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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여성사 연구의 성과는 90여편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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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주차 한국여성사 결론

* 시대별 한국여성사 연구의 특징

광복이후 70년동안 한국 고대 여성사 연구는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왔으며, 2013년 현재 100여편의 연구성과물이 있다. 고대 여성사연구의 특징은 정치사 분야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여왕 존재의 역사적 가치와 업적에 대한 연구가 많았다. 2000년대 에 들어와서는 연구 방법론의 다양화가 나타났는데, 고고학 자료와 금석문에 대한 여성주의 접근이 있다. 또한 학제간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기존의 역사학에 젠더고고학, 인류 학, 여성학, 사회학, 국문학, 구비문학, 윤리학, 민속학 등에서도 고대여성사 연구가 진행되 었다.

고려시대 여성사 연구의 성과는 90여편이 출간되었다. 자료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많은 연구를 쌓아왔다. 그 결과 고려시대 여성사 연구는 주로 왕실 여성의 혼인과 가족제도 에 대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1970년대가 되면서 고려시대 여성사 연구 의 기본 문헌자료가 정리되었다. 고려시대 여성사 역시 2000년대가 되면서 전문 연구자가 증가하면서 연구성과물이 양과 질적인 면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문헌자료의 부족을 극 복하기 위해 비교사 방법을 활용했다. 하지만 고려시대 여성에 대한 연구가 왕실 여성인 후 비 등에 편중되어 있다는 것은 앞으로 시각의 다양화와 비교사적인 방법을 통해 다양한 주 제로 나아가야 함을 말해주고 있으며, 연구할 분야가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여성사 연구자들은 르네상스를 구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현 상은 1990년대 여성사자체에 대한 대중의 관심 증가로 시작되었다. 2000년대 들어와서 연 구자의 증가로 연구성과 또한 축적되었다. 다른시대 여성사 연구에 비해 연구주제와 연구 방법론도 다양해졌다. 여성사 연구자 사이에서는 열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뜨 거운 논쟁이 진행중이다. 조선시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여성의 삶과 경험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올 정도로 조선시대 여성사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요구되고 있 다.

근대 한국여성사 연구는 1960년대 사회학자들이 근대여성운동사의 뿌리를 찾기 위한 일 환으로 시작되었으며, 다른 어떤 시대보다 다양한 주제와 함께 많은 연구 성과가 이루어졌 다. 가령 여성운동, 여성교육, 법과 정책 등에 대한 연구가 많았다. 2000년대가 되면서 민 족주의와 여성주의 그리고 섹슈얼리티에 대한 여성사 학계의 관심 증대로 신여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연구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현대 한국여성사의 연구 시기는 1980년대 이후부터이다. 현대 여성사 연구는 여성사와 여성학 사이에서 긴장 관계에 놓여있다. 여성학과 여성사의 모호한 경계로 말미암아 연구성 과물이 많은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적기도 하다. 현대 한국여성사 연구는 여성학, 문학, 정치학, 언론학 등 타분과 학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론과 주제의 다양 성이 그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현대 여성사 연구는 역사학이라는 독립된 정체성을 넘어 ‘열린 역사학’이라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현대 여성사의 큰 과제는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 포스트식민주의, 포스트페미니즘의 교차속에서 여성으로서의 역사적 경험과 실체 를 본질화해서 서술할 수 있는 이론적 작업이 필요하다. 따라서 기존의 역사 서술의 방법론 을 넘어 새로운 글쓰기 방식과 다양한 시도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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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별 한국 여성사 연구의 동향

** 고대 여성의 정치적 리더십

2000년대 이후 여성사 연구는 역사 속 여성의 정치적 리더십과 여성적 리더십 주제에 대 한 연구가 증가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젠더 불평 등 지수에서 여성의 정치 분야 진출 이 가장 낮았다는 통계가 나온 것과 맞물려 있다. 이러한 현실문제와 함께 여성의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관심 증가로 역사 속 여성의 리더십에 대한 연구가 고조되었다. 젠더 개념은 여성사 연구의 주요한 분석틀로 인식되었다. 여성은 타도난 성(sex)이 아니라 한 시대의 주 류담론과 제도에 의해 젠더화된 것이며, 정치권력이 젠더 형성의 강력한 기제로 작용했다.

