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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C NEWS

아주대 의대 의료인의 이상은 무엇일까?

아주대학교의료원 10주년

특별기획Ⅲ - 의료원과 나

2004

년은 아주대학교병원이 개원 10년이 되는 해이면서 또한 의과대학 설립 16년을 맞은 해이다. 한반도 역사에 길이 남을 올림픽이 개최되던 1988년 3월, 의과대학 제1회 입학생을 받았 고 의과대학 교수진은 1989년부터 일하기 시작하였다. 故 김효규 총 장님을 모시고 의과대학 교학업무를 시작하였던 사람으로서`어느 새, 이 세월이 흘렀단 말인가…a놀라게 된다.

지금 송재관으로 불리는 의학관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서 울건축 김종성 사장에 의하여 기본설계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건물의 최종 사용자에 해당되는 교수들이 부임하자 김 사장님과 실무진 및 아 주대 공대 건축학과 제해성 교수가 함께 총장실에서 도면 검토작업을 하게 되었고, 필자의 요구에 의하여 의학관 10개층 모두 실험실로 사용 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하기로 했다. 건물내 기계실을 2배 이상 확장하 는 설계 수정을 시작하였으며, 학생 강의실은 계단 강의실로 수정 요청 하였다. 부임 후 2년 동안 설계도면에 준하여 이것저것 필요한 부분들을 건축회사에 요청하는 일로 밤이 깊어가는 줄을 모르고 지내다가 새벽녁 집에 들어오는 필자를 보면서 남편이 하는 말, d아아주주대학교에 가더니, 아

아주주 가 버렸나 했더니 들어오긴 오는군요…e

설계도면에 익숙하지 못한 교수들이 김 사장에게 부탁하여 의학관 골 조를 세우는 시점에 한번 현장에 들어가 볼 기회를 얻었다. 먼저 3층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 보려던 순간 앗찔 하였다. d어~ 밖을 볼 수가 없네요?e3층의 동·서 양끝 부분에서는 밖을 전혀 볼 수 없도록 벽면 이 높아서 보통 사람들에게는 영낙 없이 감옥 같은 방에 갇힌 기분이었 다. d이 벽을 조금만 내려 주시면 안 될까요?e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렸 으나 대답은 일언 지하에 거절이었으며, 이유는 건물 외관의 미학상 결 코 수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독 안에 갇히는 신세들이 되겠군 …a2층 을 거쳐 지하 강의실로 내려가서 다시 한번`앗찔a하였다. 지하 1층과 지상 1층을 점유한 계단 강의실의 급격한 경사는 강단에서 뒤에 앉는 학생을 올려다 보면 고개가 꺾어지게 되었다. 그 부분 수정을 제안해 보 았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수많은 교수들이 이곳에서 강의하게 될 터인 데 큰일 났구나. 80명을 수용하는 계단 강의실의 경사가 이렇게까지 되 어야 하는 것인가 ….a

아주대 의대 로비는 그 당시 타 대학에서는 감히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천정이 2층까지 개방 되어 있으며 시원한 로비로 설계되어 당시 재직하고 있 던 기초교수 6인(김형일, 문창현, 이기범, 이영돈, 임인경, 전기홍)과 임상교 수 3인(탁승제, 소의영, 이 성낙)이 기금을 추렴하여 로비 바닥에 조형물을 제작하 기로 하였다. 그 조형물에 교수들 의 이름을 넣자는 학장의 제안은 만류하 였으나, 들어갈 문구를 지어 보라는 명령을 받들어 글귀를 만들었다. 의 과대학을 졸업하고 기초의학을 다시 공부하면서 간직하게 된 소망과 함 께 우리나라 의학자들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하는 아주의대의 미래 를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의학을 탐구하는 이 집에서 의료인 의 이상이 실현되기를 기원하면서…a라는 글을 의학관 로비에 새겼다.

중앙에는 의학을 상징하는 지팡이와 뱀, 가장자리에는 인생을 의미하는 60갑자, 그리고 24방위를 지시하는 표식과 함께 영원히.

