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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게모니 개념의 이론적 구축: 담론

IV. 라클라우의 정치적 주체론

2. 헤게모니 개념의 이론적 구축: 담론

헤게모니 개념을 이론적으로 구축하기 위해서는 헤게모니의 영역을 우연성의 영역으로 완전히 이동시켜야 한다. 그러나 헤게모니 개념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정치의 영역은 토대-상부구조 이분법에 따라 경제적 토대라는 필연성의 영역에 의해 제약되는 상부구조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정치의 영역을 우연성의 영역 으로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토대-상부구조 이분법으로부터 사회적인 것의 영역을 “정치적인 것을 상부구조가 아니라 사회적인 것의 존재론이라는 위 상을 갖는 것”으로 탈구축할 필요가 있다(라클라우·무페, 2012: 18).

라클라우는 알튀세르의 과잉결정(overdetermination) 개념을 예로 들면서 마르

크스주의의 발전과정에서 이러한 탈구축의 가능성이 존재했다고 본다. 알튀세르 는 “사회적인 것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과잉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사 회와 사회적 행위자들은 그 어떤 본질도 결여하고 있으며, 사회적 행위자들의 규 칙성들은 단지 일정한 질서의 확립을 동반하는 상대적이고 불안정한 형태의 고 정화일 뿐이라고 보았다(라클라우·무페, 2012: 179). 이러한 점에서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개념은 본질주의를 벗어나서 접합과 헤게모니 개념을 이론화할 수 있 는 가능성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라클라우가 보기에 알튀세르의 이론에는 과잉결정 개념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최종 심급에서의 경제에 의한 결정”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최종 심급 의 존재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객체, 즉 구체적인 효과를 산출하는 ‘경제’가 존 재한다(라클라우·무페, 2012: 180-181)”는 것을 뜻한다. 이는 사회적인 것에 본질 이 존재한다고 보면서 사회를 필연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 이었다. 그는 이러한 이유로 알튀세르의 이론이 본질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본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에서 사회적인 것에 대한 개념은 완전히 고정될 수 없는 정체성들의 영역인 과잉결정의 영역으로 탈구축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영역으로 서 사회적인 것을 개념화하기 위해 라클라우가 택한 것은 담론(discourse)이라는 우회로이다. 담론은 “접합적 실천의 결과로 생긴 구조화된 총체성”을 뜻한다. 그 는 담론적으로 접합되지 않는 차이는 요소라고 부르고, 변별적 위치들이 담론 내 에서 접합된 것으로 나타날 경우 그것들을 계기들(moments)이라고 부른다(라클 라우·무페, 2012: 191).

모든 대상은 담론의 대상으로 구성되며 담론 외부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 는다(라클라우·무페, 2012: 194). 비담론적인 복합체들, 즉 제도들, 기술들, 생산 조직 등은 오직 담론적 접합으로만 간주될 수 있을 뿐이다(라클라우·무페, 2012:

196). 그러나 담론 외부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사유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라클라우는 담론이 단순한 관념의 산물이 아님을 이야기하기 위해 담론의 물질적 성격을 강조한다. 따라서

“접합적 실천은 순수하게 언어적인 현상들로 구성될 수 없으며, 담론 구성체가 구조화되는 다양한 제도들, 의례들 그리고 실천들의 전체적인 물질적 농밀성을

뜷고 들어가야 한다”(라클라우·무페, 2012: 199).

그는 담론이론을 통해 “담론적 총체성은 단순하게 주어진 그리고 한계가 정해 진 실정성(positivity)의 형태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담론적 외 부로부터 완벽한 보호를 받는 사회적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라 클라우·무페, 2012: 202). 따라서 어떤 주어진 담론도 최종적인 의미를 궁극적으 로 고정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본질주의적 접근은 기각된다. 담론은 우연성의 영역이 관통하는 영역이 되며, 다양한 접합적 실천에 열려 있게 된다.

그러나 의미를 궁극적으로 고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역으로 의미를 부분적으로 고정하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만약 이러한 작업이 존 재하지 않는다면 사회적인 것은 불가능한 대상을 구축하는 노력으로서만 존재할 뿐일 것이다. 모든 담론은 담론성의 영역을 지배하기 위한 시도로서 구성된다.