따라서 여성은 타고난 본래의 성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조 앤 스콧은 여성사 서술의 범주로 젠더 개념 적용을 제안하였으며, 모든 정치적 권력관계에 서 젠더가 드러나는 방식으로 여성사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고대국가 시조모의 정치적 업적을 조명한 여성 정치사 분야의 연구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한국 고대 여성 정치분야에서의 연구로는 주로 지배계층의 여성 을 중심으로 국모(國母)와 시조모(始祖母), 왕모(王母)의 섭적, 여왕(女王), 왕비족과 외척세 력, 왕비, 공주, 왕실여성의 칭호와 정략결혼을 한 여성에 대한 연구가 있다.

여성사에서 정치개념은 기존의 정치개념과 달리 상당히 포괄적이다. 첫째 개념은 여성이 공식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정치적 권위와 정치제도를 발굴해야 하며, 정치권력을 행사했던 인물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둘째개념은 공식적인 권력 행사로 제도화되거나 역사의 표 면에 나타나지 않지만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치적 변화를 가져온 유력한 인물을 발굴하거나 그들의 정치권력에 대한 재조명이다.

먼저 고대 여성정치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여성의 권력이 제도화되어 있는 정치체 제의 한 실례로 역사 속에 존재하였음을 밝힌 것이다. 가령 강영경의 「단군신화에 나타난 웅녀의 역할」은 설화 혹은 신화 속에 머물러 있던 단군의 어머니인 웅녀의 존재를 역사적 인물로 조명했다. 웅녀의 역사적 업적은 수렵문화의 공동체 의식과 농경문화의 위계질서 이 념을 융합함으로써 우리나라 고대 사회가 안정되고 풍요로운 사회 곧 고조선이라는 국가체 제의 수립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웅녀가 더 이상 곰이 아니라 역사시대를 알리는 한국 역사 의 시조모로서 그 정치적 역할을 하였음을 드러냈다. 그 동안 역사학계에서 고조선을 한반 도 최초의 고대국가로 인식해왔고, 단군을 역사적 인물로 간주해왔으나 단군의 어머니에 대 해서는 신화와 설화 속에 가두어 희미한 존재로 묶어놓았다. 이 논문으로 말미암아 웅녀는 한국역사 속 첫 여성 인물로서 자리매김 되었으며, 이는 신화가 역사가 되는 여성사의 변곡 점을 이루어낸 논문이라 하겠다.

하영애의 「신라시대 선덕, 진덕, 진성 여왕의 정치리더십 비교연구」에서 신라시대 세 여왕의 리더십은 남성중심의 정치문화에서 여성 정치문화를 창조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기 존의 정치사가 여왕의 권력을 혼돈과 취약함의 상징으로 그리고 부정적 권력으로 서술했다 면, 이 논문은 호국적 이상과 인자하고 너그러우며 부드러운 자질로 여주불능(女主不能)의 한계를 극복하였고, 군신간의 신의를 바탕으로 한 선덕여왕의 덕치리더십으로 군사권과 행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친당 외교정책으로 삼국통일의 초석을 다졌다. 진성여왕은 ‘향가집’을 만들 정도로 내적갈등과 모순에 대한 시대적 사명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진성여왕의 선양(禪讓)은 책임감 있는 지도자로서 용감한 행위로 규정했다. 이와 같이 그동안 부정적 평가를 받았던 진덕여왕과 진성여왕에 대하여 여성적 리더십과 여성적 윤리 실천의 관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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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이밖에도 신라 왕실의 여성은 호칭에서 보여주듯이 정치적 위계질서 속에서 정치적 권력 이 주어져 있었다. 이현주의 「신라 중고 시기 왕실여성의 칭호」에서 신라 왕실 여성의 칭 호는 개인적인 호칭이 아니라 국가 의례에서 사제역할을 맡았으며, 사제는 국가행사를 관장 하는 직위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았다. 이는 여성의 권력이 공식적으로 제도화되어 있는 신라 정치체제의 한 사례를 역사학계에 공식화한 것이 다.

