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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학교의 설립

속초에서의 최초 공교육기관은 일제시대 1면 1교정책에 의해 1919년 설립된 대포공립학교가 그 효시이다.18) 근대 교육기관으 로 최초인 이 학교는 개교 당시 4년제 2학급과 강습소 1학급으로 편성되었다. 그 후 1923년에 6년제로 승격되었고, 1936년 대포공 립심상소학교로 개칭되었다가 1941년 국민학교령에 의해 ‘대포국 민학교’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한편 도천면 소재지가 속초리로 옮겨지고 속초면으로 승격되는 등 속초항을 중심으로 한 인구 집 중이 되자 1937년 영랑공립심상소학교가 두 번째로 설립되었다.

일제시대의 또 다른 학교로는 주봉국민학교가 있었다. 주봉국 민학교는 1940년 4월 1일 대포초등학교 부설 주봉간이학교로 개 설되어 1953년 주봉국민학교로 독립인가가 되었고, 1965년에 외 설악국민학교로 개칭되어 도문동으로 이전하였다가 설악국민학교 의 설립과 함께 흡수․통합되었다.

18) 총독부는 한국인 회유정책으로 교육의 기회를 확대한다는 명분으로 1919년 3면 1교 정책을 추진하였고, 1929년에는 1면 1교 정책, 다시 1면 3교 정책을 추진하여 초등교육은 양적으로 크게 늘어났다.

일제후기 속초지역 국민학교

학교명 수업연한 학급수 학생수 재학생국적

대포국민학교 6년 8 약 580명 한국인

영랑심상소학교 6년 7 약 500명 한국인

설악심상소학교 6년 3 50-60명 일본인

주봉

(대포국민학교 부설 야간학교) 2년 1 약 60명 한국인

일제후기에 오면 전쟁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군수물자와 각종 물자의 생산에 학생들을 동원하였다. 학교는 ‘근로즉교육(勤 勞卽敎育)’이라는 표어 아래 학생들의 인격적 성장을 도외시한 채 부족한 노동력을 공급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한국의 각급 학 교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필요한 인적자원을 공급하는 일에 동원 되었으며 학교는 병영화 되어갔다.

< 1938년 대포소학교 근로보급대 작업광경 >

공교육기관이 설립되기 전에는 양양군 지역의 교육 기관을 이 용하거나 서당 등 개인 교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인 구나 경제적인 능력을 고려하면 학령 아동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며, 별도의 교육 기관 설립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 다. 따라서 정규보통교육기관인 대포공립학교가 세워진 후에도 한동안 서당 교육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속초에서의 최초 개량서숙은 청대리에 장성헌(張聖軒)이 설립 한 ‘청대서숙(靑垈書塾)’으로 설립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 서숙은 대포 학교가 세워지기 전까지도 4~40명의 학생들을 수용하였을 정도의 규모가 있었으며, 학생들은 기혼자에서부터 7~8세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연령 격차가 심했다고 한다. 청대 서숙은 대포 학교의 영향으로 학생이 줄어 경영난을 겪게 되었는 데, 이를 유지하기 위하여 유지들의 집으로 전전하면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시대의 변천에 따라 폐쇄되 었는데 이때 서숙의 명칭은 ‘청호서숙(靑湖書塾)’이었다.

해방 이전 이 고장의 서당 훈장들은 도리원 이교민(李敎民), 상 도문리 오윤환(吳潤煥), 오각환(吳珏煥), 온정리 진동규(陳東奎), 장천리 엄내영(嚴乃泳), 엄주익(嚴柱益), 척산리 차명균(車明均), 논산리 장원섭(張元燮) 등이다.

서당은 조선교육령 등의 규제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가 엄 금하고 있던 ‘조선역사’, ‘조선지리’를 비롯해 청소년들에게 항일 민족교육을 교수한 곳도 있었다. 서당이 민족교육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자, 일제는 1918년 서당규칙을 발표하여 서당에서 교수하 던 『동몽선습』을 제외시켜 조선역사 교육을 금지하고 서당을 탄압하였다.

