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공업화학 전망, 제24권 제3호, 2021왕부지, 기(氣)철학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이 상 은 교수 (상지대학교)
왕부지(王夫之, 1619년-1692년)의 본명은 부지(夫之)이고, 자는 이농(而農)이며 호는 강재(薑齋)이다. 만년 에 중국의 오악(五岳) 중 하나인 남악(南岳) 형산(衡山) 밑의 석선산(石船山)에 은거하였으므로 그를 선산선생 (船山先生)으로 불렀다. 왕부지는 명(明)나라 만력(萬曆) 47년(1619년)에 지금의 호남성(湖南省) 형양현(衡陽縣) 에서 태어나 청(淸)나라 강희(康熙) 31년(1692년)에 상서초당(湘西草堂)에서 세상을 떠난 명말청초의 대표적인 학자이며 사상가이다. 왕부지는 끝까지 명나라에 절의를 지킨 명(明)의 대표적인 유로(遺老)로 황종희, 고염무 와 함께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삼유(三儒)로 일컬어진다. 그는 전통적인 유교경전인 사서(四書)와 오경(五經) 등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새로운 해석을 했으며, 특히 철학적 본체론에 명확한 입장을 정리하고 장재의 기일원 론(氣一元論)의 철학을 계승하고 보완하여 기(氣)철학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꾼 개혁적인 사상가라 할 것이다.
왕부지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인 왕조빙(王朝聘)은 50세였고, 어머니 담씨(譚氏)는 47세였다. 요즘으로 봐도 늦둥이였던 셈이다. 네 살 때인 1622년부터 맏형인 왕개지(王介之)를 따라 공부를 하여, 일곱 살 때인 1625년에 십삼경(十三經)의 학습을 마쳤다고 하니 대단한 영재라고 하겠다. 청년시대에 향시에 우등으로 합격 하였으나, 회시(會試)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숭정(崇禎) 12년인 1639년에 무창(武昌)에서 다시 향시에 참 가했지만 낙방하였다. 그해 10월 왕부지는 곽풍선(郭風蹮), 관사구(管嗣裘), 문지용(文之勇) 등과 광사(匡社)라 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 취지는 서로 올바르게 잡아준다는 의미였다. 왕부지는 일찍부터 공허한 공부가 아니 라 부패한 사회를 바로잡겠다는 참여의 정신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숭정 16년(1643년)에 장헌충(張獻忠)의 반란군이 형주(衡州)에 와 있을 때 여기에 가담할 것을 강력히 권유 하였지만 그는 목숨을 걸고 이를 거절했다. 숭정 17년(1644년) 청나라 군대가 만리장성을 넘어오고, 이자성의 반란군이 베이징을 함락시키자 숭정황제는 도망가다 자금성(紫禁城) 뒤편 경산(景山)에서 목매어 자결하고 명 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이 때 왕부지는 백여 개의 운(韻)에 달하는 비분시(悲憤詩)를 짓고 대성통곡했다고 한 다. 얼마 후 청나라 병사들이 남하하자 왕부지는 호북성 순무(巡撫) 즉, 지방장관에게 상소를 올리고 대항을 하였다. 이때 둘째 형과 숙부, 부친이 모두 전사했다.
이로부터 왕부지는 향리(鄕里), 광둥(廣東), 광시(廣西) 등의 각지에서 반청(反淸) 저항운동을 하였다. 청군 (淸軍)의 침입에 의해서 남경이 함락되고 그의 고향도 점령되자, 형산(衡山)에서 거병했지만 패하여 조경(肇慶) 으로 도망간 명나라 왕실의 계왕(桂王)을 따라갔다. 이 남명(南明) 정권에서 왕부지는 행인사행인(行人司行人) 이 되었다. 그러나 永曆4년(1650년)에 남명 조정에서 당쟁이 심화되자 왕부지는 동운양(董雲驤)과 상소를 올 려 이를 비판하다가 도리어 엄하게 문책을 당하기도 했다. 그 뒤에 왕부지는 계림(桂林)에 있는 구식사(瞿式耜) 를 만나러 갔다가 호북성 양양(襄陽) 출신인 정의가(鄭儀珂)의 딸과 결혼한다. 그 후로 왕부지는 광동(廣東), 광서(廣西) 지역을 전전했다. 그런 와중에 오삼계(吳三桂)가 자칭 황제가 되어 독립하려고 할 때, 왕부지에게
http://www.ksiec45or.kr
인문학칼럼
http://www.ksiec.or.kr
KIC News, Volume 24, No. 3, 2021
KIC News, Volume 24, No. 3, 2021
43
권진표(勸進表) 즉, 황제에 즉위하기를 권하는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지만 단호히 거절하였다.반청복명(反淸復明)을 위한 그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남명(南明) 정권의 신하들의 내분에 절망하고, 이제 명 조 회복의 가망이 없음을 깨달은 그는 1651년에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에는 깊이 은거하며 오 로지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이 시기에 자신이 직접 체험한 사실(史實)을 기록한 것이 바로 그의 저술 《영 력실록(永曆實錄)》이다. 이후로 왕부지는 청조(淸朝)의 회유과 협박에도 굽히지 않고, 죽을 때까지 명조(明朝) 에의 절조를 지켜 청조(淸朝)에 벼슬하지 않고 향리에서 교육과 학문에 전념하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
만년에는 석선산에 거주할 때 가난과 병으로 매우 힘든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저술에 쓸 종이를 살 여력도 안 되어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저술활동을 쉬지 않고 계속한 것을 보면 그의 강 인한 의지와 불굴의 정신에 머리가 숙여진다. 또한 세인과 교유하지 않아 그의 저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그가 죽은 뒤 거의 200년이 지난 청나라가 위기에 빠진 시기에 빛을 보기 시작했다.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망 한 것을 통한하며 쓴 그의 저술들이 위기에 빠진 청나라를 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 이기도 하다.