고구려 왕후 우씨의 경우 형사취수는 남편의 바로 아래 동생에게 재가(再嫁)하는 것인데, 우씨는 뛰어난 정치력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공식적인 최고 권력자와 집단을 움직였다.

왕비들은 국정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지배계층의 여성은 정치 분야에서 공식적인 정치 권력을 지닌 제도와 지위에 속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의견을 표시하고 집단과 조직을 움직여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을 하게 만들거나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 나기도 했다. 권력 구조 속에서 여성은 지배하는 쪽에 서기도 하고 종속되는 쪽에 서기도 했다. 여 성의 공식적인 권위가 남성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지배층 여성도 분명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 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여성사 연구에서도 왕실여성의 정치권력에 대한 연구를 통해 새로 운 여성 정치사 개념이 더욱 명백해졌다. 임혜련은 조선왕실 대비들의 수렴청정이 공식적인 정치제도이며, 이를 통해 어린왕을 보호하고 조선왕조의 체제를 유지해왔음을 밝히고 있다.

변원림은 안동김씨 세도정치와 순원왕후 간의 권력관계를 조명했다. 순원왕후는 안동김씨 집단을 본인 주위에 포진시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도록 권력행사를 했으며, 국정을 이끌어간 ‘여군(女君)’임을 강조했다. 이들 연구를 통해 여성의 뛰어난 정치적 리더십 양상 이 발굴되었으며, 여성의 권력이 제도화되어 정치체제의 역사적 실례로 조명되었다.

** 고려시대 혼인제,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 논쟁

고려시대 여성사 연구에서도 자녀균분상속과 서류부가혼이 강조되었고, 이러한 연구를 토 대로 고려시대 여성의 법적지위가 조선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았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 에 대해 권순형은 『고려시대 혼인제도 연구』에서 서류부가혼이나 빈번한 재혼사례가 반드 시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을 했다. 또한 일부일처제 와 일부다처제가 여성의 지위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에 대한 기존 연구검토를 통해 재조명하 기도 했다.

고려시대 혼인제도를 다룬 최초의 저술인 이능화의 『조선여속고』는 고려시대의 혼인제 도를 다처제로 파악하고 있으며, 1938년 이마무라 도모(今村炳) 는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 제가 병존하였다고 주장했다. 고려시대 혼인제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장병인은 기존의 일부 다처제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장병인은 일부일처제를 주장하는 자료를 실증적으로 제시했다. 충렬왕 원년 2월 대부경 (大府卿) 박유가 “전란과 몽고의 공녀정책으로 인한 인구의 감소를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 워 다처제 시행을 건의하였으나, 재상의 부인을 비롯한 상류층 부인들의 비난으로 시행되지 못했다. 이와 같이 고려사회는 법제상으로 일부일처제의 원칙이 고수되고 있었던 사회였다.

장병인은 고려시대의 혼인제를 규명하는 데 금석문, 행장, 가계, 세계 등의 자료를 활용하였 으며, 이러한 자료를 통해서 확인된 혼인사례는 총 196건이었다. 이중 다처가 기재된 사례 는 51건 중 27건은 선처 사망 후 후처를 맞이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다처의 가능성이 높은 9건의 사례는 최충헌과 이적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민왕 말년에서 우왕 연간에 집중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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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있다. 이 시기 다처현상은 왕조 교체 혼란기에 나타난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따라서 고려 사회는 법제상 일처제의 원칙이 지켜졌을 뿐만 아니라 실제상으로도 일처제가 비교적 잘 준 수되고 있었다. 이러한 장병인의 고려시대 일부일처제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지 못했다. 사 실 일처제와 다처제가 여성의 삶에 어떻게 다르게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분석은 미미하 다. 일처제든 다처제든 여성의 지위와 관련해서보다 분석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고려시대 여성이 가정생활을 영위하는데 윤리적, 도덕적 지침은 불교의 가르침에 따랐다.

