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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대학교병원 건축 공사에 얽힌 이야기(2)

돌아보는 의료원 10년 (완결편)

사부의 대학병원 설치 기준령에 의하면 우리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의 경우 300병상 규모 이상의 병원 건축이 불가능했다. 아주대 의 대 입학생 정원이 30명이었기에, 학생 30명의 10배에 해당하는 300병상 이란`방정식a이 있었던 것이다. 1,000병상 규모의 병원을 계획하고 있 던 故 김효규 총장께서 당시 문태준 보사부장관을 찾아 해결책을 모색 하셨다고 한다. 문태준 장관은 의사 출신이기도 하지만, 소신이 뚜렷한 행정가여서 학생 입학 정원의 10배 기준이라는 대학병원 설치 기준령을 과감히 풀어주었다고 한다. 故 김효규 총장께서 필자에게 전해 준 바에 의하면 문 장관은`최소한a의 설치 기준령을 공무원이`그 이상a은 허가 할 수 없다고 잘못 해석한 데서 이런 문제가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 한다. 필자는 문태준 전 장관의 바른 소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우리 병원 같은 대형 공사를 설계부터 준공까지 약 2년 반 만에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김우중 회장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우 중 회장께서는 수백 명의 의사, 간호사 같은 의료 인력을 연초 졸업 시 기에 확보해야 하는 대학병원의 특수성을 확실히 이해하고 계셨다. 그런 까닭에 공기를 1994년 4월까지 끝내라는 지시를 내렸고, 여기에 ㈜서울 건축의 대표이사인 김종성 교수의 각별한 관심이 또한 큰 역할을 했다.

관례에 따르면 설계 도면이 완성된 후 입찰과정을 거쳐서 공사가 시작 되기 마련인데, 기본 설계 후 ㈜대우건설이 입찰 절차 없이 곧바로 공사 를 시작했고, 세부 설계작업을 공사 현장에서 진행하는 이른바 fast track 시스템을 적용한 것이다. 이때 수많은 병원 공사 현장에서 평생을 보낸 최태성 고문이 고맙게도 우리 병원측의 이익을 꼼꼼히 챙겨주었다.

이렇듯 시공사인 ㈜대우건설, 설계 회사인 ㈜서울건축 그리고 병원건축

추진위원회가 일심으로 크고 작은 어려움을 극복하였기에 우리 병원이 공기를 맞추면서 우뚝 설 수 있었다고 본다.

우리 병원의 공사 진행이 막판에 힘을 얻게 된 데는 숨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1993년 중순 김우중 회장께서 김준엽 재단이사장, 故 김효규 총장, ㈜대우건설측 대표, ㈜서울건축의 대표이사 김종성 교수 등이 참 석한 우리 병원 건축 관련 회의를 용인시 소재 대우그룹 연수원에서 소 집한 바 있다. 그 자리에서 김우중 회장께서는 건설 공기를 반드시 지킬 것을 강조하셨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함께 회의에 참석했던 ㈜대우 건설의 모 상무가 필자에게 예정된 공기를 맞추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 가능하니 건설 현장 옆에 간이 건물 몇 동을 임시로 지어 응급 환자만 이라도 보는게 어떻겠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때 필자가 받은 당혹감과 허탈감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상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공사 현장 에서는 공기를 맞추기가 현실적으로 도저히 어렵다는 분위기가 팽배했 던 것이다. 생각 끝에 필자는 당시 대우그룹의 김준성 회장을 찾아뵙고 우리의 어려움과 준공 일자의 중요성을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김준성 회 장께서 바로 ㈜대우건설의 장영수 사장을 불러 필자의 고충을 듣게 하 고 도와주면 좋겠다는 당부를 하셨다. 필자를 데리고 회장실로 자리를 옮긴 장영수 회장은 당시 우리 병원 건설 현장 소장인 김흥수 이사를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김 이사에게 다짜고짜 다음날부터 당장 서울에서 출퇴근하지 말고 현장(수원)에 거처하면서 공사를 진행하고 야간 공사 를 함께 병행하여 공기를 맞추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결재 사항이 있으 면 장 회장에게 직접 와서 받으라고 하는데, 그 서슬 퍼런 분위기에 필 자는 그저 놀랐을 뿐이다.

아주대학교의료원 10주년

3 3 그 후 늦은 밤 퇴근길 공사 현장을 환하게 밝히는 용접공들의 불꽃이

필자의 눈에는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김준성 회장(現 이수그룹 명 예회장), 장영수 회장(전 ㈜대우건설 회장, 現 한국건설문화원 이사장), 김흥수 이사(전 ㈜대우건설 전무) 외 우리를 도와주셨던 많은 분들을 만날 때마다 필자는 늘 고마운 마음을 전하곤 한다. 이분들의 숨은 협조 가 없었다면 아마도 병원 개원 일자가 1년은 더 늦어졌을 것이다. 우리 병원은 이분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웅장한 모습으로 우뚝 선 우리 아주대학교병원을 보노라면 또 다른 고마운 분들의 얼굴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김우중 회장께서 병원 건설공사를 차질 없이 진행하라고 지시하였는 데도, 공사 현장에서는 공사 대금을 못 받아 하청 업체에게 일을 시킬 수 없다고`버티a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마다 대우그룹을 직접 찾아가 도와달라고 하면 본부에서 현장으로 대금을 보냈는지, 여하튼 현장 소장 의 안색이 밝아지곤 했다. 이때 대우그룹 내에서 우리 병원 프로젝트를 위해 늘 적극적으로 보살펴주신 분들이 있는데 이우복 회장을 비롯해 서형석 회장, 윤영석 회장 등이 바로 그분들이다.

