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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목 이상이 아니었다는 결론적 한계에 도달하였다. 박서보가 양식의 융합이 아닌 예술의 정신성을 현대미술의 방법론과 결합시키는 방법을 고민하던 1967 년, 오랜 고민의 해결책은 우연히 찾아왔다. 박서보 작업 여정의 결과물과도 같 은 ‘묘법’ 시리즈에 대한 모티브를 네 살배기 어린아들의 행동 속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박서보는 그동안 서양식 방법론에 따라 현대미술을 해석하기 급급했던 자신이 마치 네 살 어린이와도 같은 초보적인 수준임을 알게 되었다. 좀 더 이 른 경험이 축적된 서양의 현대미술 양식을 바둑판식 격자 노트라고 한다면, 격 자 안에 글씨를 써넣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현대미술을 마주하는 본인의 모 습을 떠올리게 되었으며, 불가능한 표현에 상심하고 이러한 행동의 표현으로 마구 빗금을 그어대는 어린아이의 행동에서 자신의 회화세계의 중대한 전환점 을 발견하게 되었다.26)

초기 묘법의 제작 재료는 캔버스와, 백색안료와 연필로 시작하여 1970년대 후 반부터 삼베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연필은 주로 4B연필을 활용하여 단순히 그 리는 재료가 아닌 손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행위를 위한 도구로써 활용하여 화면에 물감이 마르기 전에 ‘긋기’로 선을 메우고 다시 흰 물감을 칠해 앞선 과 정을 무(無)로 되돌린다. 그리고 다시 선을 그어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수신(修 身)의 과정을 가진다.

26) 이부용(2015), 전게서, pp.46〜47.

<그림 23> 박서보, 「묘법 No.47-74」

박서보의 후기 묘법은 한지의 활용으로 본격화된다. 한지는 어 떤 종이보다 수분을 잘 흡수한다.

색을 머금고 있으나, 발색이 은은 하며, 종이와 색이 합일하는 특성 이 있다. 다시 말해, 한지는 물과 만나면서 독특한 색감과 더불어 흡습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물성과 정신성을 동시에 함유하 고 있는 한지는 박서보의 작업을 해석하는데 가장 이상적인 소재 가 되었다. 한지는 “행위와 종이 의 물질성이 용이하게 일체화되 고 단번에 물성에 도달할 수 있 는 매체”로서 박서보의 작품 속에 녹아들며 독보적인 양식으로 표 현되었다. 한지의 재발견은 동양

의 철학적 사상과 사고방식에 녹아들던 작가의 사상을 작업 속에서 보여지는 중요한 촉매제였다. 동양의 자연관과 발상의 결을 함께 한 순수한 우리 재료로 서, 한지와의 만남은 전통적 정신성과 자연의 합일을 추구한 박서보의 회화세 계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색을 흡수하는 한지의 특성에서 자연의 조화 를 추구하는 동양사상의 특징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작가는 단순히 한지가 이 미지의 표현을 받쳐주는 재료적 한계로서 기능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어떤 이 미지를 담기 위한 배경처럼 무의미해서는 안 되고, 재료 자체의 아름다움과 특 성을 나타내는 주체로서 위치해야 하며, 한지가 갖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발현 시키기 위해 작가의 작업행위와 한지의 물성이 합일화되는 과정을 추구하는 것 에 가장 큰 목적을 두었다.27)

1990년대 이후 박서보의 작품에 또 한번의 변화가 생겨나게 된다. 가장 큰 변 화는 화면상에 나타나는 수직의 직선 패턴이 나타난다는 것인데, 그동안 작품

27) 상게서, pp.58〜59.

<그림 24> 박서보, 「묘법 Ecriture, 2003.

에 나타났던 불특정한 사선의 패턴이 사라지고 일정하고 엄격하게 분할된 직선 의 패턴이 나타난다.

작품의 변화에 대해 박서보는 “21세기로의 이행 속에 맹목적으로 내던져진 현 재의 내가 그 동안 이뤄낸 성과에 안주하고 싶은 유혹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 림이었다.”라고 밝혔다. 타성에 젖은 자신에 대해 다시 한번 새로운 변화의 도 전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28)

21세기에 들어 박서보의 묘법은 현대적인 직선구도 내의 강렬한 색채의 표현 으로 나타난다. 2000년 이후에 등장하는 후기‘묘법’ 작업방식의 다른 특징은 색 채의 조합으로 다양한 안료를 계획적으로 작품에 적용하여 화려한 색의 묘법으 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여러색을 조합하여 한 가지색의 색을 만들 때에도 명도의 차이와 색상의 조합방식의 차이에 따라 세분화하고, 이를 공식 화하여 사용하는 계획성을 보여주고 있다. 안료 조합과정에 농도에 따른 색의 변화과정의 원리를 적용한 것으로, 완성된 색에 사용된 안료를 기호화하고, 이 를 작품 뒷면에 표기하여 어떤 색의 조합인지 알아볼 수 있도록 구분하기도 하 였다. 오랜시간의 색상 배합 과정이 축적되어 체계화된 자신만의 색 조합과정 을 구축하여 2000년 이후, 박서보는 고유한 자신만의 색감을 드러낸 강렬한 색

28) 상게서, p.65.

<그림 25> 박서보, 「Ecriture (描法) No. 140410

의 화면을 구현할 수 있었다. 공식화된 색을 받아들이고 표현한 박서보의 묘법 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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