이에 대해 김영미는 「고려시대 여성의 출가」와 「불교의 수용과 여성의 삶·의식세계의 변 화」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적 세계관과 윤리관이 여성의 삶을 좌우했 다. 불교적 여성관이 고려시대 가정생활과 가족윤리로 실천되었다. 『고려사』, 『고려사절 요』, 지식인의 문집, 『동문선』그리고 여성의 묘지명 분석을 통하여 볼 때 가장 널리 받 아들여진 가르침은 인과응보설, 윤회설, 보시사상, 보은관념이었다. 인과응보설, 윤회설은 현 세에서 쌓은 공덕이 내세의 삶을 결정한다고 하여 현세와 구분되는 전생과 내세의 관념을 형성하였으며, 현실의 사회경제적 차별을 합리화 했다. 그리고 현실에서의 선행 즉 이타행 을 강조했다. 그런데 불교의 가부장성은 바로 여성의 성불 불능성에 있었다. 따라서 여성의 불교수행은 여성이 성불하기보다는 가족의 안녕과 극락왕생을 기원한 것이었고, 불교 문화 융성을 가져오는 경제적 뒷받침은 여성의 적극적인 시주에 있었다.

고려시대 여성에게는 딸로서의 효도가 강조되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독신으로 살면 서 부모에게 효를 행하거나, 남편과 사별 후 친정으로 돌아와서 친정 부모에 대한 효가 강 조되었으며, 고려후기 시집 식구의 일원으로서 시부모에 대한 효도도 강조되었다.

결혼한 이후 아내로서의 역할은 남편을 공경하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는 것이었다. 일 가친척을 도와주며 화목했다. 고려시대 가정교육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태교부터 시작해서 자녀교육에 힘썼다. 여러 아들이 학문에 힘써, 아들 세명을 과거에 급제시킨 어머니는 국가 로부터 녹을 받았다. 가족윤리로서의 효행과 부덕을 실천하고 자녀교육에 힘쓰던 여성의 삶 과 의식에 불교는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 여성의 불교 신앙생활은 원찰을 세우거나 천도재를 지내 남편과 시부 모의 명복을 빌고, 독경, 염불, 재물, 시주 등을 했다. 가족윤리를 실천하는 여성이 자신의 성불을 위해 노력하기보다 가족과 자신의 현실적 안녕을 위해 불교 신앙 활동에 적극적이었 다.

** 조선여성, 가부장제의 희생자인가 생존자인가

여성사 연구에서 젠더개념은 조선시대 여성사 연구에서 가장 활발하게 적용되었다. 조선 시대 여성사 연구자들은 유교질서라는 엄격한 지배 이데올로기 속에서 여성은 자신들의 권 위와 위상을 확보하기 위해 어떻게 삶을 꾸려왔는지에 주목했다. 이는 여성의 삶이 단순히 가부장제 질서의 피해자로서 억압의 대상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로서 여성사가들이 그들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 여성사 연구의 가장 두드러진 성과이다. 유교적 가 부장 질서가 절정에 도달한 시기에 여성이 누린 상대적 자율성의 틈새를 찾아내고 주체성에 주목했다. 여성을 수동적인 피해자의 관점이 아니라 여성 고유의 경험을 중시하고 문화를 창조하고 지식을 향유하던 주체적인 행위자로서 부각시켰다.

특히 가족 관계 속에서도 여성의 인정 투쟁에 대한 연구 또한 주목할만한 성과를 이루어 냈다. 17세기 중엽 이후로 제사와 재산상속의 관행이 변화하면서 부계질서가 강조되었고, 그 결과 여성의 지위가 점차 낮아졌다는 것은 이미 학계의 상식이 되었다. 이에 대해 이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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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는 조선후기 여성이 딸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잃어갔지만 남편의 집안에서 보장되는 며느리로서의 권리,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확보해 나갈 수 있었다고 했다. 조선전기에는 여 성이 본가살이의 가족관계 속에서 딸로서의 위상과 권리를 향유했다. 균분상속과 처가살이 로 물적 기반이 마련된 여성은 자율적인 권한과 지위를 가졌으며, 본가나 외가와 폭넓은 친 족의 유대를 형성했다.