1992년 10월 의학관 준공을 기념하는 싸인 액자의 좌측상단에는 빈 공간이 남아 있다. 당시 UCLA 방문 교수로 잠시 근무 중이던 필자를 위하여 김형일 교수의 배려로 남겨진 공간이지만, 뒤늦게 액자를 열고 싸인 하는 것 보다 그냥 빈 공간으로 남기는 후문을 선택하였다. 그 액 자는 현재 의학관 2층 로비 우측에 걸려 있으니 한 번씩 들려서 그 당 시 수고하던 분들의 자취를 느껴보시기 바란다.

임 인 경 교수 / 생화학교실

배꼽의 의미(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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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대학교의료원 10주년

특별기획Ⅲ - 의료원과 나

주대학교의료원이 이 지역에 자리한지 10년, 의료계 파업과 의약 분업의 숙제, 대우사태와 교내분규, 어느 것 하나 우리가 상처를 받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지난 10년은 현란했다. 나라가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고 사회분위기도 진보와 보수의 갈등 속에 어수선하고 우리 기 관도 뭔가 변화가 와야지 살아 남을 것 같은 이 시기에`함께 할 행복한 100년a의 비전을 가지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신의 자세를 점검하고 반성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내 탓이 아니라 네 탓!a이라는 타성에 젖어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을 잊고 지금 현재 보이는 형상만을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우(愚) 를 범하지는 않았는지….

나 하나 보다는 우리를 먼저 생각하고 묵묵히 나 하나를 죽이고, 온 갖 난맥을 헤쳐 나온 사람은 이제 그 희생정신이 비난의 타겟이 되어 역류하는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닌지….

5년 전`선인재 칼럼a에 배꼽의 의미에 대해서 논한 적이 있다. 우리 몸이 형성되기 전에는 가장 중요했던 배꼽의 역사성을 생각해 볼 기회 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퇴행한 흔적기관에 지나지 않지만 태초의 배꼽은 생명의 근원이었고, 세상에 명명되도록 생명의 공급원이 었던 것을 다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배꼽을 통해서 모태로부 터 영양 공급을 받지 못했다면 우리가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로서 존재 할 수 있었는지를 한번쯤은 각자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은 마음 이다.

대우라는 대기업은 이제 우리 아주대학교의료원의 배꼽이 되어버린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10년 전 우리 의료원이 처음 들어설 때부터 대우 라는 기업은 살얼음판을 걸으며 자금조달을 해오는, 언제나 부도날 수 있는 기업 그러나 동시에 언제나 스스로를 무한 확장시키며 굴러가는 기업이라는 양면적인 면을 보여왔다. 그로부터 5년 뒤 대우패망 비사(秘 史)를 접했을 때 우리 모두는 상처를 받았다. 대우그룹은 아주대학교의 료원의 근원이었고 세상에 명명되도록 생명의 공급원이었던 것이 10년 이 지난 지금은 흔적기관이 되어버린 것이다.

개원 초기에 희생정신으로 살았던 우리들의 선배 몇 동료들의 진면목 을 보려는 혜안은 지금 어디에도 없는 것은 아닌지, 단지 지금 자신들의

생각이 가장 현명하다는 안일한 잣대가 배꼽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이목 구비가 뚜렷한 얼굴이나 그릴려는 분위기로 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우 리 의료원의 모습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선배들이 그랬거나 말거 나,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지금 보이는 형상이 중요하다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단세포적 발상이 영웅시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현대식 건물은 주춧돌이 필요 없다고들 한다. 우리 의료원도 배꼽이 나, 주춧돌이 없이도 건재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 하지만 MBC의`종합 병원a이라는 드라마가 우리 의료원을 오늘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니라, 어 려운 일을 마다 않고 묵묵히 감내해 준 선배님들의 배꼽 역할이 보이지 않는 어디에도 단단히 자리하고 있음을 개원 1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으리라.

