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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룸즈버리에 대한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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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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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국의 형식주의 비평과 블룸즈버리(Bloomsbury) 그룹의 모더니즘 작품 연구

1)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전 영 백

<서론>

블룸즈버리에 대한 재조명:

두 차례의 전시(Tate Gallery, Courtauld Institute Gallery, 10.1999 - 1.2000)

<본론>

I. 블룸즈버리 그룹

II. 블룹즈버리의 예술

II-1 블룸즈버리의 모더니즘 회화: 로저 프라이, 바넷사 벨, 던컨 그란트

II-2 모더니즘 시각의 일상화: 오메가 공방 (1913-1919)

III. 형식주의 비평: 클라이브 벨과 로저 프라이의 미학관

V. 영국화단의 맥락과 블룸즈버리:

블룸즈버리 그룹의 분열과 형식주의 미학에 대한 비판

<결론>

‘Modern Art 에 내재한 Postmodernism 인가?’

<서론>

블룸즈버리에 대한 재조명

1999 년 늦가을에서 2000 년 봄에 걸쳐, 런던에서 블룸즈버리 그룹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하는 두 차례의 전시가 동시에 열렸다. 테이트 겔러리의 “불룸즈버리의 예술(The Art of Bloomsbury: Roger Fry, Vanessa Bell, Ducan Grant)”과 코톨드 겔러리(Courtauld Institute Gallery)에서의

“현대적으로 된 예술: 로저 프라이의 예술관(Art Made Modern: Roger Fry's Vision of Art)"이 그것이다. 미국 순회전으로 이어진 테이트 전은 광범위한 시기에 초점을 맞춰 1910-1925 년 작품을 대상으로 하였는데, 로저 프라이, 바넷사 벨, 던컨 그란트의 회화 작품과 오메가 공방(Omega Workshops)2)에서 만든 오브제들이 전시되었다. 이 전시와 함께 그란트와 벨의 서섹스(Sussex) 지역 샬레스톤(Charleston)의 집이 전시를 위해 개방되었는데, 이곳은 이들의 생동감 있는 장식 스타일로 기념적인 장소이다.(도판 1)

(2)

코톨드 전시는 1920 년대의 마티스, 세잔에의 유행을 유도, 소장가들에게 큰 영향을 준 프라이의 이론적 전설에 깊이 파고들어, 그 미술과 사상을 블룸즈버리의 회화와 병행시켜 놓았다.3) 이 전시에서 프라이가 직접 그린 놀라운 작품들 뿐 아니라 피카소, 마티스 등의 작품과 아프리카 조각, 초기 중국 예술품, 그리고 프라이의 소장품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미적 비젼은 기존의 미술 취향에 도전하고, 문화, 역사적 범주를 넘나들면서, 영국뿐 아니라, 1950 년대, 60 년대의 미국 모더니즘의 발전에, 또 그 예술적 취향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되었다.4)

블룸즈버리 그룹에 대한, 그리고 그룹의 지도자인 로저 프라이에 대한 최근의 이와같은 재조명은 프라이의 시각이 현대 미술의 과거 및 동시대 작가들의 위상을 보여 주면서도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래를 제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프라이를 중심으로 한 영국의 형식주의자 및 작가들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끝자락에 있는 오늘날의 미술계에 여전히 존재하는 여러 문제들, 즉 자국의 시각문화(자아)와 외래 문화(타자)와의 갈등, 순수 미술과 일상 미술의 경직된 간극, 그리고 이론과 실기 사이의 괴리 등을 이미 20 세기 초에 고민하였고,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이에 대한 과감한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이는 영국과 미국의 문화적 구분 없이 형식주의에 대해 일반화시키는 경향, 또 이에 대한 단순하고 왜곡된 기존의 이해와도 무관하지 않다. 본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영국의 형식주의 비평과 블룸즈버리 그룹의 모더니즘 작품을 다시 돌아보고자 하는데, 이러한 취지는 근래의 비평계의 관심과 맥락을 같이 한다. □아트 뉴스(Art News)□에 실린 제인 벌튼(Jane Burton)의 글이 단적으로 이를 나타낸다: “불룸즈버리가 다시 피어난다(Bloomsbury Blooms Again)”.5)

<본론>

I. ‘블룸즈버리 (Bloomsbury)’ 그룹

블룸즈버리 그룹은 1910 년에서 1940 년까지 30 년 정도의 시기를 활동범위로 볼 수 있는 영국모더니즘을 주도하였던 미술 집단을 말한다. 본래

‘블룸스버리’는 런던 대영박물관 근처의 지역인데 이 곳은 영국의 많은 영향력 있는 인물들, 즉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리톤 스트라치(Lytton Strachey), 클라이브 벨과 바넷사 벨(Clive Bell and Vanessa Bell), 던컨 그란트(Duncan Grant), 그리고 로저 프라이(Roger Fry) 등의 주거지였다.

1910-11 년, 고든 스퀘어 46 번지(46 Gordon Square)에 프라이, 클라이브와 바네사 벨 부부가 모여 모임을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가족 관계나 친분이 있는 관계로 맺어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지적으로 모험적인 사람들, 장차 여러 방면에서 중요 인물로 부상하게 될 사람들로서, 케임브리지 대학(Cambridge Univ.)이 중요한 공통 기반이 되었다. 이들은 작가, 예술가, 비평가, 고위 관리, 정치가, 학자 등 영국사회의 지식인들이었는데, 스테판 자매(Stephen sisters) 즉 바네사 벨과 버지니아 울프가 있었고, 경제학자며 교사였던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버지니아 울프의 남편이 될 레오나르 울프(Leonard Woolf), 이.엠. 포스터(E.M. Forster) 등이 포함되었다. 비록 저술과 회화가 이 집단의 핵심이었지만, 학계와 정치 또한 그룹의 정체성을 이루었다 할 수 있다.

블룸즈버리 그룹은 그 조직의 성격상 복합적이고 개방적이었다. 다양한 영역의 지식인들, 예술가들이 폭넓은 담론을 위한 토론의 장을 마련한 셈이다. 블룸즈버리의 역사를 모더니즘의 역사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하면서도 이 그룹의 지도자인 로저 프라이의 역할에서 포스트모던적 특성을 조명한 크리스토퍼 리드(Christopher Reed)의 글은 블룸즈버리 그룹의 양면적 성격을 보여준다. “프라이의 활동주의(activism)를 그 역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과 연관된 관심에 초점이 맞춰진다.”6) 힐톤 크레이머(Hilton Kramer)는 “새로운 블룸즈버리는 21 세기의 초에 더 적절할 것이고, 그것은

‘포스트모던’ 블룸즈버리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7) 이는 80 년대 중반부터 영국에서 로저 프라이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프라이의 비평적 업적에 대해서는 영국의, 나아가 서구의 모더니즘의 정립에 기여한 바가 인정되면서도, 포스트모던 시기로 이행하면서 모더니즘에 대한 공격이 가해지자 그의 형식주의 미학에 대해서도 왜곡되거나 제한된 시각을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8)

