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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이렇게 비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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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이렇게 비유했다

李 炳 郁*

Freud Compared Like This

Byung-Wook Lee, M.D.*

서 론

한 평생을 바쳐 정신분석의 기초 및 그 기둥을 세웠던 프 로이트는 실로 방대한 저술을 통하여 자신이 이룩한 업적의 실체를 전달하려 애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 지성사 를 통털어 프로이트만큼 오랜 기간에 걸쳐서 그토록 끈질긴 오해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이에 대하여 Freud(1933)는 말하기를,“우리가 지핀 불 위에서 자기들의 수프 냄비를 데우고 있는 심리학자들과 심 리치료사들-우리의 작업에 대해 진실로 고마워하지도 않으 면서- 또 과학의 놀라운 결과들을 독점해버리는 습성이 있 는 학자들, 그리고 일반 대중들에 의해서 꿈이론이 얼마나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물어 보십시오. 그 대답은 결코 만족 스럽지 못합니다.” 라며 은근히 불만을 털어 놓았는데, 이는 불확실성에 대해 참지 못하는 대중들의 조급성과 편협성에 일침을 가한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신분석에 대해 적대 적인 세상의 몰이해 및 편견에 맞서 대항하는 외로운 전사 의 모습이기도 하다. 앞서 인용한 프로이트의 말에서 보듯 이 그가 애써 지핀 불 위에 아무런 양해나 고마움의 표시도 없이 부당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수프 냄비를 데우며 도용하 는 수많은 학자들과 치료자들에 대한 불만은 오늘날에 와서 도 여전히 제기되는 문제라 하겠다. 그리고 프로이트의 재 치있는 이러한 비유는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그 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프로이트의 독특한 독일어 문체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평자들이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저자의 실력으로는 평가 할 수 없는 부분이기에 그 대신 여기서는 수많은 저술 등을

통해 드러난 그의 재기 넘치는 비유에 중점을 두어 논의를 진행시켜 보고자 한다. 흔히들 프로이트에 대한 인상을 말 할 때, 너무도 완고하고 근엄하여 손쉽게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인물로 평가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이러한 태도 역시 일종의 전이적 감정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실 제로 프로이트 자신은 비록 냉소적인 경향도 없지는 않지만 유머 감각이 풍부했던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물론 프로 이트 자신이 이미 밝힌 바 있듯이 모든 농담의 근저에는 상 당한 적개심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프로이트의 여러 비유들 은 매우 적절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기저에는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어려운 프로이트 자신의 복잡미묘한 정서적 요인 들이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프로이트의 여러 다양한 비유적 표현들을 통하여 그가 진정으로 전하고 자 했던 의미가 무엇인지 탐색해 보고자 한다.

본 론

프로이트의 비유

프로이트는 말하기를, 정신분석의 진정한 효시는 자신이 아니라 브로이어라고 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 르기까지 그 말을 진실로 믿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아 무도 믿지 않을 그런 말을 프로이트가 굳이 한 이유는 무엇 일까. 겸손에서 우러나온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겸손 은 곧바로 진심이 아니라고 간파당할 것이 분명하다. 프로 이트 자신은 분명히 그 스스로를 정신분석의 창시자로 믿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앞의 언급은 다분히 정치적인 수사학에 가깝다. 아무리 프로이트 자신이 그렇게 말하더라 도 세상이 인정하지않을 것임을 굳게 믿는 바가 있었기 때 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 이처럼 말이란 매우 복잡미묘한 심리적 배경을 띄우기 마련이다.

Edelson(1983)은 1930년 프로이트에게 수여된 괴테 문 학상의 의미에 대하여 논하면서 전혀 새로운 과학적 이론의

접수완료:2008년 7월 7일 / 심사완료:2008년 7월 21일

*翰林大學校 醫科大學 精神科學敎室

Department of Psychiatry, College of Medicine, Hallym University, Seou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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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시자인 프로이트로서는 자신의 이론을 대외적으로 납득 시키고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비유를 동원할 수 밖 에 없었으며 따라서 괴테상이 주어진 이유도 그 어떤 화려 한 수사학적 문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탁월한 비유법 에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뛰어난 비유를 동원하여 그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론을 보다 손쉽게 이해시킬 수 있었으며 동시에 서구 지성사에 있어서 자신의 위치를 더 욱 확고히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Pederson-Krag(1956) 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이미 밝힌 바 있다. 동시대인들이 손 쉽게 경험할 수 없을뿐 아니라 인식하기도 어려운 심리적 체계를 단순한 말과 글로서 전달하기란 실로 어려운 작업임 에 틀림없으며 더욱이 매우 추상적인 용어를 동원하여 이해 시켜야 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프로이트는 자신의 학설을 입증하는데 큰 어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그 의 적절한 비유는 그러한 난관을 극복하는데 상당한 도움 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주로 공식과 도표를 이용하여 새로운 이론과 가설을 설명하고자 하는 물리학자 들은 보다 수월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이론을 이해시킬 수 있 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Wurmser(1977)는 모든 과학에 유일한 단독의 방법론이란 있을 수 없으며, 어떠한 과학도 추상적 상징 차원의 비유를 동원하기 마련이라고 하면서 특 히 정신분석이론에 과학적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다고 주장 하는 급진적 경험주의자들의 비판을 반박하였다.

