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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제주馬의 역사문화원형

1. 한국의 馬문화원형

문화 원형이란 한 지역의 구성원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특성, 즉 원형이 문화로 발현되어 어떤 특수성을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내면에 문화 원형으로 존재하는 말의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 한국의 신화와 역사 속에 나타나는 말의 상징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말과 인간과는 어떠한 관련이 있 는가? 몇 가지 형태로 등장하는 말의 상징성을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는 신의 대변인 또는 계시자로서 등장하는 모습이다. 사료를 통해 말을 통 해 천신의 계시를 보여주는 예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혁거세 신화 속에서의 말은 영험적인 존재로서 신의 대변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혁거세 신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높은 곳에 올라 남녘을 바라보았다. 양산 및 蘿井곁에 이상한 기운이 마치 번개 빛처럼 땅에 드 리우고 흰 말 한 마리가 꿇어 앉아 절을 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그곳을 찾아 살펴보니 자주 빛 알 한 개가 있는데, 말은 사람을 보자 길게 울면서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곧 그 알을 쪼개 보 니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얼굴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놀라고 이상히 여겨 동천에 가서 목욕시켰 더니 몸에 광채가 나고 날새와 짐승들이 따라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일월이 청명하였다.30)

30) 三國遺事 卷1, 紀異2, 新羅始祖 赫居世王 “時乗高南望, 楊山下蘿井傍異氣如電光垂地, 有一白馬跪 拜之状. 尋撿之有一紫卵, 馬見人長嘶上天. 剖其卵得童男形儀端羙. 驚異之俗於東泉. 生光彩鳥獸率舞 天地振動日月清明. 因名赫居世王, 號曰居瑟邯, 時人爭賀曰 “今天子已降, 冝覔有徳女君配之.”

위 인용에서는 박혁거세가 신의 대변인 또는 계시자로서 등장하는 모습이다. 말이 꿇어 앉아 절을 했다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은 말이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절을 했 다는 것이고 사람들이 오자 말이 울면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했는데, 이는 신의 대 변인임을 말하는 것이다.31) 사료에서 말을 통해 천신의 계시를 보여주는 예를 찾을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말을 인간처럼 표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사람들을 보고 하늘로 올라간 것은 하늘의 계시를 전달하고자 하는 신화적 유용성을 제시하 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신의 계시자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료로 금와왕 탄생 이야기 또한 그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여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자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대를 이을 자식을 구하였다. 그가 탄 말이 곤연에 이르니 큰 돌을 보고 마주 대하며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옮기니 거기에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금색 개구리 모양이었다. 왕이 기뻐하면서 “이 는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주신 것이다.”말하고 거두어 길렀다. 이름을 金蛙라고 하였다. 그가 성 장함에 그를 태자로 삼았다.32)

이 신화에서 말은 기다리고 있던 태자의 탄생을 알려주는 예시자로서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해부루가 아들이 없어 걱정하는 마음으로 산천에 제 사를 지내고 그 예견이 말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면 말은 천상계와 인간계를 연결하며 하늘의 계시를 전달하는 중요한 동물로 인식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인간과 동반자로 함께 등장하는 모습이다. 다양한 전설 속에서 말이 망자를 실은 수레를 끄는데 이용되는데 이는 말이 망자의 영혼을 이승에서 저승으 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아 인간의 죽음에 동반자로써 함께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전남 장흥에서 내려오는 다음의 신화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어느 날 장흥골 원님이 장평을 가기 위해 말을 타고 거드름스럽게 넘어 가려 했다. 이를 본 만년 주민들이 한사코 말렸다. […] 원님은 막무가내로 말을 타고 재를 넘기 시작했다. […] 겨우 재 꼭 대기에 오르기 직전 힘이 빠진 말이 바위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말과 함께 굴러 떨어진 원

31) 표인주, 「‘말’의 민속적인 관념과 신앙적 의미」, 한국학연구 51,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4, 291쪽.

32) 三國史記 卷13 髙句麗本紀 1, 시조 동명성왕 즉위년 “扶餘王解夫婁, 老無子, 祭山川求嗣. 其所御 馬至鯤淵, 見大石, 相對流淚.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 蛙一作蝸.. 王喜曰, “此乃天賚我 令胤乎.” 乃収而養之, 名曰金蛙. 及其長, 立爲太子.“

님은 며칠을 앓다가 죽고 말았다. 그 후 만년 사람들은 재의 꼭대기 부근에 원님과 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당산을 만들어 주었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33)

위 인용문에서 말을 망자와 동일시하여 함께 매장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말의 영혼을 달래주었다는 내용에서 단순한 동물이 아닌 인간 에게 소중한 존재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인간과 영혼 공유의 모습을 보여 주는 예로 삼국사기 신라본기 사료에 의하면 왕이 타던 내구마가 무릎을 꿇고 슬프게 울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겨울 10월에 왕이 항상 타던 內廐馬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슬프게 울었다.34)