왕부지는 천문, 역법, 수학, 지학 등을 연구했으며 경(經), 사(史),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위에 언급한 《영력실록(永曆實錄)》 이외에, 《황서(黄書)》, 《상서인의(尚書引義)》, 《영력실록(永曆實錄)》, 《춘추 세론(春秋世論)》, 《악몽(噩夢)》, 《속통감론(續通鑒論)》, 《송론(宋論)》 등이 있지만 생전에는 출간되지 못했다.
왕부지의 학문과 사상적 업적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철학, 문학, 사학에 있어 서 중요한 성취를 하고 있다. 먼저 철학분야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한 것이다. 헤겔이 “철학은 시대의 아들”이 라고 했듯이, 모든 철학자의 사상과 문제의식은 그가 처한 시대상황에서 생겨난 것이다. 간혹 시대를 앞서 새 로운 사조를 얘기하는 천재적인 이들도 있지만, 그것도 또한 과거의 경험과 그 시대의 현실에 바탕하여 추론해 내는 것이다. 왕부지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건국되는 시기에 살았던 한 마디로 망국의 지식인이었던 것 이다.
왕부지는 참담한 현실을 몸소 체험하면서 명나라 멸망의 원인을 정치적 부패는 물론 현실과 괴리된 학문과 교육에 있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먼저 공허한 이치를 궁구하여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성리학적 사유나 주 관적인 마음의 판단으로 세상의 현실을 처리하려는 양명학적 사고를 비판, 배척하며 새로운 방향의 철학을 제 시하였다. 왕부지 이전에도 한대(漢代)의 왕충(王忠)이나 송대(宋代)의 장재(張載) 같은 철학자가 기(氣)철학을 주장했었다.
왕부지는 장재의 기일원론을 계승하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기의 취산(聚散) 즉, 기가 모였다 흩어졌다는 하는 작용으로 설명한다. 이는 《주역(周易)》 〈繫辭傳(계사전)〉에 대한 그의 해석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다.
〈계사전〉에 나오는 “形而上者 謂之道 形而下者 謂之器” 즉, “형이상의 것을 도(道)라 하고, 형이하의 것을 기(器) 라 한다.”는 것에 대한 해석에 바로 그의 기철학의 핵심이 잘 나타나 있다.
천하는 바로 器이다. 道는 器의 道이다. 器가 道의 器라고 할 수는 없다. 도가 없으면 기가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지만, 실은 기만 있다면 도가 없는 것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기가 없다면 도가 없 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볼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말하지 않을 뿐이지 실은 그것이 진리이다.
(《주역외전(周易外傳)》 卷5)
여기서 도(道)란 형체가 없는 것 즉, 어떤 원리를 말한다. 그것을 리(理)라고도 한다. 기(器)란 형질을 가진 구체적 사물을 가리킨다. 그것을 기(氣)라고도 한다. 왕부지는 당송(唐宋) 이래의 여러 학자들 특히 주자가 주 장하는 구체적 사물이나 현상에 우선하는 도(道)가 있다는 관점을 비판하고, 오히려 도(道)가 구체적 사물이나
http://www.ksiec.or.kr
44
공업화학 전망, 제24권 제3호, 2021현상에 의해 존재한다는 관점을 주장하는 것이다. 결국 구체적 현실을 떠난 공허한 원리를 가지고 현실을 파악 하려는 관점을 타파하려했던 것이다. 우주만상의 모든 작용은 결국 기(氣)라는 것이며, 기(氣)의 움직임에 따르 는 것이 리(理)라는 입장이다. 즉, 기(氣) 밖에 독립된 리(理)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왕부지의 이러한 철학은 바로 그의 실천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성리학자들의 선지후행설(先知後行說) 즉, 먼저 알고 나서 실천이 가능하다는 견해를 반대하고, 지행병진설(知行竝進說) 즉, 지식과 실천은 병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또한 왕부지는 종래의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을 철저히 구분하여 “존천리 알인 욕(存天理 遏人欲)” 즉, 하늘의 이치를 보존하고, 인간의 욕구를 막아야 한다는 성리학의 명제를 부정한다. 왕 부지는 인간의 욕구를 떠나서 공허하게 하늘의 이치를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하늘의 이치는 바로 인욕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욕구를 긍정하는 가운데 거기서 일정한 법칙을 찾으려는 왕부지의 반금욕 주의적인 사고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왕부지는 문학에 있어서도 상당한 업적을 남기고 있다. 왕부지가 시가(詩歌)에서 요구한 가장 기 본적인 것은 바로 정감(情感)이다. 그의 관점은 시가는 하나의 예술형식이기 때문에 정감을 중요한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다. 즉, 이를 무슨 철학적 이치나 학문적 지식 혹은 기타 여러 형식의 문체로 대체할 수 없다고 보 았다. 성정(性情)을 도야하는 데는 다른 풍치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 전거(典據)나, 편지, 혹은 훈고(訓詁) 등으 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시로써 성정을 바르게 이끌어야 하고, 본성 속의 감정을 이끌어야 한다고 했다.
