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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지천 최명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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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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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양명학의 주체성과 창조정신 7주차】

7. 지천 최명길의

주화론

(2)

1. 遲川 崔鳴吉

▷ (1586~1647)

▷ 字: 自謙, 號: 遲川, 滄浪

▷ 牛溪와 栗谷 계통의 李恒福과 申欽의 문인

▷ 조익, 장유, 李時白과 교유, 남언경 및 장유와 동서간

▷ 仁祖反正(1623)에 참여

▷ 병자호란(1636) 때 講和(和議)를 주장,

▷ 鄭齊斗는 최명길의 형 최래길의 외손서

▷ 崔錫鼎(孫)과 崔崑崙(曾孫) ⇒ 黨禍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최 명길이 양명학자임을 부인

2. 양명학 수용

① 당시 名分만을 고집하는 주자학자 비판 ☞ 心의 주체적 � 實質적 태도 중시

대저 名은 實의 그림자이니, 名分만을 따라 그 實質을 책망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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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는 것이 많을 것이다. 形迹은 마음이 드러난 것이니 形迹만을 고집하여 마음을 구한다면 잃는 것이 또한 많을 것이다. … 아아!

지금 세상 사람들이 숭상하는 것은 名分이요, 臣이 힘쓰는 것은 實質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논하는 것은 形迹이요, 신이 믿는 바 는 마음입니다.(遲川集, 권8, �疎箚 論典禮箚�)

② 양명의 心卽理說과 良知說 수용

☞ 心本體의 작용은 動靜을 一貫하여 부단히 天地流行과 하나 로 合한다고 봄

네 편지에 이르되 “ 본래면목本來面目이 오직 황홀恍惚한 사이 에 희미하게 보일 뿐이니 공부가 익지 못하여 그런가 합니다”

라고 하였으니, 네가 능히 이러함을 깨달았으니 그 동안 점검點 檢, 성찰省察한 공功을 알 수 있다. 깊이 기뻐한다. 양명서陽明書 에 이르기를 “ 심心은 본래 활물活物이라. 오래 수착守着할 것 같으면 마음 위에서 병이 날까 걱정한다” 라고 하였으니 반드시 친절하게 본 바 있고, 또 자기가 체험하여 분명하기에 이렇게 말 한 것이라. 양명은 고명함으로도 이런 걱정이 있거늘 하물며 너 야 모진 역경에 있으니 어찌 평인平人같이 태평할 수 있겠느냐?

이때에 급히 각고하는 공부를 하여 지나치게 지수持守하면 혹 다른 병이 날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심상尋常한 언동에 라도 때때로 정신 차려 수습하여 이 마음으로 하여금 놓이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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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고 가끔 정좌靜坐 묵관黙觀하여 천기天機의 묘함을 인취認取 하여라. 언제든지 내 마음의 체體로 하여금 연비어약鳶飛魚躍하 는 천天에 합하게 할 것 같으면 비록 갇힌 속에 있을지라도 스스 로 영귀무우咏歸無雩의 취향이 있을 것이라, … 이른바 본래면목 本來面目이란 언제나 허명虛明�징철澄澈한데 들어 있어 희노애 락喜怒哀樂 사이에 나타나는 것이니, 이러한 까닭에 옛 사람들 이 용공用功함에 있어 동정動靜을 하나로 보는 것이다. 일월日 月 한서寒暑의 대사, 풍운風雲 연우煙雨의 변태變態 어떤 것이 나 다 도체道體의 유행인 동시에 내 마음의 작용으로 더불어 어 울려 하나이니 깨달음이 여기 이르러 항상 체인體認하게 되면 희미하던 것이 자연히 분명할 것이며 황홀할 사이라 하던 것이 자연히 항구 순숙純熟할 것이다.(�寄後亮書�)

사람에 이 마음(心)이 있으니 그 理는 그 가운데 있다. 비어서 밝 고, 맑아서 한결같은데 이에 感通있더라.(�雜著�復箴�)