박 기 현 주임교수 / 이비인후과학교실

후회없는 선택이 준 나의 또다른 기회

아주대학교의료원 10주년

특별기획Ⅲ - 의료원과 나

1987

년 고3 수험생으로 의대 진학을 꿈꾸던 나는 서울시내의 의 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선생님들도 친구들도 충분히 서울 에 위치한 의대 진학이 가능하다고 여겼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해 가을까지 아주대 의대는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학교였다.

아주대 의대를 처음 알려준 분은 아버지였다. 그해 가을 얼핏 지나가 는 말로 아주대 의대가 생겼다고 하시더니 원서 지원 시기가 다가오자 본격적으로 신생 의대의 장점을 설명하시며 아주대 의대의 진학을 고려 해 보라고 하셨다. 세상 물정 모르는 고등학생이던 나에게 아버지의 권 유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남들이 알아주는 명문대학 중 어디 에 원서를 낼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고 수원도 아주대도 낯선 이름이었 다. 그러나 아버지는 끈질기게 나를 설득하셨고 시간이 자나면서 나도 진지하게 아주대 의대를 생각하게 되었다. `신생 의대에서는 좀더 기회 가 많지 않을까a, `대우그룹에서 학교를 지원하고 있다는데 우리나라 최 고의 병원을 짓지 않을까a이렇게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학교에 대해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입학하고 보니 신생 의대의 현실은 나의 기대와 많이 달 랐다. 선배들이 없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의대 교수님도 없었고 병원 신 축은 계획과 소문만 있을 뿐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친지들에게 아주대 의대에 다닌다고 하면d아주대에도 의대가 있나?e라는 반문을 듣곤 했 다. 이런 당혹감과 실망으로 학교에 다니기 싫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학교를 그만 다니기에는 현실적으로 힘들었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위로하고 힘이 되어준 입학 동기들과 후배들과의 정도 쌓여 있었 다. 결국 이 학교는 내가 선택하였고 내가 몸 담아야 하며 내가 살아가 는 동안 꼬리표처럼 그 이름이 따라다닐 곳이라고 깨달았다. 그래서 이 끌어 줄 사람이 없으면 내가 이끌고, 내가 나서며 살기로 했다. 그렇게 전통이 있는 의대의 학생들보다 조금은 어려운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학교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다.

졸업 후 아주대학교병원에서 인턴, 레지던트를 마치고 전문의가 되었 다. 전공의 생활 중 1회 졸업생의 한 사람으로서 아주대 의대 동창회 설 립에 기여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내 나름대로는 의무감을 느끼면서 시작했었다. 동창회 일을 하면서 힘들었던 기억들도 있지만 좋은 경험으 로 남아 있다.

2000년 군 입대로 학교를 떠나게 되면서 내가 아주대학교의료원과 얼 마나 많은 인연들을 맺고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리 사교적인 성격 도 아닌데 인사를 하기 위해 만난 사람들은 예상외로 많았고 아쉬움도 많았다. 아마 다시 학교에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는 지도 모른다.

군 제대 후 나는 학교에 교원으로서 돌아왔다. 군대에 근무하는 동안 장래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했지만 내가 가장 원하던 곳은 내 청춘을 보낸 모교였다.

가끔`내가 만일 아주대 의대에 들어오지 않고 다른 학교에 갔었더라 면 어떻게 되었을까?a하는 질문을 해보곤 한다. 또 다른 가능성이 있었 겠지만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아주대 의대는 나를 성장시켰고 보호하였 으며 많은 기회를 주었다. 멋모르던 학생 시절에는 불만도 있었지만 신 생 의대를 짧은 시간내에 명문 의대로 키우신 초창기 교수님들과 의료 원 담당자분들의 노력을 새삼 실감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학교 를 발전시키고 이끌어 가야 하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에 큰 책임감을 느 낀다. 앞으로 학교의 발전에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다.

박 재 범 교수 / 예방의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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