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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i polla; e[cw uJmi'n levgein ajll! ouj duvnasqe bastavzein a[rti:

문서에서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페이지 54-60)

이 외에도 너희에게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지금은 너희가 견디지 못할 것이다.

13- o{tan de; e[lqh/ ejkei'no", to; pneu'ma th'" ajlhqeiva", oJdhghvsei uJma'"

ejn th'/ ajlhqeiva/ pavsh/: ouj ga;r lalhvsei ajf! eJautou', ajll! o{sa ajkouvei lalhvsei, kai; ta; ejrcovmena ajnaggelei' uJmi'n.

그러나 그분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그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 다. 그는 그의 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들은 것만 말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 오는 일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ejkei'no" ejme; doxavsei, o{ti ejk tou' ejmou' lhvmyetai kai; ajnaggelei' uJmi'n.

그는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그는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기

118) C. K. Barrett,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p. 340.

119) Leon Morris,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 699.

120) Ibid.

때문이다.

15- pavnta o{sa e[cei oJ path;r, ejmav ejstin: dia; tou'to ei\pon, o{ti ejk tou' ejmou' lambavnei kai; ajnaggelei' uJmi'n.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은 내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 하였다.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본문에서 Παρακλητο 의 여러 가지 사역 가운데 제자들을 인도하는 사역이 있다. Παρα κλητο 는 예수가 제자들을 위해 시작했던 인도 사역을 이어받나 수행하시며, 그들을 모 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우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할 말이 많았으나 그들이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견디다’(

bastavzw

)란 동사는 돌을 드는데(요 10:31), 어떤 짐을 지는데(요 19:17), 어떤 견디기 어려운 것을 지는데(갈 6:2) 사용되고 있다. ‘견딜 수 없다’는 것은 제 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능력에 제한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요한복음서 여러 곳에 나타나는 ‘그리스도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믿더라’(요 2:22; 12:16; 13:7)는 말씀이 이를 잘 반영해 준다. 이 문장(요 16:12b)에서 ‘지금’(

a[rti

)이란 단어가 맨 마지막에 온 것은 ‘강조’를 나타낸다.121) 즉, 제자 들의 영적인 성장에 비추어 볼 때 ‘이 시점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122) 그러나 ‘진리의 영’이 오실 때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것이다. 그는 제자들 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모호하게 인도하지 않고, ‘모든 그 진리 가운데로’(

ejn th'/

ajlhqeiva/ pavsh/:

) 인도한다. 여기서 ‘그 진리’는 절대적인 진리로서 그리스도 자신을 가 리킨다. 헨드리(G. S. Hendry)도 정관사 ‘

th'/

’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왜냐 하면 요한복음서의 관용적인 표현을 빌리면 진리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도래한 진리

121) B. F. Westcott,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Grand Rapies: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1), p. 230

122) Ibid.

(요 1:17)이기 때문이요, 성부에 의해 그리스도에게 풍성하게 주어진 그 진리(요 16:15)이 기 때문이며, 그리스도가 이에 관하여 ‘내가 진리요’(요 14:6)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123) 한마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재현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진리의 성령은 모든 그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데 여기의 ‘인도한다’(

oJdhgew

)라는 동 사는 요한복음서 만이 여기에 사용하는 것으로, 예수님이 성령이 인도하시는 ‘그 진리’인 것처럼 예수님이 ‘길’(

oJdos

)이라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는 듯하다.124) 성령이 제자들을 진 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증거는 그가 자기 마음대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만을 말하기 때문이다.

Παρακλητο 는 장래 일을 알려 주신다. 여기서 '앞으로 오는 일'(

ta; ejrcovmena

)은 종 말론적인 사건들로서 미래에 일어날 것을 의미하고 있다. Παρακλητο 가 장래의 일을 알 리신다는 것은 매일 매일의 특수한 일들이거나 독창적인 예언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 니라,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해 사도들만이 받을 Παρακλητο 의 해설을 말한다.