방대한 저술 활동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프로이트의 매 우 재치있는 수사적 비유법을 탐색하다 보면 흥미롭게도 프 로이트의 내면세계 또한 엿볼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놓았 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만큼 많은 기록을 남 긴 인물은 자기 노출의 위험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다. 정신분석의 미국 상륙을 페스트의 위험에 비유한 점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적이 있다. 속물적인 미국사회에 대 한 혐오감의 표시라거나 정신분석운동의 야심을 드러낸 표 현이라는 둥, 여러 말들이 많았으나 프로이트가 진정으로 의도했던 바는 정신분석이론의 순수성이 낙천적인 기질의 미국인들에 의해 엉뚱한 방향으로 변질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우려는 실제 로 그렇게 되었다. 중세 유럽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집단 적인 학살의 대상이 되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페스트에 살 아남은 유일한 사람들 가운데 유대인들이 많다는 사실이 알 려지게 되면서 그들이 우물에 독을 넣어 사람들을 죽게 만 들었다는 소문이 전유럽에 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만 해도 유럽인들의 위생상태는 불량하기 그지 없었으나 유 대인들만큼은 전통적으로 청결한 위생상태를 유지하며 살았 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페스트의 위험에서 벗어

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는 생물학적 페 스트가 아니라 정신적 페스트의 위험에 대해 누구보다 민감 한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의식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 영향력의 실체를 규명하고 자 했던 프로이트 입장에서는 아무도 본 적도 없으며 보려 고도 하지 않는 미지의 영역에 대해 애써 설명하고 이해시 킨다는 일이 얼마나 힘겹고 곤혹스러운 일인지 실감했을 것 이다. 의식과 언어를 넘어선 세계를 말과 글의 힘을 빌려 이 해시키려 한다는 작업 자체가 어쩌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그런 불가능한 사명 을 자청해서 떠맡고 험난한 여정의 길을 떠난 것이다. 그 길 은 시련과 고통에 가득찬 가시밭길이기도 했다. 그리고 보 이지도 않으며 인식할 수도 없는 세계를 나름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비유가 동원될 수 밖에 없었다.

운명과 환경

프로이트에 대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그가 환경적 요인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리비도 발달에만 근거하여 모든 신경증 을 설명하고자 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프 로이트의 저술 내용을 자세히 읽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사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극단적인 환경론자들에 의해 의 도적으로 왜곡된 사실들이 널리 전파됨으로써 이러한 오해 는 더욱 증폭되어 온 감이 짙다. Freud(1917)는 매우 부 유한 집주인과 신분이 낮은 문지기의 딸들에 대한 비유를 들어 환경적 요인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 다. 즉 서로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 자란 집주인의 딸과 문지 기의 딸은 리비도 발달의 관점에서 그 운명이 서로 다를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환경의 중요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신분의 차이는 양육방식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이처럼 너 무도 당연한 현상을 프로이트가 무시할 리가 없다. 그러나 이런 해명에 의해서도 역시 끈질긴 시비를 잠재우지는 못한 다. 계급적 차이를 용인 내지 두둔하는 부르조아적 발상이라 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입에서 나 오는 말이라면 무조건 시비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그러 나 개인적 인격 발달과정의 중요성뿐 아니라 환경적 요인 또 한 과소평가할 수 없다는 말은 매우 지당하고도 융통성 있 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분법적 흑백논리에 젖어있 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주장이 성에 찰 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부가적인 해명이 또 필요해진다.

Freud(1912a)는 자질(endowment)과 운(chance)이 삶 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하면서 기질적 요인과 우연적 요인이 함께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는 주장하기를, 일반적으 로 하나의 요인에 여러 가지 원인이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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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사람들은 하나의 원인만 생각한다고 지적하면서 모든 사람

은 타고난 소질과 아동기 성장 경험의 결합된 작용으로 독 자적인 개성을 얻는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따라서 마치 프 로이트를 필연적인 운명론자인 것처럼 사실을 호도하고 우 연성 및 동시성을 주장했던 융 학파의 입장과 매우 극단적 인 대립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비치게 만든 것은 프로이트 자신이 원래 취했던 입장과는 실제로 다를 뿐만 아니라 그 가 원했던 바도 아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Waelder(1960) 의 심도있는 논의가 유용하다. 그는 프로이트가 신봉했던 인 과론적 견해는 모든 과학의 기본 입장이라고 하면서 추상적 인 형이상학으로 흐를 수 밖에 없는 인간 심성 연구의 제약 을 뛰어넘어 과학지향적이고자 했던 프로이트의 노력은 당 연히 그 정당성을 얻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과 연 숙명론자였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많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이 팔자소관인가 아니면 본인의 자유의지에 달렸는가 하는 식으로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 로 간단히 다루어질 문제가 아니다. 프로이트 역시 매우 신중 한 인물이었기에 그런 식의 단순논리로 인간의 운명을 다루 지는 않았다. 물론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매우 회의 적인 입장을 취했다. 비록 그가 반복강박 개념에 입각하여 숙명 노이로제(fate neurosis)라는 용어를 사용하긴 했지 만 그것은 인간의 운명을 믿어서가 아니라 여러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신경증적 특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 다. 실제로 프로이트 본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는 도전을 통하여 자신이 꿈꾸 었던 학문적 대업을 성취해낸 장본인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에게는 행운과 불운이 동시에 따라 다니기도 했다. 유대 인 신분이기 때문에 대학교수가 될 수 없다는 불운이 있었 지만 그 때문에 그는 세계적인 대학자로 거듭나는 행운을 맞이할 수 있었으며, 또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잃고 해외 망명길에 오를 수 밖에 없는 불운이 따랐지만, 그 자신의 명성 덕분에 죽음을 면할 수 있는 행운도 뒤따랐기 때문이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하는 문제는 따지고 보면 그 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결과에는 나름대로의 이유와 원인이 있다는 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말처럼 만고 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바위에 구멍이 난 것은 오랜 세월 그곳에 떨어진 물방울이 있었기에 가능 한 일이었다. 불교적 인과론도 같은 입장에 서있다.

