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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난립(亂立)

주요학습 내용

1. 호족(胡族)의 북방 침식 2. 오호(五胡)의 구분

3. 호족(胡族)의 궐기 4. 북방(北方)의 혼전 5. 저족(氐族)의 강성 6. 비수(淝水)의 전쟁

1. 호족(胡族)의 북방 침식

진(晉) 혜제(惠帝) 말에 호족(胡族)들이 일으킨 전란을 중국의 사가(史家)들은 오호란화(五胡亂華)라 한다. 오호(五胡)란 흉노(匈奴)와 갈(羯)․선비(鮮卑)․저(氐)․강(羌)을 가리키는데 이들이 호족의 주류 들이었다. 호족들은 전한(前漢) 때부터 후한과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꾸준히 중국으로 들어와 중국의 힘 이 약해지면 기회를 얻어 세력을 키워 나갔다. 삼국시대에는 이들을 이용하여 상대방과 싸웠기에 호족 들은 더욱 강해졌지만, 중국인들의 상무(尙武) 정신(精神)은 갈수록 약화되어 갔다.

서진(西晉) 때에 이르면 호인(胡人)들은 점점 더 복잡하게 분파(分派)되면서 중국 내지로까지 침습해 들어갔다. 북쪽은 요동반도와 내몽고․감숙성, 남쪽은 하북성의 동북부와 산서성의 중남부 및 섬서성의 북서 남부와 사천성의 북부까지 모두 호족의 거주지가 되었다. 이와 같은 호족의 분포는 서진(西晉)의 중심부를 포위하는 형태로 발전되어갔다. 북방의 중요 전략 지대는 모두 호인들의 세력 범위 안에 있게 되었기에 서진(西晉)의 도성도 호인들의 위협 아래 놓이게 되었다.

진무제(晉武帝) 6년인 서기 270년에는 하서(河西)의 선비족인 독발수기능(禿髮樹機能)이 반란을 일으 켜 량주(凉州)를 함락하였으나 마륭(馬隆)에 의해 278년에 평정되었다.

시어사(侍御史) 곽흠(郭欽)은 호족들을 변경밖으로 추방하자고 건의 하였지만 진(晉)의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혜제(晉惠帝) 6년인 서기 296년에는 관중(關中)의 저(氐)와 강(羌)이 군대를 일으키며 저(氐)의 장수 인 제만년(齊萬年)을 추대하여 양산(梁山-섬서성 건현)에 머물고 있었지만 서진(西晉)은 서기 299년에야 이를 평정하기 시작했다.

산음령(山陰令) 사람 강통(江統)은 “사융론(徙戎論)”을 저술하여 곽흠의 주장을 다시 내세웠지만 서진 (西晉)의 왕조는 300여 년간이나 자리 잡고 살던 호족들을 변경 밖으로 내 쫓기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 하면 서진은 ‘팔왕의 난’이란 내부 싸움에 다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2. 오호(五胡)의 구분

이 시기에 중국을 흔들어 놓았던 유목민족들은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1) 흉노(匈奴)

흉노는 전한(前漢)의 선제(宣帝) 때에 호한야(呼韓邪)의 항복을 받아들여 그 부락을 오원(五原)과 삭방 (朔方) 등의 군(郡)에 머물게 하여 한인(漢人)들과 함께 살게 하였다. 후한(後漢) 초에는 다시 남선우(南 單于)의 부(部)를 서하군(西夏郡)에 두었다가 그 뒤에 이석좌국성(離石左國城)으로 남선우(南單于)의 정 부를 옮겨 가게 하였다.

후한의 영제(靈帝) 말년에는 흉노가 한(漢)을 도와 황건적을 평정하기도 했다. 동탁의 난이 일어나면 서부터 흉노는 낙양 북쪽의 황하 연안인 하내군(河內郡)에 모여 있었으나 그들의 종족이 나날이 성하여 지면서 대부분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중부의 분수(汾水) 유역 일대에 나뉘어 살게 되었다. 헌제(獻帝) 때는 조조가 하북을 평정하고 그들을 좌․우․남․북․중의 5부로 나누어 모두 3만 여 부락이나 되었 다.

진무제 때 변경 밖의 흉노가 계속 항복해 들어오자 서진(西晉)은 그들을 중국 내지에 들어와 살게 하 였다. 그래서 병주(幷州-지금의 산서성) 전체는 흉노의 거주지가 되었다.

2) 선비(鮮卑)

오호 가운데 선비족의 부락이 가장 컸다. 흉노가 남쪽으로 이동하자 선비족들은 흉노의 땅에서 마음 대로 살면서 발전했기 때문이다. 후한의 환제(桓帝) 때 선비의 추장 단석괴(檀石槐)는 중국의 큰 근심거 리가 되었다.

삼국시대의 선비 부락은 점차 분립하여 통일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부락은 모용(慕容)․

척발(拓跋)․단(段)․우문(宇文)․독발(禿髮)․걸복씨(乞伏氏) 등이 있었으며, 이 가운데도 모용과 척발 2 씨가 가장 강하였다. 이 선비 부락은 북쪽 변방에 분포되어 요동으로부터 하서(河西)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들의 활동 지역이었다. 당시 선비족 중에는 농경을 하는 부락도 많았다.