良知의 天은 하루아침에 깨치니 엄폐할 수가 없다.(�論典禮箚�)

▶ 양명은 本來面目이 良知이며, 七情이 良知와 일원적 체계를 지닌다고 봄

本來面目은 이른바 우리 聖門의 良知이다.(傳習錄(中), �答陸 原靜書�, 162조목)

기쁨�노여움�슬픔�두려움�사랑�미움�욕망을 七情이라 한다. 七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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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사람 마음이 지니고 있는 것이니, 다만 양지를 명백하게 알 아야만 한다. … 七情이 그것의 자연스런 흐름에 따르는 것은 모 두 良知의 작용이니, 그것을 선악으로 구별할 수는 없지만, 거기 에 집착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다만 七情에 집착함이 있으면 그 것을 모두 욕망이라 하는데, 그것은 모두 良知를 가로막는 것들 이다. 그러나 七情에 집착함이 생겨날 때는 良知도 스스로 그것 을 깨달을 수 있으며, 그것을 깨달으면 가려진 것은 즉시 제거되 어 그 본체를 회복하게 된다.(傳習錄(下), �黃省曾錄�, 290조 목)

獨知를 주장

남은 모르는데, 自心이 獨知한다.(�雜著�復箴�), 自心의 眞妄은 自心이 안다.

▶ 왕양명의 獨知와 良知

無事時에도 진실로 ‘ 獨知’ 요, 有事時에도 또한 獨知이다. 사 람이 만약 홀로 아는 곳(獨知)에서 힘쓸 줄 모르고 사람들이 모 두 아는 곳에서만 힘쓴다면 곧 거짓을 꾸미는 것이며, 바로 “ 군 자를 만난 뒤에 계면쩍어 하는 것이다.” 이 홀로 아는 곳이 바 로 성실함의 싹이다.(此獨知處便是誠的萌芽) … (傳習錄(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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薛侃錄�, 120조목)

이른바 “ 다름 사람은 비록 알지 못하더라도 자기 홀로 안다”

(人雖不知, 而己所獨知)는 것, 이것이 바로 내 마음의 良知이다.

(傳習錄(下), �黃以方錄�, 317조목)

3. 병자호란(1636) 淸과의 和親을 주장(主和)

☞ 위난 시 고착화된 義理 � 名分보다 국가의 존립을 위해 權道를 따름

병자년(1636) 12월 22일 오랑캐의 사신이 또 와서 和親을 청하 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정축년(1637) 1월 3일 김류가 최명 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 나의 뜻은 그대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으나 다만 선비들의 공론을 어찌할꼬?” 하니, 최명길이 말하 기를 “ 우리들은 비록 만고의 죄인이 될지라도 반드시 임금이 망할 줄 알면서도 차마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오늘의 和親은 아니 하지 못할 것이요.” 하고 홍서봉과 이경직을 오랑캐에게 보냈다.

18일에 적이 남문 밖에 와서 소리질러 말하기를 “ 和親을 하고 자 하거든 속히 나오고, 하고자 하지 않으면 19일과 21일에 마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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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決戰하자.” 하고, 또 북문에서 소리질러 말하기를 “ 속히 나 와 말을 들으라.” 하였다. … (홍서봉과 최명길이 글을 보내 和親 의 뜻을 전하였다.) … 金尙憲이 이 글을 보자 찢어 버리고 실성 통곡을 하니 소리가 임금의 거처까지 들렸다. 최명길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 선대부(최명길의 부친)는 자못 명성이 士友간에 자 자하였는데 公의 무리들은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는가?” 하니, 김류는 잠자코 있었다. 최명길이 말하기를 “ 어찌 대감을 보고 옳지 않다 하리오마는 이는 부득이한 것입니다.” 李聖求는 몹시 노하여 김상헌에게 말하기를 “ 대감이 전부터 和親을 배척하여 나라 일을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하였으니 비록 후세에 이름을 중 하게 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 임금과 종묘사직은 어찌 하란 말 이요. 대감은 어찌하여 나가서 적에게 義로 대항하지 못하오?”