블룸즈버리 작가들은 끊임없이 외부에 눈을 두었고 이 그룹에 뿌리를 두는 조직들, 즉 오메가 공방(Omega Workshops), 금요 클럽(Friday Club), 그리고 그래프턴 그룹(Grafton Group) 등과의 관계를 활용하여 자체 발전을 꾀하였다.9) 이러한 집단들에 관여한 작가들은 스텐리 스펜서(Stanley Spencer), 윈드헴 루이스(Wyndham Lewis), 스펜서 고어(Spencer Gore), 마크 거틀러(Mark Gertler), 폴 내쉬(Paul Nash) 등이 있었다. 블룸즈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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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을 보면 누구보다 프라이, (바넷사) 벨, 그란트가 대표적이었고, 이 세 작가들은 영국의 미술세계가 그들의 유일한 활동 근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은 뚜렷하게 코스모폴리탄적인 성격을 갖고 영국 문화가 유럽 대륙으로부터 너무 오래 분리되어 있었다고 느꼈다. 파리에 자주 왕래한 것은 물론이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정기간행물도 출판하였고 다수의 해외 전시를 하면서 프라이와 벨의 미학적 평가는 맹목적 애국주의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들이 마티스, 보나르, 브라크, 피카소 등 프랑스 화단에 비해 영국 화파를 과소평가했던 것은 단순히 프랑스에 대한 애착(Francophile)이라 비판할 수만은 없다.

II 블룸즈버리의 예술

II-1 블룸즈버리의 모더니스트 회화

블룸즈버리 작가들과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그룹이 형성된 1910 년을 중심으로 당시 영국 화단의 상황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그 중심에 로저 프라이가 있었다. 1910 년, 프라이는 44 세로 뉴욕에서 런던으로 돌아왔는데, 뉴욕에서 1905 년부터 그는 큐레이터, 자문, 또 관장으로 재직하면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의 회화 부문을 담당했었다.10) 프라이는 식커트(Sickert)의 세대에 가까웠고 그가 미술에 대한 취향을 형성하던 시기는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s)와 휘슬러(Whistler)가 영국에서 진보적 화가로 여겨지던 때였다. 그는 1910 년경에는 이미 비평가와 예술감식가로서 중요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11)

프라이가 기획하여 그래프톤 갤러리(Grafton Gallery)에서 열린 두 차례의 후기 인상주의 전시 중, 첫 번째 전시는 1910 년 11 월,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Manet and the Post-Impressionism)'라는 제목으로 기획되었다. 이 전시에서는 세잔, 반 고흐, 고갱, 마티스, 피카소, 드랭, 쇠라, 루오 등의 작품이 선보였다. 소위 ‘미술 지진(art quake)’이라 불렸던 만큼 이 전시는 당시 영국 화단에 충격적이었고 영국 모던 아트의 시발점으로 간주될 정도로 그 의미가 큰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반응은 전시에 대한 찬, 반의 대립적 양상을 보였다. □런던 타임즈(London Times)□는 이 전시를 “문명이 이룬 모든 것을 거부하고 격하시키는 것”이라고 하였고, 윌프리드 블런트(Wilfrid Blunt)는 “지극히 사적이고 음란한 쇼를 벽에 불경하게 휘갈긴 엄청난 유치함”이라고 악평하였다. 무엇보다 비평가들을 경악케 한 것은 프라이의 이론이 후기 인상주의자들의 “가치 없는” 캔버스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귀중한 프레스코화 사이의 근접성을 찾았다는 점이었다. 반면, 이 전시는 에드워드 시대의 영국(Edwardian England)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인식되기도 하여, 바넷사 벨은 회고하기를 전시가 “갑작스런 해방과 스스로를 느끼도록 고무시켰는데, 이는 절대적으로 압도적이었다”라고 하였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 전시가 끼친 영향을 서술하기를, “1910 년 12 월경 인간 특성이 변화하였다”라고 하였다.12)

1912 년 2 차 후기 인상주의전은 프라이에게 모던 아트를 미술 이론적으로 더 명확히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13) 세잔을 포함하여 마티스, 피카소, 드랭, 블라맹크, 보나르, 엘벵 등이 포함된 이 전시에서 프라이는 역시 세잔을 “가장 위대한 창시자”로서 묘사하였다.

프라이와 벨은 모두 입체주의를 진정 이해했다고 보기 힘들고, 이후 입체주의와 추상미술 사이의 양식을 표현한 몇몇의 영국 작가들은 이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한편, 프라이는 마티스에 대해 강하게 긍정적 반응을 보였는데, 그는 마티스의 작품에 대하여 “다른 모든 작가들의 작품과 달리 놀라운 디자인의 장식적 통합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미술작품의 통합적이고 근본적인 특징인 디자인에 대해 프라이는 일상적 삶의

‘감각(sensations)’으로부터 분리된 조형적 독립을 이루는 방법으로 생각했다. 1 차 전시를 보고 놀랐던 많은 이들이 입체주의와 야수주의에 대해 배우기 위해서 다시 찾아왔는데, 소위 ‘개종’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큰 변화가 있었고, 특히 슬레이드(Slade)의 학생들이 그러했다. 폴 내쉬는 이 전시들이

“슬레이드에 혼란스런 효과를 가져왔다”고 서술할 정도였다.14)

한편 슬레이드 미술대학(Slade School of Art)15)에서는 미술교사들이 그들의 학생들을 후기-인상주의의 전반적 파급효과로부터 보호하려 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문제는 ‘만약 미술이 세잔과 더불어 최근에 다시 태어났다면, 만약 미적 감수성이 타고나는 것이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래서 만약, 벨이 주장했듯이 “미술은 가르쳐질 수 없다”고 한다면, 미술 교육의 개념에 어떤 값을 치러야 할 것인가?’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대안적 개념이 없었고, 많은 학생들은 블룸즈버리 사회로 인도되었다.16)

(4)

프라이는 당시에 가장 양질의 회화를 프랑스 회화라고 보았고, 세잔과 마티스를 최상의 작가로 주목했다. 그에게 전자는 형태, 후자는 색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그가 인도한 블룸즈버리 그룹이 지향한 표현 언어도 다분히 이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바넷사 벨의 <Abstract Painting>(c.1914)(도판 2)은 그녀가 그린 것들 중 가장 엄밀한 기하학적 그림으로서, 근본적으로 형태와 색채의 관계를 병행하여 추구하였다. 한편, 그란트의 <The White Jug>(1914)(도판 3)도 처음에는 기하학적 추상회화였는데, 나중에 전경에 정물 요소를 포함시켜 변화를 꾀했다. 블룸즈버리 그룹의 화가들이 1914-15 년경 추상 연구에 임했다는 것은 모험적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들 미술의 가장 기본적인 관심은 익숙한 인물과 장소였다. 그들은 추상을 정물의 방향으로부터 접근하였고, 그 과정에서 인식할 수 있는 대상들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블룸즈버리 회화의 가장 중심적인 모티프는 역시 인물이었다.