아주대학교병원 설계작업이 시작되면서 우리 추진본부에서는 각 부 문, 부서별로 여러 형태의 자료를 설계팀에 넘기면서 협조체제를 구축했 다. 그 한 예로 수술실 담당팀은 국내 대학병원 수술실에 오랜 기간 근 무하면서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자료를 집약한 바 있다. 당시 영 동세브란스병원 이규정 간호부장께서는 수술실 구조에서 반드시 피해야

할 사항들과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필기 노트 3권에 꼼꼼히 적어 주셨 고, 추진본부에서는 그걸 설계팀에 전하여 아주 유용하게 반영시켰다.

필자는 국내 기존 병원의 단점들을 극소화하면서 첨단 지식을 극대화하 는 것이 최신 병원을 짓는 근간이 된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병원 내 환 자가 사용하는 공간은 공(公) 개념으로 넓게 잡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설계에 반영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점이 높이 평가되었는지 대한건축가 협회가 주관하는 1994년도 대형 건축부문에서 우리 아주대학교병원이 최우수 건축물로 선정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우리 아주대 의대가 배출한 첫 졸업생들이 의사 국가고시에 전원 합 격한 후 모교 병원에서 의사로서의 첫 길을 밟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 리 병원 건축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이 얼마나 흐뭇해하고 자랑스러워했 는지 그때의 일이 새삼 떠오른다.

이 성 낙 前 의무부총장

아내·엄마·여성으로서 나와 같기에 …

방클리닉은 산부인과와 마찬가지로 환자의 대부분이 여성들이다.

그래서인지 내원하는 환자들을 맞이할 때면 같은 여자의 입장에 서, 아내로서, 아이의 엄마로서 무의식적으로 이들의 심정을 파악하게 되고, 의료인으로서 내가`도와드릴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a하 는 생각으로 환자분들을 접하게 된다.

2000년 가을, 유난히 슬퍼 보이는 눈빛을 가진, 작고 왜소한 40대 초 반의 여자분이 남편의 손에 이끌려 내원하였다. 여느 환자들처럼 담당 선생님께 진찰을 받았으며 한쪽 유방에 작은 달걀 크기의 멍울이 있음 을 확인하였고, 주치의로부터 외래에서 시행되는 간단한 조직검사 처방 을 받게 되었다. 검사과정 내내 그 분은 진찰대에 누워 소리없이 눈물 을 흘리고 있었다. 일주일 후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고, 그 분은 꽤 진행 된 유방암으로 진단됐다.

담당 선생님은 수술을 권유했고, 이 분은 주치의와 남편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수술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진료대기 환자가 유난히 많았던 그날, 담당 선생님은 여러 번 수술의 필요성을 설명하시다 결국 집에서 상의후 다시 내원할 것을 권유받는 것으로 진료를 종결하였다.

유방클리닉 간호사겸 코디네이터 업무를 맡고 있는 나는 이런 경우 다시 한번 환자와 보호자분께 수술기법과 치료제 개발이 잘 되어 있는 유방암 치료에 대하여 절대 포기하지 말기를 진심으로 당부하게 된다.

이 분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수 차례 설명드렸고, 환자분은 이틀 후 내원하여 서둘러 수술을 받았다. 여러 선생님들의 많은 관심과 도움으 로 환자분은 빠르게 회복되었고, 지금도 건강하게 잘 지내시며 외래 정 기점진을 꾸준히 받고 계신다. 담당 선생님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한결 같으신 분이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이 분에게는 왠지 더 마음을 쓰시는 것 같았다.

나는 환자분이 그렇게 수술을 완강히 거부한 이유를 수술후 한참 뒤 에야 조심스럽게 그분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선천적 장애를 갖고 태어 난 아이가 5세를 전후로 상태가 많이 악화되었고, 같은 시기에 본인의 유방에 기분이 나쁠 정도로 단단하게 만져지는 멍울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에 대하여 심한 죄의식을 가진 환자분은 아이가 죽으 면 자신도 아이의 뒤를 따라 갈 것이라고 굳게 결심하였고, 병원을 찾

은 당시 아이는 이미 하늘나라로 간지 수개월이 지난 상태였다. 지금도 이 분은 아이에 대한 기억을 가슴 깊이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 갖고 계 신다.

올 가을, 이분은 수술한지 만 4년이 된다. `세월이 약이다a라는 옛 어 른들의 말씀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의 아픔은 점점 옅어져 가고, 우 리는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 분주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나는 가톨릭 신자이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성당에 나가는 날이면 유방클리닉의 발전과 함께 유방암으로 수술한 우리 환자분들의 마음의 평화와 건강에 대한 기도를 잊지 않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토요일 오후, 그 동안 소홀했던 나의 종교생활과 함께 환자분들의 건강과 마음의 평화에 대해 잠시 묵상해 본다.

김 미 숙 간호사 / 유방클리닉

잊을 수 없는 환자

아주대학교의료원 1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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