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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6:7-15

문서에서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페이지 32-54)

왜냐하면 세상이 저를 보지도 못하고 ․․․․․․․․․(17c.세상x보혜사/보지도 알지도 못함이라 알지도 못하다 )

너희는 저를 아나니 ․․․․․․․․․․․․․․․․․․․ (17d. 제자-보혜사/알다)

왜냐하면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실․․․․․․․․․․․․․(17e. 보혜사-제자/거하다) 것이요

또 저는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7f. 보혜사-제자/있다)

2)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 (26a. 아버지-예수-성령=

보내실 성령. 보혜사/ 보내다)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 (26b. 보혜사-제자/가르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 (26c.보혜사-예수-제자/생각 나게 하시리라.’ 나게 하다)

3)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내실․․․․․․․․․․․ (26a. 그 보혜사. 보혜사/보내다)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그 진리 ․․․․․․․․․ (26b. 아버지-성령/나오다) 의 성령이 오실 때.

그가 나에게 대하여 증거하실 것이요 ․․․․․․․․․(26c. 성령-예수/증거하다)

4) 요 16:7-15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노니 ․․․․․․․․․․ (7a. 예수-제자/말하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 (7b. 예수-제자/떠나다,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7c. 예수-제자/떠나다)

그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 (7d. 보혜사-제자/오다) 할 것이요

그러나 내가 가면,․․․․․․․․․․․․․․․․․․․․․․ (7e. 예수-제자/가다)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 (7f.예수-보혜사-제자/보내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 (8. 보혜사-세상/책망하다)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들이 나를 믿지 ․․․․․․․ ․ (9. 세상x예수/믿지 아니하다)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 (10a. 예수-아버지/가다)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0b. 제자x예수/보지 못하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11. 보혜사-세상/심판하다)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12a. 예수-제자/말하다)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 (12b. 제자-예수/감당하지 못하다) 그러하나 그가, 곧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 ․ (13a. 보혜사=진리의 성령/오다)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 ․․․․․ ․․․ (13b. 보혜사-제자/인도하다) 하시리니.

왜냐하면 그가 자신에 관하여 말하지 ․․․․․․ (13c. 보혜사x자기자신/말하지 않다) 않고

오직 그가 듣는 것을 말하시며,․․․․․․․․․․ ․ (13d. 보혜사-예수/듣고 말하다)

그가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 (13e. 보혜사-제자/알리다)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니,․․․․․․․․․․ ․ (14a. 보혜사-예수-영화롭게 하다) 왜냐하면 그는 내 것을 취해서 ․․․․․․․․․․․․․․ (14b. 보혜사-예수/취하다) 그는 그것을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 (14c. 보혜사-예수-제자/알리다) 무릇 아버지가 가진 것은 다 내 것이라 ․․․․․․․․․․ ((15a. 아버지-예수/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 (15b. 예수-제자/말하다)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 (15c. 보혜사-예수-제자/알리다) 하였노라.’68)

위 본문 분석을 통하여 요한복음서에서 ‘Παρακλητο 와 성령, Παρακλητο 와 예수, 다 른 Παρακλητο , 진리의 영’의 관계를 고찰하고자 한다.

1) Παρακλητο 와 성령

요한복음서 저자의 새로운 개념의 하나는 Παρακλητο 를 성령과 동일시하는 것이다(요 14:26a). 여기에 나타난 ‘성령’ (το πνευμα το αγιον)이란 표현은 영에 대한 가장 완 전한 묘사(the Fullest Description of the Spirit)69)로서 요한복음서에 유일하게 이곳에서 만 발견할 수 있다.

요한복음서 저자의 성령 이해는 신약의 다른 곳에 나타난 성령 이해와 다르지 않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성령 Παρακλητο 는 아버지가 보내시며(요 14:16b), ‘아버지께서 예 수의 이름으로’ 보내시는 분이다(요 14:26a). 따라서 Παρακλητο 는 아버지와 아들과 매 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Παρακλητο 는 아버지가 거룩하시고(요 7:11), 예수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막 1:24; 눅 4:34)인 것처럼, 거룩한 영(성령)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영이시고 (요 4:24), 예수께서는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요 20:21). 그리고 동일 논리로 바울은 68) 최갑종, 「성령과 율법」, pp. 133-135.

69) Leon Morris,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 656.

