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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조(南北朝)의 대치(對峙)

이 시기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에 이어 남쪽에는 송(宋), 제(齊), 량(梁), 진(陳)의 순서로 흥망이 반복되었고, 북쪽에는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등의 국가가 저마다의 부국강병을 위해 병립하다가 수(隋)나라에 의해 다시 통일되었다.

북위 영희 3년(서력 534년)에 효무제 원수(元修)가 고환의 압박에 불만을 품고 서쪽 장안으로 달아나 우문태에게 의탁하자 고환은 대로했다. 그 해 10월 17일 11살 세자 원선(元善)을 다시 황제로 세워 동위 효정제(孝靜帝)가 되었다. 그는 영희 3년을 천평(天平) 원년으로 개원하고 업으로 천도했다.

북위는 전부터 큰 동란을 겪으며 진양을 근거지로 하는 고환의 세력과 장안을 근거지로 하는 우문태 두 개의 군사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영희 3년 5월, 원수는 동원령을 선포하고 하남 등 주의 군대를 이동하여 양나라를 정벌하겠다고 했지 만 실제는 진양을 기습하고자 한 계책이었다. 노련한 고환은 원수의 마음을 간파하고 역시 양나라를 정 벌한다는 명목으로 20만 군대를 남하시켜 낙양까지 육박하며 동관과 화음(華陰)까지 진격하였다. 다급한 원수는 우문태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원수는 우문태의 지원을 믿었기에 낙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고 집을 부렸으나 그 해 12월 우문태는 원수를 독살하였다. 다음해(서력 535년 1월) 우문태는 남양왕 보거 (寶炬)를 황제로 세워 서위(西魏) 문제(文帝)가 되었다. 서위의 연호는 대통(大統)으로 개원하였다. 이로 써 북쪽을 장악했던 북위는 고환이 독점하는 동위와 우문태가 통제하는 서위로 분열되었다.

3) 북제(北齊)와 북주(北周)

동위(東魏) 무정(武定) 8년(서력550년) 5월 10일. 고양이 황제에 등극하여 천보(天保)로 개원하고 국호 를 제(齊)라 하였다. 앞서 고환은 장자 고징을 후사로 정하고 차남 고양을 실력자로 양성하여 집안의 세 력를 다지고자 하였다. 고양은 형제 간 다툼을 피하기 위해 평소 재능을 드러내지 않았다. 고환이 죽은 뒤 고징이 정권을 장악했으나 암살당하자 고양이 대신 정권을 잡았다.

5월 초 심락․장량․조언심 등이 동위(東魏) 효정제에게 선양하라고 강요하자 효정제도 어쩔 수 없이 조서를 쓰라하였다. 최할과 배양지는 미리 써 놓은 조서에 옥새를 찍어 고양에게 황위가 넘어갔기에 동위는 멸망하고 북제(北齊)가 건국되었다.

우문태의 셋째 아들 우문각은 황후 원씨의 적자였다. 우문태가 556년에 50세의 나이로 죽으며 조카 우문호에게 뒤를 부탁하였다.

서위(西魏)에서는 우문태(宇文泰)의 세자 우문각(宇文覺)이 스스로 주공(周公)이라 하면서 전권을 행사 하다가 557년에 주(周)나라를 세웠다.

서력 559년 우문호는 정권을 황제에게 돌려주었으나 군권은 장악하였다. 주명제가 똑똑하자 우문호는 560년 4월 독이 든 떡을 주명제에게 먹여 독살하였다.

남쪽에서는 욱(頊)이 진선제(陳宣帝)가 되자 북제(北齊)의 혼란한 틈을 타 서력 573년에 오명철(吳明 徹)에게 10만 대군을 주어 북제(北齊)를 정벌해 연전연승하였다.

서력 575년 북주(北周) 무제(武帝)가 북제(北齊)를 멸망시켰다. 북방은 이 때 다시 통일을 보게 되었 다.

북주(北周)가 북제(北齊)를 멸망시키자 진선제는 또 오명철에게 북벌을 계속하게 하여 팽성(彭城)을 포위하였다. 북주(北周)는 왕궤(王軌)에게 팽성을 구원하게 하자 왕궤는 진군(陳軍)을 대파하고 오명철을 포로로 잡았다.

북주(北周)는 무제(武帝)가 578년에 죽자 태자 윤(贇)이 계위하여 선제(宣帝)가 되었다. 선제는 방종하 여 중신(重臣)을 죽이고 국정을 정역(鄭譯)에게 위임하였다. 다음 해 선제는 태자 천(闡)에게 전위하여 정제(靜帝)가 되고 자신은 스스로 천원황제(天元皇帝)라 칭하면서 방자하게 굴어 조정 전체가 불안하였 다.