1912 년경 블룸즈버리의 ‘내부 핵심’ 중 바넷사 벨과 그란트는 후기 인상주의의 절정에 힘입어 자신들의 가장 기술적으로 진보된 작품을 제시하였다. 그란트는 브룸즈버리의 초기부터 1920 년대까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파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마티스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가장 좋은 작품은 시적이고 온순하며, 밝은 색조와 건조한 붓 터치 사이의 균형을 잃지 않았다. 강렬하면서도 조화로운 색채는 영국적 회화의 특징을 이루는 것으로 인상주의와 입체파의 영향을 모두 받은 것이다.

그란트의 가장 성공적 작품은 초상화였는데, 예를 들어 그의 초기작으로 인물 표현의 섬세한 감각을 보이는 <James Strachey>(c.1909-10)(도판 4)17), 울프를 그린 <Virginia Woolf>(1911)(도판 5)18) 등이 있다. 이는 그가 그린 울프의 유일한 초상으로, 버지니아를 육체적 아름다움보다 강한 성격의

냉철한 관찰력의 소유자로 묘사하고 있다. <The Dancers> (c.1910-11)(도판 6)에서는 그란트의 초기작의 특징인 편집적 접근방식으로 다양한 양식을 활용한 것이 나타난다. 외국의 새로운 미술의 영향을 수용하여, 양식적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영국의 번즈 존스(Edward Burnes-Jones), 그리고 푸생 등에 대한 열정을 드러내며 또한 1 차 후기인상주의 전시에서 선보인 고갱의 영향을 자신의 양식으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The Glass>(c.1916)(도판 7)에서는 분절적 색면들이 전체 화면을 뒤덮어 오브제와 배경이 종합되는 이미지를 나타낸다. 이 시기는 그란트의 전이적 시기로서 이전 시기의 전체적인 밝은 색채가 붓터치의 색채 파편으로 나눠져서 조성된다.

매우 독특한 양식의 <Bathing>(1911)(도판 8)은 작가 6 명이 공동으로 작업한 벽화 프로젝트들 중 하나였다.19) 그란트는 시실리, 로마(시스틴 성당) 등 이탈리아에서 미켈란젤로의 인물들을 보았고, 파리에서 마티스를 접했다. 또한 수영하는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모델을 채용하는 등 다양한 참조를 통해 편집적이면서 동시에 개성적 양식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최종 벽화는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이행하는 단일한 움직임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의 <The Dancers>와 연관되는 순환적 동세이다.20)

바넷사 벨은 블룸즈버리 작가들 중, 주제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데 확신을 갖고 임한 작가였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어떤 특정한 서술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형태의 관계와 그 복잡한 조성을 설명한 편지글이 있고, 작품에 대한 언급이 약간 남아 있는데 인간 감정의 비인간화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표현 언어는 묘사적이기보다 암시적이어야 하고, 지나친 격정을 나타내기보다 보유적이어야 한다고 인식하고 이를 자신의 회화에서 구현하고자 하였다. 극단적으로 형상을 없애버린 그녀의 추상 작업을 보면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1915 년 이후에는 추상을 추종하지 않았다. 벨은 추상과 구상을 모두 포괄하는 작업을 하였는데 이 점에서 블룸즈버리 미술의 형식주의는 재평가 받게 되었고 보다 유동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

벨의 <Studland Beach>(c.1912)(도판 9)은 영국의 도어셋 해안의 풍경을 그린 벨의 초기 명작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자세한 부분에 대한 묘사를 억제하면서 분리된 색채에 대해 최소한의 모델링을 가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형태의 단순화를 이루어냈다. 이는 영국 모더니즘에 대한 탁월한 기여이다. 전경의 두 인물은 벨의 아들 줄리앙과 그 유모로 알려져 있는데, 리사 티크너(Lisa Tickner)가 이미 밝혔듯이, 이 장면은 벨의 어린 시절의 정제된 기억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여성과 아이들을 향한 벨의 애정 어린 시각이 극도의 공간적 단순성과 제한된 색채의 구성으로 제시되어 있다.

목욕용 천막 옆에 서 있는 여인이 수평선 없는 바다를 응시하는 모습은 다른 세계를 향한 은유적 지시라고 해석할 수 있다.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벨의 작업에서 대상의 본질적 특징을 집약적으로 포착하는 단순한 디자인은 <Virginia Woolf in a Deckchair>(1912)(도판 10)에서 잘 드러난다.

<Painted Omega Screen (Tents and Figure)>(1913)(도판 11)은 일상에서의 디자인을 구현하고자 했던 블룸즈버리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이 병풍의 디자인이 근거한 그림은 <Summer Camp>(1913)(도판 12)인데 이는 ‘수욕도 병풍(Bathers Screen)'이라는 명칭을 얻기도 하였다.

야외에서 몸을 드러낸 여인들의 주제는 벨이 추종했던 프랑스 작가들 즉 세잔, 드니, 마티스 그리고 드랭의 작품들에서 주도적인 테마였다. <By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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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tuary>(1915)(도판 13)에서는 벨이 오메가 공방에서 작업한 실용 디자인의 특징인 기하학적 추상이 그녀의 이젤 회화에도 계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풍경이 그녀의 회화에 비교적 드물지만, 이 겸허한 스케일의 그림은 명확한 디자인을 잘 나타낸다. 디자인이 명확하기 때문에 대립적으로 나뉘어져 있는 색채 영역들이 전혀 혼란스럽지 않다. 구성의 수직적 요소들은 그녀가 거의 집착적으로 고수하는 특성이라 할 수 있다. 프라이는 벨의 작품에 대해, 일상의 주제를 ‘그녀 특유의 진지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그러나 즐거운 사색’으로 변형시킨다고 묘사하였다.21)

로저 프라이의 작업을 살펴보면, 자신의 형식주의에 입각하여 공간에서의 대상의 관계를 부각시켰고 색채는 비교적 덜 강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관심은 무엇보다 '견고성'이었다. 바넷사 벨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목표는 ‘부피와 공간 사이의 상호작용’을 잘 드러내는 것이고 이를 최대한 3 차원적으로 이루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프라이의 작업에서 비공식적 특성을 언급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사실 초상에 대한 선호이다. 이것은 순수 형태에 대한 미학적 강조를 두는 그의 이론과 모순되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정 추구한 것은 초상이 갖은 ‘유사성(likeness)'의 개념을 넘어 인물에 대한 조형적 요소들의 조합에 관한 것이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프라이의 작업은 거의 구상인데 그란트나 벨에 비해 표현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작품 중, 그래도 초상화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는데, 시인이자 배우인 트리를 그린 <Iris Tree in a Sombrero>(1915)(도판 14)와 젊은 시인 싯웰의 예민한 묘사가 돋보이는 <Edith Sitwell>(1918)(도판 15)을 들 수 있다. 프라이가 주장하는 일상 생활과 순수미술과의 접합은 그의 <Still Life with Omega Flowers>(1919)(도판 16)에서 보인다. 바넷사 벨이