종교와 정신분석

프로이트는 오랜 기독교 전통사회에 몸 담고 살면서 과감 하게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았다. 자유 민주사회의 특성은 종교적 자유가 보장될 뿐만 아니라 신

을 믿지 않을 자유 또한 허용된다. 그러나 프로이트 생존 당시 그가 속한 사회는 자유민주체제가 아니었던 만큼 그 에게 던져진 비난과 혐오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 른다. 반면에 프로이트 자신은 종교에 대한 반감을 지녔다 기 보다는 특정 신앙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사상가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신에 대한 믿음과 구원 환상 자체를 신경증 적 경향의 표출로 간주했던 프로이트였으니 신앙인들 입장 에서는 당연히 그가 종교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으로 이해했 음직도 하다. 오죽하면 교황까지 나서서 프로이트의 정신분 석이 인간 심성을 타락시키는 사악한 이론이라고 선언할 정 도였겠는가(Gay 1987). 교황의 무오류성을 믿는 전통사회 에서 종교 자체를 일종의 강박신경증으로 간주했으니 비난 의 대상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다.

Freud(1915)는 전이 사랑에 관한 논의에서 목사와 보험 외판원의 비유를 들어 분석가와 여성 환자 사이에 재현되는 문제와 유사함을 말한 바 있다. 그가 비유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신앙심이 없는 한 보험 외판원이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가족들은 그가 죽기 전에 교화시키기 위해 목사를 불러왔다. 두 사람의 오랜 대화가 끝나고 마침내 방 문이 열리며 목사가 나왔다. 그러나 가족들의 기대와는 달 리 보험 외판원은 교화되지 않았고 오히려 목사는 보험에 가입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만약 환자의 구애가 그 어떤 응 답을 얻어낸다면 그것은 환자에게는 커다란 승리이겠지만 치료적으로는 완전한 패배라는 것으로 분석치료와 애정관계 는 공존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비유라 하겠다. 그 런데 Gay(1987)는 프로이트의 무신론에 관한 저서 맨 첫 머리에 이 부분을 인용한 바 있는데, 그 이유는 기법상의 문 제를 논하는 와중에 무심코 프로이트 자신의 무신론적 입장 을 드러내고 있는 좋은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환자를 종교 적으로 귀의시키려다 오히려 그에게 설득 당하고 마는 성직 자의 희화적인 모습에서 우리는 종교에 대한 프로이트의 냉 소적인 시각을 엿볼 수 있다. 면죄부 파동으로 종교개혁까지 일어났던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이해한다면, 천국에 가기 위 해 헌금하는 행위는 일종의 보험에 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고 날카롭게 꼬집은 오래된 농담이 생겨난 이유를 알만도 하겠다.

Freud(1918)는 늑대인간의 사례 첫머리에서 고래와 북 극곰의 예를 들어 분석이론의 반대파와 논쟁할 수 없음을 선언했다. 고래와 북극곰이 서로 싸움을 할 수 없는 이유는 각자 자기가 사는 영역을 벗어날 수 없어서 서로 만날 수 없 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융과 아들러를 의식한 비유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종교와 정신분석의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 는 비유라 하겠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종교와 정신분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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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반목하고 대립할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양자 의 관계는 지금까지도 매우 껄끄러운 입장임을 부인하기 어 려운 것이 사실이다. Freud(1933)는 [신 정신분석 입문]

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무의식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보다 는 성모 마리아의 기적을 믿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것 입니다. 정신분석적인 작업은 어렵고 매우 까다롭습니다. 그 것은 책을 읽을 때 썼다가 산보 나갈 때 벗어 놓을 수 있는 안경처럼 그렇게 손쉽게 손에 잡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는 과학적 진실이 반드시 대중적 호응을 얻는 것은 아니지 만, 치유를 전제로 하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대중들의 관심 을 무시할 수도 없는 곤란한 입장에서 나온 하소연이라 하 겠다. 또한 같은 글에서 말하기를,“우리의 진단은 나중에 가서야 이루어지는 게 보통입니다. 그것은 빅토르 위고의 책에서 읽은 스코틀랜드 왕의 마녀재판과도 같습니다. 그 왕 은 물이 끓고 있는 냄비에 마녀를 집어넣고 끓인 다음 맛을 본 후에 이 사람은 마녀이고 이 사람은 마녀가 아니라고 말 합니다”라고 했던 것이다. 매우 투박하고 잔혹한 비유라고 도 볼 수 있는 이 대목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지만 환 자를 마녀재판 식으로 다룬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며 환자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토대로 분석이 진행되어야 보다 정확한 진단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불가능한 사명

Freud(1937)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직업 가운데 분석 가를 예로 들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는 애당초 만족스런 성과를 얻기 힘든 불가능한 직업 3가지가 존재하는데 교육, 통치, 분석이 그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점, 삶의 풍족함에 대한 욕구 또한 끝이 없다 는 사실, 그리고 분석을 통한 치료 효과에 대한 기대, 역시 끝이 없다는 점에서 한 말일 것이다. 오랜 분석에도 불구하 고 지적인 통찰 차원에 머무는 경우들도 적지 않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프로이트의 이런 푸념 비슷한 말도 단순한 그 의 염세적 경향 탓으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 매우 솔직한 고백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오히려 그토록 불가능한 사 명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치유를 위해 헌신적으로 공헌하는 수많은 치료자들을 독려하는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정신분석은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추 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전혀 새로운 인간으로의 재 탄생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정녕 그렇다면 그 것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가 될 것이다.

불교 용어에 증상만심(增上慢心)이라는 말이 있다. 깨달 음에 도달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착각하여 스스로 잘났다는 교만에 빠져 우쭐거리고

뽐내는 마음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현상은 설익은 초심자들에게서 흔히 보는 증상인데 약간의 참선과 수행과 정을 마친 후에 마치 자신이 득도나 한 것 같은 착각에 빠 져 일반 중생들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며 우습게 알거나 지나친 과대적 사고 및 전지전능감 등의 희열감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유사한 현상은 의사세계에서도 나타나는데 일 부 전공의들에게서 볼 수 있다. 몇 차례 수술을 직접 집도하 여 성공한 이후에 자신이 이 세상에서 제일 유능한 외과의 사라도 된 듯한 우쭐한 기분에 도취되는 경우 등을 말한다.