이때 양견은 우대승상(右大丞相)이 되어 군․정(軍․政)의 대권을 혼자 장악하고 있어서 우문씨의 정 권은 쉽게 양견에게 돌아갔다. 양견이 전정(專政)한 지 얼마 안 되어 상주(相州-지금의 하남성 안양현) 총관 울지형(尉遲逈))이 군대를 일으켜 양견을 토벌하자 관동의 여러 고을이 호응하였다. 운주(鄖州)와 익주(益州)에서도 반란이 일어났지만 양견의 지지기반은 관중(關中) 뿐이었다. 양견은 위효관(韋孝寬)과 왕의(王誼) 등을 보내 10월에 이들을 완전 평정하였다.

4) 유연(油然)과 돌궐(突厥) - 유연

북흉노 제국(서기 155)을 멸망시키는데 중국과 함께 힘을 합쳤던 몽골계 선비족(鮮卑族)은 몽골리아 지역에서 흉노의 대체 세력의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흉노제국이 사라진 이후에 몽골리아는 약 2세기 반 동안 권력의 진공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기원후 400년경이 되어서야 강력한 새로운 유 목 민족 제국이 등장하였다. 이것이 바로 유연(柔然)이라고도 불리는 유목민족이다. 유연에 대한 역사 역시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다.

유연의 생활양식도 다른 유목민족들의 양식과 비슷했다. ‘그들은 물과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며, 천막 에서 거주한다’는 것 등의 기록과 유연이 변발을 했었다는 기록도 보이고 있다. 이들 유연과 북중국을 장악한 북위(北魏)와의 관계는 공격과 방어, 그리고 보복 공격 등으로 끊임없는 전쟁과 침략의 연속이었 다.

북위는 전력의 우세를 믿고 여러 차례 유연의 영토 깊숙이 침입했었다. 북위의 황제 세조(世祖) 태무 (太武 423-452)의 재위 기간인 438년과 443년에, 북위의 군대는 유연의 군대와 싸우려고 고비 사막을 가 로 질러 갔으나 제대로 싸워 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유연의 군대가 광활한 대륙 속으로 피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막의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북위 군사들은 대부분 병들어 죽었다.

북위는 429년 이후에 오손(烏孫), 고차(高車) 등 소왕국들과 동맹 관계를 맺어 유연과 싸웠다. 448년 열반(悅般)과의 동맹은 유연에 중대한 타격을 주었다. 북위와 열반 동맹군의 공격으로 유연의 통치자 달 단(韃靼 414-429)이 사망하였지만 멸망시키지는 못했다. 결국 유연을 토벌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 는 것을 깨달은 북위 왕조는 공격에서 수비 위주로 전환하여 긴 성벽을 건설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으 로도 북위는 유연을 굴복시키지 못하고 유연의 멸망보다 앞선 534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한편, 유연에 복속되어 철공업에 종사하던 돌궐족들이 6세기 초에 유연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하기 시 작하였다. 그들은 북위의 지원을 받으면서 성장하여 세력이 점차 증강되자 부족장이었던 토문(土門)이라 고도 불리는 부민은 유연의 통치자에게 공주와 혼인하기를 요청했지만 그가 대장장이 출신이라는 이유 로 거절당하였다. 부민은 이 사건을 빌미로 552년에 북위의 계승자인 서위(西魏 535-554)의 도움을 받으 며 유연에 공격을 단행하여 유연을 격파하였다. 이로 인하여 유연의 군주인 아아궈이가 자살하고, 아아 궈이가 없는 유연은 내부 분열이 일어나 패망하였다.

다시 서력 555년에 돌궐은 유연의 군대를 완파시키고 3,000명을 잡아다 목 베어 죽였다. 이로서 유연 이라는 나라는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의 역사에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 돌궐

중국은 투르크족을 돌궐(突厥)이라 불렀는데 이 말은 중국인이 북방 오랑캐인 투르크족을 경멸하는 뜻으로 만들어낸 조어(造語)로서 투르크와는 별개의 말이다. 돌궐의 뜻은 ‘사나운 말 같은 큘부족’이라는 뜻이다. 즉, 이 말은 돌궐족의 초기 부족명이 ‘궐(厥)’ 즉 ‘큘’ 임을 암시하고 있다.

투르크족은 흉노의 후손들로 본거지는 알타이산맥의 외트켄 산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부족을 투르크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그들이 알타이 산록에 거주하였고, 알타이 산이 투구처럼 생겨 그 와 같은 의미의 이름을 붙였다고 하기도 한다. 이 부족의 원래 직업은 철공이었다. 처음에는 유연에 속 한 일개 복속국가 이었지만 유연을 뒤엎고 제국을 건설했다. 이들은 유목민족의 역사상 최초로 군락지 대를 건설하여 유목지대의 도시 건설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돌궐 제국은 부민 혹은 투멘 이라고 불리는 고대 투르크족 지도자에 의해 서력 545년 경 건설되었다.