당시 신라의 나라 상황으로 연관지어 볼 수 있다. 이는 나물왕이 고구려에 구원 을 요청하는 과정에서의 왕의 심리상태를 왕이 타고 있는 말이 무릎을 꿇고 울었다 고 감정을 대입하여 표현함으로써 말과 인간의 영혼의 동반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내용은 벽화 등에서도 종종 그 모 습을 발견할 수 있다. 보통 무덤 속에서 말 의 형상을 한 여러 부장품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역시 말을 통해 영혼을 실어 하 늘로 전달하고자 했던 그 시대 사람들의 생 각을 읽을 수 있다. 즉 말은 사람만 태우고 이동했던 동물이 아니라 영혼을 태우고 또 는 신적인 존재를 태우고 다니는 동물로 여 [그림 1] 천마도 겨졌던 존재였다. 이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그림이 신라시대 천마총에서 출토되었던 말다래에 그려진 천마도이다.

또한 삼국시대 다양하게 제작되었던 상형 토기의 모습에서도 말을 소재로 하여 만든 것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상형 토기는 일상생활보다 제사 등 의례 과정에서 술이나 물을 담아 사용하거나 죽은 사람의 영혼을 담아 하늘로 올라가기 를 기원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기록으로 유추해 볼 때 옛 부터 말은 승천

33) 표인주, 「민속현상에 나타난 ‘말(馬)’의 상징성」, 비교민속학 9, 비교민속학회, 1992, 208쪽.

34) 三國史記 卷3, 新羅本紀 第3 나물이사금 45년 冬十月, 王所甞御内厩馬, 跪膝流淚校勘 哀鳴.

하는 영혼을 도와주는 역할 즉 피장자의 영혼을 싣고 승천하는 신앙적 상징물, 신 성한 동물로 인식되어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제작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35)

그림 2] 기마인물형 토기36)

세 번째는 인류의 생활 속에서 친근함을 나타나는 말의 상징성이다. 말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그 존재를 나타낸다. 말은 신화와 전설을 중심으로 설화에 반영되어 나타나기도 하지만 일생 언어생활이나 우리의 고유한 세시풍속 또 는 놀이의 형태로도 그 모습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 이는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 에 말에 대한 관념이 밀접하고 친근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음 의 사료는 말을 이용한 놀이로 다른 나라를 멸망시킨 일에 대한 것이다.

于尸山國과 居柒山國이 신라 국경의 인근에 끼어 있어 매우 걱정거리였다. 居道가 변경의 지방관 이 되어 몰래 그곳을 병탄할 생각을 품었다. 매년 한 번씩 많은 말들을 張吐의 들판에 모아놓고, 병사들로 하여금 말을 타고 달리면서 재미있게 놀게 하였다. 당시사람들은 이 놀이를 馬技라 불 렀다. 두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익숙히 보아 왔으므로, 신라의 평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여 이상 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때 거도는 전쟁을 일으켜 갑작스레 두 곳을 쳐서 멸망시켰다.37)

삼국시대 이후에도 군사적인 측면에서 말의 유희를 이용하는 방법이 여러 갈래로 전승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은 조선시대의 마상무예를 들 수 있다. 마 상무예는 기병이 활이나 칼 혹은 다양한 종류의 병무기를 사용하여 말과 함께 했던

35) 한국의 馬 시공을 달리다 , 국립제주박물관, 2014, 40쪽 36) http://www.museum,.go.kr/

37) 三國史記 卷44 列傳4, 居道 “時于尸山國·居柒山國, 介居鄰境, 頗爲國患. 居道爲邊官, 潛懐并呑之 志. 每年一度, 集羣馬於張吐之野, 使兵士騎之馳走, 以爲戲樂. 時人稱爲馬叔.校勘兩國人習見之, 以爲新 羅常事, 不以爲怪. 於是, 起兵馬, 擊其不意, 以滅二國.”

무예훈련을 말한다. 이런 마상무예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조선 후기까지 그 모습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상무예의 변화과정을 통해 당대의 군제나 전술의 변화에 대한 이해를 더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무예 인 毛毬또한 조선 전기를 대표할 만한 마상무예라고 할 수 있다. 모구는 그냥 제자 리에 서서 활을 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타고 달리며 앞의 말이 끄는 털 공에 화살 을 쏘는 것으로 일종의 유희적 성격이 강한 마상무예이다. 조선왕조실록 에서 세

무예훈련을 말한다. 이런 마상무예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조선 후기까지 그 모습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상무예의 변화과정을 통해 당대의 군제나 전술의 변화에 대한 이해를 더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무예 인 毛毬또한 조선 전기를 대표할 만한 마상무예라고 할 수 있다. 모구는 그냥 제자 리에 서서 활을 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타고 달리며 앞의 말이 끄는 털 공에 화살 을 쏘는 것으로 일종의 유희적 성격이 강한 마상무예이다. 조선왕조실록 에서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