활동양식이 요구하는 자아를 지니게 된다. 시민이 된 다는 것은 학생으로서의 자아와 어머니로서의 자아, 직업인으로서의 자아, 그리고 정 치인으로서의 자아 등등 일체의 삶의 형식에 담겨 있는 정체성을 내면화하여 그 속에 서 자아를 추구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관계를 사회와 분리된 판단과 선택 속에 위치시킬 경우에는, 주체로서의 개 별성과 개체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자아는 내부 지향적이 된다. 숙고와 반성을 통한 선택이 없이 자아는 존재할 수 없으며, 역으로 그러한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한 선택 은 이루어질 수 없다. 전체를 지향하는 부분으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자체로서의 완전 과 완성을 지향하는 자아를 내세우는 셈이다. “나는 회의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 다.(cogito, ergo sum)”는 Descartes(1637)의 말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시민성을 보는 측면에 따라 관계와 그에 관련된 자아를 구하는 원천이 달라 진다. 그러나 관계와 자아의 원천이 다르다는 것을 시원적으로 근거를 달리하는 대립 의 입장에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역사가 그래 왔듯이 내부 지향적인 자아는 외부 지향적인 자아가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축을 달리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축에 있으면서 시작하는 지점이 다르고 지향하는 방향이 다를 뿐이다. Kierkegaard가 말하는, '내부 지향적 자아(A Self)를 위한 외부 지향적 자아(The Self)의 파괴'에 담 겨 있는 자아의 의미는, A Self가 공허한 백지 상태에서 출발하는 자아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The Self의 세계를 딛고 새로운 지평을 지향하는 자아를 의미하는 것으 로 보아야 한다(Rosenow, 1989). 즉, 자아는 전체를 지향하는 부분으로 시작하여 다시 금 전체를 뛰어 넘어 부분 그 자체로서 완전과 완성을 지닌 자아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된다.
4) 해방적 합리성은 비판철학 분야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이다. 모든 사회는 불평등한 권력 관계에 기 초한다는 문제 의식에 근거해서, 현존하는 사회구조 및 사회적 관계에 들어 있는 비합리적인 측면을 비판할 수 있는 판단력을 해방적 합리성으로 정의한다.
둘째, '표준‘에 있어서 역시 각각의 관점은 서로 다른 가정을 한다. 덕목을 중시하는 입장은, 행위 주체가 따라야 할 규범적 표준이 있음을 가정한다. 하지 말아야 할 행위 와 해야 할 행위를 구별해주는 기준 즉, 좋고 나쁨의 기준에 의해 설정된 표준적인 행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시민은 그러한 표준적인 행위를 내면화하고 있는 사람이 된다.
이에 반해 합리적인 판단 능력에서 시민성을 구하는 입장은 규범적 표준을 따르기 보다는, 어떤 행위가 옳은 행위인지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인지적 능력을 중시하기 때 문에 판단과 선택 과정에서 요구되는 도덕적 원리나 절차와 같은 인지적, 기술적 표 준을 따른다. 판단 주체의 선택과 결정이 합리적이기 위해서는 이유와 근거가 정당화 될 수 있어야 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관점은 표준의 가정을 달리하고 있지만, 합리성은 규범적 표준의 산실이 면서 동시에 무덤이 된다. 덕목이 규범적 표준으로 자리하기까지 그 기초는 합리성의 주사를 받으면서 만들어진다. 시민성으로서의 덕목은 시원적 또는 선험적인 완전과 완성함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우연적이며 상황적으로 시작된 삶이 합리성의 주사를 받으면서 정련되고 표준화된 삶의 형식으로 탄생하고, 다시금 기존의 삶의 형 식은 합리성의 조사와 평가를 받으면서 삶의 저편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현재적 삶의 형식이 역사의 저편으로 밀려가기까지 구성원들의 관계를 유지해 주고 의미와 맥락을 제공해 주는 원천은 바로 그 현재적 삶의 형식이다. 그리고 구성원들은 그러한 삶의 형식을 표준으로 내면화하는 한편, 그 표준이 끝나는 지점에서 합리성의 세계로 들어 간다.