제작한 이국적 종이꽃을 그린 것인데 프라이는 자신의 집을 이 정물의 배경으로 삼았다. 그는 그림의 다양한 배경을 만들기 위해 작업실 벽을 다양한 색채로 칠하고 붙였다고 한다. 무엇보다 프라이가 일상미술(응용미술)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기여한 부분은 도자기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이를 국가의 미적 수준을 가늠하는 좋은 지표라 했고 스스로 직접 제작하였다.22) (도판 17)

II-2 모더니즘 시각의 일상화: 오메가 공방 (1913-19)

오메가 공방{Omega Workshops: (1913-1919)}은 1913 년 런던, 블룸즈버리 지역의 피츠로이 스퀘어(Fitzroy Square)에 설립되었는데, 프라이의 실용미술과 디자인의 기능에 입각한 실제적 소산이었다.(도판 18) 이 공방을 미술사 전통의 맥락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있다. Omega and after23)의 저자 이사벨 안스콤(Isabelle Anscombe)은 이 공방을 1870 년대와 80 년대의 미술․공예 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에 연결시키기보다, 그와 가장 가까운 모델로 비너 베르크슈테테(Wiener Werkstätte)와 관련지었는데, 이는 1903 년 비엔나 분리파(Vienna Secession)의 미술가들과 건축가들에 의해 시작된 장식미술 공방이었다.24)

프라이는 버나드 쇼(Bernard Shaw)에게 쓴 편지에서 처음 오메가 공방을 세우는 계획을 기록한다. 그는 이 편지에서 불란서의 프아레(Poiret)의 말틴 아뜰리에(Ecole Martine)에서 이 공방에 대한 구상을 떠올렸다고 적었다. 경험있는 프랑스 젊은 작가들로부터 보조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언급하면서 이 공방을 통한 자신의 소망은 영국적 전통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피력하였다.25) 공방은 가능한 모든 공간을 과감하고 자유분방하게 장식하였고 전통적인 장인의 도제 방식을 탈피하여 창의적 발명과 풍부한 수공의 표현을 고무하였다. 개인의 서명 대신 오메가 상징(도판 19)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공동체적 성격을 지닌다.26)

오메가는 블룸즈버리의 사업이었고, 바넷사 벨의 텍스타일, 그란트의 회화를 담은 병풍, 프라이의 도자기 등이 공방의 가장 대표적인 생산품이었다.(도판 20) 그러나 실제로 경제적 측면에서 후기 인상주의 가구가 유통되는 시장은 제 1 차 세계대전 시 영국에만 국한되었고, 물건이 고가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찰스 해리슨(Charles Harrison)은 프라이의 오메가 공방이 러스킨과 모리스가 신조를 두었던 미술․공예 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된다고 하면서 그 공방의 역할도 사회, 경제, 공업의 실제 상황으로 인해 수공품이 가격 면에서 공장의 물품과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고 분석한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상황에서 이들의 작품은 사치 품목이었기에 친구들이나 아마추어로 규명되는 자유 중상층의 사람들에게 판매되었다.27)

미술과 사회, 예술과 일상에 대한 오메가 공방의 의도는 설립자인 프라이의 입장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프라이에게 있어

‘장식(decoration)’이라는 용어는 광범위한 뜻과 풍부한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그에게 디자인의 구체화된 형태를 뜻하는 것이고, 또 그 구현된 통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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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이 정신성과 접목되는 것이었다. 만약 디자인이나 장식이 정신의 표현이라면, 좋은 디자인은 위대한 정신적 건강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비록 러스킨이나 모리스의 사회참여적 관여와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그런 면에서 프라이는 이들 초기 비평가들과 공통점을 갖는다. 프라이는 그들과 같이 디자이너로 고용된 작가들이 인간 환경의 양식을 결정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912 년, Art and Socialism을 저술하면서, 프라이의 관심은 ‘추상적 영역의 창조적 미술’로부터 ‘응용미술(혹은 실용미술)’로 전향하였다.28)

힐톤 크레이머(Hilton Kramer)의 설명에 따르면, 프라이가 오메가 공방을 세운 의도는 미술․공예 운동을 야수파(마티스)와 입체파(피카소)에 기반을 둔 장식 원칙에 따라서 재시도하려는 노력으로 봐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나름대로 설득력을 갖는다.29) 그러나 오메가 공방을 과거의 미술․공예 운동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시각에 반대하는 입장도 강하게 제시되는데 이 또한 주목할 만하다. 오메가 공방이 일반적으로 미술․공예 운동의 마지막 전초지대로 묘사되어 왔지만,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고 보는 시각이 있는데, 예를 들어 이사벨 안스콤의 주장을 들 수 있다.

먼저 프라이 자신은 케임브리지를 떠난 후 잠시 그 운동과 연루되었지만, 주도적인 유럽 디자인에 결코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유럽 공방들에 기본적으로 영감을 주었던 미술․공예 운동에서 활동한 대분분의 디자이너들이 건축가였던 것도 참고해야 한다. 그런데 프라이는 오메가 산물을 결코 건축과 연결하여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관심은 회화였고, 디자인에 대한 그의 강조는 단지 미학적 이론과 연결되었던 것이지, 건축과 같은 형태상의 구조감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할 수 있다. {후자는 이후에 바우하우스(Bauhaus)나 르 코르비지에(Le Corbusier)에 의해 강조되었다.} 따라서 그는 아르 데코(Art Deco) 양식과 같은 프랑스의 발전에 무관심하였고,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아울러 프라이가 다수의 영국 디자이너들이 추종했던 사회주의를 거부했다는 점도 그를 미술․공예 운동과 분리시키는 근거가 된다.30)

이런 이유에서 오메가가 어떠한 결집된 양식을 띠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기대는 불가능했다. 오메가의 두 가지 목표는 영국의 후기 인상주의를 진전시키는 것과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프라이는 작가들이 구조적 디자인이나 가구 제조에 깊이 관련되기를 기대하기보다, 그들이 회화에서 표현한 바가 장식품, 일상 용품들에 일관성 있게 드러나기를 바란 것이다.31) 생산적이었던 오메가 공방의 첫 해는 1 차 세계대전으로 타격을 받고 침울한 전쟁의 분위기에서 그 미적 화려함은 턱없이 비현실적으로 비춰졌다. 오메가가 지향했던 “일상을 위한 오브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창조의 기쁨에 대한 자유로운 유희”는 지켜졌으나,32) 프라이가 공방 활동을 보다 광범위한 사회적 공간으로 확장시키기보다 부유한 개인 고객에만 의존하였다는 점은 이 조직의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III. 형식주의 비평: 벨과 프라이의 미학관

형식주의 미학의 첫 공표라고 할 수 있는 클라이브 벨의 1914 년 저서 Art33)에서 제시된 ‘의미 있는 형식(significant form)’이라는 개념에는 예술의 정서적 토대, 그리고 비개인적 예술의 측면, 그리고 원시주의적 성향이 강조되어 있다. 이 개념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정서와 차별되는 ‘미적 정서(aesthetic emotions)’와 직결되는데, 이것이 형식주의 미학을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미학의 핵심적인 문제를 ‘의미 있는 형식’으로 본 벨은 이를 ‘미적으로 감동을 주는 형식’이라고 설명하였다.34)

벨은 이 개념이 사실, “‘의미 있는 형식(significant form)’보다 ‘형태의 의미 있는 관계(significant relations of form)’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말했고 ‘의미 있는 형식은 우리를 특별한 방식으로 감동시키는 배열과 복합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35) 벨은 이러한 미술 작품의 의미(significance)는 그 자체가 강도와 특정성을 갖는 것으로, 순수한 미술은 그러한 의미를 보유하여 삶의 의미와 어떤 관계도 갖지 않는다고 하였다.36) 미술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우리는 형태와 색채의 감각, 그리고 3 차원의 공간적 지식을 갖기만 하면 된다고 하였는데,37) 의미 있는 형식은 그것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미적 정서를 야기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38) 벨에게 있어 의미 있는 형식은 우주적이고 근본적인 특징을 갖는다.