성령을 ‘하나님의 영’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한다(롬 8:9).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Παρακλητο 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자리에 오시는 분이다.

이와 같이 요한복음서의 저자의 성령 이해는 신약의 다른 곳에 나타난 성령 이해와 본 질적인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Παρακλητο 를 성령과 동일시한다고 해서 잘못을 범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약의 다른 곳에 나타난 모습과 다른 것은 요한복음서 저자만이 성령을 Παρακλητο 라고 기술하였다는 점이다. 저자는 고별설교의 맥락에서 성령Παρακλ ητο 를 떠나시는 예수와 긴밀한 관계에 놓는다. 즉 요한복음서 저자는 Παρακλητο 를 떠 나시는 예수가 아버지와 함께 계실 동안 제자들 사이에 있을 ‘예수의 현존(現存)’으로서 제시한다.

요한복음서 저자가 독특하게 사용하고 있는 Παρακλητο 는 그 본질(本質)이 인격임을 나타내 주는데, 그 결정적인 증거는 남성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Παρακλητο 가 인칭 대명사(εχεινο )로 지칭(指稱)되는 사실이다.70) 이 사실에서 Παρακλητο 는 인격성(人格性)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추상적(抽象的)이고 비인격 적인 힘의 영역으로부터 인격적인 영역(領域)으로 옮겨 놓았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서 저 자는 Παρακλητο 를 하나의 인격으로서 구약 사상 속의 신적인 능력 이상의 것을 암시 한다고 할 수 있다.71)

요한복음서 14장 26절에 드러난 Παρακλητο 의 사역적인 측면, 곧 모든 것을 가르치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면을 고려해 볼 때도 이것은 인격자만이 할 수 있는 인격자 의 사역이다.

요약하면 요한복음서 저자가 사용한 Παρακλητο 는 신약의 다른 곳에 나타난 성령과 동일한 분으로서, 인격성을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떠나시는 예수가 아버지와 함께 계실 동안 ‘예수의 인격적인 임재’로 나타내고 있다.

70) Ladd는 바로 앞에서 성령(το πνευμα)은 중성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여기서 남성형태(εχεινο ) 로 쓰여질 때 우리는 여기서 성령의 인격성이 시사된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고 말한다. G.

E.래드, 「신약신학」, 신성종. 이한수 공역(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pp. 387-388.

71) Ibid.

2) Παρακλητο 와 예수

요한복음서 저자는 어떤 특별한 역할에 있어서 Παρακλητο 를 ‘성령’과 동일시하였다.

그러나 요한복음서의 저자가 증거 하는 Παρακλητο 개념은 우리가 신약에서 성령에 관 해서 알고 있는 바를 능가하고 있다. 특히 Παρακλητο 는 본질(本質)에 있어서 예수와 같을 뿐만 아니라( 14:16b),72) 활동에 있어서도 예수와 같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Παρακλ ητο 를 언급하는 모든 곳에서 예수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요 14:26a, 26c; 15:26a, 26c; 16:7f, 13d, 14a, 14b, 14c, 15c).

브라운은 Παρακλητο 와 예수와의 관계(關係)를 아래의 네 주제에서 구체적(具體的)으 로 다루고 있다.73)

(1) Παρακλητο 의 오심

가) Παρακλητο 는 오실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도 세상에 오셨다(요 4:43; 16:28;

18:37).

나) Παρακλητο 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신다: 예수도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신다(요 16:27-28).

다) 아버지는 예수의 요구에 따라 Παρακλητο 를 주실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주 실 것이다(요 3:16).

라) 아버지는 Παρακλητο 를 보낼 것이다: 예수도 아버지에 의해 보냄을 받으셨다 (요 3:17).

마) Παρακλητο 는 예수의 이름으로 보내어질 것이다: 예수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 셨다(요 5:43).

(2) Παρακλητο 의 신분

가) 만일 Παρακλητο 가 ‘다른 보혜사’(another paraclete)라면, 예수는 ‘첫 번째 보혜 사’(the first paraclete)이다(요일 2:1).

72) 헬라어에는 ‘다른’이라는 말이 두 개 있다. 그것은 αλλο 와 ετερο 이다. αλλο 는 ‘같은 종류 중에 다른’(another of the same kind)을 의미하고, ετερο 는 ‘다른 종류 중에서 다른’(another of the different kind) 을 의미한다.

