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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信契節目 과 傳燈契

다산이 강진에 유배 온 후 둔 제자들은 모두 세 그룹이었다. 첫째는 사의재 시절 읍중 제자그룹이며, 둘째는 해남 윤씨가 중심이 된 다산초 당 시절의 제자그룹이다. 그리고 셋째는 대둔사와 백련사의 승려들로 구성된 전등계 제자그룹이다. 그동안 제자들의 강학활동 중 읍중 제자 와 초당 제자들에 대하여서는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고 그간의 정황들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러나 傳燈契 제자들에 대하여서는 구체적으로 발표 된 사례가 없어 그 성격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본 장에서는 茶信契

328) 정약용, 茶山詩文集 , 4권. 「芙蓉亭歌」, ‘勅賜龍茶試新水’

329) 정약용, 茶山詩文集 1권, 「尾泉歌」, ‘爲試龍團治癖疾’

節目 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과 내용을 살펴보고 전등계와 다산의 관계 에 대해서 밝혀보기로 한다.

茶信契節目 은 다산이 18년 동안 강진에서의 유배를 끝내고 고향 으로 돌가기 전 8월 30일 여러 제자들과 함께 묶은 계의 약조이다. 다 산은 여기에 그동안 강학한 제자들의 명단을 모두 기입하고 그가 떠나 간 뒤 제자들이 해야 할 일들을 낱낱이 기록하였다. 그러나 茶信契節 目 의 序는 다산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스승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더 라도 인간의 무리로서 신의를 지키자는 결의를 가지고 썼던 듯하다. 그 에 의하면 다신계는 다산이 떠나기 한해 전 제자들이 이러한 일을 미리 알고 계를 조직하여 자원을 마련해 두었다. 이러한 내용들을 간략히 정 리하여 보기로 한다.

1. 무인년(1818) 8월 그믐날 僉議

사람이 귀중한 것은 신의가 있기 때문이다. … 우리들 몇 십 명이 무진 년(1808) 봄부터 오늘날(1818.8.30)에 이르도록 동아리를 이루어 살며 형 제와 같이 글을 배우고 지었다. 지금 스승님께서 북쪽 고향으로 돌아가시 니, 우리들이 뿔뿔이 헤어져 마침내 아득히 서로를 잊고 생각하지 않는다 면 신의를 익히는 도가 경박하게 되지 않겠는가. 지난해 봄에 우리들이 미 리 이 일을 염려하여 돈을 모으고 계를 만들었다. …… 이에 우리들이 35 냥의 돈으로써 스승님의 행장에 쓰시라고 바치고 서촌 몇 뙈기의 밭을 남 겨 계의 재산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름을 다신계라고 붙이고 앞날의 신 의를 익히는 자본으로 만들었다. …

2. 좌목, 나이 순서대로 정하지 않고 형제별로 둘씩 기록하였다.

이유희-이강희, 정학가-정학포, 윤종문-윤종영, 정수칠, 이기록, 윤종 기-윤종벽, 윤자동-윤아동, 윤종심-윤종두, 이택규, 이덕운, 윤종삼-윤종 진. 이상의 18명인데 다산의 18제자라 한다.

3. 약조, … ⑵ 매년 청명이나 한식날 계원은 다산에 모여 다신계를 열 고, 운자를 내어 시를 읊어 이름과 작품을 써서 정학연에게 보낸다. 이 다 신계 여는 날의 생선 값 1냥은 곗돈 가운데서 지급하고 양식 쌀 1되는 각 자 가지고 온다. ⑶ 곡우 날엔 눈차를 따서 덖어 1근을 만들고, 입하 날 늦차를 따서 떡차 2근을 만든다. 이 엽차 1근, 떡차 2근과 시와 편지를 같이 부친다. … ⑹ 차를 채취하는 일은 각자 맡은 양을 스스로 마련해야 하나, 스스로 마련하지 못할 경우 돈 5푼을 신동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귤동 마을의 아이를 고용해 차를 채취해 숫자를 채우게 한다. …

4. 강진읍성제생좌목, 손병조, 황상-황취- 황지초, 이청, 이재정. 이상 6명이다.……이로 말미암아 읍내 사람들은 나와 근심을 함께 했던 사람들 이고 다산의 여러 사람들은 어찌 뒤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겠는가. 이에 다신계절목 끝에 또 읍내 사람 6명을 기록하여 훗날의 징표로 삼으려 한 다. 또 여기 여러 사람들은 마땅히 다신계 일에 한마음이 되어 관리하라.

이것은 내가 남기는 부탁이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⑴ 입하 날 뒤에 엽차·떡차를 읍내로 들여보내면 읍내에서는 인편을 찾아 유산에게 부쳐 보낼 것. … ⑸ 袖龍·掣鯨은 또한 방외의 인연을 맺은 자이다. 그 傳證 契 田畓(穀)에, 만약 근심할만한 일이 있을 경우 고을 안에 알리면 고을 안에서 주선하여 돌아보고 구호하라.330)

다산은 이 계를 만드는 목적이 읍내의 제자들을 그냥 두고 갈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에 제자들이 하나씩 해야 할 일들과 시기, 금전의 용처를 기록해 두고 지킬 것을 당부하는 마음에서였다.