3) 갈(羯)

갈(羯)은 흉노의 별파로써 흉노를 따라 중국으로 들어와 상당군(上黨郡)의 갈실(羯室-지금의 산서성 요현)에 흩어져 살고 있어 갈호(羯胡)라고 불리었으며 그들은 이때까지 유목 생활을 하고 있었다.

4) 저(氐)

저(氐)는 한대(漢代)에 서남이(西南夷)에 속했던 민족으로 염방(冉駹-지금의 사천성 무현) 동북의 무도 군(武都郡-지금의 감숙성 성현)의 경내에 있었으며, 모두 10여 부락으로 그 중 백마씨(白馬氏)가 가장 컸다.

파군(巴郡-지금의 사천성 강북현)에 살고 있는 부족으로는 무락종리종(武落鍾離種)이 가장 컸었다.

후한(後漢) 말에 조조(曹操)는 무도저(武都氐) 수만 부락을 경조(京兆-지금의 섬서성 장안현)․부풍(扶 風-지금의 섬서성 경양현)․천수군(天水郡-지금의 감숙성 천수현) 등의 경내에 옮겨 유비(劉備)를 막도 록 하였다.

촉한(蜀漢)의 후주(後主) 때 무도저(武都氐) 400여 호를 광도(廣都-지금의 사천성 화양현)에 옮겨 살게 하였으므로 저인(氐人)들은 점차 내지로 들어가게 되었다.

진(晉)나라 때 저인(氐人)들의 중요한 근거지는 무도(武都)와 략양(略陽-지금의 감숙성 태안현) 등 2개 군(郡)이었으며, 경조(京兆)의 저인(氐人)도 전과 같이 살고 있으면서 일부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5) 강(羌)

강(羌)은 후한(後漢) 때에 변방의 근심거리로서 특히 중엽 이후에는 더욱 심각하였다. 이 시기에 강인 (羌人)들은 지금의 감숙성 동부와 섬서성 북부 일대에 살고 있으면서 동서(東西) 2개 부락으로 나뉘어 있었다. 영제(靈帝) 때는 단영(段穎)의 활약으로 그 세력이 크게 쇠약하여 오호(五胡) 가운데 가장 약했 다고 볼 수 있다. 저(氐)나 강족(羌族)의 숫자는 흉노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고 선비(鮮卑)보다 적었으나 그들의 한화(漢化)는 비교적 순탄하게 잘 되어 간 편이다. 그들은 모두 중국어를 할 줄 알았고 추장들은 한인(漢人)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오호(五胡)는 진(晉) 혜제(惠帝) 말기부터 대규모로 거병(擧兵)을 하기 시작하여 10년 후에는 북방 전체를 점령하였다.

서기 304년에 흉노의 유연(劉淵)이 왕이라 자칭한 뒤부터 남조(南朝) 송(宋)의 문제(文帝)가 재위 16년 인 서기 439년에 북위(北魏)가 북방을 통일하기까지 136년 동안 10여 개의 국가를 세워 한족(漢族)의 전 통적인 정권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동안 한인(漢人)들도 북방에 3개의 소국(小國)을 건국하였으나 그것 은 호족(胡族) 세계의 일개 점(點)에 불과할 뿐이었다. 역사가들은 이들을 십육국(十六國)이라 부르고 있 다.

16국의 명칭은 흉노(匈奴)가 건국하였던 전조(前趙)․북량(北涼)․하(夏)와 갈(羯)이 건국한 후조(後 趙), 선비(鮮卑)가 건국한 전연(前燕)․후연(後燕)․남연(南燕)․서진(西秦)․남량(南涼), 강(羌)이 건국한 후진(後秦), 저(氐)가 건국한 전진(前秦)․후량(後凉)․성한(成漢), 한인(漢人)이 건국한 전량(前涼)․서량 (西涼)․북연(北燕)이다.

이 기간에 일어난 국가는 16국 이외에도 더 있어서 20여 개 국가가 흥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16국이 차지 한 지역이 넓고 국가를 유지한 기간이 길었기에 역사가들은 십육국 시대라 한다.

3. 호족(胡族)의 궐기

1) 혼전의 시작

서진(西晉)때부터 남조(南朝)가 멸망하기까지 62개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였다.

서진(西晉) 혜제(惠帝) 말년에 먼저 군사를 일으킨 호족은 파저(巴氐) 이씨(李氏)였다. 이씨들은 지금 의 사천성 낭중현(閬中縣)에 살고 있다가 한나라 말기 장노(張魯)가 한중을 차지하고 있자 그 부족 가운 데 이호(李虎)라는 인물이 500여 가구를 이끌고 그에게 의탁하였다. 후에 조조가 한중을 평정하자 이호 (李虎)와 그 부족들을 략양(略陽)에 옮겨 살도록 하여 파씨(巴氏)라고 불렀다.