벨의 형식주의는 형식을 순전히 시각적인 것으로만 본 것은 아니고 형식 자체가 의미를 보유하며 그 정서적 토대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벨의 형식주의를 월터 페이터(Walter Pater)를 중심으로 한 심미주의와 연관시키며, 더 나아가 그 예술적 황홀감이 종교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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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경과 유사한 것으로까지 이해하도록 하였다.39) 미적 인식은 획득되거나 교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를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은 타고난 것이기에 소수의 감식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 본다. 따라서 예술철학의 광범위한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한 죤 러스킨, 윌리엄 모리스, 허버트 리드로 이어지는 맥락과는 대립적이다.

따라서 형식에 직접적인 정서적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사람들만이 시각예술을 진정으로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한 형식주의 미학에 대해 소수 엘리트를 위한 심미주의 미학이라고 비판한 견해를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형식주의 미학의 토대에 형성된 1940 년대 뉴욕의 그린버그 미학 또한 동일한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엘리트라는 용어가 자칫 혼동을 일으킬 수 있는데, 이는 소수의 탁월한 감식가들은 계급과 교육으로 결정되는 자들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형식주의에서 강조하는 형식은 사실 교육받은 계층이나 문명화된 보통 사람이 도리어 인식할 수 없는 것인데, 이 점이 원시적 성향을 부각시키는 형식주의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40)

당시에 신영국미술 클럽(New English Art Club)과 캠든 타운 그룹(Camden Town Group)의 더 진보적인 회원들이 있었으나, 벨은 전반적으로 미술의 일관성 있는 견해를 형성하는 시도를 모두 포괄하는 도그마를 제시하게 되였고 이것이 그 예술가들이 가치 있게 생각하는 많은 부분을 배제하였다. 모든 ‘문학적(literary)’ ‘일화적(anecdotal)’ 혹은 ‘묘사적(illustrative)’ 미술은 무시되었다. 요컨대 미술의 표현 방식에 있어, 벨은 자신의 이론에서 재현적 요소가 가능한 한 축소된 추상미술이나 그 요소가 완전히 배제된 비대상 미술을 부각시키지만, 사실상 본인은 비대상 미술이나 추상 미술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점을 한계로 드러내 보인다.41)따라서 블룸즈버리 그룹 화가들의 작품 다수가 완전한 추상보다 재현의 요소가 많은 반추상, 혹은 구상 작품인 것은 벨과 프라이의 형식주의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로저 프라이의 이론적 체계는 벨과의 차이를 통해 보다 잘 파악할 수 있다. 벨의 미학이 지닌 기본적 결함은 순전히 주관적 반응 외에는 예술작품에 의미 있는 형식이 존재한다는 점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 지적된다. 예술의 형식에 대한 프라이의 선언 또한 결국 주관적인 반응에 근거를 두었지만, 그는 지적 재능과 과학적 훈련 덕분에 작품을 자신의 반응에서 분리시켜 다른 관람자들에게 의미 있는 용어로 그 작품의 구조를 분석, 설명하는 데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프라이의 미학은 형식이 유발하는 정서적 충격에서 지성을 통한 객관적 구조인 형식으로 강조점을 이동시킨 것이다. 이는 벨의 이론 체계가 결여했던 것, 즉 형식적 분석을 위한 객관적 뼈대를 제공하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미적 본질을 구성하는 자율적인 형식의 관계에 대한 프라이의 생각에서 지배적인 요소는 ‘조형성(plasticity)’의 개념이다. 프라이의 조형성은 회화와 주로 연관되고 이 개념은 2 차원의 표면 위에 3 차원의 공간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상정된다. 그는 회화의 평면을 2 차원으로 처리하는 것이 미적으로 의미 있다기보다 단순히 장식적이라 생각하였다. 프라이는 말한다: “의미 있는 양감을 보여주지 않는 순수하게 평면적 표면이 어떤 심오한 정서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42) 그가 극찬한 14 세기 피렌체 회화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회화가 조각이나 건축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점이다. 이는 공간 속의 매스와 양감을 평면 위에 새롭게 배치하는 감각과 직결된다.

프라이의 미학에서 강조하는 조형적 요소에 대해 유념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이러한 조형적인 요소는 심리적인 요소와 대립된다는 것이다. 프라이는 당시 영국 화단의 상황을 한탄하면서, “우리가 중요시하는 조형적 표현을 왕립학교(Royal Academy)의 화가들에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맞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단지 심리적 실체만을 그려왔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두 번째로 프라이의 조형성이 단지 형태에 국한되는 것으로 인식한다면 그의 형식주의 미학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43) 사실 그는 세잔 작품의 분석에서 ‘조형적 색채(plastic colour)’를 강조하였는데, 세잔의 후기 작품에서 핵심 사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채색된 면들의 상호 작용에 의해 명백하게 조성된 조형적인 전체의 구성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면들의 관계는 명암보다는 색채의 연관성에 의해 규정되었다고 하면서 프라이는 색채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세잔 이후에 훨씬 명백해졌다고 서술했다.44)

1909 년 출판된 ‘Essay in Aesthetics'(이는 Vision and Design에 포함되어 있음)는 프라이가 형식주의로 나아가는 결정적 단계를 보여준다.