이 중 전등계의 제자들을 잊지 못하는 다산의 마음이 엿보인다. 다 신계의 제자들 중 초당의 제자와 읍내 제자들 외에 수룡과 철경 등 전 등계 일원까지 돌볼 것을 제자들에게 당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등이란 불교에 속한 제자를 이르는 말로써, 전등계란 불문의 제자들 과 맺은 계란 의미이다. 즉 수룡과 철경을 방외의 사람들이라고 한 것 은 속가에 머물지 않는 출가자를 이르는데, 다산은 자신이 해배되어 강

330) 정약용, 茶信契節目 ,‘1.戊寅(1818)八月晦日 僉議, 所貴乎人者以有信也 …吾輩數十人 自戊辰(1808)之春 至于今日 窘居績文如兄若弟 今函丈北 還吾輩星散 若遂漢然相忘 不思 所以講信之道 則不亦佻乎 去年春吾輩 預盧此事 聚錢設契其始也 …吾輩以三十五兩之錢 納于行裝 函丈以西寸數區之田 留作契物 名之曰茶信契 以爲日後講信之資…, 座目 序次不 以年齒以各其毘弟雙雙書之, 2. 座目 序次不以年齒以各其毘弟雙雙書之,李維會-李鋼會, 丁學稼 -丁學圃, 尹鍾文-尹鍾英, 丁修七, 李基祿, 尹鍾箕-尹鍾璧, 尹玆東-尹我東, 尹鍾心-尹鍾斗, 李宅逵-李德藝, 尹鍾參-尹鍾軫, 已上十八人. 3. 約條, ⑵每年淸寒 食之日契員會于茶山以修契事出韻賦詩聯名作暑送于酉山 右會之日魚價錢一兩自契中上下糧 光一升假各自持來, ⑶穀雨之日取嫩茶焙作一斤, 立夏之前取晩茶作餠二斤 右葉茶一斤餠茶 二斤與詩札同付, ⑹採茶之役各人分數自備而其不自備者以錢五分給信東命雇橘洞村兒採茶充 數. 4.邑城諸生座目, 孫秉藻, 黃裳, 黃聚, 黃之楚, 李晴, 金載靖. ⑴ 立夏之後葉茶餠茶 入送于邑中 自邑中討便付送于酉山, ⑸ 袖龍掣鯨輩亦方外之有緣者也 其傳證契田畓如有可 憂之事入告邑中自邑中周旋顧護’송재소·유홍준, 한국의 차문화 천년 2, 돌베개, 2009, 83면-89면.

진을 떠날 때까지 이들을 보살피고 관리했다.

다산은 방외의 사람들로 완호·은봉·연파 등과는 지기로서 교유를 나누었고, 초의·호의·철경·수룡·자굉·법훈·철선·풍계·근은 등 은 사제의 연을 맺은 전등계의 승려들이었다.331) 이는 다산과 대둔사 승려들과 맺은 佛門契로서 그들의 관계가 매우 돈독하였다는 것을 의미 한다. 연파와 호의의 제자들과 연을 맺은 것은 다산이 그들을 잊지 못 하고 자신의 제자처럼 지도하고 보살피는 스승으로서의 참마음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이 더해져 다산은 이들이 속한 전등계 전답에 무슨 일 이 생기면 마을에 알려 마을사람들이 주선하여 이들을 돌보아 주도록 당부를 하였다. 전등계의 전답에 무슨 일이 생긴다는 것은 다산과 관계 를 맺은 승려들의 재정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가 된다. 당시 수룡과 철 경이 있던 전등계의 전답에 문제가 생기면 제자들이 고을에 알려 돌보 고 구호까지 하라고 했다. 이것은 전등계의 승려들을 지키고 보호해 주 라는 다산의 당부라고 할 것이다. 다산은 그 후로도 대둔사에 보내는 인편을 통하여 수룡과 철경의 안부를 묻고 초의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건네는 등 제자를 향한 스승의 애틋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또 茶信契節目 에는 다산이 전등계의 전답에 관여하고 있는 내용 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전등계의 재산권이 다산에게 일부 속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산은 전등계의 전답에 문제가 생기면 다신계에서 소출한 재산의 일부를 전등계를 위해 특별히 활용하도록 부탁하였다.

이것은 다신계의 재산권이 다산이나 계원들 중 어느 한 쪽에 치우쳐 있 는 것이 아니라 다산이 일부 재산권을 사용할 수 있고, 나머지는 다른 계원들이 운용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즉 다신계의 재산은 공동 명의로 운용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정황으로 다산의 유배기간 동안 다산과 다신계의 직접적인

331) 정민, 「다산 일문(逸文)을 통해본 승려와의 교유와 강학」, 다산학술재단 국제학술대회발 표논문, 2012.5, 4면.

관심과 지원이 있었던 전등계의 실체를 밝히게 되었다. 이는 다산과 승 려들과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마땅할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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