73) R. E. Brown, The Paraclete in the Fourth Gospel, pp. 126-127.

나) 만일 Παρακλητο 가 ‘진리의 영’이라면, 예수도 진리이다(요 14:6).

다) 만일 Παρακλητο 가 ‘성령’이라면, 예수님도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다(요 6:69).

(3) 제자들에 대한 Παρακλητο 의 관계

가) 제자들은 Παρακλητο 를 알거나 인식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을 것이다: 제자 들이 예수를 알거나 인식하는 것은 특권이다(요 14:7, 9).

나) Παρακλητο 는 제자들 안에 또 제자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다(ειναι εν or με τα μενειν παρα): 마찬가지로 예수도 제자들안에 또 제자들과 함께 거하신다(요 14:20;

17:23, 26 -εν ’; 요 15:4, 5 - ‘μενειν εν ’; 요 14:23 - μονη παρα).

다) Παρακλητο 는 제자들을 가르칠 것이다: 예수도 들으려하는 자들을 가르치셨다 (요 6:59; 7:14, 28; 8:20).

라) Παρακλητο 가 제자들을 모든 진리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예수는 길이요 진리 이다(요 14:6).

마) Παρακλητο 는 제자들에게 장래 일을 알리거나 계시하실 것이다: 예수도 모든 일을 알리고 계시하기 위해 오실 메시야와 자신을 동일시 하셨다(요 4:24-26).

바) Παρακλητο 가 증거 하실 것이다: 예수도 증거 하셨다(요 8:14).

사) Παρακλητο 의 가르침이나 계시는 새롭지 않다. 그는 제자들에게 예수가 가르쳤 던 것들을 기억하게 하신다. 그는 예수를 위해서 증거 하시고 예수를 영화롭게 하신다:

예수는 자신의 것을 말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가르쳐주신 것을 말씀하신다. 예 수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다(요 7:27-28; 14:13; 17:4).

(4) 세상에 대한 Παρακλητο 의 관계

가) 세상은 Παρακλητο 를 받아들일 수 없다: 악한 사람들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 았다(요 5:43; 12:48).

나) 세상은 Παρακλητο 를 보지 못 한다: 사람들(제자들)은 조금 있으면 예수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들었다(요 16:16).

다) 세상은 Παρακλητο 를 알거나 인식하지 못 한다: 사람들은 예수를 알지 못한다 (요 16:3; 7:28; 8:14, 19; 14:7).

라) Παρακλητο 는 세상이 미워하는 상황에서 증거 하실 것이다: 예수도 세상에 반

대하여 증거 하셨다(요 7:7).

마) Παρακλητο 는 예수의 재판에 관하여 세상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하실 것이다.

상기와 같은 브라운의 고찰은 Παρακλητο 와 예수 사이의 본질과 사역에 있어서 뚜렷 한 평행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즉 Παρακλητο 는 본질(本質)에 있어서나 사역(使役)에 있어서 예수님과 같은 분이다.

Παρακλητο 가 ‘내 이름으로’ 보내어질 것이라는 말씀(요 14:26a)에서 ‘내 이름으로’

란 의미를 단지 ‘내 대리인으로’라든가 ‘내 간구로서’라고 해석한다면, 예수께서 하신 약속 의 의미는 안전히 파괴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내 이름으로’ Παρακλητο 를 보 내시겠다는 말씀 속에는 Παρακλητο 의 본질이나 사역이 자신의 것과 같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3) 다른 Παρακλητο 와 예수

요한복음서 저자는 약속된 Παρακλητο 를 ‘다른 Παρακλητο ’ (αλλον παρακλητον)라 고 묘사하고 있다.

kajgw; ejrwthvsw to;n patevra, kai; a[llon paravklhton dwvsei uJmi'n, i{na meq!

uJmw'n h\/ eij" to;n aijw'na,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 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 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

여기서 우선 ‘다른’이라는 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말 성경에는 그저 ‘다른’으 로 번역되어 있어 그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헬라어에는 ‘다 른’이라는 말이 두 개 있다. 그것은 헬라어에는 ‘다른’이라는 말이 두 개 있다. 그것은 αλ λο ετερο 이다. αλλο 는 ‘같은 종류 중에 다른’(another of the same kind)을 의미 하고, ετερο 는 ‘다른 종류 중에서 다른’(another of the different kind) 을 의미한다.74) 라이트후트(J. B. Lightfoot)는 ετερο 는 종류의 차이를 암시한다고 주장한다.75) 그는

74) Leon Morris,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 648.