서당에도 갈 수 없는 서민들은 야학을 찾아갔다. 선구적 지식

인․노동단체들이 운영한 야학에서도 노동자, 농민, 상인 등 기층 민과 그 자제들을 대상으로 한글과 우리 역사, 지리 등을 가르쳤 다.

나. 일제시대의 문화재자료

일제시대 문화재자료로 새로 등록된 것은 없다. 다만 이미 조 선시대에 만들어졌다고 보는 속초리성지와 대포성지가 등록되어 있다.19)

속초리성지 도천면 속초리주위 약 삼백 칸, 토성, 불완전 대포성지 도천면 대포리주위 칠십 칸, 토성, 불완전

다. 민속

(1) 대포서낭제

대포서낭제는 연1회, 10월 초순에 길일을 택하여 제사를 올리 며 3년마다 무당을 불러 풍어굿을 행하였다. 2개의 서낭당(할머 니․할아버지 서낭당)이 있는 관계로 새벽의 제사 때에 시간을 똑같게 하기 위해 서로 횃불로서 신호를 보낸다.

제수(祭需)로는 반드시 소를 잡아 바치는데 이 때 쇠머리를 소 라고 하지 않고 말이나 말머리로 칭한다. 이는 서낭님이 말을 타 고 온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견해에는 이의가 있다.

산신의 상징동물은 호랑이고 서낭신의 상징동물은 말이다. 말과

19) 조선총독부,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소화17(1942).

서낭과의 관련성은 인정되나 서낭제사에 말고기를 쓰는 것은 그 신격을 잡아 쓰는 말이다. 그래서 말머리는 말-마루-루 곧 으 뜸, 중요함의 뜻을 지닌 낱말이 말로 변천한 것이며, 여기에 머리 가 첨가되었다고 보여진다. 머리도 ‘頭’보다 ‘으뜸(首)’의 뜻으로 쓰여져 첩어를 이룬 것 같다. 그러므로 말머리는 가장 의롭고 중 요한 으뜸의 희생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무당굿 중심의 풍어제는 2~3일간 12거리가 베풀어지며 풍어 제․풍년제․용왕제를 올린다. 이 때에 주민의 요청이 있으면 무 당이 각 가정을 방문해서 축원을 해주는데 이것을 ‘지신을 올린 다’고 한다.

각 서낭당에는 신주인 할아버지, 할머니서낭신의 탱화가 걸려 있다. 할아버지서낭은 도포를 입고 갓을 썼으며 한 손에 긴 지팡 이를 들고 있는 대감형의 모습이고 할머니서낭은 뒷머리를 틀어 올린 미인으로 의자 양옆에는 연꽃이 한 송이씩 솟아나 있다.

(2) 외옹치서낭제

도내에서 전통적인 민속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마을의 전형 이 외옹치이다. 서낭당과 장승 및 무당이 있고 최근에는 30여 년 간이나 세우지 않던 솟대를 다시 세운 이 마을은 70여 가구 390 여 명의 주민이 반농반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시행하여 왔다는 서낭제는 마을 입구에 장승을 세우고 서낭당에 서 굿을 하며 바닷가에서 용왕제를 드리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 다. 춘추로 유교식의 당제를 올리고 풍어굿은 3~5년 단위로 가 을제사 때에 올린다. 지난 해의 제주가 택일을 해오면 새 제주가 가려서 도가를 정한다. 도가는 금줄을 치고 목욕재계하며 쌀 3되

로 신주를 담가 서낭당 옆에 묻고 당에도 금줄을 친다.

별신제라 부르는 서낭굿을 할 때는 제주와 제관이 무당과 함께

‘골미개서낭님’이라 부르는 암․수 장승에게 가서 굿을 하고 지신 을 밟는다. 신간(神竿)에 강림한 골매기서낭신을 서낭당에 안치한 다. 이어서 사흘간의 굿이 시작된다. 요즈음은 마을회관에서 굿을 한다. 부정굿-천왕굿(성황굿)-조상굿-칠성신굿-세존굿-군웅굿-성 주굿-손님굿-계면굿-꽃굿-등놀이굿-뱃놀이굿 등의 순으로 12거 리를 마치면 서낭제가 끝난다.

그리고 다음날 오시부터 축으로 나가 물굿(용왕굿)을 벌인다.

