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욕망과 감성의 해방구” 홍대앞 클럽(Club)의 생성과 발전
3) 클럽데이의 발전과 클럽문화협회의 등장
댄스클럽의 발생
댄스클럽은 테크노뮤지션이나 DJ공연을 통해, 턴테이블과 믹서기 등 첨단디지털 전자장비를 기반으로 샘플링된 음악이 연주되고, 그에 맞추어 클러버들이 춤을 추 거나 음악을 즐기는 커뮤니티적 성격이 강한 공간이다. 따라서 일반나이트클럽이나 유흥주점과 달리 부킹을 상품화하지 않고 술을 강매하지 않고 1만원 안팎의 비용으 로도 춤과 음악을 즐기는 스탠딩문화의 형태를 취한다.
파 티 기 획 사
아 티 스 트 (D J , 뮤 지 션 )
클 러 버 (레 이 버 )
홀 바
D J
부 스
입 구 화 장 실
클 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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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나이트클럽 댄스클럽
소요비용 -테이블 기본요금 포함 평균 10만원 이상 -5천원에서 1만원 주요
이용계층
-일반 젊은층
-술과 춤과 이성을 좋아하는 사람 -전문직 종사자 등 감수성이 풍부한 젊은층
주목적 -술과 이성교제 -음악과 춤과 커뮤니티
공간형태
-공간규모가 대형임(300~600평이 일반적) -테이블로 가득한 홀, 춤추는 전용무대, 디제이
박스 등으로 이루어짐
-공간규모가 소형임(40~60평이 일반적) -테이블이 없는 홀, 디제이박스 등으로
이루어짐 운영형태 -웨이터와 삐끼가 존재하고 주먹세계와
연계됨 -파티가 없음
-웨이터와 삐끼가 없음
-수시로 파티를 개최하고, 음악행사가 활성화됨
이용양태
-술에 취해 춤추는 사람이 많음 -과시적이고 부딪힘과 싸움이 빈번함 -부킹을 상품화함
-대다수가 술보다 음악과 춤에 취함.
-타인을 존중하고 부딪힘과 싸움이 없음 -부킹을 상품화하지 않음
DJ 공연형태
-레코드판이 아닌 CD로 믹싱해서 틀어줌 -손님들이 신나게 춤추는 것에만 초점을 두고
쇼의 형태를 취함
-중간 중간 블루스타임이 있음
-DJ의 음악이 중요하며, 그 음악에 적응하기를 요구
-손님들의 상태를 보아가면서 서서히 음악에 빠져들 수 있는 음악스타일을 만들어나감 -블루스타임이 없으며 장르별로 전문화됨
<댄스클럽과 나이트클럽의 차이점>
이처럼 독특한 댄스클럽들이 홍대지역에 생성된 배경에는 국내 최대의 미술대학 인 홍익대 미대의 존재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개성 있고 문화적 감수성으 로 가득 찬 젊은이들이 미대를 거치면서 그들의 창조성과 개성, 개방성을 통해 새롭 고 실험적인 활동을 펼쳤다. 클럽형성의 모태가 된 ‘발전소’는 일종의 작업실형태를 띤 바(bar)였으며, 댄스클럽의 원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바는 일상적으로 그 곳을 즐기는 작가들의 행위예술이기도 했으며, 즉석공연이 수시로 일어나는 장이 되었다.
‘발전소’와 같은 바가 본격적인 클럽으로 발전하는 과정에는 소위 테크노음악(일 렉트로닉 댄스뮤직)이라는 컨텐츠가 자리 잡고 있다. 1980년대 후반의 3저 호황, 88 올림픽 개최, 해외여행 자유화조치, 해외유학생의 급증한 해외교포들의 역 이민이라 는 사회경제적 상황을 토대로 당시 외국에서 유행하고 있던 테크노음악이 홍대지역 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민주화, 세계화, 개방화의 흐름 속에서 영어강사, 대사관 종사자, 사업가, 유학생 등 기존 주한미군과는 다른 인텔리 층 외국인들이 그들의
문화적 감성과 부합하는 홍대지역을 찾게 된 것이다.
