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침구학에 관한 연구
이정록1ㆍ오준호1ㆍ서지연1ㆍ김태은2ㆍ홍세영3ㆍ윤성익4ㆍ차웅석1ㆍ김남일1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1의사학교실, 2한의철학과, 3한의역사학과, 4사학과
A study on BalHae's acupuncture and moxibustion
Jeong-Rok Lee1, Jun-Ho Oh1, Ji-Youn Seo1, Tae-Yuen Kim2, Sae-Young Hong3, Seng-Yick Yun4, Wung-Seok Cha1, Nam-Il Kim1
Dept. of 1Medical History, 2Oriental Medical philosophy,3Oriental Medical History,
4College of History, Kyunghee University Abstract
Objectives : Balhae was a Kingdom forming the Period of Southern and Northern Kingdoms with Shilla.
Because there have been paid little attention to the medicine of Balhae in the medical history field, we have little information on the medicine of Balhae thoroughly in detail. The aim of this study was to explorer on the acupuncture and moxibustion in Balhae as a part of the study on the medicine of Balhae.
Methods : Because the historical remains of BalHae is not sufficient, it is hard to find out the part directly related to medicine However, the study established the category of acupuncture and moxibustion based on two rational frames from both diachronic and synchronic respects.
Results : BalHae succeeded to the unique tradition and manufactured excellent needles which is harmless to human body. And BalHae's acupun`cture was the highest level in those days by succeeding to the tradition from Gogugryeo. There might have been the Bi-Bo idea that we can treat country's disease with the Bo-sa (補瀉) theory of acupuncture in BalHae.
Conclusions : We could know that there has been many medical scriptures of our own in BalHae. We could find out that BalHae succeeded to the legitimacy of our native medicine from Gojosun to Goguryeo and that they had the highest Acupuncture and Moxibustion in those days.
Key words : BalHae's medicine, native medicine, legitimacy, acupuncture and moxibustion
Ⅰ. 緖 論
발해는 고구려 멸망 이후 30년만인 서기 698년에 고구려 장군이었던 대조영에 의해
건국된 국가로 926년에 거란의 침입을 받고 멸망하기까지 229년간 15대에 걸쳐 남쪽의 신라와 더불어 남북국시대를 형성하였다. 발 해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여 고구 려의 옛 영토를 수복하고 더욱 확장하여 北 으로는 시베리아․연해주․만주대륙, 南으로 는 대동강과 원산, 西로는 요동반도를 포함
⋅교신저자 : 김남일,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의사학교실, Tel. 02-961-0672, Fax. 02-964-3191, E-mail : [email protected]
⋅이 논문은 2006년도 두뇌한국21사업에 의하여 지원되었음.
⋅투고 : 2007/01/08 심사 : 2007/03/06 채택 : 2007/03/12
하는 드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면에서 고구려를 계승하였으며,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여 발전 시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발해의 이러 한 국제적인 위상은 新唐書․渤海傳 에서 ‘海東盛國’이라 일컬었던 것을 보 더라도 알 수 있다. 발해가 이어온 민족의 문화와 전통은 발해의 멸망과 더불어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200년 가까이 계 속된 발해 유민들의 발해 부흥운동의 결과 로 後渤海, 定安國, 興遼國, 大渤海國 등으로 이어졌으며1), 이 국가들의 멸망 후에도 고 구려 계승의식을 천명한 고려에 의해 이어 져왔다.
그동안 한국의학사의 고대사 부분에 대한 연구는 사료의 부족과 일제 식민사관의 영 향①으로 인해 그동안 활발하지 못하였다2). 이미 한국사에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사이 를 남북국시대로 설정하여, 발해를 우리의 역사로 다루고 있는 것에 비해, 아쉽게도 醫 學史 분야에서는 발해의학을 연구하려는 노 력이 부족하였다. 金斗鍾의 韓國醫學史 에는 통일신라의 의학에 대해서만 언급 되어 있을 뿐 발해에 대한 내용은 없다. 통 일신라가 고구려의 영토나 문화를 계승하지 못했으며, 또한 고구려를 계승하여 발해가 북쪽에 세워졌는데도 불구하고 신라가 한반 도를 통일했다고 보아 통일신라라고 칭하거 나, 혹은 이때 비로소 한민족의 정체성을 형 성했다고 보는 종래의 견해는 타당치 않다.
발해를 우리 역사로 보고 적극 연구하려는 노력은 한국의학사에서도 마땅히 반영되어 야 한다. 발해의학의 연구가 중요한 이유는 고조선에서 고구려를 거쳐 내려온 고유 의 학의 정통성의 계승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 이다.