셋째, 시민성에 대한 두 관점은 ‘행위’와 관련해서 차별되는 가정을 지닌다. 우선 덕 목과 같은 내용을 중시하는 입장은 시민성에 행위가 포함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생각 이나 판단을 시민성의 한 측면으로 보는 관점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이나 판단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역시 행위라고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입장은, 덕목을 지닌다는 말은 덕을 내면화하여 품성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덕목에는 행위로 나타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MacIntyre, 1984;
Frankena, 1989).
MacIntyre가 말하듯이 덕목은 활동양식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요구되는 내재적 수 단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덕목은 행위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맥락 즉, 사회적 배경을 제공해준다. 왜냐하면 활동양식에는 지향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목 적에서 연역되는 우열과 선악을 구별해 주는 기준을 지닌다. 아울러 그러한 활동양식 은 시간적 전통과 공간적 전통을 이어가는 유기적 전통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활동양식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의 행위는 시작과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적 삶의 한 토 막으로서 설명과 이해가 가능해진다. 이렇듯 덕목은 행위로 실천된다는 의미와 행위 에 대한 설명과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는 맥락을 담고 있다.
반면에 시민성을 형식으로 보는 관점은 행위로 실천되어야 함을 전제하지 않는다.
합리성은 이유나 근거와 관련한다. 판단과 선택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지 ‘앎과
실천의 일치’ 여부를 따지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행위를 두고 합리적이라고 평가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행위를 평가하는 말이 아니라, 행위의 이면에 들어 있는 이유와 근 거가 합리적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합리성이 행위를 포섭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합리성이 행위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방식들 간에 갈등을 일으키거나 전혀 새로운 방식의 행위가 요구되는 상황이 발생하여 전통으로 내려오는 삶의 형식이 당장에 요구되는 행위의 지침을 제공하지 못하게 되거나, 전통적인 삶의 형식이 외래의 삶의 형식과 접촉하게 될 경우, 그러한 전통은 합리성에 의한 조사와 평가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이러한 과 정을 통해 전해오던 전통으로서의 삶의 형식은 새로운 전통으로서의 삶의 형식으로 변화한다. 즉, 합리성은 현재의 행위를 평가 대상으로 삼아 장래의 행위를 위한 방향 을 안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결 론
시민성 개념은 두 측면으로 나누어지며 각각의 측면에 들어있는 가정들이 서로 다 르지만, 양자의 관계는 갈등적이거나 배타적이기보다는 변증적이며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 아울러 양자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시민교육에 시사하는 의미는 달라진다. 양자를 배타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볼 경우, 시민성을 사회에 근 거하는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개인성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것이 교육 실천에 지니는 함의는 차별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민성이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것은, 시민교육은 활동양식에 내재된 덕목과 사회적 실행에 담겨 있는 관례를 따르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 되며, 반면에 개인의 사고와 선택 속에 시민성을 정초하는 것은, 시민교육은 덕목과 관례를 목적으 로 삼기보다는 이들을 판단과 평가를 위한 소재로 삼아 합리성을 지니게 하는 데 목 적을 두게 될 것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경우에 시민교육은 어느 한편에서 다른 한편 을 배척해야 하는 선택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에 반해, 양자를 모두 시민성으로 간주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즉, 덕목을 목적 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합리성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가능한지를 묻는 말이다. 이 말 은, 덕목을 목적으로 삼음은 덕목을 지향함이고 합리성을 목적으로 삼음은 덕목을 수 단으로 삼음을 의미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배타적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시민교육의 목적이 될 수 있는지를 의심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시민성과 시민교육의 목적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것과 관련된다. 즉, “시민교육의 목적은 시민성 을 기르는 데 있으며, 시민성은 덕목과 합리성이다.”라는 진술에서 비롯된 질문이다.
얼핏 패러독스처럼 보이지만 이는 풀리지 않은 갈등의 패러독스가 아니라 변증 관 계에 있는 패러독스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어느 한 쪽도 다른 쪽에 의존하지 않고
서는 그 자체로 완성과 완전함을 구가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이 덕목과 합리성은 축을 달리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을 달리한다. 덕목은 합리성의 주사를 받아 삶의 형식으로 자리하게 되며, 다시금 덕목은 합리성의 조사를 받아 보 다 완전하고 보다 완성된 삶의 형식으로 자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세대 를 이어가는 유기적인 전통의 양식 속에서 변증적으로 통합된다.