물론 오랜 분석 수련을 마친 사람들에서도 이와 유사한 현 상을 일시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그래서 꾸준 한 자기분석을 요구하였으며 분석가 자신도 5년 주기로 재 분석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그 의 제안은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지켜지지 않고 있지만 분 석가로서 지녀야할 기본적 자세를 제안했다는 점에서 귀담 아 들어야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정신분석이 추구하는 이상은 과연 실현 불가능한 이데올 로기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정녕 불가능한 사명인 것일까.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면 프로이트를 포함 한 수만명의 분석가들이 무슨 이유로 그토록 오랜 기간 공 부하고 분석을 시행하겠는가. 불가능하다기 보다는 거기에 따르는 막대한 수고와 인고의 노력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지 나치게 안이한 태도로 접근했다가는 오히려 큰 낭패를 보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인간의 무의식을 다루 는 일은 보다 신중하고 조심스런 태도로 임해야 한다는 사 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진정한 통찰에 이른 사람은 오히 려 자신에게 무엇이 가능하고 가능하지 못한지 정확히 구분 할 수 있는 분별력을 발휘할 것으로 본다. 분석은 온전한 인 간을 제조하는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보다 나은 성장을 도 모하는 기회일뿐이다.

분석의 목적

분석의 목적을 말할 때 금과옥조처럼 인용하는 말이 있다.

이드가 있던 곳에 자아가 있게 한다는 것(Freud 1933). 그 러나 이것이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그것 이 바다 간척사업과 같은 문화적 작업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 거대한 이드의 바다에 제방을 쌓아 파도를 막고 새로 운 자아의 토양으로 바꾸는 간척사업에 견줄 수 있는 비유 라 하겠다. 그러나 저자는 모든 정신치료적 과정을 차라리 밭농사에 비유하고 싶다. 다시 말해 마음의 밭을 일구는 농 사로 친다면 정신분석만큼 오랜 기간에 걸쳐 철저하게 토 양을 일구는 농사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속성으로 이모작, 삼모작을 하는 농사가 있다면, 그것은 일찍 수확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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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는 장점은 있으나 품질면에서 어느 정도나 보장할 수 있는

지 장담하기 어렵다. 더구나 지지적 치료는 치료자가 직접 나서 환자의 일손을 거들어주는 것이라고 볼 때, 정신분석 적 치료는 가시적인 도움이 전혀 없는 것으로 오해받을 소 지도 다분히 존재한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본다면, 정신분석 만큼 영속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치료도 찾기 힘들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아와 이드의 관계를 말과 기수의 관계에 비 유하곤 하였다. 말이 동력을 위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기수 는 그 짐승의 힘을 어디로 끌고 나가야 할지 목표를 정한다 고 본다면, 말과 기수 사이에 적절한 일체감과 협력이 이루 어져야 올바른 행보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자아와 이드 사이에는 말과 기수의 관계처럼 순탄치가 않은 경우가 많으 며, 동시에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는 속담도 있듯이 불쌍한 자아는 엄격한 주인을 셋이나 섬겨야 하기 때문에 여의치가 않다는 것이다. 즉 이드, 초자아, 그리고 외부세계 등을 항 상 고려해야만 하는 자아 입장에서는 여간 고달픈 일이 아 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아의 인생은 결코 순탄치가 않다 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프로이트의 관점은 다소 염세 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운 좋게도 순조로운 삶을 살아 가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염세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고통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주장이 오히려 삶의 진 실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빵을 달라고 외치는 시위 군중들을 향하여‘빵이 없으면 비스킷을 먹으면 되는데’ 고 중얼댔다는 마리 앙토아네트 왕비의 말처럼 삶의 비극 적 현실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 어떠한 회 의적인 시각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분석의 목적은 자아 기능의 확대 및 자기에 대한 시 야의 확대에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무의식의 발견

Freud(1917)는 무의식 내용이 의식에 떠오르는 과정을 사진의 영상에 비유했다. 처음에는 음화였다가 인화지를 통 하여 양화가 되어야 우리가 그 모습을 선명하게 알게 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모든 음화가 반드시 양화가 되 어야 한다는 법이 없는 것처럼 무의식 과정이 반드시 의식 적인 과정으로 변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평면적 인 차원의 비유와는 달리 보다 공간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그는 매우 큰 대기실(무의식)과 그리 고 그 방과 연결되어 있는 보다 작은 방(의식)을 예로 들고, 그러나 두 방을 연결하는 문턱에는 모든 활동을 검열하고 감시하는 파수꾼(전의식)이 자리잡고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작은 방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제 지하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우리의 일상적인 대화에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 처럼 수면위로 보이는 의식의 밑에 놓여있는 거대한 무의식 세계를 빙산의 비유로 도식화 하는 것이 의식과 무의식의 존재를 이해하는데 매우 적절한 도움을 준다고 하겠다. 그 러나 전의식의 존재를 기능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댐의 비유가 더욱 적절할 듯 싶다. 의식 영역으로 넘쳐 나오려는 무의식 내용을 적절히 막아줌으로써 의식을 안전하게 지켜 주는 댐의 역할이 전의식이 맡은 역할과 같다는 것이다. 이 는 결국 방어의 기능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방어 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전의식 개념은 그 효 용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따라서 Freud(1923) 는 자신의 이론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식에의 접근 가능성 여부만 갖고서는 여러 예외적 인 현상들을 설명하기가 어려워진 탓이다. Brenner(1982) 는 그런 점에서 일관성이 떨어지고 복잡하기만한 상호 모 순된 설명에 의지할 것 없이 보다 포괄적인 개념인 타협형 성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프로이트의 이론 그 자체는 일종의 지도와 같은 역할을 하 는 것이다. 지도에 그려진 등고선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가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는데 매우 유용한 안 내자 구실을 한다. 마찬가지로 지형학적 이론이든 구조 이 론이든 간에 실제로 존재하느냐 여부가 문제의 핵심은 아니 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 세계를 이해하는데 유용한 안내서 일 뿐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분석 작업을 고고학적 발견 에 자주 비유했다. 마치 동굴 벽면에 새겨진 고대인의 암각 화를 해독하는 고고학자처럼 분석가 역시 오랜 기억의 회상 을 통하여 암호화된 개인적 의미를 해독하는 작업에 모든 노 력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는 고대 트 로이 문명의 유적을 발견한 쉴리이만처럼 수천 년간 베일 에 싸여 숨겨져 왔던 무의식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 린 정신 분야의 고고학자라 하겠다.