본 논문에서는 발해의학 중에서 발해의 침구학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이를 위해 먼 저 발해의학 연구에 관한 논리적인 틀을 세 워 어떠한 기준으로 발해의학에 접근하고자 했는지 제시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발해의 침구학에 관한 내용을 전개하도록 하겠다.
먼저 공시적인 관점에서 당시의 동아시아지 역의 침구학 수준을 기준으로 발해의 침구 의 수준을 설정하도록 하겠으며, 통시적인 관점에서 발해가 계승한 침구에 대한 우리 고유의 전통과 특징을 통해 당시 발해의 침 구에 관한 수준을 드러내도록 할 것이다.
Ⅱ. 本 論 1. 연구방법론
발해에 관한 사료가 극히 부족하고, 그나 마 대부분이 「新唐書」 등의 중국 사서에 기 록된 것이기 때문에, 발해의 의학에 관한 내 용을 직접적으로 규명해내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연역(演繹)적인 논리의 틀을 사용 하면 가능하다. 즉, 발해의학이 갖는 대전제 를 제시하여 이를 통해 발해의학은 어떠한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하는
① 김홍균은 그의 논문 「高麗時代 醫學史觀 叱正(1)」 p.3과 9에서 ‘ 韓國醫學史 를 통해 알 수 있는 김두종의 역사관은 전반적으로 외래의학에 예속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다분하다’라고 주장하였으며, 결국 이러한 그의 역사관은 일제식 민사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역사관을 가지고 저술한 韓國醫學史 는 그 후 한국의학사를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방법을 사용하면 된다.
발해의학의 실체는 모른다는 전제하에 발 해의학의 모습을 엿보기 위해서는 발해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것을 이용해서 적어 도 발해의학은 이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고 제시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본 논문에서는 통시적인 관점과 공시적인 관점 두 가지 축 으로 그물을 만들어 기준을 세워 발해 의학 연구의 기본적인 틀로 삼았다.
Fig. 1. 발해의학의 통시적․공시적 관점을 표시한 논리적 계통도
통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시대 순으로 계 승관계에 있는 국가에는 그들만의 문화적 전통이 있다. 그러므로 전통에 관한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본다면, 한 국가(B)를 중심 으로 시대적인 흐름을 관찰하였을 때 어떤 전통이 先代의 국가(A)와 後代인 국가(C)에 있다면, 중간국가(B)에는 당연히 존재하였다 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전통은 처음 생겨 서 지금까지 전해내려 오는 것만이 전통으 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비록 중간에 끊긴
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시간적인 연속성 을 가지고 이어져 내려온 것이 있다면 이는 전통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A에는 없지만 C에서 새롭게 등장하 는 것이 있다면 이는 C에서 갑자기 생긴 것 이 아니라 B에서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으 며, 거꾸로 C에는 없지만 A에 존재하는 것 은 B에도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와 발해가 계승관계를 이루고 있다 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먼저 발해인들 스스로가 고구려를 계승하였 음을 표방하였다. 발해왕이 일본으로 보낸 외교문서에서 자신이 고구려왕이요 후손임 을 자처했다. 객관적인 입장에 있었던 일본 조정 역시 渤海를 ‘高句麗’로 渤海王을 ‘高麗 王’으로 ‘渤海使’를 ‘高麗使’로 지칭하였고, 渤海樂을 ‘本國樂’이라 부르면서 ‘高麗樂’으 로 연주하기도 하였으며, 신라인들까지 발해 가 고구려의 후손이라고 하였다1).
또한 발해는 정치․문화적인 면에서도 고 구려를 계승하였다. 발해의 군사제도 및 5京 制나 6部制등의 정치제도는 고구려의 것을 계승한 것이다. 도성의 구조 및 축조방법, 궁성의 배치나 도시구조 그리고 무덤, 온돌 구조 등의 유적과, 도자기․기와․불상 등의 유물에서 고구려의 양식을 이어받았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멸망 후 고구려 땅에 살 던 백성들이 갑자기 다른 민족이 되어버릴 수는 없으므로 발해의 주민 대부분은 고구 려 사람이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고구 려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고구려의 문화는 자연스레 발해의 문화가 되었을 것이다. 이 로 인해 민족 고유의 문화는 단절되지 않고
발해로 이어졌으며, 마찬가지로 고구려의학 은 발해의학의 근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고구려와 고려에 공통적으 로 존재하는 의학적 특징은 발해에도 존재 하였을 것이므로 발해의학으로 설정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에 존재하였지만 고려에는 전해지지 못한 것이 있더라도 이것이 발해 에는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에 대 한 증거만 있다면 역시 발해의학으로 삼을 수 있다. 또한 고려초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점이 있다면 이것 역시 발해에서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논증이 가능한 부분은 발해의학으로 설정하도록 하겠다.