75) Ibid. 에서 인용.

말하기를 αλλο ετερο 사이의 주요한 특징은, αλλο 는 하나에 또 하나(똑같은 하 나)로서의 다른 것이고 (another as 'one besides'), ετερο 는 둘 가운데 하나로서의 다 른 것이다(another as 'one two').곧 αλλο 는 같은 것을 ‘더하는’(add)개념이라면, ετε ρο 는 다른 것을 ‘구분하는’(distinguish)개념이다.

이상과 같은 문법적 설명에 비추어 보면, 예수께서 약속하신 ‘다른 보혜사’(αλλον παρ ακλητον)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즉 예수는 자기 자신과 다른(ετερο ) Παρακ λητο 를 약속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본질적으로 같은(αλλο ) Παρακλητο 를 약속 한 것이다. 이런 이해에서 보면 예수는 ‘제1의 보혜사’가 되고, Παρακλητο 는 ‘제2의 보 혜사’가 된다. 곧 Παρακλητο 는 예수의 ‘예수의 ’제2의 자아’(alter ego)인 셈이다.76)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예수 자신이 돌아온다는 약속이다(요 14:18). 왜 예수께서는 다 른 Παρακλητο 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또 자기가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까? 여기의 예수의 오심은 역사의 마지막인 'Parousia'일리는 없다. 왜냐하면 그 사건은 모두에게 보여 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 말씀은 분명히 자기의 자리를 대신할 ‘계 승자’를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이다. 떠나시는 예수가 할 일은 아버지로부터 Παρακλητο 를 보내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오시는 분77)은 예수님 아니라 예수님과 본질이 같은 Παρακλ ητο 곧 ‘예수의 제 2 자아’인 것이다. 이처럼 Παρακλητο 사상은 예수의 부재를 전제한 다. Παρακλητο 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의 기름부음이며, 아들이 아니고 아들의 영이시 다. 그러나 그 유사성이 너무 가깝고 또 그 동등함이 너무 완전해서 예수님은 자신과 Πα ρακλητο 를 동일시하신다(요 14:18).

그러므로 요한복음 14장 16절의 의미에 있어서, 예수님을 Παρακλητο (제1의 Παρακλη το )78)로서, 다른 보혜사를 예수님과 본질적으로 같은 또 하나의 Παρακλητο (제2의 Παρ ακλητο )로서 이해 하는 것이 최선의 이해(理解)일 것이다.79)

76) S. S. Smally, 「요한신학」, p. 358.

77)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는 예수의 말씀은 헬라어 원문에 의하면 ‘너희에게로 오고 있다’

(ερχομαι)이다. W. Barclay, p.58.을 참고.

78) 요일 2:1에 예수가 Παρακλητο 로 묘사되어 있다.

79) 브라운은 ‘다른 보혜사’가 ‘다른 또 하나의 보혜사’의 의미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R.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 698. 참조

4) Παρακλητο 와 진리(眞理)의 영

요한복음서 저자는 Παρακλητο 를 새로운 명칭 곧 ‘진리의 영’(το πνευμα τη αληθε ια )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 표현은 요한복음서의 고별설교에 3회(요 14:17a; 15:26b;

16:13a)나타난다. 언제나 Παρακλητο 에 대한 규정으로서만 나온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Παρακλητο 가 ‘진리’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을 ‘진리’라고 선언하셨다(요 14:6). ‘진리의 영’인 Παρακλητο 는 예수님이 이미 말하 고 행한 바를 기억하게 함으로서 제자들을 오직 진리 가운데로 이끌 것이다(요 16:13b).

요한복음서 저자가 이해하는 Παρακλητο 는 ‘진리를 전달하는 영’이다.

요한의 사상(思想)에서 소유격(所有格)은 곧 목적격(目的格)이다.80) 그러므로 ‘진리의 영’이란 성령(Παρακλητο )이 곧 진리(眞理)임을 나타내 준다. 이처럼 Παρακλητο 는 진 리를 본질적인 특성으로 가지신다.