하였다. 이에 김상헌이 말하기를 “ 나는 한번 죽음이 있을 뿐이 나 자결하지는 못하였다. 만일 오랑캐 진영으로 보내 주면 죽을 곳을 얻을 것이로다. 대감은 어찌하여 나를 묶어 내어주지 않으 오?” 하니, 최명길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기를 “ 대감은 찢었 으나 우리는 마땅히 이것을 주어야 한다.” 하고, 오랑캐에게 보 내는 답서를 주워 모아 이어 붙였다. 김상헌은 기거하고 있는 집 으로 물러가 비로소 먹을 것을 물리치고 스스로 반드시 죽기로 기약하고 사람을 보면 반드시 울었다. 이성구가 문을 나가니 申 翊聖은 칼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 和親의 의논을 주장하는 자는 내가 이 칼로 베리라.” 하였다.(이긍익, 練藜室記述, 권 25, �丙子胡亂 丁丑南漢出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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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년(1642)에 최명길이 (중국) 심양에 들어가 북관에 갇히었다 가 계미년 4월 남관으로 옮기어 구류되었다. 최명길과 김상헌은 다만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 방에 갇혀 있었다. …

최명길이 처음에 김상헌이 이름을 낚으려는 마음이 있다고 의심 하여 정승에 추천됨을 깍아 버리기까지 하였는데, 이때 같이 因 禁되어 있으면서, 죽음이 눈앞에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의젓한 모습을 보고 드디어 그의 節義를 믿고 마음속으로 탄복 하였다. 김상헌도 또한 처음에는 최명길을 옛날 남송의 秦檜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였었는데, 그가 죽음을 걸고 스스로 뜻을 지키며 흔들리거나 굽히지 않는 것을 보고, 또한 그의 뜻이 오랑 캐를 위함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에 두 집안이 서로 공경하고 존중히 여겼다.

김상헌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 兩代의 우정을 찾고 백년의 의심 을 푼다” 라고 하였고, 최명길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 그대 마음 돌 같아서 돌리기 어렵고 나의 道는 고리 같아 경우에 따라 돈 다.” 고 하였고, 또 “ 장차 정승의 자리에 德과 功業이 새롭기를 기 다린다.” 하였는데, 이는 진심으로 함께 정승의 지위에 오르기를 기약하는 뜻이요, 무단히 한 말은 아니다.

최명길이 심양의 옥에 있을 때 일찍이 김상헌과 함께 經과 權에 대하여 강론하였다. 김상헌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 성공과 실패 는 天運에 달린 것이나, 모름지기 義를 살펴 돌아갈지어다. 비록 아침과 저녁이 뒤바뀐다 하더라도, 어찌 치마와 저고리를 거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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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손가. 權(權變)이란 賢者도 그르치기 쉽지만, 經(經常)은 마 땅히 여러 사람이 어길 수 없는 것이라. 사리에 밝은 그대에게 부쳐 말하노니, 아무리 급하더라도 저울질은 삼갈지어다.” 하였 고, 최명길 또한 시를 지어 말하기를 “ 고요한 곳에서 뭇 움직임 을 보니, 참으로 원만한 귀결을 이루었도다. 끓는 물이나 얼음도 모두 물이요, 가죽옷이나 칡베옷도 모두 옷 아닌 것이 없도다.

일이야 혹 때에 따라(隨時) 다를지라도, 마음이야 어찌 道에서 어긋나랴. 그대 능히 이 이치를 깨닫겠거니, 語黙간에 각기 天機 가 있는 것을“ 하였다.(이긍익, 練藜室記述, 권26, �審獄諸因�)

▷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 이대 양난은 조선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분기점이 된다. 주자학이 그 현실적 한계를 노정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또한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實學 이 대두되는 기점이 된다.