그 후 상수도, 엠아이, 조커레드, 황금투구, 명월관, 엔비아이엔비 등 현재와 유사 한 클럽들이 늘어났으며, 나이트클럽과 명백히 차별화된 테크노음악전문클럽들이 2000년대 초까지 전체 클럽씬을 주도하면서 각종 파티와 공연, 실험적 문화행사들이 진행되었다. 당시 엑스터시와 같은 신종마약의 근거지로 행정과 언론방송에 의해 지목받았던 시기와도 겹친다.
그러나 댄스클럽들은 99년 밴드공연의 합법화가 이루어진 라이브클럽들과는 달 리 일반음식점에서 춤을 출 수 없도록 규정된 식품위생법에 의해 불법화되어 있었 고 수시로 단속과 영업정지를 반복하는 가운데 많은 클럽들이 문을 닫는 상황이 지 속되었다.
클럽데이(Clubday)의 시작
이러한 상황 속에서 2001년을 앞두고, 월드컵관련행사로써 홍대지역의 클럽들을 관광상품으로 수용하려는 서울시와 시민단체(공간문화센터)가 도시마케팅과 지역 커뮤니티사업이라는 관점에서 홍대앞 클럽들과 관계망을 형성하게 되었다. 댄스클 럽들은 이에 고무되어 클럽문화를 대중들에게 알리고 합법화하는 취지 속에 2001년 3월 클럽데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 밤 1만 5천원짜리 한 장의 티켓으로 참여클럽 모두를 입장할 수 있는 클럽데이는 2006년 현재 만5년을 넘겨 제63회를 바라보게 되었고, 그 규모도 매월 6,000명~10,000여명이 참여하는 춤의 축 제로 발전했다.
클럽데이의 대중화에는 서울시 등 행정의 직간접적 관계를 배경으로 지역시민단 체가 클럽문화의 구심으로 작용했다는 점이 결정적이다. 시민단체와 클럽데이 참여 클럽들이 클럽데이추진위원회를 공동구성하여 초기 클럽데이를 끌고 나가는 엔진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공동의 장소마케팅, 이해조정, 경제공동체적 관계망을 만들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시 등 행정과의 관계는 월드컵을 앞두고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클럽의 문화관광적 가치를 인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불법공간, 마약 파티의 온상이라는 이유로 단속했다. 월드컵기간중의 월드클럽데이라는 행사를 지 원하기로 해놓고 보건위생담당부서에서 민원을 이유로 클럽데이 참여클럽들을 일 제단속한 것이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시민단체와 클럽들은 이전과 달리, 민변출신 변호사들의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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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에 의한 법적 대응, 서명운동, 언론방송 보도, 항의행사 등을 통해 전면 이슈화했 고, 이슈화를 통해 오히려 클럽들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공격적 마케팅효과를 얻 었다. 행정의 이중잣대와 자기모순으로 인해 댄스클럽들은 자체의 힘으로 클럽문화 대중화와 클럽합법화를 실현해낼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제도화되지 못했지만 사회적, 문화적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고 적어도 춤에 대한 단속은 유보되 는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슈화의 성과는 행정의 정책변화로 이어졌다. 서울시 주도로 홍대지역 클럽문화를 보호하고 미술, 공연 등 문화다양성과 환경을 육성할 수 있는 홍대문화지구 지정 추진이 시작되었다.
홍대신촌문화포럼과 놀이터프로젝트
서울시와의 협력과 클럽데이의 에너지를 기반으로 홍대지역의 문화예술인들과 라이브클럽들이 모두 참여하는 홍대신촌문화포럼을 구성하여 홍대지역의 문화환경 을 살리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되었다. 그중 일명 놀이터프로젝트는 홍대 정문 건너편에 버려져 있다시피 했던 어린이놀이터를 문화적 공간으로 탈바꿈시키 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홍대신촌문화포럼을 중심으로 월드컵 기간 중 놀이터담 장을 허물어 개방하여 프리마켓, 설치미술 등 놀이터행사를 진행하는 동시에, 구청 공원녹지과와 용역업체, 주민대표, 상인단체 등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놀이터 디자인 에 대한 컨셉을 토론하고 수정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놀이터프로젝트는 공간문화의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로와 지하철2호 선 홍대입구역 뒤편의 걷고 싶은 거리조성 후 극도로 상업화되고 그 범위로 홍대앞 으로 확산되기 전에 놀이터를 공간적 거점으로 삼아 문화적 아우라를 지켜내자는 분명한 목표를 가졌다.