또한 예수님이 ‘진리’(요 14:6)이시고, Παρακλητο 는 ‘진리의 영’(요 14:17a; 15:26b;

16:13a)이시고,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진리로’(요 4:23) 예배를 드려야 하기 때문에, 이런 삼위일체론적인 이해를 고려할 때 ‘진리’는 신성과 매우 밀접한 연관되어 있는 것으 로 간주된다.81) 그러므로 여기에서 Παρακλητο 의 신성이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처럼 진리의 영이신 Παρακλητο 는 진리를 그의 존재의 본질적인 특징으로 가지면서 하 나님과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진리의 영’이 ‘제자들과 함께’ 거할 것이요, ‘제자들 안에 거할 것’, ‘제자들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하셨다(요 14:16c, 17e, 17f). 이 구별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너희와 함께’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진리의 영’과 제자들 사이의 교제를 연상할 수 있고,

‘너희 안에’라는 구절에서 ‘진리의 영’이 제자들 속에 실제적으로 내재(內在)함을 연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진리의 영’이신 Παρακλητο 는 예수의 자리에 와서 제자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신다. 제자들과 ‘교제’를 나누시는 진리의 영은 인격이시다. 죤스톤(G.

Johnstone)은 요한복음서에 나타나는 Παρακλητο 를 인격으로 보는데 도전하였다. 그는 요한복음서 저자가 Παρακλητο 를 특정한 그리스도 지도자들, 특히 교사들, 예언자들, 순

80) R.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 639.

81) Leon Morris,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 650.

교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비인격적인 신적 에너지’(inpersonal divine energy)로 보았다고 주장한다.82) 죤스톤은 이런 주장의 근거로서 요한복음서 저자가 쿰란에서 기원한 ‘진리의 영’이라는 비인격적인 유대 개념을 아버지께로부터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는 그리스도 자 신에 의해 보내어진 Παρακλητο 의 사상과 결합시켰다고 보았다.83) 요한복음서 저자가 이렇게 한 이유는 천사-중보자(미가엘)를 그리스도교회의 영적인도자와 수호자로서 내세 우는 이단적인 주장들을 반박하고자 함이었다고 죤 스톤은 주장한다.84) 그러나 Παρακλη το 를 비인격으로 보는 죤스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그는 요한복음서 저자가 쿰란 에서의 ‘진리의 영’의 비인격적인 유대 개념을 Παρακλητο 의 사상과 결합시켰다고 보았 는데, 이런 주장은 용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서 저자가 Παρακλητο 에게 ‘진리 의 영’이라는 명칭을 준 것은 Παρακλητο 는 ‘예수의 영’이고 진리는 예수라는 요한복음 서 저자의 사상 안에서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형태로든 유대적 성령 이해가 완전히 비인격적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85)

베츠는 Παρακλητο 의 본질을 인격이며 동시에 비인격(어떤 천상의 능력)이라고 주장 한다. 그에 의하면 인격으로의 Παρακλητο 는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 거하시고, 능력으로 서의 Παρακλητο 는 제자들에게 파송되어지며, 감동 감화 되어진다,86) 따라서 베츠는 Πα ρακλητο 의 본질을 인격적인 동시에 비인격적이라고 결론짓는다. 즉 Παρακλητο 를 예 수 곧 첫 Παρακλητο 를 뒤잇는 인격과 천상의 능력이라고 본다.

그러나 베츠의 이런 주장도 허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대로 제자들에게 보내 어져 그들을 감동 감화시키는 Παρακλητο 의 능력있는 모습은 Παρακλητο 의 본질을 가 리키는 것이 아니라 Παρακλητο 의 현현을 나타내 주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오순절, 약속된 성령이 제자들 위에 오시는 모습도 이런 능력있고 강력한 모습이었다(행 2:1-4). 이것은 성령 Παρακλητο 의 현현을 가리킬 뿐이지 결코 그의 본성을 가리키는 것 이 아니다. 물론 오순절 이후,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인격성은 계속 나타나고 있다.87) 그 82) S. S. 스몰리, 「요한신학」, pp. 353-354.

83) Ibid.

84) George Johnstone, The Spirit-Paraclete in the Gospel of John(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0), pp. 119ff.

85) S. S. 스몰리, 「요한신학」, p. 355.

86) Ibid.

87) 행 5:3-4; 8:29; 13:1-4; 15:28등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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