진(晉)에 이르러 이들이 흥성하였다. 이호의 손자인 이특(李特)․이상(李庠)․이류(李流) 등은 모두가 뛰어나 주변의 부족들이 귀순해 왔다. 혜제 때 제만년(齊萬年)이 반란을 일으키고 관중(關中)에 대기근 이 일어나자 이특 형제들은 부족을 이끌고 촉으로 들어갔다.

서기 300년 익주(益州) 자사 조흠(趙廞)이 성도(成都)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이상(李庠)을 장군으로 삼 았다. 다음해 조흠은 이상(李庠) 인망이 높을 것을 시기하여 죽이자 이특 등은 조상을 죽이고 성도로 들

어갔다.

서진(西晉)이 나상(羅尙)에게 군대를 이끌고 촉을 평정하게 하자 이특은 서진에 항복하였고 서진은 그 에게 작위와 상을 내렸다. 그 해 나상이 유민들을 돌려보내려고 하자 이특은 여러 차례 옛 정으로 이들 에게 호소하여 대부분이 그에게 귀속하였는데 그 수가 2만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요죽(繇竹-지금의 사 천성 북양현)에 머물게 되었다. 이특은 사천성 수녕현에 자리 잡고 성도(成都)로 진공하였으나, 서기 303 년에 서진의 후원군이 도착하여 이특을 죽이자 이류와 이특의 아들 이웅(李雄)은 사천성에 있는 비성(郫 城)에 자리 잡았다. 같은 해에 이류가 죽자 이웅을 수령으로 추대했는데 라상은 이를 공격하다가 실패하 고 달아났다. 이웅은 성도로 들어가 서기 304년에 스스로 성도(成都)의 왕이 되었다가 서기 306년에는 황제라 바꾸어 부르고 국호를 성(成)이라 하였다.

이 때 서진은 제왕들이 싸우고 있어서 이를 원정할 힘이 없었기에 지금의 섬서성과 사천성 및 귀주성 일부가 이웅에 의해 함락되었다. 그러나 이웅이 일어난 지역은 멀어서 대국을 견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유연(劉淵)이 기병한 시점을 호족들에 의한 중국 통치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2) 유연(劉淵)

유연(劉淵)은 후한 말의 흉노 남선우(南單于)인 어부라(於扶羅)의 손자로 부친 표(彪)는 좌현왕이 되어 유(劉)씨 성을 사용하였다. 조조는 흉노를 5개 부락으로 나누고 그 우두머리들에게는 모두 유(劉)씨 성 (姓)을 쓰도록 했다. 유표(劉豹)는 좌부수(左部帥)가 되어 지금의 산서성 고평현에 머물고 있었다. 진무 제 때 유연이 아비의 자리를 계승하였고 무제는 그를 북부도위로 삼았다.

혜제 때는 유연이 오부(五部) 대도독이 되어 5부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 때 성도왕 영(穎)이 업(鄴)에 머물게 되었는데 유연이 그를 따랐다. 서기 304년 왕준(王浚)과 등(騰)이 영(穎)을 공격하자 유연은 부족 으로 돌아가 군대를 일으키어 적을 격파하겠다고 청하고, 영(穎)은 이를 허락하였다. 유연이 부(部)에 도 착한 뒤에 즉시 서진(西晉)에 반란을 일으키고 독립하여 스스로 한왕(漢王)이라 칭하면서 좌국성(左國 城)에 도읍을 정하였다. 회제(懷帝) 2년인 서기 308년에는 황제라 칭하고 평양(平陽-지금의 산서성 임분 현)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 다음해 유연은 아들 총(聰)을 보내 낙양을 침공하였으나 실패하고 돌아왔다.

유연은 석륵(石勒-羯人)․왕미(王彌) 등을 기주(冀州)․청주(靑州)․사주(司州)․예주(豫州)․서주(徐 州)․연주(兗州) 등에 보내 가는 곳마다 파괴하였다.

서기 310년에는 유연이 죽고 아들 유화(劉和)가 계위하였다. 그러자 유총이 유화를 죽이고 자립하였 다. 이때 관동(關東) 지구의 대부분은 흉노의 소유가 되었고 낙양도 위험했으나 서진(西晉)의 군신들은 여전히 내분에 빠져 있었다. 동해왕 월(越)은 호인들의 침입이 심각해지자 석륵(石勒)의 토벌을 자처하 여 연주(兗州)와 예주(豫州)를 진압하였다.

3) 석륵(石勒)

그해 월(越)은 항(項-지금의 하남성 항성현)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는 조정의 중신들과 명장 및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갔으므로 낙양은 더욱 약하게 되었다.

서기 311년 회제(懷帝)는 동해왕 월의 전횡을 괘씸하게 생각하고 비밀리에 장군 구희(苟睎)를 보내 토 벌하니 월(越)은 분사하고 말았다. 태위 왕연(王衍) 들은 월의 장례를 치르려고 동해로 돌아갔다. 그 기 회를 틈타 석륵은 허창에서 그들을 추격하여 진군(晉軍)을 고현(苦縣-지금의 하남성 녹읍현)에서 크게 무찔러 10여만 명이 거의 죽고 왕공(王公) 대신들도 대부분 포로가 되어 서진의 무력(武力)은 완전히 상 실된 지경에 이르렀다.