'그가 너희에게 알릴 것'이라는 독특한 요한복음서 저자의 기술이 있다.125) 13절의 목 적어는 '올 일'이고 14, 15절의 목적어는 '내 것'이다. 즉 성령 Παρακλητο 는 예수의 것 만을 알린다. '너희에게 알린다'(

ajnaggelei' uJmi'n

)는 말의 반복에 있어 요한복음 저자적 인 특징은 Παρακλητο 사역의 이런 면을 강조하는 것이다.126)

이 처럼 성령의 사역은 미래를 나타내 주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테니(M. C. Tenney) 는 성령께서 '올 일'을 알린다는 부분은 신약성서의 영감에 대한 증거를 제시해 주는 것 으로 보았다.127) 성령의 인도사역에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그 사역이 전적으로 그 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이라는 사실이다.128) 성령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 고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ejkei'no" ejme; doxavsei

). 여기에서 대명사

123) George S. 핸드리, 「기독교신학과 성령」, 황승룡 역(서울: 복음문화사, 1984), pp. 23-24.

124) Leon Morris,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 700.

125) Ibid., p. 701.

126) Ibid.

127) Merrill C. 테니, 「요한복음서 해석」, 김근수 역(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9), p. 225.

128) Leon Morris,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 701.

ejme;

는 동사 앞에서 강조적 위치에 놓여있다.129) 그 분은 바로 어느 누구도 아닌 그리스 도요 성령의 사역의 주제가 되는 분이다130)

성령은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알림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한다. 그는 제자들에게 알려야 될 것을 예수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새로운 계시를 가져오지 않는 다. 예수는 아버지를 사람들에게 계시하므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다(요 17:4). 마찬가 지로 성령Παρακλητο 는 예수를 사람들에게 계시하므로 예수를 영화롭게 하신다.131) 우리는 여기서 다시 Παρακλητο 가 예수님과 같은 사역을 함을 뚜렷이 볼 수 있다. Πα ρακλητο 는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알리며, 예수의 영광만을 나타낸다. Παρακλητο 는 승 귀하신 예수의 말씀을 알리는 유일한 중보자다.132) 그리고 예수의 자리에 오셔서 그의 사역을 계속하시는 예수의 다른 자아이다.

우리는 영광에 대한 언급에서 실현된 종말론의 한 요소가 있음을 볼 수 있다. 공관복 음서에서 인자는 마지막 날에 영광가운데 올 것이다(막 13:26).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 영 광은 그리스도의 현존과 Παρακλητο 를 통하여 이미 왔다.133)

우리는 마지막 절(요 16:15절)에서 Παρακλητο 의 아들에 대한 관계뿐만 아니라 아버 지에 대한 관계도 엿볼 수 있다. 아버지의 것은 바로 아들의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은 아 버지의 일을 하신 것이다. 따라서 Παρακλητο 가 예수의 것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알리겠 다는 것은 곧 아버지의 것을 알리겠다는 말과 같다. 다시 말하면 Παρακλητο 는 예수의 자리에 와서 결국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Παρακλητο 가 자기의 사역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기의 것'이었던 것을 취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요 16:15).134) 요한적인 사고에 있어 Παρακλητο 가 아버지께로부터 오지 않는 예수의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없다.135) 이처럼 Παρακλητο 의 사역은 아버지의 사역이면서 곧 아들의 사역이다. 그러므로 Παρακλητο 의 인도 사역에서 Παρακλητο 129) B. F. Westcott,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p. 231.

130) Ibid.

131) R.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 716.

132) M. E. Boring, The Influence of Christian Prophecy on the Johannine Portrayal of the Paraclete and Jesus, NTS 25 (1978. 10): 115.

133) R.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 716.

134) B. F. Westcott,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p. 231.

135) R.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 717.

