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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민요의 사회·역사적 배경

문서에서 제주민요의 배경론적 연구 (페이지 27-58)

민요는 직설적이고 개방적인 소통구조를 갖고 있는 구술체로서 그 사회와 역사 에 대해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상황인식을 보여주는 표현민속(express folklore)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공동체적인 제약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부조 화와 불만을 배출하는 출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회와 문화의 질서를 유지시 키는 강한 조정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세상이 평화로우면 민요에도 그 시대상이 반영되며, 세상이 힘들고 어지러우면 역시 고통스러운 현실을 반영한다.

민요는 민중 스스로의 소유물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민요를 부르는 행위는 창자의 입장에서는 스스로의 삶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행위이지만, 사회·정치·경제적 측면 등 거시적 구조에서 보면 또 다른 의미와 역할을 갖는 행 위가 된다. ‘정선아라리’가 민중 스스로의 삶의 측면에서는 노동·유희의 기능을 갖고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지역 구성원들을 하나의 공동체로서 통합시키고 그 공동체가 조화롭게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20)는 사실은 노래를 통한 동질적인 사 회 인식과 공동체적 공감대를 확인시켜 준다. 즉, 노동이나 유희 공간에서 민요 사설을 주고받는 일은 단지 노래를 주고받는 행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의 구성원을 묶어주는 구실을 한다.

민요의 사회적 의의는 민중이 그들의 주변에 나타나는 온갖 현상을 언어수단으 로 표출하고 호소하는 데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제주민요는 제주도의 사회·문화 적 성격을 가장 강하게 표출하는 구비전승물이다. 즉, 제주의 사회·역사적 상황과 인식을 가장 예민하게 반영하는 것이 제주민요이다. 따라서 제주민요를 통해 제 주사람들이 시대와 사회, 문화에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하며 살아왔는지 살펴보는 일은 지역연구로서 의의를 갖는다.

1. 탐라국시대

『瀛洲誌』21) 에 다음과 같은 제주도에 대한 기록이 있다.

20) 강등학, 「민요의 현장과 장르의 기능」,『민요와 민중의 삶』, 우석출판사, 1994, p.19.

21) 奎章閣藏, 『耽羅文獻集』, 제주도교육위원회, 1976, pp.2~4.

瀛洲 太初 無人物也 忍有三神人 縱地湧出鎭山北P 有穴曰毛興 長日高乙那 次日良乙那 三日夫乙那 狀貌甚偉 器度寬豁 絶無人世之態也 皮衣肉食 常以遊 爲事 不成家業矣

영주에는 태초에 사람이 없었다. 홀연히 세 신인이 땅에서 솟아나니, 한라산 북녘 기슭에 있는 모흥혈에서 솟아난 것이다. 맏이를 高乙那, 다 음을 良乙那, 셋째를 夫乙那라 하였다. 그들의 용모는 장대하고 도량은 넓어서 인간 세상에는 없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가죽옷을 입고 육식을 하면서 항상 사냥을 일삼아 가업을 이루지 못했었다.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 바라보니 자줏빛 흙으로 봉한 나무함이 동해 쪽 으로 떠와서 머물러 떠나지 않았다. 세 사람이 내려가 이를 열어 보니, 그 속에는 새알 모양의 옥함이 있고 자줏빛 옷에 관대를 한 사자가 따 라와 있었다. 그 옥함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처녀 세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 나이는 15·6세요, 용모가 속되지 않아 아리따움이 보통이 아니었고, 각각이 아름답게 장식하여 같이 앉아 있었다. 또 망아지와 송아지, 오곡 의 씨를 가지고 왔는데, 이를 금당의 바닷가에 내려놓았다.

세 신인은 즐거워하며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하늘이 우리 세 사람에 게 주신 것이다.」고 했다. 사자는 재배하고 엎드려 말하기를 「나는 동 해 벽랑국의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이 세 공주를 낳으시고, 나이가 다 성숙해도 그 배우자를 얻지 못하여 항상 탄식함이 해가 넘는데, 근자 에 우리 임금께서 자소각에 올라 서쪽 바다의 기상을 바라보시더니, 자 줏빛 기운이 하늘을 이어 상서로운 빛이 서리는 것을 보시고, 신자 세 사람이 절악에 내려와 장차 나라를 얻고자 하나 배필이 없으시다 하시 고, 신에게 명하여 세 공주를 모셔 가라 하여 왔사오니, 마땅히 혼례를 올려서 대업을 이루소서.」하고,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세 신인은 곧 목욕재계하여 하늘에 고하고 나이 차례로 나누어 결혼하 여 물 좋고 기름진 땅으로 나아가 활을 쏘아 거처할 땅을 정하니, 高乙 那가 거처하는 땅을 제일도라 하고, 良乙那가 거처하는 곳을 제이도라