서력 552년 서위(西魏)와 연합하여 유연(柔然)을 멸망시킴으로 초원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서력 553년 부민이 사망한 후에 아들 무칸과 동생 이스테미가 동부 초원과 서부 초원을 나누어 다스리게 되었다.

그들 중 동돌궐을 지배하는 자가 돌궐제국의 왕이 되었다. 왕호는‘카간’이라 하였다.

서돌궐은 형식상 동돌궐에 부속되어 있었기에 서돌궐을 다스리는 우두머리의 관직명은 ‘야부그’였다.

서력 557년 돌궐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같이 아프가니스탄 지방의 에프탈리테를 붕괴시키고 영토를 동

부 킨강산맥에서 부터 트란속시아나 지경까지 넓혔다. 그 후 중앙아시아의 비단무역길을 장악한 돌궐은 페르시아와의 무역 협정을 추진했으나 실패하였다.

서력 567년에 소그드인 비단업자 마니아크를 단장으로 비잔틴제국에 외교사절단을 보내 돌궐과 비잔 틴이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페르시아는 오랜 기간 동안 이 지역의 교역을 장악해 왔었는데 , 돌궐이 소그드 상인들을 지배하자 돌궐과 적대관계를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돌궐이 중국에서 비단을 구매하여 페르시아에게 팔고 페르시아가 다시 비잔틴에게 파는 중개무역이 구상되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돌궐은 비잔틴과의 직접 무역을 시도하였다. 직접 무역은 돌궐과 비잔틴간의 외교관계의 증진으로 발달 했다.

돌궐과 비잔틴의 우호는 전통적으로 페르시아와 적대관계에 있는 비잔틴으로서는 페르시아를 위협하 려는 전략적 의미로도 중요했다. 아바르인에 대한 기득권 문제로 비잔틴과 돌궐이 한때 긴장하기도 했 으나 비교적 돌궐과 비잔틴의 관계는 무난히 계속되었다. 돌궐은 중국 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침략을 통해 경제적인 부를 축척했다.

그러나 서력 583년 통일된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었다. 내부분열로 인해 동서로 나뉘어진 돌궐은 수나라에 의해 이용당하기 시작하였다.

서력 612년,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다가 실패함으로써 나라가 멸망하게 되면서 이 시기를 이용하 여 돌궐이 잠깐 부흥하였으나, 곧이어 등장한 당나라에 의해 반세기 동안 지배를 받게 되었다.

서력 683년에 이르러 쿠툴루그 일테리쉬에 의해 돌궐은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여 제 2의 돌궐제국인 후돌궐을 세웠다. 돌궐비문에 나타난 빌게카간․큘테킨 등은 바로 이 후돌궐의 통치자들이 다.

일테리쉬는 독립 후 10년 만에 동부 초원지대를 장악하여 제국으로서 위치를 견고히 다졌다. 그러나 이 지역은 얼마 후 여러 유목 부족들의 세력 각축장이 되어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서 력 742년에 바스밀부족이 우이구르, 카를룩 부족과 연합하여 어린 나이에 카간이 된 돌궐의 마지막 왕 텡그리를 제거함으로써 돌궐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그 후 바스밀과 카를룩, 그리고 우이구르 사이의 세력 다툼에서 우이구르의 일테베르가 정권을 장악 하여 자신을 카간으로 선포함으로 우이구르제국이 출발하게 되었다. 

2. 남방(南方)의 정권교체

1) 송(宋)

동진(東晋)에서는 비수전 후에 사안(謝安)이 죽고 회계왕(會稽王) 도자(道子)가 정치를 독점하였다. 효 무제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여러 인물들을 등용했지만 그로 인하여 붕당이 발생되어 정치는 더욱 어지 러웠다.

402년 동진(東晋)은 환온(桓溫)의 아들인 환현(桓玄)이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 사마원현(司馬元顯)을 총 수로 삼고 유뇌지를 선봉, 사마상지를 후부장(後部將)으로 삼아 토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마상지는 환현에게 패하였다.

서력 403년 말에 환현은 건강(健康)에서 칭제하여 국호를 초(楚)라고 하였다. 그러자 404년에 북부병 의 구장(舊將)들인 유유(劉裕)․하무기(何無忌)․유의(劉毅) 등이 경구(京口)로부터 기병하여 환현을 토 벌하였다. 환현은 이 싸움에서 패하여 안제(安帝)를 데리고 심양(尋陽)과 강릉(江陵)으로 달아났다가 유 의(有毅)에게 패한 뒤 한중(漢中)으로 달아났으나 도중에 살해되었다.

유유는 두 차례 북벌하여 410년에 남연(南燕)을 멸망시키고 417년에 후진(後秦)을 멸망시켜 관중(關 中)을 회복했는데 동진(東晋)이 북방의 호족들과 싸운 전쟁 중에서 가장 큰 승리였다.