17세기 중반 이후 종법적 질서가 확산되면서 장자의 권위가 물적, 이념적으로 확립되고, 여성은 시집살이의 물적 토대에서 시댁의 며느리로서의 위상과 집안의 어머니로서의 권위, 종가의 종부로서의 권위와 정통성을 확보해갔다. 안동 장씨는 성리학적 도덕성 실현을 통해 서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였고, 권위를 확보했다. 성리학적인 행위는 정통성을 인정받게 되 고 정통성은 권위를 부여받게 된다. 그 권위는 곧 정치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종부는 엄격한 지배 이데올로기에 순응하기보다 주어진 질서 속에서 자신의 권위와 위치를 확장해 나간 주체적인 여성으로 호명되고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 종부의 존재와 역할이 유교 가부 장제의 희생자가 아니라 주체적인 리더십을 지닌 가문의 지도자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이순구의 연구는 여성을 중심에 놓고 유교화(儒敎化)라는 문제를 바라보았을 때 가장 곤 혹스러운 점은 여성이 자발적으로 유교를 내면화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점을 문제로 제기한다. 이순구는 ‘열녀되기’란, 여성이 현실에 대처하는 전략이자 사회적으로 자 신을 드러내는 방법이었다고 주장한다. 열녀란 당시 사회에서 최고의 도덕적인 실천으로 평 가받았기에, 여성으로서 최고의 현달이자 자아실현 또는 자기표현의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유교화의 수용과 내면화가 수동성과 희생이 아니라 스스로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 었다는 것이다.

정해은은 여성의 정체성을 수용과 내면화가 아닌 저항의 측면에서 접근했다. 정해은은 가 체(加髢)라는 머리치장을 실마리로 하여 18세기 여성이 사회적 잣대나 가치관에 밀려 자신 의 욕구를 억제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작은 저항’이라는 제목에서 보 듯이 여성도 숨죽이지만은 않고 저항하면서 나름의 삶의 전략을 펼쳤다는 것이다. 이는 여 성이 불리한 환경에서 틈새를 찾아내어 생존 전략을 구사하거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주 어진 환경에서 재량권을 행사했다는 관점이다. 이로써 조선시대 여성이 유교사회에서 위상 을 획득하기 위해 내면화를 선택했든지 아니면 저항했든지 간에, 조선시대 여성사 연구의 업적 성과로 유교적 젠더 지배이데올로기에 단순히 수동적으로 순응했다는 1970년대 근대 여성사 연구자들의 주장을 극복하게 되었다.

** 독립운동가 여성가족의 재조명

독립운동가 여성가족에 대한 연구는 독립운동사에서 늘 간과되어 왔으나 2000년대가 되 면서 윤정란의 「독립운동가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여성의 삶」에서 독립운동의 의미와 개념 확대를 제공하고 있다. 일찍이 1970년대에 이루어진 여성 독립운동가 연구들은 국난극복을 위한 여성들의 활동이 근대 한국여성의 사회적 진출의 발판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일제 강점 35년을 벗어나 해방된 자주독립국가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나라를 위해 목 숨을 아끼지 않은 독립투사들의 활동 덕분이며, 독립운동가들의 두려움 없는 활동은 후방에 서 노부모와 어린자녀를 돌보거나 생계를 부양했던 여성가족의 희생과 헌신위에서 가능했 다. 독립운동은 총, 칼 등 무기로만 쟁취하는 것이 아니며, 남자만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신이 처한 입장에서 자신의 잠재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조국의 광 복과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독립운동이었다. 독립운동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 각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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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 끊임없이 불굴의 의지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한민족의 역량이 결집되어 해방의 감격을 맞이 할 수 있었다. 그동안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해서는 꾸준히 학계에서 연구가 진행되었 지만 독립운동사에서 직접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던 남성과 여성 못지않게 또 하나의 축으로 활약했던 독립운동가 여성 가족들이 미친 영향의 진면목을 밝혀내는 작업이 이루어진 것이 다.

윤정란은 독립운동사에서 여성 가족들의 활동과 업적에 관한 연구를 출간했다. 일찍이 1970년대 박용옥은 독립운동에서 여성의 광범위한 활동과 참여는 바로 남녀가 대등한 위치 에서 구국의 전선에 서는 것이었고, 항일 독립운동 과정은 남녀평등으로 가는 과정이 되었 으며 한국근대 여성의 사회진출은 여성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했다.