공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 문화권내에는 공통적인 문화가 존재하므로 주변국에서 공 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들은 문화권내의 어 느 국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발해는 고구 려 문화를 계승하여 기본으로 삼았지만, 주 변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자신들의 문 화를 한층 더 발전시켰다. 당을 비롯한 주변 국가와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받아 들이면서도 고유의 문화와 조화를 이루도록 잘 융화시키며 발전하였다. 이는 다음의 논 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발해의 무덤은 고구려의 무덤양식인 돌무 덤 위주이지만 당의 벽돌무덤이나 말갈의 흙무덤도 받아들였다. 발해의 도자기 제조기 술을 보면, 발해는 기본적으로 고구려의 전 통적인 제조 양식을 계승․발전시켜 당나라 에서도 찬사를 보낼 정도의 우수한 자기를 만들어내면서도, 당삼채를 받아들여 삼채도 기도 구워냈다. 고구려의 뛰어난 연금술을 계승하여 우수한 금은세공품을 만들어내면
서도, 금 알갱이를 촘촘히 박는 서역의 누금 기법(縷金技法)을 받아들여 금속장식품을 만 들기도 했다. 발해는 종교적인 면에서도 개 방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발해의 솔빈 부 절터에서 십자가가 발견되고, 동경용원부 에서는 삼존불의 협시보살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있는 상이 출토 되었고, 발해의 무순 (撫順)에서도 수백 점의 십자가가 발견되었 다. 이것은 7세기경 중국에 들어온 景敎 (Nestorianism)의 영향으로 보이는데, 이를 통해 발해는 종교적으로도 열린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3). 그러므로 발해는 개방적이면 서도 주체성을 잃지 않는 자주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었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의학에서 도 이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를 통해 발 해의 이웃 국가인 당․후기신라에서 공통적 으로 발견할 수 있는 의학적 특징은 역시 발해에도 존재하였을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이를 발해의학의 기본적인 수준으로 설정하 도록 하겠다.
본 논문에서는 이를 기본으로 하여 발해 의학을 규명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논리 적 사고의 틀은 발해의학의 연구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서나 적용하여 연구하는 것이 가능하므로 한국의학사 연구 에 적극 활용되었으면 한다.
2. 발해의 침구학
우리 민족에게는 고조선 이래로 내려온 鍼灸에 대한 전통이 있으므로, 발해에도 당 연히 이러한 전통이 남아있을 것이다. 먼저 발해의 침구학에 대한 기본적인 수준을 제 시하기 위하여 주변국이었던 唐代의 침구학
의 특징을 살펴보겠다. 그리고 침의 기원과 우리 고유의 침의 제조에 관한 전통과, 침술 에 대해 살펴봄으로 발해의 침구학의 수준 을 설정하도록 하겠다.
1) 唐代의 침구학
唐왕조는 鍼灸를 매우 중요시하는 정책을 펴서 침구에 대한 교육이 강화되었고 침구 를 전문으로 하는 의료인이 제도적으로 많 이 보완되었다. 의학교육제도에서도 수나라 때 전문과인 醫科, 按摩科, 呪禁科의 세 가 지에 처음으로 鍼灸科를 추가하여 네 개의 전문과를 설치하여 鍼灸에 대한 교육이 강 화했는데 이를 통해 鍼灸學의 학술수준이 더욱 향상되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太醫署 에 배속된 침전문의들은 鍼博師 1일 鍼助敎 1인, 鍼師 10인, 鍼工 20인, 鍼生 20인이었 다. 당태종은 태의서의 醫生과 鍼生들의 침 구학습을 엄격히 할 것을 하교하여 이에 따 라 침생들은 甲乙經 과 脈經 을 반드시 읽을 것이 요구되었다. 이런 연유로 唐代에는 침구전문의들이 많이 배출 되었는데, 脈法과 鍼法에 정통했으며 明堂經 과 明堂圖로 유명한 甄權, 뜸으로 骨蒸을 치 료한 崔之悌, 明堂圖를 교정하고 많은 경외 기혈을 보충하고 아시혈의 개념을 정리했던 孫思邈 등은 대표적인 唐代 침구학자들이다.