▷ 최명길 당시의 주자학적인 정치 분위기는 전적으로 관념적인 名分論에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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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천 최명길에게> - 김상헌

성공과 실패는 天運에 달린 것이나 모름지기 義를 살펴 돌아갈지어다.

비록 아침과 저녁이 뒤바뀐다 하더라도 어찌 치마와 저고리를 거꾸로 입을 손가 權(權變)이란 賢者도 그르치기 쉽지만

經(經常)은 마땅히 여러 사람이 어길 수 없는 것이라.

사리에 밝은 그대에게 부쳐 말하노니 아무리 급하더라도 저울질은 삼갈지어다.

<청음 김상헌에게 화답하며> - 최명길

고요한 곳에서 뭇 움직임을 보니 참으로 원만한 귀결을 이루었도다.

끓는 물이나 얼음도 모두 물이요

가죽옷이나 칡베옷도 모두 옷 아닌 것이 없도다.

일이야 혹 때에 따라(隨時) 다를지라도 마음이야 어찌 道에서 어긋나랴.

그대 능히 이 이치를 깨닫겠거니 語�간에 각기 天機가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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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尙憲의 斥和와 최명길의 主和

斥 和 主 和

주 자 학 양 명 학 현실적 삶의

當爲적 가치

현실적 상황과 주체의 합치 春秋大義와 名分 事功과 隨時變易 常道 = 經常 權道 = 權變

※ 丙子胡亂에 있어서 [斥和]와 [主和]의 역사적 의미

☆ 淸陰 金尙憲(1570-1652)은 斥和를 주장 - 김상헌의 학문바탕 은 주자학 : 주자학의 존재론적 本體(理)의 확립을 통하여 현실 적 삶의 당위적 가치를 정립한다. 그러므로 삶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문제보다는 그러한 문제가 야기되 는 논리적 근거로서의 名分과 義理 같은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가치의 문제를 더욱 중시하게 되어 외세의 침략과 같은 국가적 위기를 당할 때는 명분과 의리를 통한 殺身救國의 정신이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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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될 수 있다. 병자호란을 통해 나타난 김상헌의 입장 또한 의 리와 명분을 통한 주체성의 확립에 있었다. 김상헌이 평소에 추 구하고자 한 것도 大義와 名分이었다.

大義가 있는 곳에는 털끝만치도 구차스러워서는 아니된다. … 古 人의 말에 ‘ 신하는 군주에 대하여 義를 따르는 것이지 命을 좇 는 것이 아니다’ 라 하였으니, 士君子의 出處進退가 어찌 오직 義에 돌아 갈 뿐이겠는가? 禮義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명령만 따르는 것은 곧 아녀자나 侍官의 忠이다.(淸陰集, �豊岳問答�)

이같이 김상헌의 大義와 名分을 통한 주체사상은 병자호란을 당하여 죽음을 불사하는 <斥和論>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인데, 그의 <斥和論>은 義理를 높임으로써 스스로의 주체의식을 사수 하려는 주자학적 의리사상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 遲川 崔鳴吉은 主和를 주장 - 主和의 사상적 근거는 양명학 : <主和>의 논리는 이념적 大義보다는 현실을 중시하여 현실적 상황과 주체가 합치된 곳에서 그 해결책을 찾으려는 실리적 입 장이었다. 그러나 최명길은 <主和論>이 大義와 名分을 도외시 한 채 實利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世儒들의 지탄 속에서, 자신 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3)

이 이렇게 和親을 주장하는 것이, 是非를 고려하지 않고 단지 利害로만 아뢰어 전하를 잘못 인도함이 아닙니다. 현 정세를 참작 하고 義理를 裁量하며, 先儒들의 定論에 考證도 해 보고, 祖宗께 서 행하신 史跡을 참고하여, 이렇게 하면 반드시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고, 이렇게 하면 백성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며, 이렇게 하면 道理에 해로울 것이고, 이렇게 하면 事理에 합당할 것임을 익히 생각하여, 그것이 꼭 옳다는 自信이 서서 아뢴 것입니다. (遲川 集, 권11, 丙子封書 제3)