하늘의 덕이라든가, 왕도, 절의, 사공, 예악, 문장 등은 《周易》, 《書經》, 《禮記》, 《春秋》 등으로 풀어 가면 된 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으로 《詩經》을 대신하여 성정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 또한 그것들의 역할을 대신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사람들은 두보의 시를 “시사(詩史)” 즉, 시로 쓴 역사라고 칭송하는데, 왕부 지는 이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한다. 그는 정감을 표현하는 시와 사실을 서술하는 역사의 경계를 허무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각각의 임무와 역할이 있다고 본 것이다.
왕부지는 고전시학 이론 가운데 “뜻을 말하는 것과 정에서 연유한다(言志緣情)”는 좋은 전통을 계승하면서 마음의 소리가 발하여 시가 되는 것이고, 시로써 정을 바르게 이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정이 이르는 곳 에 시가 이르지 않음이 없고, 시가 이르면 정이 이른다고 하여, 정감과 시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강조하 였다. 또한 공자가 말한 “시는 자신의 감흥을 일으킬 수 있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있고, 세상 사람과 함께 할 수 있고, 또 남의 잘못을 부드럽게 원망할 수도 있다(詩 可以興 可以觀 可以群 可以怨).”고 한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중시했다.
왕부지는 이러한 사회적 기능을 할 수 있는 정감을 문자에 담아 시가를 만드는 과정에 두 가지가 매우 중요 하다고 했다. 하나는 감정과 경치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감정과 성음의 문제이다. 요컨대 시인의 감정과 자 연의 경치 사이에 어색한 경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경치 가운데 감정이 생겨나고, 감정 가운데 경치 를 머금고 있는 혼연일체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왕부지는 또한 시가의 음악성을 강조한다. 그는 음악이 시가의 미감작용을 가져다준다고 보았기 때문에, 감정과 성률(聲律)이 호응하여 서로를 살려 주어야 한 다고 했다. 성률이란 운률과 같은 것이다. 결국 시가의 운률과 시인의 내면의 감정이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룰 때 훌륭한 시가가 탄생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감정과 운률의 자연스러운 조화를 추구한 것이지, 시정(詩情)을 떠나서 성률에 얽매이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끝으로 사학에 있어서의 성취를 살펴보자. 왕부지의 사학관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그는 귀납법적인 방법을 취했다는 점이다. 즉,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분석하고 그 결과를 귀납하여 교훈이 될 만한 것들을 이끌어내는 방식이다. 둘째로는 비교의 방법을 썼다는 점이다. 왕부지는 이 방법을 이용하여 고금의 역 사변천과 왕조의 부침, 다양한 인물들의 표리, 사실들의 진위 등의 비교를 통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냈
KIC News, Volume 24, No. 3, 2021
KIC News, Volume 24, No. 3, 2021
45
다. 나라의 멸망의 원인도 비슷한 점도 있으나 서로 다른 점도 있음을 찾아낸 것이다. 셋째로는 역사주의적 방 법을 썼다는 점이다. 왕부지가 역사를 논할 때는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역사적 배경을 충분히 고려한 다음에 이를 분석하고 정리하는 합리적인 방법을 썼던 것이다.왕부지는 몰락한 나라의 지식인으로 당당하고 진지하게 처신한 실천적 사상가였다고 하겠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땐 목숨을 걸고 항쟁하다가 이미 망하고 난 다음에는 절의를 지키며 은거하여 학문과 교육을 통하여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꿈꾸었다. 그는 전통의 학문과 교육 그리고 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안목으로 바라보았다.
현실과 괴리된 학문과 교육이 바로 망국의 중요한 원인이며, 제도는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하고 제도의 임무는 백성을 섬기는 것이라는 근대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후세에 많은 사람들이 왕부지를 높이 평가하고 있 다. 그 중에서 신해혁명(辛亥革命) 성공이후 장태염(章太炎)은 봉건제를 타파하고 중국민족의 광복을 이룬 것 은 바로 선산(船山) 즉, 왕부지의 학설에 근원한다고 극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