따라서 시민성으로서 덕목과 합리성을 배운다는 것은 현재적인 삶의 형식으로서의 덕목을 배우면서 동시에 그러한 덕목에 들어 있는 합리성을 함께 배우는 것이 된다.
덕목에 내재되어 있는 합리성에 의존하지 않은 채 덕목의 껍질만 배운다는 것은 바둑 을 배우는 사람이 정석을 기계적으로 암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나의 정석이 바 둑계의 표준이 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흑백 간에 최선의 경쟁을 벌였을 때 얻을 수 있는 결과라는 의미를 전제하는 것이며, 이는 그만큼의 합리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의 미한다. 따라서 바둑계에 입문하는 사람에게 있어 정석은 따라야할 표준이 되며, 정석 을 표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정석의 수순에 들어 있는 최선의 판단 형식 즉, 합리성을 함께 배움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석은 당분간의 표준이다. 표준으로서의 정석을 끝낸 사람에게 있어 정석 은 표준이 아니라 판단과 평가의 대상이 된다. 그는 정석을 수단으로 삼아 보다 완전 하고 완성된 새로운 정석을 지향하는 세계로 입문하여 합리성을 끊임없이 추구하게 될 것이다. 시민성으로서 덕목 또한 마찬가지다. 시민은 덕목을 표준으로 삼되 합리성 에 의존하여 덕목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덕목과 그 속에 내포된 합리성을 배우고 난 연후에는, 덕목은 더 이상 표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뛰어넘어야 할 대상이 되며, 이제 그 일은 합리성에 맡겨진다.
Kohlberg가 말한 3단계(상호 기대 및 동조의 단계)는 2단계가 지향하는 표준이며, 동시에 4단계의 판단 대상이다. 그리고 각각의 단계는 그만큼의 합리성을 지니고 있 으며 또한 그러한 합리성의 주사를 받아 형성된 전통으로서의 삶의 형식이 공존한다.
3단계는 상호 기대와 동조라는 삶의 형식과 그에 대응하는 합리적 판단 형식이 공존 한다. 3단계의 삶의 형식을 배운다는 것은 그에 대응하는 합리적인 판단 형식에 의존 해야 함을 요청하며, 그런 연후에 3단계의 삶의 형식은 4단계의 합리성과 삶이 형식 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 요컨대, 일체의 삶의 형식에 입문하는 사람에게 있어 표 준은 전통으로서의 삶의 형식이며 그러한 표준에 도달하는 방법은 합리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Socrates는 사약을 마시며 삶의 형식 즉, 시민이 따라야 할 표준은 덕목이나 관례 등과 같은 사회적 실행임을 보여 주었으며, 동시에 그러한 삶의 형식이 비합리적임을 악법이라는 말로 대신했다. Toulmin(1989) 역시, 사회를 평가하는 틀은 합리성이지만 개인의 행위를 평가하는 틀은 사회적 실행이라며, 삶의 형식에 입문하는 시민이 따라 야 할 표준이 사회적 실행에 있음을 주장한다. 이렇듯 Toulmin이 말하는 사회적 실행 과, Socrates가 말하는 악법은 시민성의 표준이 된다.
그러나 사회적 실행과 악법은 평가되고 개정되어야 한다. 평가와 개정은 표준을 따
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표준을 판단하고, 새로운 표준을 선택하는 것을 의 미한다. 그리고 이 일은 합리성을 추구하는 일 외에 다름이 아니다. 시민은 표준을 따 르는 세계로 들어가서 표준을 극복하는 세계에 존재한다. 따라서 시민교육은 바로 이 와 같은 세계로 사람들을 안내하는 것이며, 그러한 세계로 안내하는 방법은 개별자로 서의 시민에게 생래적으로 잠재해 있는 합리성에 의존하는 것이어야 한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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