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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을 칠하여 말린 후, 캔버스 천을 뒤로하여 일정 간격에 맞춰 가로세로로 정 밀하게 번갈아 가며 접는다. 그러고 나면 접힌 선을 따라 균일한 형태의 그리 드가 생기는데 이렇게 생긴 사각형의 칸 사이에 화면과 분리된 물감 파편을 손 으로 제거하고 아크릴 물감을 여러 번 칠하기를 반복하며 떨어져 나간 부분을 다시 메워나가며 작품을 마무리한다.

이렇듯 작품에 많은 시간을 들인 그의 노력은 물성과 규칙성을 작품에 그대로 드러나게 하며, 작품이 전달하려는 내용을 더욱 명확하게 하고 있다. 정상화의 작품은 무엇을 그리겠다는 목적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단지 작업의 과정을 중 요시하며 화면을 구축해 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연스러운 표현을 화면에 담는 것 이었다. 1970년대에 와서는 이러 한 그의 미학적 지향성이 더욱 구체적으로 표명되어 한지와 먹 의 현대적 변용 <귀(歸)> 혹은

<닥>으로 이름 붙여진 연작으로 나타난다. 작품 속 화면은 채색을 하지 않음으로써 한지 본연의 모 습을 그대로 살려내면서 그 가장 자리에만 먹으로 살짝 채색을 가 하여 자연스러운 번짐이 나타나 도록 하였는데, 한지의 백색과 먹 의 흑색의 대비와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 등 모서리의 각이 잘 드러나 상당히 델리케이트 한 양 상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화면의 좌우 혹은 상·하의 대칭적 구조는 한국 전래 가옥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창문이나 여러 기능을 가진 문들을 연상시킨다.42)

1984년 정창섭은 첫 개인전에서 한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화면에 담은 물 (物)과 작품이 일원화된 독특한 종이 작품 <저楮>연작을 발표한다.43)

닥나무에서 채취한 섬유질인 ‘닥’은 전통 한지의 재료로, 정창섭 작품에서 이

‘닥’이 바로 재료이자 작품이 된다. 이러한 작품은 2011년 정창섭이 타계하기 전까지 지속된다.

정창섭의 한 인터뷰에 따르면, “내가 요즘 하고 있는 닥 시리즈는 어린 시절 의 기억이고 나를 형성해준 고향에서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중 략) 어린 시절 아침에 잠을 깨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부드러운 햇빛입니다. 그리고 창호지에 넣은 코스모스나 국화 꽃잎 등이 은은하고 아름답게 비쳐오면 그곳에서 하얀 밥에 파르스름하게 군 김과

42) 구진경(2015), 전게서, pp.196〜197.

43) 송미숙(2010), “정창섭론”,『정창섭』, 국립현대미술관, p.68.

<그림 34> 정창섭, 「닥 86921

된장을 먹고 자랐으니까요. 그것은 그림을 떠나서도 뭔가 그리운 것이지요.”44) 라고 했는데, 정창섭에게 있어 ‘닥’은 자신의 그리운 고향이자 과거이며, 그가 지향하는 전통적인 미를 품는 작품으로서의 완전함을 꿈꾸게 하는 것이었다.

작품이 제작되는 과정을 보면, 닥나무 껍질을 분리하여 삶아낸 후 종이를 만 들 수 있도록 찧고 그것을 물에 풀어 닥의 섬유질이 잘 살아나도록 한다. 그후, 닥의 물기를 빼고 풀과 섞어 반죽으로 만들고 캔버스에 올려 작품을 형상화 해 나간다. 섬세한 강약 조절로 주름과 결을 만들어 표면을 이루어 나가고 나면 일정한 건조 과정을 거친 후 특유의 질감을 지닌 작품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제작하는 정창섭의 작품은 ‘그리지 않은 그림’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물상의 변화와 작가의 끈질긴 인내의 결과물인 그의 작품은 물감 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큰 특징이다. 대신 캔버스에 종이를 풀로 고정시키기 전, 종이가 물에 불려진 시간에 따라 명도와 채도가 변화하고 그로 인해 다양 한 색감이 표현될 수 있도록 한다. 정창섭의 작품에는 인위적인 것과 자연의 진리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 인간의 본래적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도교 윤리

44) “정창섭화백 : 충북출신 원로 작가를 찾아서”,『충청일보』, 1986. 4. 26. 김용대, “정창섭의 회화세 계, 물(物)과 아(我)의 합일”,『정창섭』, 국립현대미술관 도록, 2010, p.38

<그림 35> 정창섭,

「MEDITATION 9605」

<그림 36> 정창섭,

「MEDITATION 9613」

가 십분 반영되어 있다. 한국의 전통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닥종이는 닥 나무를 원료로 만든 한지로, 자연의 소박함과 자연주의적 순리의 조형미를 표 현하기에 적합한 소재로 여겨졌다.45)

정창섭은 ‘닥’을 사용하게 된 계기에 대해 우연히 ‘이것을 한번 사용해보자’가 아닌 ‘만났다’는 표현을 쓸 만큼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왔다고 이야기한다. 그만 큼 그는 “종이의 물적 실존성”에 자아를 대입하여 “물질과 자아의 일원적 체 험”을 체득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정창섭은 한국 단색화 경향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신체의 행위와 물질과 시간을 어우러지게 하여 예술로 승화시켰으며, 한국적 삶과 정서, 동양적 미의식을 바탕으로 서구 모더니즘을 체화시켰다.

이상의 작품 분석을 통해 작품의 질감표현은 작가의 내적 경험 등의 상징적 개념 표현과 행위 그 자체로써 작품에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표 현은 1960〜70년대 회화운동인 앵포르멜과 단색화 운동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45) 국제갤러리(2014), 전게서, p.65.

<그림 37> 정창섭, 「묵고 91108」

경향이 크다고 볼 수 있으나, 작품의 표현방식과 그 재료에 대한 고민은 현재 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가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재료에 대한 고정관념이 점차 사라짐에 따라 전통적 미술 재료를 넘어 그동안 상상하지 못했던 많은 물체가 작품의 화면상에 등장하며, 각종 개념, 또 는 상징적 표현과 행위의 표현으로써 활용되며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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