대개 道에는 正道와 覇道가 있고, 일에는 輕하고 重한 것이 있으 니 義도 때에 따라 달라집니다.(義亦隨之) 성인께서 주역을 지을 때에 中道를 正道보다도 귀하게 여긴 것도 이런 까닭입니 다. 그러하오니 이치를 똑바로 보고 德이 두터운 군자가 아니면 뉘라서 능히 경우를 짐작하고 소견을 굳게 지켜서 한 세상의 일 을 처리하겠습니까? ( 丙子封書 제3)

▷ 그에 의하면 그의 主和論은 단순히 實利的 사고에서 나온 것 이 아니라 義理의 재량을 통해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 는 義理란 다음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대개 알 수 없는 것이 世變이고 한없는 것은 義理입니다. 천하 가 무사할 때에는 삼가 정상적인 법만을 지켜 가니 현명한 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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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사람이 동등한 길로 귀일할 수 있사오나, 난리로 역경을 당 하여 어찌할 수 없을 지경에는 변통성이 있어서 道와 함께 행하 여야 바야흐로 聖人의 큰 權道라 할 수 있습니다. ( 丁丑封書 제2)

▷ 최명길에 의하면 의리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것은 常道와 權道이다. 治世에는 常道로써 가능하지만 亂世에는 현 실적 상황에 입각한 변통성 있는 權道가 중요하다. 최명길이 추 구하였던 의리는 權道로서의 의리였다. 최명길도 <主和>로 말 미암아 그의 신변에 닥쳐 올 괴로움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에 ‘화친을 주장한다<主和>’는 두 글자가 신의 일평생 신변의 累가 될 줄로 압니다. 그러하오나, 신의 마음은 아직도 오늘날 和 親하려는 일이 그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 丙子封書 제3)

▷ 그러나 최명길이 자신에게 닥쳐올 불명예를 감수하고 <主和>

를 주장하게 된 배경에는 이념적 명분보다는 국가와 백성을 수 호하려는 현실에 대한 그의 주체적 판단이 전제되어 있었던 것 이다.

자기의 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경망하게 큰 소리를 쳐서 오랑캐 들의 노여움을 도발, 마침내는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묘와 사 직에 제사지내는 일조차 못하게 된다면 그 허물이 이보다 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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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겠습니까? ( 丙子封書 제3)

▶ 왕양명의 隨時變易과 因時制宜의 義

中은 다만 天理이고, 易이다. 때에 따라 변역[隨時變易]하니 어 떻게 고집할 수가 있겠는가? 모름지기 때에 따라 마땅함을 제정 [因時制宜]해야 하니, 미리 하나의 표준(規矩)을 설정하기가 어 렵다. 예를 들어 후세의 유자들이 도리를 하나하나 빈틈없이 설 명하려고 하나의 격식을 설정하는데, 이것이 바로 한 가지를 고 집[執一]하는 것이다.(傳習錄(上), �陸澄錄�, 52조목)

義는 곧 良知니, 良知가 두뇌라고 하는 것을 알면 바야흐로 집착 이 없게 된다. 또한 예를 들어 사람이 보내준 선물을 받는 경우 또한 오늘은 마땅히 받아도 되나 다른 날에는 마땅히 받아서는 안되는 경우가 있으며, 또한 오늘은 마땅히 받아서는 안되나 다 른 날에는 마땅히 받아도 되는 경우가 있다. 네가 만일 오늘 마 땅히 받아도 되는 것에 집착하여 일체를 받으며 오늘 마땅히 받 아서는 안되는 것에 집착하여 일체를 받지 않는다면, 이는 곧 어 느 한쪽에만 마음을 전적으로 기울이는 것으로 良知의 본체가 아니니, 어떻게 義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傳習錄(下), �黃省曾 錄�, 248조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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