이 때 낙양은 기근으로 백관이 흩어졌다. 유총은 이 기회를 노리고 군대를 낙양에 보내 공격하니 진 군(晉軍)은 연전연패하여 낙양이 함락되고 회제(懷帝)는 포로가 되었다. 유총은 계속하여 족자(族子) 유 요(劉曜) 등을 보내 서쪽으로 장안을 취한 뒤 남양왕 모(模)를 죽이고 유요를 관중에 머물게 하였다. 구 희(苟睎)는 서진 무제(武帝)의 손자인 예장왕 단(端)을 받들어 몽현(蒙縣-지금의 하남성 상구현)에 행대 (行臺)를 세웠으나 석륵에게 공격당하여 포로가 되었다. 이 때 석륵은 왕미(王彌)를 죽이고 그 부하들을

합병하여 세력이 매우 강하게 되었다.

4) 서진(西晉)의 수난시대

서기 312년 진(晉)의 안정태수(安定太守) 가필(賈疋)과 풍익태수(馮翊太守) 색림(索琳), 안이호군(安夷 護軍) 국윤(麴允) 등이 기병하여 장안을 공격해 함락시키자 유요는 패하여 도망갔다. 가필 등은 무제의 손자 진왕(秦王) 업(業)을 받들어 태자로 삼아 행대를 세웠다. 다음해 회제가 살해되었다는 말이 들리자 업(業)이 제위에 올라 연호를 건흥이라 하고 민제(愍帝)가 되었다.

그 후 유요는 해마다 서쪽을 공격하다가 서기 316년에 다시 장안을 공격하였다. 진군(晉軍)의 식량이 다 떨어지자 민제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 이 때 서진의 북방은 대부분 함락되었고, 겨우 세 지역만 지 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 중 하나는 병주자사(幷州刺史) 유곤(劉琨)이 양곡(陽谷-지금의 산서성 양곡현)을 지키고 있으면서 서쪽으로 선비의 탁발씨(拓跋氏) 부(部)의 추장인 의노(猗盧)와 접하여 병주의 북부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유주자사(幽州刺史) 단필탄(段匹殫)이 계(薊-지금의 하북성 대흥현)에 머 물면서 유주(幽州)를 보호하고 있었다. 단필탄은 본래 유주(幽州)의 선비(鮮卑)로 부친 무목진(務目塵)이 요서군(遼西郡) 지역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혜제(惠帝) 때에 서진으로부터 요서공(遼西公)의 작위를 받 았다. 회제(懷帝) 때는 무목진을 대선우로 삼고 단필탄을 좌현왕으로 삼아 서진을 돕게 하였다. 서기 314년에 왕준(王浚)이 석륵에게 살해되자 단필탄은 유주자사로 계임(繼任)되었다.

량주자사(凉州刺史)인 장식(張寔)이 고장(姑臧-지금의 감숙성 무위현)에 머물면서 서진에 충성을 다하 고 있었다. 장식의 부친은 궤(軌)로 혜제 때에 량주자사가 되어 하서(河西)를 지키고 있으면서 서진을 섬겨 왔다.

5) 동진(東晉) 건국

민제 때 장궤가 죽자 식(寔)이 계위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밀려오는 호족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민제(愍帝)가 포로가 되자 건업(建業)을 지키고 있던 낭야왕(琅邪王) 예(睿)가 옹립되어 진왕(晋王)이 되 고 건무(建武)라 연호를 고쳤다. 예(睿)는 사마의(司馬懿)의 아들 낭야왕 주(伷)의 손자로 혜제 말년에 동해왕 월이 그를 평동(平東) 장군으로 삼아 하비(下邳-지금의 강소성 비현)에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회제(懷帝) 초에 건업으로 옮겼다. 사마예는 왕도(王導)를 모사로 삼아 신임하였고, 오(吳)나라 지역의 명현(名賢) 고영(顧榮)과 하순(賀循) 등을 끌어들여 당지(當地)의 인심을 얻었다. 낙양이 함락되고 많은 중원의 인사들이 남하하자 그 중에 현인(賢人)들을 모아 함께 일을 보도록 하였다.

예(睿)는 검소하고 청빈하게 살면서 백성들을 착취하지 않았기에 남방의 여러 주들이 차례로 귀속하 였다. 민제가 즉위한 뒤에는 승상이 되었다. 장안이 함락되자 예(睿)는 북정(北征)을 하자고 하였으나 이 는 형식상이었을 뿐이다. 서기 317년에 민제가 평양(平陽)에서 해를 당하자 다음해 3월에 예(睿)가 제위 에 올라 태흥(太興)이라 연호를 바꾸니 원제(元帝)가 된다. 이로부터 진(晉)은 강남으로 옮겨가 북방의 호족 국가들과 대치하였다.

