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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초의 마을 이름을 기초로 하여 취락 발달을 살펴 보면, 속초는 4개축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발달해 가고 있는 모습 이다. 즉 내물치리-하도문리-중도문리-상도문리를 잇는 선, 부월 리-논산리-노리를 잇는 선, 장항리-토왕성리-정고리를 잇는 선, 속진-속초를 잇는 선이 그것이다. 내물치리축은 쌍천을, 부월리 축과 속초축은 청초호를, 장항리축은 설악산을 배경으로 한다. 속 초리와 속진리는 다른 생활환경을 가진 것 같으나 실상은 청초호 로 연결된 해안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가. 전통안정축(내물치리-하도문리-중도문리-상도문리)

일제강점기 초 인구의 증가는 쌍천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쌍 천은 조선시대까지 도문천으로 불려졌는데, 풍부한 용수를 공급 할뿐만 아니라 도문버덩을 기름지게 만들었다. 따라서 예로부터 상도문리와 하도문리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런데 1914년 지방제도의 개혁 내용을 보면 중도문리, 노리, 장항리가 새로 신설되었다. 사람이 살지 않았던 중도문리에 인구 가 유입되어 새로운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이는 전통축이 확대 된 것으로 기존 마을에는 더 이상 인구 유입 요인이 없어져 다른 지역으로 생활권이 이동하였음을 의미한다.

도문면의 인구는 기록을 보면 중도문리 생성을 빼고는 거의 변 동이 없다. 이는 도문면이 안정적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도문면은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농지와 땔감, 용수도 풍부한 곳 으로 속초 이주민이 가장 선호하는 곳이었다. 쌍천 축은 인구 증

가로 인해 물치항이 지역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하였고 물자와 정 보의 유통이 이루어졌다.

나. 전통불안정축(장항리-토왕성리-정고리)

장항리-토왕성리-정고리를 잇는 축은 설악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정고리는 신흥사 사찰 마을이었는데, 지금도 절 주위에 장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 듯이 옛날에도 그러했다. 또한 산천 유람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고, 마등령으로 넘어 다니 는 사람들의 쉼터 역할을 했으며, 기본적으로 화전도 했을 것이 다.

토왕성리는 전통적인 화전민촌이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때 에는 화전이나 심마니 생활 외에는 다른 수입원을 찾기가 어렵 다. 1914년 장항리가 신설되는데 이는 화전민촌의 확대라기보다 는 상도문리 위쪽 남아있는 땅의 개간과 관련이 있다. 어떻게 보 면 장항리의 신설은 전통안정축의 확대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산간 지방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화전민의 생활은 한계 성이 있게 마련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1920년경 도문면 장항 리․토왕성리․정고리가 합해져 장항리가 된다. 이것은 화전민촌 의 축소이며, 인구의 감소로 이어져 토왕성리, 정고리에서 좀 더 아래쪽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축은 발전 한계성을 가졌다.

다. 농업발전축(부월리-논산리-노리)

부월리축은 전통안정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미 개발된 곳이

많아 인구의 유입요소가 없어 인구 유입이 미미하였다. 하지만 노리쪽은 달랐다.

노리는 현재 노학동 지역으로 과거에 습지대였던 곳이 개발됨 에 따라 평야지대로 변하였다. 노리는 산악지대 개척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였고, 이 곳을 시작으로 유입된 인구는 농토를 만들어가 면서 취락이 농토를 따라 형성되어 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일제 후기에는 노리(蘆里)에서 도리원리(桃李源里), 이목리(梨木里), 척 산리(尺山里)가 분리되었다. 이는 산악개발의 전진기지였던 노리 를 시작으로 점차 서쪽으로 농토가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 척산 지역의 취락 형성(1970년) >

농토를 따라 취락이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전통적인 마을인 부월리는 인구 증가는 더디지만 자체에서 늘 어나는 인구와 외부로부터 새로이 유입되는 인구로 인해 새로운

터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때 청초호를 막아주는 긴 사주가 새 로운 주거의 터전을 마련해 줄 수 있는 공간으로 주목을 받게 되 었다. 이곳은 일제시대 주도로가 나있는 상황이었지만 일제의 군 사적 목적에 의하여 개발이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취락의 형 성이 늦었는데, 1945년 이후의 월남민과 한국전쟁 중 남하한 피 난민은 귀향하기에 쉬운 사주일대에 피난민촌을 건설하여 오늘날 속초시 발전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 해방후의 청호동 모습 >

라. 항구발전축

속진리와 속초리는 전통적으로 반농반어 마을이었다. 속진리는 영금정에서 수복탑에 이르는 항구로서 작은 어촌이었고, 속초리 는 속진리와 연이은 갯배나루 왼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속초리는 청초호 자체를 바탕으로 삼았고, 속진리는 청초호의 입구를 배경

으로 삶을 이어갔다.

이들 지역은 반농반어의 생활을 영위하였다고는 하나 농업으로 는 그리 주목받지 못하였다. 시내 한가운데까지 낮은 산지였기 때문에 개발할 여지가 별로 없어 보였다. 하지만 산지를 개간하 여 농사를 짓고자하는 노력은 계속되어 산림지역이 농토로 변해 갔다.

이런 가운데 1930년대에 들어와 청초호가 항구로 개발되면서 1937년 면 소재지가 대포리에서 속초리로 옮겨지고, 면의 명칭도 도천면에서 속초면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농업인구뿐만 아니라 어업인구도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유입된 인구로 인해 1942년 속초읍의 승격을 가져오고, 속초리는 1구에서 4구로 나눠 질 정도로 확대되어 오늘날 속초의 모태가 되었다.

개항 이후

제3장 개항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