퇴행과 고착

다윈의 진화론이 프로이트에게 준 영향에 대해서는 이론 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에 가장 정면으로 배 치되는 이론은 바로 퇴행의 개념일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진화가 유일한 목적이 될 수 있다고 하겠으나 특이하게도 인간은 심리적인 퇴행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진화라는 원대한 생물학적 목적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 현상이기도 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죽을 때까지 퇴행상태에 고착되어 전혀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수도 많다. 만성적 정 신분열병 환자들의 경우가 그러하다. 이와는 달리 신경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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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는 분석시간에 일시적인 퇴행현상을 보이지만 곧 원상 태로 복귀할 수 있는 탄력성을 지녔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같은 심리적 퇴행은 인간만이 보여주는 매우 이례적인 현 상이다.

이러한 퇴행과 고착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프로이트는 리 비도의 관점에서 군대의 진격과 후퇴에 비유하기를 즐겼다.

다시 말해서 적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더 이상 앞으로 진격하지 못할 경우에는 작전상 후퇴를 하기 마련인데 이 같은 현상은 인간의 심리적 세계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Freud 1917). 그는 이처럼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는 방어적 현상을 퇴행이라고 불렀다. 그리 고 일단 후퇴한 군대가 가장 안전한 후방에 집결하여 전열 을 재정비하는 도시가 있다면 바로 그곳이 고착 지점이 된 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관점에 따르면 가장 심한 퇴행의 고착점은 엄마 젖을 빠는 구순기가 될 것이다.

전쟁에서 군수물자의 공급이 없이는 아무리 전투력이 뛰 어나도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군수물자는 리비도에 해당한다. 리비도의 공급에 힘입어 자아는 환경과 의 씨름에서 자신을 지탱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 프로이트 의 일관된 신념이었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구조 이론이 대 두되면서 부분적인 수정이 가해졌지만, 퇴행도 일종의 현실 도피적인 방어라고 보았을 때, 환자 자신의 병을 과소평가 하려는 억압의 방식은 머리를 모래에 처박고 문제가 해결 되었다고 믿는 타조의 처세술과 비슷하다고 하였다(Freud 1914). 실제로 많은 환자들은 치료를 통하여 자신의 신경 증적 고통을 직면하고 돌파해 나가기 보다는 퇴행적인 신경 증 상태에 그대로 안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환자 에게는 남다른 용기가 필요하고 분석가에게는 인내심이 요 구되는 것이다.

노이로제

신경증은 떼어버릴 혹 같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물리 쳐야할 귀신도 아니다. 어떤 점에서는 모든 인간이 각자의 신경증적 경향을 지니고 살아간다. Freud(1913)는 노이로 제의 본질에 대한 무지 때문에 사람들이 흔히 신경증을“외 국에서 온 아가씨” 정도로 가볍게 여긴다고 불만을 표시하 고, 사람들은 그녀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기 때문에 당연히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기대한다면서 의사들 또한 이러한 잘못된 믿음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신경증은 결코 저절로 떨어져 나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 님을 강조하면서 Freud(1913)는 이런 잘못된 믿음 때문 에 모종의 방편을 제안하는 환자가 있을 수 있음을 말했다.

즉 자신의 고통스런 증상들 가운데 어느 한가지만이라도 편

하게 해준다면 나머지는 스스로 해결하며 살아가겠다는 제 안을 환자가 하는 수가 있는데, 분석가는 이런 제의에 가볍 게 응해서는 안될 것임을 강조했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환 자의 증상들에 대한 분석가의 능력이 남성의 생식능력과 비 슷하다는 다소 이상한 비유를 들었는데, 예를 들어 정력이 왕성한 남자가 온전한 아기가 태어나도록 할 수는 있겠지만, 아기의 몸에 머리나 팔다리만 생기게 할 수는 없으며 또한 아기의 성별조차도 마음대로 정할 수는 없다는 것으로, 이 러한 과정은 물론 아기가 엄마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끝나는 것이지만, 한 인간의 신경증도 이런 유기체의 특성을 지닌 다고 하였다. 이러한 비유는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는 점에 서 실패한 비유라 하겠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분 석가 임의대로 환자의 증상들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아니라 는 의미로 해석되며, 또한 신경증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개개의 증상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보다 포괄적인 시 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임을 강조한 듯 싶다. 이어지는 그 의 설명을 참조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것은 신경증의 부분 증상들이 서로 독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서 로를 규정하며 서로를 지지해 주기도 한다는 점. 따라서 사 람은 항상 단 하나의 신경증에 걸리는 것이지, 우연히 한 개 인 안에서 만난 여러 신경증들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는 주 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도 납득하기 어렵다. 프로이트가 살았던 그 시절에는 히스테리와 강박증이라는 두 가지의 고 전적 신경증 외에는 다른 진단명이 별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신경증의 유형도 다 양하게 구분되고 있는 실정이며, 서로 다른 신경증들이 한 환자에게 공존할 수 있음은 상식이 된지 이미 오래이다.