역사가들은 진무제(晉武帝)부터 민제(愍帝)까지를 서진(西秦)이라 하고, 원제(元帝) 이후의 진(晉)을 동 진(東晋)이라고 한다. 서진(西晉)이 지속된 기간은 서기 265년부터 316년까지 52년이었다.

4. 북방(北方)의 혼전

1) 2개의 조(趙)나라

서기 318년 유총이 죽고 아들 찬(粲)이 계위하였으나 주색만 좋아하고 정치는 사공(司空)인 근준(靳 準)에게 맡기었다. 근준은 친위병을 데리고 유찬을 죽여 유씨를 없애 버렸다. 장안에 있던 유요(劉曜)와 양국(襄國-지금의 하남성 형대현)에 있던 석륵은 이 사실을 알고 근준을 토벌하였다. 석륵의 군대가 먼

저 평양에 도착하자 근준은 부하에게 살해되어 난이 평정되었다. 유요(劉曜)는 동쪽으로 가는 도중에 칭 제(稱帝)하고 다음 해에는 장안(長安)에 천도하여 국호를 조(趙)라 하였다. 그 해 석륵도 유요와의 사이 가 나빠지자 양국(襄國)에서 조(趙-후조)의 왕위에 올라 유요와의 관계를 끊었다.

서기 316년에 유곤(劉琨)은 석륵에게 패하여 단필탄에게 투항하였으나 단필탄에게 살해되었다. 이 때 단필탄은 석륵에게 패하여 유주(幽州)와 병주(幷州)를 완전히 잃어버려 관동지구는 모두 석륵의 소유가 되었다. 석륵은 서쪽으로 황하와 낙수 사이에서 유요와 대립하고, 남쪽으로는 회북에서 동진과 대적하면 서 세력을 키워 나갔다.

유요도 적극적으로 관중을 다스리며 상군(上郡)의 저(氐) 양씨(楊氏)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유요는 황 음무도하여 석륵을 따라 갈 수 없었다.

서기 321년 석륵은 석호(石虎)를 보내 단필탄(段匹殫)을 염차(厭次-지금의 산동성 양신현)에서 격파하 고 그를 사로잡았다.

서기 328년 석륵은 유요와 싸워 유요를 사로잡아 죽였다. 유요가 죽은 뒤 조(趙)의 태자 희(熙)는 다 음해 백관을 이끌고 상규(上邽-지금의 감숙성 천수현)로 달아나 관중이 크게 혼란하였다. 석륵은 석생 (石生)을 보내 장안을 취하고, 석호는 상규를 취하여 조(趙)의 태자를 죽였다.

서기 330년, 석륵이 제위(帝位)에 올랐지만 국호는 여전히 조(趙)라고 하였다. 석륵은 재주가 뛰어나고 표독하며 교활하였기에 갈호(羯胡)의 소종(小種)으로도 중국을 휘어잡을 수 있었다. 그는 한인(漢人) 장 빈(張賓)을 모사로 삼아 예(禮)로 다스릴 줄도 알았고 의관화족(衣冠華族)을 존중할 줄도 알았다.

이 때 양주(凉州)의 장준(張駿-寔의 아들)이 기회를 보다가 자립하여 서진(西晉)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것 외에는 중국 북방 전체가 조(趙) 석륵의 소유나 마찬가지였다.

서기 333년 석륵이 죽자 아들 석홍(石弘)이 계위하고 석호(石虎)를 승상으로 삼았으나 다음해 석호는 석홍을 폐위시켜 죽이고 자칭 거섭천황(居攝天王)이라고 했다. 서기 335년 석호는 업(鄴)으로 환도하였 다가 337년에는 자칭 천왕이라고 하였다. 석호는 뜻을 이루자 사치만 일삼고 멋대로 사람을 죽였으므로 정치는 어지러워갔다. 서기 349년에 석호가 칭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자 아들 세(世)가 계위하였다.

그러자 석세의 형인 석준(石遵)이 석세를 죽이고 자리를 빼앗았다. 그러자 대장 석민(石閔)이 다시 석준 을 죽이고 석호의 서자인 감(鑒)을 계위시켰다. 석민은 한인(漢人)으로 본성은 염씨(冉氏)였으나 석호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성을 석(石)이라 고쳤다.

역사가들은 유요(劉曜)의 조(趙)를 전조(前趙), 석륵(石勒)의 조(趙)를 후조(後趙)라고 하였다.

2) 선비(鮮卑) 모용씨(慕容氏)

호족들이 중국 북방으로 들어온 뒤부터 그 군주는 한제(漢制)에 따라 황제라 하였지만 별도로 대선우 를 상설하여 아들이나 동생을 임명해 부족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한족이나 호족은 융화될 수 없었던 것 이다. 석민(石閔)의 정권은 한인들에게는 후원을 받았지만 호인들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석민은 한인들에게 갈호(羯胡)를 죽이도록 장려하였다. 그래서 20여만 명의 호인(胡人)들이 살육 당하였다.