一日登漢拏山 望見紫泥封大函 自東海中浮來欲留而不去 三人降臨就開則 內有玉函形如 鳥卵 有一冠帶紫衣使者隨來 開函有靑衣處子三人 皆年十五六及 勇姿脫俗 氣韻竊窕 各 修飾共坐 且持駒犢五穀之種 出置金塘之岸 三神人 自賀日 是天必授我三人也 使者再拜 稽首曰 我東海碧浪國使也 吾王生此三女 年皆壯盛而求不得所耦 常以遺嘆者歲餘 項者吾 王登紫霄閣 望氣于西溟則 紫氣連空 瑞色葱龓 中有絶岳 降三子三人 將欲開國而蕪配匹 於是命臣侍三女 以來 宜伉儷之5以成大業 使者怱乘雲而去 莫知所之 三神人卽以潔牲 告天 以年次分娶 就泉甘土肥處 射矢卜地 高乙那所居曰第一都 良乙那所居曰第二都 夫 乙那所居曰第三都 自此以後始成産業 植播五穀且牧駒犢 日就富庶 遂成人界矣 厥後九百 年之後人心咸歸于高氏 以高爲君 國號乇羅 (하략)

하고, 夫乙那라 거처하는 곳을 제3도라 했다. 이로부터 산업을 일으키기 시작하여 오곡의 씨를 뿌리고 송아지 망아지를 치니 날로 살림이 부유 해져서 드디어 인간의 세계를 이룩했다.

그 후 9백 년이 지난 뒤에 인심이 모두 고씨에게 돌아갔으므로 고씨를 왕으로 삼아 국호를 乇羅라 했다.

삼성신화는 『高麗史』 계통과, 『瀛洲誌』계통이 있는데22) 그 계통에 따라 많 은 이본들이 있지만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다. 『高麗史』 계통에서는 삼신인의 서열이 ‘양→고→부’로 정해지는 데 반해, 『영주지』계통이 ‘고→양→부’로 서열 이 정해지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정치적 판도에 따라 삼신인의 서차의 차이만 보일 뿐, 모두 탐라국 건국의 유래를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삼성신화는 제주도에서 창조된 것인지 외부에서 형성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탐라국의 형성배경과 생활풍속 등 제주도의 상고대를 해설하는 자료로서 매우 귀중한 의 미를 갖는다. 이 신화에 의하면 탐라국시대에는 농경과 어로를 함께 하며 공동생 산과 공동분배의 씨족사회를 영위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씨족생활이 지속되는 가운데 외적의 침입과 외세의 간섭 등에 대해 소수 집단만으로는 방어가 어렵게 되자 서로 동맹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집단유지를 위하여 자연스럽게 세 씨족의 공동체인 탐라국이 성립된 것이라 할 수 있다.

朴祉源의 『南遊錄』23)에는 ‘당서에 말하였기를 ‘용삭초에 담라라는 나라가 있 었는데 그 왕 유리도라가 사신을 보내어 입조하였다. 그 나라는 신라 무주의 남 쪽 섬 위에 있다. 풍속은 질박하고 누추하다. 옷은 개가죽으로 해 입고, 여름에는 초가집에, 겨울에는 굴로 된 방에 산다. 처음에 백제에 부용되었다가, 뒤에 신라 에 부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탐라국은 독립된 국가로써 주변의 여러 나라와 무역과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의 생활형편은 가난했고 최근까 지 이어져 온 의생활과 주생활의 전통이 이미 탐라국시대부터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제주도의 탐라국시대는 당시 제주사회를 짐작하게 하는 역사적 사료나 문헌자 료를 갖고 있지 못한 까닭에 오늘날까지도 신화의 시대로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상과 역사에 대하여 객관적인 분석이나 제시는 매우 어려운 듯하다. 당시는 민요나 설화의 생산과 전승이 지속적이고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되나, 거의 구전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나라의 전체적인 상황을 조

22) 현용준,「삼성신화연구」,『무속신화와 문헌신화』, 집문당, 1992, pp.181~190 참조.

23) 朴趾源(金益洙 역),『南遊N』, 濟州文化院, 1999, pp.13~14.

唐書云m朔初有儋羅者其王儒理都羅遣使八朝國在新羅武州南島上俗樸陋衣犬皮夏草屋冬窟 室初附百濟後附新羅按此皆指耽羅也

망해 볼 때, 같은 시기에 해당하는 신라의 향가는 25수만이 남아 있고, 백제와 고구려의 시가나 설화를 기록해놓은 문헌을 거의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탐라국시대 문화의 생산과 전승은 거의 구술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자체가 기록문자를 가지지 않은 자연 전승의 시대인 데다, 그 후 계속된 물리적·사회적 요인에 의한 소실이 더해지면서 제주도는 탐라국시대의 사 회문화적 유산을 거의 갖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탐라국시대의 제주사회를 반영한 민요를 찾을 길 없는 것도 사회역사적 맥락에 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현전하는 민요 중 탐라국시대로부터 전승된 민요가 상당 수 있을지라도 정확하게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점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기인한다.

2. 고려시대

고려 건국 후 제주는 고려에 예속되면서 지방 행정구역인 탐라군으로 편입되고, 고려에서 직접 관원을 파견하여 민정을 관장하게 되면서 탐라국은 해체되었다.24)

고려 건국 후 제주는 고려에 예속되면서 지방 행정구역인 탐라군으로 편입되고, 고려에서 직접 관원을 파견하여 민정을 관장하게 되면서 탐라국은 해체되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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