Freud(1913)는 분석치료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표시하 는 가운데, 신경증 형성에 관여하는 여러 요인들이 모두 만 족되어야만 하는 병인 방정식의 개념 도입을 주장하였는데, 그 이유는 신경증을 유발한 병인 방정식의 가장 미묘한 지 점을 공격하여 병에 의한 이득을 헛되게 만들어야 비밀 누 설 효과로 인해 우리가 원하는 변화된 결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매우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프로이트의 바램을 그대로 따르고 시도한 인 물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아닌 프랑스의 분석가 자크 라캉이 었다. 라캉은 기호언어학 개념에 맞추어 인간 무의식을 수 리적 방정식으로 설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내용 은 실로 난해하여 전문가들조차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과연 어느 정도의 임상적 유용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는 의문이다. 그것은 마치 타나토스의 개념이 이론적으로는 그럴듯 하지만 임상적 가치면에서 그 효용성이 떨어진다는 점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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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어쨌든 프로이트는 신경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환자들의

이율배반적인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를 숙녀들의 용변 에 비유했다. 예를 들어 상류사회 남녀들이 야외로 소풍을 가기로 했을 때, 숙녀들이 용변을 보고 싶을 경우, 꽃을 따러 간다고 말하기로 서로 약속하지만, 어떤 심술궂은 사람이 이 비밀을 알아내어 참석자에게 미리 나눠주는 안내문에“용 변을 보고 싶은 숙녀분은 꽃을 따러 간다고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쓴다면 숙녀들은 다른 핑계를 댈 필요 없이 부끄러워하지 않고도 생리적인 욕구를 인정할 것이고 어떤 신사도 그것에 불쾌해 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처럼 비밀을 누설하는 정신분석적 해명 때문에 병으로의 도피가 차단된 다면 환자들은 자신속의 욕동을 인정하고 보다 정직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Freud 1913). 이 말은 결국 통찰을 거부하고 신경증으로 도피하려는 저항이 나타날 경우에는 직면과 해석을 통하여 그러한 도피를 차단시켜 나갈 수 있 음을 말한 것이다.

전이와 저항

분석 상황에서 나타나는 전이현상에 대하여 Freud(1914) 는 매우 다루기 힘든 장벽으로 간주했다. 일단 전이가 출현 하면 환자의 관심이 분석가에게로만 쏠릴뿐 자신의 내면세 계를 탐색하는데 소홀해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전이 를 가장 강력한 저항의 일부로 보았던 것이다. 솔직히 프로 이트는 전이에 대하여 매우 상반되고 모순된 태도를 보였는 데 한편으로는 반드시 극복하고 넘어가야할 치료적 장애물 로 보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치료적으로 유용한 도구 가 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Freud(1914) 는 전이를 환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준비된 운동장과도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어떤 일 부 영역에서는 환자로 하여금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둠으 로써 전이라는 운동장을 열어 준다는 것이다. 이 말은 전이 가 충분히 나타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는 것이 치료적 으로 도움이 된다는 뜻으로 들린다.

전이 사랑에 대한 논의에서 Freud(1915)는 가족의 사랑 만으로는 어떤 신경증도 고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분석에서 전이사랑이 끼어들게 되면 극장에서 상연중에 화 재 경보가 울리는 경우처럼 갑자기 끼어든 현실 때문에 연 극이 망쳐지는 것과 같이 치료장면이 완전히 변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환자에게 그러한 전이사랑을 억제하거나 포 기하라고 더 나아가 승화시킬 것을 요구하는 것은 분석적인 것이 아니라 무분별한 것이며, 이는 마치 정교한 주문을 통 해서 저승으로부터 유령을 불러낸 다음에 질문 하나 던지지 않고 그 유령을 다시 저승에 보내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결국 이는 억압된 것을 의식으로 불러일으킨 후에 놀라서 새로 억압하는 꼴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분석가는 윤 리적 이유뿐만 아니라 기법적인 이유 때문에서라도 환자에 게 사랑을 베푸는 것을 자제해야 된다는 것이 Freud(1915) 의 일관된 논지이다. 즉 환자는 이같은 사랑의 기능을 치료 중에 소진하지 않고 치료가 끝난 후에 실제 삶에서 필요해 질 경우를 대비하여 준비해 놓는 것이 치료의 목표라는 점 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프로이트 는 개들의 경주를 예로 들었다. 다시 말해 화환 모양의 소 시지가 상으로 주어지는 개 경주에서 어떤 장난꾼이 개들이 달리는 트랙에 소시지 하나를 던짐으로써 모든 경기 자체를 망칠 때처럼 치료자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 냐하면 개들은 그 소시지 하나에 덤벼들 것이며 결국 경주 나 승자를 위한 소시지 화환도 모두 잊어버리게 될 것이 뻔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분석가는 삼중의 전 투를 치러야 하는데, 그것은 곧 자신과의 싸움, 반대자들과 의 싸움, 그리고 환자와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또한 분석가 는 폭발성이 매우 강한 물질을 다루는 화학자처럼 자신이 매우 강력한 힘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으며 그 때 문에 조심성과 양심을 갖춰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그러나 단지 위험하다는 이유만으로 화학자가 그러한 폭발 물질로 작업하는 것을 금지할 필요가 있겠는가 반문하고, 결국 인간사회에서는 다른 어떤 열광과 마찬가지로 치료에 대한 열광도 없을수록 좋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증을 전혀 무해한 수단과 절차를 통해 극복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신경증을 너무도 과소평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Freud(1914)는 환자가 즐겨 사용하는 무기와 방어를 어 떻게 적절히 다룰 것이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겪었음을 고백하고, 환자는 과거라는 무기고에 서 무기를 꺼내서 치료의 진전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하지만, 분석가는 환자로부터 그 무기를 하나 하나 빼앗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에 있지 도 않은 적을 상대로 싸울 수 없으며 가까이 있지도 않은 적을 죽일 수는 없다는 점을 환자에게 인식시키는 것이 중 요함을 강조했다. 이처럼 전이저항의 완고함에 대하여 Freud (1912a)는 누누이 강조하였다. 그는 전략적 고지를 차지하 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군인들의 모습으로 그 특성 을 비유했다. 즉 전투중에 어떤 조그만 교회나 농장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아주 격렬하게 싸운다고 해서 우리는 그 교 회가 일종의 민족적 성지라고 여기거나 또는 그 농가에 군 수품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 서 교회나 농장의 가치는 오로지 전술적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도 그 전투에서만 유효할 것이라며, 이처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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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을 제압하는 것이 분석가에게 가장 어려운 작업이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이는 치료에 더 없이 유용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결국 우리는 누군가 부재중이거나 또는 그 의 초상만 존재할 때에는 그 어느 것도 잡을 수 없다는 것 으로, 따라서 적을 상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적이 우리 앞에 실제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허 공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분석의 기법