350년에는 석감이 석민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오히려 석민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자 석민은 제위 에 올라 국호를 위(魏)라 하고 염(冉)씨 성을 다시 사용하였다.

이 때 석호의 아들 지(祗)가 양국(襄國)에 있으면서 존호를 칭하고 있었기에 호인 중에 군대를 데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호응하여 여러 차례 석민과 싸웠다. 다음 해 석지(石祗)는 부하 장수인 유현 (劉顯)에게 살해되면서 석씨의 세력은 전멸되었다.

조(趙)와 위(魏)의 싸움이 한창일 때 요동의 선비 모용씨가 기회를 타고 남하하였기에 염민(冉閔)이 석씨를 멸망시킨 후에는 선비라는 새로운 강적과 만나게 되었다.

모용씨(慕容氏)는 선비족 장군의 집안이다. 위(魏)나라 명제(明帝) 때 막호발(莫護跋)이 창려(昌黎) 극 성(棘城-지금의 요녕성 금현)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진무제 때는 막호발의 증손인 외(廆)의 세력이 강해 지자 선비(鮮卑)의 도독으로 삼았다. 회제(懷帝) 때는 모용외(慕容廆)가 스스로 선비(鮮卑) 대선우(大單 于)라 부르며 요동에 부속된 선비족을 공격하여 합병시켰다. 서진(西晉)이 남으로 이주하자 모용외는 요

동을 공격하여 고구려 군사도 여러 차례 격파하였다. 원제(元帝)는 모용외를 평주목요동군공(平州牧遼東 郡公)으로 삼아 서로 돕도록 하였다.

서기 333년 모용외가 죽자 아들 황(皝)이 계위하여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하며 용서(龍西-지금의 열 하 조양현)로 옮겨갔다. 다음해 후조(後趙)의 석호(石虎)가 침공했으나 모용황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 전 에 모용황은 요서의 선비(鮮卑) 단요(段遼)를 멸망시키며 수년 동안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서기 348년 모용황이 죽자 아들 준(儁)이 계위하였다. 후조(後趙)가 혼란해지자 모용준(慕容儁)은 그 기회를 노리고 남하 하여 350년에 계(薊)를 빼앗고 그 곳을 도성으로 삼았다.

서기 352년에는 모용준(慕容儁)이 동생 모용각(慕容恪)을 보내 염민(冉閔)을 공격하였다. 염민은 연군 (燕軍)과 위창(魏昌-지금의 하북성 무극현)에서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 용성(龍城)에서 참수 당하였고, 연 군(燕軍)은 업(鄴)을 취하였다. 그 해 겨울 모용준은 제위에 올라 연(燕)이라 부르고 업(鄴)으로 천도하 였다. 역사가들은 이를 전연(前燕)이라 부른다.

전연의 중요한 기반은 요동과 관동 지구이다. 남쪽으로는 회수(淮水) 이북에서 동진(東晋)과 대치하였 고, 관중(關中) 지구는 염(冉)씨의 위(魏)나라 때 저(氐) 족인 부씨(苻氏)에게 빼앗겼다.

5. 저족(氐族)의 강성

1) 저족(氐族) 부견(苻堅)씨

저족(氐族) 출신 부씨(苻氏)의 선조는 략양(略陽) 임위(臨渭-지금의 감숙성 진안현) 출신으로 대대로 저 (氐)의 장군이었다. 전조(前趙) 때 저(氐)의 부족들 가운데 포홍(蒲洪)이 유요에게 투항하였으나 전조(前 趙)가 망하자 포홍은 석호(石虎)에게 투항하였다. 석호는 그를 장군으로 삼아 방두(枋頭-지금의 하남성 준현)에 주둔시켰다. 석호가 죽자 포홍은 다시 동진(東晋)에 투항하였고, 서기 350년에 동진은 그를 정북 대장군(征北大將軍)으로 임명하였기에 세력이 커졌다. 그러자 포홍은 부씨(苻氏)로 성을 고치고 스스로 대선우삼진왕(大單于三秦王)이라 칭하였다.

조(趙)와 위(魏)가 싸울 때 포홍은 중원을 차지하고 서쪽으로 관중을 취하려고 하였으나 성사되기 전 에 부장(部將)에게 살해되었다. 포홍이 죽은 뒤 아들 부건(苻健)이 계위하여 부중(部衆)을 이끌고 입관 (入關)해 장안을 점령하였다. 그 다음해 부건은 스스로 천왕대선우(天王大單于)라 칭하고 국호를 대진(大 秦)이라 하였다. 역사가들은 이를 전진(前秦)이라 부른다. 서기 352년에는 부건이 칭제하였다. 동진(東晋) 은 환온(桓溫)을 보내 정벌하라고 하였지만 부건은 잘 막아 내었다. 부건은 계속하여 관중을 평정해 기 반을 공고히 하였다.

서기 355년에 부건이 죽고 아들 생(生)이 계위하였으나 357년에 부건의 동생인 부견(苻堅)이 생(生)을 살해하고 자립하였다.