그리고 작자미상의 明堂灸經 , 新 集備急灸經 , 灸法圖殘卷 , 點 烙三十六黃經 과 손사막의 千金要方 , 千金翼方 , 蘇敬의 脚氣灸 方 , 崔之悌의 骨蒸病灸方 , 王燾 의 外臺秘要 등 침구에 관한 서적들
이 편찬되어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4). 經典을 중시하는 고유의 의학전통을 계승한 발해는 이러한 침구서적들을 구하여 깊이 공부하였을 것이다.
2) 鍼의 제조에 관한 고유의 技術
침의 기원이 우리 민족과 관련이 깊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뿐만이 아니 라 전통과학사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우리 민족은 고조선 이래로 침의 제조에 필요한 우수한 기술과 양질의 재료도 있었다. 발해 는 이러한 先代의 문화를 이어받아 우수한 침을 제조하였다고 생각된다.
(1) 鍼의 기원
素問․異法方宜論 에서 “동방의 지역은…그 병이 모두 癰瘍으로 되어 그 治 가 砭石에 의한 고로, 砭石이 또한 동방으로 부터 來한 것(東方之域…其病皆爲癰瘍 其治 宜砭石 故砭石者 亦從東方來.)”이라 하여 그 鍼術의 연원을 밝히고 있다. 說文解字 에서는 “砭, 以石刺病也.”라고 하여 砭 石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돌로 만든 도구임 을 밝히고 있다. 山海經 의 「東山經」
과 「東次二經」에서는 중국의 동쪽에 있는 산들을 소개하면서, 고씨산(高氏山)과 부려 산(鳧麗山)에서 잠석(箴石)이 많이 난다고 하였다5). 잠석에 대해서 東晉의 郭璞은 “砥 鍼으로 만들어 癰腫을 하는 것”이라고 주석 하였는데4), 山海經 의 전체 내용 가 운데 잠석은 東山經에서만 보인다. 이러한 근거로 보아 초기에는 砭石 혹은 箴石을 이 용하여 돌을 곱게 갈아서 뾰족하게 만들어
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Fig. 2. 함경북도 웅기면 송평동 신석기시대 유적에 서 출토된 석침과 골침6)
石鍼말고도 또 다른 초기 침의 형태로는 骨鍼이 있다. 기존의 사학자나 고고학자들은 침이나 바늘과 같이 뾰족한 도구를 대체적 으로 바늘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으나, 바늘 귀가 없는 것은 의료용 도구인 침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Fig. 2>에서 좌측 은 石鏃과 石鍼이고 가운데는 磨製石鏃과 石斧 우측은 骨鍼 骨刺器이다. 골침의 경우 구멍이 없으니 바늘로 사용한 것은 아닌 것 같으며, 무척 가늘고 예리한 것이 외과용 수 술도구 등으로 사용된 것 같지도 않으니 아 마도 일반적인 침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김두종도 한국의학사에 서 서포항(라선직할시 굴포리)․오동(함경북 도 회령) 등 고조선의 여러 유적에서 뼈로 만든 침이 출토되었고 하였다6). 이로 보아
초기에는 石鍼과 더불어 骨鍼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內經 과 山海經 의 砭石과 箴石에 관한 문헌상의 근거와, 고조선 시기 의 유적에서 石鍼과 骨鍼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鍼은 동방에서 기원되었으며, 시기적으로는 고조선시대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 침의 제조를 위한 재료와 금속가공기술 침구학 분야에서 침의 제조나 재료에 관 한 역사적인 연구는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특히 폄석에서 현재의 금속침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였다.
재료면에서 보면 초기에는 石鍼과 骨鍼을 사용하였을 것이나, 문명이 발달하면서 침의 재료에도 변화가 생겼을 것이다. 석기시대가 끝나면서 청동기 시대가 열렸는데, 우리 민 족의 청동기의 사용은 BC.2500년경으로 보 며 중국의 황하문명보다도 300년 가량 앞섰 다고 한다7).
당시 고조선의 銅을 가공하는 기술은 현 대과학기술과 비교해보더라도 놀라울 정도 였다. 고조선에서는 이미 鍍金과 板金, 鏤金 등의 금속가공 기술을 사용하였다7). 이 중 에서 도금법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데, 고 조선에서 사용했던 도금법은 아말감합금에 의한 수은도금과 박도금이었다. 수은은 철․
니켈․코발트 등을 제외한 거의 모든 금속 을 녹이면서도 열에는 증발하는 특성을 가 지고 있다. 그러므로 수은에 금이나 은 등을 혼합하여 아말감을 만들어 그것을 청동기에 바르고 열을 가하면 수은은 증발하고 금이
나 은만 청동기의 표면에 남아 도금되는 것 이다. 기원전 10세기 후반기에 보급된 馬具 류와 수레부속품들에서 보이는 금동 제품들 은 아말감합금의 수은도금 제품이었다.