놀이터가 새롭게 정비되고 개방화되면서 자연스레 홍대앞의 랜드마크로 부각되 었다. 젊은이들의 만남과 주민들의 여가공간으로 놀이터는 항상 활력에 차고 멀리 했던 어린이들까지 놀이터로 돌아왔다. 놀이터에서 주말마다 벌어지는 작가들의 프 리마켓과 희망시장은 문화놀이터로써 다양한 공예작품 및 핸드메이드상품들로 가 득하고 다양한 소규모 공연과 시민체험프로그램이 곁들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이터공간은 갈등을 안고 있었다. 놀이터가 정비되고 활성화 되면서 놀이터경계선에 노점이 늘어나고 노점과 프리마켓, 희망시장과의 크고 작은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월드컵 이후 서울시의 무관심속에서 구청 또한 현행법상 어 린이공원이기 때문에 행사를 공식 승인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노점과의 형평성문
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노점과 프리마켓 등이 경계선을 중심으 로 안팎으로 뒤섞여 놀이터 자체가 상업화되고 있다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당초 놀이터 정비과정에서 홍대신촌문화포럼은 노점 등과 놀이터관리문제를 들 어 놀이터 관리권을 포럼에 주기를 요구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이후 홍대신촌문 화포럼이 월드컵행사를 지나 서울시의 지원프로젝트가 끝나면서 소멸되고, 놀이터 문제는 행사주체의 문제로 남겨졌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행정과의 관계에 있다. 월드컵행사라는 일회용 프로젝트가 이후 지역의 주체 및 컨텐츠에 어떻게 기 여하도록 할 것인가, 지역주체와 행정의 지속적 협력관계는 어떠한 형태로 구축되 어야 하는가 등에 대한 전략적 사고와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클럽문화협회의 출범과 새로운 전망
클럽데이추진위라는 시민단체와 클럽주들의 협력체계는 초기 클럽문화를 지키고 결속하는 구심이었다. 주한미군의 출입금지, 마약근절, 행사기획 등 의미 있는 일들 을 합의를 통해 이루어냈지만 클럽문화의 전망을 만들어내는데 한계를 보였다.
단속이 유보된 가운데 클럽주들의 상업적 마인드가 강화되고 클럽데이의 상업적 성공은 그 경향을 가속화했다. 또한, 클럽문화의 대중화와 함께 매니아 층이 이탈하 기 시작했고 클럽들의 특색도 무너졌다. 더구나 초창기 댄스클럽씬의 주역이었던 테크노클럽이 장기침체기에 빠지고 주류문화와 연결된 힙합클럽들이 강세를 보이 기 시작하는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는 내부갈등과 생존경쟁이 본격화되려는 조짐으로 나타났다.
클럽문화협회는 클럽문화의 업그레이드와 새로운 비젼이라는 목표 속에 2003년 12월 외부전문가 및 시민사회단체 대표, 클럽주들이 이사진을 구성하면서 비영리민 간단체로 출범했다. 운영비용은 클럽데이에 대한 기업협찬금에서 충당하고 나머지 협찬금에서 적립된 기금은 지역축제 및 클럽문화발전기금, 지역사회복지기금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또한, 협회 출범과 함께, 총무, 디자인, 기획 등 보다 체계화된 실 무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협회의 출범과 때를 맞추어 2004년부터 지역의 여건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내적으 로는 몇몇 클럽주 합작으로 130평정도의 대형클럽빌딩이 생겨나고 타 클럽주들의 위기의식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외적으로는, 빌딩신축으로 인해 연극 공연장인 씨어터제로가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홍대지역의 원조 문화예술인들 및 라 이브클럽들이 연대하여 씨어터제로 살리기 운동을 전개하면서 지역의 상업화를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