2) 부견(苻堅)의 북방 통일

부견이 즉위한 뒤 학교를 일으켜 유학을 장려하고 절행(節行)을 표창하였으며 한인(漢人) 왕맹(王猛) 과 같은 인재를 등용하여 밝고 깨끗한 정치를 하였으므로 국운이 크게 신장되었다. 부견은 천하를 통일 할 야심을 가졌다. 이 당시 전진(前秦)의 동에는 연(燕), 서에는 량(凉), 남에는 동진(東晋), 북에는 선비 (鮮卑) 척발씨(拓跋氏)의 대(代)가 있어서 모두 천하 통일의 장애가 되었다.

당시 연(燕)은 전진(前秦)의 가장 큰 적이자 첫 번째 정복 목표였다. 그러나 연의 국력이 전진보다 강 하여 손대지 못하였다. 360년, 연(燕)은 모용준(慕容儁)이 죽고 아들 위(暐)가 계위하여 동생 모용각(慕 容恪)이 보정하였으나 국세는 여전히 강했다.

서기 367년에 모용각이 죽자 모용각의 숙부 모용평(慕容平)이 집정하였다. 모용평은 욕심이 많고 모자 라서 정치가 어지러워 갔다. 모용평은 연(燕)의 명장인 모용수(慕容垂)를 시기하여 죽이려 하였기에 모

용수는 전진(前秦)에 투항하였다. 전진은 비로소 연을 정벌하기로 결정하고 396년 겨울에 왕맹을 보내 연(燕)을 정벌하였다. 다음 해 전진(前秦) 군은 낙양과 진양(晋陽)을 함락시키고 로주(潞州-지금의 탁장 하)에서 모용평을 격파하여 15만 명이나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전진군(前秦軍)이 계속 업(鄴)을 포위하자 모용위(慕容暐)와 모용평(慕容平) 등은 용성(龍城)으로 달아났다가 전진(前秦)의 포로가 되어 연(燕)이 멸망하였다.

연(燕)을 멸망시킨 전진(前秦)은 373년에 다시 구지(仇池)의 저(氐) 양씨(楊氏)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이후 전진(前秦)은 구지(仇池)의 백성들을 관중으로 이주시켜 구지의 땅은 비게 되었다.

전진은 376년에 량(凉)도 멸망시켰다. 량을 멸망시키자 전진(前秦)은 즉각 대(代)를 정벌하였다. 대(代) 는 선비(鮮卑)의 탁발씨가 세운 나라로 색변발(索辮髮)을 했기에 색두부(索頭部)라고도 부른다. 대(代)를 공격하던 전진군(前秦軍)이 십익건(什翼犍)을 사로잡자 대(代)는 멸망하였다.

그 뒤 부견은 다시 여광(呂光)을 보내 서역을 침공하여 구자(龜玆)를 평정하니 항복한 나라가 30여 국 에 이르렀다. 이로써 중국의 북방은 전진(前秦)에 의해 완전히 평정되었다.

부견(苻堅)은 남방의 동진(東晋)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침공하였다.

구지를 멸망시킨 전진(前秦)은 남하하여 동진의 량(梁)과 익(益) 2개 주를 취하고 379년에는 양양(襄 陽)을 취하여 동진의 양주자사(梁州刺史) 주서(朱序)를 사로잡았다. 이로 인하여 전진(前秦)은 오호(五 胡)가 세운 나라 중 가장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부견은 왕도(王道) 사상에 물들어 있어서 다른 나라를 멸망시킬 때마다 그 나라의 군신들에게 모두 관작을 수여하는 관대함을 보여 주었다. 선비와 같은 종족은 나라가 망하고 포로가 되었지만 이러한 우 대 속에서 오히려 세력이 커 갔다. 부견(苻堅)은 동진(東晋)이 자기의 왕화(王化)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겨 북방을 평정한 뒤부터 적극적으로 남침을 도모하였다.

서기 378년에 전진(前秦)의 명상(名相) 왕맹(王猛)이 죽었다. 왕맹은 죽으면서 동진(東晋)이 중국의 정 통이라고 하며 그들은 국내가 안정되어 정복하기 어렵고, 선비(鮮卑)와 서강(西羌)은 심복(心腹)의 환 (患)이라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충고했으나 부견은 이 말을 등한시 하였다.

부견은 저(氐)의 종족이 번성해지자 저인(氐人) 15만호를 전국의 중요한 지역으로 보내 부씨(苻氏) 종 친에게 다스리도록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자신의 힘을 분산시키게 되었다.

그 뒤 부견은 대규모 동진(東晋) 공격을 계획하여 383년에 비수대전(淝水大戰)이 일어났다.