또한 합금기술에서도 아연을 의도적으로 배합하여 청동기를 주조하여 일반 청동에 비해 우수한 아연-청동 합금을 사용하였는 데 이는 한국청동기만의 특징이라고 한다8). 이러한 청동기의 사용은 침의 재료에 있어 서도 획기적인 변화를 만들었을 것으로 보 인다. 청동기술에서 중요한 기술 중의 하나 는 거푸집을 만드는 것인데, 중국에서는 흙 으로 만든 土鑄型을 사용했으나, 고조선에서 는 더 높은 수준의 滑石製 거푸집을 사용했 으며, 이와 더불어 가장 정교하고 높은 기술 을 요구하는 蠟型(밀랍과 송진을 섞어 틀을 만듬)도 사용했다. 이것은 아주 섬세한 제품 을 만들 수 있다는 잇점이 있다. 고조선시대 의 유물 가운데 섬세한 잔줄무늬로 장식된 청동거울은 밀랍틀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본 다9).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고조선에서는 가는 鍼을 주조하여 사용할 정도의 기술력 이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은 우수한 금속가공기술을 바탕으 로 이미 고조선 시기에 의료용 銅鍼을 만들 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숭실대학교 박 물관에는 고조선 시기의 청동침의 주물틀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것이 의료용 침을 만들 던 주물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10).
침은 피부를 뚫고 인체 내부로 들어오므
로 몇 가지 기본요건을 충족시켜야 안심하 고 사용할 수 있다. 즉, 독성이나 거부반응 이 없는 인체에 무해한 재료여야 하며, 일정 한 경도와 강도를 유지할 수 있는 기계적 성질을 갖추어야 한다. 또한 비싸지 않고 비 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여야 한다. 이 러한 조건에 맞는 재료가 있으니 바로 高麗 銅이다.
일본 정창원의 소장품에는 남북국시대에 만들어진 은침 1쌍, 철침 1쌍, 별도의 은침, 동침, 철침 합계 7개가 있다고 한다11). 이를 통해 남북국시대에 금, 은, 동, 철 등의 금속 재료로 침을 만들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금이나 은이 좋은 재료가 되지만 귀금속이 기 때문에 널리 사용되기 힘든 재료이며, 철 침에 대하여서는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 므로 본 논문에서는 銅을 위주로 살펴보도 록 하겠다.
명나라 사람 董越이 1488년에 조선에 사 신으로 와서 보고들은 것을 賦로 적은 朝鮮賦 에 우리나라의 銅에 관해 기록해 놓았는데, “여러 금속 중에서 생산되는 바가 가장 많아서 구하기 쉬운 것은 銅만한 것이 없다.”고 하여②, 우리나라에서 銅이 많이 났 음을 논증해준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주석 에서 “조선에서 나는 銅은 가장 견고하고 붉으며 식기와 수저 등을 이것으로 만드는 데 중국에서 高麗銅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다.”라고 하였다③. 식기나 수저 같이 음식이 나 입에 닿는 것은 녹이 슨다거나 하여 인 체에 독반응이나 거부반응을 유발해서는 안
② 五金莫究所産最多者銅
③ 朝鮮地産銅, 最堅而赤, 食器匙箸, 皆以此爲之, 卽華所謂高麗銅也.
되므로 해가 되지 않는 재료를 사용하였음 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건을 만족 시키는 것이 高麗銅이었음을 논증해주는 좋 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高麗銅은 고구려, 백제 이래로 우리 민족이 애용하였던 생황(笙簧)이라는 악기에 입을 대고 불어서 떨림을 만들어 소리를 내 는 부분인 황(簧, reed)을 만드는데도 사용 되었다. 明의 王圻가 지은 續文獻通考 의 笙에 관한 기록을 보면, “笙簧은 반 드시 高麗銅으로 만든 것을 사용한다”고 하 여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황(簧)도 입에 직접 닿고 침이 많이 뭍는 부위이므로 부식성이나 독성이나 거부반응이 없어야 한 다는 조건을 만족해야한다.
금속침도 수저와 식기류, 簧과 마찬가지의 조건을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으며 오히려 더 엄격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할 것으로 생 각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헌적인 근거들은 高麗銅를 이용하여 침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가설의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앞서 언 급했던 우수한 금속가공기술을 근거로 보면 충분히 가능하다.
고조선의 이러한 금속기술은 고구려에서 계승․발전시켰다. 고구려의 연금술은 陶弘 景의 本草經集註 의 金屑의 조문을 보더라도 세계적인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 는데6), 그 연원은 고조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뛰어난 금속가공기술과 양질 의 재료를 바탕으로 우수한 침을 실제로 생
산하였다는 것은 다음의 문헌적 근거를 통 해 알 수 있다.