이어서 배가 있는 사람이나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있는 집에서 상을 차려 오면 소지를 올리고 복을 빌어준다.

이러한 용왕굿이 끝나면 바닷가에서 죽은 어부의 혼을 위로하 는 오구굿을 한다. 무당은 물가에서 큰 원을 그리며 죽은 이의 혼을 부르면서 춤을 춘다. 그리고 흰 천으로 혼길을 낸다. 이때 왕무당이 손에 연꽃을 들고 천을 가르면서 혼을 위로하는 무가 (巫歌)를 부른다. 초혼의 노래와 춤이 절정에 이르면 사자의 혼은 극락으로 인도된다. 그러면 당집에서 가져온 지화를 불사르고 박 수무당인 화랭이가 거리굿에 해당하는 뒷풀이를 하는 것으로 완 전히 끝이 난다.

용왕굿-오구굿-거리굿으로 이어지는 용신제는 마을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는 ‘고풀이’이다. 이 명칭 그대로 외옹치는 서낭제와 용신제를 작품화해서 1983년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품하기 도 하였다. 이렇게 큰 굿을 할 때면 백여만원 이상의 경비가 들 기 때문에 해를 넘기는 경우가 생긴다. 더구나 가파른 산등성이 를 의지하여 옹기종기 동해를 향하여 앉았던 마을이 1985년도의 장마로 사태를 만나 등성이 너머로 이주하였고, 축항에 가득하던

전마선도 보이지 않으니 외옹치 서낭굿의 맥이 끊어질 것 같다.

(3) 외옹치 장승제

외옹치마을은 동구에 남녀 장승이 서 있다. 이 마을에 사는 무 녀(김옥순)가 ‘골매기서낭님’으로 지칭하는 장승은 ‘천하장군’(키 129cm, 둘레 99cm)과 ‘지하장군’(키125cm, 둘레 94cm)으로 표기 된 남녀 장승이다. 기교가 나타나 있지 않고 입체감도 별로 없으 며 무서운 인상이라기보다는 놀란 듯한 모습이다. 예전에는 목수 가 잘 깎아 세웠으나, 지금은 마을사람들끼리 모여서 공동으로 깎기 때문에 모양이 좋지 않다. 나무장승이 썩으면 바꾸어 세운 다. 새로 세우기로 결정하면 장정을 뽑아서 산으로 보내 알맞은 나무를 고르게 하고 그것을 도가로 옮긴다. 도가까지 나무를 옮 겨올 때는 신가를 불러 잡귀를 쫓고 흥을 돋운다. 도가에서 암, 수 장승을 정성껏 조각하여 동제가 시작되기 전날 마을 어귀에다 세운다. 이 때에 제사를 드리고 치성한다. 별신굿(서낭굿)을 할 때는 동제가 시작되는 날 아침에 장승제를 올린다.

무관으로 차려입은 무녀들이 먼저 서낭당에 제물을 차려 놓고 고축을 한 후, 천왕대를 따라 춤추면서 장승이 있는 마을 어귀로 내려간다. 거기서 “좌별신 우별신 골매기 서낭님 액맥이 수맥이 -- 하우동참하옵소서”라고 고축을 하며 골매기청좌굿을 한다. 신 간(神竿)에 골매기 남녀서낭(남녀장승)이 강신하면 목장승의 신 이 안좌하신 것이 되어 장승제가 끝난다. 1985년도에 수해로 마 을이 이전되어 장승을 다시 세웠는데 위치도 바뀌었다. 그 옆에 는 새로이 솟대도 세웠다.

라. 문학

1906년 양양군수로 부임하여 현산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 하던 남궁억(南宮檍)이 자유사회를 희구하는 시조를 발표하였다.

설악산 돌을 날라 독립기초 다져 놓고 청초호 자유수를 영넘어로 실어 넘겨 민주의 자유강산 이뤄놓고 보리라.

이 시조는 정치적 자유, 민족적 독립, 민주적 강산을 만들어 보 겠다는 소망을 시조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는 현대 시조의 모습 을 띤 것이었으므로 신체시와 또 다른 신시조의 초기작품이 되었 다. 남궁억은 시조작가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새 로운 사상과 철학을 시조의 내용으로 담은 혁신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