예수님 사역과의 연속성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Παρακλητο 의 인도 사역에서 그의 본질이 뚜렷한 인격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13절에서

ejkei'no"

to; pneu'ma th'" ajlhqeiva"

와의 연합은 특이한데, 남성 대명사가 중성 명사와 나란히 병행(immediate juxtaposition)되어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 서의 저자가 성령을 인격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136)

우리는 본 구절에서 진리의 성령으로 표현된 Παρακλητο 의 사역을 고찰하였다. Παρα κλητο 는 제자들을 모든 '그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장래 일을 알리시는 진리의 전 개자(Unfolder)이다. 그리고 이 모든 사역은 아버지의 것 곧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알리 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역이다. 즉 Παρακλητο 는 그리스도의 자리에 오셔서 그의 구원 사역을 계속하시는 것이다.

6) 요한복음서 외(外) 보혜사(요일 2:1)

Tekniva mou, tau'ta gravfw uJmi'n, i{na mh; aJmavrthte. kai; ejavn ti"

aJmavrth/, paravklhton e[comen pro;" to;n patevra, !Ihsou'n Cristo;n divkaion:

나의 자녀들아 너희로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너희에게 이 글을 쓴다. 만약 어떤 사람 이 죄를 지을지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하시는 분이 우리에게 있다. 그 분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구절은 요한서신에 나타나는 유일한 Παρακλητο 에 관한 구절이다. 또 유일하게 예 수 그리스도를 Παρακλητο 로 부르는 구절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범했을 때 그들을 위하여 대언해 주시는 자이시다. 그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 9:24),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자 이시다(롬 8:34; 히 7:25). 즉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중재자(仲裁者)로서 '변호자'로 불

136) Leon Morris,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 699.

려지고 있다.

브루크(A. E. Brooke)도 요한서신에 유일하게 나타나는 Παρακλητο 는 '변호자'가 분 명하다고 한다.137) 모리스도 이 단어의 법적인 면이 분명하기 때문에 '변호자'가 적절하 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Παρακλητο 의 분명한 하나의 사역은 변호하시는 일이다. 그런데 요한은 이 런 변호의 사역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곧 천상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Παρακλητο 로 표현된 것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서에서 예수께서 약속하신 '다른 보혜사'(

a[llon paravklhto

)와 잘 연관이 될 수 있다.

즉 예수는 분명히 자신을 ‘첫 보혜사’(first Paraclete)로서 이해하셨다.138) 따라서 예수께 서 ‘첫 보혜사’가 되시고 약속하신 성령은 ‘다른 보혜사’(요 14:16)가 되신다.

이러한 Παρακλητο 의 이해를 그의 사역과 연관시켜 보면, 첫 보혜사인 예수께서는 아 버지 앞에서 곧 천상에서 우리를 위한 변호자가 되시고, 다른 보혜사인 성령은 지상에서 우리를 위한 변호자가 되신다. 이처럼 성자와 성령은 함께 변호자(대언자)가 되신다. 성 자를 ‘대언자’라고 하면 성령은 ‘다른 대언자’이시요(요 14:16 참조), 예수의 다른 자아인 것이다.

본 구절에서 나타난 Παρακλητο 의 변호(대언) 사역은 천상에서 예수의 사역에 적용되 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의로우신 분으로 묘사되었다. 곧 변호의 사역은 의로우신 예수 님 즉 인격자의 사역이시다. 인격자만이(어떤 힘이 아니다) ‘의로운자’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다른 Παρακλητο 의 변호 사역도 그가 인격자임을 암시해 준다.

던(J. D. G. Dunn)도 성령이 예수님의 성격을 취하셨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인격성은 성 령의 인격성이 되었다고 말한다.139)

우리는 Παρακλητο 의 변호(대언) 사역에서 다시 Παρακλητο 가 예수님과 같은 사역을 함을 보았다. 곧 Παρακλητο 는 예수님의 자리에 와서 그의 사역을 계속하시는 예수님의

‘제2의 자아’인 것이다.

137) A. E. Brooke, The Johannine Epistles(ICC; Edinburgh: T. & T. Clark, 1980), p. 23.

138) James D. G. Dunn, Jesus and the Spirit(London: SCM Press Ltd. 1975), p. 350.

139) Ibid., p. 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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