酉陽雜俎 7券 「醫」문에 보면 魏 나라 때에 고구려 客이 침을 잘 놓았는데 1 촌정도 되는 머리카락을 10여 토막을 낸 후 머리카락 가운데의 구멍을 침으로 꿰어 연 결시켰다는 기록이 있다④. 침의 제조술의 측면에 보면 그 정도로 가늘게 하여도 부러 지거나 쉽게 휘어지지 않는 침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니, 이는 고구려가 침의 제조 에 관한 뛰어난 수준을 가지고 있음을 간접 적으로 보여준다.
후기신라에서는 침을 당에 수출했다. 당고 종 咸淳 3년(672년)에 문무왕이 鍼 400개를 헌납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11), 경문왕 9년 (869년)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함께 보 낸 물품 중에 ‘슬슬전금침통(瑟瑟鈿金針筒) 30구, 금화은침통(金花銀針筒) 30구, 침 1500 개’를 겸하여 進奉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 다⑤. 고구려에 우수한 가공기술이 있었고 후기신라에서도 鍼을 제조하여 당나라에 수 출까지 할 정도였으니, 이를 통해 발해에서 도 우수한 침을 제조하여 사용하였을 것을 알 수 있다.
발해는 침을 제조하는데 필요한 양질의 재료도 생산했다. 遼史地理志 의 咸 州에 대한 기록을 보면, “함주는 안동도호부 가 설치되었던 지역이고, 고구려의 銅山縣이 있고, 발해의 銅山郡이었다…”라고 하여 銅 山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이름에서 추정해 볼 수 있듯이 이 지역에는 銅이 많이 생산
④ 酉陽雜俎 7券 「醫」 “魏時有句驪客 善用鍼 取寸 斬爲十餘段 以針貫取之 言髮中 也 其妙如此”
⑤『三國史記』券11「新羅本紀」第11 景文王 條
“九年秋七月, 遣王子蘇判<金胤>等入<唐>謝恩,…(중략)…瑟瑟鈿金針筒三十具, 金花銀針筒三十具, 針一千五百. ”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현재 알려 진 발해의 銅 생산지는 갑산의 고진동, 연해 주, 요하의 하류지방, 그리고 길림성 천보산 일대였다고 한다. 실제로 러시아에 위치한 발해의 유적인 니콜라이에프스크에서 각종 청동기와 청동생산 도구가 나왔으며, 노보고 르제예브카와 크라스키노에서는 청동도가니, 거푸집, 용해물찌꺼기 등이 나온바 있다고 한다13). 또한 冊府元龜 外臣部에 보 면 발해와 신라가 당나라에 熟銅을 수출하 고 있었다는 기록⑥이 나오는데, 발해가 당 에 숙동(熟銅)을 수출할 수 있었던 것은 발 해의 銅이 중국에서 생산된 銅보다 잘 정제 된 우수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바로 고조선 이래로 중국에서 인정받은 高麗銅이었기 때 문일 것이다. 실제로 중국에서 발해의 숙동 같이 잘 정제된 양질의 동이 널리 생산된 것은 명나라 시대부터라고 한다13). 그러므로 발해는 양질의 재료와 우수한 가공기술을 바탕으로 高麗銅을 만들어 인체에 무해한 침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3) 발해의 鍼術
발해의 침구학에 관한 기록이 현재까지 알려진 바가 없지만, 선대인 고구려의 뛰어 난 침술과 인접국었던 후기신라의 침구학의 수준을 통해 발해의 침술의 수준을 추정할 수 있으므로 이를 통해 발해의 침술에 대해
살펴보겠다.
(1) 고구려의 침술
앞서 언급했던 酉陽雜俎 7卷 「醫
」문에 보면 “魏나라 때 高句麗의 객이 침을 잘 놓았다. 1촌 되는 머리카락을 취하여 10 여 토막으로 끊어 이를 침으로 꿰어 연결시 켰다. 그는 머리카락 가운데가 비었다고 말 하였다. 이처럼 재주가 묘하였다.” 라고 하 였다. 이는 고구려 사람들이 머리카락의 가 운데가 비어있음을 알고 있을 정도로 고구 려의 의학 수준이 고명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또한 토막 난 머리카락을 침을 이용하 여 가운데의 구멍을 꿰어 연결시킬 정도로 침을 잘 다루었으며, 그 정도로 가늘면서도 부러지지 않는 침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는 것이니 고구려의 침에 관한 높은 수준을 알 수 있다.