이들은 이렇게 의미를 부분적으로 고정하는 특권적인 담론 지점들을 결절점 (nodal points)이라고 부른다(라클라우·무페, 2012: 205). 접합적 실천은 의미를 부 분적으로 고정하는 결절점의 구축을 필요로 한다.

사회적인 것의 불가능성은 모든 정체성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 즉 담 론 내에서 ‘주체’는 언제나 ‘주체 위치들’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라 클라우·무페, 2012: 210-211). 따라서 초월적 주체를 중심으로 주체 위치들을 통 일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적대(antagonism)라는 개념을 통해 경험적으로 드러난다. 적대는 객관적 관계의 존재를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에

‘실재적 대립’과 ‘모순’ 개념과는 구별된다. 말하자면 적대는 사회적인 것의 한계 에 대한 경험인 것이다.

또한 적대는 곧 사회적인 것의 한계를 전복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 시도는 등가 관계를 통해서 드러난다. 왜냐하면 적대는 실정적으로 재현될 수 없으며 오 직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그 변별적 계기들의 등가를 통해서만 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클라우·무페, 2012: 233). 즉, 일정한 담론적 형태들은, 등가를 통해 대상의 모든 실정성을 무화하고 적대 그 자체에 실재적인 실존을 부여하게 된다 (라클라우·무페, 2012: 234). 등가 사슬(a chain of equivalence)은 어떤 적대가 수 반되어 있는지에 따라 다양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모순적인 방식으로, 주체 그 자체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접합적 실천이란 단절의 지점들과 그것

들의 가능한 접합 양식들을 결정하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3. 이론의 적용가능성 검토

라클라우가 비판했던 것처럼 20세기 중반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 계급에 과도 한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면서 본질주의에 갇혀 있었다. 그는 어떠한 주체에도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이러한 본질주의를 타파하고자 했다. 그는 주 체는 언제나 담론 내에서 다양한 주체 위치로 존재하며, 그 정체성은 고정적이지 않고 우연적이라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라클라우의 정치적 주체론은 촛불-대중 을 특권적 주체로 강조하지 않아도 촛불-대중이 다양한 정체성으로 구성되어 있 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라클라우의 이론에서 주체의 형상은 흐릿해지고 만다. 촛 불-대중 내에는 다양한 차이가 존재하고, 어떠한 계기로 인해서 이 차이들이 접 합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촛불-대중의 등장을 단지 우연적인 접합적 실천의 결과라고 이야기하게 되면 촛불-대중의 운동이 근본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전환과 같은 한국사회의 구조적 변동에 대한 반발에 따라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을 포착할 수 없다. 이들이 주기적으로 광장을 메울 수 있었던 이유는 접합적 실 천의 영역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이러한 한계는 라클라우가 설정한 담론 개념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는 마르크 스주의의 토대-상부구조 이분법을 기각하고 사회적인 것의 영역을 담론 개념을 통해 탈구축하면서 네그리의 이론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생산의 영역과 독립적 인 정치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라클라우 이론의 한계는 정치의 영역이 무 한하게 확장되면서 주체성의 문제를 구조적 분석과의 연결지어 사고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그가 담론 개념을 “어떠한 외부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면서 담론이 역사적으로 특수한 형태의 사회 구조 속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담론을 단순한 관념의 산물로 보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담론 내부의 물질적 장치들에 대한 분석을 담론 외부에 존재하는 자본주의 사회 에 대한 구조적 분석과 결합하지 못한다는 것은 생산의 영역과 독립적인 정치의

영역을 무한한 우연성의 영역으로 미뤄두는 것과 같다.

결국 그는 담론 개념을 통해 생산의 영역과 독립적인 정치의 절대적 자율성의 영역을 제시할 수는 있었지만, 생산 영역과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 상대적 자율 성의 영역을 구축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라클라우의 이론이 촛불-대중의 다양한 정체성이 접합적 실천에 의해 새로운 헤게모니로 구성될 수 있는 장을 제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러한 헤게모니가 어떠한 공통된 목표로 구성되어야 하는 지를 제시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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