분석 기법의 발전은 이론적 발전 속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더디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프로이트는 기법면에서 자 신의 스타일을 계속 고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 름대로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기법을 보완시켜 나갔다고 볼 수 있다. 비교적 초기에 해당하는 논 문에서 Freud(1905)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미술 기법을 인용 비유했다. 미술의 기법에는 덧붙이는 방법과 떼어내는 방법이 있는데, 회화는 덧붙이는 방법으로 작업하는 것으로 텅 빈 캔버스에 색의 조각을 입히는 일이며, 조각은 떼어내 는 방법으로 작업하며 이는 암석의 표면을 덮고 있는 것들 을 떼어내는 일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암시 기법은 증상의 기원, 힘, 의미에 신경을 쓰지 않고 대신 암시를 덧씌움으로 써 병인의 표출을 막는 반면에, 분석 요법에서는 어떤 새로 운 것을 덧씌우거나 도입하려 하지 않고 대신 어떤 것을 떼 어내거나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병적 증상의 기원을 없 애고자 한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각고의 노력이 요구된다 는 점에서 분석은 그만큼 힘든 과정이라 하겠다.

기법상의 어려움과 고충에 대해 Freud(1905)는 세계적 으로 가장 유명한 신경증 환자의 일례로 햄릿을 인용하면 서 대중들이 원하는 보다 간편한 방법을 아직까지 찾지 못 하였음을 솔직히 인정했다. 햄릿 3막 2장에서 왕의 심부름 으로 햄릿의 우울증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방문한 신하에게 햄릿이 피리를 연주해보라 요구했으나 연주를 못한다고 신 하가 거절하자 햄릿이 화를 벌컥 내며 말한다.“당신들은 나를 연주하려 하고 있소. -중략- 제기랄, 내가 이 피리보 다 연주하기가 더 쉬워 보인단 말이오. 나를 당신들이 원하 는 대로 어떤 악기라고 부르든 상관없소. 하지만 당신들이 나를 짜증나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를 연주할 수는 없 을 것이오.” 프로이트는 피리 연주처럼 확실히, 빠르게, 편 한히 이루어지는 치료가 있다면 물론 좋겠지만 분석치료의 효과는 신속하지 않으며 또한 의사뿐 아니라 환자에게도 많 은 희생을 요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시간도 적게 걸리고 보다 손쉬운 치료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비록 고생스럽고 시 간도 많이 걸리는 치료법이긴 하지만 그런 수고를 통해 더

욱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런 치료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하면서, 낭창 치료법을 그 예로 들었다. 과거에 통용되던 소작해서 긁어내는 방법에 비 해 최근의 핀젠(Finsen) 요법이 얼마나 불편하고 비용이 많 이 드는지 생각해 보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핀젠 요법이 낭창을 근본적으로 치료하기 때문에 커다란 진보로 받아들 여지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고 분석치료에서도 기법상의 어려움이 불가피함을 역설했다.

Freud(1905)는 분석을 일종의 정신적 수술에 비유하고, 분석에 대한 사회적 불신에 아쉬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 는 수술 보조 책임이 있는 동료가 수술 부위에 침을 뱉으 며 즐거워한다거나 가족들이 피가 튀고 환자가 요동을 칠 때마다 외과의사를 위협하는 것과 같은 그런 환경에서는 수 술이 불가능한 것처럼 분석과 같은 정신적 수술 역시 그런 환경에서는 평탄하게 시행할 수 없을 것이라며, 이처럼 자 신을 도무지 믿어주지 않는 상황에서는 많은 치료가 실패 할 수 밖에 없다고도 하였다. 또한 그는 터키와 서양의 산 부인과 의사 입장을 비교하면서 분석가가 다루어야할 성적 부분의 어려움에 대해 언급하였다. 터키에서 산부인과 의사 는 벽에 난 구멍을 통해 내밀어진 손목의 맥을 짚고 진료한 다고 하지만, 그러나 오늘날 서양의 산부인과 의사는 직접 내진을 통하여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하면서 이처럼 산부인 과 의사가 환자의 생식기를 직접 관찰할 수 있듯이 분석가 도 환자의 정신적 치부인 성경험, 성적 환상 등에 대해 있는 그대로 듣고 관찰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치료가 가능하다 고 하였다.