6. 비수(淝水)의 전쟁

1) 전진(前秦)의 세력(勢力)

효문제가 즉위 한 뒤에 사안(謝安) 등이 집정하였다. 사안은 식견이 넓어 민심이 그에게 돌아갔다. 사 안(謝安)은 형의 아들인 사현(謝玄)을 연주(兗州) 자사로 삼아 광능(廣陵-지금의 강소성 강도현)에 있게 하였다. 사현은 부임 이후 강북에서 모병한 지 수년이 못되어 강군(强軍)을 만들어 북부병(北部兵)이라 고 불렀다. 그는 유뇌지(劉牢之)를 참군(參軍)으로 삼고 선봉을 맡겼다. 당시 전진(前秦)의 부견이 강성 할 때라 항상 군대를 보내 남침하였지만 유뇌지는 이를 잘 막아내고 있었다. 이로부터 중앙의 군사력도 강대하기 시작하여 밖으로부터의 위협도 점차 적어지게 되었다.

북방을 완전히 통일한 전진(前秦)은 382년에 동진(東晋)을 정벌하고자 논의하였지만 많은 신하들이 반 대를 하였다. 그러나 오직 모용수(慕容垂)만이 찬성을 했다. 부견은 자기의 군사력이 강하였기에 반드시 이길 거라고 생각하고 383년에 일제히 출병하였다. 그 해 8월, 부견은 아우 부융(苻融)에게 선봉인 모용 수의 군대를 감독하게 하고 친히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였다. 이 밖에 유(幽)․기주(冀州)의 군대를 팽성 (彭城-지금의 강소성 동산현)으로 남하시키고, 양(梁)․익주(益州)의 군대는 장강(長江)과 한수(漢水)를 따라 동쪽으로 남하하게 하였다. 이때 동원된 군대는 보병 60만 명과 기병(騎兵) 27만 명으로 87만의 대

군이었다.

9월에 부견이 항성(項城-지금의 하남성 항성)에 이르자 후대인 량주군(凉州軍)은 그제야 함양에 도착 하였다. 부융이 30만 명을 먼저 이끌고 영구(穎口-지금의 안휘성 영상현)에 이르러 남침을 준비하였다.

2) 동진(東晉)의 방어

동진(東晋)은 사안의 동생 사석(謝石)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사현과 함께 8만 명으로 전진(前秦)의 군 대를 막았다. 동진은 나라 전체가 크게 놀라 공포에 떨고 있었으나 오직 사안만이 이것을 안정시키게 되었다.

그해 10월에는 부융이 수양(壽陽-수춘으로 지금의 안휘성 수현)을 함락하였다. 부견은 대군을 항성에 남겨 둔 채 자신은 경기(輕騎) 8,000명을 이끌고 수양으로 가 전에 포로가 되었던 동진의 장군 주서(朱 序)를 사석(謝石)에게 보내어 항복을 권고하였다. 주서는 암암리에 사석에게 전진병(前秦兵)이 모두 모이 기 전에 공격하도록 권고하였다.

11월에 사현은 유뇌지에게 정병 5000명을 보내 낙간(洛澗-지금의 안휘성 정원현)에서 맞아 싸우게 하 였다. 전진군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15,000명이나 되었다. 동진군의 주력이 승세를 타고 서진(西進)하 자 전진군은 비수(淝水) 서쪽에서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현(謝玄)은 부견(苻堅)에게 사람을 보내 스스로 도하하여 결전할 테니 부견의 군대를 5리만 물리라 고 하였다. 부견은 동진군이 도하할 때 공격하려고 이에 응하였다. 그러나 전진군은 일단 물러나게 되자 정지할 수 없었다. 이 기세를 타고 동진군이 도하하여 전진군을 급습하였다. 전진군은 일대 혼란에 빠져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대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로 부융이 피살되었다. 주서(朱序)는 후진(後陣)에 있으면서 전진군이 이미 패하였다고 크게 외치는 바람에 전진군은 즉시 붕궤되어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 았다.

비수전쟁이 동진의 승리로 끝났지만 동진은 옛 강토를 다시 회복할 수 없었다. 북방은 여전히 호족들 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체 인구의 절대 다수를 점유하고 있던 북방의 한인(漢人)들은 300여 년 동안 호 족(胡族)의 통치를 받아야 했다. 이 기간 동안 호족과 한인은 혼혈되어 새로운 종족이 출현하였고 외국 의 풍속과 종교가 대량으로 한인들에게 수입되어 체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거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이러한 현상은 남방의 동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 역시 만인(蠻人)들과 혼혈되어 황제(黃帝) 이후 부터 전해진 전통 한인(漢人)의 순수한 혈통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7. 사회와 문화

1) 죽림칠현(竹林七賢) 2) 서예가 위부인(衛婦人)

3) 벽돌을 운반한 동진(東晉)의 도간(陶侃) 4) 고개지의 100만전짜리 그림

5)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 6) 산수시인 도연명

7) 구마라집(鳩摩羅什)

8) 여걸 사도온(謝道韞)

9) 양산백과 축영대

이 시기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에 이어 남쪽에는 송(宋), 제(齊), 량(梁), 진(陳)의 순서로 흥망이 반복되었고, 북쪽에는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등의 국가가 저마다의 부국강병을 위해 병립하다가 수(隋)나라에 의해 다시 통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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