프라이는 “미술은 ‘실제적 삶’에 대조되는 ‘상상적 삶의 표현’이고, ‘우리는 자연과 유사함이라는 생각을, 또 옳고 그름의 생각을 없애게 될 것이다”라고 서술하면서, ‘유사성(likeness)’이나 묘사성을 암시적으로 비상상적인 것(unimaginativeness)과 동일시하였다. 당시 화단의 상황은 ‘자연에의 유사성’을 가정하는 관전파들과 ‘표현의 강도’를 가늠하는 모더니스트들 사이의 구분이 확실하였는데, 프라이는 진보 진영인 후자에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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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프랑스에서는 이미 후자가 선호되었다.) ‘Essay in Aesthetics’에서 프라이는 ‘실제적인 삶(actual life)’과 ‘상상적 삶(imaginative life)’을 구분하여, 후자를 ‘반응적 행위(responsive action)'로부터 독립된 영역으로 삼고 여기에 예술을 상정한다.45)

1920 년, 프라이는 자신이 20 년 동안 쓴 논문들을 기초로 최초의 평론집 Vision and Design을 출판하는데, 이 책에서 그는 벨의 책 Art에서 제시한 의미 있는 형식은 감정(emotion)의 특별하고 유일한 종류의 표현인 ‘미적 정서(aesthetic emotion)’와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한다.46) 프라이는 예술과 관련된 정서가 ‘자기 목적적’이고, 형식적 요소에 의해 형성, 관련된다고 주장한다. 프라이가 ‘디자인의 정서적 요소’를 형식적 요소들 - 선, 매스, 공간, 빛, 그림자, 색, 평면 등 - 의 배치로 이해한 것도 이러한 주장과 무관하지 않다. 요컨대, 그가 제시하는 미적 정서는 일상적 삶과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어떤 대상은 우리에게 강도 높은 일상에서 분리된 사색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상상적 삶에 속하는 것으로 매일의 생활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Vision and Design에 포함된 논문 ‘Art and Life'에서 그러한 무관심한 사색과 ‘삶의 감정(emotions of life)’

사이의 구분을 부각시킨 것을 알 수 있다.47)

프라이의 형식주의 미학을 영국의 미학적 전통과 연결시켜 보면 그의 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관념과 미술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입장을 보다 정교하게 이해할 수 있다. 영국의 미학적 맥락은 특히 월터 페이터나 (멕밀란) 휘슬러 등의 심미주의 전통과 존 러스킨, 윌리엄 모리스, 허버트 리드 등 예술과 사회적 기반과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했던 입장이 대립적 양상에 있음을 주지한다. 그런데 프라이의 입지는 이 두 맥락 중 어느 한 쪽에 속하지 않는 절충적인 것으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우선, 그의 오메가 공방의 설립만 보더라도, 삶에 직접 개입하는 미술의 역할을 누구보다 잘 의식한 것이기에 그를 심미주의로만 볼 수 없다.

사실, 그가 라파엘 전파를 혐오한 이유가 그들의 심미주의 때문이었는데, 프라이는 그들이 삶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채 도피적 예술관념을 가졌던 것을 비난하였다. 솔로몬 피시맨이 그의 태도가 “심미주의 전통보다 러스킨의 전통에 훨씬 더 가깝다”고 주장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48) 또한 프라이가 오메가 공방에서 하려고 했던 일은 월리엄 모리스의 미술문화 활동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프라이의 동기가 예술을 통한 사회 혁신보다 실제적인 것, 즉 젊은 예술가들에게 수입을 제공하려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프라이의 미학에 러스킨의 전통을 잇는 성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또한 그에 반하는 심미주의적 요소를 인정해야 한다. 월터 페이퍼의 심미주의 중, 미술의 기초로서의 형식 개념을 계승하는 점,49) 또 프라이의 초기 작업이 러스킨에 대한 반동을 보이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예술과 도덕을 단순하게 균등화한 해석, 즉 예술을 도덕적 상태의 직접적인 표현으로 보는 러스킨의 해석을 19 세기 말 다수의 예술 이론가들과 함께 거부했던 프라이였다. 예술이 윤리적 혹은 실질적 기준과 관련되어 있음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심미주의자들과 같은 태도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라이는 예술이 도덕성을 초월한다는 심미주의자들의 추론적인 관점과는 견해를 달리하여, 미학은 도덕적 기준과 아예 무관하다는 시각을 확고히 한 점이 흥미롭다.50) 프라이는 예술에 대한 그의 태도를 “미적 행복을 추구하는 음유시인의 것이라기보다 무관심한 과학 연구자의 것”이라고 묘사한 피시맨의 설명이 설득력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프라이의 비평적 시각을 심미주의로 볼 것인가 아니면 사회와 직결되는 미술의 역할을 강조한 맥락에서 볼 것인가’의 문제는 이분법적 논리에 상응하는 한쪽의 답변으로 해결될 수 없다. 오메가 공방과 같이 실천적 영역에서 사회와 직결된 미술의 가치를 부각시켰기에 러스킨 및 모리스의 전통에 연결되는 한편, 프라이의 형식주의 미학의 핵심이 미술의 자율성에 있기에 근본적으로 심미주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심미주의에 반감을 가지기는 했어도 프라이는 예술은 자율적이라는 근본 취지 하에, 상상력은 윤리적 판단에 종속되지 않는 미적 정서를 낳는다고 보았고, 예술과 도덕성이 분리된 상태에서 정서라는 자율적 영역이 확보되었다고 믿었다.51)

요컨대, 프라이의 미학은 비대상 미술이 등장하자 형식에 대한 그의 감각에서 한계를 보였다. 사실 그의 이론 체계의 말기에 예술이 절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관념을 포기하였다고 평가된다. 왜냐하면, 회화의 ‘의미 있는’ 형식적 요소가 외부 세계와 관련 없는 내적, 본질적 ‘정신적’

실재를 구성한다고 해도, 각각 수용된 그 요소들은 물질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프라이는 미적 경험이 정신적 실재를 인식하게 해 준다고 확신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허버트 리드가 그의 예술 개념이 조형적 형식이라는 필요조건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극히 유물론적이라고 지적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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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영국 화단의 맥락과 블룸스버리: 블룸즈버리 그룹의 분열과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

블룸즈버리 그룹의 분열은 프라이를 둘러싼 블룸즈버리 핵심 부문과 퍼시 윈드햄 루이스(Percy Wyndham Lewis) 사이의 불화로 본격화되었다. 루이스를 따르는 분리파들(secessionists)들은 마티스보다 피카소와 입체주의에 의해 더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루이스에게는 특히 아방가르드 미술은 장식의 쇄신보다는 사고의 구체화를 뜻하였는데, 그는 블룸스버리에서 이탈한 후, 회오리파(Vorticism)을 형성하여 1914 년, 간행물 Blast에서 프라이를 본격적으로 공격하였다.52) 회오리파의 양식적 근거는 모더니즘의 또 다른 체계인 미래주의(Futurism)였는데, 미래주의전이 1912 년, 런던의 삭빌 화랑(Sackville Gallery)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 전시는 현대성과 도시 경험의 역동성과 감각을 축연하는 것이었다. (프라이는 많은 19 세기 회화들처럼 미래주의도 지나칠 정도로 삶의 직접적 표상이었다고 느꼈기 때문에 몇 달 후 개최한 2 차 후기 인상주의전에서 미래주의를 독일 표현주의와 함께 배제하였다.53))

루이스는 당시 사회의 생동감을 은유적으로 전달하였는데, 에너지는 딱딱하고 각진 선들의 엄격한 구조에 의해 통제되었다. 그에게 ‘현대적 인간(modern man)’이란 기계와 같이 딱딱한 껍질, 외부적 형태 안에 보유되어야 하고 굉장한 에너지에 의해 생동을 얻는 존재이다. 루이스는 프라이의 그룹이 너무 예민하고 인간적이어서 당시 현대 세계와 괴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프라이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역사가라는 것이 현대 미술을 이해하는 데에 부적합하다고 여겼는데, 이는 프라이가 가진 전통의 핵심이 그리스, 로마의 전통에 있다면 이것은 20 세기의 미술의 역동성을 이해하는 데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54)

이러한 그룹의 직접적 분열과 함께 당시 영국 화단의 조류는 블룸즈버리와 형식주의 비평에 대한 비판을 본격화하였는데, 이를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미술 표현의 방식에 있어 무엇보다 30 년대 초현실주의(Surrealism)의 도래가 프라이의 형식주의의 제한적 시각에 의심의 그림자를 드리웠음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55) 사실, 상상적 시와 문학이 강한 영국과 같은 국가에서 초현실주의에 대한 영국의 뒤늦은 반응은 부분적으로 블룸즈버리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 차 대전에 의해 야기된 사회변화와 동반하여, 초현실주의는 전통적 문화의 출발점을 수용하지 않았던 젊은 작가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고 하겠다.