日本書紀 卷24 皇極主 4年(신라 선덕여왕 14년, 645년)에 보면 고구려에서 침을 배운 일본의 학문승 鞍作得志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가 호랑이⑦와 더불어 친구가 되어 枯山을 靑山으로 변케하거나 黃地를 白水로 바꾸는 등의 기이한 침술을 배웠다는 기록이 있는데14), 진위 여부는 가 릴 수 없으나 그만큼 고구려의 침술이 뛰어 났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전통을 계승 한 발해의 침술 또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⑥ 冊府元龜 권999 外臣部 互市
“개성 원년(836년) 6월 치청절도사가 주청문을 올렸다. ‘신라 발해 등이 숙동을 수출하려 하는데 이를 금지하지 말아 줄 것 을 바랍니다.’ 그 달 경조부에서도 주청문이 올라왔다. ‘건중 원년(780년) 10월 6일 칙서를 내렸다.’ 錦罽 綾羅 縠繡 織成 細 紬 絲 布 氂牛尾 珠 銀 銅 鐵 奴婢 등은 모든 번(주변국가)과 무역해서는 안된다." (開成元年六月 淄 節度使奏新羅渤海 將到熟銅 請不禁斷 是月京兆府奏准 建中元年十月六日 勅諸錦罽 綾羅 縠繡 織成 細紬 絲 布 氂牛尾 珠 銀 銅 鐵 奴婢 等 並不得與諸蕃互市)
⑦ 호랑이가 사람처럼 말을 하고 친구가 되었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므로, 여기서 虎는 仙人이라고 생각된다.
높은 수준이었음이 분명하다.
(2) 나말여초의 裨補說
침구에 관한 유구한 전통은 남북국시대에 이르러 침구 이론으로 나라와 국토의 질병 을 치료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는데 이를 비보설이라고 한다. 燕山君日記 1년 5월 28일에 보면 비보설은 道詵을 宗祖로 삼는다고 하였으며, 梵海禪師는 東師列 傳․道詵國師傳 에서 비보에 대해 다음 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만약 병이 들어 위급할 경우 곧장 혈 맥을 찾아 침을 놓거나 뜸을 뜨면 곧 병이 낫는 것과 마찬가지로, 산천의 병도 역시 그러하니 절 을 짓거나 불상을 세우거나 탑을 세우거나 부도 를 세우면, 이것은 사람이 침을 놓거나 뜸을 뜨 는 것과 같은지라, 이름하여 말하기를 비보(裨補) 라고 한다15).
즉, 補瀉의 원리를 이용하여 자침하거나 혹은 뜸을 떠서 사람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 처럼, 국토를 인체와 같은 유기체적인 구조 로 보고 침구학의 補瀉의 원리를 이용하여 국토의 병을 치유하여 국가와 백성들의 안 녕을 도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의학 에서의 補瀉의 원리를 응용하여 국가의 건 강과 안녕을 이루는 방편으로 비보의 개념 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전을 중시한 고유의 의학 전통을 바탕으로 한의 학에 대한 기초가 튼튼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道詵의 비보사상의 연원은 仙道에 있다고 한다. 道詵은 지리산의 異人에게 산
천순역의 지리법을 전수받았는데,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道術이 있고 秘訣을 말 하는 사람을 異人이라고 일컫고 方術을 하 는 사람을 仙道하는 사람이라 하였으니, 사 상적 계통이 전래의 仙道로 판단된다. 또한 도선이 異人을 만난 지리산은 예로부터 仙 道의 중심이 되는 산으로서 도교의 이상향 인 三神山 중의 方丈山으로 일컬기도 하였 다. 地誌에서는 지리산을 太乙眞人이 살고 여러 神仙이 모이는 곳이라 하였다. 한국 선 도의 맥을 기록한 靑鶴集에서도 도선이 勿 稽者라는 仙人의 餘韻을 띠고 있다는 기록 이 있다. 文宗實錄에서도 정안종이 도선류의 비보설에 대해 얘기하면서, “양진 비보하여 화기를 순합함은 옛 神仙이 남긴 자취입니 다.(禳鎭裨補, 順合和氣, 古神仙之遺迹.)”라고 말한 사실도 비보설의 선도사상적 계통을 위치 짓는데 참고가 된다16).
仙道사상은 의학의 기원과도 연관이 깊으 니 이러한 것 들을 통해 비보설과 고유 의 학과의 관련성은 더욱 깊다고 할 수 있다.