Freud(1913)는 체스 게임을 예로 들면서, 책을 통하여 체스 게임을 배우려는 사람은 초반 포석과 종반 끝내기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설명을 할 수는 있겠지만 포석 이후 중 반전의 무한히 다양한 진행방식에 대해서는 설명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따라서 책을 통한 이런 가르침 의 공백은 대가들이 둔 게임을 한판 한판 열심히 연구해야 만 메워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분석치료를 행하는데 대한 규칙들에도 이와 비슷한 제한이 따르기 때문에 지식의 전수뿐 아니라 기법의 전수에도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라 는 것이다. 이러한 언급은 책만을 통해서는 제대로 전수하 기 어려운 기법상의 어려움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따 라서 비법의 전수라는 측면에서 볼 때, 분석가의 전문적인 수련의 필요성을 절감한 말로 들리기도 한다. 또한 시간과 돈의 투자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분석치료시간은 하루 중 일정 시간을 임대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또한 매우 힘든 정신적 노동에 속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음악이 나 외국어 개인교습에서 시간제로 하는 것은 당연시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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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의사가 이런 식으로 시간을 정하면 너무 가혹한 것으로 보

일 수도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러나 현실적으로 달리 방도 가 없다는 하소연도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는 과 거 10년간 하루 한 두 시간씩 무료분석도 시도해 보았으나 기대한 만큼의 이점을 얻지 못했으며 오히려 또 다른 저항 들이 엄청나게 강해지는 것을 경험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환자에게 자유연상을 요구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했다.“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모두 말 하십시오. 예컨대 달리는 기차의 창가에 앉은 사람이 수시 로 변하는 바깥 풍경에 대해 자신이 본대로 안쪽에 앉은 사 람에게 묘사해주는 그런 여행객처럼 하십시오”. Lewin(1970) 은 프로이트의 이러한 접근 방식에 대하여 매우 친절하고도 자상한 측면을 엿볼 수 있다고 하였지만, 실제로 분석의 규 칙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태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Freud(1914)는 환자의 인생에서 중요한 어떤 결정도 분석이 종료되기까지 미루도록 한다고 하였으며, 늑 대인간의 경우에서도 분석이 종결될 때까지 결혼을 미루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Freud 1918). 프로이트는 말하기를, 오믈렛을 만들기 위해서는 달걀을 깨야 하듯이 성공을 위해 서는 약간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하면서, 환자에게 불필요 한 친절을 베푸는 것이 오히려 치료의 진행에 방해가 되는 수가 많음을 경고하였다(Freud 1913). 단적인 예로 그는 어느 한 가지 점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것을 허락해 주자마 자 전체 작업의 해결이 불가능해진 경우를 예로 들었다. 프 로이트는 언젠가 국가기밀에 대해 발설하지 않겠다는 선서 를 한 고위공무원을 치료한 적이 있는데 이 제한 때문에 결 국 치료가 실패로 돌아간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다. 프로이 트는 이런 실패를 교훈 삼아 다음과 같은 적절한 비유를 들 었다. 어떤 도시의 한 지역에서 망명자의 피보호권이 인정 된다면 그 도시의 온갖 불량배들이 그곳에 모여드는데 얼마 나 걸릴지를 생각해 보라고 하면서, 사람은 원래 어떤 손해 를 보거나 자기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만 현명해질 수 있는 법이라고 하였다.

분석의 기간

Freud(1913)는 치료를 시작할 때 치료기간이 얼마나 걸 릴지에 대한 질문처럼 달갑지 않은 것도 없다고 하면서 다 음과 같은 이솝 우화를 그 예로 들었다. 여행이 얼마나 걸릴 지 묻는 나그네에게“일단 걸어 보시오” 라고 요구한 다음 에 여행자의 보폭을 알아야 여행에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 낼 수 있다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주장이 다. 그러나 솔직히 이런 질문에는 거의 대답하기가 불가능 하다는 점을 시인하기도 했다. 그리고 분석에 대한 무분별

한 기대 또한 바람직하지 않음을 충고했다. 즉 환자의 무분 별함과 의사의 부정직함이 결합되어 분석에서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리는 경우가 있어서 아주 빠듯한 기간 내에 분석 을 마치려고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아무도 평상 시에는 무거운 탁자를 손가락 두 개만으로 들어올릴 수 있 다거나 대저택을 짓는데 작은 오두막을 짓는 시간 동안에 지을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정작 신경증적 문제의 치료에 있어서는 아무리 지적인 사람들조차도 시간과 작업 량, 그리고 치료 성과 사이의 불가피한 비례 관계를 생각하 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신분석에는 항상 오랜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Freud(1913)는 강박신경증을 보다 짧고 편안한 방법으 로 치료할 필요가 있다는 동료의사의 편지에 대해 결핵이나 악성 종양을 그런 식으로 치료할 수 있다면 내과의사들도 아주 만족해하겠지만 그러나 신경증에서는 생각처럼 그리 수월치 않음을 강조했다. 다만 프로이트는 환자가 일정 기 간 동안을 의무적으로 참으면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 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누구든 원한다면 언제든지 치 료를 중단하도록 허용한다고 했다. 그러나 짧은 기간 동안 분석을 받은 후에 그만 둔다면 아무 성과도 없을 것이며 완 전히 끝내지 못한 수술처럼 불만족스러운 상태가 되기 쉽다 는 점을 지적했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처음 정신분석을 시 도했던 시절에는 치료를 계속하도록 환자를 설득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는데 이제 와서는 오히려 치료를 그만두게 하는 데 골머리를 앓아야 한다고도 했다.

Freud(1937)는 분석기간을 단축시키려는 랑크의 시도 는 불충분한 시도였음을 지적하고, 이를 기름 램프 화재에 비유했다. 즉 그런 시도는 기름 램프가 엎어져 불이난 집에 서 소방수가 화재를 진압한다면서 단지 그 램프를 불길이 시작된 방에서 제거한 것으로 만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프로이트는 사자의 먹이 사냥에서 보듯이, 한번 실수하면 다시는 만회할 수 없기 때문에 사자는 단 한 번만 도약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분석에서도 단 한번의 실수로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경고하 였다.

분석기간에 대한 논란에서 가장 의문이 드는 사례는 Freud (1918)가 유아신경증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 표했던 늑대인간의 사례였다. 그는 여기서 저항의 크기와 분 석 기간은 서로 비례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아군과 적 군의 비유를 들었다. 어느 시골의 한 구간을 지나가는데 있 어서 평화시에는 급행열차로 수시간이면 지날 수 있고 얼마 전에는 아군이 수일간에 걸쳐 지날 수 있었던 길이지만 적 군은 그 거리를 몇 주나 몇 달이 걸려야 지나갈 수 있는 것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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