둘째, 1930 년대는 프라이의 형식주의가 본격적으로 이론적 도전을 받은 시기였는데, 이는 니콜슨(Ben Nicholson), 헵워스(Barbara Hepworth) 등 더욱 국제화된 영국의 모더니즘의 부상, 그리고 이에 기여한 허버트 리드로부터의 비판이 중요하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56) 당시 맑시즘에 흥미를 가진 리드는 미술을 사회 전체의 반영으로 보았는데, 프라이의 취향과 세련의 고도 가치가 20 세기 삶의 새 질서와는 분리되었다고 여겼다. 기계, 대량 생산, 우주적 교육과 대면하여, 프라이는 그 스스로의 감각의 사적 세계로 단지 철회할 수 있을 뿐이라고 서술하였다. 리드는 프라이가 완전히 발전된 의식을 표현하는 것에만 미술을 제약하였고, 본능적 삶의 거울로서의 역할은 부인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피카소와 초현실주의자들를 들어, 블룸즈버리에서 예시된 교육된 예민성으로부터 본능적인 것으로 미술의 관심이 변이되는 것을 지적하였다. 리드는 프라이가 미술의 심리에 상당한 흥미가 있었으나, 심리적 미술의 성질을 혐오하였기에 초현실주의를 멀리했고 독일 미술을 혐오했기에 독일 표현주의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고 비판하였다.

끝으로, 1930 년대 리얼리스트 담론(realist discourse)의 부상을 기억해야 하는데, 이는 예술가 국제 협회(Artists International Association)과 연합하였고 맑시즘의 강세에 힘입었던 것이다. 안소니 블런트(Anthony Blunt)는 이가 1933 년, 캐임브리지에 강하게 영향 미쳤다고 했으며 “미술을 위한 미술(Art for Art's sake), 순수한 형태(Pure Form)는 사라지고, 역사적 유물주의에 의해 대치되었다”고 힘주어 주장하였다.57) 이후, 리얼리스트 담론은 영국 화단에 간헐적이나마 계속적으로 표출되었다.58)

덧붙여 이러한 형식주의에의 비판적 시각에서 블룸즈버리의 계급성이 가진 한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블룸즈버리 작가들은 기존의 영국 상류층에 대항하였으나 또한 그 부분이기도 했다는 것이 이 그룹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사실, 그들의 작품을 유지하고 수용했던 사회, 문화적 조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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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결별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프라이, 벨, 그란트에게 있어, 프랑스와 같은 다른 문화와의 동일시는 20 세기 초 영국 사회의 체제로부터 제약받지 않고 자유로운 세계를 향한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이어받은 문화를 전체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V ‘Modern Art 에 내재한 Postmodernism 인가?’

영국 20 세기 회화의 현대적 움직임(modern movement)의 시작은 1910 년과 1912 년, 로저 프라이에 의해 조직된 두 차례의 후기 인상주의 전시였다.

세잔과 옛 거장들의 재조명을 통해서 사실주의가 주도적인 당시 영국 화단의 빅토리안 시각으로부터 회화의 형태와 구조를 이해하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20 세기의 4 분의 3 을 프라이의 비평적 사고가 미술을 주도했다는 사실은 그에 대해 영국의 취향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나타낸다.59) 클라이브 벨과 로저 프라이는 ‘전통적 모더니즘’으로 인식되어 왔다. 양질의 미술작품에 대한 기준을 구조적 형태로 규명, 통합되는 것으로 삼았고, 그들이 찬양했던 현대적 작가들의 작품은 우주적이거나 ‘고전적’ 특성이 부각되었다. 예술의 자율성을 공고히 하여 모더니즘의 근본 틀을 형성한 형식주의의 업적을 과소 평가할 수 없다. 부정적인 과정을 통해, 비본질적 요소들, 즉 주제, 심리적 상태의 묘사, 재현 자체를 연이어 제거함으로써 미술 경험의 자율성에 관한 개념에 도달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 형식이고, 생산적 시각예술 연구에서 형식이 우위를 차지한다는 사고를 확립하였다. 이 형식은 그림 속의 회화적 요소들의 관계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회화가 지닌 설명적 내용과 문학적 연상과 분리되었다. 그 결과, 형식주의자들, 특히 프라이의 비평관은 예술을 인간 경험에서 떼어놓는 심미주의라고 단순하게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심미주의의 측면뿐 아니라, 이에 반하고 일상의 삶과 사회적 맥락에 관여하는 프라이의 미학적 태도를 재조명하고자 하였다.

미술의 자율성을 향한 모더니즘적 지향에서 주제보다 형태의 우위에 대한 주장은 필요한 제시였다고 하더라도 이는 또한 미적 표현에서 심각한 규제를 부과하였고 포스트모던 시기의 다양한 비판의 쟁점이 되어왔다. 오늘날 미술 담론에서 형식주의의 영향이 주도적이지 않다는 것은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형식주의 담론을 지나치게 단순한 비판의 대상으로 과소평가하는 경향은 뒤따라오는 포스트모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초래하기 쉽다. 작금의 과제는 무엇보다 그러한 비판의 시각을 돌이켜 이 체계의 형성 및 발전 과정을 추적해 가면서 과거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일일 것이다.

본 논고의 기본 구상은 로저 프라이를 중심으로 한 형식주의 미학을 21 세기의 시점에서 조망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2000 년에 열린 두 전시가 이제까지의 모더니즘의 시각을 오늘날의 시점으로 현대화하는 실제적 근거가 되었다. 포스트모던이 익숙한 현재에 이미 역사의 뒤안으로 지나간 벨과 프라이의 형식주의 미학, 그리고 블룸즈버리 그룹에 다시 관심이 모아지는 것에 주목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 체계의 정체성은 그것이 모더니즘과 필연적으로 엇물려 있다는 것이고 이는 이미 이론적으로 익히 인식되는 바이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이 미술사의 실제 비평 담론, 그리고 미술의 화파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 발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씨앗은 이미 모더니즘에서 발아하고 있다는 가정을 이론과 작품과의 관계에서 고찰하고자 하였다.