비록 道詵은 신라에서 활동하던 승려였지만, 이와 같은 개념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발해에도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설사 발해에는 비보설을 이용하여 사찰이나 탑 등을 짓는 것이 없었다 하더라도, 공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당시 발해의 침구에 대한 수준도 그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 經典을 중시한 전통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의학을 교육함에 있어 경전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발
해에도 이러한 전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 다. 거란의 태조가 발해를 멸망시킨 뒤 발해 의 땅에 동란국(東丹國)을 세우고 장자 ‘倍’
를 인황왕(人皇王)에 책립하여 다스리게 하 였는데, 인황왕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문 을 좋아하고 음양에 통하고 음률을 알았을 뿐 아니라 의약과 침․뜸에도 정통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인황왕이 동란국을 다스리면서 해동성국이라 불리웠던 발해의 훌륭한 문화 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것은 당연하며, 특히 의학에 관심이 깊었던 만큼 발해의 의학에 관해서도 많이 연구하였을 것이다.
契丹國志 卷14 諸王傳의 東丹王 기사를 보면 人皇王은 사냥과 수렵을 좋아 하지 않고 독서를 즐겨 東丹國에 있을 때 중국의 幽州에 사람을 보내어 금은보화로 구입한 수만 권의 서적을 醫巫閭山 위에 望 海堂이라는 서당을 지어 비치하였다고 한다
17). 훗날 그가 후당으로 망명할 때에 소유하 고 있던 수만 권의 책 중 수천 권을 가져갔 는데 그 책들은 당시 중국에서도 볼 수 없 는 異書와 醫經이었다고 한다⑧.
평소 인황왕이 의학을 좋아하고 책을 많 이 모았다는 것과, 동란국이 발해 멸망 직후 거란의 태조에 의해 세워졌으며 인황왕이 첫번째 왕이 되었음을 고려해 볼 때, 인황왕 이 소유하고 있던 의서들 중 상당수가 발해 가 간직하고 있던 고유의 의학경전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유의 의학경전들이 존 재하고 잘 보존되었던 것은 바로 경전을 중 시하는 고유의 전통으로 인한 것이다. 특히
침구에 대해 유서 깊은 우리 민족의 국가인 발해에는 침구학에 관한 고유의 의학경전이 많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Ⅲ. 結 論
이상과 같이 발해의 침구학에 관한 몇 가 지 사실들을 살펴보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발해는 침구학 분야에서 고유의 전통을 많이 계승하였다. 鍼의 동방기원설에서 알 수 있듯이 鍼灸의 기원은 우리 고유의 의학 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는 발해의 침구학 형성에 중요한 배경이 된다.
침의 제조에 있어서는 고조선에서 고구려 로 내려오는 우수한 금속가공기술은 발해에 서 우수한 침을 생산하는데 중요한 기술적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발해는 高麗銅을 생산하였으며 이를 통해 인체에 해가 되지 않는 우수한 金屬鍼을 생산하였 다. 이를 통해 발해가 침의 제조에 있어 우 수한 고유의 전통을 이어나갔음을 알 수 있 었다.
발해의 침술에 관하여서는 고구려의 뛰어 난 침술이 중국과 일본에까지 알려져 있었 던 것을 미루어 볼 때 고구려를 계승한 발 해도 이를 이어 받아 침술의 수준이 뛰어났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침구에 관한 유구한 전통은 남북국시대 말에 침구학의 이론으로 나라와 국토의 질병을 치료하는 裨補사상이 나오는데 까지 이르렀다. 비록 기록상 남아있지 않더라도 동시대의 신라와
⑧ 冊府元龜 卷997 技術 “後唐 契丹東丹王 歸中國明宗 賜姓名贊華尤 好畫及燒金煉汞之術 始泛海歸朝載書數千 自 樞宻使趙延夀 每求假異書及醫經 皆中國無者 永康王兀欲 東丹之長子也 後改名聿 好行仁惠善丹 尤精 藥”
후대의 고려에 이러한 사상이 있었다는 것 을 미루어 볼 때 발해도 이러한 사상은 존 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발해 멸망 직후 세워진 東丹國의 첫 번째 왕인 人皇王은 의약에 정통하였는데 그가 後唐으로 망명할 때 중국에 없는 異書 와 醫經 수 천권을 가지고 들어갔다는 기록 이 있다. 이는 발해에 침구학을 비롯한 민족 고유의 의학경전들이 많이 존재하였던 것을 말해주며 경전을 중시하는 고유의 전통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점들 을 미루어 볼 때 발해는 고조선에서 고구려 로 이어지는 고유 의학의 정통성을 계승하 였으며 침구학에 있어서 당시 최고의 수준 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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