이에 반해, 윤정란은 독립운동의 개념을 확대 발전시켰다. 먼저, 독립운동가의 어머니와 아내 등 여성 가족들의 역할에 대한 연구를 통해 독립운동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일제의 살 벌한 감시와 통제 속에서 여성 가족들은 독립운동가와 운명을 같이했다. 여성 가족들의 삶 과 경험은 독립운동가의 활동과 별반 다를게 없었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 아내와 가족은 남편과 시아버지의 활동과 업적을 자랑스러워하거나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그들이 겪은 엄청난 고통과 시련에 대해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이는 사회적 그리고 가족들의 분위기에 대해 불편해하였다고 한다. 민족의 독립이라는 거 대 담론 앞에서 여성이 겪는 문제는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한 사람의 수는 3백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중에서 독립유공자로서 국가에서 서훈을 받은 수는 남성에 비해 여성은 극소수이다. 여성 독립운동가가 이 정도밖에 안되는 것은 남성에 비해 적극적으로 발굴이 되지 않았거나 유족이 없어 신청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 시 여성이 남성에 비해 독립운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이들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후방에서 지원한 여성의 활동 역시 독립운 동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한 운동가와 독립운동가 가족으로서 독립운 동가와 공동운명체로 삶을 살았던 여성의 활동은 독립운동가로 등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윤정란은 앞으로 한국 근현대사가 한 단계 더 발전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의 후방 기 지로서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었던 여성에 대한 관심, 자료발굴 그리고 연구뿐만 아니라 지역의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동에 대한 연구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근대여성

박용옥은 『한국근대여성사』에서 성리학의 열녀관이 충신관을 능가하였으며, 이러한 현 상이 근대사회로의 이행기에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개화 여성으로 변모해갔다고 제안했다.

이는 전통사회에서 여성이 이차적이고 부차적인 지위에서 머물러야 했던 것은 사실이나 여 성의 이러한 열악한 지위를 사회적 역할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여 한국여성사 연구의 새로 운 지평을 열었다. 전통시대 여성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인식으로 전통시대 여성에 대한 재 평가와 긍정적인 지위로 격상시킨 것은 실증적인 연구와 함께 여성의 눈으로 역사를 인식하 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박용옥은 한국 근대 여성운동사의 뿌리와 전통이 우리의 역사 속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를 실증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전통시대 즉 조선시대 여성사 연구의 활성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신영숙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회적인식」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문제를 통해 민족 수난과 여성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여성에게 여성이라는 정체성보다 민족의 정체성이 훨씬 중요한 현안으로 인식되었다. 민족의 어머니이며, 모성으로 미화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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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희생과 헌신의 아이콘이었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열악한 조건에 놓여 있었던 일본 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포함한 여성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 겼다. 이 연구는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중심으로 그들의 인식과 단체 활동가들의 인식 비교를 통해 그들이 역사의 주체로 거듭 태어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또한 피해자들의 증언 을 통해서 기존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민족주의에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연구는 민족주의와 페미니즘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 으켰다. 정현백은「민족주의, 국가 그리고 페미니즘」을 통해서 그들을 민족의 피해자로서 가 아니라 민족 역사의 주체로서 강조하고 있다. 여성운동과 평화운동은 민족문제를 주체적 으로 해결하고, 대응하는 적극적인 방안이라고 했다. 예를 들면 전쟁을 저지하는 평화운동 이나, 세계화 시대에 각 역사와 민족, 각 사회와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호 존중하는 방 안을 여성 스스로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여성 개인도 엄연히 민족국가의 정치적, 사회적인 존재이며, 일정한 집단으로서의 민족이나 계급에 상응하는 집단적인 여성 문제 못 지않게 한 명 한 명 개별 여성의 삶에 근거한 민족주의는 , 피해를 근절하고 참다운 여성 인격의 존엄성과 명예를 회복시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1)

1) 강영경 외, 『한국여성사연구 70년』, 한국학중앙연구원. p. 342~35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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