유유(劉裕)는 힘이 없었음에도 안제(安帝)를 죽이고 공제(恭帝)를 세웠다가 420년에 자립하여 국호를 송(宋)이라 하며 송무제(宋武帝)가 되었다. 이때부터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가 시작되었으나, 북방(北方) 은 그때까지 여러 나라가 병립하였기에 19년이 지난 뒤 북위(北魏)가 통일하고 나서야 완전한 남북조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유유에 의해 건국된 송(宋) 역시 내부의 혼란이 극심하였다. 무제 유유, 소제 유의부, 문제 유의륭, 효 무제 유준, 전폐제 유자업, 명제 유욱(劉彧), 후폐제 유욱(劉昱), 순제 유준까지 8대의 황제들이 계위하였 으나 대부분 황제들은 황음하고 무능하였고 권력 다툼에 의한 반란이 지속되었다.

소도성은 저연을 끌어들여 원찬과 유병을 죽이고, 심유지의 반란을 정복했다. 서력 479년 송순제 유준 은 소도성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선위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2) 제(齊)

서력 479년, 송(宋)을 찬탈하여 제(齊)를 건국한 소도성(蕭道成)은 대대적인 개혁을 하였다. 직접 검소 한 생활을 하며 가혹한 규제를 풀었다. 학교를 세워 백성들을 가르치며 사치한 물품 들을 폐기하도록 하면서 “내가 천하를 10년만 다스릴 수 있다면 금값을 흙 값으로 내리리라”라고 말하였다.

중국 고대 산림과 강, 호수는 국가 소유였으나 남북조 시대에 들어서 세족들이 소유하여 자기 장원으 로 만들었다. 소도성은 이것을 금지시켜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 호구조사를 하여 호적을 만들고 그 기 준으로 부역을 결정하였다. 소도성은 남북조 시대의 명군이었으나 황제에 오른지 4년 만에 56세의 나이 로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

소도성이 세운 제나라는 고제 소도성. 무제 소석. 울림왕 소소업. 해릉왕 소소문. 명제 소란. 동혼후 소보권. 화제 소보융까지 7대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제 역시 송과 다르지 않았다.

서력 500년 11월, 소연은 측근들과 은밀하게 모의하여 군사 1만 명에 군마 1,000여필, 배 3,000척을 얻 었다. 미리 숨겨 놓은 목재와 대나무를 꺼내 배를 만들고 여승진이 준비해 놓은 노를 가져왔다.

서력 501년 소연의 대군은 양양을 출발하여 노산과 영성의 투항을 받으며 소보권이 있는 건강으로 향 하여 남조를 멸망시켰다. 남조 제는 23년간 존속하여 남조에서 가장 단명한 왕조가 되었다.

3) 량(梁)

소연이 신림(남경)에 이르자 제나라 백관이 나와 투항했다. 소연은 반귀비와 간신들을 잡아들이고 화 제 소보융이 도착하기 전에 선덕태후로부터 중서감. 대사마. 녹상거사. 표기대장군. 양주자사를 임명 받 았다.

서력 502년 선덕태후가 섭정하자 소연은 도독중외제군사로 승진하여 검을 차고 전당에 오르는 특허를 받았다. 이후 소연은 몇 차례 사양하다가 서력 502년 4월, 황제에 올랐다. 량무제(梁武帝)가 된 소연은 검소한 것을 숭상하여 겨울이 되면 사경(四更)에 촛불을 들고 시찰하였으며, 고기 반찬 없이 콩국과 나 쁜 쌀로 식사하며 어진 신하들을 등용하여 정치가 깨끗하고 밝았다.

서력 553년에 량원제(梁元帝)는 무제의 아들 소기(蕭紀)가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서위(西魏)에 게 구원을 청하였지만 서력 554년에 서위병(西魏兵)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원제가 피살되자 왕승변(王僧辯)과 진패선(陳覇先)은 진안왕(晉安王) 방지(方智)를 즉위시켜 경제(敬 帝)가 되었다. 원제를 죽인 서위(西魏)는 소찰(蕭察)을 강릉으로 옮기고 황제를 삼았는데 역사가들은 이 를 후량(後凉)이라 한다. 서위는 소찰에게 형주의 땅 300리만을 주고 군대를 보내 감시했기에 양양도 서 위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자 북제(北齊)는 포로로 잡고 있던 량(梁)의 종실 소연명(蕭淵明)을 보내 즉위 시키려고 하였다.

량군은 이에 대항하다가 패하여 소연명을 맞아들여 제위에 앉혔다. 그 때 진패선은 경구(京口)에 있었 다. 진패선은 소연명을 반대하다가 서력 557년에는 량(梁)을 멸망시키고 진(陳)을 건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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