이는 모더니즘과 포스터모더니즘을 이해하는 기존의 시각틀이 ‘모던’에 대비되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분법을 탈피하지 못하는 경직된 사고에 하나의 실제적 도전 사례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로저 프라이의 모더니즘에 입각한 시각이 종래의 해석처럼 모더니즘의 틀에 지나치게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요즘의 재평가는 형식주의 비평과 직결되는 블룸즈버리 그룹과 오메가 공방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 그룹들에서 산출한 작품들이 당시의 주도적인 양식(세잔, 마티스, 초현실주의자 등)에서 보아 미적 표현이 떨어진다는 단선적 시각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담론과 조직의 정체성 차원에서 볼 때 영국적 미술의 근거를 비영국적인 맥락에서 찾는 프라이의 구상은 대담한 자기 부인과 문화적 개방성에 근거한 것임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소수 특권층을 위한 엘리트주의라고 비판받아 왔던 20 세기 중반 미국의 그린버그의 비평과 프라이의 형식주의 비평을 차별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60) 이는 프라이를 포함한 영국의 형식주의가 사실 담론의 제한된 차원을 넘어 미술 실기(블룸즈버리 그룹), 그리고 일상 삶으로의 침투(오메가 공방)라는 다층적 관계에서 이해해야 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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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주의 미학이 지향하는 이론의 방향이 블룸즈버리 회화와 오메가 공방의 도자기며 일상용품의 오브제에서 제대로 실천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스런 여운이 남는다. 그러나 그 이론과 실기, 저술과 작품 사이의 어긋난 ‘갭’과 ‘구멍’이 오늘날 소위 포스트모던 담론이 흥미롭게 여기는 부분이다.

모더니즘의 미끈하고 잘 짜여진 시각적 텍스추어에 난 구멍과 간극을 통해 포스트모던의 발아는 움트고 있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Abstract>

British Formalist Criticism and the Modernist Art of Bloomsbury

Young-Paik Chun

(Assistant Prof. in Hong Ik Univ./ Ph D in Art History)

The formalist art criticism of Clive Bell and Roger Fry has been recognised as 'traditional modernism'. They valued modern artists whose works were unified in solid forms and structural compositions, which is equivalent to what looks to be universal and classic. An representative artist who proved to be an ideal example for their aesthetics was Paul Cézanne, whose work was highlighted in the two crucial exhibitions for Post-Impressionism in London held by Fry. One cannot undermine the British formalism's achievement contributing to the formation of modernism whose essential incentive seeks for independence of Art - 'Art for Art's sake'.

The process of negation was the way suggested for attaining to the modernist goal, which was thought to remove inessential elements in art practice such as descriptive expression of literary themes or psychological state, and representation itself. Therefore what remains to us is form confirming its priority in the visual. Such form is suggested being constructed by the relationships between pictorial elements in the painting, separated from explaining contents and literary associations. As a result, the formalist criticism has been understood as aestheticism regardless of empirical experiences in human life. Against this rather simplistic apprehension of the formalists - Fry in particular, this paper attempts to take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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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ance by shedding light on the other side of their aesthetics: its involvement with social context and its relation to everyday life without losing its proclaimed name of 'Art'.

This is approved in the Bloomsbury group and the Omega workshop, the two major artists’ groups, which Fry made in order to realise his formalist criticism in the painting (the former) and everyday objects (the latter). What is concerned in this research is, in fact, the way in which he tries to relate his theoretical formulation and art making where he himself took part in. It is due to the fact that the main purpose of this paper aims to reconsider the formalist aesthetics centering on Fry's from an standpoint of the postmodern era. Under its argument lies a sort of skepticism over the binary opposition between modernism and postmodernism, of which clear-cut division seems implausible at least in the very formation of formalist critique in Britain and the art practices drawing on it.

This project has been actually motivated by the two exhibitions on the art of Bloomsbury group and Roger Fry's artistic vision, recently held in London, which gave us a chance to look back how British formalist criticism was related to the art of Bloomsbury, bridging theory and art production.

One could not expect that the modernist works of Bloomsbury and Omega workshop were good enough to realise the formalist aesthetics of Fry and Bell. Obviously, there are holes and gaps remained in the texture made of the interrelating structure of the conceptual idea and the concrete practices based on it. Nonetheless, the initial formation of formalist criticism in Britain was not so 'Modern' of which sense is rigidly contrasted to 'Postmodern'.

Rather, one could say that Fry and the formalist discourse surrounding him was more open, more flexible and more related to everyday life than we habitually assume it to be under the category of Moder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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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I.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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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타

<Key Words>

Formalist Criticism, British Formalism, Bloomsbury Group, Omega Workshops, Modernist Art, Roger Fry, Clive Bell, Vanessa Bell, Duncan Grant

<도판 캡션>

1) 던컨 그란트와 바넷사 벨의 샬레스톤 집 내부 (1930 년대 장식됨) 2) 바넷사 벨, <Abstract Painting>(c.1914), 44.2x38.8, Tate Gallery, London 3) 던컨 그란트, <The White Jug>(1914), 106.7x44.5, Private Collection 4) 던컨 그란트, <James Strachey>(c.1909-10), 63.5x76.2, Tate Gallery, London 5) 던컨 그란트, <Virginia Woolf>(1911),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6) 던컨 그란트, <The Dancers> (c.1910-11), 53.3x66, Tate Gallery, London 7) 던컨 그란트, <The Glass>(c.1916), 25.4x35.6, Private Collection 8) 던컨 그란트, <Bathing>(1911), 228.6x306.1, Tate Gallery, London 9) 바넷사 벨, <Studland Beach>(c.1912), 76.2x101.2, Tate Gallery, London 10) 바넷사 벨, <Virginia Woolf in a Deckchair>(1912), 34.8x24, Private Collection

11) 바넷사 벨, <Painted Omega Screen (Tents and Figure)>(1913), 178x208(전체),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12) 바넷사 벨, <Summer Camp>(1913), 78.7x83.8, Byran Ferry Collection

13) 바넷사 벨, <By the Estuary>(1915), 47x63.5, Private Collection

14) 로저 프라이, <Iris Tree in a Sombrero>(1915), 98.4x71.1, Private Collection 15) 로저 프라이, <Edith Sitwell>(1918), 61x45.7, Sheffield Galleries

16) 로저 프라이, <Still Life with Omega Flowers>(1919), 59.9x44.2, Tatham Art Gallery, Pietermaritzburg 17) 로저 프라이, 오메가 도자기(1914-16)

18) 오메가 공방의 작업 모습(c.1913; 맨 왼쪽이 로저 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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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오메가 공방의 상징(세라믹 위에 그린 마크) 20) 바넷사 벨의 오메가 텍스타일 작품(1913)

참조

관련 문서

12) Maestu I, Gómez-Aldaraví L, Torregrosa MD, Camps C, Llorca C, Bosch C, Gómez J, Giner V, Oltra A, Albert A. Gemcitabine and low dose carboplatin in the treatment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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